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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주의를 대표하던 국가로서, 냉전의 한축으로 한 때 미국과 세계를 양분했던 초강대국.
1922년에 수립된 이래 공산주의를 추구하던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이며, 제2세계의 종주국이었다. 해체 시점(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 세 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국가, 미국과 양극 체제를 주도한 초강대국이었다. 1991년에 해체되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스푸트니크)을 쏘아올린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우주에 개(라이카)를 보낸 나라이자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유리 가가린)와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발렌티나 테레시코바)를 배출한 나라이자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달에 착륙(루나 9호)한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우주 유영(알렉세이 레오노프)을 한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우주 정거장(살류트 1호)을 만든 나라이기도 하다.
국민총생산(GNP)만도 해산 직전인 1987년까지 세계 2위를 지켰을 정도로 절대 서방 국가들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1990년에 1인당 국민 소득이 약 9,300달러(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 반론은 있다. 국민 소득은 소련 당국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교환가격으로 계산했는데, 이는 루블을 지나치게 평가절상한 것이다. 하단의 '경제' 부분 참고) 정도였으며,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그 절반 정도인 약 5,800달러 정도였다. 거기다가 사회주의 국가여서 명목상으로는 부의 분배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기에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기본적인 부분이 보장되었다. 또한 무상의료가 실질적인 형태로 구현된 인류 역사상 유일한 국가였다. 실제로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의료를 유료서비스로 바꾸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러시아인이 속출하였다. 나중에 상황이 좀 안정되면서 오늘날의 러시아도 무상의료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별도의 세금을 추가로 납입하며 약제비는 개인 부담이다. 소련 시절의 무상의료 제도는 별도의 세금 없이 의료 및 약제비까지 모두 무료였다.
취지는 좋았으나 실패로 끝나 버린 소련에 대한 기억은 아직까지도 러시아인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65%의 러시아인이 "소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불행인가?"라는 질문에 긍정하고 있고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같은 소련 구성국들, 심지어 반러감정이 있는 우크라이나에서조차도 러시아는 몰라도 소련에는 상당한 향수를 가진 인구가 많다는 걸 보면 러시아와 옛 소련 구성국들 사이에서 소련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정치적 자유도 생각보다는 어느 정도 있어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권기를 제외하고는 당과 정부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는 허용되었다.
소련은 그 나라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고유명사'(이를테면 주요 민족 또는 땅 이름)가 국가명에 포함되지 않은 얼마 안 되는 나라였다. 러시아어로 쓰면 'Советский Союз (싸볘츠키 싸유스)'가 되고 영어로 쓰면 'Soviet Union'이 된다. 가끔 무의식중에 '소련 연방'이라고 쓰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럼 소비에트 연방 연방이 된다. 다만, 종종 이 나라를 '소연방'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소(비에트)연방의 줄임말이므로 맞는 표현이다.
한자 표기의 '소련(蘇聯)'에서, 蘇는 '소비에트'를 음차한 '소유애(蘇維埃)'의 약칭이다. 옛 신문 등을 볼 때 정치면 등에 그냥 '蘇' 만 써있어도 그냥 소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 蘇, 美國에 大獅子吼! 등. 지금은 '구(舊) 소련'이라고 하기도 한다. 舊에는 관형사로 '지금은 없는 것' 이라는 뜻도 있다. 故 소련 다만 서구권에서는 경우에 따라 소련을 그냥 'Russia'로 통칭하기도 했는데, 심지어 소련 스스로도 군가 가사에서 간혹 자국을 '러시아'라고 일컫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관련 사례로 소련 군가인 전설적인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수병들의 긍지이다!', 수병은 우리의 가족이다의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고향 러시아다.', 슬라브 여인의 작별(1984년 라자레프 작사 버전)의 '러시아가 우리를 부르고 행군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등이 있다.
서적이나 언론 등을 가리지 않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라고, 연방과 공화국의 단어 순서를 바꿔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잘못된 명칭이니 쓰지 않도록 주의하자. 헷갈리지 않으려면 이렇게 이해하면 쉽다. 소련은 '(무슨무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들이 뭉친 나라이므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들의) 연방'인 것이다. 즉, 연방제란 자치권을 가진 각 단위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국가인데, 소련의 경우 이 각각의 단위들이 주(州)나 도(道)가 아니라 '공화국'이었다는 것. 따라서, 공화국의 연방체이므로 공화국 연방이다. 무엇보다도 소련의 구성국 중 하나였던 러시아의 정식 명칭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었음을 기억하면 착각할 일은 없을 것이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이후, 10월 혁명을 계기로 블라디미르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할 것을 우려한 열강들이 잔존한 황제파, 즉 백군을 지원하며 적백내전이 발발한다. 초반에는 일부 중심도시를 제외한 영토 전역을 상실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결국 볼셰비키가 승리를 거두면서 1922년 12월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Р.С.Ф.С.Р)이 탄생한다.
자본주의가 사회 체제이지 이념은 아닌 것과 달리, 러시아 혁명 당시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는 이념일 뿐 사회 체제로 구체화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세계 최초로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등장과 그 운영을 두고 말이 많았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는 '이건 카를 마르크스 선생이 생각한 혁명이 아니다.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한 채 진행한 혁명(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빠진 반쪽짜리 혁명)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전체주의적 독재정권)을 낳을 것이다'라며 강하게 디스를 했고, 이에 소련의 통치자 블라디미르 레닌과 그의 부하이자 이론가였던 레프 트로츠키는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이 샌님아!'라며 카우츠키의 지적을 강하게 쏘아부쳤다. 마르크스는 사적 유물론의 입장에 서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혁명은 단계적인 절차(민주적 절차)를 통해 점차 나아가는 것이 핵심이었지만, 레닌과 트로츠키는 그것은 자본주의가 부후화되어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듦에 따라 불가능해졌으므로, 무장한 프롤레타리아가 제국주의 열강들끼리 벌이는 제국주의 전쟁을 내란으로 전화시켜 폭력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게 수립된 프롤레타리아 독국가는 근본적으로 낮은 생산성과 이로 인한 일반화된 궁핍이라는 위기에 직면하였고, 이 틈을 타서 스탈린을 위시한 관료집단이 빠르게 성장하여 1당 독재 체제를 수립하는 러시아판 테르미도르 반동을 일으킨다. 이렇게 테르미도르 반동을 일으킨 스탈린 관료집단에 의해 왜곡된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은 이후 사회주의 국가의 집권층들(마오쩌둥, 김일성, 발터 울브리히트 등)이 중앙집중적이고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인 '민주집중제'를 주장하는 핵심 근거가 되었고, 결국 사회주의권의 비극이 되었다.
처음부터 소련이 강력한 공업 국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1928년까지만 해도 소련의 공업 생산량은 미국의 8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제정 러시아의 산업 혁명도 19세기 말~20세기에 들어서야 시작될 정도로 늦었고 소련도 서구에서 봤을 땐 가난한 농업 국가에 불과했다. 처음으로 소련의 최고 권력자(최고 인민회의 의장)가 되었던 레닌은 소련을 공업국가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오랜 내전으로 인해 소련은 철강 생산량이 내전 이전에 5분의 1로 크게 축소된 상태였다. 레닌은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펼쳐 소규모의 사기업, 상업을 인정하는 등 시장 경제에 일부를 도입하였다.
1924년 레닌 사후부터 시작된 공산당내의 혼란기에 트로츠키를 위시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1928년 최고 지도자가 된 이오시프 스탈린은 공업 생산 목표를 제시하며 이제 막 발전하고 있는 농업국가인 소련을 공업국가으로 바꾸기를 원하였다. 1931년 스탈린은 "우리는 서방에 비해 50년 뒤쳐져 있습니다. 이제 그 격차를 10년 내로 따라잡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으며 소련의 모든 산업과 경제 활동을 국가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단기간에 서구권을 위협할 만큼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내긴 했다. 대공황으로 서방이 무너져갈때 소련은 대공황을 무시하고 성장하였으며 1930년대 중후반에는 유럽 제 1의 공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혹독한 인권 탄압과 눈물어린 희생이 감추어져 있었다. 나라 자체는 부강해졌지만 스탈린 시대 소련 인민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스탈린은 초고속 공업화를 위하여 농업을 모조리 집단농장화하고 농민들을 쥐어짰으며 중공업과 달리 경공업은 발달이 미미하여 생필품도 모자란 편이었고, 스탈린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시베리아나 서부 러시아에 있는 굴라그에 강제로 끌고 갔다. 공업화와 함께 정치적으로는 대숙청을 감행하여 모조리 숙청하고 그야말로 철권독재를 했다. 이 대숙청을 계기로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스탈린에게는 강력한 정적이었던 트로츠키(세계혁명주의 주장자)는 실권하여 멕시코로 도망을 갔으나, 1940년 스탈린이 보낸 라몬 메르카데르라는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물론 스탈린은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죽었고, 후임자인 흐루쇼프가 트로츠키 암살자인 라몬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수여했다.
어쨋든 서구권의 열강들이 세계 대공황으로 휘청거리는 사이 스탈린의 소련과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나란히 약진했고, 스탈린은 초기에는 반공을 외치는 독일에 맞서 서유럽 국가들과의 안보동맹을 추구했으나 일이 잘 안 풀리자 되려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전세계를 놀라게 한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초반에는 나치 독일과 폴란드를 양분하고 핀란드를 침공하여 영토의 일부를 할양받는 등 잘 나가다가 1941년 6월 독일에 의하여 크게 뒤통수를 맞는다. 소련군은 대숙청으로 잉여가 된 군 지휘 체계로 인해 초반에 크게 밀렸으나, 북부의 레닌그라드, 중부의 모스크바, 남부의 스탈린그라드 등 주요 도시들을 사수하고 1943년 8월 지상 최대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에서까지 승리 하면서 전황은 반전되고, 결국 1945년 5월 베를린을 함락시키기에 이른다. 1945년 8월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소련 역시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에서부터 진격해 내려왔고, 8월 15일에는 일본이 항복했다. 그때의 진격으로 소련은 사할린 섬 전역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2700만에 달하는 인민들이 희생되었긴 하지만. 이 전쟁을 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이라고 하는데, 약 5년간 전쟁하느라 공업과 농업의 기반이 전부 날아가버려서 재건하는 데 또 인민이 갈려야 했다.
하지만 승리의 열매는 달았다. 소련의 영토는 러시아 제국의 그 시절에서 엄청나게 축소되어 있었고 2차 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만 해도 공산국가는 전세계에 소련과 몽골 인민 공화국, 그리고 얼마 후에 소련에 편입될 투바 인민 공화국이 끝이었으나, 2차 대전의 승리로 그 잃었던 영토를 모조리 되찾음은 물론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을 전부 집어삼켜 그 세력과 영향력은 크게 확장되었으며, 아시아에서도 북한과 중국, 베트남 등에서 잭팟이 터져 세력을 크게 넓혔다. 한편으로 미국의 턱 밑인 쿠바에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켜 공산권으로 갈아타고 두고두고 미국의 골치를 아프게 하며, 쿠바뿐만 아니라 먼로 독트린 이후 계솟 미국의 앞마당 취급 받았던 중남미에서 대규모 좌익 운동, 좌파 정치 세력을 지원하여 자본진영의 총본산 턱 밑에 공산주의의 칼을 들이대는 성과를 거둔다. 그 어마어마한 공업 생산력과 군사력에 힘입어 소련은 마침내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초강대국이 되었고, 공산진영의 대표국가로서 약 50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 모든 곳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력과 보이지 않는 대결을 반복하였다. 통칭 냉전이라 불리는 시기 동안 한반도와 베트남, 앙골라,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온갖 지역 국가들이 이념 대립의 대리전장이 되었고, 미국이 주도하는 NATO와 소련을 위시한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서로 확실하게 개발살을 내버리려고 양 진영의 주요 도시에 항상 ICBM을 겨누고 있었다.
자본주의 진영에 속했던 국가들에게 강대한 군사력과 매혹적인 이념으로 무장한 소련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생산력 자체가 부족한 가운데 사적 소유가 철폐된 결과 등장한 '비민주적인 계획경제'에 내재된 효율성 부진으로 인해 전면적 대립보다는 데탕트, 공존 경쟁이 추구되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서기장이 된 사람은 게오르기 말렌코프였으나 그는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6개월만에 사임하였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의 서기장이 되었다. 그는 스탈린을 비판하고 그에 대한 신격화를 중단하고 잔인한 독재자로 까내렸으며 또 스탈린 당시의 억압적인 사회의 숨통을 트게 하고 권력투쟁에서 지면 처형이나 다름없던 스탈린 체제의 정치를 크게 순화시켰다. 수용소의 인구도 스탈린 때 1300만명에서 1956년에는 500만명까지 줄어들었다. 이러한 스탈린 격하 운동은 서방과 소련 내부는 물론이고 공산권에도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 비난하였고 결국 이 두 국가는 국경분쟁까지 벌어지는 등 사이가 급격하게 멀어졌다. 동유럽에서도 이에 영향을 받아 폴란드와 헝가리 등에서 반소시위가 일어났고 소련은 이를 진압하였다. 스탈린 때까지 소련은 초강대국으로 등극했음에도 정작 인민의 삶의 질은 낮은 수준이었지만 흐루쇼프 시대에 들어서 삶의 질도 상당히 나아졌다. 생활 수준도 올랐고 미국의 잡지를 비롯해 일부 영화, 책, 음악, 예술의 자유(그러나 종교만큼은 엄청나게 탄압하였다.) 등이 허용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계속 발전하고 있었다. 심지어 당에 대한 비판도 어느정도 허용되었고 서방과의 교류도 늘어났다. 다만 미국과의 경쟁 자체는 이 시대에도 계속 되었다. 특히 우주 분야에 있어서 흐루쇼프 때 소련은 1957년 스푸트니크를 날려 미국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개를 우주에 보냈고, 1961년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와 1962년 인류 최초의 여성우주비행사를 탄생시켜 경쟁국 미국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결국 농업정책에서 큰 실패를 해야했고 재래식 전력을 감축하려다가 군부의 반발에 부딪혔으며 끝내 권력 기반이 약해져 실각되어버렸다. 흐루쇼프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된 양반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참고로 그가 통치했을 때에 소련은 서방에서 회색의 시대, 또는 침체의 시대(Эпоха Застоя, Era of Stagnation)로 불렸다. 이는 근본적으로 생산력이 서방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근본적 한계와 상명하복식 관료주의의 체제로 인해 천천히 무너져가고 경제 성장이 둔화된 모습과 떨어져가는 노동생산성, 그리고 별다른 개혁도 없었고, 개혁을 몇 번 하더라도 별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상당히 높아져 사람들의 삶은 편안해졌고 특별히 피를 부르는 사건이나 숙청도 거의 없었다. 또 미국과의 무리한 군비 경쟁으로 인해 국방비가 GNP 대비 12%나 될 정도로 늘어나고 비대칭 전력의 규모에서 미국을 능가하게 되었다. 다만 침체의 시대라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까지 소련은 공산권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선언 후 동유럽에 개입하여 프라하의 봄이라던가 폴란드의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해버렸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이란 팔라비 왕조가 붕괴하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인도-아라비아해의 주도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미국은 본격적으로 대소 봉쇄를 시작하였다.
최초로 시도된 것은 식량 봉쇄였다. 소련의 농업은 스탈린의 집단 농장화로 박살난 이래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대대적인 농지 개간과 개혁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식량자급을 하지 못 할 정도로 생산성이 떨어졌으며, 이는 소련의 농·축산업 체계의 문제점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러시아 제국 시대까지만 해도 중유럽을 먹여살렸던 과거와는 정반대로 소련은 미국에서만 매해 2500만 톤이 넘는 곡물을 수입해야만 했으며, 이 막대한 수입량을 다른 곳에서 대체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카터 행정부는 소련에 대한 곡물 수출을 중단했다. 그러나 수출 중단으로 인해 소련으로 흘러가던 막대한 곡물들이 시장에 풀리자 식량 가격이 대폭락하여 미국의 농가는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으며, 일시적인 식량 위기를 벗어난 소련은 폭락한 국제 곡물 가격을 이용해 다른 나라를 통해서 예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반군에 스팅어 지대공 미사일 등의 각종 무기를 지원했다. 교외를 장악한 반군이 소련 손아귀의 도시들과 거점들을 포위한 상황에서 소련군이 교통하기 위해서는 항공편을 사용하여야 했는데, 미국의 물밑지원으로 상당한 무장력을 갖춘 반군이 게릴라전으로 헬기 전력에 대항하자 소련은 빠져나갈 방법도 찾지 못하고 그저 돈만 쏟아부을 수 밖에 없는 이상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전면적인 경제 봉쇄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막대한 재정 출혈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함으로서 원자재 수출로 간신히 명줄을 연장하던 미약하디 미약한 소련 경제를 붕괴시키는 단초를 만들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석유값이 일정 수준은 되었기 때문에 버틸 수는 있었다.
브레즈네프의 초장기 집권은 그의 사후 권력을 이어받을만한 실력자들이 함께 폭삭 늙어버렸으므로 이후 유리 안드로포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1년씩 해먹고 바로 죽는 혼란기가 찾아와서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그후 젊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등극하여 여러 문제를 보고 1985년부터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을 시행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해 하반기에 사우디와 미국-영국의 치킨게임으로 1986년 석유값이 폭락하여 세수가 크게 줄어버린데다가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가 터지면서 결국 소련의 경제는 회생 불가능한 수준까지 가버렸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글라스노스트는 소련 체제 하의 온갖 비리와 범죄를 드러내어 소련 공산당과 소련 체제의 정당성에 흠집을 냈다. 한번 시장의 고삐가 풀리자 인플레이션을 막아낼 방법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고르바초프의 혁신 정책은 원래의 의도는 거의 이루지 못한 채 소련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붕괴를 초래했고, 억눌려 있던 민족주의가 발흥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발트 3국 등지에서 처음으로 "독립 만세!!" 를 외치며 소비에트 연방에서의 탈퇴와 민족국가로써의 자주독립,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환원 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1991년 소련 국민투표를 통해 연방 체제만은 유지하려 하였고, 실제로 투표에 참여한 9개 공화국에서 77.8%의 지지를 얻었지만, 몇 달 뒤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보리스 옐친이 이를 진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입지가 더욱 커지자 소련의 붕괴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쿠데타는 민중의 저지로 인해 실패로 끝났으나, 1991년에 이미 고르바초프는 권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쿠데타 진압으로 정치적 스타가 된 보리스 옐친은 이미 진작에 소련을 탈퇴한 공화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조지아, 몰도바, 아르메니아)을 제외하고 자신을 포함한 소련 소속 9개 공화국 지도자들과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기로 밀약해 모두 소련을 탈퇴하는 바람에 소련은 가입국 하나도 없는 빈사 직전 상태였다. 고르바초프가 결국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소련은 공중분해되었다.
소련이 가진 모든 권리와 의무는 러시아 연방이 계승하였으며, 소련의 공화국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모조리 독립국가가 되어버렸다.
소련은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큰 국가였다. 소련이 성립할 때 기존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폴란드와 핀란드가 뚝 떨어져 나갔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서쪽 지역도 폴란드에게로 넘어가버렸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하면서 영토의 상당수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소련이 보유한 영토는 몽골 제국이 보유했던 영토와 맞먹을 정도의 광대한 크기였다. 지금도 독립국가연합 소속 국가들은 경제적 가치가 꽤 높은 편.
그러나 소련 붕괴 전후로 불거진 민족 갈등과 소련 시절의 행정구역 변경과 민족이주의 영향으로 인해 소속되었던 공화국들 간 영토 분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이와 관련된 전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소련에서는 원래 러시아 주민들이 살던 곳을 행정 문제 등으로 인하여 다른 공화국의 영토로 만들거나 각 공화국의 경계 설정에 대해 민족적 구분 같은 건 개의치 않고 인구에 맞추어서 설정하거나 (스탈린 시절에는)여러 민족들을 타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으며 이후로도 1960년대까지 러시아 주민들을 지역개발 등의 이유로 민족갈등을 고려하지 않고 타 공화국으로 이주시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소련은 "설마 우리가 망하겠어?"라는 생각을 했고 그건 서방 세계도 마찬가지였다지만 결국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소련은 초강대국이라 외부의 위협은 미국 밖에 없고 자원도 많으며 내부 통제도 잘 이뤄지고 있는데다가 중진국 수준의 1인딩 GDP와 복지수준을 보였는데 이런 나라가 망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토와 자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였다. 현재의 러시아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지만, 소련은 그 러시아와 가장 큰 내륙국인 카자흐스탄을 포함해 총 15개국이 합쳐진 어마어마한 영토를 자랑했다. 그 땅 넓다는 미국, 중국보다도 2배 반 정도 더 넓은 나라가 소련이었다!
지구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그 크기는 북아메리카에 비교될 정도였다. 물론 그런 거대한 영토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쪽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매우 적었으며 모스크바를 비롯한 우랄 산맥의 서쪽이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물론, 우랄 산맥 동쪽에도 경제가 발달하거나 공업지대의 도시(이르쿠츠크, 옴스크, 노보시비르스크 등)도 있다. 그 거대한 국토 중에서 경작지는 11%에 불과했으며 41%는 타이가 지대였고 16%는 목장등, 나머지는 툰드라와 동토, 산악 지대도 있었고 건조한 지역도 존재했었다.
국토가 넓은 나라답게 접경국도 많았는데 서쪽으로는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까지 6개국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몽골, 중국, 북한까지 7개국과 국경을 접했다. 1945년까지는 일본과도 접경국이었다.
거대한 영토 덕분에 자원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준에 속했다. 식량을 제외하면 자원은 자급자족이 가능할 수준이었고, 전략무기를 위한 자원도 엄청나게 생산되었다. 시베리아 지역은 비록 춥고 개발이 안 되어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에 속했으나 석유, 철, 망간, 천연가스, 금, 아연, 니켈 등 다양한 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사실 소련의 경제 역시 현재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자원에 상당히 의존한 편이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석유 덕을 엄청나게 많이 본 편이었고 이후 저유가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소련의 최고봉은 현 타지키스탄의 파미르 고원에 위치한 공산주의 봉(소련 해체 이후 타지키스탄에서 이스모일 소모니 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으로 높이는 무려 7,495m로 세계에서 50번째로 높은 높이를 자랑한다. 그리고 이 산은 소련 내외의 훌륭한 산악인에게 수여되는 눈표범 상의 수상 조건 중 하나인 산이다.
소련 붕괴 직전인 1989년 당시 행정구역일람. 굵은 선 안쪽이 소련 당시의 영역이며, 분홍색 지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그 이외의 색의 지역은 현재 독립된 국가들로 귀속되었다.
소련을 이루는 구성체 중에는 '공화국' 이라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었다. 각 공화국들은 별도의 헌법, 의결기구, 그리고 각 공화국의 공산당이 있었으며, 이들의 의원들이 상위 기구인 소련 최고회의 혹은 소련 공산당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소련의 권력기구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러시아인이었고, 헌법상으로만 보장되는 소수민족의 권리는 소련 초기에는 안습일 정도로 유명무실한 수준이었다.
소련은 다음과 같은 구성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련의 연방 구성체인 공화국
소련 바로 아래 단계의 공화국이다. 소련이 처음에 세워졌을 때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자캅카스와 같은 4개의 연방 구성체 공화국들로만 이루어졌었다. 후에 생긴 아래의 여러 연방 구성체 공화국들은 이 4개의 공화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자캅카스 SFSR은 아래 적혀있듯 후에 3개의 공화국들로 분리되고, 중앙아시아 5개의 공화국도 러시아 SFSR에서 분리된 것이다. 또는, 발트 3국처럼 기존의 독립국가를 흡수해 편입시킨 것도 있다.
◦СФСР(SFSR) -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새 헌법에 따라 1936년부터는 러시아 연방 공화국이 소련의 유일한 SFSR였다. 정식 명칭으로 부르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그러니까 소련이라는 연방 국가 산하에 또 연방 국가가 있었던 것이다. 1936년 이전에는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도 존재했지만, 1936년에 그루지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세 개의 SSR로 분리되었다.
소련의 경제는 1960년대까지는 미국보다 성장속도가 2배 이상 빨랐지만, 코시긴 개혁 실패 이후 서서히 공산주의 국가의 한계를 보이면서 1970년대 초반부터는 정체되기 시작했고 개혁 개방으로 혼란스러웠던 1988년부터는 초고속성장 중이던 일본에 명목 GDP 2위를 넘겨주었다.
내전 직후 소련의 산업시설은 거의 전무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블라디미르 레닌이 신경제 정책을 도입했고 농업과 상업은 활성화 되었지만 공업이 발전하지 않는이상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스탈린은 집권 이후에 테러,폭력에 기반한 무자비한 산업화를 추진했으며 많은 희생을 치루었지만 1차,2차 5개년 경제개발은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소련은 2위 경제/공업대국이 되었다. 비록 나치 독일의 침공 이후로 다시 초토화되었지만 1950년대 중반에 전후복구를 끝냈다.
스탈린 이후, 특히 흐루쇼프~체르넨코 시기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중진국~ 선진국 수준으로 꽤 살만한 국가에는 속했다. 특히 1950~60년대의 경제성장률은 당시 기준으로 못해도 미국의 2배 이상 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미국인들이 진지하게 소련 위협론을 논했다.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이 제시된 것도 체제경쟁에서 적어도 밀리지는 않겠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비해 이러저러한 문제점은 많이 제시되었지만 전반적인 체급은 튼튼했다. 비록 경공업이 빈약해 생필품 부족이 빈번했고 식량 역시 미국, 아르헨티나 등지로부터 막대한 양을 수입했지만 중공업/화학공업이 튼실하여 공업 생산량은 세계 5분의 1이나 되었다. 의료와 교육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서비스는 국가가 무상으로 지원했으며 명목상으로는 부의 분배도 이루어져 생활수준도 전체적으로 높은 편에 속했다. 실업률은 약 1%~2% 정도로 추정된다고 하며 주요 수입 및 산업은 자원수출, 철강, 항공우주, 화학, 중공업, 전자 등이었다고 한다.
CIA자료를 포함해 몇몇 사료에서는 1인당 GNP를 1990년 기준으로 9,300달러로 당시 기준에서 중진국과 선진국의 사이 정도의 소득은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3억에 세계 3위에 달하는 인구 덕에 국민총생산(GNP)은 87년까지 세계 2위(1985년 당시 국민총생산 2조 2천억 달러), 1988년에 일본이 추월해(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1991년까지 3위였다고 보기도 한다. 주요 수입 및 산업은 자원수출, 철강, 항공우주, 화학, 중공업, 전자 등이었다고 한다.
다만 이 통계에는 함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소련의 공식 환율이나 가격 등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특히 CIA의 방법론은 냉전에 따른 정보 제약 등으로 말미암아 GDP 조사 등과 관해 소련의 공식 가격이나 환율에 기초하였는데 공산권은 정치적 목적에서 통계 조작이 심각했다. 이는 GDP를 포함해 실업률, 지니계수를 위시한 소득분배지표에도 적용된다. 관련문서 1980년대만 하더라도 당시 소련은 공식적으로 루블 환율을 0.6 대 1 수준에서 유지했었고 이는 당시의 암시장 환율에 비하면 비정상적으로 고평가된 수치였다. 1980년대 후반 루블/달러의 암시장 환율은 4~5 대 1 수준이었고 이는 10배가 좀 안 되는 수준이었다. 관련문서 이 외에도 상품가격의 경우 공식가격에 비해 2~3배는 비쌌다. 물론 교육이나 의료는 무료로 서비스되었기 때문에 돈이 안들었고, 기본적인 생필품의 경우에는 공식환율대로 수입해놓았던데다가 주택임대료같은 부동산 비용이나 공공요금은 왕창 쌌기 때문에 암시장 환율만으로 구매력을 평가하기는 무리가 크지만, 어쨌든 그와 별개로 지하경제 규모가 엄청나게 컸던것은 사실이었다.
암시장이나 농민시장에서 가볍게는 다차(별장)에서 생산한 작물들을 교환하거나 판매하는건 물론이고, 물론 직원들이 몰래 몇개씩 빼돌린 제품도 거래가 이루어졌으며 공산당 당원이거나 국영기업에서 주요직책을 맡을 정도가 되면 인맥이나 뇌물 등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서방에서 비디오테이프나 음반같은걸 수입한 다음에 웃돈에 팔아서 짭잘하게 용돈벌이도 하고 그랬다고 한다. 물론 암시장에서 파는 수입품의 가격이 암시장 환율에다가 추가적인 이윤이 붙기때문에 물건값은 왕창 비쌌다. 여하튼 그래서 암시장 환율만으로 볼때 구매력은 낮아보이지만 실제로는 미국이나 서구권에 비해서는 낮기는 했지만 그래도 국가에서 보조하는 금액이 결코 적지는 않았고, 저축률도 나름대로 높은축에 든것을 보았을때 암시장 환율의 그것보다 컸다고 할수있다. 공식환율보다는 낮다는것은 여전하지만(...) 여하튼 그 구매력을 충족시킬만큼의 고품질의 소비재가 제대로 공급안되었기 때문에 그 구매력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문제점이 너무도 컸다. 공산주의 국가라는 특성을 활용하여 2억을 넘는 거대한 중산계층을 만들어내기는 했어도 경공업의 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거대한 중산계층의 구매력을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UN의 통계에 따르면 1인당 gdp는 83년에 3650달러로 가장 높았고(당시 시장가격을 반영한 수치다.) 관련자료 그 이후로는 대체로 감소 추세였다. 이에 기초해 GDP를 따지면 1978년부터 일본보다 그 수치가 낮아졌다. 1980년에는 서독에도 일시적으로 역전당했고, 1986년에 다시 역전당했다. 미국에 비교하자면 1970년 기준으로 약 절반 수준인 GDP, GNP를 자랑했으나 80년대에는 1/3으로 쪼그라들었다.
경제성장률의 경우 스탈린, 흐루쇼프 시절에는 미국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계획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경제가 침체되었다. 다만 1960년~1989년까지 소련의 평균 경제 성장률은 전 세계에서 평균 이상이었고 1980년대에도 미미하게나마 성장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1986년 이후에는 자료마다 다르지만 저유가로 말미암아 -2~2% 수준의 저성장을 기록했다. 같은 시기 미국의 경제성장률도 낮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률은 훨씬 높았다. 사실 소련 해체 이후의 경제상태가 워낙 개막장이라 묻히는 것이지 소련 말기의 경제 상황도 결코 좋은 것은 아니었다.
과학기술 및 산업
소련은 국가가 계획경제에 의거해서 과학기술을 중점적으로 육성했기 때문에 기초과학, 우주과학기술, 군사공학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항공우주 분야는 넘사벽이었다. 세계 최초의 무인우주선, 유인우주선 모두 소련이 날린 것이었고 당장 화성, 금성, 수성에도 탐사선을 보내고 소련 붕괴 직전까지 우주왕복선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정도였다. 러시아도 소련의 과학기술 기반을 많이 이어받았지만 소련에 비하면 안습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의학, 에너지 물리학, 수학, 화학, 조선업, 군사 기술에 있어서 소련은 고급 인력이 다수 있었으며 중공업은 우랄 콤비나트등 막대한 군수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발전시켰다. 특히 핵 물리학이나 화학, 천문학에 있어서 소련의 과학자들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니콜라이 세묘노프는 소련 성립 이후 러시아에서 최초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받기에 이른다. 소련 시절 노벨물리학상을 수상받은 경우가 총 네 번 있었으며 노벨 화학상은 전술한 경우 한 번이 있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도 소련 시절 때 쌓은 실적을 바탕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두 차례 더 받은 바가 있다. 그러나 소련 붕괴 후 3만 명에 달하는 소련의 과학자들이 외부로 유출되어 현재 러시아의 기초과학 수준은 매우 침체된 상태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후부터 소련 해체까지 미국과 양극체제를 구축하여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였으나, 미국을 압도할 능력을 갖춘 적은 없었고 단지 위협 정도에 그쳤을 뿐이다. 국제연합(UN)에서도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했으나, 타 상임이사국들(미국·프랑스·영국·중화민국)이 모두 서방세력이어서 반대권(Veto)을 행사하는 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대부분의 시기를 서방세력과 신경전을 벌였다. 1971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임이사국이 된 이후로는 좀 나아졌다. 두산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
이외에도 헌법으로 소속 공화국들의 외교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소련과는 별도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도 유엔에 창설멤버로서 가입했다. 처음에는 유엔에서 16개(소련+15개 공화국)의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한 속셈으로 모든 공화국을 가입시키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공화국들이 자치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소련의 실상을 알고 있던 미국이 50개주를 모두 가입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자 최종적으로는 소련의 창설멤버였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가 가입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물론 예상대로 소련 해체 전까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철저히 소련의 거수기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은 정부수립 직후부터 소련과 대립했고 6.25 전쟁으로 사실상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소련은 북한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보아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으며 대한민국이 1955년 UN에 처음 가입하려 했을 때도 소련은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격으로 이를 반대했다.
남한-소련 관계는 1970년대에 들어 조금씩 누그러졌는데, 닉슨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미국의 세계정책이 바뀌고,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강대국 관계도 바뀌게 된다. 이에 따라 한국도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소련도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한국과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관계를 개선하려는 징후를 보였다. 1971년 8월 김용식 외무장관은 국외에서 소련이 한국에 대하여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1972년 5월 16일 비슷한 취지를 밝혔다. 무역법도 고쳐 소련을 포함한 비적성 공산국가와의 교역도 허용하였다.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외교선언을 통하여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에 대하여 문호를 개방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그들도 호혜적인 조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소련도 한국이 아시아집단안전기구의 회원이 될 수 있으며, 남북한의 국제회의 및 유엔 동시가입 실현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1973년부터는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한 사람들에게 소련 입국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1980년 소련에서 개최하였던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도 선수단을 파견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 소련 규탄시위가 벌어지게 되면서 양국간의 적대관계는 계속되었다.
대한항공도 1988년 이전까진 소련 영공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0년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을 시행하면서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를 하였고, 소련과도 수교를 하였다.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고, 노태우 대통령 역시 소련을 방문하는 등 두 국가의 사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그러나 1년후 소련이 붕괴되서(...) 러시아 연방이 외교 관계를 이어 가고 있다.
1991년 7월의 소련 인구는 2억 9,304만 7,571명으로, 당시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였다. 그러나 그동안 미국의 인구가 폭풍성장하여 3억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2016년 현재는 옛 소련 구성국들의 인구를 모두 합해도 미국에 3위를 추월당해 4위권이다.
소련은 다민족국가로, 민족 수가 150개 이상에 달했었다. 1989년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의 51.4%인 1억 4516만명이었으며, 그 다음이 우크라이나인(4419만명), 우즈베크인(1670만명), 벨라루스인(1004만명), 카자흐인(814만명) 순이었다. 별도의 자치지역조차 없었던 독일인과 유대인도 각각 204만명, 138만명이나 되었다. 참고로 고려인은 약 50만명.
대략적으로 보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을 포함한 동슬라브 민족이 70%를 차지했다. 12%는 튀르크계 민족, 기타 10%였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구소련에 해당하던 15개국 인구 총합은 2억 8,767만 4,254명 가량으로 오히려 줄었다. 소련 해체 이후 구소련 구성국이 모두 경제 파탄을 겪었던 탓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