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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팔만대장경 새겨진 강화 선원사
강화 선원사(禪源寺)는 고려시대 무신 최우가 창건한 사찰이다.
최우는 당시 최고 집권자로 꼽힌다.
고려가 몽골과의 항쟁기이던 1천232년 강화로 도읍을 옮긴 뒤, 대몽항쟁을 위한 국민총화의 일환으로 선원사를 창건했다. 고종 임금이 1천246년(고종33년) 5월 선원사에 행차했을 때도 최우가 접대를 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다만 창건 시기는 1년여 차이를 두고 2가지의 기록이 있다.
병오년(1천245년)에 창건해 연회를 크게 베풀었다는 기록과, 을사년(1천246년)에 선원사의 초대 주지 진명국사가 승려 200명과 창건했다는 기록으로 나뉜다.
김형후 전 인천시 문화재감정관은 2003년 ‘강화선원사의 역사와 가람 구성’이라는 논문을 통해 “1천245년에 선립해 낙성법회를 1천246년 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했다.
진명국사 이후 2대 원오국사, 3대 자오국사, 4대 원명국사, 5대 굉연 등 당대의 신망이 높은 고승들이 차례로 주지스님을 맡았다. 선원사는 당시 송광사와 함께 2대 사찰로 손꼽힌다.
하지만 고려의 왕실이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고나서 차츰 쇠퇴했고, 결국 조선 초기 이후에 폐허화 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곳
특히 선원사는 현재 해인사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을 만든 장소로 꼽힌다. 조선왕조실록은 1398년(태조7년)에 이 절에 있던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서울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까지 대장경판을 선원사에 보관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학계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의 본사가 강화도에 있었고 승려들이 경판을 필사하고 조각했다는 점 등을 감안해 경판을 보관한 선원사에 대장도감을 설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선원사의 입지적 조건이 대장경판 간행사업을 하기에 아주 적합하다는 점도 선원사에서 대장경판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다. 강화로 옮긴 궁성과 아주 가까운 곳이고, 선원사 앞뜰에서 부두가 보이기에 목판 재목을 운송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여기에 선원사가 최우의 원찰이고, 충렬왕 때 궁전으로 사용할 만큼 규모가 컸다는 점 등도 이를 뒷받침한다.
1996년부터 5년여간 진행한 선원사지에 대한 발굴 작업에서 보상화문전을 비롯해 명문이 새겨진 막새기와·치미(치尾)·원숭이 상 등 수많은 유물이 나왔다. 유물 양도 풍부하고 질적으로도 상당히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대장판경은 단순히 불교라는 종교의 의미보다는, 높은 문화력·경제력과 강한 정치력을 엿볼 수 있는 거대한 문화물로 꼽힌다. 경판의 숫자가 8만개인데, 양면을 사용했으니 전체 면수는 16만면. 그리고 1면 당 322자의 글자를 새겼으니 전체 글자는 5천200만개에 달한다.
대장경은 나무를 베어 강화 앞 바다의 뻘에 약 3년 동안 담가놓고 뒤틀림이나 터짐, 그리고 곤충의 해를 차단한다. 이후 소금물 통에 넣어 찐 다음 그늘에서 1년여를 말린다.
해마다 5만명 정도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글씨체를 연습해서 종이에 글씨를 써야하고, 이에 따른 종이만 해도 40~50만장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원고를 경판에 붙인 뒤, 1글자 파고 1번 절하고 하는 식으로 수많은 전문 인력을 투입했다.
이후 400㎏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옻을 경판에 칠하고, 경판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귀퉁이에 각목을 대고 구리를 붙인다. 이 같은 대장판경은 제작기간이 무려 16년이나 걸리는 등 고려시대 전체를 통털어 가장 규모가 큰 국책사업이다.
[경기일보]
선원사지에 남아있는 석물
선원사지 올러가는 돌 계단
■ 터만 남은 선원사
선원사는 1398년(태조7년) 대장경판이 서울로 옮겨졌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학계는 이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에 절이 폐지한 것으로 추측한다.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기슭,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 크고 작은 집채가 500여칸에 달하는 곳. 하지만 이후 30여년이 지난 1천428년(세종10년)에 한 글에서 선원사의 절터가 상림원의 과수원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후엔 장원서의 과수원으로 바뀐 기록만 일부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다
호국불교의 이념을 기리는 팔만대장경 판
이운행사를 하는 장면
선원사 복원 계획도
팔만대장경 제작 모습이 담긴 선원사
대웅전 벽화
왜
외국인들을 법당에 모셨을까?
답은 아래에~
첫댓글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