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전 텔레비전을 보면서 2분을 못 참고 채널을 돌렸다. 박완서 소설가님의 문학권력은 동전의 양면처럼 ‘권리위에서 잠을 잔’ 이북 실향민의 실책의 역사와 같다. 우리 같은 사람이 죽어야 통일이 된다고 하는 목소리는, 깜빡하면 그냥 속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공산당에 쫓겨온 이들을 죄인으로 고정하는 좌파 어법에 아부하기란 사실을 숨기게 된다. ‘한’이 맺힌다 하는 차원의 박완서 할머니 때 감정을 기묘하게, 2세대들에 떠넘겨서 손가락질을 받도록 하게 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박완서 할머니의 ‘만행의 역사’에 너무 ‘한’이 맺혀서, 연기학원 안다녀도 ‘눈물 연기’는 자신있다. 그 한 맺힌 생각만 하면 눈물이 쭈르르르 흐르기 때문이다.
1989년의 [창작과 비평]의 “복원되지 못한 것을 위하여”가 쓰여진 이래에, 대한민국 건국을 훼방한 여운형씨가 빛을 발하기는 일이 일어나기 까지, 이북 실향민 2세는 한이 맺히고 박완서씨같은 이북 실향민 2세들의 가슴에 상채기를 주면서 밥벌어먹는 소설가만 잘나간 시간들이었다. [이중간첩]을 찍던 한석규에서 변절한 한석규의 시간이 얼마되지 않는 다는 사실에 놀라울 이유도 없고, 지면에 맞추어 정치권력 따라서 사고방향을 이리 저리 틀어온 것으로 악명 높은 구세대 소설가의 행보에 지나치게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이만 피곤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소설가 박완서씨를 잊어야 할 시간일 수 있다. 이북 실향민임을 앞세워서 소설가로서 밥벌어먹는 정치성을 뿌리채 의심해야 될 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황장엽 선생이 개혁개방된 북한으로 돌아가는 날, 소설가 박완서씨도 반드시 덤으로 끼워서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렇게 공산당을 피해넘어온 동세대인들 모두를 죄인으로 몰아버리며 밥벌어먹는 차원의 발언을 한다면, 반드시 꼭꼭 공산사회 북한에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대학가 좌파 수정주의 역사학에서 이북 실향민이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아주 잘 아는 발언을 했다. 그것은 [창작과 비평]의 그 유명한 소설을 생각하면 그러하다. 그 소설이 대학가에서 바람을 잡은 이후에, 대학가에서 온갖 사회주의 좌경 현대사 물건들이 술술 통하게 되었다.
극동방송 장경동 목사님은 오늘 강좌에서 한국 교회에서 사라진 본질성을 이야기했다. 한국 문단에서 소설가의 문제에도 마찬가지이다. 문단의 어른으로 젊은 세대를 고려해야 되는 입장의 할머니 작가가, 특정 지방출신을 이야기하며 그 지방에서 나온 2세대들을 죄악으로 몰아버리는 심리적 짐을 지워주는 것은, 우리 문학이 얼마나 ‘인간’을 다루지 못하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훗날의 역사가는 어떻게 이북 실향민 대다수가 이북 실향민 상징을 팔아먹는 박완서 소설가에게 믿음이 배반당했는가를 이해하는 데에서, 오늘을 정리할 것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이북 실향민 2세대가 정체성을 지키는 이가 거의 없는 점이 이해가 된다. 이렇게 짐 떠넘기고 상징 팔아 밥벌어먹는 작가들의 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