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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풍동인은 비틀거리며 힘겹게 걸음을 한발짝씩 옮겨 놓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당문을 나선 것이 해시(亥時) 무
렵, 만물이 고요한 잠에 빠졌을 시각이었다. 당운담의 서슬이
하도 시퍼렇던지라 몸이 불편한 아내한테도 먼 길을 다녀온다
는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격이라니.
첫 번째로 검을 들이댄 자는 모두 세 명이었다. 검은색 경장에
검은 복면으로 진면목을 숨겼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예
리한 살광(殺光)만 빛냈다.
사천 산길이 워낙 험준하기에 녹림도로 착각하고 곱게 타일렀
다. 그러나 그들이 검을 떨쳤을때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았다.
일 대 일의 승부라면 충분한 승산이 있을것 같았다. 그러나 상
대는 세 명,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은 독술에도 능수능란했다.
간신히 한명을 중독시키고 몸을 빼는 데는 성공했지만 등줄기
에 길다란 검상을 입어야했다.
그로부터 무려 열다섯 번의 공격.
경각심을 일깨워 은밀히 이동도 해보았고, 변장도 했지만 귀신
같은 그들의 이목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당문에서는 내
로라 하는 솜씨임에도 그들은 자신의 검로(劍路)를 익히 알고
대처해 왔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암습 초반에 상대의
무공을 파악한 까닭이었다. 아! 놀랍게도 상대 역시 당문의 무
공을 전개했다.
환격검법, 당문의 독술, 당문의 독, 바로 당문 사람들이었다.
이게 무슨 경우인가? 당문사람이 당문도를 치다니...
현실은 냉엄했다.
사리를 따지기에 앞서 우선 살아야했다.
풍동인에게는 독제실에서 연마한 독술과 남들보다 조금은 더
강력한 맹독이 있는 반면에 당철휘가 그랬던 것처럼 실전에 대
한 감각이 부족했다. 상대는 반대였다. 거의 독에 의존하지 않
고 암기와 검공을 사용했다.
'중위대나 후위대겠지.'
당철휘와 당자인, 당동한이 당문주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
해 암투를 벌인다는 것은 사천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었다. 조금과장 한다면...당문내에서는 쉬쉬하면서 말들을 안
할 뿐이지 서로 옷깃만 스쳐도 으르렁거릴 정도로 파벌 간에
알력이 심했다.
만약 내가 당문에 등을 돌린다면...하는 질문도 그런 의미로
받아 들였다.
그런데 이건 사태가 의외로 심각했다.
'크윽! 내가 살수 있는 길은 빨리 부대주를 만나는 것뿐...'
풍동인은 아침 안개가 자욱이 깔린 너머를 예의 주시하며 힘겹
게 나아갔다. 한 손으로 복부를 움켜잡아 선혈이 흘러내림을
막았지만 발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의 양은 적지 않았다.
'환격검법의 요체를 완벽히 깨달은 놈이었어.'
자신의 배를 가르고 지나간 검의 주인공. 적어도 부대주급 이
상의 실력을 지닌 자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중위대와
후위대에서는 그만한 인물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제길! 또 걸렸다.'
믿을수 없는 현실이 다시 발생했다.
장강에서 올라온 축축한 습기는 세상을 뿌옇게 흐려 놓았다.
찰싹찰싹 때리는 물결 소리가 한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장강
까지 왔으니 더 이상 추적은 없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희미한 안개 너머에 보이는 그림자 셋은 암습자가 분명
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정확히 찾아오는가? 십 리 밖의 들쥐도 식
별한다는 매의 눈이라도 가졌단 말인가?
'눈! 눈이다. 제길! 후위대였군.'
이제는 상대를 명확히 알았다. 후위대 사람들이기에 정체를 파
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들과 독제실과는 연관이 거의 없
는 탓에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취봉밀(聚峰蜜).
독제실에서 만들어 주고도 잊고 있었다니 복부가 갈라질 만했
다. 한때 동물의 습성을 연구하면 희귀한 독이 만들어지지 않
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일부일처(一夫一妻)를 고수하는 동물들은 주요 연
구 대상이었다. 특히 까마귀, 비둘가 원앙 등은 반려자가 죽어
도 다른 짝을 찾지 않는다. 왜 그럴까?
결국 원인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연구과정에서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당장 실용화시켜도 무방할 만큼 완벽
했다.
동물들은 발정기가 다가오면 생식선에서 독특한 물질을 흘려
낸다. 그 냄새는 십 리 이상 풍기는 것도 있으며, 유독 같은
종류의 동물만이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
당문에서 손댄 것은 쌍살벌이었다.
벌은 다른 벌레의 체내 또는 체외에 산란하기 때문에 진화시키
기가 용이했다. 특히 사냥벌들은 독방을 가지고 있어 공격용으
로 활용하기에도 순조로웠다.
하늘소의 생식기에 방향성이 높은 용연향(龍延香)을 투여했다.
하늘소가 낳은 유충은 쌍살벌에게 공급되었고 쌍살벌들의 교감
능력은 날이 갈수록 탁월해졌다. 문제는 영양 상태가 부실하여
작고 미발달된 벌들이 나온다는 것. 그것은 딱히 문제랄 것도
없었다. 공격용, 추적용으로 활용하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으
니까.
쌍살벌에서 채취한 꿀을 취봉밀이라 불렀고, 바로 후위대에 공
급되어 추적 능력을 탁월하게 만들었다.
풍동인은 겉옷을 벗어 구석구석 냄새를 맡아보았다.
역시 취봉밀의 냄새가 풍겨 나왔다. 이렇게 대문을 활짝 열고
다녔으니 도둑이 왜 안들겠는가.
'망설이면 죽는다.'
당철휘에게 전해 줄 병기와 절정 독에 물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가죽주머니 입구를 단단히 여며 맺다. 물과 불에 대한 대비는
당문처럼 완벽한 곳이 없으리라. 그러니까 백년 전 칠가를 귀
속시키는 위업을 달성했겠지.
휘익!
풍동인은 먹이를 발견한 솔개처럼 덮쳐 오는 삼인을 뒤로하고
장강으로 뛰어들었다.
* * *
"풍동인이 나섰습니다. 모두 열 여섯 번의 공격을 했고 적당히
놓아 주었습니다."
작은 바위를 연상시키는 당잠청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대회
의청에서 격앙된 어조로 말하던 것에 비한다면 이상한 일이었
다.
"후위대주가 한일이니 실수는 없었으리라 믿네."
"실수는 없었습니다. 후위대가 공격한다는 것을 알게 해줬고,
당문을 나서자마자 공격했으니 목적을 알고 있다는 것도 암시
해 줬습니다. 풍동인은 고지식하지만 머리는 뛰어난 인재입니
다. 그 정도로도 충분할 겁니다."
"수고했네."
"저...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송구하지만...풍동인이 돌아온
다음의 일은..."
"허허허! 독제실장과 부딪칠 것이 염려되는가? 걱정 말게. 풍
동인은 살아 돌아오지 못해."
당기룡은 책에서 눈길을 떼고 호롱불의 심지를 돋꿨다.
"독제실장과 당철휘 사이에 오가는 전서는 모두 선별 처리되니
까 너무 염려 말게. 그것보다 자식의 일이 염려되지 않는가?
당철휘는 당뇌전과 비폭정 그리고 십미패독, 황련독산을 지녔
네. 그는 독오른 독사야. 자칫하면 자인이에게 하독할지도 몰
라."
"그렇게 죽어 갈 자식이라면 없느니만 못합니다."
당기룡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인이가 자네만 같으면 문제없을 텐데. 성격은 많이 고쳤던
가?"
"무인이 되는 중입니다. 허물을 완벽히 벗고 날개를 펼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허허허! 자네는 참 독한 사람이야."
서로간의 말이 끊기고 잠시 동안 호롱불 타들어 가는 소리만
치직거렸다.
"한연지는 자인이를 찾아냈는가?"
"똑똑한 여자입니다. 단비하를 찾으라고 약재상을 빌려 줬더니
자인이를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단 나흘만에..."
"그래! 추리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지. 조심하게. 당랑(螳螂)은
수컷이 잡아먹히는 세계야."
"자인이는 당랑이 아닙니다. 만족할 겁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는 것은 좋지 않아."
"빼앗으려면 철저히 빼앗아야지요. 후한이 남을 만한 여운을
남겨서야 되겠습니까?"
"허허허...!"
당기룡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가졌다. 단점만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장점만 보다가는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었다.
당기룡은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인간이 없다는데 고민했
다.
'영지...네놈은 너무 일찍 죽었어.'
생각할수록 아까운 놈. 거대 문파를 충분히 이끌어 갈 만한 놈
이었는데 , 혈반사접을 너무 경시한 것이 실수였다. 그 때문
에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벌여야 했다. 당문을 키우는 것 못
지않게 중요한 일, 차기 문주를 양성하는 일...
당영지가 있었을 때는 후계자 간의 서열이 명확했다. 차기 문
주에 대한 욕심은 냈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
던 것이 하루 아침에 변하고 말았다. 사실 그들보다는 당문을
위해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다는 당문 십절이 더욱 극
성이었다.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다음 문주로 누가 등극하느냐
에 따라 실질적인 이인자의 권력을 누릴 수 있을테니까.
당기룡은 심신이 노곤해졌다.
"쉬어야겠네. 당철휘와 한연지에게서 눈을떼지 말게."
읽던 책을 덮으면서 힘없이 흘러나온 말이었다.
* * *
단비하는 혼미한 의식에서 깨어나 잠시 주위에 귀를 기울였다.
칠은방의 방도들은 모두 물러난 모양으로 주위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응?"
몸을 일으키던 단비하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인을 보고 의
외란 표정을 지었다. 저들에게 복용시킨 섬백단은 세 알 아무
리 내공이 지고한 고수일지라도 사흘은 의식을 잃어야 옳았다.
자신은 두 알을 먹었다.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검
공을 시전하는 데 지장이 없으니 어느 정도는 갖줬다 할 수 있
고 독에 길들여진 몸이니 하루 반정도 긴 잠을 잔다고 생각하
며 복용했다.
이들이 자신보다 먼저 깨어나는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깨어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줄이야. 내공이 상상
이상으로 고강하다는 뜻. 내공만으로 따진다면 자신이 가장 약
한셈이다.
"귀공은 늦잠을 자는구먼."
중년무인은 밝은 웃음으로 대했다.
"칠은방 놈들은 산정으로 몰려갔소. 아마 그대로 포위망을 압
축하면 우리가 걸려들 걸로 생각하는 모양이오. 하하하!"
청년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너털웃음을 홀렸다. 하기는 꼼짝없
이 죽을줄 알았다가 살아났으니.
"방금 산정으로 몰려갔다고 했소?"
단비하는 굳어 있는 관절을 풀면서 청년을 바라봤다. 보면 볼
수록 잘생긴 청년이었다. 당문에서 얼굴만으로 제일을 꼽으라
면 단연 당철휘였다. 천상 공자처럼 잘생겼으니까, 당자인도
계집애처럼 곱살했지만 아무래도 사내다운 기풍까지 겸한 당철
휘가 한결 나았다.
이 청년은 당철휘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유신장이 확인하고 왔다네."
단비하는 유신장이 누구냐는 뜻을 눈에 담았다.
"아, 우리 서로 통성명(通姓名)도 없었군. 나는 사망산검 이철
진이라고 하네. 이 아이들은 내 자식들이네."
"형장, 이군무라 하오."
이군무는 사람좋게 웃으며 포권지례(包拳之禮)를 취했다.
"이경화라고 해요."
이경화는 부끄러운 듯 살짝 볼우물을 지었다. 입가에 움푹 패
이는 보조개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수더분하지만 보면 볼수
록 정감을 느끼게 하는 용모였다.
"나는 귀의신장 유청이라고 하네. 이 대협의 노복이지."
유청 역시 가볍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허허허! 본인 스스로 노복이라 자칭한다네. 그는 바로 내 의
제(義弟)일세. 본인이 하도 우겨서 성씨와 명호를 따 유신장
(柳神掌)이라고 부르고 있지."
"단비하라고 불러 주시오."
단비하는 내키지 않는 듯 사위를 유심히 관찰하며 말했다.
순간 이철진의 눈에서 다시 형형한 안광이 발산되었다. 자신의
명호를 듣고도 이토록 태연한 사람을 일찍이 보지 못한 까닭이
었다.
"내력을 얼마나 발휘할 수 있소?"
단비하는 아무것도 없는 산속을 예의 관찰하며 고개를 돌리지
도 않은채 물었다.
"허허허! 내력이랄 것도 없네. 겨우 일 성 가량 회복했을
뿐..."
이철진은 하던 말을 중단하고 단비하가 건네 주는 부자뿌리를
받아 들었다.
"이건...?"
"보다시피 부자 뿌리요. 시중에 나가면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여기 토질이 아주 좋아 최상품을 구할 수 있었소. 이걸 복용하
면 보름이면 원기가 회복될 것이오."
"부자를? 부자는 잘못 복용하면 안된다던데...?"
단비하는 조심스럽게 가시나무를 헤치면서 앞으로 전진했다.
복용하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태도였다.
"허허허....!"
이철진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동시에 유청과 이군무
의 눈에서 노여움이 치솟는 것을 감지했다. 하지만 이경화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일렁이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쉬익!
"커억!"
단비하는 조독기를 발사함과 동시에 신법 비(飛)를 펼쳤다.
뒤를 따르는 네 사람은 두 가지 의미에서 눈을 휘둥그렇게 떠
야만했다.
첫째는 산정으로 올라간 인원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점. 애초
계획대로 섬백단에서 깨어나지 않은 단비하를 들쳐 엎고 하산
했다면 큰낭패를 당할뻔했다.
내공이 강해서 섬백단의 약효가 일찍 풀렸지만 산밑에 있는 칠
은방 방도를 상대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사실 이 정도로 운신
할 수 있는 것만도 단비하의 예측에서 훨씬 벗어난,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둘째는 단비하의 놀라운 신위.
의독에 관한 지식이 풍부한 줄은 알았지만 칠은방도들을 소리
소문없이 잠재울 줄은 몰랐다. 오죽하면 이철진이 '성씨가 당
씨라면 꼼짝없이 당문 사람으로 오인하겠구먼' 하는 탄성을 자
아낼 정도였다.
더욱이 그가 펼친 신법은 자신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
다. 희한한 일이 아닌가. 내공이 약하면서도 정교한 신법을 발
휘할 수 있다니. 이런 현상은 권각술에 치중한 외공(外工)을
익힌 사람들에게서 종종 발생했다. 그렇다고 단비하가 외공을
익힌 흔적은 전혀 없었다.
"참, 재미있는 물건이네요. 그걸 뭐라고 부르죠?"
이경화는 흥미로운 눈길로 바짝 옆으로 다가섰다. 일순 여인만
의 독특한 방향이 더운 바람결에 뭉클 묻어 나왔다.
"쉿!"
단비하는 급히 이경화의 입을 막고 조독기에 풍멸환을 채워 넣
었다.
'다량의 독을 한통에 집어넣고 분량을 조절하여 사용한다
면...'
조독기의 결함이 느껴졌다. 암기실 천수나천은 신의 손을 가진
사람, 왜 이런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한 번 발사
하고 다시 장전하는 것보다 여러 번 사용하게 만들었다면 훨씬
유용할텐데.
"이거 정말 지겨워 즉겠군. 아니, 독에 중독된 놈들이 하늘로
사라졌어, 땅으로 꺼졌어!"
"글쎄 말이야. 기가 막힌 것은 오히려 그놈들이 독을 풀었다는
것 아닌가. 덕분에 제일진에서는 사망자가 여섯 명이나 나왔다
는군그래."
"여섯 명?"
"옆에서 지켜본 사람 말로는 눈뜨고 볼수없는 지경이었다네,
거의 이틀 동안 고통에 몸부림 치다가 죽어 갔다는데?"
"에잉! 차라리 일찍 죽는 게 나을 뻔했군 그래."
밤새 우는 소리만 고즈넉한 정적 속에서 조용히 두런거리는 소
리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쉬익!
"컥! 크윽!"
방금까지 아무 근심 없이 말을 주고받던 두 방도는 짧은 단말
마의 비명을 토해 내며 목을 움켜쥐고 길게 드러누웠다.
'여섯 명이 죽었군. 무지한 놈들...'
독이 잔뜩 깔린 곳에 내버려두었으니 성할 리가 있을까. 일찍
끄집어 냈다면 다섯 시진 정도 혼절한 다음 아무 일 없이 툭툭
털고 일어났을 텐데...
"어쩜! 이게 무슨 독이에요?"
이경화는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다가들며 감탄을 드러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독에 대한 상식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지독한 독일지라도 중독되는 순간 바로 쓰러진다는 말
은 금시초문이었다.
"풍멸환이라는 독이오."
순간 만면에 미소를 띠우며 다가오던 이철진의 안색이 급격히
경직 되었다.
"귀공, 풍멸환이라 했나?"
이번에는 단비하가 놀랄 차례였다.
"풍멸환을 아시오?"
"풍멸환은 만우당의 독인데 어찌 귀공이 가지고 있나?"
이철진뿐이 아니었다. 노복이라 자칭한 유청과 여태껏 호의를
보이던 이군무, 이경화 역시 안면에 노기를 띠운채 은근히 공
력을 일으켰다.
"만우당과 연관이 있소?"
"만우당주 남궁백은 본인의 의제되는 사람이네. 만우당이 쇠락
하고 난 후, 남궁백은 풍멸환의 재현에 온신경을 다 쏟았지.
얼마전 전서구를 보내 왔네. 풍멸환을 완성했다고..."
이철진은 잠시 말을 그쳤다. 감정이 격앙되는 모양이었다.
만우당주 남궁백과 의형제간이라면 모든 상황이 설명되었다.
잠시 호흡 조절을 하여 마음을 진정시킨 이철진은 계속 말을이
었다.
"하지만 사고현으로 달려가 보니 부패해서 알아볼 수 없는 시
신만 놓여 있었네. 당문의 홍무독과 부시독에 당한 증상이지.
그 와중에서도 철갑조는 없더군. 귀공이 가지고 있나?"
"후후후!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소?"
"상황을 설명해 보게."
어느새 다른 삼 인은 삼 방을 포위한 상태였다. 손은 검을 잡
고 있었으며 언제라도 격출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먼저...지금 상태로는 당신들에게 승산이 없소. 나는 이미 풍
멸환의 모든 것을 알았소. 분량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사실이었다. 칠은방도들을 한순간에 잠재울수 있었던 것도 풍
멸환의 독량을 적절히 조절했기에 가능했다. 풍멸환, 자포독
후란독, 섬백단...품속에 있는 모든 독들의 성분을 연구할대로
연구했다.
"귀공이 죽였는가?"
이철진은 흥분할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아니 갈
수록 침착하고 냉정한 성격으로 변했다.
"죽이지 않았다면 믿겠소?"
"풍멸한이 귀공 수중에 있는 까닭을 밝혀 주게."
"강요하지 마시오. 나에게는 그럴 의무가 없으니까. 당신들 덕
분에 사흘간 지체한 것 만도 큰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오."
단비하는 울화가 치밀었다. 원치 않게 사람을 구해 주고, 당철
휘에게 나 여기 있소, 하고 흔적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만우당 흉수로까지 몰려 합공을 받아야하다니. 참, 개 같은세
상이다.
"휴우! 강요하지 않겠네. 우리들의 무례를 용서하게나."
뜻밖에도 이철진은 순순히 물러났다.
"무슨 의미요?"
"아무 의미도 아닐세. 자네를 믿는다는 이야기네."
단비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철진의 의도를 탐색하는
눈빛. 하지만 곧 존경으로 변해 갔다.
삼면에 위치해 있던 이군무 이경화. 유청도 공력을 풀고 미안
하다는 눈 인사를 보내 왔다. 이들은 진정으로 자신을 믿었다.
"말 한마디로 풀어질 성질이 아닌데 저를 어찌 믿습니까?"
어조가 변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는 그 사실을 몰랐다.
"하하하! 어렵지 않네. 우선 자네 말대로 우리 모두가 연수한
다해도 겨우 동귀어진이나 가능할까? 그런데 자네는 손을쓰지
않았네. 두번째는 저들..."
이철진은 풀숲에 쓰러져 있는 칠은방도를 가리켰다.
"풍멸환은 치명적인 독이네. 아우가 만든 풍멸환에 당했다면
저렇게 아직까지 숨쉬고 있을 수가 없지. 하지만 자네의 독은
진짜 등멸환과 너무 흡사해서..."
"진짜 풍멸환입니다."
단비하는 사고현 만우당에 들른 일부터 자신이 고초를 겪은 일
을 소상하게 설명해 줬다. 그러나 자신이 당문에서 나왔다는
것만은 말하지 않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미리 군침
을 흘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들을 당문과의 싸움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
"그런데 만우당이 왜 쇠락했는지 혹 아십니까?"
단비하는사대 독문을 찾아다닐 때부터 치밀던 궁금증을 물어
봤다.
들어도 좋고 안들어도 좋다는 심산에서...
"만우당은 철갑조와 풍멸환으로 맹위를 떨쳤네. 그러나 풍멸환
의 독성이 너무 강해 제조비법을 당주만 알고 있었지. 그런
데..."
유일하게 풍멸환 제조 비법을 알고 있던 태상당주 남궁전이 실
종 되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누가 감히 욱일승천하는 만우당
을 건드렸을까? 사대 독문이 비슷한 시기에 쇠락한 것을 보면
다른 독문 역시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으리라.
"자 이제 빠져 나가야죠. 경계망을 다섯 겹이나 뚫었으니 앞으
로 한 두군데만 더 뚫으면 안심해도 될 겁니다."
단비하는 옷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이들을 만난 것은 기연이
었다. 덕분에 사대 독문에 대한 의문을 어렴풋이나마 풀었고,
당문주 당기룡이 의도한 바를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저...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남궁 숙부님이 돌아가셔서 비통
한데다가 칠은방놈들에게 암산까지 당한 마당이라..."
이경화는 단비하를 둘러싼 행위 자체를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애써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했다.
"이해할수 있소. 마음에 담지 마시오."
"정말이죠? 정말 이해하시는 거죠?"
못내 의심스러운 듯 이경화는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이내 환한 미소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모습은 누가
보든지 간에 꼭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이철진은 단비하를 따라 일어서다 말고 주춤거렸다. 딸아이의
눈가에 일렁이는 뜨거운 열정, 자신이 젊었을 적에 발했던 눈
빛이었다. 눈빛은 잘못 읽었다 할지라도 아비와 오빠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경망스럽게 행동하던 아이가 아니었다.
"휴우!"
긴 탄식이 가늘게 새어나왔다.
딸아이의 나이가 과년해지면서 심성이 바른 젊은이라면 언제든
지 환영할 마음의 준비가되어 있었고 단비하 정도의 젊은이라
면 사윗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단비하라는 젊은이는 한군데 머물러 있을 사
람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인에게는 기다림과 고뇌만 있을뿐
인 것을...
* * *
당철휘는 만신창이가 되어 나타난 풍동인을 보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어떻게 동문을 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모두
가 원수다. 당문주가 되는 그날까지...
"아버님이 주신 것은?"
"무, 무사히...허억! 가, 가져 왔습니다."
풍동인은 피에 절은 손으로 가죽주머니를 꺼내 건네 주었다.
"다시 한번 말해라. 후위대가 틀림없느냐?"
'트, 틀림...없....허억! 도, 도와줘. 사, 살고 싶..."
풍동인의 동공은 이미 풀려 있었다. 아무래도 오른쪽 가슴에서
아랫배까지 길게 그어진 검상이 치명적이었다.
"후위대 부대주 한연지는 여기 있다. 또 한 명의 부대주 당자
인은 축출당했고...후위대주가 아니라면 너를 이 지경으로 만
들 사람이 별로 없을텐데?"
"사, 살려...줘..."
풍동인은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생명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이놈아! 말을 해야 복수를 해줄 게 아니냐?"
성난 당철휘가 와락 멱살을 부여잡았다. 복수는 틀림없이 해줄
생각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후위대 누가 이토록
가공할 검공을 시전하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커억...!"
풍동인은 그토록 발버둥 친 보람도 없이 고개를 뒤로 꺾었다.
충성스럽게 가죽주머니를 전달했지만...차라리 이렇게 죽은 게
다행이었다. 믿고 있던 당철휘에게 독수를 당했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테니까.
당철휘는 풍동인의 멱살을 놓고 일어섰다.
"한 매. 보았다시피...이제는 태도를 결정해 줘야겠어."
연인에게 속삭이는 음성이 아니었다. 싸늘했고, 정이 담겨 있
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랑보다는 야망이 가치있을 테니 당연한
일. 한연지는 하얀 이를 살며시 드러내고 하얗게 웃었다.
"무슨 태도를 결정하란 말이지요?"
순간, 당철휘의 몸이 핵 돌려지며 푸른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처음 견식하는 검공이지만 자신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빠른
검, 이런 무학을 지녔으면서도 아직까지 숨기고 있었다니...역
시 생각한 대로 효웅 기질이 다분했다.
검날이 사슴처럼 가녀린 목덜미에 겨눠졌다.
"이미 후위대와는 피할수 없는 싸움이 벌어졌다. 자, 선택해
라. 네가 몸담고 있는 후위대냐 아니면 나냐?"
"호호호...!"
한연지는 검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개를 팔딱 젖히며 큰웃음
을 터뜨렸다. 순간 살짝 스쳐 간 검날에 하얀 목덜미가 베어지
며 핏방울이 맺혔다.
"참 유치하군요. 겨우 이것밖에 안되나요? 실망했어요."
한연지는 서슴없이 등을 돌렸다.
"한 매!"
쩌렁한 일갈이 귓전을 때렸다.
"도와 줘."
도와 줘? 한연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몇 번에 걸친 실망
과 좌절은 한 인간을 타락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자인의 소재지
는 진작 파악했고, 그러면서도 두문불출 방안에 있었던 까닭은
당철휘에게 자신을 돌이켜 볼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도와달라.
자신의 능력을 완벽히 파악했다는 결론이 된다. 자신보다 뛰어
난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여인의 육신을 탐내는 평범을 뛰어넘어 진정한 한 팔로 사용하
겠다는 의미다. 그러기에 자존심을 버려 가며 도와 달라는 말
을 할 수 있는 게다.
"호호호! 이제 기초가 잡혔군요."
한연지는 당철휘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도와드리죠. 대가는 세 개의 산을 넘어야해요. 가장 가까운
산은 당자인. 그를 죽이든가, 굴복시켜야 돼요. 두 번째 산은
당동한 그를 치는 것은 당자인보다 배는 힘들 거예요. 지금 문
주에게 가장 신망을 받고 있는 사람은 당동한이죠."
"세 번째는?"
"문주 당기룡."
"문주?"
"당신은 효웅이지 영웅이 아니에요. 효웅은 난세에 제 몫을 다
하죠. 이제 아시겠어요? 제가 당신을 선택한 것은 그런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지금이 난세라..."
"문주는 모종의 일을 추진하고 있어요, 만약 성공한다면 구파
일방의 위명을 단숨에 뛰어넘을 거예요. 그 속에 삼절을 죽이
는 것도 포함되죠."
"으음!"
"어렵게 생각마세요. 제가 차근차근 풀어 드리죠. 그전에..."
쉬익! 찰싹!
옥으로 빚은 듯 고운 옥수가 허공을 가르며 당철휘의 빰을 거
세게 후려쳤다.
"한 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입안이 터져 찝찔한 핏물이 입 안으로
고여들었다. 하지만 제 성질대로 울화를 터뜨릴 수 없었다.
한연지의 서릿발 같은 눈빛, 한을 품어 오뉴월에 서리를 맺히
게 하는 눈을 보았다.
"앞으로는 함부로 검을 휘두르지 마세요. 특히 나에게는..."
"퉤엣! 그러지."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빰까지 얻어맞았는데 전혀
밉지가 않았다. 매섭게 눈을 부릅뜬 모습이 꼭 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얼굴 속에 천하를 격동
시킬 만한 지략이 숨어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황성현에서 단비하를 놓친 일...그대의 작품 아닌가?"
"맞아요. 그 당시 단비하는 대가가 들어갔던 방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었죠."
"일산촌에서 기습을 당할 거라는 것은?"
"문주가 무애곡으로 우리 삼 인을 보낼 때 한 말이 있어요. 대
가의 독공, 나의 머리, 단비하의 생명력, 단비하는 헛된 짓을
하지 않아요. 머리가 나쁘지도 않죠. 우리가 추적해 올 걸 빤
히 알면서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니에요. 더욱이 황성현에서
한번 당했으니..."
"덕분에 나는 개망신을 당하고 모든 것을 다 빼앗겼어. 폭우빙
혼통까지...왜 그랬나?"
"아직은 알것 없어요. 하지만 대가에게 이로운 일인 것만은 틀
림없어요.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나 할까요. 단비
하가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죠.
그는 제가 생각했던데서 한치도 어긋남없이 행동하고 있어요.
빼앗긴 것은 잠시 맡겨 뒀다 여기세요."
당철휘는 다시 한 번 한연지에게 감탄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
면 한연지는 벌써 당문주를 상대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 않은
가.
"그런데...묘한 변수가 생겼어요?"
"변수?"
"사망산검 이철진과의 만남."
"아! 그거...하지만 이철진 정도는..."
"호호호! 한번 당하고도 상대를 경시하는군요. 그 마음을 떨치
지 못하는 한 대가는 계속 패배할 거예요. 그리고 저는 앞으로
단 한 번의 패배도 용납하지 못해요. 무슨 말인지 아세요?"
"알...겠어. 이철진에 대해서 말해 주구려."
"이철진은 무당파 장로(長老) 경운(慶雲) 진인(眞人)의 속가제
자예요. 태청검법(太淸劍法)을 물려받았지만 환(幻)을 배제하
고 쾌(快)를 더해서 사망산검을 만들어 냈죠. 천성적인 무골인
지라 이미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까지 올랐다는 말이 있어
요. 검류(檢流)는 빠르고 지금까지 무패(無敗)를 기록했어요."
"휴...우! 대단한 이력(履歷)이군."
당철휘는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만한 말을 듣고도 전혀 걱
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를 만났다는 것 자체로는 변수가 되지 못해요. 문제는 그가
바로 만우당 당주 남궁백의 의형이라는 점이죠. 완성된 풍멸환
이 어떤 위력을 지녔는지 알고 있는 마지막 사람이에요. 이제
곧 한 명이 더 늘어나겠죠. 단비하."
"언제 칠 예정이오?"
"누구를 말인가요?"
"단비하."
"호호호! 그를 칠 필요는 없어요. 제 생각이 맞는다면 이철진
과 단비하의 만남을 문주도 알고 있을거예요. 틀림없이..."
"틀림없이?"
"당자인이 나설 거예요. 밀명이 내려지겠죠. 당자인은 파문된
상태니까 후위대주란 통로를 거칠 거예요. 우리는 당자인과 합
류해서 주어 온 물건이나 챙기면 되요. 명심하세요. 가장 중요
한 일은 청성파 삼절이라는 여우를 죽이는 것. 대가는 전면에
나서지 말고 당자인을 이용하세요."
"당철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전과는 달리 조급함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두눈에는 야망이란 불길이 활활 타올랐
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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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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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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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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