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고대 로마사에 있어서 특히 초기 로마의 역사는 상당부분 안개에 둘러싸여있다. 무엇보다도, 고대 역사서들의 서술이 특히 이 시기에 있어서는 상당히 믿을만하지가 않다. 로마인들은 역사서술이라는걸 꽤나 늦게 시작한 편이다. 로마의 역사가들이 자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게 대략 BC200년대의 일이니, 로마 건국기의 이야기는 기록 시점에서 엄청난 시간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이다. 당장 리비우스 본인이 자신의 대작 역사서, Ab Urbe Condita (도시의 건립으로부터)에서 스스로 초기 역사는 신뢰성이 높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 안개속의 역사에서, 그동안 유일하게 믿을만하다고 여겨져온 것이 바로 BC 6세기에 이르러 로마의 군대가 초기 부족군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그리스식 호플리타이 팔랑크스로 변모했다는 설이다. 현재 로마 상고사에 있어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두 책을 저술한 Tim Cornell 선생(1995)과 Gary Forsythe 선생(2005) 모두 로마군의 팔랑크스 도입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서술하는데서 이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최근에 들어와 이 굳건했던 정설이 흔들리고 있다.
기록과 유물
티투스 리비우스는 기원전 340년 라틴전쟁때의 로마군을 다루면서, 한때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와 같았던 군대가 마니풀루스 대형으로 정렬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마니풀루스 이전에 존재했던 이 '로마 팔랑크스'의 기원을 로마의 신화적 역사에 나오는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물론 실존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의 개혁으로 돌려왔다. 코미티아 켄투리아타의 창설을 비롯한 그의 일련의 개혁으로 로마가 기존의 씨족 연맹체에에서 동시대 그리스와 비슷한 과두정 시스템으로 발전했으며, 그 결과가 호플리타이 팔랑크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호플리타이 장비와 전술은 인접한 에트루리아를 통해 받아들였다고 인식되었다.
초기 로마 호플리타이를 묘사한 그림
다른 로마 초기 역사의 신화적 사건들과 달리, '세르비우스 개혁'이 실체를 인정받아온 것은 유물의 뒷받침 덕분이었다. 실제로 기원전 7세기-6세기 에트루리아 지역에서 호플리타이 전사를 묘사한 유물은 상당히 풍부하다. 게다가 이 시기 무덤에서 흔히 그리스 호플리타이와 연결되는 유물들(원형의 청동 방패와 갑옷 등등)와도 상당히 발굴되었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에트루리아 호플리타이의 존재에 의문을 표했다. Momigliano같은 경우 '귀족과 그들의 클리엔테스 간의 명확한 신분의 구분을 기반으로 한 에트루리아의 사회구조에서 호플리타이 군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 하였고, Spivey와 Stoddard는 고고학적 조사 끝에, 에트루리아 무덤에서 발굴된 무구는 실전용이 아니라 장식 용도의 부장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이 학자들도 에트루리아가 로마 호플리타이의 기원이라 보기 어렵다고 했을뿐, 로마 상고사에 있어서 호플리타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로마 호플리타이 설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는 상당히 최근에 와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해당 주제에 대한 몇몇 최근 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문제의 기원-호플리타이 수정주의
새로운 주장은 고대 그리스사에 대한 재검토에서 왔다. 사실 필자는 예전에도 몇몇 포스팅을 통해서 고대 그리스사 연구의 최근 쟁점 중 하나인 '호플리타이 수정주의'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학자들이 피터 크랜츠와 Hans van Wees 등이다. 수정주의쪽의 대표적인 주장을 둘로 정리하자면, 호플리타이 팔랑크스는 생각보다 유동적이었으며 집단 푸쉬가 아닌 개개인의 듀얼의 집합이었다는 것과, 흔히 생각하는 중무장 보병의 밀집대형으로서의 팔랑크스는 상당히 점진적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van Wees는 '호플리타이 정통론'의 주장, 즉 전형적인 호플리타이 팔랑크스가 대략 기원전 650년경에 출현했다는 설을 반박하고,
7세기에서 심지어 6세기까지도 그리스 전투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묘사된 것과 흡사한 유동적인 모델에 가까웠다고 주장하였다.(이 모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http://charger07.egloos.com/4105478) 또한 이때까지도 군대는 씨족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양하게 무장한 전사들(중무장 전사와 경무장 전사, 투사무기로 무장한 이들까지 모두 합친)의 집합체였지, 비슷한 무장을 갖춘 중무장 보병들만이 팔랑크스를 구성하여 싸웠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느슨한 대형을 갖춘 군대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무장 보병이 비교적 타이트하게 밀집한' 팔랑크스로 바뀌는 것은, 수정주의 학자들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후반에 와서야 일어난다. 이때에 와서야 폴리스가 비로소 시민 개개인의 삶에서 기존의 씨족 중심의 사회구조를 능가하는 권위를 행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전이 선행되어야지만, 각 시민들은 전투대열을 형성할때 자신의 옆에 친족이 아닌 그 누가 있어도 똑같이 전투력을 발휘할 수가 있게 된다. 이른바 '호플리타이 에토스'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로마 왕정 후기나 초기 공화정 시기에 이런게 존재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이러한 호플리타이 수정주의가 사실이라면, 기존의 로마 군제 발전 내러티브는 심각한 문제를 노출하게 된다. 호플리타이 팔랑크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에 호플리타이 팔랑크스가 정립되기도 전에 로마 왕정이 호플리타이 팔랑크스 체제를 갖추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플리타이에 대한 그리스사 연구자들의 수정론을 받아들인 로마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기존 해석에 대한 의문점들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로마 호플리타이-정말 있었나?
일단, 호플리타이 팔랑크스가 당연히 존재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배제하고 나니, 문제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단 이 시기를 서술한 기록이 신뢰성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그나마 로마 호플리타이에 대한 기록을 그동안 신뢰하도록 한 것이 유물이었는데, 그리스사의 수정주의 입장을 접하고 다시 생각해보니 호플리타이 갑옷과 무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곧 호플리타이 팔랑크스 전술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역시 앞서 언급한 에트루리아 고고학의 연구결과를 참고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최근 로마 호플리타이 통설에 도전하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N. 로젠스타인 선생(2010)과 J. 암스트롱 선생(2016)의 연구를 중심으로 해서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기록이 믿기가 어려운 시대고, 유물에 의한 복원도 한계가 있다보니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로마 왕정이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시대(기원전 6세기)에 호플리타이 팔랑크스를 도입했다면, 기원전 5세기는 이 로마 팔랑크스 군대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기원전 5세기 로마의 주적은 중부 이탈리아 산악지대의 부족들이었다. 싸움의 형태는 소규모 습격과, 이에 대한 보복 형태의 습격이 주를 이루는 약탈전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형도 그렇고, 이런 형태의 전쟁에 필요한 것은 기동성을 장기로 하는 이른바 '레이드 부대'지 밀집한 보병대가 아니다. 게다가 로마가 상대한 적들은 대체로 로마보다 군사력이 발달된 부족들은 아니었던 것 같고, 기원전 390년 알리아 전투 이전까지 로마군은 그닥 심각한 패배를 겪지도 않았다. 따라서 급격한 군제개혁의 필요성이 있어보이지도 않는다. 이러한 점들이 로젠스타인 선생이 군사적인 측면에서 로마 호플리타이 팔랑크스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근거들이다.
사회정치적 요인도 중요하다. 앞서 보았듯이, 고전기 그리스 호플리타이 팔랑크스 전술의 정립과 폴리스 아이덴티티는 상당한 연관성을 갖는다. 또한 역시 앞서 보았듯이, 에트루리아 팔랑크스에 대한 회의론도, 에트루리아의 사회 구조에서 제대로 기능하기 힘든 전술이라는게 중요한 근거다. 초기 로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신생 공화정 로마는 소위 '신분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물론 이 시기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 점이 많지만, 로젠스타인에 따르면, 적어도 국가가 개별 시민들에 대한 장악력을 늘려가는 시기라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국가 분열의 위기에 처한 시기였다. 따라서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까지의 로마가 그리스 폴리스에서 그랬듯이 시민들을 팔랑크스로 조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이 시기 전쟁의 또다른 특징 중 하나는, 국가가 주도하는 전쟁과 동시에 유력한 씨족(gens)이 주도하는 사적인 전쟁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시기 사료의 신뢰성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 있지만, 현재 연구 결과는 개별 씨족이 중심이 된 일종의 'war band'가 벌이는 사적인 전쟁은 6세기에서 5세기 중부 이탈리아 전쟁의 흔한 양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 로마 전쟁에 대해서 가장 합리적인 추정을 내린다면, 설령 국가 주도의 전쟁이라 하더라도 거대한 보병 밀집대가 아니라 각각이 독립된 전술 단위로서의 소집단(아마도 백인대)이 모여서 부대를 형성했다고 보는것이 옳을 것이다.
로마군이 언제부터 마니풀루스로 바뀌었는지 또한 상당히 추측하기 어렵다. 관련 기록들은 매우 혼잡한 상황인데, 이는 후대에 기록을 남긴 로마인들 스스로도 정확히 언제부터 로마 군단이 마니풀루스로 싸우기 시작했는지 잘 몰랐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만 어떤 하나의 군제개혁을 통해 바뀌었다기보다는, 점진적으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로젠스타인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피로스 전쟁 쯤이면 마니풀루스로의 전환이 완료되었다는것 뿐이라고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제레미 암스트롱 선생은 중부 이탈리아의 호플리타이 전투방식 자체가 '역사적 신기루'라고 보고 있다. 그 이유인즉, 고대 로마의 역사가들은 '역사서술'에 대한 개념을 그리스의 선배들로부터 배웠다. 특히 아테나이의 역사가 그 모델이 되었다. 그리스의 역사서술은 중무장 보병 팔랑크스의 등장과 정치, 사회적 개혁을 연결지었다. 물론 앞서 봤듯이 현재 수정주의 해석은 그 고대 서술에 의문을 표하고 있지만, 아무튼 그리스인들은 스스로의 역사를 그렇게 서술했고, 로마는 그 방식을 배웠다. 그리스 역사가들이 기원전 3세기에 로마 역사를 서술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역사 발전의 패턴'을 투영하였고, 로마인들도 당연히 그 방식을 모방해서 서술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암스트롱 선생은 사료해석과 유물해석 두 가지 부분에서 로마 호플리타이 설을 비판한다. 우선, 사료를 주의깊게 읽으면 상당히 상충되는 이야기가 나타난다. 전반적인 내러티브는 군제개혁과 호플리타이에서 마니풀루스로의 변화를 이야기하는데, 대부분의 전쟁기록은 개개인의 영웅적인 무용담과 1대1 대결로 가득하다. 물론 다시 되풀이하자면, 이 시기에 대한 서술은 신화적인 기록으로 가득해서 어떤게 정말 신뢰할만한 것인지 알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후 시기에도 로마 귀족들에게 1대 1의 대결로 적장을 쓰러뜨리는 것을 포함해서 전쟁터에서 용맹을 발휘하는게 이상으로 남아있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신화적 과장이나 수사라고 치부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암스트롱도 로젠스타인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 전쟁에서 씨족과 가문이 담당한 역할이 생각보다 크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 역시도 팔랑크스 전투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양상을 그려낸다. 이 시기 전쟁과 전투는 아직 부족적인 면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전술적 차원에서는 van Wees가 고졸기 그리스 전투를 설명하면서 동원한 '영웅적' 모델과 비슷한 면모가 강했다는 것이 암스트롱의 결론이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 유물 및 도상들은 지금까지 이탈리아에서 호플리타이 팔랑크스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앞서 말했듯이 의장용이든 실전용이든, 이 시기의 부장품에서 호플리타이식 중무장 보병 방어구가 발굴되고, 호플리타이 전사를 묘사한 그림이 발견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전에는 이런 중갑을 착용하면 움직임이 제한되기 때문에 팔랑크스 전술밖에는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van Wees나 크랜츠로 대표되는 호플리타이 수정론의 주장을 통해 반박이 가능하다. 호메로스가 모티브를 따온 그리스 '암흑시대'나 고졸기 전투는 아무리 봐도 팔랑크스 집단전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이 시기 그리스군은 분명 갑옷으로 중무장을 했다. 이 말은 중무장 보병의 존재 자체가 바로 팔랑크스 전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더욱이, 암스트롱은, 오히려 팔랑크스 전술이 완비될수록 이러한 중장비는 필요가 없어진다고 주장한다. 타이트한 대형 자체가 충분한 방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중장비는 오히려 앞뒤좌우에서 오는 공격을 모두 막아야 하는 난전에서 더 쓸모가 있다. 실제로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군은 얼굴 전면을 가리는 코린토스식 투구나 무거운 갑옷을 점차 폐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기는 팔랑크스 전술이 완성되어가던 시기다. 4세기 중반의 아테나이 팔랑크스에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투구와 창과 방패 뿐이었다. 그리고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역시 장비를 상당히 경량화한 부대였다. 따라서, 암스트롱은 중장갑의 존재는 팔랑크스 전술이 아니라 오히려, 개개인의 용맹이 중시되는 형태의 전투가 이 시기 중부 이탈리아 전쟁의 일반적인 형태였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로젠스타인과 마찬가지로, 그도 로마의 마니풀루스 대형은 호플리타이 팔랑크스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는 마니풀루스는 로마군의 규모가 커지고, 많은 동맹군을 포함하게 됨에 따라 기존에 독립적인 전술 단위로 존재하던 소부대를 하나로 묶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보고 있다. 각 소부대들과 동맹군 부대의 전술을 일원화할 필요 없이, 그들이 싸우던 방식대로 싸우도록 하면서도 하나의 군대로 통일시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게 대단히 유연한 마니풀루스 시스템이었다는 것이다.
나오며
이 설을 따르면 결국 로마군은 개개인의 전투 능력과 용맹이 중심이 되는 <일리아스> 식의 전쟁 방식에 따라 싸웠고, 점진적으로 부족군에서 국가 군대로 바뀌었지만 그러한 근본 전투 방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마니풀루스 대형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떤 매우 점진적인 개량의 결과라는 뜻이 된다.
개인적으로 이 해석은 상당히 신뢰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 몇년간 공화정 중기 로마군의 전투 방식에 대한 논의가 크게 발전되었고, 여기서도 기존의 해석을 상당부분 뒤엎는 획기적인 해석들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상고시대 로마군의 전투 방식에 대한 최근의 견해들을 받아들인다면, 공화정 중기까지의 연속성이 상당부분 아무 문제없이 해결된다.
다만 여전히, 초기 로마의 국가나 군대나 대부분은 안개 속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어쩌면 진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고대사에서 정말 자신있게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참고문헌
Jeremy Armstrong, War and Society in Early Rome: From Warlords to Generals (Cambridge, 2016).
-----------------, Early Roman Warfare: From the Regal Period to the First Punic War (Barnsley, 2016).
Nathan Rosenstein, 'Phalanges in Rome?' in Garrett G. Fagan and Matthew Trundle (eds.), New Perspectives on Ancient Warfare (Leiden, 2010).
Gary Forsythe, A Critical History of Early Rome: From Prehistory to the First Punic War (Berkeley, 2005).
Tim Cornell, The Beginnings of Rome: Italy and Rome from the Bronze Age to the Punic Wars (London, 1995).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다 오랜만에 서양사 게시판에 와서 좋은 글 읽고갑니다
감사합니다
흥미롭네요... 문득 로마의 건국신화의 원류를 생각해보면 호플리테스가 등장할 건덕지가 좀 부족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로마 건국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일 뿐입니다
@mr.snow 원류가 트로이아든 알바롱가든 실질적으로는 소아시아 느낌 다소 받은건 사실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
@힘의 군주 그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입증될수 없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유 노 낫띵, 미스터 스노우"
...
...
아니, 걍 아이디가 아이디라 함 쳐보고 싶은 드립이라능;;
하하하 전총통님 하하하.........
글을 잘쓰시니 부럽습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