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1913년 경기도 가평 生
·30년 삼각산 승가사서 심월화상 은사로 득도
·봉은사 신원사등서 사미 사집 사교 대교 이력마침
·43년 중국 연변 장춘 하얼빈 등 서 만행
·70년 태고종 창종공로패 수상
·92년 호명산 감로사서 20하안거 성만
내 나이가 올해로 여든 넷인데 참 부끄럽고 덧없군요. 부처님은 여든해를 살다 가셨는데 나는 그 보다 4년을 더 살았어도 아무 가치 있는 일을 못했어요. 이 늙은 몸이 누구의 것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몸이란 것은 자꾸자꾸 갈아 입는 옷에 불과한 것이죠. 그러고 보면 살기를 몇해 살았느냐가 그리 중요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인데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은 이 영원 불멸의 영혼을 위해 다음 옷을 어떤 걸로 준비 했느냐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생난득 남생난득 불법난득’이란 말도 있지만 인간의 몸을 받았어도 축생의 업을 지었으면 다음 생의 옷은 축생이고 축생의 몸을 받았어도 인간될 업을 지으면 다음생의 옷은 인간이란 것이 윤회의 이치 아닙니까. 이 몸은 헛것입니다. 다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영혼은 있으니 그를 바로 아는 일이 우리의 숙업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이라고도 하고 영혼 정신등으로 말하기도 하는 그놈을 우리는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마음이라 해도 그 본래 면목이 아니고 영혼도 정신도 다 그 이름일 뿐이지 그 실체는 아닙니다. 우리가 자성(自性)이라 말 하는 것도 마찬 가지 입니다. 이름이 무엇이건 그건 중요할 것이 없지요. 다만 그놈의 실상을 알아내는 일이 절박할 뿐입니다. 그 절박한 숙제를 풀기 위해 불교를 믿어야 하는 겁니다.
불교는 지혜와 신통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과 제불보살은 지혜와 신통의 선생님들입니다. 지혜는 우주법계의 근본이 되는 자성을 아는 것이고 신통은 그 지혜를 통해 우주법계를 살피고 누리는 즐거움의 행(行)들입니다. 나의 주인은 바로 나일뿐입니다.
나라고 하는 주인이 지극한 지혜를 얻으면 신통의 경지에 이르러 십만억 국토의 모든 모습을 두루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십만억 국토라는 어마어마한 세계에는 이 사바계보다 험난한 곳도 있을 것이고 더 아름다운 곳도 있을 것이지
만 지혜의 마음으로 그 세계를 관하면 미추의 분별도 없어집니다. 그러니 십만억
국토가 하나로 보이고 하나 속에 십만억 국토가 들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되어야 지혜
를 증득할 수 있는데 그것을 위해 수행정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정토를 얻길 원한다면 내가 아미타불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미타
불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러한 서원을 세워야 하고 다음으로 아미타불의 행을
하면 됩니다. 내 몸안에 이미 제불보살의 모습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내가
아미타불을 원하면 아미타불이 될 수 있고 문수보살을 원하면 문수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원하기만 하고 그 행을 받들어 행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중생의 모습
을 벗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떤 행위를 하며 살아가지만 그 행동이 지극한 원행(願行)일때 착실한 과
보를 받아 불보살의 길을 열어 가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
고 이웃과 잘 지내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선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극락세계
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선한 업이 불법을 닦은 이의 원행이 아니면 극락에
머무는 시간은 짧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원행이어야 합니다. 부처님과 여러 보살님
들의 가르침과 서원을 알고 ‘나도 그렇게 해야지’라는 원력을 갖춰야 합니다.
원력이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원행은 그 믿음의 실천인 겁니다.
이 나이든 납자에게도 큰 서원이 하나 있습니다. 나의 서원은 다른 사람들이 들으
면 질겁을 하기 일쑤여서 밝히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이 몸을 벗고자 하는데
그냥 눕거나 앉아서 죽음을 맞아 옷을 벗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스스로 내
몸에 불을 당겨 이 육신의 허상을 태움으로써 부처님의 한량 없는 은혜를 갚을까
합니다. 화마의 고통은 잠시이고 부처님 세상에 태어나는 즐거움은 영원할 것이니
주저할 일이 아닙니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 제23’에 희견 보살께서 일월정명덕 부처님 회상에서
수행 정진 할 때 현일체색신삼매(現一切色身三昧)를 증득하고 육신으로 공양함을
서원하여 부처님 앞에서 하늘의 보배 옷으로 몸을 감고 향유를 끼얹고 스스로 그
몸을 태워 공양 올려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나는 그 대목을
읽고 매우 큰 감명을 받았고 내 몸도 소신공양(燒身供養)하리라 서원을 세웠습니
다. 소신공양의 목적이 이 몸의 허상을 버리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희견보
살의 서원처럼 불은에 보답하고 모든 중생이 괴로움과 병환을 여의고 나고 죽는
일의 얽힘으로부터 벗어나 무생법인을 증득하길 염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소신의 원을 세운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여기에 이르렀지
만 그 원을 실천 하고자 하는 마음에는 한치의 오차가 없습니다. 다만 나 스스로
그 좋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데 날이 갈수록 무서운 생각도 줄어들고 조금씩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소신을 할 만큼의 근기를 키우는 일이 나의 수행이기
도 합니다. 호명산에 감로암을 짓고 좌선정진 해 온 것이나 서방극락교주 아미타
부처님을 염불하고 관하는 것이 모두 내 서원의 실천의지를 다지는 수행인 것입니
다.
특히 나는 <관무량수경>의 6관법 중 제1관인 일상관(日想觀)을 참구해 왔습니다.
일상관의 참구를 두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와 중생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한 곳에 모아 서쪽을 생각하라. 그리
고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아니고 눈이 있는 자는 누구나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니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지는 해를 똑똑히 바라보라.
그리고 생각
을 움직이지 말고 곧 지는 해가 마치 서쪽하늘에 매달아 둔 북(鼓)과 같음을 보도
록 하라. 해를 보고 난 후에도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그 모습이 한결같이 보이도
록 하라.”
내가 소신공양의 원을 공개하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나 혼자 몰래
하다가 산불이라도 날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50여년전 개운사에서 한 노
스님이 칠성각 앞에 장작을 쌓아 놓고 소신을 했는데 손상좌가 급히 노스님을 끌
어 내려 원을 이루지 못하고 화상만 입는 모습을 보았기에 혹 나도 생각지 못한
방해를 받을까 염려 됩니다.
또 소신이 확실히 되지 않으면 다시 다비를 해야 하
니 번거로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소신공양을 공개하여 내 간절한 서원이 이뤄
져 불보살님 은혜를 갚을 수 있길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내가 이 허
망한 몸뚱아리를 태워 공양함으로 수 많은 중생들이 기쁨을 얻고 분단된 나라가
하나로 합쳐지고 사회도 안녕하고 헐벗고 괴로운 사람이 없어질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의 뜻을 모르고 상좌들이나 신도님들이 자꾸 말려서 큰 일입니다.
그래도 나는 서원을 이루고 말 것입니다. 방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도 몰래 혼
자라도 이루고 말 것입니다. 현행법에 의하면 내 행동이 가당치 않은 것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은 변함이 없으니 누
구도 방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만약 단한번 아미타불을 생각만 해도
팔십억겁 동안 지은 무거운 죄가 능히 소멸된다 했습니다. 간절히 부처님을 불러
야 합니다. 그 부처님을 부르는 사이사이에 우리도 부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백
명이 앉아 참선을 하여 한사람 득도하기는 어려워도 만 사람이 모여 염불을 하면
만 사람이 모두 서방극락에 왕생 한다고 했습니다.
그 서방극락이란 아미타 부처
님이 계신 곳인데 그곳에서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고 정수리에 수기를 받아 성불
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유한합니다. 아니 생명 자체는 무한이되 그 생명의 껍데기는 유한입
니다. 몸이라는 옷도 유한이고 물체라는 형상도 유한입니다. 무한을 싸고 있는 유
한을 깨고 그 무한생명의 참 모습을 아는 것이 성불입니다. 그러기 위해 염불을
하라는 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부르고 제불보살을 부르라는 겁니다.
그 거룩한 이름을 입으로만 불러서는 안됩니다. 온 마음을 모아 지극하
게 불러야 합니다. 지극한 부름에는 응당한 답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젊은 시절 나라 잃은 서러움을 중국 대륙의 연변과 장춘 하얼빈등지에서 실
컷 맛 보았습니다. 더러 탁발을 나가면 바루에 음식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배
고픔보다 서러운 것이 나라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별이 총총한 이국의 들판에서
나는 염불로 밤을 세운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며 객지를 떠돌며 해방된 조국에서 부처님 법의 바퀴를 굴리는 비원을 키웠던 것입니
다. 6.25전쟁때도 나는 산더미 같은 시체 속에서 염불로 살아 났습니다.
염불 간경 참선 주력의 여러 방편이 다 성불을 위한 것입니다. 어느것이 좋고 나
쁘다고 분별할 것이 아닙니다. 다 좋습니다. 무엇이든 일심으로 정진 수행하는 사
람에게는 다 좋습니다. 그러나 이게 좋으냐 저게 좋으냐를 따지고 정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효용이 없습니다. 방편이란 그런 것입니다.
염불도 수행이고 참선도 수행입니다. 간경도 수행이고 주력도 수행일뿐 그 자체가 성불은 아닙니다.
그 모든 과정을 뛰어 넘은 자리에 열반의 기쁜 종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맑고
고운 소리를 듣는 것이 모든 중생의 소원이 아닙니까.
우리들이 부처님께 귀의 했다고 말하는데 귀의한 그 순간 우리의 몸은 제불보살님
의 외호를 받게 됩니다. 마음이 산란하여 제불보살의 위신력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몸은 이미 보살이요 부처라는 얘기입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보살을 염하고
부처님을 부르는데 어리석은 중생으로 살아갈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성불을 위해서는 앞에서 말했듯이 지혜를 가꾸어야 합니다. 한량없는 믿음의 마음
으로 신실된 삶을 누리며 지혜를 가꾸어야 합니다.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고 참선
을 하고 경전을 읽고 주력을 하여 튼튼한 지혜의 성을 쌓아 열반의 기쁨을 맛 보
아야 할 것입니다.
불자들은 그 기쁨을 위해 늘 노력 정진하며 즐겁게 살아야 합
니다. 소신공양으로 불보살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서원이 있어 이 나이든 납자도
오늘의 삶이 허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자꾸 소신공양 얘기를 하니까 무서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마음이 정해지면 편안하기 그지 없음을 아시고 방해나 말아 주시
기 바랍니다.
극락세계가 멀리 있지 않고 아미타불이 따로 있지 않으니 지금 인간 중생이 사는
곳을 더럽히지 않으면 이곳이 극락이고 마음을 잘 닦으면 이 모습이 아미타불이니
부디 게으름 피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성불의 대도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방편에
속지 말고 목적에 욕심내지 말며 마음을 비우고 비워 무량청정 불국토를 이루십시
오.
나는 내 살아 온 과정을 되짚어 보건대 여러분께 아미타 부처님을 일심으로 염하
는 염불을 권하고 싶습니다. 아미타 부처님의 한량없는 국토에 태어나길 발원하라
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발원이 성취되게 하려면 무량의 공덕을 지어야 하고 무량의
수행정진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아야 무량청정의 아미타 국토가 펼쳐집니
다.
첫댓글 모든 중생 다 같이 염불하여 모두 다 언제나 모든 불보살님의 가피 안에서 늘 편안하고 행복한 삶 영위하며 살아가다가 아미타부처님계신 극락세계에 나기를 기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
원상스님의 큰원력과 자비심이 가슴 뭉클합니다 아미타부처님의 가피입은 저도 자신을 되짚어 보게 됩니다.열심히 염불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겠습니다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