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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四 章. 정기(正氣), 살이 살을 먹고
( 一 )
전갈 세 마리가 그려진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하얀 바탕에 금색으로 테두리를 하고, 얽히고 설킨 전갈 세
마리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딩자인은 빠르게 다가오는 소선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전갈 문양. 자라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보았던 당문 표기였다.
입는 의복에서부터 온갖 곳에 이르기까지...전갈 문양은 너무
눈에 익숙했다.
일반 무인은 전갈 한 마리, 역주(力主)들은 전갈 두 마리, 부
대주는 세 마리, 실장이나 대주들은 네 마리...그러나 그 중에
서도 당가의 사람은 전갈 한 마리를 더 표기했다. 당씨 성을
쓰는 일반 무인은 다른 가문 역주급에 해당하는 권한을 누렸
다.
당자인 등은 전갈네 마리를 표식할 수 있는 반면에 한연지는
같은 부대주이면서도 전갈 세 마리밖에 표식하지 못했다.
소선에 탄 인물...당씨 성을 쓴다면 역주, 그렇지 않다면 부대
주였다.
'제법 한가락하겠군.'
당자인은 뱃전에 서 있는 인물을 보면서 누구인지 짐작해 봤
다. 물결이 제법 거세 큰배도 흔들리고 있는데 상대는 붙잡은
것 하나 없이 꼿꼿한 자세로 서 있다. 천근추(千斤墜)를 시전
하고 있지 않다면 중심 이동이 놀라운 인물이었다.
당자인은 후자라고 생각했다.
굳이 천근추를 펼칠 필요도 없었고, 조그만 소선이기에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중심 이동이 뛰어나다는 것은 어떠한 자세,
어떠한 환경하에서도 공격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선이 더욱 가까워져 육안으로 식별할수 있는거리에 이르자
당자인의 눈살은 더욱 찌푸려졌다.
'사마전...!'
당문주 당기룡의 충성스런 개.
당자인은 자신이 모종의 계략에 의해 깅호에 내던져졌음을 아
직 몰랐다. 소파산에 자리를 잡고 이만한 세력을 양성하기까지
눈물겨운 고생을 했다. 그 이면에는 당문주의 가슴에 엄가지검
을 꼽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큰몫을 해줬다.
"제법 빠를것 같은데요?"
조문덕 또한 날카로운 예기를 느꼈는지 한마디했다.
"사마전이라는 놈이다. 당문주의 밑바닥을 햟아먹고 사는 놈이
지."
말 속에는 평소의 당자인답지 않게 증오의 냄새가 풀풀 풍겼
다. 그런 점을 감지 못할 조문덕이 아니었다.
"골통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후후후! 물고기들이 먹기 좋게 잘
게 쪼개서..."
"아니다. 내버려둬라. 사자(使者)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소
문기(小門旗)를 걸고 오는 모양인데...어디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들어나 보자."
당자인은 사마전의 배가 다가오도록 가만히 내버려뒀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 낸다고 했던가.
사마전은 놀랍도록 침착해진 당자인을 보면서 자신의 시대가
빠르게 끝나가고 있음을 절감했다.
"당철휘와 한연지가 합류했을 텐데..."
"후후후! 사마전...착각하는 모양인데...나는 당문에서 파문당
한 사람이오. 나의 행동에 간섭하려 한다면 용서하지 않겠소.
그리고 나를 대할 적에는 일방의 방주로 대해 주시오. 그만한
예의쯤은 알 사람이..."
당문을 떠나오기 전 문주가 한 말과 한치도 어긋남없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과연 당자인은 기대한 대로 성장했다. 파문의 아픔
이 유약함을 떨치고 당당한 거목으로 우뚝서게 만들었다.
사마전은 품속에서 밀지(密紙)를 꺼내 디밀었다.
"문주의 전갈이다."
당자인은 먹이를 앞에 둔 호랑이처럼 귀광을 발산하면서 쉽게
받아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절한 것도 아니었다. 무척 안락
해 보이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손으로 턱을 괸 채 선택의 자유
를 만끽했다. 당문주의 전갈을 거절할수 있는 입장, 그런 위치
에 있다고 자신했다.
"이 서신을 본 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 목을 베어도 좋다.
그때는 일방의 방주로 예우를 해주지."
당자인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리자 조문덕이 나서서 한 손으
로 가로챘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자인
에게 바칠 때는 더없이 공손했다.
'당자인...어디서 저런 사람을 얻었는가. 나와 대적해도 손색
이 없을것 같은데...'
사마전은 지금 조문덕을 자신의 위치에 놓았다. 당자인쯤은 아
직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자부심과 그의 수하라는 편협된 생
각 때문에...하지만 조문덕이 사망산검과 동수를 이뤘다는 사
실을 안다면...?
"미친...아니야! 이건...사마전! 무슨 꿍꿍이속이냐?"
당자인은 눈이 붉어진 채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었
다. 와락 구겨진 밀지가 그의 격한 심정을 대변했다.
사마전은 다시 밀지 한장을 꺼냈다.
"후위대주 당잠청 어른께서 전해 주라고 하더군."
이번에는 전처럼 느긋하지 않았다. 쏜살같은 기세로 달려와 솔
개가 병아리 채듯이 가로챘다.
잠시간의 침묵...
"후후후...!"
사마전은 당자인의 웃음 소리가 상처 입은 맹수의 울부짖음으
로 들려 섬뜩했다.
"그랬었군...어쩐지 아버님이 빼돌리기는 거액이었어. 문주의
지시를 받고 안전하게 지원해 준 은자들..."
나머지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속엣말로 중얼중얼거리면서 선실을 빙빙 돌았다. 차기 문주로
내정된 줄 알았다가 갑자기 역도로 몰렸고, 온갖 간난 끝에 오
늘을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안색이 급변하기 수십 번 마침내 당자인은 본래의 신색을 되찾
았다. 짧은 시간에 무수한 갈등을 겪은 사람답지 않게 차디차
고 냉정한 얼굴...
당자인은 다시 의자로 돌아가며 확신에 찬 음성을 토해 냈다.
"조문덕, 가서 당철휘와 한연지를 데려와라."
"맙소사!"
사마전은 황급히 일어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는
한연지를 부축했다.
유난히도 결벽증이 심해 조금이라도 티끌이 묻으면 털어 버려
야 직성이 풀리던 한연지, 그래서 옷도 새하얀 백의를 즐겨 입
지 않았던가. 지금 몰골은 그런 한연지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
었다.
백의는 지저분하게 더렵혀지고 구겨졌으며 군데군데 찢어져 있
기도 했다. 곡기(穀氣)를 오랜 기간 손대지 못한 듯 피부는 거
칠었고 안색은 창백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단정히 뒤로
묶은 머리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고 부단히 애쓴 흔적을 보
여 주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
놀라움에 입도 제대로 벌어지지 않았다.
"후후후! 내 수하들인 줄 알았다면 거칠게 다루지는 않았을 텐
데...쯧쯧!"
당자인은 짐짓 탄식을 터뜨리며 한연지의 턱을 치켜 들었다.
"문주의 명을 받들어 수하가 되었다는 말을 왜 하지 않았나?
진작 말했다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순간 상황을 짐작한 사마전이 일갈을 터뜨렸다.
"후대주! 말이 지나치다. 문주는 힘을 합하라고 했지 억누르라
는 말..."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퉤엣!"
한연지가 당자인을 향해 입에 고인 침을 힘껏 내뱉었다.
"너는 어차피 이 정도밖에 안 돼. 죽으라고 발버둥쳐 봐야 문
주의 손바닥에서 맴도는 인간일 뿐이야."
"후후후...!"
당자인은 독설을 웃음으로 받았다. 그리고,
"조문덕,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은데 어찌하면 좋겠
나?"
"흐흐흐! 계집은 두들겨 패야 말귀가 트이는 법이죠."
"그런가?! 하하하...!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렇게 하면 하
녀를 얻을 뿐이야. 나는 혼이 사라진 여자는 얻고 싶지 않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앞으로 주모(主母)를 대하듯 모셔라. 생
활에 조금도 불편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라. 알았나?"
"알았습니다. 주공!"
조문덕의 행동은 순간적으로 돌변했다. 한연지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굽히며 존경의 예를 표시했다.
"흥! 가두고 굶기고...그래도 이번에 하는 수작은 조금 머리를
굴렸군."
한연지는 치욕스런 기억이 되새김 되는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당자인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십여 명의 수하를 잃고 선착장에
돌아온 다음부터였다.
그는 말에서 내리기 바쁘게 선실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당철
휘를 찾아갔다. 그로부터 당철휘의 모둔 자유는 박탈되었다.
굵은 승삭(繩索)으로 몸을 꽁꽁 묶이고 배 밑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한연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루에 한번씩 들렀다.
"가장 고통스러운 게 뭔지 아나? 배고픔, 기갈...당해 보지 않
은 사람은 모른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그런 것을 알아야 돼."
"배고픈가? 목이 마른가?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구걸은 못 하
겠지? 살기 위해서는 해야돼. 나는 참많이 얻어먹었어. 쉰 밥
을 먹고 배앓이 해 본적 있어? 배고프면 소리쳐라, 밥을 줄테
니."
"지독하군. 의지를 보여 준다 이건가? 다 부질없어. 한마디 하
지. 너희들이 죽으면 장강에 던져 버릴 생각이야. 물고기들이
좋아하겠지? 그리고 당문에서는 너희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전
혀 모를 거야."
고통은 지독했다. 배고픔이 그런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먹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배고픔보다도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기갈이었다. 아랫 입술을 깨물어 피를
마셔 보았지만 갈증만 더욱 심하게 찾아왔다.
운기조식을 할수만 있다면...
당자인은 무공을 사용할 수 없도록 산공독(散功毒)을 복용시켰
다. 순수한 정력(精力)으로 만 버텨야했다.
어느 날, 배가 무척 빠르게 움직였다. 일사불란하게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도 들리고...한연지는 어떤 상황인지 말해 주지 않
아도 짐작 할 수 있었다. 무산파와의 싸움이었다.
한연지는 오랜만에 웃었다. 바싹 말라버린 입술이 움직이며 뇌
살적인 웃음을 떠올렸다.
'멍청한 놈...'
자신에게 생각과 행동의 자유가 있다해도 이번 공격에는 참여
하지 않았으리라.
소병(小兵)이 대병(大兵)을 칠 때는 기습을 위주로 한다. 그렇
지 못하다면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살려야 한다. 무산파는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도 공격을
유도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니.
'대주나 실장감이지 문주감은 아냐.'
한연지의 눈은 고통스런 빛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상
황을 받아들이는 당철휘에게 향해졌다. 그만이 유일한 당문주
재목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당자인에게 결박을
당할 때도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실력의 차가 뚜렷해서 포기
했다면 말이 되지만 일부러 결박당했다는 편이 옳았다.
당자인에게 회수당한 비폭정, 당뇌전, 그리고 그가 지녔던 절
독을 살포하며 대항했다면 많은 대가를 받아냈으리라.
그는 주루에서의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말을 잃었다.
틈만 있으면 눈을 감고 뭔가를 깊이 생각했다. 어떤 때는 바로
지척에 이르도록 까마득히 모르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도 있었
다. 철저한 무방비, 무감각 상태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누예가 성충이 되기 전 겪어야하는 번데기 상태에 돌입 했음을
직감했다.
당자인을 상대하라고 풍동인이 목숨을 버리며 건네 준 비폭정
과 당뇌전을 순순히 내준 데는 이유가 있을것이다. 아마도 그
런 암기의 한계를 절감한 모양이다. 그보다 더욱 나은 것, 그
것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리라.
당자인이 나타나면 무척 괴로운듯 심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
다. 눈에는 동정 어린 눈길도 깃들인 채...하지만 당자인이 물
러가고 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
리고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십여 일 이제는 끝났다. 승패는 당자인의
일방적인 판정패였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지 않겠지만...
"한연지, 돌아가서 쉬어라. 참, 파사국에서 들여 온 귀한 지분
(脂粉)이 몇 갑 있다. 보내 줄 테니 바르도록 해라. 나를 위해
서...후후후!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 곱게 말을 들어라.
그것이 신상에 이로우니까."
"마지막 말, 명심하지."
한연지는 사마전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일어섰다.
이때 장한들에게 끌리다시피 들어오는 당철휘가 보였다.
'번데기에서 깨어났군.'
한연지의 눈가에는 그 누구도 모르게 빠른 기광이 스쳐 갔다.
요 며칠간 당철휘는 심하게 않았다. 육체적 고롱을 능가하는
정신적인 번뇌로 인해서...지금처럼 편안한 모습은 아니었다.
자신이 끌려 나오기 전에는 그런대로 원래의 신색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그때도 얼굴에서 부드러운 기미는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푹 처박고 끌리다시피 휘청이며 걸어오는 지금
은 결에서 느끼기에도 온화한 미소가 입가에 물려졌다. 독한
천성을 감안한다면...소리장도(笑裏藏刀), 한연지조차도 방심
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심계를 갖줬다.
푸른 물살을 스치듯 지나가는 울새가 보였다.
"휴우...!"
남모를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문주를 상대로 심계를 펼친다는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이 들
었다. 그를 알면 알수록, 생각을 읽으면 읽을수록 놀라웠다.
삼절 진인을 제거하는 것부터 일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모종의 계략을 완성시켜 나가는 과정일 뿐이었다.
후계자 세 명의 능력을 완성시킨다는 쪽으로도 생각해 봤다.
그 생각도 무리가 있는 것이 혈반사접을 찾으러 나간 당동한에
대해서는 전혀 알수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후계자의 능력을 키
워 준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하는데...'
검은 날개, 하얀 배를 가진 물새가 다시 수면을 스쳐 갔다.
* * *
'낄낄낄! 무림에 나온 환영 인사치고는 너무 성대하군."
"이놈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정신 똑바로 차려 뒈지고
싶지 않으면..."
정태구와 마대는 거리를 좁혀 오는 복면무인 여덟 명을 보면서
낄낄거렸다.
말이 되지 않았다. 배에서 내린 일행은 나루터에서부터 일단의
무리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 후로 숨돌릴 틈도 없는 차륜전
(車輪戰)이 시작되었다. 무산(巫山) 마두(碼頭)에서부터 무산
까지는 겨우 삼 리밖에 안되는데 하루가 지나도록 나아가지 못
했다.
복면인들은 꼭 여덟 명씩 나타났다.
한결같이 독공의 달인들...
일세를 풍미했던 무산파파가 독에 중독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분노한 갈홍아 역시 싱겁게 무너졌고, 그나마 일곱 차례의 공
격을 물리칠수 있었던 것은 사망산검이 중독되는 위험을 감수
하면서 악전고투한 덕이었다.
"낄낄낄! 너는 몇 마리나 남았냐?"
마대는 사뭇 여유롭기까지 했다.
"한마리...빌어먹을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들이야?"
정녕 알길이 없었다.
처음보는 독술, 처음보는 절독.
천만다행인 점은 비홍사의 독기가 절독을 어느 정도 중화시킨
다는 것이었다. 전신에 십 년 묵은 시신처럼 살점이 부패하면
서 쏟아낸 사독은 복면인들의 절독과 극성이었다.
"제길! 그래도 네놈 자식들은 원이나 없이 죽었지. 나는 무슨
지랄병이 들었는지 이놈들 욕구조차 마음대로 채워 주지 않았
어. 아주 튼튼한 놈들만 선별해서 교미를 시켰지. 한이라면 그
것뿐이야."
"흐흐흐...! 그런 놈이 내 자식들은 왜 그냥 내버려뒀지?"
"튼튼한 놈들이었거든."
삼 장 거리, 흑의복면인 여덟 명은 조심스럽게 다가들었다.
그들도 비홍사의 놀라움을 여러 번 견식했는지라 쉽게 다가들
지 못했다. 하지만 일 장거리로 다가서기 무섭게 흑수투(黑手
套)에 감춘 절독을 살포하고는 물러서리라. 중독되지 않는다면
전처럼 물러설 것이고, 무산파파처럼 중독된다면 악귀처럼 달
려들어 요절낼 심산일 게다.
"네놈은 몇 마리나 남았냐?"
"이제 아홉 마리...제길 내 싸움도 아닌데 끼여들어서..."
스물 여덟 마리...그 정도는 죽었다. 마대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비홍사. 이놈은 까다로운 성질 만큼이나 길들
이기도 힘들었지만 번식 능력도 없었다. 불 같은 발정(發情)에
비하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었다. 암수 한 쌍을 접붙이면 새끼
가 나올 확률은 거의 일 할, 전무하다 할 수 있었다.
"이놈아, 네놈하고 통쾌하게 술 한잔 같이하고 싶었는데...미
안하게 됐다."
정태구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괜찮아. 내 다리를 찾은 것으로 만족해."
마대는 동의(動倚)에 앉아 가죽주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제갈
문의 역작이었다. 움직이는 의자, 의족보다 움직이는 데 수월
했고 무엇보다 방향 전환이 손 쉬웠다.
정태구도 품속에 손을 찔러 넣어 싸늘한 한기를 뿜어 내는 비
홍사의 촉감을 즐겼다. 이번 결전이 마지막이었다. 저놈들의
절독을 더 이상 막아낼 비홍사도 없고, 그틈을 놓칠 인간들이
아니었다.
"야, 야! 저놈의 새끼가 왜 기어나왔냐?"
정태구는 이 장앞으로 다가선 복면인들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중 마대의 놀란 소리를 듣고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응? 어!"
단비하가 제법 여유있는 자세로 전장에 끼여들었다.
정태구는 늙은 구렁이답게 무산파파가 단비하를 쳐다보는 눈
속에 담은 정을 보았다. 갈홍아, 악귀처럼 심성이 사악해진 질
녀를 본래의 곱디 고운 성품으로 이끌어 줄 사람은 단비하뿐이
었다.
젊기에, 투박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사내답게 보였기에, 육
척 장신에서 뿜어지는 허허로움이 매력적이었기에, 그래서 단
비하만은 모든 싸움에서 제외시켰다. 중독되어 의식이 혼미한
무산파파와 갈홍아를 부탁한 것이다. 사망산검 이철진까지 쓰
러진 다음에는 싸움을 할 만한 손이 없었지만 단비하만은 제외
시켰다.
지금쯤은 무산파에 당도해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이 싸움은 내가 맡겠습니다."
찢어진 입이라고 터져 나온 소리는 더욱 가관이었다. 장문과
사망산검까지 당한 마당에 백면서생이나 다름없는 놈이 무얼
어째?
정태구는 안색이 일그러지면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만용부리지 말고 빨리 꺼져!"
순간이었다. 단비하의 신형이 쾌속하게 쏘아지며 정태구와 마
대의 앞을 가로막았다. 복면인들과의 거리는 일 장반, 이제 두
어 걸음이면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몸을 빼기에는 너무 늦었
다.
"비홍사를 꺼내서 저를 물어 주십시오. 빨리!"
"이, 이놈아! 비홍사는 독기만 쐐도 절명하는데 네놈이..."
"빨리!"
"옛다. 모르겠다. 네놈 죽는 것은 분명히 내 탓은 아니다."
마대의 손이 가죽주머니에서 뽑혀졌다.
과연...비홍사는 일세를 풍미할 만했다. 가죽주머니에서 묵빛
광채가 터졌다 싶은 순간 벌써 어깻죽지와 허벅지에 극심한 통
증이 밀려들었다. 얼마나 독성이 강한지 물린 자리는 퉁퉁부어
오르고 피부색이 검게 변색되었다.
한지에 먹물이 흡수된다고나 할까? 구릿빛 피부가 검게 물들어
가는 광경은 섬뜩함을 지나 아름답게 조차 느껴졌다.
단비하는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골기도찰법보다 잔인한
고통이 있을까 싶었다. 아무리 비홍사의 독이 치명적이라해도
운기할 틈은 있을것 같았다.
한데 정작 부딪쳐 보니 그게 아니었다. 운기할 틈조차 주지 않
고 심장으로 바싹 다가오는 독기는 막을 길이 없어 보였다.
땅이 확 일어나고, 나무들이 저절로 쓰러지며, 하늘이 빙글빙
글 돌았다.
'지면 죽는다. 이겨 내면 당절삼해를 능가하는 하독법을 얻는
다.'
아랫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순간, 비릿하면서도 찝찔한 액체
가 입속으로 흘러들었다. 동시에 독성과는 다른 아픔이 찰나간
이지만 찾아왔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기해혈에 모인 진기를
끌어올려 손끝에 모았다.
쏴아아...!
거센 물결이 전신 혈도를 격타하는 느낌.
의념(意念), 운기행공의 요점인 의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경지였다. 하지만 혼미한 의식 속에서 운공을 하고 있는
단비하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위험해!"
누군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흑수투를 활짝펼치며
비호처럼 달려드는 여덟 사내도 보였다.
"타앗!"
모든 내력이 빨려 나가는 것 같았다. 손끝에 모인 진기가 방사
되면서 비홍사의 독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물러서라!"
누군가 소리쳤다. 하지만 은자 몇 푼 주고 산 철검이 더욱 빨
랐다.
쒜에엑!
환상처럼 너울지는 검, 아름다운 장미가 만개하듯 검광이 하늘
하늘 쏟아졌다.
"크윽!"
신음 소리, 무릎 관절이 힘없이 꺾이며 대지에 몸을 누이는 복
면인들...
"허억! 헉!"
거친 숨이 몰아쳤다. 천릿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사람처럼 가슴
이 답답했다. 망치로 뒷머리를 얻어맞은듯 아찔한 현기증도 일
었다.
툭!
철검이 떨어졌다. 지금은 철검을 들고 있을 힘조차 없었다.
'목을 쳐 오겠지?'
자신이 몇 명을 베었는지도 기억에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검은
그림자는 무조건 베었으니 대 여섯은 될 것 같은데...
푸르디 푸른하늘, 밝게 빛나는 태양, 그리고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웃음과 열정의 현란한 폭발.
쿵!
단비하는 썩은 고목처럼 쓰러졌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즐감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
즐독입니다
즐~~~감!
즐독하였습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즐~~~감!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함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
즐독 합니다 ㅡㅡㅡㅡㅡㅡ
즐독 ㄳ
즐독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