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호 宋東浩 (1897 ~ 미상)】 " 27결사대 대원,
친일매국노 처단 거사 계획"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영동면(嬴東面) 덕달동(德達洞) 출신이다. 1920년 9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1920년 당시 24세였던 것으로 보아 1897년생으로 추정된다. 27결사대 대원으로 1919년 고종(高宗) 장례일 당시 친일매국노 처단 거사를 계획하였다.
1919년 1월 이탁(李鐸)이 독립운동을 수행할 목적으로 서간도(西間島)에 건너 온 한인 청년을 모아 결성한 27결사대 대원이 되었다. 서간도에 무장 독립군단(獨立軍團)이 본격적으로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 1919년 만세운동 이후부터였으니 27결사대의 성립 시기는 상당히 빠르다고 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대원이 된 인물들도 상당히 이른 시기에 만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평남 성천군(成川郡)의 대부호였던 이탁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가산을 모두 정리해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그는 서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대토지를 구입하고 그곳에 한인들을 이주시켜 생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민족학교를 설립해 청년들을 애국 인재로 양성하였다
성립 당시 27명이 참여했기에 27결사대였으나 시간이 가며 점점 증원되어 50명이 넘는 대원을 갖게 되었다. 결사대의 첫 번째 활동 목표는 을사늑약과 정미조약, 그리고 경술국치 당시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매국노를 처단하는 것이었다. 목표가 정해지자 거사일을 1919년 3월 3일 고종의 국장일로 정하고, 일제 군경의 의심의 눈을 피하기 위해 대원들은 3개 조로 나뉘어 서울로 향하였다. 3월 24일 서간도를 출발한 대원들은 이틀 후인 3월 26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결사대의 계획은 고종의 국장 행렬이 지나갈 때, 고관대작으로서 그 뒤를 따르는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계획 하에 대원들은 행렬이 지나갈 거리와 매국노들이 자리 잡을 위치 등을 사전 답사해 측정하며 3월 3일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거사일이 되었으나 무기가 도착하지 않았다. 서울로 출발한 행동대 이외 1개조가 펑톈(奉天)에서 무기를 받아 서울로 운반해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것이다. 3월 15일이 되어서야 6정의 권총과 탄환, 단도 등이 도착하였다.
계획대로 거사를 치루지 못했으나 실망하지 않고 동지들과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동지들과 퇴색된 독립문의 태극기를 선명하게 다시 칠해 한민족의 광복 의지가 뚜렷이 나타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친일파들의 죄상을 폭로하고 꾸짖는 성토문·격문·경고문 등을 종각이나 독립문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부착하였다.
일부 대원들과 이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박기한(朴基寒)·차병제(車秉濟)·손창준(孫昌俊)·이기원(李基原)·최병인(崔秉寅) 등은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친일파들을 척결하기 위해서는 활동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군자금 모집 담당 대원들은 3월말부터 5월초까지 서울 중심부로 부촌이 몰려있는 효자동(孝子洞)·무교동(武橋洞)·인사동(仁寺洞)·돈의동(敦義洞)의 친일부호, 또는 친일파는 아니더라도 부자인 사람들의 집을 기습적으로 드나들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결사대원들의 독립문이나 종각 같은 대중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활동이나 군자금 모금 활동은 종로경찰서 일제 경찰의 감시망에 포착되고 말았다. 마침내 5월 5일 차병제·손창준을 비롯한 10여 명의 대원들이 붙잡혔다. 동지들의 피체 소식을 듣고 남아있던 동지들과 협력해 철통같은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서간도의 본부로 귀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