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개에게 술 먹이기가 나와서 내가 옛날에 저지른 일을 생각해본다. 여기에서는 강제로 소주를 두병이나 먹여서 개가 술이 취하여 괴로워하는 걸 동영상으로 촬영한 악랄한 짓이었지만.
의과대학 본과 3학년 때, 그러니까 1970년 이었다. 지금은 낙산공원으로 완전히 바뀌어 얼마 전 찾아 가보았더니 흔적도 찾을 수 없었던 낙산 언덕배기에서 하숙하던 때의 일이다. 하숙치는 방이 네 개이고 하숙생이 모두 여덟 명이 있었고 서울대 법대, 공대, 의대생들이 하숙생이어서 서로 친하게 지냈었다. 이 중에는 나중 율산그룹을 이룬 친구도 있었고. 심심하면 같이 방에 모여서 화투도 치고 카드게임도 하고 술도 마시곤 했었는데.
한번 일요일 아침은 마시다 조금 남긴 소주를 안주로 한 비스킷에 묻혀서 하숙집에서 키우는 개에게 주었더니 날름날름 몇 개를 받아먹고는 술이 취해서 사라졌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주인아줌마가 교회를 다녀와서 개가 보이질 않아 ‘검둥아, 검둥아’하고 온종일 찾아도 보이지 않더니 마루 밑 어두컴컴한 곳에서 저녁에 나왔다. 털 색갈이 새까매서 마루 밑을 찾아보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던 것.
몇 주후 똑같은 일이 벌여졌다. 나는 하숙집 아줌마가 무서워 이러지 말자고 말렸으나 짓궂은 전주 출신의 내 하숙방 서울의대 동기, 어느 정도이냐 하면 의과대학교 기초학교실 동물 실험실에서 흰쥐를 키우겠다고 몰래 훔쳐와 하루 만에 도망을 가기도 한. 또 개에게 술을 먹였다. 술맛을 안 개는 이번은 스스로 즐기며 받아먹곤 해롱대는 걸 구경하다 주인아줌마에게 들켜 직사하게 야단맞고 우리 하숙생들은 쫓겨날 뻔하였다. 역시 개는 술이 약해요. 왜냐하면 그 아까운 술과 안주를 넉넉하게 남겨 두었다 줄 형편이 되지 않았거든요.
이 집에서 벌인 부끄러운 나의 추태하나는 의대 부산 친구들 중 하나가 학기가 바뀌어 노량진으로 이사를 가는데 따라갔다. 하숙생활을 오래 해보면 갈수록 짐이 줄어든다. 나 역시 하숙생활 처음 시작할 때는 책상과 옷장 등 짐이 좀 있었으나 나중에는 옮길 때 이불 보따리 하나와 책 보따리 하나로 되었던 것처럼. 택시 두 대에 나누어 타고 트렁크에 보따리 하나씩 싣고 한강 인도교를 넘어 경사진 길을 올려가 간단한 이사를 완료하고 보니까 가장 중요한 등록금과 하숙비, 용돈이 든 대학봉투, 그때는 그렇게 불렀었지요, 를 택시에 두고 내린 것이었다.
얼굴이 하얘진 친구한테 나는 그 택시 번호를 안다. 삼팡구 집고 사삥, 이를 풀어쓰면 도리 지꼬땡에서 389로 20으로 집을 만들고 족보로 4와 1이다. 즉 차의 번호는 38941이란 이야기. 얼른 내려가서 올라온 곳의 4거리에 가니까 때 마침 순경 한 사람이 차도 별로 다니지 않는 그 곳, 지금은 물론 번화한 길로 되었으나,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이실직고를 하고 도움을 청하였더니 ‘그래, 내가 가운데 서 있고 자네들은 길목마다 지키고 있다가 그 차가 보이면 신호해.’ 몇 십분을 초조하게 기다리니까 안양 쪽으로 갔던 택시가 올라오는 게 보인다.
‘아저씨, 저 차예요.’ 순경이 ‘휘리릭’ 호루라기를 불며 차를 세웠다. ‘여기 학생들이 봉투를 하나 두고 내렸다는데’ ‘못 보았는데요’ 하고 기사가 시침을 떼고 오리발을 내민다. ‘그럼 차를 한번 뒤져볼까’ 하니까 순경에 젊은 학생들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 겁먹은 기사가 ‘패널 박스를 열더니 ’이건 가요?‘ 돈은 한 푼 축나지 않고 그대로 찾은 것이다. 그 친구가 나에게 고마운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때 유행한 술이 흑맥주, 500cc 잔으로 열한개, 물론 5,500cc가 아니고 한잔이 약 350cc로 따르지만 많이 취한 건 틀림이 없었다.
일은 그날 밤에 벌어졌다. 술이 취한 체 고꾸라져 잠이든 내가 자다 일어나서 걸상을 딛고 책상에 올라가 아래를 보고 ‘쉬야’를 한 것이다. 이 집은 바깥에 잇는 화장실이 두 계단을 올라가 있으니 잠결, 술 취한 김에 그냥 두 계단을 올라가서 잘 자고 있는 하숙방 동기에게 저지른 일이다.
하나 더 이 집에서 지냈던 일 중 기억나는 것은 하릴없으면 노름판을 벌리는데.
하숙생이 무슨 큰돈이 있겠어요. 훌라, 마이티, 심지어는 포커까지 10원짜리 내기, 돈 없면 담배 한 개피 놓고, 아니면 성냥 한개, 이마져 없으면 나중에는 마빡 맞기를 한다. 다른 건 잃어도 다시 따면 고만인데 이마에 맞은 건 남을 때려도 내 아픈 이마가 낳질 않으니 고약하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할라치면 이마가 뻑뻑하다.
그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첫댓글 여기에 나오는 하숙 동기는 지금 텍사스에 가있는 이남규,
연락이 안 되고 자기 장모상(이영균선생부인)과 서울의대 인수봉 의대길 개척 40주년 행사에도
국내에 나오지 않았어요.
이기진 여동생과 결혼을 하여 처남매부지간인데도.
과거력들이 쏟아져 나오는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남규 이야기도 처음 알게 되었고....
이남규가 나올 수 없었던 데는 무슨 사연이 있지 않았겠는가?
장모상에도 나오지 않은 것을 은연 중 비방하는 듯한 문구를 만약 본인이 읽는다면 나름대로 항의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일 것이다.
그래서 온갖 루트를 다 통해서 연락을 취하였으나 두절.
우리 의대 82 년 졸업생 하나가 모처에서 안과를 개업하던 중 행방불명이 되었다. 매월 만나는 모임에 나오질 않아 친구들이 수소문했으나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동기 중 하나를 내가 잘 알기에 혹 그 친구가 놀음 같은 것을 좋아하는가 물었더니 그렇다는 답이었다. 혹시 혼자 실종되었으면 가족이라도 나서야 할 것인데 그것도 아닌 것을 보면 분명히 가족이 같이 떠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분명 조폭들에게 많은 돈을 빚지고 가족이민을 떠난 것이 분명하니 더 이상 찾지 않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일 것이라는 충고를 한 일이 있었다.
이남규는 소생이 1987년 연말쯤 Texas Austin에 살고있던 누이동생을 방문했다가 연락을 하였더니 어디냐고 묻더니 그곳에서 차를 타고 오면 5시간이면 올 수 있다고 하여 차를 몰고가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Texas 서북쪽 에 살고 있었는데 차를 몰고 가는 동안에 비가 오더니 곧 진눈개비로 바뀌었다가 함박눈으로 바뀌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Texas에서 눈구경을 하리라고 누가 생각인들 했겠습니까? 남규는 그곳에서 부인과 세딸을 데리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취미로는 말을 타고 다니며 사냥을 즐겨했고 소생의 두 아들에게도 말을 태워주고 야생토끼들을 향해 총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답니다.
지금쯤 세자매는 모두들 장성했을 터인데 어떻게들 컸는지 궁금하군요. 그때 생각나는 것 중의 하나로 Pizza를 시켰는데 몇시간 내로 도착하지 않으면 값을 받지 않는다고 하더니 실제로 배달이 늦어지자 값도 받지않고 그냥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신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Pizza Hut"이 아니었나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