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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二 章. 나포(拿捕), 실수는 누가
( 一 )
단비하는 부자를 탕기에 집어넣고 화로의 불길을 맞줬다.
이철진을 비롯한 일행들은 극심한 탈수증에 시달렸다. 무리하
게 운공한 결과였다. 다행스럽게도 의원을 곧 찾았고. 부자외
에도 적절한 약재를 구할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효험이 지
극한한 약을 복용한다 할지라도 칠주야는 꼬박누워 있어야 될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꽤 고명한 솜씨구려. 어디에서 사사(師事) 받았소?"
의원이라기보다는 산적 두목이 어울릴 것 같은 털북숭이 장한
이 다가서며 물어 왔다.
"사사랄 것도 없습니다. 가전으로 물려 온것을 조금..."
자신의 이름을 전현(全賢)이라고 밝힌 털북승이 의원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약재를 배합하는 걸로 미루어 보면 사천인데..."
단비하는 고개를 들어 전현을 바라보았다. 말투를 듣고 사천
사람임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았지만 약재를 혼합하는 정도로
사천을 알아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전현의 말대로 각 지방마다 약재를 혼합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
랐다. 똑같은 병일지라도 지방이 틀리면 같은 약방문을 쓰지
못하는 곳이 중원. 광대한 대지만큼이나 사람들의 체질이 천차
만별이었고, 지방색을 더 할수록 그런 증상은 심했다.
어떤 경우에는 의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처방전이 틀렸
다. 지방마다 각기 독특한 의독 체계가 생성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의(神醫)라는 말을 종종 하지만 그것은 그 지방에
한해서일 뿐이지, 중원 전역을 통틀어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의는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단비하는 이철진 일행이 호북성 사람임을 감안하여 상당
히 부드러운 처방전을 쓰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사천인임을 알
아보다니...
"왜? 의외인가? 호북성 의원들은 연교(連翹:개나리 열매)를 거
의 쓰지 않는다네. 그런 것은 사천 사람들이 즐겨 쓰지 평야
(平野)와 험산(險山)의 차이랄까?"
"그랬군."
단비하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비록 단가의 의독술이
절정이라고는 하나 구시대에 정립된 유산 현대인에게 맞을 까
닭이 없었다.
또한 약재의 분량을 가감하는 것보다는 환자의 습성이나 체질
을 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의료술을 실감했다.
'같은 약재라도 산지(産地)에 따라서 효과가 틀리다. 틀린 약
효 그것만 분별할 수 있다면 어떠한 처방도 가능하다. 단가의
처방전을 버려야 한다. 골기도찰법으로 수백 종의 약재를 익힌
것으로 자족하고...다시 만들어야한다.'
고개를 돌려 전현을 쳐다 보았을때 그는 닭장에서 계란을 꺼내
는 중이었다.
이철진은 이틀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동안 충분히 휴
식했는지 급속도로 원기를 회복했다.
삼첨산에서 일행을 놓친 칠은방도들은 눈에 불을 켜고 집집마
다 수색했다. 하지만 일행이 머문 의원만은 뒤지지 않고 지나
갔다. 평소 전현의 성질이 더러웠는지 아니면 또 다른 사정이
있는지 몰라도, 없다는 말 한마디에 군소리없이 물러선 것이
다.
그러나 감시의 눈초리는 계속 번뜩였다.
단비하가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자신있다고 해
서 큰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아직 회복되지 않은 사
람들을 나몰라라 팽개친 채 떠날수는 없었다.
이경화의 증세는 더욱 심각했다.
일행들은 세맥점혈법을 펼친 후에 섬백단을 복용하면 잠력이
하루정도 촉발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공력이 심후해서 운기를
한 결과 약간의 내공을 회복한줄 착각했다. 그것은 단비하뿐만
이 아니라 이철진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착각이었다.
내공이 약한 이경화가 후유증을 가장 심하게 않았다.
그녀를 보호하려면 최소한 이철진의 손 한 개는 묶였다고 화야
한다. 유청은 자신을 보호할 정도는 되고, 이군무는 부족하지
만 그런 대로 버틸 만 했다. 그러나 칠은방도들이 떼거지로 몰
려 온다면 꼼짝없이 당할 지경이었다.
'벌써 칠주야가 지났어. 당철휘...한연지...지척에 다가왔겠
군. 준비를 해야겠어.'
그들이 삼첨산에서 발생한 사건을 모를 리 없었다. 당연히 풍
멸환이나 섬백단의 존재도 알았을테고, 칠은방이 사망산검을
제거하기 위하여 아비산을 하독한 것도 알아챘을 게다. 그리고
독의 대가 당철휘와 사리 판단에 뛰어난 한연지가 함께하는 이
상 의원을 찾아내고 암습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번에 공격당하면 필패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폭우빙혼통을
써야한다. 당철휘를 폭우빙혼통으로 제거하고 한연지를 탈혼망
으로 상대한다면...그만한 시간을 줄까?'
그런 시간을 줄 리는 만무했다. 폭우빙혼통에서 발사되는 강침
을 막을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위력을 지닌
만치 한 손으로 사용했다가는 반탄력에 몸의 중심을 잃고 만
다. 그런 상태에서 탈혼망을 꺼내 든들 무엇하랴.
단비하는 개미굴처럼 복잡해진 마음을 접어 둘 수밖에 없었다.
* * *
< 단비하의 척살. >
말굽은 삼백 냥과 함께 전달된 전서.
두서가 전혀 없이 짤막했다. 하단에는 아버지 당잠청이 즐겨
쓰는 사자 문양의 낙관(落款)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생생
하게 찍혀 있었다.
'초특급 명령이다.'
계집애처럼 가는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당잠청은 세 종류의 낙관을 사용했다.
영사보원(靈獅步原)은 신령스런 사자가 초원을 걷는 모습이었
다. 대세를 조용히 관망하며 경망되이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
담겼다.
험로주사(險路走獅)는 울퉁불퉁한 험로를 달리는 사자의 형상,
움직이되 많은 어려움이 담겨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었다.
지금까지는 영사보원이나 험로주사의 낙관을 담은 전서가 날아
왔다. 때문에 당자인은 은밀한 곳에 숨어 자신의 힘을 차분히
다졌다.
맹사축록(猛獅逐鹿)은 사나운 사자가 사슴을 쫓는 현상, 먹지
않으면 먹혀야 하는 먹이사슬을 말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해결해야 될 난제였다.
"조문덕(趙文德)을 불러라."
명을 내린 당자인은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엄가지검을 만지작
거렸다.
그날 이후 한시도 손에서 떼어 놓지 않는 검이었다. 자신하던
구룡십팔변이 문주에게는 일초지적(一招之適)도 안 된다는 사
실을 알았을때 찾아온 허탈감이라니...
급변(急變)을 듣고 자신을 따라나선 이십여 명의 당문도를 이
끌고 오늘을 만들었다.
혹시나 있을 추적대에 대비해 얼마나 마음 졸이며 쫓겼던가.
사천과 섬서(陝西)의 경계인 소파산(小巴山)에 산채(山寨)를
짓고 터를 잡았다.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녹림
무리에 휩쓸리는 사태는 막아줬지만 그런 만큼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생활을 했다.
아버지가 암중에 보내 온 말굽은 백 냥.
큰 돈이었다. 산중에 떠도는 엽사(獵師)들을 규합하여 백여 명
으로 늘어난 수하들이 살기에는 충분한 돈이었다. 하지만 자신
이 당문에 있을때는 거들떠 보지도 않을 작은 금액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당자인은 호랑이가 산중에서 포효하는 듯 거침없는 일성이 들
리고서야 긴 회상에서 깨어났다.
곰처럼 우람한 체구에 추부(椎夫)들이 쓰는 투박한 도끼를 어
깨에 걸머멘 장한이 들어왔다. 호피로 지은 겉옷을 입어 전형
적인 엽사의 모습이었으며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한
근육이 돋보였다.
무공을 익힌 당문 고수들을 통나무처럼 후려 패던 사내, 선척
적인 괴력과 사냥을 하며 익힌 날씬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감탄까지 자아내야 했던 사내였다.
그런 사내가 계집애처럼 가녀린 당자인에게 감복되었다.
무려 다섯 달에 걸쳐 음으로 양으로 진정을 다해 노모와 아내
를 보살폈다. 그 기간은 허한(虛汗:식은땀)에 시달리던 병약한
여인이 건강해지는 데 충분했다.
조문덕은 당자인을 찾아왔다. 그리고 당자인이 보여 준 일수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 정도는 일장에 죽여 버릴 수 있는
무위가 아닌가. 그런데도 별볼일 없는 자신을 그렇게나 아끼다
니, 뜨거운 웅지를 불태웠다. 나이가 당자인보다 배는 더 먹었
음에도 머리를 숙였다. 마음으로 감복한 것이다.
마음으로 굴종시킨다.
문약하고 가날픈 몸을 가진 당자인이 당당하게 당문주의 후계
자로 거론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 누구도 따
를 수 없는 지도력.
"쇄석부(碎石斧)는 어느 정도 익혔나?"
"흐흐흐! 내 감히 장담하는데 소림방장도 내 도끼를 맞받지는
못할 것이오."
"으음! 아니, 그렇다면 나는 빨리 쥐구멍을 찾아야 겠는걸."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조문덕은 당황하여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얼굴색까지 붉게 물
들인채...
"하하하! 농담이다. 드디어 우리가 할일이 생겼다."
"할 일이라고 하셨습니까?"
투명한 광채가 일렁거렸다. 깊은 산속에 숨어 무공을 익힌 보
람을 찾는 순간이니 벅찬 감회가 없을리 없었다.
"오늘밤 떠날 차비를 갖춰라. 목적지는 호북성 천보채현(天保
寨縣). 족히 한 달은 걸릴 거리...십 일 만에 당도할 수 있는
노선과 방법을 강구해라. 산채에 있는 말굽은 칠십육 냥을 전
부 써도 좋다."
"알겠습니다."
소파산을 쩌렁 울리는 대답이 뒤를 받쳤다.
여정에 대한 준비는 당보권(唐寶勸)이 맡았다.
당자인을 따라 당문을 이탈한 순수대원 중의 일인, 그는 유달
리 몸이 쇠약했다. 부친은 아내의 심한 입덧을 보다 못해 부자
탕을 먹였다.
아내와 자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고
당연히 아내를 선택했다. 그러나 끈질진 생명은 어머니와 생명
을 맞바꾸며 세상에 태어났다.
자라면서도 늘 골칫거리였다.
무공은 입문 할 생각도 못했다. 과민성체질(過敏性體質)인지라
독 근처에도 갈수 없었다. 일원 유명원의 부원주로 있던 부친
을 화병으로 죽게 만든 원인은 소심한 성격이었다. 도대체가
기대라고는 눈곱만치도 할수없는 평범 이하의 인물이었다.
당자인은 그의 장점을 파악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치밀했다.
소심한 만큼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는데도 침두(枕頭)를 높
이 하지 못했다.
천성이 그랬다.
삼십 일 걸릴 거리를 십 일로 단축시키는 일은 태어나서 처음
으로 맡은 큰 임무였다.
두두두두두...!
백여 필의 말이 일제히 치달렸다.
당자인이 보았던 대로 당보권의 준비는 하자를 찾을수 없었다.
마상에서 말고삐를 쥔 수하들은 끊임없이 펴서 말린 생강을 씹
어댔다. 건강(乾薑)은 강행군에 꼭 필요한 체력을 보충해 줬
다.
말이 흰 거품을 쏟아내며 기진해 쓰러질 때쯤 백여 필의 말을
가진 마상(馬商)을 만났고, 일행은 촌각도 소비하지 않았다.
체력이 한계에 도달해 더 이상 달릴 수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는 시원하고 편안하게 쳐진 장막(帳幕)을 만났다. 마시면 뱃속
까지 얼얼해질 정도로 차디찬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고, 괴로
회복에 좋다는 보중악기탕(補中益氣湯)도 마셨다.
세 시진 정도 수면을 취하고 혼몽한 상태에서 띵하게 울리는
머리를 쳐들면 김이 모락모락나는 시호계지건강탕(柴胡桂枝乾
薑湯)을 가져 왔다. 운기조식으로 약효를 충분히 흡수하고 체
력을 회복하는 데 일 각을 소모했다.
당보권은 한달 여정을 십 일로 앞당기는 길은 없다고 판단했
다. 그러나 꼭 가야 한다면 방법은 있었다. 남들이 쉬고 잠잘
때 달리면 된다. 문제는 체력, 아무리 무인이라 할지라도 터무
니없는 강행군을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설혹 그렇게 강행군
을 한다해도 목적지에 도달해 싸움을 할수없는 지경이라면 아
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일행이 출발하기 반나절 전에 산채를 출발했다.
마상을 만나고 약재상에게 모든 걸 부탁하고 자신은 다시 길을
개척해 갔다. 문약한 체질로는 견딜 수 없는 강행군이었다.
코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머릿속은 띵하게 울렸으며
전방 사물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렸다.
하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준 당자인 그에 대한 보
답을 하고 싶었다. 또한 이 일이 세상에서 자신이 할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당보권은 장평현(長坪縣) 약재상에게 말굽은을 전해 주며 뒷일
을 부탁했다. 차질이 생긴다면 당문의 처참한 보복이 있을 거
라는 협박도 함께...그리고 곧 쓰러질 것 같은 몸을 마상에 싣
고 힘차게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천보채현까지는 백이십 리. 세 군데는 더 준비를 해야 된다.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자인은 구 일하고 반나절 만에 천보채현에 들어섰다.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 천보객잔(天保客殘) >
객잔 주인 윤명중(尹明中)은 갑자기 밀어닥친 백여 명을 보고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렸다.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거의 한
달 수입에 맞먹는 은자를 선수금으로 지불한 사람이 말한 일행
들.
"헤헤! 손님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윤명중은 덩치가 보통 사람의 배는 됨직한 거한에게 다가서며
말문을 열었다.
"그런가? 지금부터 절대 조용하기 바란다. 만약 휴식에 조금이
라도 방해를 받는다면 네 목이 성치 못할 테니까. 그리고 이곳
에 먼저 온 사람이 있을텐데."
한주먹감 밖에 안되어 보이는 애송이가 말을 대신했다.
당자인은 몸집이 작고 가널펐으며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장부인지라 나이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그에게서 유일하게
무인의 냄새를 맡을수 있는 곳은 수리매처럼 날카로운 눈매였
다.
"아! 그 양반...저를 따라오십쇼. 야! 이놈들아, 어서 안내들
않고 뭐 하고 있는 거야?"
객방(客房)이 삼십여 개로 제법 규모가 큰 천보객잔이지만 손
님들을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욕심 많은 유명중의 성
화 때문에 점원들은 자신들이 기거하는 방은 물론 유명중이 기
거하는 안채까지 비워주는 부산함을 떨었다.
"당보권...수고했다."
당자인은 속에서 치미는 격정을 조용한 말로 표현했다.
병자처럼 초췌한 몰골, 거칠어진 살결, 붉게 충혈된 눈, 당보
권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위태로웠다. 무공을 익힌 사
람도 속에서 단물이 올라올 정도로 힘든 여정이었는데 하물며
늘 몸이 약했던 당보권이야 말해 무엇하랴.
"주...주군..."
당보권은 당자인이 들어섬을 알고 몸을 일으키려 꿈질거렸다.
"그냥 누워 있어라. 너는 충분히 쉴 자격이 있다."
당자인은 당보권의 의자를 당겨 침상 결에 놓고 앉았다. 그리
고 두손을 내밀어 당보권의 두손을 따뜻하게 마주잡았다.
"주...주군...더 이상...모시지 못할...것"
"쉬잇!"
당자인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당보권의 입을 막았다.
"살려 주마. 나를 따르는 사람이, 일을 충실히 수행한 사람이
죽어서야 쓰겠느냐."
당보권은 감격이 치미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때 당자인은
지필묵을 펼쳐 일필휘지로 수많은 약재와 분량을 적어 나갔다.
"조문덕! 수하들에게 충분히 휴식을 취하라고 일러라. 하루동
안 푹 쉰다. 척살은 내일 저녁 수행할 예정이니 단비하에 대한
정보를 빠짐없이 수집하도록 그리고 부방주는 이 처방전을 가
지고 의원에 가서 탕약을 지어 와라. 반드시 부방주가 직접 이
행하도록 해라."
가칭(假稱) 대북방(大北方) 부방주 조문덕은 콧등이 시큰거렸
다. 유약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방주의 어디에 이런 마음이
들어 있을까. 수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조문덕은 처방전을 받아 들면서 붉어지는 눈시울을 감추느라
애썼다. 그의 마음은 또 한번 당자인에게 감복되었다.
'주군! 주군을 위해서라면...'
* * *
단비하는 이철진, 전현과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다른 삼
인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지만 아직 술 마실 정도는 아니었
다. 그들은 멀거니 둘러앉아 취중우담(醉中遇談)에 장단을 맞
줬다.
"자네 주량이 의외로 약한 편이군. 그것 마시고 벌써 취하나?"
전현과는 많은 말을 나눴다.
아버지 단추강에게 의독술을 고문과 다름없는 골기도찰법으로
익힌 후 처음으로 많은 지식을 얻었다. 조그만 현(縣)에 있는
의원치고는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었다.
"하하하! 그것이라니요. 벌써 여섯 독째 아닙니까?"
"하하하! 더 마시게 이 오미주(五味酒)는 마시면 마실수록 기
운이 돋궈지는 술이라네. 아차차차...내가 또 천신(天神)에게
의술을 이야기하고 있구먼."
전현도 단비하의 놀라운 의술에 감탄했는지라 오고 가는 이야
기 속에 정이 듬뿜 묻어 나왔다. 십 년이나 묵은 오미주를 열
독이나 꺼내 온 것도 그런 연유와 맥을 같이했다.
"단공 어디로 가던 참이었나?"
이철진은 자신들 때문에 발이 묶인 것을 내내 미안해 했다.
"무당산으로 가던 중이었지요."
취중인지라, 술잔을 같이한 벗들, 마음을 주어도 좋을 만한 벗
들이라 판단했기에 내심을 털어놨다.
"무당?"
뜻밖에도 이철진은 눈을 빛내며 반문했다.
"무당에 무슨 일로 가려 했는가?"
"무당파의 무학을 보고 싶었습니다. 지고한 검학이 있을것 같
더군요. 구파일방이라는 말이 허명이라면 실망하겠지만..."
"지고한 검학! 단공이 말하는 검학이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가?"
검의 대가답게 이철진은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자신이 속한 문
파이기에 더욱 마음이 끌리는 모양이었다.
"일검으로 하늘을 가르는 검학은 존재합니까?"
"허허허!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에게 그런 검을 배우겠냐
고 물어 본다면 거절하겠네. 사람을 살리는 것조차 미숙한 검
인데 그런 걸 배워 무엇 하겠나?"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다.
"무당파 장문 일운(一雲) 진인(眞人)은 검신지경(劍神之境)에
다다랐다고 들었습니다."
"검신지경이라...좋은 말일세. 그렇게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검의 달인이지. 그러나 장문 또한 이 무광검의 검광을 없애지
는 못하네."
"그럼 당문을 칠 만한 검학은 있습니까?"
"당문?"
"당문을 쳐?"
검리(劍理)를 듣던 사람들은 느닷없는 말에 아연 실색했다.
당문이 비록 구파일방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함부로 대할수 없
을 만큼 성세를 쌓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단비하의 말 뜻
은 무당에서 검학을 배워 당문을 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
가.
대문파도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만 칠 수 있는 당문. 일개인
이 당문을 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단비하는 그런 말을
태연히 했다.
취중일망정...
"당문을 치고 싶은가?"
"해야 될 일입니다."
말을 마치고 답답한 듯 오미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오미자의
향긋한 맛이 배인 짙은 갈색의 술은 향긋한 향을 풍기며 목구
멍으로 넘어갔다.
"가지 말게."
단비하는 들이키던 술이 목구멍에 걸릴 정도로 놀랐다. 너무
뜻밖의 말이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네. 첫째, 무당은 당문을 치지 않아. 절대
로...왜인지 짐작하겠나? 명분이 없네. 설혹 명분이 있다해도
당문을 치면 무당파 도인들 팔 할은 희생되네. 재기할 수 없는
치명적 손실이지. 힘의 균형이 거의 비슷하다는 말일세."
이철진은 술을 마시지 않은 것처럼 또렷한 어조로 말을 이었
다.
"둘째, 무당은 도를 추구하는 문파일세. 구파일방의 반열에 들
어선 것은 세인들이 그렇게 말해 줬기에 그런 거지. 무당파 스
스로는 무림 은원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네. 자기 완성
이 궁극적인 목표랄까?"
답답해졌다.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철진으로부터 직접 듣고
보니 더욱 답답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군무야, 검을 뽑아라."
숨소리까지 들리는 고요한 정적 속에 스르릉하는 검명이 긴장
을 고조 시켰다.
"태청검법을 펼쳐 보아라."
이군무는 검을 가슴에 보듬어 안고 안뜰 널찍한 곳으로 걸어갔
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아름다운 검무를 추기 시
작했다.
꽃이 너울너울 떨어진다.
휘두르는가 했는데 찔러들고, 베는가 싶으면 비켜 올렸다.
무궁한 현기가 깃든 검법, 오랜 세월 꾸준히 연마했는지 한 동
작, 한 동작이 극히 절제되어 태청검법의 묘리를 유감없이 드
러냈다.
"사망산검!"
이철진이 일갈을 내지르기 무섭게 이군무의 검세가 돌변했다.
일체의 격식이 배제되고 빠름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검로(劍
路)가 분명해 전후좌우 어디든 공격할 수 있고, 어떠한 상황에
서도 수비가 가능한 검식이었다.
태청검법이 휘황한 달빛 아래 학 한 마리가 너울대는 몸짓이라
면, 사망산검은 달빛도 숨은 으숙한 밤에 살광을 번뜩이는 살
랭이의 몸 동작이라는 편이 어울렸다.
쉬익! 쉬이익...!
공중으로 떠올라 세 번 회전한 다음 내리긋는 동작을 끝으로
이군무는 조용히 검무를 마쳤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내공을 전개한 탓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호흡이 거칠었다.
"태청검법은 무당파의 진산검법일세. 젊은 혈기에...무당파의
온후 광명한 검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 무수한 비무를 거치
며 깨달은 검학을 태청에 실었네. 그것이 사망산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치졸한 검법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데는 태청검법보
다 월등하네. 어떤가? 이래도 무당으로 가려는가?"
단비하는 넋을 잃었다. 얼굴빛이 헬쑥하게 변한채 아직도 허공
에서 너울대는 이군무의 잔영(殘影)을 쫓았다.
가람검공은 태청검법보다 기세가 사나웠다. 하지만 사망산검에
는 뒤졌다. 온후 광명한 점에서는 사망산검보다 뛰어났고, 태
청검법보다는 한 수 아래였다. 중용(中庸). 단가에 비전된 가
람검공은 태청검법과 사망산검의 중간적 위치를 점했다.
"이, 이건 당문의 독술을 막지 못해."
실성한 사람처럼 읊조렸다. 정녕 무당의 검학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면 독랄하기 짝이 없는 당문 독공에 필적할 수 없었다.
"검학은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 목적이라네. 독문은 엄격히 말
하면 무가(武家)가 아닐세. 환자를 치유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독공은 부산물일 뿐이야. 서로 존립하는 목적이 다르다
네."
이철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죽고 죽이는 무림에서 목적 타령이나 해
서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 분명 다른 무엇이 있을 터였다.
'내공, 내공이야!'
한줄기 밝은 빛이 암흑 천지를 밝혔다.
"무당에는 신공(神功)이 있습니다."
단비하는 들뜬 음성으로 황급히 소리 질렀다.
"신공! 허허허! 의원이 신공의 한계를 모르는가? 초인적(超人
的), 초자연적(超自然的) 현상을 말하는 모양이네만, 그 정도
는 지금 자네도 가능하지 않은가? 높은 나무에서 떨어지고도
상처 하나 없다면, 원숭이처럼 자기 몸의 몇 배를 뛰어오르고,
호랑이처럼 빨리 달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초인 아닌가?"
"당문은...당문은..."
단비하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철진의 말을 그대로 수긍
할수는 없었다. 무당파의 내공수련법이 가람신공과 동일하다면
진정 당문을 상대하지 못한다. 깊은 야밤에 전위대 백사십사명
만 급습을 해도 초토화 시킬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자네가 독을 알고 있으니 나를 공격해 보게. 자, 어서!"
이철진은 무릎위에 무광검을 올려놓고 태연한 신색으로 재촉했
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행동으로 보여 주려는 의사였다.
"그럼..."
단비하도 사양하지 않았다. 취기는 간곳 없고 주르륵 흐르는
진땀이 얼마나 긴장했는가를 대변해 줬다.
조독기를 꺼내 풍멸환을 채워 넣은 다음 다시 소매 속으로 숨
겼다. 조금도 우위를 점하지 않으려는 태도, 이철진은 빙긋이
웃음을 머금었다.
쉬익! 찰각! 파아앗!
순간적으로 소매 속에서 조독기가 꺼내지며 단추를 눌렀다.
풍멸환은 반경 반 장을 뒤덮으며 휘몰아쳐 갔다. 하늘을 나는
새도 피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허억!"
단비하는 경악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사악!
옷깃을 가르는 소리 분명 검에 베이는 소리였다.
"이제 됐는가?"
이철진의 음성은 바로 옆에서 들려 왔다. 찰나의 순간에 자리
에서 일어나 풍멸환을 피해 내고 자신을 벤 것이다.
"당문이 구파일방을 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문파에 나 정도
의 고수가 구름처럼 많기 때문이라네. 그병기들을 동원한다면
양패구상(兩敗俱傷), 아마 십독(十毒)도 있을걸? 그것은 암습
에서나 유용하지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암기라면 평수(平手).
당문 십독일지라도 정면으로 승부를 가늠한다면 이길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단비하는 허탈한 심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지금 자신
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당문을 칠 엄두가 나지 않기에 무당파에
가려고 했다. 거기에 가면 천하기학이 존재하고, 익힐 수만 있
다면 당문도 두렵지 않다고...
결론은 하나였다. 가람검공을 극성으로 익혀야 하는 것.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검로는 지금도 익숙하지만
그 속에 깃든 묘리를 파악해야 진정한 검을 얻는다. 그 전에
는...
"내일 떠나겠습니다."
생기가 빠진 시신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말속에 힘이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기운과 넋이 빠진 인간...단비하는 흐느적거
리는 몸짓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뒤를 이철진이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는 단비하가 자
신에게 패한 충격으로 상심했다고 생각했다.
또 한 사람 이경화의 얼굴이 애처로움으로 물들었다. 단비하가
느낀 상심이 전신으로 느껴졌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이라는 생
각은 물론 하지 않았다. 그저 가깝게 지내온 사람, 그리 밉지
않은 사람이 불쌍하다고...그런 마음인 줄 알았다.
"나는 칠은방의 방도입니다."
사인은 전현의 입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에 기겁을 했다.
"칠은방에 가입하고 나서야 내가 생각한 문파가 아니라는 사실
을 알았죠. 칠은방이 산불처럼 거세게 일어나는 것은 무인들뿐
만 아니라 평민들도 방도로 가입할수 있기 때문이지요.아! 그
것은 이 대협이 주루에서 암산을 당했으니 잘 아실 테지만...
칠은방은 이곳 천보채를 물샐틈 없이 포위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칠은방도가 함부로 들어오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전현은 칠은방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으리라. 만약 전현을 무
시할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벌써 요절났겠지. 적어도 천보채
를 에워싼 오백여 명의 우두머리보다는 높은 직위라는 것은 어
렵지 않게 추측되었다.
"칠은방에 아미산을 준 것도 바로 나죠."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철진은 잔잔하면서도 포근한 눈빛으로 전현을 응시했다.
전과(前過)는 이상했지만 악의가 있다면 이런 말을 하지 못하
기에.
"칠은방이 우리를 건드리는 이유가 뭡니까?"
이군무가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물었다. 칠은방이 암습을 가한
다면 정녕 피하기 힘들었다. 칠은방도가 누구인지 알수 없으니
까.
무를 익힌 사람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하물며 아내가,
남편이, 자식이 칠은방도일 수도 있었다. 그들은 무림 방파의
형태를 빌었지만 근본은 종교적 색채가 짙었다. 한마디로 사이
비 종교집단이었다.
불교(佛敎)나 도교(道敎)는 배척해야 할 이단 종교였다. 당연
히 구파의 대부분이 이단자로 몰렸다. 아직은 세(世)가 약하기
에 참고 있을 뿐이었다.
"하하하! 칠은방은 제법 형태를 갖줬네. 힘이 넘치면 어찌하겠
나? 그들은 같은 호북성 내에 있는 무당파가 눈엣가시였네. 이
대협 일행을 암산한 것은 무당파의 반응을 살피려는 행동이지,
아무리 세속에 연연하지 않는 무당파라 할지라도 속가제자가
암산 당했다면 무슨 반응이 있을것 아닌가?"
이철진은 가늘게 신음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계
획은 성공할 뻔했다. 단비하가 나타나지 않았다면...무당파는
분명 사람을 파견했을 터이고...무당파와 칠은방과의 싸움이
벌어진다면 지루한 장기전이 될 것이다.
"이상한 것은...이 대협을 무공으로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비산으로 암습을 했죠, 그런데 지금
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백여 명의 무리
들이 천보채로 들어 왔습니다. 복색은 엽사지만 눈에서 빛나는
형형한 안광은 분명 무인들..."
"우리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알면 방에서 가만있지 않을 텐
데..."
"비하, 저 친구가 대문을 두드리는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입니
다. 하하하!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도(道)가 있다고 해서 가입
했더니 완전 도둑들이지 뭡니까. 그러잖아도 몸을 빼려고 했지
만 내 의술이 필요한지 무던히도 참아 주더군요."
전현은 덩치 만큼이나 당당한 풍모를 흘려 냈다.
"우리도 떠날 때가 된 것 같구려. 그동안 고마웠소."
"아닙니다. 말로만 듣던 이 대협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휴
우! 어쩐지 오늘 술이 먹고 싶더라니..."
전현은 단비하가 들어간 방을 흘끗 쳐다보면서 길게 탄식을 토
해 냈다.
쉬익! 우지직...!
조문덕이 휘두른 도끼는 나무 빗장을 여지없이 박살냈다.
"쳐랏!"
밤공기가 싸늘하게 찢어지는 일갈. 산을 달리며 무공을 수련한
건각들이 쏜살같이 뛰쳐 들었다. 족히 이십여 명은 되는 무인
들.
"어느 놈이냐?"
산적같이 위맹한 전현이 방문을 열며 냅다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자신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잘 익은 수박처럼
갈라졌다.
"한놈도 살려 두지 마라!"
조문덕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른 방으로 뛰어들었다.
우지끈...!
문을 열 필요도 없었다. 커다란 덩치로 뛰어드는 것으로 충분
했다.
한지와 대나무로 만든 문은 너무 쉽게 부서지며 방안 윤곽을
환히 드러냈다.
아무도 없었다.
깨끗이 정돈된 침상, 호롱불에 꽂힌 심지는 불을 켠 흔적이 없
는 새것이었다.
"흐흐흐...! 튀었군."
조문덕은 전혀 낙담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운 듯했
다.
"아무도 없습니다."
예측했던 대답이 수하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놈들은 도망가지 못한다. 천천히 가자."
공격하던 기세와는 사뭇 다르게 여유있는 태도를 취했다. 밖으
로 나오자 문지방을 걸치고 널브러져 있는 전현의 모습이 보였
다.
"건방진 놈!"
왜일까? 맹수가 맹수를 만났을 때처럼 자신과 비슷한 풍채를
지닌 자에게 강한 적의가 느껴졌다.
우직...!
우악스런 발길질에 반쪽으로 갈라진 전현의 얼굴이 두부처럼
으깨졌다.
유청은 마혈이 짚힌 단비하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비호처럼
신형을 날렸다. 전현의 말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낀 이철진이
서둘러 천보채를 빠져 나가고자 했지만 넋을 잃은 단비하는 고
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섬뜩했다. 눈빛이 무덤에서 갓 나온 사람처럼 번들거렸다.
당문을 치겠다는 말과 함께 그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
되었다. 맹진(盲進),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부쉬 버리며 나
가겠다는 태도. 이래서는 허무한 죽음밖에 돌아올 게 없었다.
결국 마혈을 짚어야했다.
'주공은 내력을 칠 성이나 회복했다. 소주(小主)들도 오 성 가
량은 회복했고...나만 빠져 나가면 된다.'
유청은 부지런히 밤길을 더듬어 나갔다.
이철진과 이군무, 이경화는 다른 길로 칠은방 방도들을 유인했
다. 목숨을 백척간두에서 구해 준 단비하에 대한 배려였다.
칠은방과의 싸움은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쉬익!
바람처럼 신형을 날리던 유청은 거대한 철벽에 부딪힌 듯 신형
을 멈추며 반사적으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어둠 저편에서 몸을 드러내는 이십여 명.
'매복이 있을줄 알았어.'
유청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했다. 귀의신장이라는 말
을 들을 만큼 장법(章法)에 일가견을 가졌다. 절정무인이라면
몰라도 쓰레기 같은 칠은방도들에게 당할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았다.
먼저 단비하의 마혈을 풀어 주었다.
끄응,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깨어나는 단비하를 보면서 공격
거리와 대상자를 면밀히 관찰했다. 가장 가까운 놈과의 거리는
삼 장 하지만 좌측 중간에 있는 놈이 가장 만만하게 보였다.
우선 몸집도 작을 뿐만 아니라 싸움에 대처하는 몸가짐도 허술
했다.
'저놈을 가장 잔인하게 죽여야 한다.'
선공은 빠를수록 잔인할수록 상대방의 기를 꺾을수 있다. 그런
면에서 가장 적절한 먹잇감이었다.
쉬익!
귀의신장 유청은 쾌속하게 신형을 날려 덮쳐 들었다. 양손에
운집된 내력은 바위라도 부술듯이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순간,
"커억!"
유청은 달려들던 것보다 빠르게 튕겨졌다. 목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 아비산에 당했을 때 느꼈던 통증과 비슷했다. 살점
이 조각조각 나는 듯 화끈거렸다.
'빌어먹을! 또 독인가?'
비틀거리며 물러서던 유청은 단단한 고목에 등을 기댔다. 아!
고목이 아니었다. 고목처럼 웅장한 거인이었다. 뒤에서 뻗어
나온 두 손은 유청의 목을 움켜쥐고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순간적이지만 자신이 너무도 나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이군무의 세기(細技)를 다듬어 준 자신인데...
"케엑...!"
항거할 수 없는 거센 힘. 어느 순간인가! 신형을 일으키는 단
비하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고 짜릿한 쾌감이 전신을 휘돌았
다. 주르륵 쏟아진 오물이 바지를 적시며 땅으로 홀러내렸다.
그 순간 유청의 혀는 길게 늘어지고 눈동자는 뒤집혔다.
"퉤엣! 뭐가 이렇게 싱거워."
어둠을 한꺼번에 밀쳐 버리는 고함소리.
단비하는 정선이 번쩍 들었다. 오랫동안 마혈을 짚혔는지라 굳
어졌던 몸을 푸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짧은 순간에 자신과 엇
비슷한 무공을 지녔던 귀의신장이 맥없이 꺾였다. 긴장하지 않
을수 없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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