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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일산촌(一山村)은 갑자기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결같이 병색이 완연했고 혼자 기동을 못하는 병자가 대부분 이었다. 질 좋은 비단옷을 입은 사람도 간혹 보였지만 가난에 찌들어 약한 첩 변변히 쓸수없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길게 줄을 늘인 채 초라한 모옥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 다. < 일산의원(一山醫院) > 문가에 세워진 깃발에 써진 글씨로 보면 병을 치료하는 의원이 분명했지만 병실 하나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전형적인 산골 의 원이었다. 값싼 약 몇 첩 지어 주고 동전 몇 문 움켜쥐는 그런 곳이었다. 오치(誤峙)는 명색이 의원(醫院)이지만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 진 약방문 이외에는 처방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는 진맥올 하 는 것이 아니라 몰려든 사람들에게 줄을 서라고 고래고래 고함 을 질러댔다. 빌어먹을 날씨는 왜 이리 뜨거운지 이마와 목덜미에서 흐른 땀 이 단삼에 축축이 젖어들었다. 그러나 평생 처음 맞아 보는 대 성황인지라 벌린 입을 다물줄 몰랐다. '돈을 조금 더 받아도 되는데...' 가난에 지친 손들이 내미는 동전 몇 문을 받아들면서 아쉬움을 떨치지 못했지만 내색 할수는 없었다. 어떤 이는 돈이 없어 계 란꾸러미나 씨암탉을 들고 올 때도 있었다. 은자가 넉넉할 것 같은 대부호가 눈에 뛸 때마다 혹시 기다리다 못해 돌아가면 어쩌나 노심초사했지만 순서를 바꾸지도 못했다. "아니, 이게 처방전이야?" 문득 진맥실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오치는 힐끔 쳐 다 보았을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분명 또 쓸데없는 채소나부랭이를 처방전이라고 적어 줬을 테 고, 절묘한 약처방을 기다리며 오랜 시간 기다리던 사람들은 배반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겪는 일이었다. 마늘을 날것으로 하루 두세 쪽 먹어라. 뽕나무 열매를 말려서 달여 마시거나 가지를 잘게 썰어 볶아서 차로 달여 마셔라. 폐병에 시달리던 환자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돌아갔다. 피마자 한줌과 석산초 뿌리 한두 개를 함께 넣고 찧어서 양 발 바닥에 붙여라. 열 시진쯤 지나면 물기가 대소변으로 나온다. 늑간이 찌르듯이 아프다고 울부짖던 환자는 노기로 얼굴이 붉 어진 채 욕지거리를 한뭉치나 던지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왔다. 멀쩡한 몸으로, 한결 나아진 모 습으로...손에는 값어치는 없으나 진정이 물씬 배인 것을 들고 왔다. 진맥실에서 노성을 지르는 저 사람도 아마 며칠 지나지 않으면 계란 한 개라도 들고 다시 돌아오리라. 꼬리를 이으며 동구 밖 까지 늘어선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잉...이거 순 사기꾼들 아냐?" 진맥실에서 물러 나온 사람은 입이 한다발이나 튀어나온 채 험 한말을 그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처방을 내렸기에 그러시오?"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환자가 궁금증이 치미는지 은근히 물었 다. "글쎄, 무를 달여서 하루에 두번 한 그릇씩 장기 복용하라는구 려. 세상에 이런 말이 어디 있소?" "해보시지 그러오. 돈드는 일도 아니고..." 환자는 돼지처럼 뚱뚱한 사람을 쳐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흘렸 다. 이 사람은 산후에 부기를 빼는 방법도 모르는 것일까. 무즙이 부기에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데 하기는 부기라 고 말하기에는 너무 살이 쪘어. "이 사람아 비의(卑醫)의 처방이 원래 그런 건데 그것도 모르 고 왔나?" 오치가 참지 못하고 기어이 한마디 거들었다. 십 일 전, 갑자기 나타난 젊은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한나절을 보낸 끝에 지필묵을 빼앗다시피 잡아채서는 비의(卑醫)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저녁나절 찾아 온 환자에게 마늘 처방을 내렸다. 돈이 들지 않는 일 환자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오치가 지어 준 약재보다도 효과가 있었다 고 전해 왔다. 조그만 산골인지라 소문은 불길처럼 번져 갔다. 원래 촌사람들은 큰 병부터 자잘한 병까지 온갖 잡병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먹고 살기 바빠 제 한 몸 건사하기 힘 들었던 사람, 고질을 앓고 있는 사람...모든 사람들이 모여들 었다. 처방전이 어처구니 없다 보니 진료비도 구분이 없었다. 동전 몇 문, 먹을 것,의복...어떤 사람은 빈손으로 오기도 했지만 진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오치는 조그만 방안에서 문을 열어 놓고 환자의 맥을 짚고 있 는 젊은 의원을 쳐다 보았다. '신의(神醫)야, 신의...' 비의는 처방전을 적어 주었고, 환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받 아 드는 모습이 보였다. '이름이나 알았으면 좋겠는데...' 이런 사람이 궁벽한 산골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일산의원에서 진료를 하는지는 몰라도 때가 되면 철새처럼 돌아가리라, 그리고 자신은 다시 별볼일없는 평범한 의원으로 돌아가 분주했던 이 시간을 그리워하겠지. 그 전에 이름만이라도 알아 두고 싶었다. 오치는 술시(戌時)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때쯤이면 아무리 환 자가 많더라도 비의는 진료를 끝냈다. 저녁을 먹고 얇은 벽자 하나로 구분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면 의서(醫書)를 읽든가 무엇인가를 적어댔다. 간혹 답답한 것이 있는지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고뇌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더니 어제는 별빛 한 점 없는 깜깜한 안뜰을 두 시진이나 서성거렸다. 세상의 온갖 고민을 혼자 걸머진 듯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술시가 되자. 비의라 자칭한 젊은이는 진료를 끝내고 손발을 씻었다. 이미 저녁을 지어 놓고 기다리던 막둥이 어미가 밥상을 들여왔 다. 막둥이 어미 또한 비의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 다. 열다섯에 시집이라고 왔는데 조석 끼니조차 걱정해야 하는 궁핍한 살림이 아닌가, 더욱이 남편이란 사람은 무슨 병인지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하는 병자. 그럭저럭 살아온 세월이 삼십여 년. 그래도 남편 구실은 했는 지 늦게나마 막둥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만약 막둥이라도 없었으면 세상 살맛을 잃었을 게다. 그런데 비의가 그녀에게 또 다른 희망을 주었다. 이제나저제나 죽을 날만 손꼽던 막둥 아비가 자리를 털고 일어 서는 기적을 보였다. 비의가 치료를 시작한지 나흘 만이었다. 막둥 어미는 뭐라고 감사를 표시해야 할 줄 몰라 하다가 그렇 게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비의의 시중을 들었다. 막둥 어미 같은 사람들은 많았다. 마당을 쓸어 주는 사람, 나 무를 해 오는 사람, 물을 길러 주는 사람, 이 모두가 비의를 존경하는 일념에서 자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름이 어찌 되는가?" 오치는 수저를 들기도 전에 궁금했던 것을 물어 봤다. 처방전 을 내릴 때 외에는 입에 재갈을 물렸는지 도대체 말이 없는 청 년, 처음에는 푸르죽죽한 살빛이 꼭 지옥나찰처럼 섬뜩했는데 며칠 전부터 제 피부색을 되찾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그래도 사 람다웠다. "저녁이나 드시지요." "이 사람아. 자네는 떠날 사람이 아닌가. 같은 의원으로서 안 계(眼界)를 넓혀 줬으면 이름이라도 알아야 안되겠나?"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비의는 이미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부엉! 부우엉...! 야산에서 우는 부엉이 소리가 청승맞게 정적을 갈랐다. 그 소 리는 논에서 시끌거리는 개구리 소리와 보조를 맞추어 아늑한 평화를 가져왔다. 잠자코 듣노라면 심신이 절로 편안하고 고요 해졌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싱그러운 산바람도 더위를 식혀 주 는데 일조했다. 쉬익! 휘리릭...! 옷자락 날리는 소리가 가볍게 들리며 일남일녀가 내려섰다. 여인의 손에서는 시퍼런 장검이 달빛에 빛을 발했고 사내의 두 손은 넓은 소매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았다. "놈이 의원으로 가장하고 있었어? 음...! 의독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다는 이야기...감히 당문에서 의독술을 훔쳐 배우다니, 노...옴!" 가늘게 저며 나오는 음성은 더운 지열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싸늘했다. "대가, 들어가세요. 놈이 뛰쳐 나온다면 제가 막죠." 사내 당철휘는 한연지를 흘끗 쳐다보고는 신형을 날렸다. 그깟 놈 하나 잡는데 퇴로(退路) 운운하는 것이 영 자신을 무 시하는 것 같아 기분 나빴다. 한여름인지라 문을 활짝 열어 놓 은 저켠은 무덤 같은 침묵이 자리했다. 세상모르게 곯아 떨어 졌을텐데... 당철휘의 신형이 막방으로 짓쳐 들려는 찰나, 파앗! 갑자기 조그만 불길이 어둠을 살랐다. "엇!" 당철휘는 쏘아 가던 몸을 급히 정지시키고 뒤로 한걸음 물러섰 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던가 별것 아니라고 늘 생각했으면서 도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것이 있었던지 자신도 모르게 취한 행동이었다. 호롱불의 심지가 돋궈지면서 방안 정경이 환하게 드러났다. 촌구석 어디에서나 볼수있는 노인은 한삼(汗衫) 차림으로 죽은 듯 고요히 누워 있었다. 그리고 눈에 불을켜고 찾던 단비하가 간단한 무복차림으로 호롱불에서 물러서며 마당을 쳐다보았다. "어서들 오게." 담담한 음성. 올 줄 알았다는 듯 행동에 경망됨이 없었다. 또한 알고는 있었지만 바보의 어눌한 음성이 아니라서 선뜻 행 동하기에 무척 곤혹스러웠다. 지금의 단비하는 생면부지 초면인 전혀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 다. 웃음기없는 얼굴, 당당한 태도, 흔들림없는 말투...그러고 보니 기도만 틀린 것이 아니었다. 곧은 허리, 쩍 벌어진 가슴, 금방이라도 폭발할것 같은 몸 , 십이 년 동안 숨겨 왔던 진면 목이 사실대로 표출되었다. "이놈의 새끼..." 당철휘의 오른 손목에서 스르륵 혈왕절편이 미끄러져 내렸다. 한연지가 왜 만성독약을 복용시키라고 했는지, 왜 그토록 말끝 마다 죽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적수라는 의 미보다는 발끝으로 짓이겨 버릴 한마리 벌레로 비쳐졌다.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혈왕절편을 휘두르기 전에...내 말을 듣는 게 좋아." 단비하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죽음의 사신 당철휘와 한연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극히 태연한 모습 은 알지 못할 불안감이 되어 이 인의 전신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대들과 맞설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아. 하지만,나는 여기 와서 십여 일 동안 사람들을 진맥했지. 머리로만 익힌 지 식을 응용해 보았는데 뜻밖에 완벽했어. 아! 오해는 하지 말 게 당문의 독술을 훔쳐 배운것은 아냐. 단가의 비전 의독술이 지." "개자식, 쓸데없는 말은..." "계속 들어라!" 범종을 울리는 듯 한 고함소리. 단비하의 음성에는 위엄이 배 어나왔다. 일대 종사의 기품이 절절이 배인 듯했다. 불과 십여 일 만에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성숙해 있 었다. "당문의 올가미에서 빠져 나가는 방법은 중원을 떠나 세외(世 外)로 가는 것뿐.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후후후! 그래서! 우리와 맞설 생각을 하게 됐다 이거지?" 당철휘는 비웃음을 가득 띤 얼굴로 실소를 흘렸다. "독문사람을 대접하는 방법은 독뿐이지." "이런 미친 놈!" 쉬릭...! 분노한 당철휘의 손에서 혈왕절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기세는 일어날 때보다 빠르게 가라앉았다. 뻣뻣하게 고개를 들 던 구절편이 맥없이 축 늘어지고 만 것이다. "어, 언제? 이, 이게 무슨 독..." 당철휘의 양눈은 회의(懷疑)와 경악으로 얼룩졌다. 믿을 수 없었다. 후기지수 중 제일이라는 자신의 이목을 속이 고 하독할 수 있다니, 자신이 독에 중독된 것도 몰랐다니 말이 다. 그러나 목 뒷덜미 풍부혈(風府穴)이 빠개질 듯 아프고 기 해혈(氣海穴)에 운집되던 내공이 산산이 홀어지는 현상은 분명 산공독(散功毒)에 중독된 증상이었다. "먼저 하나 묻겠다. 주숙아를 죽인 사람이 누구냐? 검법, 환격 검법이었지. 한연지, 너라고 추측했다만..." "맞아요." 한연지는 전혀 긴장한 빛이 아니었다. 당철휘처럼 당황하지도 않았다. 운공을해서 확인할 생각도 않고 모든 사실을 받아들였 다. 그만큼 단비하를 안다는 말도 되고...차라리 오늘 이 사태 를 미리 예측한 듯했다. 단비하는 조용히 일어섰다. 당연히 당철휘는 무섭게 긴장했다. 그가 손을 써온다면 꼼짝없 이 죽을 참이었다. 벌써 반신이 자르르 마비되는 것이, 손발을 놀리기는 커녕 한걸음도 제대로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무섭도 록 효과가 빠른 독. 독성이 이 정도라면 능히 당문 십독과 어 깨를 견줄수 있는 독이었다. "우리를 어찌할 생각이죠?" 한연지는 재미있다는 듯 싱긋 웃으며 물었다. 묵묵하게 마당으로 내려선 단비하는 일지를 뻗어 당철휘의 마 혈을 짚었다. 무섭도록 빠른 솜씨였지만 독에 중독되지 않은 상태라면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손가락하나 움 직일 수 없는 지금은 빤히 눈뜨고 날아오는 손가락을 지켜보아 야만 했다. 이어서 혈왕절편을 빼앗았다. 소매 속에 들어 있던 조독기도 품속에 있던 절독들도 갈취했다. 자포독, 후란독, 당문 금기 암기인 폭우빙혼통도 빼앗았다. "개새끼, 주, 죽여라!" 당철휘는 씨근덕거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분하지만 어쩔 수 있 는가. 자신의 목숨이 타인에게 쥐여진 것을...그러나 이 순간 에도 죽음의 입김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병신 같은 놈의 손에 놀아난 것만 분할 뿐이었다. "어린애가 흉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안돼." 퍼억! "크윽!" 복부에 터진 일격.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버티고 서 있던 당 철휘는 다시 날아온 또 한번의 발길질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한 마장이나 날아가 떨어졌다. 혼절하지는 않았지만 흰 동공을 보이며 숨을 컥컥 몰아쉬는 모습이 난생 처음 육신에 가해진 고통의 강도를 말해 주었다. 퍼억! 퍼억...! 단비하는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한에 사무쳐 내 지르는 발길질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침착했다. 고통이 가라앉는 시점을 정확히 파악했다. 가장 고통을 극대화 시키는 요혈만을 골라 파고들었다. 얼굴이 피범벅이 된 당철휘는 눈에서 이글거리는 독광을 뿜어 냈다. "주, 죽...인다!" 속옛말처럼 가녀린 음성.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처지에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분출했다. 극통을 일으키는 몸보다 갈기갈기 찢어지는 마음이 더욱 아팠다. 발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던 인간에게 받는 수 모인지라 마음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당철휘가 꿈틀거리지도 못할 정도로 축 늘어지자 발길질도 멈 췄다. "잊지 마라. 지금 이 고통을...독제실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며 몸부림쳤다. 독제실 부대주라면 그 들의 고통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되지 않나?" 단비하는 빙글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상긋거리는 한연지의 모 습이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났다. "우리를 죽인다고...당신이 살지는 못해요." "알아." 한연지는 담담한 음성이 믿어지지 않는듯 눈을 크게 떴다. "깨끗이 죽여 줄수는 없나요?" 한연지는 오히려 싱긋 웃었다. "의외로군. 목숨을 구걸할 줄 알았는데...너는 그런 여자 아닌 가?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네놈의 뼈를 갈아 먹겠다.' 뭐 이 정도 생각은 할줄 알았는데?" "착각하지 말아요. 당신을 몰라서 걸려든 것이 아니에요. 만약 죽이려 했다면 주숙아의 집에서 죽였어요. 이제는 알았어요?" "그럼 일부러 당했다는 말인가?" 한연지는 당철휘를 힐끔 쳐다보았다. 지독하게 두들겨 맞은 당 철휘는 몸을 쭉 뻗고 길게 누워 버렸다. 아마 의식이 없을게 다. "한 사람을...최대의 효웅을 교육하는 중이죠. 궁지에 몰린 쥐 는 고양이도 물잖아요? 골방에서 죽음이 두려워 웅크리고 있던 소심한 사람이 도망가면서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정말 바보 겠죠. 당신은 섬백단을 만들었어요. 이게 섬백단의 독효인가 요?" 눈과 눈이 부딪쳤다. "너를 사랑했었다." 단비하의 입에서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음성이 홀러나왔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 진정이었다. "호호호...! 병신..." "한때나마 사랑했던 정분으로..." 퍼억! 단비하의 오른손이 보드랍기 이를데 없는 아랫배에 내리꽂혔 다, "허억!" 비웃음을 흘리던 한연지는 느닷없이 파고든 고통에 헛바람을 토해내며 눈을 부릅떴다. 이런 고통이...주먹이 아니라 쇠꼬챙 이로 후벼판듯 뼛골까지 저려 울리는 고통.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마라." 단비하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려고 미련없이 사립문으로 걸어 갔다. 한연지는 무너져 내리는 육신 너머로 그 모습을 분명히 봤다. 그리고 입가에 가는 미소톨 베어물었다. 그것으로 오늘 의 승부는 끝났다. 패한 사람은 당철휘, 아무것도 거머쥐지 못 한 사람은 단비하, 승리자는 자신이었다. 삐이걱! 사립문이 열리고 어둠 저편으로 서서히 동화되는 단비하를 보 면서 혼절의 나락으로 깊이 침잠했다. '역시 단비하...너는 실수했어.' 정신을 차린 한연지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이었다. 푹신한 침상의 감촉이 느껴졌다. 지저분한 천장도 보였다. 날이 밝았는지 밝은 햇살과 찜통 같은 열기가 몰아쳤다. 사람들의 응성거림도 들렸다. 눈을 감고 서서히 진기를 끌어올렸다. 일사천리(一瀉千里), 미미한 진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전 신 혈도를 휘돌았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상쾌해졌으며 전신이 날을듯 가벼워졌다. 운공조식을 할때마다 느끼던 현상, 독에 중독된 흔적은 어느 한구석 남아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눈길을 돌려 사방을 훑어보고 방안에 아무도 없음 을 알자 몸을 일으켰다. 손때가 묻은 검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낯선 방, 어색한 분위기만 아니라면 어젯밤 일이 악몽이라 생 각될 정도로 아무 이상이 없었다. 문득 열려진 방문 너머로 한 노인이 지나가다 무슨 기척을 느 꼈는지 주름살 가득한 얼굴을 돌렸다. 분명 방안에서 한삼 차 림으로 늘어져자던 노인. "응? 일어났구려. 잠깐만 기다리시우, 지금 닭죽을 끓이고 있 으니...이 사람, 막둥어미! 아직 안 됐나?" "흥! 닭죽은 무슨 얼어죽을 닭죽. 아, 저 사람들 때문에 신의 께서 떠나셨단 말예요. 그렇지 않으면 말씀 한마디 하지 않고 가실 분이에요." 딱히 주방이랄 것도 없는 곳에서 패악스런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군침을 돌게 하는 구수한 닭죽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 다. 한연지는 한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희미한 의식 저편으로 멀어 져 가던 단비하의 모습...그는 살려 준 것이다. 왜일까? 반드 시 뒤를 쫓는다는 것을, 다음에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는 사실을 알면서 왜 살려 줬을까? 한연지는 쓰디쓴 고소(苦笑)를 베어물었다. '단비하...무산파의 장작개비 같은 놈보다 나으면 나았지 모자 라지 않는 지략이야. 바보가 아니라면 그 정도 생각은 할 줄 알았지. 호호호! 잘됐어. 너의 종말을 지켜볼 수 있으니...' 약은 놈, 당철휘와 자신을 죽인다면 경악한 당문은 자신들보다 더욱 강한 고수를 파견할 것이고, 단비하 그는 갈수록 어려운 싸움을 하게되리라. 숨좀 돌리고 싶었겠지. 자신들의 추적쯤은 자신있다는 의미도 되고...당철휘에게서 빼 앗은 독이나 기구는 한동안 유용하게 쓰여지겠지. 적어도 단비 하란 이름이 당문주의 귀에 가시처럼 들릴 정도는... '당문을 상대할 자신이 생기면 물러서지 않겠지? 네놈이 무엇 을 얻으려고 발버둥치는지는 몰라도 곧 죽게 될걸! 호호호!'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가 뜨겁게 대지를 덮었지만 마음은 서 리 맺힌 듯 꽁꽁 얼어붙었다. 이럴 줄 알고 패배를 자초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당문에서는 기가 막힐 것이다. 당철 휘와 한연지가 코앞에서 놓친 것도 모자라 철저히 농락당하고, 하물며 당철휘는 지닌 모든 것을 빼앗겼으니...금기 암기인 폭 우빙혼통까지. "예 있어요. 어서 처멕이고 쫓아버려요." 퉁명스런 아낙 음성이 귀를 간질였다. 단비하 놈에게 잔정을 많이 쏟은 듯 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한연지의 마음은 개미 굴같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들끓었다. 아무리 자초한 패배이 지만 감히 자신에게 일격을 가하다니, 건방진 놈! "여기 미음이나...허억! 왜, 왜 이러슈?" 닭죽을 받아들고 방으로 들어서던 오치는 조그만 상을 놓치며 기겁을 하고 놀랐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줬더니 보따리 내놓 으라는 식이었다. 안마당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안쓰러워 침상으 로 옮겨 놓고 한숨 푹 재워 줬더니 검을 들이대? 쉬익! 검은 섬광처럼 오치의 목을 베어 냈다. "아아악...!" 오치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어깨 위 머리를 헌납했다. 그러면? 닭죽을 끓여 주고 집에 가려던 막둥 어미는 방안에서 벌어진 참상에 두손으로 볼을 감싸며 돼지 멱따는 비명을 토해 냈다. 쉬이익! 한연지는 비쾌하게 몸을 놀려 중년여인의 목마저 베어 냈다. 단비하를 좋게 말한 것은 죄 중에서도 대죄에 속한다. 그에 관 한 말은 하지 말았어야 옳았다. 검에 묻은 피를 세차게 휘둘러 털어 냈다. 딩철휘는 넋을 잃은채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는 큰 좌절이 앙금처럼 내려앉았다. 그는 한연지가 다가오는 모습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섬백단에 당했어." 믿을수 없다는 듯,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들을수 없을 정도 로 작은 소리였다. "섬백단은 독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한연지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당철휘를 보면서 가늘게 웃었다. 파랗게 멍들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 그의 심정이 어떤지 알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겠어. 섬백단이 어떻게 그런 증상을 일으킬 수 있는 지...하지만 분명히 섬백단이야." 당철휘는 섬뜩할 정도로 조용했다. 분노의 빛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예전의 당철휘라면 망아지처럼 길길이 날뛰어야 하거 늘...단비하가 예전의 단비하가 아니듯 당철휘도 당문을 떠나 올때의, 무애곡에서 첫 임무를 수행할 때의, 황학산에서 좌절 을 당할 때의 당철휘가 아니었다. 지금 또 깊은 생각을 한다면 한단계 더 깊은 심계를 소유하게 되리라. "삼첨산으로 가자. 거기에서 준비를 조금해야 돼." "준비요? 호호호! 왜요? 다시 추적하려고요?" "그래야지. 우리에게는 눈과 귀가 있어. 세상끝까지, 아니 지 옥까지라도 따라가서 목을 베고 말겠어." "후후후! 자존심이 무척 상한 모양이군요." 당철휘는 이그러진 얼굴로 한연지를 돌아보았다. 단비하의 발 길질에 퉁퉁 부어오른 얼굴은 봐주기가 민망할 정도로 뒤틀렸 다. 눈가는 시퍼런 멍으로 가득했고 부어오른 살이 눈구멍을 닫았다. "한매는 포기하겠다는 말인가?" "아니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우선 대가에게는 독이 없어 요. 그놈은 폭우빙혼통, 자포독, 미완성의 풍멸환까지 가지고 있어요. 더욱이 하독하는 방법이 기가 막혀요. 대가도 어떻게 당하는지 몰랐잖아요? 이제는 쉽게 치지 못해요." "어쩌자는 말인가?" "당자인과 연수하세요." "당자인! 단비하 한 놈을 죽이는데 당자인과 연수하라고?" 당철휘는 인상을 더욱 험하게 일그러 뜨리며 화를 버럭 냈다. "호호호! 한놈이요? 그놈에게 어젯밤에는 죽다 살아났어요." "독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야." "섬백단이 있다는 것은 알았잖아요. 방심했다는 표현이 적합하 죠. 섬백단 따위로 우리를 옭아맸다면 지금은 어떻겠어요? 이 미...단비하는 날개 달린 용이에요." "으...음! 만약 연수한다면 문주 자리는 날아간 거야." "호호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단비하, 그놈은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을 알았어요. 필시 당문에 복수하려 들거예 요. 거기에다 뒤를 쫓는 무인들이 있다면? 그들이 자기 아버지 를 죽인 당자인이라면? 호호호! 아마 당자인은 힘든 싸움을 하 게 될 거예요. 만약 죽어 준다면 더 없이 고마운 일이고요." 당철휘는 한연지의 말에서 속뜻을 읽었다. 이 여인은 당자인이 당문에 돌아가지 전 암살할 것이다. 후계자가 한명 뿐이라면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아마 당동한에 대한 대책도 세워졌을테지. 그렇게만 된다면 잠시뿐인 치욕, 얼마든지 감수 할수 있었다. "좋아...연수하지." 당철휘는 아직도 꾸역꾸역 선혈을 쏟아내는 두 시신을 일견한 후 신형을 날렸다. 그뒤를 바로 한연지가 따랐고, 그제야 이곳 저곳에 숨어 있던 환자들이 웅성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 * * 무독천살 당운담은 안색이 돼지 간처럼 시커멓게 변한채 고개 를 들지 못했다. '바보같은 놈! 그까짓 놈 하나 죽이지 못하다니...' - 허허허! 어떤가? 당자인과 연수하지 않는 한 힘들다고 하지 않았나? 문주의 비웃음이 뒷덜미를 잡아채는 것 같았다. 문주의 처소를 향해 한걸음씩 떼어 놓는 발걸음이 천근처럼 무 거웠다. '응? 문주...' 당기룡은 허리를 반쯤 숙이고 정원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월견초(月見草)의 향기를 맡는 중이었다. 당문주는 상징적인 의미로 월견초를 심었다. 번식력이 대단히 강해 중원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꽃. 중원에 고루퍼지는 꽃처럼 번영을 구가하라는 의미가 제일 먼 저 담겼다. 저녁에 노란색으로 피었다가 아침에 햇빛이 비치면 곧 약간 붉 은색을 띠면서 죽는 가련한 꽃이지만 종자를 채취하여 기름을 짜면 월견초유(月見草油)라 하여 감기, 신장염, 인후염 등에 쓰이고 민간에서는 비만증에도 쓰였다. 세상에 널리 유용한 사 람들이 되라는 의미가 두번째로 깔렸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의미이고 당운담은 땅속 깊이 들어가 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는 굵은 뿌리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 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문주님, 저..." 사실을 고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서두를 꺼내야 할지 난감했 다. "당철휘가 당한 이야기라면 알고 있으니까 하지 않아도 되오." 당운담은 등도 돌리지 않고 터져 나온 음성에 수치심을 느꼈 다. 평생 동안 문주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 하면서 살아왔던가. 당문을 떠받치는 기둥 열 개 중에 하나가 되었다고 자부했는데. "이놈좀 보시오. 활짝 핀 모습이 너무 아름답지 않소?" 당철휘가 당하리라는 것을 예측했다는 태도였다. "이놈이 낮에 피는 모습은 극히 보기 드물다오." "그렇지요." 당운담은 소태를 씹는 듯한 기분으로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다른 곳이라면 문주의 말이 맞지만 이곳 사천에서는 보기 드문 일도 아니었다. 사시 사철 짙은 운무로 감싸인 이곳에서는 오 히려 태양 보기가 힘들었고, 당연히 월견초가 대낮에 피는 모 습은 흔치 않게 볼수 있었다. "당철휘는 바로 이놈 같소. 낮에는 져야하거늘 지지 못하고 자 태를 뽐내야 하는 놈...만약 단비하가 아니고 다른 파의 무인 이었다면 목숨이 백 개 있었어도 성치 못했을 것이오. 안 그렇 소?" 문주는 자식에게서 직접 전서를 받은 자신보다도 더욱 상세하 게 일의 경과를 알고 있는 듯 했다. "문주님, 기회를 더 주시면..." 당운담은 자식을 위하여 식은 땀을 흘려 냈다. "허허허! 독제실장, 당문이 진정 단비하를 죽이지 못해 이런다 고 착각하는 것 아니오?" "그, 그럴 리가..." "단순히 놈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전위대를 파견하는 게 더 확실하다고 생각하는데...어떻게 생각하시오?" "물론이지요...아니, 그럼 다른 뜻이라도...?" 전위대원은 오랜 기간 동안 이런 일에 정련된 인간 병기들이었 다. 비록 무공이나 독공은 낮을지라도 그들이 나선다면 주머니 에 든 물건을 꺼내듯이 간단하게 요리할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었다. "미망(迷妄)을 버리시오. 실장은 너무 자식을 모르는 것 같 소." 당운담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비가 자식을 모르다니 무슨 말인가? 혹시 이제는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말인가. "만약 지금의 당철휘와 당영지가 겨룬다면 어찌 될 것 같소?" 순간 당운담은 밝은 햇살이 비춰드는것 갈았다. "오! 그러시다면...우매하여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우매하여..." 기어이 목이 메었다. 감격에 치받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랬다, 지금의 당철휘는 죽은 당영지와 겨루어도 부족함이 없 을 정도로 경험을 쌓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기세도 많이 누그러졌고, 대신 깊은 혜량이 자리잡았다. 호랑이가 제 새끼 를 벼랑으로 굴러 떨어뜨리듯 문주는 세 명의 후계자에게 각기 다른 방법으로 경험을 축적시키는 중이었다. "한연지는 똑똑한 아이요. 그녀라면 당자인과 손잡을 방도를 강구하겠지. 문제는 한 산에 호랑이 두 마리가 살 수는 없는 법, 당자인과 당철휘 둘 중에 하나는 자연스럽게 굴종하겠지.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는 없지요. 남의 밑에 있는 것은 나 하나로 족하니 까.' 먼 옛날 일이 회상되었다. 당기룡이 당문주로 선택되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축하까지 해 주지 않았던가. 왜 문주 자리를 그리 쉽게 포기했을까? 뛰어난 지략, 놀라운 무공, 빈틈없는 하독 솜씨에 눌렸다기 보다는 인 제부터인가 후계자들끼리 정해진 서열에 굴종했기 때문이었다. 문주는 그 서열을 만드는 중이었다. 젊어서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도 이런 기회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자신은 당기룡의 도움을 받아야했고 그 와중에 심복하고 말았다. 맡은 일의 내용은 다르지만 자식 또한 똑같은 경우에 처해졌 다. 확실히 깨달았다. 먼 옛날 처절함에 몸부림쳤던 것이 전대 문주의 발상에 기인했음을, 자식이 마음으로 울어야 하는 까닭 을... '내 전철을 밟게 할수는 없어. 당자인이 당기룡이라. 그렇게 될 수는 없지.' 문주와 몇 마디를 더 주고 받았지만 건성으로 대답했을 뿐 머 릿속은 딴 생각으로 가득했다. 풍동인(風銅寅)은 당운담의 부름을 받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제실에 들어온지 십오년이 흐르도록 야심한 시간에 부름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언제나 깔끔하고 깨끗하게 일 처리를 하는 당운담은 모든 일을 낮에 처리했지 밤까지 늘어뜨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더욱이 당문에 긴급한 사건이 생긴 것도 아니고. 그러나 정작 당운담이 본론을 말하고 조그만 보따리를 내밀었 을 때는 불쾌감이 발끝부터 머리 끝까지 팽배했다. 무시해도 유분수지, 암기실 부대주 풍도건과 함께 풍가에서는 가장 촉망받는 사람에게 겨우 이런 잔심부름을 시키려고 야심 한 시간에 부르다니. 당운담은 풍동인의 기색에서 마음을 읽었다. "불쾌한가?" "그것은 아닙니다만 이런 일이라면 다른 사람을 시켜도..."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일을 해줘야 하네. 그 누 구도 몰라야 하는 일이네. 세상은 물론 당문 사람들조차도... 자네 처자도 몰라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게." 풍동인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문 칠병 중 두 가지인 당뇌전(唐雷箭)과 비폭정(飛暴丁) 그 밖에 별로 특이할 것 없는 독 몇 개를 당철휘에게 가져다 주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이 난리인가. "자네는 나에게 충성하는가 아니면 당문에 충성하는가?" 묘한 물음이었다. 제독실장에게 충성하는 것이 당문에 충성하 는 길이라 생각했는데 그러나 풍동인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실장님에게 충성하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당문에 등을 돌린다면?" 순간 풍동인은 섬뜩했다. 지금 한 말 한마디가 먼 훗날 천형의 사슬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그래도 실장님을 따르겠습니다." 말을 마치면서 당운담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았지만 표정의 변 화는 없었다. '지독한 인간. 기쁜 표정이라도 지으면 어디가 덧나나.'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명심하게. 다녀오게, 독제실 부 대주라는 직함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테니." 풍동인은 머리가 하얗게 비어 왔다. 독제실 부대주. 귀속칠가 중에서는 단지 다섯 명만이 그 자리 에 있지 않은가. 자신이 부대주의 위치에 오른다면 모두 여섯 명, 귀속칠가 사람으로서는 오를수 있는 한계까지 오르는 셈이 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기필코 전달해 주고 오겠습니다." 풍동인은 둘째 딸을 낳은지 열 사흘밖에 안된 부인의 활짝 웃 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강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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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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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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