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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전 王翦 ? ~ ?)】 「진시황의 의심을 떨치고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만든 명장」
왕전(王翦)은 빈양(頻陽)의 동향(東鄕)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한 왕전(王翦)은 커서 진시황(秦始皇)을 모셨다.
시황(始皇) 11년, 왕전(王翦)은 진군(秦軍)의 장수가 되어 조(趙)나라의 알여(閼與)를 공격하여 쳐부수고 아홉 개 성을 빼앗았다.
진시황(秦始皇) 18년, 왕전(王翦)은 조(趙)나라를 공격하여 1년여 만에 조(趙)나라 도읍 한단(邯鄲)을 함락시키고 조왕(趙王)의 항복을 받았다.
조(趙)나라의 모든 영토를 평정한 왕전(王翦)은 그 땅을 진(秦)나라의 군현(郡縣)으로 만들었다.
다음 해(기원전 227년), 연(燕)나라 태자(太子) 단(丹)이 형가(荊軻)를 시켜 진왕(秦王)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이에 진왕(秦王)은 왕전(王翦)을 시켜 연(燕)나라를 공격하여 그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연왕(燕王) 희(喜)는 견디지 못하고 요동(遼東)으로 달아나고 왕전(王翦)은 연(燕)나라의 도성 계성(薊城: 북경)을 평정하고 귀환했다.
진왕(秦王)은 왕전(王翦)의 아들 왕분(王賁)을 장군으로 삼아 형(荊)을 정벌하게 하였고, 왕분(王賁)이 형(荊)의 군사를 격파하자, 진왕(秦王)은 이 지역에 어양군(魚陽郡), 북평군(北平郡), 요서군(遼西郡) 등을 설치했다.
계성(薊城)을 평정하고 귀환 중에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위왕(魏王)의 항복을 받고 위(魏)나라의 전 영토를 평정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은 삼진(三晉)을 멸하고 연왕(燕王)을 요동(遼東)으로 몰아냈으며, 수차에 걸쳐 형(荊: 초)나라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진(秦)나라 장수 이신(李信)은 젊고 용기가 있었다.
과거에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연(燕)나라의 태자(太子) 단(丹)을 연수(衍水)까지 추격하여 연군(燕軍)을 격파하고 단(丹)을 사로잡은 바가 있었다.
이에 진시황(秦始皇)은 이신(李信)을 용감하며 어질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에 진시황(秦始皇)이 이신(李信)에게 묻기를, "내가 초(楚)나라를 공략하여 빼앗으려 하는데 장군의 생각에 군사가 몇 명 정도 있으면 되겠는가?" 라고 하자,
이신(李信)이 대답하기를, "20만 명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이 다시 왕전(王翦)에게 물었다.
왕전(王翦)이 대답하기를, "60만 명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라고 하였다.
시황(始皇)이 왕전(王翦)에게 말하기를, "왕장군은 이제 늙었구려!
어찌 이리 겁이 많아졌소?
이(李)장군은 기세가 용맹하다더니 과연 그말이 사실이었구먼." 이라고 하면서 진시황(秦始皇)은 이신(李信)을 대장군으로 하고 몽염(蒙恬)을 부장으로 하여 20만의 군사를 주어 남쪽으로 내려가 초(楚)나라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왕전(王翦)은 자기의 말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 삼아 고향 빈양(頻陽)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내려고 하였다.
이후 진 시황제는 젊고 용감한 장수인 이신에게 초나라 정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군사가 필요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신은 "20만 명을 넘지 않아도 됩니다."라 답하였다. 그러나 왕전은 "60만 명이 아니면 안됩니다."라 하였다. 진 시황제는 왕전이 늙어서 겁이 많아졌다고 생각하고는 이신과 몽염 등으로 하여금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왕전은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이와 병을 핑계로 고향인 빈양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신과 몽염은 각기 평여(平與)와 침(寢)을 공격하여 초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그러나 이신은 언영(鄢郢)을 격파한 후 성보(城父)에서 몽염과 합류하는 과정에서 사흘 밤낮으로 추격해온 초나라 군대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달아났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진 시황제는 몸소 빈양으로 찾아가 왕전에게 사과하며 초나라를 공격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왕전은 6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여 초나라 정벌에 나섰다. 왕전이 출전하자 진 시황제가 몸소 파상(灞上)까지 와서 그를 전송했다. 그런데 왕전은 떠나기 전에 진 시황제에게 자손들을 위하여 많은 전택(田宅)과 원지(園池)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고, 함곡관에 이르러서도 5번이나 사자를 보내 좋은 땅을 청하였다.
이때 누군가 왕전에게 "장군의 요구가 지나칩니다."라 하자, 왕전은 "진왕께서는 거칠고 사람을 믿지 않으신다. 지금 진나라 군대를 모두 내게 맡겼는데, 내가 자손의 생업을 위해 전택을 요구하여 뜻을 보여주지 않으면 진왕께서 나를 의심하시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초나라 정복 기원전 224년(진시황 23), 왕전은 몽무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때 왕전은 일부러 보루를 쌓고 초나라 군대가 수차례 싸움을 걸어도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전은 군사들을 휴식케하며 그들을 잘 씻기고 잘 먹이며 다독거렸으며 몸소 병사들과 식사하는 등 군중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윽고 왕전이 사람을 시켜 군중을 둘러보니 군사들이 스스로 투석(投石, 돌던지기)과 초거(超距, 장애물넘기)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를 듣고서야 왕전은 군사들이 싸울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후 초나라 군대가 동쪽으로 이동하자, 왕전이 이들을 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그리고 마침내 기(蘄)에서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그 장군 항연을 죽였다. 기원전 223년(진시황 24), 왕전은 몽무와 함께 다시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의 마지막 왕인 초왕 부추를 사로잡았으며 진(陳)의 남쪽부터 평여(平輿)에 이르는 땅을 빼앗았다. 기원전 222년(진시황 25), 왕전은 초나라의 강남(江南)을 평정하였으며, 또한 월군(越君)을 항복시키고 회계군을 두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기원전 221년, 왕전의 아들인 왕분이 제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면서 마침내 전국시대가 종결되고 중국이 최초로 통일되기에 이르렀다.
진(秦)나라의 대장군이 된 이신(李信)은 평여(平與)를 공격하고, 몽염(蒙恬)은 침현(寢縣)을 공격하여 초군(楚軍)을 크게 이겼다.
이신(李信)이 또 언(鄢)과 영(郢)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계속해서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몽염(蒙恬)의 군사들과 성보(城父)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초(楚)나라 군대는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이신(李信)의 뒤를 추격하여, 이신(李信)의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진군(秦軍)의 양쪽 진지를 점령하여 도위(都尉) 7명을 살해하자, 결국 진군(秦軍)은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
시황(始皇)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몸소 수레를 몰고 빈양(頻陽)으로 달려가서 왕전(王翦)을 만나 사과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아 결국 이신(李信)이 우리 진군(秦軍)을 욕보였소.
지금 들리는 말로는 초(楚)나라 군사들이 진(秦)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매일 서쪽으로 진군(進軍)하고 있다 하니, 장군께서 비록 병중이기는 하지만 어려움을 당한 과인을 외면하지 말기 바라오." 라고 하자,
왕전(王翦)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臣)은 이미 몸이 늙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합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어질고 현명한 장군을 택하여 중임을 맡기시길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이 사과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 장군은 더 이상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마시오." 하자, 왕전(王翦)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어쩔 수 없이 신(臣)을 꼭 쓰려고 하신다면, 60만 명의 군사가 아니면 안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진시황(秦始皇)은 "장군의 계책을 따르겠소." 라고 하였다.
왕전(王翦)은 60만 명의 군사를 얻어 초(楚)나라 원정길에 올랐다.
진시황(秦始皇)은 몸소 파상(灞上)까지 나와 왕전(王翦)을 환송하였다.
왕전(王翦)은 출전하면서 진시황(秦始皇)에게 좋은 전답과 저택, 저수지가 딸린 정원을 무리할 정도로 크게 요청하였다.
시황이 듣고 말하기를, "장군은 원정을 나가면서 어찌 가난을 근심하시는 것이오?" 라고 묻자, 왕전(王翦)이 말하기를, "대왕을 위해 장수가 되어 공을 이루었음에도 끝까지 제후의 작위를 받지 못하게 되면 신(臣)은 단지 시골에서 사는 이름 없는 신하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신(臣)은 지금 대왕의 신임을 받은 기회를 이용하여 연못이 딸린 정원을 청하여 자손들에 물려주려고 해서입니다." 라고 하였다.
진시황이 듣고 크게 웃었다.
왕전(王翦)이 행군을 시작하여 함곡관(函谷關)에 도착할때까지 사신을 진시황(秦始皇)에게 보내 좋은 논밭을 달라고 요청하기를 5번이나 하였다.
옆에 있던 부관이 말하기를, "장군께서는 요청하는 정도가 너무 심하시지 않으십니까?" 라고 하자,
왕전(王翦)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무릇 진왕(秦王)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남을 믿지 않는다.
지금 진(秦)나라의 무장한 모든 군사들을 모두 나에게 맡겼다.
내가 많은 전답과 저택을 스스로 청해 자손들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지 않는다면, 진왕이 어찌 나를 의심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왕전(王翦)은 이신(李信)을 대신해 마침내 초(楚)나라를 공격하였다.
초(楚)나라는 왕전(王翦)이 더 많은 군사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의 모든 군사들을 동원하여 진군(秦軍)을 막으려고 했다.
이윽고 왕전(王翦)이 초(楚)나라 진영에 이르렀으나 보루를 높이 쌓고 굳게 지키기만 할 뿐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초(楚)나라 군사들이 출병하여 계속해서 도전했으나 왕전(王翦)은 결코 군사를 내보내 응전하지 않았다.
왕전(王翦)은 매일 군사들을 휴식과 목욕을 시키고 좋은 음식으로 위로하며 병사들과 더불어 숙식을 같이하며 친해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왕전(王翦)은 사람을 시켜 군중에서 사졸들이 무엇을 하며 놀고 있는지 알아보게 하였다.
그 사람이 와서 대답하기를, "투석놀이와 높이뛰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라고 하자,
왕전(王翦)이 듣고 말하기를, "이제 병사들을 필요로 할 때가 되었다." 라고 하였다.
초(楚)나라 군사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도전을 했으나 진(秦)나라 군사들이 응전을 하지 않았음으로 이내 군사를 물리쳐 동쪽으로 돌아갔다.
이에 왕전(王翦)은 즉시 군사를 일으켜 그 뒤를 추격하여 장사들로 편성된 별동대를 시켜 공격하였다.
초(楚)나라 군사들을 대파한 왕전(王翦)의 진(秦)나라 군사들은 기수(蘄水) 남쪽에 이르러 초(楚)나라 대장 항연(項燕)을 살해하자 초군(楚軍)은 마침내 패하여 모두 달아났다.
진군(秦軍)은 승세를 계기로 초(楚)나라의 성읍 수춘(遂春)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일 년여 만에 초왕(楚王) 부추(負芻)를 사로잡고 마침내 초(楚)나라의 모든 땅을 진(秦)나라의 군현(郡縣)으로 삼았다.
왕전(王翦)은 여세를 몰아 장강(長江)을 건너 남진하여 백월(百越) 지방의 군장들이 지배하고 있던 땅을 점령하였다.
한편 왕전(王翦)의 아들 왕분(王賁)은 이신(李信)과 함께 연(燕)나라와 제(齊)나라를 무찌르고 그 땅을 평정하였다.
마침내 진시황(秦始皇) 26년(기원전 221년), 진(秦)나라는 천하를 모두 병합하였다.
그 과정에서 왕씨(王氏)와 몽씨(蒙氏)가 많은 공을 세워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죽고 이세황제(二世皇帝) 때는 왕전(王翦)과 그 아들 왕분(王賁)은 죽고 없었고 몽씨(蒙氏) 또한 멸족되었으며 진승(陳勝)이 진(秦)나라에 반기를 들자, 진(秦)나라는 왕전(王翦)의 손자 왕리(王離)를 장수로 삼아 조(趙)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리(王離)는 거록성(鉅鹿城)의 조왕(趙王)과 장이(張耳)를 포위하고 세차게 공격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리(王離)는 진(秦)나라의 명장 집안 출신이다.
지금 강한 진(秦)나라 군사들의 장수가 되어 새로 생긴 조(趙)나라를 공격하고 있으니, 필시 왕리(王離)는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자,
그 사람의 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아무리 명장 집안이라 할지라도 삼대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싸움을 하면서 많은 상대방 군사들을 죽여 그 후대들은 상서롭지 못한 업을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리(王離)는 왕전(王翦)으로부터 3대에 이르는 장군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항우(項羽)가 조(趙)나라를 구하기 위해 진군(秦軍)을 공격할 때 왕리(王離)는 싸움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고 왕리(王離)가 이끌던 진군(秦軍)도 따라서 제후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한다.
옛말에 이르기를 한 척의 긴 것도 짧을 때가 있고, 한 촌의 짧은 것도 길 때가 있는 법이라고 했다.
백기(白起)는 적군을 대할 때는 그 변화가 능수능란하고 기묘한 전략은 무궁무진해서 그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지혜도 응후(應侯)의 화로부터 자신을 구할 수 없었다.
왕전(王翦)은 진(秦)나라의 장군이 되어 육국(六國)을 멸해 숙장으로써 진시황(秦始皇)에 의해 스승으로 존대받았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을 보좌하여 덕을 쌓아 나라의 근본을 공고하게 하지 못하고 그저 기회에 투합하여 몸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다가 결국 몸은 헛되이 죽고 말았다.
이에 그의 손자 왕리(王離)는 항우(項羽)의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사리가 마땅하지 않겠다고 하겠는가?
그 두 사람은 각기 부족한 점이 있었다.
王翦者,頻陽東鄉人也。[一]少而好兵,事秦始皇。始皇十一年,翦將攻趙閼與,[二]破之,拔九城,十八年,翦將攻趙。歲餘,遂拔趙,趙王降,盡定趙地為郡。明年,燕使荊軻為賊於秦,秦王使王翦攻燕。燕王喜走遼東,翦遂定燕薊而還。[三]秦使翦子王賁擊荊,[四]荊兵敗。還擊魏,魏王降,遂定魏地。
왕전은 빈얀의 동향 사람이다. 어려서 군대를 좋아하여 진나라 시황제를 섬겼다. 시황제 11년에 왕전이 장군으로 조나라 알여를 공격하여 깨트리고 9개 성을 함락시켰다. (시황제)18년 왕전이 장수로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1년만에 마침내 조나라를 점령하니 조나라 왕이 항복하므로 조나라 땅을 모두 평정하여 군으로 삼았다. 다음해 연나라가 형가를 시켜 진나라를 해치게 했다. 진나라 왕이 왕전을 시켜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연나라 왕 희가 요동으로 달아났으므로 왕전이 마침내 연나라 계 땅을 평정하고 돌아왔다. 진나라가가 왕전의 아들 왕분으로 하여금 荊을 공격하게 하니 형의 군대가 무너졌다. 돌아오면서 위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위나라 왕이 항복하므로 마침내 위나라 땅을 평정하였다.
[一] 索隱地理志頻陽縣屬左馮翊,應劭曰「在頻水之陽也」。正義故城在雍州東同官縣界也。
[一] 【索隱】 『地理志』에 “빈양현은 좌빙익에 속한다.” 한다. 응소가 말하기를 “빈수의 남쪽에 있다.”했다. 【正義】 옛 성은 옹주 동쪽 동관현 경계에 있다.
[二] 正義音預。
[二] 【正義】 음은 ‘預’이다.
[三] 正義薊音計。
[三] 【正義】 ‘薊’의 음은 ‘計’이다.
[四] 集解徐廣曰:「秦諱『楚』,故云荊也。」 索隱賁音奔。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진나라가 楚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荊 ’이라 한 것이다.” 했다.
秦始皇既滅三晉,走燕王,而數破荊師。秦將李信者,年少壯勇,嘗以兵數千逐燕太子丹至於衍水中,卒破得丹,始皇以為賢勇。於是始皇問李信:「吾欲攻取荊,於將軍度用幾何人而足?」李信曰:「不過用二十萬人。」始皇問王翦,王翦曰:「非六十萬人不可。」始皇曰:「王將軍老矣,何怯也!李將軍果勢壯勇,[一]其言是也。」遂使李信及蒙恬將二十萬南伐荊。王翦言不用,因謝病,歸老於頻陽。李信攻平與,[二]蒙恬攻寢,[三]大破荊軍。信又攻鄢郢,破之,於是引兵而西,與蒙恬會城父。[四]荊人因隨之,三日三夜不頓舍,大破李信軍,入兩壁,殺七都尉,秦軍走。
진나라 시황제가 이미 삼진을 멸망시키고, 연나라 왕을 달아나게 하였으며, 여러 번 형(초나라)의 군대를 깨트렸다. 진나라 장수 이신은 나이가 젊고 용맹하여 일찍이 군대 수천 명을 거느리고 연나라 태자 단을 쫓아 연수 가운데 이르러 마침내 깨트리고 단을 얻으니(잡으니) 시황제가 현명하고 용맹하다 여겼다. 이에 시황제가 이신에게 묻기를 “나는 형을 공격하여 취하고자 하는데 장군이 헤아리기에 어느 정도의 사람을 쓰면 되겠는가?” 했다. 이신이 말하기를 “20만을 넘지 않아도 됩니다.” 했다. 시황제가 왕전에게 물으니 왕전이 대답하기를 “60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했다. 시황제가 말하기를 “왕전 장군은 늙었구려 무엇을 겁내시오! 이신 장군은 과연 형세가 용맹스러우니 그 말이 옳다.” 했다. 마침내 이심과 몽염으로 하여금 20만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형을 치게 하였다. 왕전은 말이 쓰여지지 않기 때문에 병을 핑계로 빈양에 돌아가 늙었다.(노년을 보냈다.) 이신이 평여를 공격하고 몽염은 침을 공격하여 형의 군대를 크게 깨트렸다. 이신이 또 언과 영을 공격하여 깨트리니 이에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몽염과 성보에서 만나려 했다. 형 사람들이 인하여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이신의 군대를) 따라가서 이신의 군대를 크게 깨트리고 두 벽(진영)에 들어가 7명의 도위를 죽이자 진나라 군대가 달아났다.
[一] 集解徐廣曰:「勢,一作(新)『[斷]』。」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勢’는 ‘新’이라 쓰는데 ‘斷’이다.
[二] 集解音余。正義在預東北五十四里。
[二] 【集解】 음은 ‘余’이다. 【正義】 ‘預’ 의 동북 54리에 있다.
[三] 集解徐廣曰:「今固始寢丘。」 索隱徐廣云固始寢丘。固始,縣,屬淮陽。寢丘,地名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지금 ‘고시’는 ‘침구’이다.” 했다. 【索隱】 서광이 말하기를 “‘고시’는 ‘침구’이다. ‘고시’는 현이니 회양에 속 한다. 침구는 지명이다.
[四] 索隱在汝南,即應鄉。正義言引兵而會城父,則是汝州郟城縣東父城者也。括地志云:「汝州郟城縣東四十里有父城故城,即服虔云城父楚北境者也。又許州華縣東北四十五里亦有父城故城,即杜預云襄城城父縣者也。此二城,父城之名耳,服虔城父是誤也。左傳及注水經云『楚大城城父,使太子建居之』。十三州志云『太子建所居城父,謂今亳州城父是也』。此三家之說,是城父之名。地理志云潁川父城縣,沛郡城父縣。據縣屬郡,其名自分。古先儒多惑,故使其名錯亂。」
[四] 【索隱】 여남에 있으니 곧 응향이다. 【正義】 군대를 이끌고 성보에서 만난 것을 말하면 곧 이는 겹성현 동쪽 부성이다. 『括地志』에 “여주 겹성현 동쪽 40리에 부성 옛성이 있다.” 했다. 복건은 ‘성부는 초나라 북쪽 경계’라고 했다.” 또 허주 화현 동북쪽 45리에 또 부성의 옛 성이 있으니 곧 두예가 말한 ‘양성은 성부현이라는 것이다.’ 이 두 성은 부성의 이름일 뿐이다. 복건이 성부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始皇聞之,大怒,自馳如頻陽,見謝王翦曰:「寡人以不用將軍計,李信果辱秦軍。今聞荊兵日進而西,將軍雖病,獨忍棄寡人乎!」王翦謝曰:「老臣罷病悖亂,[一]唯大王更擇賢將。」始皇謝曰:「已矣,將軍勿復言!」王翦曰:「大王必不得已用臣,非六十萬人不可。」始皇曰:「為聽將軍計耳。」於是王翦將兵六十萬人,始皇自送至灞上。王翦行,請美田宅園池甚眾。始皇曰:「將軍行矣,何憂貧乎?」王翦曰:「為大王將,有功終不得封侯,故及大王之嚮臣,臣亦及時以請園池為子孫業耳。」始皇大笑。王翦既至關,使使還請善田者五輩。[二]或曰:「將軍之乞貸,亦已甚矣。」王翦曰:「不然。夫秦王怚[三]而不信人。[四]今空秦國甲士而專委於我,[五]我不多請田宅為子孫業以自堅,顧令秦王坐而疑我邪?」
시황제가 그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스스로 빈양에 달려가서 왕전을 보고 사과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신이 과연 진나라 군대를 욕보였다. 지금 들으니 ‘형(초나라)’의 군대가 날로 서쪽으로 나아갔으니 장군이 비록 병이 있을지라도 어찌 차마 과인을 버릴 수 있겠는가!” 했다. 왕전이 감사하며 말하기를 “노신이 병과 도리에 어긋나 내쳐지고 오직 대왕께서 어진 장수를 선택하셨을 뿐입니다.” 하니 시황제가 사과하고 말하기를 “끝난 일이다. 장군은 다시 말하지 말라!”하니 왕전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반드시 부득이 신을 등용하신다면 60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초나라를 점령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시황제가 말하기를 “장군의 계책을 들을 뿐이다.” 했다. 이에 왕전이 군대 60만을 거느렸는데 시황제가 스스로 파수의 가에 이르러 보냈다. 왕전이 가는데 좋은 田宅과 園池를 청한 것이 매우 많았다. 시황제가 말하기를 “장군이 가는데 어찌 가난을 근심하겠는가?” 했다. 왕전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장군을 삼으시고, 공이 있어도 끝내 封侯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대왕의 (관심이)신을 향함에 미쳤고, 신이 또 때에 미쳐서 園池를 청하는 것으로써 자손의 업을 삼기를 청할 뿐입니다.” 했다. 시황제가 크게 웃었다. 왕전이 관에 이르고 나서 사자로 하여금 돌아가게 하여 좋은 밭을 청한 것이 다섯 번이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장군의 빌림을 구걸하는 것이 또한 이미 심합니다.” 했다. 왕전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저 진나라 왕은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지금 진나라를 비울정도의 군대를 오로지 나에게 맡기시니 내가 많이 전택을 청하여 자손의 업으로 삼아 스스로를 굳건하게 하지 않는다면 진나라 왕으로 하여금 자리에서 나를 의심하게 하는 것 아닌가?
[一] 正義罷音皮。悖音背。
[一] 【正義】 ‘罷’의 음은 ‘皮’이다. ‘悖’의 음은 ‘背’이다.
[二] 集解徐廣曰:「善,一作『菑』。」 索隱謂使者五度請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善’은 ‘菑’라고도 쓴다. 【索隱】 사자가 5번을 청함을 말한다.
[三] 集解音鹿。
[三] 【集解】 음은 ‘鹿’이다.
[四] 集解徐廣曰:「怚,一作『粗』。」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怚’는 ‘粗’라고도 쓴다.
[五] 集解徐廣曰:「專亦作『摶』,又作『剸』。」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專’은 ‘摶’이라고도 쓰고, 또한 ‘剸’이라고도 쓴다.
王翦果代李信擊荊。荊聞王翦益軍而來,乃悉國中兵以拒秦。王翦至,堅壁而守之,不肯戰。荊兵數出挑戰,終不出。王翦日休士洗沐,而善飲食撫循之,親與士卒同食。久之,王翦使人問軍中戲乎?對曰:「方投石超距。」[一]於是王翦曰:「士卒可用矣。」荊數挑戰而秦不出,乃引而東。翦因舉兵追之,令壯士擊,大破荊軍。至蘄南,[二]殺其將軍項燕,荊兵遂敗走。秦因乘勝略定荊地城邑。歲餘,虜荊王負芻,竟平荊地為郡縣。因南征百越之君。而王翦子王賁,與李信破定燕、齊地。
왕전이 과연 이신을 대신하여 형(초나라)을 쳤다. 형(초나라)이 왕전이 군대를 더하여 온다는 것을 듣고 이에 모든 나라 안의 군대로 진나라를 막았다. 왕전이 이르러 벽을 굳게 하고 지키면서 즐겨 싸우려하지 않았다. 형(초나라)의 군대가 여러번 나와 도전하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왕전이 매일 병사를 쉬게 하고 목욕하게 하면서 좋은 음식으로 위로하고, 직접 사졸과 함께 같이 먹었다. 오래 지난 후 왕전이 심부름꾼에게 “군대 안에서 무슨 놀이하던가?” 하고 물었다. (심부름꾼이) 대답하기를 “돌 던지기와 멀리 뛰기를 합니다.” 했다. 이에 왕전이 말하기를 “사졸들을 쓸 만하다.” 하였다. 형(초나라)이 여러 번 도전하여도 진나라 군대가 나가지 않자 이에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왕전이 (초나라 군대의 이동) 인하여 군대를 일으켜 뒤쫓으며 장사로 하여금 치게 하여 형(초나라)의 군대를 크게 깨트렸다. 기의 남쪽에 이르러 그 장군 항연을 죽이니 형(초나라)의 군대가 무너져 달아났다. 진나라가 이김을 타고 형(초나라)의 땅인 성과 읍을 공략하여 평정하였다. 1년 만에 형(초나라 왕)왕 부추를 포로로 하고, 마침내 형(초나라) 땅을 평정하고 군현으로 삼았다. 인하여 남쪽으로 백월의 임금을 정벌하였다. 왕전의 아들 왕분이 이신과 함께 연나라와 제나라 땅을 깨트리고 평정하였다.
史記卷七十三
白起 王翦列傳 第十三

첫댓글 진시황이 초나라를 치기 위해 필요한 병력을 묻자, 젊은 장수 이신은 20만 명이면 충분하다고 한 반면 왕전은 확고하게 대답했다.
"60만 명이 아니면 안 됩니다."
(非六十萬人不可)
• 배경: 진시황은 왕전이 늙고 겁이 많아졌다며 이신에게 20만 군사를 주어 보냈으나 대패했다.
결국 진시황이 허리를 굽히며 다시 요청하자, 왕전은 국가 총동원령에 가까운 60만 대군을 기어이 받아내어 출정했다.
60만 대군을 이끌고 나아가면서 왕전은 진시황에게 좋은 논밭과 대저택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부하들이 "장군의 요구가 너무 지나치십니다"라고 만류하자 왕전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 진왕은 천성적으로 거칠고 사람을 믿지 못한다. 지금 진나라의 전 병력을 나 한 사람에게 몽땅 맡기셨는데, 내가 자손들을 위한 가업으로 삼겠다며 많은 전답과 저택을 요구하여 다른 뜻이 없음을 굳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진왕이 가만히 앉아서 나를 의심하지 않겠느냐?"
(不然. 夫秦王恒中麤而不信人. 今空秦國甲士而專委於我, 我不多請田宅爲子孫業以自堅, 顧令秦王坐而疑我邪?)
한 나라의 군사권을 통째로 쥔 장수가 역모를 꾀할까 봐 두려워할 왕의 심리를 꿰뚫어 본 것이다.
스스로를 '권력에는 관심 없고 오직 재물과 자식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노인'으로 위장(자污)하여 진시황을 안심시켰고,
덕분에 왕으로부터 의심 받지 않고 승리한 뒤 천수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