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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만큼 아늑해서 한번 올라오면 좀처럼 내려가기가 싫어요. 여름엔 더워서 남편 서재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내 공간이 아니다 싶은 마음에서인지 집중이 안 되더라고요.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번거로움 때문에 한번 올라가면 서너 시간은 꼼짝하지 않아요.”
마감시간에 쫓기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집중력을 요구한다.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낮 시간 대부분을 다락방에 처박혀 작업에 몰두한다. 비 내리는 날에는 한술 더 뜬다. 아예 다락방에서 나오질 않는 것.
“천장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가 온몸 가득 편안함을 가져다줘요.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싫은 다락방 덕분에 제 작업의 폭도 깊어졌답니다.”
주부 송경란 씨의 베란다 DVD방
“베란다 아지트에서 영화감상하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결혼 3년차 주부 송경란(30·경기도 안산시 부곡동) 씨. 계절마다 패브릭으로 집안 분위기를 바꾸는 감각파 주부지만 하나둘 살림살이가 늘면서 점차 공간 활용에 아쉬움이 생겼다. 어느 날 담배를 피우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싶다는 남편의 하소연에 머릿속에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좁은 베란다를 거의 창고처럼 방치하고 있었어요. 그곳에 덩치 큰 홈시어터를 갖다 놨더니 맞춘 것처럼 사이즈가 딱 맞더군요.”
텔레비전을 베란다로 치웠더니 거실이 한결 넓어졌다는 송경란 씨. 남편을 위한 공간으로 베란다 DVD방을 만들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점점 그 아늑한 공간을 찾는 그녀의 발걸음도 잦아졌단다.
“남편하고 취향이 너무 달라서 같이 텔레비전을 보면 토닥토닥 싸움이 벌어지곤 했어요. 로맨틱 코미디류를 좋아하는 저에게 남편이 매번 뻔한 스토리만 좋아한다고 핀잔을 주곤 했거든요.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방해받지 않고 혼자 볼 수 있게 되니까 꼭 영화관에 온 것처럼 편안해졌어요.”
일단 정이 붙고 나니 처음 갖게 된 방을 꾸미듯 인테리어에도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햇빛이 잘 드는 베란다에 커튼을 달고 바닥엔 러그를 깔아 최상의 시청 조건으로 꾸며갔다. 푹신한 대형 쿠션까지 제작했더니 이젠 영화관보다도 안락한 공간이 완성됐다.
“사실 집에 있다 보면 무의식중에 텔레비전을 틀어놓을 때가 많잖아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치웠더니 불필요한 TV 시청을 줄일 수 있어서 좋더군요. 또 밀폐된 공간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꽤 색다른 쾌감을 가져다줬어요.”
베란다 DVD방은 쇼핑몰을 운영하는 그녀에게 넓은 거실 작업공간까지 마련해줬다. 일하는 공간과 쉬는 공간이 완벽하게 분리되다 보니 재택 근무지의 수준도 업그레이드됐다. 블랙과 레드로 극명히 대비되는 베란다와 거실은 그녀에겐 일과 휴식의 완전한 분리를 선사한 셈이다.
채연(5·경기도 안산시 요진동)이네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곳은 거실과 베란다를 터 햇빛이 잘 드는 넓은 공간. 베란다 창 밑에 길게 나무 의자를 놓아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이 공간은 아빠가 만들어준 채연이만의 휴식장소다.
“채연이가 텔레비전이나 그림책에 나오는 전원주택을 보면서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자주 말하더라고요. 어린 마음에도 마음껏 뛰어놀 공간이 없는 아파트보다 넓고 탁 트인 집이 더 좋아 보였나 봐요. 장난감이 꽉 들어찬 놀이방보다 햇살 받으며 뒹굴 수 있는 쉼터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파란 잔디가 깔린 정원, 넓은 마당이 있는 집 대신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대한 아이의 바람을 실현해주고픈 엄마 아빠의 선물인 셈이다. 공주님처럼 핑크빛으로 예쁘게 꾸며진 채연이 방도 있지만 방에서 혼자 놀기보다는 거실에서 엄마랑 함께 보내기를 좋아하는 아이의 마음을 배려한 것. 온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거실 속 나무 의자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따로인 아이만의 휴식공간이다. 나무 의자에서 뭘 하느냐는 질문에 채연이는 쪼르르 자기 방으로 달려가 그림책을 들고 나온다.
“난 여기서 이렇게 책 읽어요. 엄마랑 소꿉놀이도 하고요, 채빈이랑도 여기서 놀아요.”
말을 끝내자마자 자연스럽게 의자에 길게 엎드려 쿠션을 받치고 재잘재잘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러다 문득 또 방으로 달려가더니 소꿉놀이 컵을 가져와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그 정성에 부응하느라 빈 컵을 들고 호호 불어가며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이곳의 주인인 채연이는 다시 엎드려 동화책을 읽기 시작한다. 한글을 아직 완전히 깨치지 못해서 반은 읽고 반은 본인이 지어내고 있다는 엄마의 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권 한 권 큰 소리로 책 읽는 모습이 사뭇 진지해서 더 귀엽다.
빈 공간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차례로 초대해 망중한을 즐기는 채연이. 다섯 살 꼬마숙녀에게 햇살 가득한 이 공간은 너른 전원주택 못지않은 안마당이다.
아이 키우는 엄마들 사이에서 육아바이블로 통하는‘삐뽀삐뽀 119 소아과’의 저자 하정훈(47·서울시 서초구 서초4동) 씨. 소아과 전문의인 그의 하루는 빡빡하지만 집에 묻어놓은 꿀단지(?) 덕분에 퇴근 발걸음은 초스피드라고. 실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아파트 1층 거실, 산책하는 이웃들의 눈을 동그랗게 만드는 건 소파 대신 놓여 있는 거대한 탁구대. 벌써 10년째 거실을 떡하니 차지한 탁구대는 이 집의 터줏대감이다.
“어릴 땐 집 마당에 전구만 달랑 두 개 켜놓고 평상 위에서 탁구를 쳤어요. 의대에 가서도 병원 구석에 탁구대를 놓고 수시로 스매싱을 날렸죠. 전문의 과정을 거치면서 탁구를 칠 여유를 갖지 못하다가 10년 전 이사를 오면서 오랜 꿈을 이룰 수 있었어요.”
탁구를 치려고 소음 걱정 없는 1층에 집을 얻었다. 가족 공동의 공간에 거대한 탁구대를 놓은 게 이기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네 식구 중 자기 공간이 제일 작다고 손사래 친다.
“전문의인 아내는 넓은 서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연구에 몰두해요. 아이들도 각자 방 하나씩은 차지하고 있잖아요. 텔레비전을 자주 보지 않기 때문에 거실 탁구대는 오히려 좁아서 더 정이 가는 저만의 스페셜 공간이에요.”
그렇다고 정훈 씨의 탁구대가 혼자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아내와 남매인 아이들과 함께 둘씩 편을 나눠 본격적인 남녀 대항경기가 벌어지기도 하고, 주말에는 친구들이 놀러와 박진감 넘치는 탁구대결을 펼치기도 한다.
매일 전용 탁구대에서 부족한 운동도 하고 스트레스도 푼다는 하정훈 씨. 파란 탁구대가 있는 거실에서야 지천명을 바라보는 중년의 나이도 내려놓고 다섯 살 꼬마처럼 순수해진다. 탁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제 물건 자랑하는 아이처럼 웃음이 끊이지 않는 그에게 이곳 거실 탁구대는 바로 지상낙원이다.
어디서 저렇게 예쁜 장난감집을 샀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현서(20개월·경기도 수원시 오목천동)의 러브하우스. 좁은 베란다에 동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그림 같은 집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얼마 전 네이버의 ‘오늘의 뜨는 블로그(blog.naver.com/kyhdream)’로 선정돼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 현서 집은 엄마 김윤형(29) 씨가 20일 동안 구슬땀을 흘리며 완성한 작품.
“어릴 적 우산 두 개를 겹쳐두고 친구와 숨기 놀이를 했던 추억이 떠올랐어요. 몸을 숨기기 비좁을수록 더 비밀스러워 숨기 좋아했던 것 같아요. 현서 방도 있지만 아직은 거실에서 주로 놀아서 아이만의 비밀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빈 상자로 집을 만들어 주면 재밌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이사오는 이웃의 짐트럭에서 냉장고 박스를 발견하고 냉큼 달려갔다. 부끄러움도 잠시, 땀을 뻘뻘 흘리며 현서 아빠가 상자를 집안으로 나르고 엄마는 현서 키를 재서 기둥의 길이를 결정하고 삼각형 그림책을 각도기 삼아 지붕을 만드는 아들 집 마련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백색 시트지를 붙이고 폼포드를 붙여 근사하게 장식했어요. 소파 커버링할 때 남겨뒀던 자투리 천으론 어닝도 만들었죠.”
제작기간 20일, 공사비용 2만7000원을 들인 두 돌배기 현서의 스위트룸은 이렇게 완성됐다. 엄마의 정성을 아는지 현서는 하루에도 베란다 집을 수십 번 들락날락거린다. 집 속으로 쏙 숨었다가 곰 인형을 토닥토닥 재우기도 하고, 창문으로 얼굴을 쏙 내밀며 저 혼자 까꿍 놀이에도 열심이다. 냉장고 집 안에서 창문 밖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잠들기도 일쑤. 지난 여름엔 땀을 삐질 흘리며 자는 아이 때문에 온 가족이 폭소를 터뜨렸다.
넓은 자기 방보다 냉장고 박스로 만든 ‘현서네 집’을 들락날락거리며 하루를 보낸다는 현서. 생후 20개월에 내 집 마련을 한 현서의 집에서 꼬마의 꿈과 소망도 하루하루 커간다.
여성조선
진행_이미종 기자 사진_조원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