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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짓 못할 짓을 헤아리며 살아야 되는데 무대책으로 단편 소설이라고 한 번 써 봤다.
사우디 생활을 경험삼아 ' 아라비아 로렌스'라고 지어놓고 그냥 소설 흉내를 내 본거지. 다 읽으려면 인내도 필요하다.
우리는 아라비아 로렌스 였나
이 성 상
홍(洪)군을 군자역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한번 갈아타더라도 이럴 때 교통편은 전철이 좋을 듯 했다. 먼저 3호선을 타고 종로 3가에서 갈아타야 한다. 이 역은 항상 인파가 들끓어 언제나 러시아워같다. 무슨 냄새도 배어 있어 서둘러 빠져 나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환승하는 5호선 승강장도 많은 승객이 내리더니 그만큼 탑승을 한다. 몇 초 사이에 왕창 쏟아져 내리고 순식간에 올라타는 승강장의 텅 빈 모습을 보면 마치 조작하는 마술장면 같다. 문 닫히면 뒷차 타야하니 일행처럼 얼른 따라 올라탔다. 객실 안은 좌석도 여유가 있다. 목적지 역에 도착해 3번 출구로 나오니 홍군이 계단위에서 맞아준다.
악수를 나누고 우리는 이면도로로 걸어 들어갔다.
“뭐 먹을래?”
저녁 식사하긴 좀 이른 오후5시다. 초가을의 이곳 골목은 사뭇 한적 한 듯 고양이와 누런 강아지는 사이도 좋은지 그늘에서 같이 졸고 있다. 어디선가 꽁치 타는 냄새도 난다. 홍군이 한 곱창 집을 가르키며
“곱창 좋아하냐?” 며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그래 괜찮은데” 대답하고 보니 주변이 곱창집 천지다.
탁자를 놓고 자리에 앉아
“그래 어떻게 지내?” 내가 물었다.
“뭐 재미없지....” 단답형 대꾸를 하며 피식 웃는다.
“뭘 해 먹고 사는데?”농담처럼 물으니
"나 택시 운전해.”
“그래?” 하고 나는 뜻밖이라는 듯 맞장구를 쳤다.
“사는 데는 어딘데?”
“여기서 얼마 안 멀어.” 한다. 우리는 곱창을 뒤집으며 소주잔을 똑같이 서너 잔을 부딪치고 비우면서 대화를 이었다.
“미안해! 바쁜 사람 보자고 해서.” 밝지 않은 표정으로 홍군은 얘기를 한다.
“뭘 그런 소리를” 내 대답에
“사업은 잘 되지?”하며 인사치례인 듯 멋쩍고 어색한 표정을 또 짓는다.
곱창을 더 시켜가며 꽤 많은 얘기를 했다. 주로 홍군이 얘기를 하고 나는 듣는 편이었다.
그 동안 홍군은 생활이 평탄치 않았던 듯 했다. 오랜만에 얘기 들어줄 청자(聽者)를 만난 듯 거침없이 살아온 얘기를 들려준다.
첫 번 부인과는 16년을 같이 살았고, 자녀는 남매를 두고 몹쓸 암으로 일찍 갔으며 3년 뒤 재혼을 했으나 사이가 좋지를 않아 지금은 그 집을 나와 별거 생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후처와의 사이에도 애 둘이 있고 지금은 다 커서 고등학교 1년과 한 아이는 중학 졸업반 이란다.
홍군은 중동의 건설현장에서 같은 무렵 나랑 같이 근무하던 사람이다. 부서는 다르지만 늘 부딪치며 지내던 동료였다. 숙소도 바로 옆 동이어서 퇴근도 확실하지 않은 그곳에선 처지를 같이 삭히며 지내야 하는 동기요 가족이었다.
그는 건설업체 D산업의 정 직원 과장이었고 나는 계약직 팀장으로 나이도 동갑이다. 자기가 생일이 두 달 빠르다는 걸 이유로 늘 형님대우를 요구하던 사람이다. 그 당시 그의 집은 아현동이라고 했고 결혼해서 100일이 지난 딸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도 학교도 안 들어간 애를 빙자 학부형과 총각은 다르다고 위세를 떨었었다.
은전을 베푼다고 여자 소개도 두 번 이나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우린 휴일이면 양고기도 구워먹고 이스트로 만든 막걸리를 같이 마시고 바둑도 두고 테니스를 치기도 했다. 어쩌다가 먼 시내로 쇼핑을 나갈 때도 있었다. 이때는 여자구경도 하는 날이라고 우린 떠들기도 했다. 맨날 화이바 안전모를 쓴 외국 노동자들과 남자 들 뿐인 삭막한 작업장을 떠나 인간이 사는 듯한 거리에서 비록 얼굴이나 눈만 내민 차림의 여자를 보지만 그것도 오래 쳐다보면 성희롱 죄는 아닌지 염려도 하면서다. 쇼윈도의 어울리지 않는 고가상품도 보며 넙쩍한 통밀 빵에 양고기를 썰어 넣은 음식도 맛보고 들어온다. 그곳만의 힐링 인 듯 기분 전환겸 몸 보신 눈 보신도 했다며 단순해져서 들어오는 날은 왠지 내 몸이 살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기도 했었다.
시간은 늘 정지된 체 인 것 같고 같은 일의 반복인 것 같은 일상만이 존재하는 그 열기 속 모래사막 공사현장. 뜨거운 열기가 익숙지 않을 때는 온몸이 익을 것 같아 오후엔 다시 현장 나가기가 무척 힘들었던 그곳이다. 1년 정도 같이 있다 홍군은 귀국을 하고 나는 쿠웨이트로 옮겨 3년을 더 현장 생활을 했었다.
이 홍군을 귀국해서 다시 만난 것은 먼저 차 안에서다. 10년 전 쯤 된다. 내 사업이 그럭저럭 안정도 되고 기틀이 잡혀 유망 중소기업으로 증시에 상장을 할까도 고민하던 때다. 시내 프라자호텔 뒤 북창동에서 거래처 사장과 한잔 잔뜩 먹고 차를 끌고 집에 올수 없어 대리운전을 해야겠기에 불려온 사람이 홍군이다. 나는 잘 몰랐는데, 이 친구는 한참을 가다 룸 밀러를 통해 나를 보며 말을 꺼낸다.
“혹시 사우디 다란현장에 근무하던 이형 아냐”하고, 정신을 차려 그를 쳐다보니 낯이 익다.
“아 홍OO 아냐? 이야 반갑다! 살아 있었고마 잉?” 술김에 농담도 건네며 명함을 얼른 꺼내주고 다시 만나자고 헤어 진 뒤 한참 후에야 다시 봤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2년이 더 지난 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이 친구 말고 중동에서 인연을 가졌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 더 있다. 라(羅)군 이다. 그 당시 작업현장에는 총인원 260명 가운데 기능직을 뺀 직원들은 한 70명 정도 됐었다. 다들 눈만 뜨면 작업 현장이나 식당, 숙소에서 마주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직급이 다르고 분야도 다르지만 다 처지는 비슷해서 국내에서의 분위기와는 좀 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조직의 매운맛 쓴맛은 이곳에서도 있었으니 정 직원보다 계약직은 거드름을 필수가 없었다. 그중에 같은 계약직 사원인 라군은 캠프관리 쪽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항상 웃는 낯이고 손재주가 좋은 전문대 출신 이었는데 모르는 게 없고 지혜가 번뜩이는 사람이었다.
이 친구도 이날 같이 만나 식사라도 하자고 했으나 사양을 해서 둘이서만 만난 것이다. 홍군과는 알긴 알아도 별 교제가 없었다고 했다. 이 라군과는 귀국해서도 쉽게 연락이 닿아 자주 만나며 지내는 편이다. 가방, 밸트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면서 핸드폰 케이스까지 만들며 꽤 번창을 했다. 한 때는 중국산 저가제품에 밀려 고전을 겪기도 하는 것 같았지만 잘 이겨내고 지금도 성업 중에 있다.
사업 때문이었는지 홍군을 까맣게 잊고 있을 때면 가끔 그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공교롭게도 그런 날은 이미 선약이 있었고 앞뒤 시간을 봐도 사업을 떠나 편히 그와 마주 앉아 긴 시간 보낼 여유가 없겠다고 생각될 때면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그러면 미안해 졌고 부담이 되었다. 한참 후에야 겨우 그와 마주 앉으면 그것도 저녁 식사만 하고 간단히 안부만 나누고 헤어졌었다
사업을 하며 좀 여유가 있어 보이는 내가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제대로 한 번 대접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으나 그게 잘 안 되었다. 왜 그렇게 시간이 없었는지 자꾸 미루다보니 그가 섭섭해 할 것만 같았다. 내 진심은 이게 아닌데 여유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만 것 같아 더 미안 했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보잘 것 없어 보여 사람을 무시하는 처사 같고 피한다는 그런 인식을 받을까 봐도 더욱 그랬다. 한참 후에야 겨우 전화를 해서 밤늦도록 술 한 잔 산 적은 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미흡 한 것만 같고 처지가 달라선지 늘 그에게 빗진 사람 같았다.
홍군은 그 당시 귀국후 ‘도로공사’로 옮겨 근무를 하다 퇴사후 부동산 중개사무실을 했었고 나중엔 음식점도 해 봤다고 했다. 이런 저런 사업을 하며 돈도 벌기도 했는데 한 순간 잘못돼서 다 접고 이젠 마음 편히 대리운전 일을 한다고 했다. 집안 얘기도 자세히는 하지 않아서 재혼까지 한 줄은 몰랐었다.
사우디와 쿠웨이트, 이라크. 이라크는 좀 다르지만 사우디는 정말 다른 세계였다. 환경과 법이 둘다 그냥 꽉 막힌 곳 30대 젊은 놈이 지내기엔 많은 인내가 필요 한 곳이라고나 할까 그런 곳이었다.
생각하면 그래도 그때가 내 인생에 가장 알차고 보람도 있고 순수했던 시절일 것 같다. 왜냐하면 서울서의 직장생활은 그저 월급 받기위해 다니는 거 같았고, 적성에도 맞지 않아 비전도 보이질 않는다고만 생각했었다. 대학을 늦게까지 다닌 탓으로 번듯한 직장이 아닌 것도 스트레스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다 그렇게 산다는 걸 이해 못하고 젊은 청춘이 무슨 특권인 냥 불만만 잔뜩 쌓아 놓고 다닌 것 같다.
맏이인 난 부모형제들의 생활비 동생들 학비의 절반 정도는 늘 내 몫 이었고 내가 받는 월급은 늘 모자랐다. 동창들 예쁜 아가씨 만나고 장가 갈 때 우리 집은 살던 집도 쫓겨나서 전셋집을 전전해야 했다. 살맛이 나질 않았었다.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많이. 한 선배를 찾아가 간곡히 매달린 끝에 한참 많이들 가는 중동을 갈 수 있었다. 그때가 1979년도 한창 봄이 시작되는 4월 달이었다. 미국의 쓰리마일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3월에 일어났으며 그해에 10,26사태가 일어난 해였다. 박대통령 서거 소식을 이틀 후에 들었고 일주일후 현지에 도착한 신문에서 보았다.
그곳이 처음엔 사우디였다. 쿠웨이트와 이라크까지 넘나들며 ‘노가다’ 생활을 힘겹게 겪어내야 했다. 50도가 넘는 열사(熱沙)의 기후가 최대 난적 이었지만 그것도 적응이 되는 게 사람 몸인 것 같았다. 처음엔 모든 게 황당하고 절망적이었다. 못 견디고 죽을 것만 같아 되돌아 올 생각도 했으나 그대로 패배자가 되긴 싫었고 서울 직장생활도 싫어 월남전 생각을 하며 버텼다. 그렇게 악으로 몇 개월 버티니 천천히 적응이 되기도 하고 이곳도 계절은 있어 기온이 몇 달은 내려가기도 하는 거였다.
모래바람과 열사의 공사현장, 서울서의 희망 안 보이는 삶에 비하면 견딜만 하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갖게 됐던 것 같다. 젊은 놈의 미래가 안 보이고 무수한 경쟁만 있어 보이는 도시의 나약한 샐러리어트(Salariat)로 안주하기 보다는 이곳 모래사막이 오히려 마음 편한 곳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오직 혹독한 더위만 참으면 되고 아무도 안 보여서 스트레스 안 받고 공주타령 하는 여자 친구도 생각할 수 없어 다 잊고 지냈다. 여러 경쟁심 부러움도 모래사막에 묻고 오로지 일만하며 4년을 보냈더니 동료가 부추겼고 부서장이 떠밀었다. 그렇게 들어가라고 미는 바람에 들어와서 늦게 장가도 들고 사업도 펼쳤다. 아주 안 오고 싶었다. 그때는 정말 그 모래벌판의 ‘베드윈’처럼 그냥 그렇게 그곳에 남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베드윈, 그들은 과연 인간인지 철인인지 걸인인지 구분도 안 갔다. 황량한 벌판에 엉성한 텐트 몇 조각, 양 몇 마리, 트랜지스터 라디오 한 대와 시커먼 주전자 양재기가 전부 같고, 까무잡잡한 촌노 같은 부인과 올망졸망한 아이들은 눈만 반짝였다. 그 뜨거운 더위와 모래 폭풍을 여름날 우리의 설악산으로 생각을 하는지 그래도 늘 웃는 낯으로 숙명처럼 단란하게(?)살고 있었다.
왜 알라는 그 ‘술탄’(최고 정치 지배자)에게만 풍요를 허락하는지 이해가 안됐고. 양 몇 마리, 낙타 한 둘 그게 재산 전부인지. 뭘 먹고 무엇을 기다리며 그 많은 아이를 낳아 살아가는지, 그게 전통이고 운명이라면 좀 너무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돈 벌러 온 주제인 내가 언급 할 일도 아니고 어쩜 내가 모르는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살게 하는지 모르긴 하다.
30여 년 전 그 당시 중동 건설현장의 우리를 가르켜 국내 매스컴은 ‘산업 전사’ ‘사막의 전사’라는 말들을 하기도 했다. 전사(戰士)는 전쟁을 하는 군인을 가르키는 말 아닌가. 그렇게 우리는 도매금으로 또 한 번의 전사가 되기도 했다.
“아라비아 로렌스”라는 영화가 있었다. 내가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본 것이 아마 고등학생 때 같다. 내 나이 아니고선 어쩜 잘 알지 못하는 영화 일지도 모른다. 오래전 일이지만 내 인생 굵은 줄을 그어줘야 할 그 시절 엊그제 같은 일들이 떠올라 감히 짜 맞춰 보기도 하는 것이다.
영화 줄거리는 영국의 정보국 장교 로렌스(TE.Lawrence)가 나온다. 푸르고 그윽한 눈을 가졌던 배우 피터 오툴이 주인공으로 연기했고 1차 대전 중 중동지역의 전투에서 아랍부족의 지원을 받기위해 그 지역에 정보장교로 파견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헌데 그는 영국정부가 바라던 것 이상으로 아랍의 지도자들을 사로잡고 아랍의 독립을 위해 열심을 다해 싸워 그들로부터 “아라비아 로렌스”라는 영웅적인 칭호를 얻게 된다는 줄거리다. 영화는 지금의 요르단왕국 ‘와디람’지역이 배경 같다. 사막과 계곡을 누비며 그는 아랍 전사들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 터어키군을 상대로 용맹스런 전투를 벌려 승리를 하기도 한다. 그 당시는 지중해 연안과 동남부 유럽, 그리고 서남아시아까지 막강한 세력을 펼치던 오스만 제국이 서서히 쇠태기를 맞을 무렵 이다. 아랍지역은 곳곳에 단위 부족들이 집단을 이루고 지낼 때였고. 규율을 잡기위해 남의 마을 우물물을 마신 병사를 과감히 아랍의 전통대로 처형을 하는 등 독한 모습도 보여주며 아랍인의 기질을 터득도 한다. 그의 그런 용맹성은 터키군에 포로로 잡힌 후 그곳에서 받은 성적 학대의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힘들어 하는 장면도 보여줬다. 복귀후 영국정부나 서구열강의 욕심이 아라비아에 매장 되어있는 엄청난 오일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많이 분개한다.
영국정부의 소환을 받고 런던으로 돌아와서는 중동지역으로 다시 보내 줄 것을 요구하지만 이뤄지지 않는다. 진정 아랍을 좋아해서였겠지만 이미 정치적으로 타결이 된 아라비아 사막은 그를 원치 않는다. 로렌스가 아랍인과 합세하여 싸우면서 보여주는 식민지 국가에 대한 그의 애정과 인간적인 순수를 우리는 영화 속에서 볼수 있었고 많은 감동을 줬다. 데이빗 린이 감독했고 이집트 출신 오마 샤리프가 나오고 명 연기자 안소니 퀸도 나온다.
평론가 들은 이 영화를 진정한 문학성을 갖춘 위대한 서사영화였다고 평을 하기도 한다. 검푸른 바다 깨끗한 백사장의 푸른 사파이어 같은 눈이라고나 할까, 유난히 맑고 그윽한 눈을 가졌던 로렌스 역(役)의 ‘피터 오툴’ 그 멋진 모습을 한 번 다시 보고 싶다. 아쉽게도 매스컴은 작년에 그가 82세로 영국에서 죽었다고 전했다.
끝을 모르게 펼쳐진 그 사막, 싫어할 수 없어 눈을 들어 멀리 사막 끝까지 바라 볼 때가 있다. 고운 황포모시를 깔아놓은 듯 보이기도 하고. 신(神)도 그 지으심을 잠시 잊고 버려둔 듯 망각의 지대로 그곳에 펼쳐져 있다. 시간이 없는 것 같고 무한한 시간이 괴어 있는 듯하다.
오로지 태초의 그 모습처럼 공기와 정적과 가벼운 바람만이 있을 뿐이다. 태양은 곧장 솟구치고 사막은 순연의 나신(裸身)이다. 한 조각의 그늘도 없이 곧장 치솟은 한낮은 태양을 달래가며 언제나 조용히 닳고 있다.
그 불볕 아래 건설현장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마치 개미떼의 역사(役事)인 듯 구조물이 늘어가고 지역의 지평선이 바뀌어 간다. 그리고 언제나 어제 같은 하루해가 저문다, 기계처럼 습관처럼 우린 일을 했다. 멀리 동쪽, 내 나라에서 있던 모든 일들은 다 잊었다. 일상도 어쨌는지, 인연도 관계도 까마득하다. 모든 욕심, 스트레스는 다 모래 속에 묻었다. 밤낮으로 일속에 묻혀 시간이 갔다. 아라비아 로렌스를 생각했다.
그들 아라비아 로렌스는 전투에서 사람을 많이 죽이고 영웅이 됐었다. 그러나 우린 사람하나 죽이지 않고 이 나라들을 위해 역사를 바꿔주고 왔다. 그것은 온몸으로 죽을 힘을 다해서다. 우리는 그 댓가로 받은 돈을, 한 푼 허투루 못쓰고 알뜰히 내 나라로 달러를 송금했다. 그 돈은 산업을 일으키고 수출을 늘리는데 쓰여 졌다고 했다. 또한 건설사는 중동 공사경험을 토대로 더 많은 수주를 해가며 성장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에서 환영받는 인물이 되기도 했으며 그때서야 장가도 가게 됐다. 남은 돈은 사업자금 종자돈이 되기도 했다.
라군은 그 동안 가끔 보며 지냈다. 아니 어떤 때는 자주 만나고 지낸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같은 사업자로서 나보다 능력과 수완이 빼어나 규모가 크고 사업 이미지가 달랐다.
매사가 순조롭고 성공한 친구인 줄만 알고 지냈었다. 골프도 오래전부터 치기 시작한 듯 회원권도 두 개나 가지고 있다. 외제차로 바꾼 지도 오래된 듯했다. 최근까지도 전화를 해 골프 부킹 했으니 나오라고 한다. 시간이 안 된다고 하면 늘 하는 소리가.
“돈 다 벌어 싸 짊어지고 갈거야?” 핀잔하듯 얘기한다.
“그렇지, 갈 때 리무진에 다 싣고 가려고, 또 천당에 럭셔리한 팬션 하나 쯤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헌데 이걸 만들기가 쉽질 않네. 왜?” 응수랍시고 이렇게 대꾸하면,
“여러 소리 하지 말고! 낼 모래 1시 반, 이천 ㅇㅇCC로 와. 알갔지?”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끊는다.
여러 번 거절 할 수도 없어 따라가기로 한다.
그 날이 되면 이 친구는 아침부터 나를 다그친다. 같이 타고 내려가게 ‘만남의 광장’으로 오라는 둥, 일 좀 보고 혼자 내려가겠다고 하면 점심때 쯤 또 전화가 온다.
“어디까지 온 거여?” 티업시간에 못 맞출까봐 걱정인 듯 확인 전화다.
“중부 고속도로 올라탔다”면
“거 봐, 같이 타고 오면 이 형님이, 우리 김기사가 잘 모셔 줄 텐데...”
이렇게 수선도 떨며 내려가서 같이 라운딩을 마치면 좋은 음식으로 저녁도 먹고 올라오게 되는데 집에 오면 대게 밤 12시라 집 사람한테 야단도 맞는다. 고속도로 야간 운전도 싫고 시간을 너무 빼앗겨 다음엔 가까운데 아니면 가지 말아야지 다짐도 한다. 그래서 가끔 불평과 원망도 하곤 지낸다.
그래도 이 친구 라군의 성의를 무시 할 수 없다.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같이 운동도 할 수 있어 좋은 일 같아서다. 고마운 일일 것이다. 사우디 그 징그러운 곳에서 힘들게 일하며 만난 친구들 아닌가. 마누라들까지 같이 공을 치기도 여러 번이다.
딸 둘에 아들 하나도 다 결혼 시킨 라군이다. 3년 전 부터는 사업을 아들에게 슬슬 맡기기로 하면서 손을 뗄 생각이었다는데 얼마 전까지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최근 검진에 췌장암이라는 게 발견이 되어 지금은 병원에 입원하고 있게 되었다. 맑은 하늘에 날 벼락이었다. 초기가 아니라 심한 것으로 나왔다며 아들이 자주 전화를 드리겠다고 한다.
문병 차 찾았더니 얼굴이 그새 반쪽이 되어 보였다.
“어떻게 된거야?” 내가 물으니
“뭐가? 이제 염라대왕이 부르시는 모양이여.” 능청스런 대답이다.
“아니 갑자기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거야?”
“이 사람아. 내가 형님이니 먼저 가는 게 당연한 거 아녀?” “자네도 조심하라구!”
환자 문병 갈 때 항상 느끼는 거다. 내가 절대자도 아니고 조선 선조 때의 명의 허준(許浚)선생도 아니지 않는가. 환자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결국 아무 힘도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것이 그저 안타까웠다. 안정이 필요 할 것 같아 쳐다만 보다 손만 잡아주고 나오며,
“힘든 시기도 잘 보내고 어려운 일도 다 잘 해결해 나온 라사장 아닌가?”
“잘 이겨내고 얼른 나아 그 멋진 드라이버 장타 또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하니 그냥 웃는다. “고마워!” 한마디 그 소리가 예전 같질 않다.
그의 부인 설명이 2주전 저녁나절 손자를 유모차에 태워 같이 산책 겸 걸었는데 앞서가던 라군이 눈앞 에서 갑자기 주저 않더란다. 깜짝 놀라 119불러 응급실로 갔더니 처음엔 뇌출혈이라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대학병원으로 옮겨 정밀검사를 했더니 저 지경이라고 한다. 췌장암은 쉽질 않다는 소리를 몇 번씩 하며 울상이다.
그 후 그의 아들이 전화가 와 누구한테 부탁 좀 해서 미국에 새로 나온 신약이 있다고 들었단다. 그걸 구입해 복용시켜 드려 보고 싶다고 해서 산호세 사는 동창 녀석에게 부탁해 전달하긴 했는데 별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이 암은 특히 통증이 심하다며 수술도 못할 상태라 진통제와 항암치료만 하게 돼서 가족이 초상집이다.
병원을 나와서 운전해 집으로 오는 길은 착잡했고 심란했다. 어느새 우리가 이제 인생을 접고 돌아 갈 때가 되었는지. 100세 시대는 우리랑 상관없는 일인지.
이때 FM 라디오의 스피커에선 내 기분을 아는지 ‘마이 웨이’(My Way)가 흘러나왔다. 볼륨을 크게 올렸다.
And now, the end is near.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자, 이제 마지막이 가까워 졌군. 그래 내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네......) I've loved. I've laughed and cried. I've had my fill, my share of losing.... And did it my ~ way.( 사랑도 해 봤고, 웃고 울기도 했지. 가질 만큼 가져 봤고 잃을 만큼 잃어도 봤다네...... 그리고 내 방식대로~ 내 맘대로 살았네.)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그냥 정겹다. 내 인생 얘기 하는 것 같아 숙연해진다. 이것은 또 후랭크 시나트라가 불러야 제 맛이다. 동양적 발라드풍으로 보이기도 해서 가사도 찾아보고 전에는 따라서 흥얼대 보기도 했는데 이젠 좋은 노래 망칠까봐 그냥 듣기만 한다. 집에 와 한 잔 생각이 나 숨겨놓은 보드카를 커피 잔에 혼자 따라 마셨다. 멍해지고 울컥 해서다.
다복한 라 군의 가족들이 떠오른다. 그 집 와이프는 우리 집 마누라보다 더 대형체구다. 남편은 날씬한데 반대로 만난다드니 큰 버스 옆에 다마스 붙어 가는 격이라고 그집 와이프는 익살을 떨었다. 두 딸도 우량아다. 반면 라군과 아들은 좀 날씬한 편이다. 집에 들어가면 시집가기 전 딸들과 같이 여인네들만 있으면 라군은 숨이 막힌다고 투덜대기도 했었다. 또한 그 집 와이프는 외형대로 푸짐해서 성격도 좋고 마당발이다. 젊은이만 보면 좋은 일 아니냐며 중매를 서겠다고 하는 통에 우리 집 아이는 아주 싫어한다.
항상 손이 커 음식을 차려도 푸짐하고 누구 선물세례도 감탄하게 해 라군의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그 넉넉한 마음 씀씀이로 해서 라군 사업이 잘 되는 게 맞다는 그 집 사람이다. 우리 집사람과는 가끔 골프를 같이 다니는데 운전을 못하는 그 집 와이프를 모시고 다녀 그 댓가로 또 잘 얻어먹어 살이 더 붙는다고 난리다. 이젠 그만 붙어 다녀야 한단다. 같이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자기 몸매를 그 집 탓을 한다. 우리 집 역도 선수이기도 하다. 외형만 그렇다는 얘기이고, 한번은 마누라의 느린 동작을 못 참고 ‘밥순이!’라고 불렀다가 꼬박 이틀을 내가 아침 차려먹고 다녀야 했다. 결혼 초엔 무척 순종적이었던 마누라다. 언제부터인가 내 약점을 다 알아 버렸는지 이젠 호락호락하질 않다. 시집간 딸까지 합세해 나보고만 잘 좀 하라고 그런다.
또 한사람 홍군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통 소식이 없다. 얼마 전 그러니까 작년 4월에 내 여식(女息)을 시집보내면서 그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러나 집 전화까지 두 대가 다 불통이었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보고 연락을 취할 방법을 다 짜 봤으나 통화가 안 되었다. 그의 여식이 강남 S병원 간호사로 근무한다고 했다. 언제 한번 찾아 볼 수밖에. 그를 마지막 봤을 때 홍군은 나에게 돈 조금 꾸워 줄 수 없느냐고 물어 왔다.
“이 사장 나 돈 조금 빌려 줄 수 있나?”
“엉? 왜, 어디 필요 한 데?”
“10월 달에 딸이 결혼을 하는데 좀 필요해서.”
“그래? 언제라고? 얼마나?”
“천만 원만 좀...”
“딸인데 그 돈 가지고 어떻게 하려고?”
“형편대로... 하려고...”
이렇게 해서 그 돈을 가져갔다. 요즘 같은 시대에 딸을 여의면서 부모가 특히 애비의 역할과 책임이 막중 할 터인데 홍군의 형편으로는 전처 딸을 첫 번째로 보내면서 많이 힘들어 하는 눈치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내 딸을 보내는 것처럼 마음이 무겁고 내가 나서는 게 맞는 일도 아닌 것 같아 답답해야 했다.
다행히 그 딸의 결혼식은 하객도 다른 집 못지않았고 친구와 병원 동료들인 듯 축하를 많이 해주고 있었다. 이날 신부의 모습은 유난히 우아했고 예쁘고 특별했다. 어느 결혼식장 신부보다 기억에 남는다. 한 가지 달랐던 것은 신랑과 절을 할 때 아빠가 신랑 다음으로 한참 껴안아주니까 그냥 눈물을 얼마나 흘리는지 끝날 때까지 훌쩍이고 있었다. 애처롭고 보기가 민망했다. 많이 사랑스러웠다. 신부 부모석 자리에 앉지 못한 일찍 간 친 엄마 생각을 해서인지 아님 아빠의 오랜 힘든 처지가 생각 되서 인지도 모른다. 신부의 애비도 남동생도 충혈 된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 뒤로 3년이 지난 것 같은데 그의 행방을 모르겠다. 빌려준 돈 받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돈이라도 주고 싶은 것이었지만 자존심 건드릴까봐 가는 날 “ 잘 갚아!” 했던 말이 자꾸 걸린다.
우리 말고도 많은 근로자들이 그곳을 다녀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다 오래전 얘기가 되었다. 신화도 아닌 듯 우리들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우리는 역전의 전사들이 아니었나? 막막하던 땅, 시간이 정지해 있고 태고의 침묵이 머물러 있는 듯 했던 땅. 뜨거운 앙금처럼 가라 앉아있는 그 사막. 그곳에서 우린 늘 싸우듯이 일 했고 견디면서 도로와 발전소를 그리고 항만을 만들어 놓고 왔다. 비록 한나라를 구하는 독립투사도 아니고 국가적인 큰 프로젝트를 나 혼자 만들어 놓고 온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이 못하는 시설들을 피와 땀으로 곳곳에 세워놓고 왔다. 참고 견디어 내고 쓰러지지 않고 돌아왔다.
두 친구 벌떡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보여줘야 하지 않는가. 그때 그 시절 강인한 전사의 모습을! 자긍심(自矜心)이라고 해도 좋다. 결코 아라비아 로렌스 못지않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 그 불굴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다.
우린 그때 사막 한가운데서 땅굴을 뒤져 몸보신 한다고 도마뱀을 잡아먹기도 했었다. 휴일 날 물차를 동원해 뭔가 있을법한 땅굴을 찾아 입구에 호스를 들이대고 물을 틀어 흘려보내면 잠시 후 팔뚝만한 도마뱀이 긴 혀를 날름거리며 어기적거리며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지게 작대기 같이 만든 장대 갈고리로 목 부분을 꽉 눌러 잡아 사각 깡통 속에 집어넣으면 끝이다. 이때 전갈도 그 구멍에서 꼭 같이 나오는데 아마 공생 하는 것으로 보여 졌다. 종류가 다른 놈도 있다. 머리 쪽에 뿔도 있고 전혀 다른 험상궂은 생김새로 나오는 녀석도 있었다. 네발이 달렸고 끝이 갈라진 20센티 정도의 혀가 들락거리고 몸길이는 1m정도다. 도마뱀이 아닐 것 같고 매우 기이하게 생긴 그 모습은 바로 전설의 동물 용(龍)을 보는 듯했다. 용을 한 번도 못 본 우리 들이라 믿지를 않았지만 그 당시 녀석 사진을 못 찍어 놓은 게 지금까지 영 후회스럽다. 같이 솥에 넣고 탕으로 고아야 보약의 효과가 배가된다는 돌팔이 같은 아저씨도 있었으니, 우린 그놈들을 식당으로 인계해 잘 부탁해서 그것을 탕약(湯藥)처럼 정말 보약 먹듯이 한 양재기씩 열흘씩이나 걸쳐 먹어 댔었다. 그 효과인지는 몰라도 별 아픈데 없이 그곳 생활을 4년에 걸쳐 마칠 수가 있었던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때 아마 두 친구도 그것을 얻어먹었을 것 같다. 그걸 못 먹는 한국인은 없었다.
우리 세 사람의 현주소는 어떤 것인가. 왜 희망적이질 않고 내일이 없어 보이는지. 나이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아직 속단 하기는 이르지만 중동의 전우 두 친구의 현재의 삶이 좀 순조로웠으면 싶다. 나이가 들수록 이젠 좀 무탈하고 편안하게 잘 사는 삶은 요원 한 것인지. 부디 라군은 다시 건강 회복하고, 홍군은 아직도 우리의 남은 시간들을 잘 관리도 해서 가족들과는 관계도 속히 회복하고, 경제적 여유도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싶다.
그럼 나는 괜찮은가. 지금의 나도 처지가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매일 혈압 약 한 알을 챙겨 먹어야 한다. 치매 가족력이 있는 만큼 언제 나도 그 불청객을 맞아 드려야 할지 항상 불안감도 안고 지낸다. 밤사이 무슨 일이 생긴 돌연사를 드물지 않게 보고 사는 세상이다. 때론 건강한 척 멀쩡한 척 하며 자만도 하고 지내지만 어깻죽지 견통 한 방으로 밤새 쑤셔대 뒤척이며 끙끙 댔고 다음날은 아주 겸손해져 걷는 것도 살살 걸어야 했다. 높은 곳에 계신 분이 나에게 한 눈 팔지 말고 까불지도 말고 살라고 주의를 준 것이라고 마누라는 잊지 않고 한마디 한다.
영화 화면에 아무 물체가 보이지 않아 깨끗해서 좋다던 그 사막이었다. 오직 먼 지평선 아래 여인의 몸 그곳 마냥 아늑하고 아득한 구릉지(丘陵地), 연 살색의 모래언덕은 무척 매혹적일 때도 있다. 그 위에 엎어져 내 ‘엄니’의 젖가슴도 찾으며 따스한 그 품에 안겨 꿈같은 잠을 들어 보고 싶기도 했었다.
때론 그곳이 우리가 사는 지구가 아닌 외계인들이 득시글거리는 어느 혹성의 지표면 같기도 하다고 보는 어느 작가도 있었다. 우주선 같은걸 타고 전자총을 들고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외계인들의 무리가 있을 것도 같은 어느 SF영화처럼, 신기루 인양 그런 환상이 들기도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 모래땅 위에 로렌스 당신은 낙타를 타고 달리고 우린 개미의 역사(役事)를 감당하며 그곳에 새로운 인프라(Infrastructure)를 심어주고, 그들의 오랜 침묵을 깨워주고자 우린 젊음의 푸른 시간들을 그곳에 쏟고 온 것 일게다.
한 밤중에 그 무변한 사막에 혼자 앉아 있어 볼 때가 있었다. 그러면 어둑한 그 사막이 저 만치서 별을 뿜어 올린다. 그 별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면 그 다음엔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유한과 무한이, 찰나와 영원이 만나기도 한다. 척박하긴 해도 그래도 그것이 축복 같던 그 사막에서 우리는 진정 아라비아 로렌스였으면 했는지 모른다.
남다른 애정으로 보는 그 사막이다. 유전지대의 가스불이 24시간 내내 타오르는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살아 움직이는 메뚜기 모양의 오일펌프는 쉼 없이 오늘도 꺼떡꺼떡 움직일 것이다. 국경너머까지 끝없이 펼쳐진 그 사막지역은 여전히 한낮의 이글거림이 있고 조용히 석양빛에 잠길 때도 온다. 그렇게 하루해가 지고나면 아침 해는 또 다시 어김없이 떠서 식혀진 대지를 맹렬하게 달굴 것이다.
그 태고의 침묵이 서려있던 그 땅에 치솟기 시작한 석유, 지금까지는 국가와 인간을 움직이는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갈등과 분쟁도 가져왔다. ‘이라크 사태’는 아직도 그치질 않고 시끄럽다. 군주들의 횡포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권자에서 끌어내리게도 한 ‘아랍의 봄’도 있었다. 요즘은 또 새로운 이슬람 극단세력 ‘IS’(Islamic state)’이라는 것도 생겨나 멀쩡한 사람을 잡아다 화면 앞에 세워놓고 공개 처형(참수)하는 잔인성을 보여주며 서방세계를 위협도 하고 있다
석유, 그 불길의 기세는 아직은 여전 하고 맹렬하다. ‘두바이’는 거듭 새로 태어날 것 같다. 최근에 들른 이집트여행길에 두바이를 보았었다. 그곳은 오일머니가 모인 부자 집 화려한 파티장 같았다. 끝없이 이어진 모래사막 끄트머리 바닷가에 또 다른 그들의 현대판 오아시스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불길도 사그라질지 모른다. 뒤따르는 대체 동력(動力)이 필요 하다는 걸 그들도 이젠 알 것 같다.
아라비아 로렌스는 영화로도 오래 기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아라비아 삼돌이(우리 세사람)는 쉽게 그냥 잊혀 질것만 같다. 아쉽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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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나 그러하듯 성상동창 글을 읽을때마다 소탈하고 인간미가 은근하게 풍기는 사람냄새가 난다 우리는 언제나 사는날까지 후회없이 즐겁고 뜻깊게 살려고 노력해본다 가는데는 순서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받아드리고 하느님앞에 갈 준비를 늘 하고 살아야 되지않을까 생각한다 간만에 좋은글 머물다 갑니다.
이군의글을보니 반갑고그런데..눈물이 많이흐른다 아마도술탓이라..
그 친구에게 속세에 신음소리는없길 바라네..이별의 슬픔일랑 없길 바라네..사막 한가운데서도 희망을 찿드시
죽음을 넘어선 새로운 희망을찿기를 기도한다..
이젠 우리도 80세 정도에 이정표를 세워 놓고 생각해야 될까보네. 더 살면 좋고 아님 말고...슬픈 일이지만 늙은이는 죽어야 새 생명들이 세상에서 활개치지...너무 비참한가?
글 읽어줘서 고맙구요. 다시 좀 수정을 했읍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경험도 하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 갑니다. 한 시대를 같이 겪으며 산다는 것도 어찌보면 축복이지요. 살면서 돈만 쫒기보다 이웃도 돌아보고 밥도 잘 사며 살아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배려가 부족한거지요. 계산이 먼저 돌아가고, 시간을 못내고, 남을 배려 할줄 아는 인간,인간의 기본같습니다.또 굳이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인간도 되지 말아야 추하지 않습니다. 늦은 나이지만 우리도 좀 그런걸 배워가며 살았음 합니다. 나 부터 잘 하라는 소리 들리는듯 합니다.
위 글을 써 놓고 마음에 안들기도 하고 좀더 잘 좀 써 보려고 5번이나 수정을 해 봤다. 그게 거기 같지만 다른 진짜 작가들도 20번은 고친다고 하니 한 편을 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것 같다. 물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쉽게 멋들어지게 써 놓은 걸 보면 쫄아 들기도 하지만 뭐 그런거 상관 않고 써지는 대로 배우기도 하면서 해 볼 생각이지. 뭐 얼마나 우리가 남은 시간이 있을지 모르기도 하지 않는가.강건들 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