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군 근남면 사곡2리에 위치하는 구은사는 서기 1455년 단종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王位簒奪)에 비분(悲憤)을 품고 산간으로 은거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로 일생을 마친 아홉 선비(김시습, 조상치, 박도, 박재, 박규손, 박효손, 박천손, 박인손, 박계손)의 충절을 모신 사당이다. 아홉 선비는 근남면 육단리, 잠곡리, 사곡리 등의 산간 계곡에 초막(草幕)을 치고 은거하면서 권농(勸農)에 힘쓰는 한편 사곡리 속계천(束溪川)변 행화정(杏花亭)에 모여 바둑을 두면서 세상사를 논했는데 그 후 시운이 맞지 않아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니 조선 인조 9년(서기 1631년)에 이르러 이지연(李止淵 : 吏曹參判)선생 등 여러 선비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짓고 매년 봄 가을 추모제를 지냈다. 서기 186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는 철폐의 비운을 맞았으나, 1921년 사당을 재건하고 6·25전란으로 다시 황폐화된 것을 지방유지들의 도움으로 1977년 중건(重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열사는 조선 인조 14년(서기 1636년) 병자호란 당시 공을 세운 충열공 홍명구(忠烈公 洪命耉)와 충장공 유림(忠壯公 柳琳)을 모신 사당으로서 조선효종때 (서기 1650년) 김화읍 읍내리 천동(泉洞)에 충열사 현판을 사액받아 사당을 건립했으나 6·25 전란으로 사당이 완전 소실되어 1975. 9. 30 지방 유지들이 근남면 육단2리에 임시로 건립하였다가 2000년도에 현위치로 이전 복원하고 일대를 성역화 하였다.『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와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은 인조 14년 12월 병자호란시 청군대장 마부대와 용골대의 대군을 맞아 홍명구는 김화읍 내리 탑골(慈母山城)에 진을 치고 싸우다 42세를 일기로 장렬히 전사했으며 유림은 김화 백수봉(栢樹峯)에서 근왕병 2천명, 의용병 3백명으로 적군을 유인·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조정에서는 홍명구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충열공의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유림에게는 좌의정을 증하고 충장공의 시호를 내렸다. 지금도 매년 춘추(음 2월과 8월)에 두 분의 명복을 비는 성대한 제향행사를 지내고 있다. |
|
포충사는 원래 철원읍 화전리 역촌동에 있었으나, 6·25전란으로 파괴되고 군부통제 지역에 속하여 1990년 현위치인 철원읍 화지리 산 1-1번지 곡암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포충사는 광해군 11년(서기 1619년)에 여진족 건주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조선 원군의 좌영장으로 출정하여 3,000여 병력으로 6만의 적군과 접전 최후까지 용전분투, 40세를 일기로 장렬히 전사한 충무공 김응하 장군의 무훈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현종 7년(서기 1666년)에 건립된 사당이다. 조선 현종 7년(서기 1666년)에 부(府)의 남4리 화전리 일봉산 기슭(역촌동)에 30간 규모의 사우를 건립하고, 현종 9년 포충사로 사액을 하였다. 현종 10년 (서기 1669년) 명나라 신종이 김장군을 요동백으로 추봉하고 우리 조정에서는 동년 6월 묘정비를 제작하였으며, 숙종 9년(서기 1683년) 송시열이 글을 짓고, 박태웅이 글씨를 쓰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전서로 제목을 붙여 제작한 요동백 김응하장군 묘정비를 사내에 건립하였다.
철원향교는 태봉국 시절 왕건의 사저 자리(現 月下里)에 설립하였다 하나 건조년대는 미상이다. 조선 선조 원년(서기 1568년) 유림들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임진왜란(서기 1595년)의 병화로 소실되었다. 그 후 인조 15년(서기 1637년) 유림들이 재건하였으며 일제치하에서는 군수 유흥종(柳興鍾)이 대성전과 명륜당 등을 중축하였는데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재산이 몰수돼 고아원으로 활용하던 중에 6·25전란으로 소실되었다. 1945년 수복 후 일시 포충사(褒忠祠)로 옮겨 모셔졌다가 유림들의 협조와 정부보조로 화지리로 이전하여 관리하다가 원위치 복원계획(종전 월하초교 부지)에 따라 2004.12 포충사로 임시 이전하였다.
철원향교 대성전 문묘(文廟)에 봉안된 25위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五 聖 : 孔子, 顔子, 子思, 曾子, 孟子 - 二十賢 : 薛聰, 程顥, 安珦, 金宏弼, 趙光祖, 李滉, 李珥, 金長生, 金集, 安浚吉, 崔致遠, 朱喜, 鄭夢周, 鄭汝昌, 李彦迪 金麟厚, 成渾, 趙憲, 宋時烈, 朴世采
정열부인 영평정씨 정막금은 현 김화읍 도창리(구 김화군 서면 도창리)에서 세거(世居)해오던 김명천(김해 김씨)의 처였다. 김명천(金明千)은 병자호란 당시인 서기 1637년 김화지구 기병으로 종군하고 있었다. 인조 14년(1636년) 호군들은 물밀 듯이 침입하여 김화읍의 자모산성을 함락하고 서울을 향해 진군하면서 현 도창리 부락에 이르러 민가에 무단침입 유숙하기에 이르렀다. 호군들의 침입으로 주민들은 물론 정막금도 시어머니와 어린 자녀를 데리고 삼갑산 깊은 산중으로 피난하였는데 그때 간직해야할 불씨를 꺼뜨리게 되어 부득이 동리(洞里)의 집에 내려와 불씨를 구하려하던 중 호군에게 그만 붙잡히고 말았다. 호군들은 젊은 막금을 보는 순간 욕정이 발하여 겁탈하려 달려들었다. 절녀인 막금은 끝까지 굴하지 않고 적도(賊徒)들에게 항거하였다. 호군들은 불응하는 막금을 단칼에 참수하고자 하는 순간 막금은 단설(斷舌)로 자결하였다. 인조 22년(1644년)에 절의(節義)와 열녀(烈女)의 행적을 가상(嘉賞)하고 정려(旌閭)하였으며, 열녀각을 세워 그의 넋을 기리도록 명하였다. 당시의 열녀각은 6.25 동란시 소멸되었으며, 1991년 10월 26일 현위치에 재건립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