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면서 한가지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전에 제가 근 만년을 이어져 내려온 우리민족의 고유신앙인 신교를 여기에 쓴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워져 버렸습니다. 그때 적힌 글이 지워지고 다시 뜬 글이 역사를 증명할수 있어야 한다고 떠있길래 지금 이글을 여러가지 사료를 바탕으로 하고 실존하고있는 박물관이나 각분야의 권위자의 말을 인용해서 씁니다. 이 글이 지워지지 않길 바라고 또 얼마전에 적은 신교에대해서는 자료가 마련되면 다시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신교는 물론 환국에 까지는 엄연한 우리나라의 역사입니다. 좀 길지만 꼭 읽어주십시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밑에있는 고교생이 우리민족의 역사를 너무모른다는 글을 읽으면서 조금 마땅찮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저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역사가 단군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여러사람은 단군을 신화로 치는 사람이 아직 많긴 하지만 엄연히 우리 나라는 단군이 아닌 환국 시대 때 부터 내려져 왔습니다. 참고로 예를 들라고 하면 '삼국유사','고조선'조에 (석유 환국-옛날에 환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라는 글이 있니다. 이것을 '경성제대영인본'이라고 해서 이마니시류가 석유환인 이라고 고쳐서 신화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의해서 역사가 왜곡되고 또 중국에 의해서도 왜곡되고 또 서양에 의해서 왜곡이 되어서 우리나라를 제대로 알고있는 사람이 극히 드믑니다. 요즘은 단군마저 신화로 치부하는 마당 이니까요.
환국이라는 나라는 남북으로 5만리, 동서가 2만여리에 다다르는 대제국으로서 바이칼호를 중심으로 나라를 이루고 있었고, 12환국으로 이루어져있었습니다. 환단고기 삼성기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환단고기에서 환은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최초의 광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단은 하늘의 광명이 비친땅이라고 합니다. 초대환인이 안파견 환인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안파견 환인을 우리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이해를 하고있습니다. 그런데 인디언 부족중에 '아파치'라는 부족이 있습니다. 이 '아파치'치의 뜻이 아버지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베링해협이 눈으로 덮혀서 얼음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아메리카대협으로 건너갈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언어, 혈액형, 체질, 치아모양등 과학적인 연구방법을 통해서도 이미 밝혀진것입니다. 미국의 고고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이 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에게는 '고시레'라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흰옷을 즐겨입는 민족이 있었구요 또 미국 워싱턴주에 있는 인디언 박물관에는 짚신, 나무절구, 소쿠리에서부터 광주리, 베틀, 어망, 물레외에도 우리조상들이 즐겨쓰던 생활도구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까지 이동을 하였습니다. 그런것을 볼때 이 환국에서 부터 동서양으로 인류가 퍼져 나갔다고 보면 됩니다. 예를들어 수메르 문명이 있습니다. 서양의 학자들중에 특히 수메르 문명의 최고의 권위자인 크래머 같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BC 3500년 경에 인류의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문명은 그 집단의 문명을 연것은 유럽에서 왔느냐, 그 집단의 원주민이냐, 아프리카에서 왔느냐 를 연구해 본 결과, 그들은 '동방에서 왔다'는 결론을 내고있습니다. 그리고 언어는 '한국어와 동일한 교착어 였다' 하는것이 대영 백과사전에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환국시대에 우리는 상제신앙을 하고있었습니다.(신교) 수메르인들은 모래를 가지고 탑을 쌓습니다. 그것을 지구랏트라고 얘기를 하고있습니다. 바로 '제천단'이죠. 그리고 그리고 수메르인들은 60진법을 썼습니다. 12진법도 썼고요. 60진법은 60갑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국의 12국의 나라 이름으로는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운국, 우루국(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국(일명 시위국 또는 통고사국), 수밀이국 으로 모두 합해서 12개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르, 우르크, 움마, 라가슈라는 도시국가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12환국중에 '우르국'이 있습니다. 또 '수밀이국'도 있습니다. 또 어떤학자들은 수메르를 '소머리'라고도 합니다.
다음으로는 '배달국'인데 배달의 뜻은 박달의 뜻에서 음이 바뀌었습니다. 밝은땅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그리고 배달국을 , '박달나무의 단'이라고 해서 '단국'이라고 얘기할수있습니다. 배달을통치했던 우리의 임금은 환웅입니다. 그리고 '주역'을 만든사람이고 중국에서 시조로 떠 받드는 태호복희씨는 5대환웅 태우의 환웅의 12번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6대 다의발환웅의 막내 동생입니다. 태호복희씨는 '풍산'에 머물면서 성을 풍으로 썼습니다. 태호복희씨가 마지막에 도읍을 한곳은 '진'국입니다. 진땅은 지금 중국의 하남성 회양현인데, 태호복희씨가 도읍으로 정했던 곳입니다. 그곳에 '태호복희지묘' 라고 규모가 큰 비석이 세워져있습니다. 바로 실존인물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농과 동양의학의 창시자인 염제 신농입니다. 8대 안부연 환웅때,ㅏ 신농씨의 아버지 소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소전은 벼슬이럼인다'강수'의 감병관으로 임병을 받습니다.중국의 섬서성에있는 위하의 지류에 강수가 있습ㄴ디ㅏ. 그 강수의 감병관으로 갔다가 신농씨는 호북성을 거쳐갑니다. 호북성에 가면 신농씨의 유적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신농씨는 동양의학의 창시자이며 시장제도를 최초로 만든사람입니다. 바로 문명의 창시자죠. 신농씨는 섬서성에서 호북성을 거쳐 호북성 수주시를 지나갑ㄴ디ㅏ. 옛날에는 수현이었고 거기를 열산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농씨를 열산씨라고도 합니다. 호남성에 영현이라고 있는데, 영현에 신농씨의 무덤이 있습ㄴ디ㅏ. 요새는 '염릉현'으로 불립니다. 즉 염제와 황제의 후손이다 해서, 대만이라든가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 중국사람들이 굉장히 참배를 많이 갑니다. 황제의 능은 섬서성 황릉현입니다. 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은 엄연히 실존했고 또 우리의 직계조상입니다. 중국하고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다들 치우천황은 알고있을것입니다. 우리 월드컵할당시에 온세상을 빨갛게 물들이기도 한'레드데빌스'의 상징이 치우천황입니다. 이 치우천황은 바로14대 환웅으로 자우지 환웅입니다. 황제가 난을 지을당시 치우가 이를 평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국에서는 이 치우천황마저도 황제헌원, 염제신농과 더불어 중국의 역사로 만들어버리려고 꾸미고 있는 판국입니다. 황제헌원이 약70여차례 난을 일으켜서 단한번도 이겨보지 못했습니다. 이 황제헌원은 배달국에서 문물을 배워갔으며 우리민족의 철학인 음양, 오행, 주역의 내용이 중국에서 발전한것입니다. 사실 중국사람들의 처음을 '주'나라로부터 잡아야 됩니다. 그리고 하은주 삼대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은나라자체만해도 중국사람들이 '동이족'이라고 공공연하게 얘기를 합니다. 백색을 숭상했고, 우제점법이 있었고, 갑골문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임해상, 서량지 같은 대만의 역사학자들도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고조선시대를 들겠습니다. BC 2333S년 부터 BC 238년까지 2096년동안 47명의 단군에 의해 고조선의 역사가 동북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삼한중에 지금의 하북성의 당산시. 하얼빈은 진한의 수도, 평양은 마한의 수도, 그리고 당산시는 번한의 수도였습니다. 즉 삼한의 각 중심지를 말한 것입니다. 초대 단국할아버지가 우리민족을 통일하고서 이 진한은 직접통치를 합니다. 다음 마한에는 웅백다라는 사람을 봉해서 초대 부단군을 둡니다. 다음에 번한에는 치우천황의 후손이었던 치두남이라는 사람을 봉해서 부단군을 둡니다. 그런데 흉노에는 그 임금인 선우가 있고, 선우 밑에 좌현왕 우현왕의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부단군제를 계승한것 입니다. 이중에 진한은'인'에 해당하고, 마한이'천', 번한은'지'에 해당합니다. 하나의 나라지만 '삼한관경제'를 썼습니다. 즉 삼한으로 나누어서 국토를 관리했습니다. 다른 역사학자는 철학이 없기때문에 이것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의 단재 신채호 선생만이 이 얘기를 했습니다. 단재가 위대한사람이라는 것은 모두들 공감하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초대단군할아버지에 대해서 전설이나 신화를 하는사람들이 많아서 구체적 이야기를 들겠습니다. 초대 단군 할아버지는 BC 2370년 5월 2일날 인시에 태어나십니다. 그리고 88살 되던 해에 강화도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고, 91세 되시던 해에 직접 거기에 가서 천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104세 되시던 해에, 부루, 부소, 부우, 부여 이렇게 네분의 아들중에, 맏아들인 부루태자를 절강성 회계산에 보내서 우에게 '오행치수'의 방법을 전수해 줘서 중국 9년의 홍수를 다스리게 합니다. 물론 기록이 있습니다. '오월춘추'에 나옵니다. '오월춘추'에 창수사자가 와서 직접 오행치수법을 전해 줬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13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뒤에 맏아들 부루태자가 2대 단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부싯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단군할아버지의 아들인 부소입니다. 그래서 그것을'부소돌'인데 '부싯돌'이라고 바뀌게 된것입니다.
다음은 북부여 입니다. 이제 환국, 배달국, 고조선시대가 지나고 열국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북부여부터 열국시대로 들어가는데 북부여는 BC 239년 '해모수'라는 분이 건국을 합니다. 해모수를 신화의 인물로 알고 있는데 실제의 인물입니다. BC 195년까지 통치를 하는데, 진시황과 동시대이죠. 그런데 만리장성을 진시황이 쌍았습니다. 그럼 만리장성을 누구를 막기위해서 쌓았을까요. 북부여를 막기위해서입니다.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뜻은 만리장성의 바깥쪽은 자기네 땅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 바깥에 있는민족이 북부여 입니다. 북부여에 대한 설명이 좀 빈약하여서 더 수정하여 더 추가 합니다.
다른 곳 에서 발춰한 내용입니다.
모수리(慕漱離)는 북부여 제2대 단군으로 환단고기 중에 <북부여기>에 있습니다. 재위 년수는 25년이고요.
북부여기에 나오는 모수리 관련 항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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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수리 원년 정미(丁未:BC 194)년, 번조선 왕은 오랫 동 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은덕을 베풀어 백성들이 매우 풍요로웠다. 그러나 후에 떠돌이 도적떼에게 패망하여 바다로 도망가 돌아 오지 않으므로, 모든 오가(五加)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卓)을 받들어, 많은 무리들과 함께 길을 떠나, 곧 바로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月支)는 탁(卓)이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르켜 중마한(中馬韓)이라 하였다. 이때에 변한(弁韓)과 진한(辰韓)도 역시 각각 그 무리들과 같이, 자기들이 받았던 땅중에 백리(百里)를 봉(封)하여 도읍(都邑)을 세우고, 스스로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馬韓)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모수리 2년 무신(戊申:BC 193)년 황제가 상장(上將) 연타발(延 勃)을 보내어, 평양에 성(城)을 둘러싸는 목책(木柵)을 만들어, 도적떼인 위만(衛滿)의 무리를 방비(防備)하게 하였다. 위만(衛滿) 또한 고통을 싫어하여, 다시는 소요(騷擾)를 일으키며 침범하지 않았다.
모수리 3년 기유(己酉:BC 192)년에 해성(海城)을 평양도(平壤道)에 속하게 하여, 황제의 동생 고진(高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에 중부여(中夫餘) 일대가 모두 복종하며, 양곡을 세금으로 바쳤다. 겨울 10월에 경향분수지법(京鄕分守之法)을 만들어, 수도(首都)는 황제가 친히 수비(守備)를 총 관할하고,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하니, 마치 윷놀이에서 용도(龍圖:말판)에서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흡사하였다.
모수리 25년 신미(辛未:BC 107)년에 황제가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고해사(高奚斯)가 즉위하였다.
이상이 추가 내용입니다.
다음은 고주몽 성제의 고구려 건국입니다. 북부여는 BC 297년에서 BC 58년까지 6명의 단군이 통치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섯번째 단군이 고무서 단군인데요, 고무서 단군이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딸이있었는데 그 딸은 '소서노'라는 딸입니다. 그 소저노와 결혼한 사람이 바로 고주몽성제입니다. 그래서 이 북부여의 적통을 이어 고구려가 건국이 됩니다. 고주몽성제는 북부여를 계승해 오다가 BC 37년 '고구려' 라고 국호를 바꿉니다. 이때 '평락'이라는 연호를 쓰게 되구요. 최초에는 다물이라는 연호를 쓰게 됩니다. 다물은 순수한 우리말로 '되물리자'또는 '되찾자' , '고조선시대 때 우리 나라 본래의 이 만주와 몽고와 저 중국의 모든 영토를 되찾자.' 이런 사상이 '다물'이라는 뜻입니다. 고구려가 북벌정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다들 알고계실겁니다. 다들 고구려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이정도만 적습니다.
다음은 대진국을 통해서 국통이 전개가 됩니다. 통일신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고 대진국 즉 발해로 전개됩니다. 왜 통일신라가 아니냐면 우리 민족의 남쪽영토만을 차지하고 있었던 신라가 우리의 국통을 계승할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진국은 실제 그들의 문화나 종교 풍습등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역사의 정통을 잇고 있습니다. 또 대진국은 과거의 그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구요. 통일신라는 한반도의 3분의 2를 차지하고있었을 뿐입니다. 대진국,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서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한사군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한사군이라는 말이 좀 생소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한사군이라는 것은 국사교과서에서 아예 사라져버렸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한사군이라는 것이 한무제가 BC 108년에, 고조선을 쳐들어 가 한사군을 설치하고 AD 313년까지 낙랑군과 대방군이 전속이 되었다는 것인데, 더해보십시오. 즉 421년 동안 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땅에 중국의 식민지가 있었다는것 아닙니까. 중국의 식민지!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중국의 왕조가 5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이때 BC 108년 시대에 전한시대입니다. 전한시대가 AD 8년 왕망이 신나라를 세웁니다. 23년까지 왕망의 신나라가 있었어요. 후한 광무제 유수가 AD 25년에 후한을 건국합니다. 25년부터 220년까지 후한이 전개됩니다. 220년에 조조의 아들 조비가 헌제를 쫓아내고서 삼국의 위나라를 건국합니다. 여러분은 삼국지를 다 읽어보셔서 이 내용은 아리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시대가 263년에 위나라에 촉한이 망하고, 265년에는 사마중달의 손자 사마염이 위나라를 찬탈합니다. 사마염이 찬탈을 하여 진나라를 세우고, 280년에 마지막 남아있던 오나라를 병합하여 삼국을 통일해 버립니다. 그러니 삼국이 지난 다음은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여 존재합니다. 진나라 때까지 중국은 전한, 왕망의 신나라, 후한, 삼국, 진나라까지 왕조가 다섯개나 변천하는데, 어떻게 평양에는 식민지가 421년 동안 지속됩니까? 말도안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기' '조선열전'에 나와서 왜곡이 되었습니다 또'삼국사기'는 우리민족의 주체적인 입장에서 쓰여졌다고 보지 않을것입니다. 삼국사기는 철저하게 김부식(1075~1151, 고려문종 29~의종 5)이 중국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쓴 역사책입니다. 그런데 김부식의 혈통을 보면 김부식의 이름 속에 이미 사대주의가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부식이 셋째 아들인데, 김부식의 아버지가 김근이라는 사람입니다. 김근이 중국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가, 중국에는 소식, 소동파, 동생인 소철, 이들이 유명하니까, 자기 셋째 아들의 이름을 소식에서 '식' 자를 따서 김부식이 라고 지었습니다. 소식의 식자를 딴것입니다. 그리고 넷째 아들은 소철의 철자를 따서 김부철이라고 지었습니다. 사대주의 정신이 자기 아버지부터 나온것입니다. 여러분도알다시피 부식은 우리나라의 국풍파를 없애버리는 데 앞장 선 사람입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데 나갑니다. 그리고 나서는 삼국사기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역대의 모든 사서를 전부참고해 가지고 책을 쓰게 됩니다.
. 지금의 역사학자늘은 '조선인의 자치 사국'으로 봅니다. 이것만봐도 역사학자들이 엉터리인것을 알수있습니다. 그래서 국사교과서에서도 한사군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나라는 서양과 일본 중국 심지어 우리나라의 역사 학자들에게 까지 왜곡을 당하고있습니다.
그리고 따로 대륙백제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이것은 인터넷<치우> '지도로 보는 한국'에서 발췌한것입니다.
'남제서'권 58의 '백제전'에는 북위의 군대와 백제와의 전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엔 '동성왕(백제24대왕, 479~501) 10년에 북위가 파병하고 침범해 왔으나 백제에 의해 패퇴되었다'고 하였으며, '자치통감'에서도 '영명 6년(448)에 북위의 군대가 백제를 쳤으나 패퇴되었다'고 하였다. 종래엔 이 기록들을 한반도의 백제와 중국 산서성 대동에 도읍한 북위국과 전쟁기사로 오인하여 착각해 온 것이 통례였다. ㄱ러나 이는 반도사관에 따른 해독 때문이다. 여기의 백제는 반도의 백제가 아니라 대륙의 백제인 것이다. 당시 동성왕은 산동반도의 백제 서경인 불기(거발성)에 도읍하여, 가까운 곳은 공격하고 먼 곳은 화친한다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 당시 북위는 중국 남북조시데에 양자강 북쪽에 위치한 왕조로서 양자강 이남의 남조인 송.제.양.진 등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에 북위와의 무력충돌이 불가피했으며 멀리서 화친관계에 있는 남제의 왕에게 동성왕의 인사명령의 내용을 국서로서 통고한것이 '남제서' '백제전'의 내용인 것이다.
이와같이 대륙백제는 중국사가 증명합니다.
이와같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입니다. 이런글을 보고 혹시 식민사관이나 사대주의 사관에 빠진 사람들이 보면은 이것은 엉터리다고 말하는 사람이 혹 있을수있을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역사의 본질을 진실로서 밝혀내야 합니다. 중국과 일본은 기를쓰고서라도 자국의 위상을 높이려고 다른나라의 역사까지 편입하려고 하는데 우리나라사람은 우리나라의 역사마저도 모르니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서양의 다른 모든나라에서는 대부분 인정하는 것을 우리나라만이 인정하지 않고있죠.
첫댓글솔직히 환국이라는 나라는 좀 구라고요 설령 있었다고 해도 환국이 있었다는 위치도 그렇고 우리나라가 환국의 후예라는 근거는 없거든요 어쨋든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한손에 드는 민족이지만...너무 개인적인 성향이 크기 때문에 =-=a 이 성향을 곤치지 않으면 중국에게 먹힐지도 모름 =-=a
나라 국자를 쓰지만 지금과 같은 나라 개념은 아닐것입니다. 하지만 사료에 남아있다는 것은 어느정도는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이야 많은 사료들이 소실되어서 없지만 지금보다 예전에는 더 많은 고대사를 밝힐수 있는 자료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위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근거또한 없다고 봅니다.
지금에 와서 고대사를 완전히 밝히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사료가 많이 없고 또 우리민족이 활동했던 지역이 지금은 우리땅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또 타 민족에 의해 없어진 부분도 많고요 그저 저의 바램이라면 이쁜 맘으로 고대사에 대해 생각해 주십사는 마음 뿐입니다. *^^* 좋은 시간 되세요 ^^
한단고기...약간의 무리가 있지요...가령 환국의 12지파에는 수밀이 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게 수메르다...성경의 12지파와 한단고기의 환국의 12지파의 연관성...머 사실이야 과거로 가보지 않는 이상에야 알 수 없지만 증거없는 또는 빈약한 (자신들에 유리한) 증거만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긍정보다 ..부정을 앞세울 필요는 없지요. 역사는 역사일 뿐... 공부란..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일 거구요... 우리의 역사이건 아니건..호기심은 갑니다. 알고 싶네요. 중국이나 일본처럼...우리도 어거지 쓰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 글 잘 읽었습니다..
고조선과 한국 민족과의 관계도 확증적으로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다. 고조선은 러시아, 중국, 한국에서 지대한 관심을 갖는 아주 매력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축적된 연구성과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조선이 한국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 또한 무시못할 정도로 지지를 받는다고 하지요.
흠...글쎄요...조금 유리한 증거만을 찾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단재의 위대함은 공감하는 것이지만, 한단고기는 위서로 찍혀있죠, 그것이 위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고, 그것은 그것을 위해서라도 연구되어야 하겠지만요. 확실히 위서이면 재론의 여지를 소멸시키고, 위서가 아니라면 연구되어야 하므로...그러나
환국,배달국이 존재했다 하지않았다가 중요한게 아니고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볼수있는건 실제 역사가 아닌 그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생각이라는걸 숙지하시고 바라보시는게 어떨지요. 모든걸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무조껀 거짓이라 배척하지 마시고, 자신이 그당시에 살았다고 생각하고 보시는게..
역사에도 여러가지 가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대부분 실증주의 사학에 기초한 교육을 받아서 증거할수 없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고 치부하는데 그것은 역사학자로서 대단히 무책임하고 게으른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설에 근거해 하나하나 증거를 찾아가며 역사의 빈 공백을 메워가는
가령 황룡사9층탑이 있었지만 외적의 침입에 의하여 불타 없어졌고 이것은 어떤 역사서에 그 내용이 실려서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렇다면 9층탑 자체는 없어졌는데 과연 그 역사서만 믿고 그것이 존재했다고 믿어야 할까요..? 아님 9층탑의 내용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9층탑의 존재는 원래 없었던걸까요..?
언젠가 일요스페셜에서 중국의 옛고구려 영토의 성이 그곳 주민들애개 환인성이라고 불려진다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입니다. 승리자는 패배자의 모든 기록과 건물과 심지어는 인간까지도 off시킬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승리자는 이렇게 말하죠...너희들 증명할수 있는 역사를 내놔봐...
'가을이 내안' 님의 주장에 적극 동의합니다.고대사로 갈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료는 극히 일부이기에 우리로서는 밝혀지지 않은 나머지 퍼즐 조각을 가지고 끊임없이 추측하여 미루어 맞추어 볼수밖에 없었습니다.고대사 선사로 올라갈수록 현재에 우리에게 전해지는 史실은 제한적일수밖에 없습니다
첫댓글 솔직히 환국이라는 나라는 좀 구라고요 설령 있었다고 해도 환국이 있었다는 위치도 그렇고 우리나라가 환국의 후예라는 근거는 없거든요 어쨋든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한손에 드는 민족이지만...너무 개인적인 성향이 크기 때문에 =-=a 이 성향을 곤치지 않으면 중국에게 먹힐지도 모름 =-=a
그 환국은 실제로는 더 오래 되었답니다. 하지만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고 인류 모두의 것이죠. 그러니 이런 소설쓰면서 민족정기의 부활을 위해 애쓰실 필요는 없답니다.
이런 사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부족하여 그에 대해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이런식으로 억지스럽게 민족주의 쪽으로 몰아가는건 그렇게 이롭지 않은 일인듯..
나라 국자를 쓰지만 지금과 같은 나라 개념은 아닐것입니다. 하지만 사료에 남아있다는 것은 어느정도는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이야 많은 사료들이 소실되어서 없지만 지금보다 예전에는 더 많은 고대사를 밝힐수 있는 자료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위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근거또한 없다고 봅니다.
서로가 입장이 틀리고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틀려서 주장이 맞서는 것인데 어느 한쪽도 본인들의 주장에 확실한 근거를 제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위의 사실을 완전히 무시할필요는 없다고 보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위의 글에 많은부분 동감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서 고대사를 완전히 밝히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사료가 많이 없고 또 우리민족이 활동했던 지역이 지금은 우리땅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또 타 민족에 의해 없어진 부분도 많고요 그저 저의 바램이라면 이쁜 맘으로 고대사에 대해 생각해 주십사는 마음 뿐입니다. *^^* 좋은 시간 되세요 ^^
있을거라고 추정해도 증거가 없으면 부정하는게 역사입니다. 증거가 없으면서 너희도 없잖니 그러니 말하지마 라는 식으로 하면 역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한단고기 읽어보았는데. 근 만년에 가까운 우리나라가 언제 4천몇백년의 나라로 줄어들었는지..
한단고기...약간의 무리가 있지요...가령 환국의 12지파에는 수밀이 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게 수메르다...성경의 12지파와 한단고기의 환국의 12지파의 연관성...머 사실이야 과거로 가보지 않는 이상에야 알 수 없지만 증거없는 또는 빈약한 (자신들에 유리한) 증거만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긍정보다 ..부정을 앞세울 필요는 없지요. 역사는 역사일 뿐... 공부란..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일 거구요... 우리의 역사이건 아니건..호기심은 갑니다. 알고 싶네요. 중국이나 일본처럼...우리도 어거지 쓰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 글 잘 읽었습니다..
고조선과 한국 민족과의 관계도 확증적으로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다. 고조선은 러시아, 중국, 한국에서 지대한 관심을 갖는 아주 매력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축적된 연구성과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조선이 한국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 또한 무시못할 정도로 지지를 받는다고 하지요.
만년이라..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신석기시대에 나라를 세웠다는겁니까? 우리나라는 지지리도 못났다는 말보다는 좋지만. 그래도. 믿을만한소리를 해야믿죠.
좋은 글입니다. 근데 좀 띄엄띄엄 써주셨으면^^
흠...글쎄요...조금 유리한 증거만을 찾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단재의 위대함은 공감하는 것이지만, 한단고기는 위서로 찍혀있죠, 그것이 위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고, 그것은 그것을 위해서라도 연구되어야 하겠지만요. 확실히 위서이면 재론의 여지를 소멸시키고, 위서가 아니라면 연구되어야 하므로...그러나
한단고기에서 끌어온 내용으로는 조금 무리가 있겠죠...대륙백제라...그쪽도 좀 더 연구가 되어봐야겠지요?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글을 잘 읽었습니다.
대륙백제는 사실이라고 하던데. 대륙백제가 있지 않고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환단고기는 좀 ㅡㅡ; 어디서는 그때까지 내려온 얘기를 19세기에 글로 남긴거라서 좀 위작스러워 보이는 거라고 하던데, 제가 보기엔 좀..;;
주장하는 바도 한단고기. 논거도 한단고기. 다시 주장하는 바도 한단고기...논증도 한단고기..글 자체로만 바라본다면. 훌륭하지만, 지극한 순환논리의 오류라는 말 이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군요. 물론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서 편중된 시각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죠.
환국,배달국이 존재했다 하지않았다가 중요한게 아니고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볼수있는건 실제 역사가 아닌 그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생각이라는걸 숙지하시고 바라보시는게 어떨지요. 모든걸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무조껀 거짓이라 배척하지 마시고, 자신이 그당시에 살았다고 생각하고 보시는게..
역사에도 여러가지 가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대부분 실증주의 사학에 기초한 교육을 받아서 증거할수 없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고 치부하는데 그것은 역사학자로서 대단히 무책임하고 게으른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설에 근거해 하나하나 증거를 찾아가며 역사의 빈 공백을 메워가는
역사학자를 보구 싶네요~ 예전에 전설로만 전해지던 폼페이도 화산재속에서 발굴되었듯이 말이죠
이시대가 곧 증명해줄날이있겠죠..??
증명할게 있어야 역사가 됩니다. 증거가 없으면 역사라고 할 수 없을뿐입니다. 가설은 증명받을 려면 증거를 내세워야 하는데 증거도 없이 가설을 맞다고 우기는것은 매우 잘못된 태도입니다.
역사는 수학이나 과학처럼 답이 딱 떨어져셔 증명= 과학의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개연성과 더 가깝고, 특히 고대사일수록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실이라고 하는것도 완벽한 사실이라기 보다는 "정설"이라고 표현하는것이 맞을듯 합니다.
가령 황룡사9층탑이 있었지만 외적의 침입에 의하여 불타 없어졌고 이것은 어떤 역사서에 그 내용이 실려서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렇다면 9층탑 자체는 없어졌는데 과연 그 역사서만 믿고 그것이 존재했다고 믿어야 할까요..? 아님 9층탑의 내용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9층탑의 존재는 원래 없었던걸까요..?
언젠가 일요스페셜에서 중국의 옛고구려 영토의 성이 그곳 주민들애개 환인성이라고 불려진다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입니다. 승리자는 패배자의 모든 기록과 건물과 심지어는 인간까지도 off시킬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승리자는 이렇게 말하죠...너희들 증명할수 있는 역사를 내놔봐...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역사가 아니야" 이것이 19세기 제국주의 첨병역할을 했던 실증주의사학의 실체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것은 " 고대사 " 그것은 얼마든지 열린 가능성이지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일수 없다" 라고 "단정"지을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가을이 내안' 님의 주장에 적극 동의합니다.고대사로 갈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료는 극히 일부이기에 우리로서는 밝혀지지 않은 나머지 퍼즐 조각을 가지고 끊임없이 추측하여 미루어 맞추어 볼수밖에 없었습니다.고대사 선사로 올라갈수록 현재에 우리에게 전해지는 史실은 제한적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환단고기 같은 대하소설을 역사로 보는 것은 지양해야 됩니다만...
그렇다면 소설이 아닌역사는 없지 않나요 ^^
정말요...?a 제 주위사람들은 모두 잘못 안건가;a 댓글 다 읽기 귀찮아서 패스했는데;
우리나가 고인돌이 세계에서알아주게많다는것을알아주시길.
고인돌이 제일 큰 것이 97t에 가까운 것인데... 이것을 끌려면 과연 몇 명의 사람이 필요했을까요? 그만큼 당시 한국은...이미 거대한 무리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거죠. 한국 역사..무시할 것만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