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60주년 - 중국 60년―팍스 차이메리카나(Pax Chimericana)] / 미(美)·중(中) 경제력 비교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10월 1일로 건국 60주년을 맞았다. 공산혁명으로 세계 최대의 사회주의 국가를 출범시켰지만 건국 초기엔 수많은 고난과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1978년 개혁·개방으로 큰 물줄기를 돌린 후 인류사에 전례가 없는 놀라운 속도로 성장가도를 질주, 미국과 함께 G2(주요 2개국)로 거론될 정도로 급부상했다. 60년 동안 달라진 중국의 국력과 위상을 분야별로 짚어본다.
일본에서는 요즘 지난 8월 말 출간된 '앞으로 5년, 중국이 세계를 제패한다'는 책이 서점가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아마존 재팬' 외국·국제 분야 베스트셀러 순위 1위에 올라 있다.
일본은 그동안 중국의 경제적 부상을 애써 평가절하해 왔다.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위기와 빈부 격차에 따른 사회 불안 등 난제들이 언제 경제의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는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 달라지고 있다. 일본의 올 상반기 대미 무역 비중은 13.7%에 그친 반면 대중무역은 20.4%를 기록했다. 반기(半期) 기준으로 대중국 무역 비중이 20%를 넘어선 것은 사상 처음이다. 책을 쓴 국제 관계 전문저술가 소지마 다카히코(副島隆彦)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미국과 동맹이 돼 중국과 싸워야 한다'고 했던 이들이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이 중국의 속국이 되고 마는 것 아니냐'며 공포에 떨고 있다"고 말했다.
▲ 중국 건국 60주년 기념일 전야인 30일 저녁,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축하 연회에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오른쪽)과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가운데),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 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이 건배를 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지 60년, 중국은 거대한 인구에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가 채 못 되던 빈국에서 이제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섰다. 예상대로라면 올해 독일을 제치고 세계 1위 수출국,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다.
중국은 이런 경제 규모를 바탕으로 올해 미국 달러화의 기축통화 패권에 대놓고 도전하는 등 국제사회로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다. 미국 뉴스위크지는 지난 8월 31일자에서 "중국이 그동안 번 돈으로 해외 자원을 사들이고 미국의 아·태 지역에 대한 영향력에 도전하는 등 독자적인 제국화의 길에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국제금융컨설팅회사인 벨먼트 파트너스의 조지프 뮤스(Meuse) 회장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미국은 지금 중국과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미 엄청난 땅을 빼앗겼고, 이런 속도로 진행되면 전쟁은 거의 끝났다"고 자탄했다. 중국인들은 소상인부터 대기업 CEO, 젊은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서구에 뺏긴 경제 리더십을 뺏어오겠다"는 목표로 똘똘 뭉쳐 있다고 그는 두려움을 표시한다.
'개혁·개방 1번지' 선전시의 밍상(名商)골프장 내 빌라촌. 한 채당 우리 돈으로 30억원이 넘는 별장식 주택 20여채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IT업체 사장 왕빈(王斌·44)씨는 본지 기자에게 "이 집 외에도 선전과 베이징에 주택 5채가 더 있고 골프장회원권 3개와 자가용 3대도 보유하고 있다. 개혁·개방과 고도성장이 없었다면 나 같은 산둥(山東)성 빈농 집 아들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건국 60주년 국경절을 맞아 중국은 자신감이 넘치고 있다. 1일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열릴 국경절 행사를 위해 무려 20만명이 대기하고 있다. 또 이날 최첨단 전투기 젠(殲)-11을 비롯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둥펑(東風)-41, 공중조기경보기 등 그동안 공개하지 않아 온 첨단 무기들도 공개된다.
중국의 급성장은 온갖 장밋빛 전망을 낳고 있다. 세계은행은 중국이 2019년 GDP 규모에서 미국을 능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미 카네기재단 선임연구원 앨버트 카이델(Keidel)은 "중국의 성공은 걸출했던 미국의 시대를 끝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로버트 졸릭(Zoellick) 세계은행 총재도 "도전받지 않았던 경제 수퍼파워 미국의 시대는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고, 데라시마 지쓰로(寺島實郞) 일본총합연구소 회장 겸 타마대학 총장은 "G20은 실제가 아니다. 실제는 G2(미국과 중국)다"고 말했다. 중국 국가통계국은 지난 29일 "2007년 중국의 세계 경제 성장 기여도는 19.2%로 미국(15.7%)을 능가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중국의 국력 평가에 거품이 있다는 반론도 많다. 1인당 국민소득은 이제 갓 3000달러를 넘어 중진국에서도 낮은 수준이고, GDP 규모도 미국의 30% 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의 먼훙화(門洪華) 교수는 "미국과 격차가 많이 줄었지만 과학기술과 창의력 등의 측면에서 미국을 따라잡으려면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상하이 사회과학원의 양위리(楊宇立) 교수는 "문화와 사상 면에서 중국은 미국이나 일본보다 30년 처져 있다"고 진단했다.
지역·계층 간 격차는 중국 경제의 가장 큰 위협 요인이다. 발달한 동부 옆으로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에 못 미치는 지역이 태반인 중·서부가 자리 잡고 있다. 높은 수출의존도도 문제다. 찰스 프리먼(Freeman)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중국실장은 "중국에 닥친 가장 큰 도전은 수출 위주의 경제"라고 경고했고, 홍콩과기대 경제학과장 단양 셰(謝) 교수는 "내수를 더욱 키우고 대미(對美)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고 충고했다./조선
[2000년] 제27회 시드니 올림픽 폐막
"2004년 아테네에서 만납시다" 제27회 시드니올림픽이 2000년 10월1일 11만7000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쉬운 막을 내렸다. 남자 마라톤 시상식이 끝난 뒤 열린 폐막식은 그리스를 시작으로 각국 올림픽위원회의 깃발이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시드니 시장이 올림픽기를 아테네 시장에게 넘긴 뒤, 17일간 주경기장인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를 밝히던 성화가 서서히 꺼졌다.
1956년 멜버른 대회 이후 44년 만에 남반구에서 열린 시드니 올림픽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이 여전히 스포츠 강국임을 입증한 무대였다. 뉴 밀레니엄 첫 올림픽에 걸맞게 남북한 동시 입장과 동티모르 출전 등 스포츠를 통한 화합에도 기여했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이 각각 금메달 39-32-28로 1위-2위-3위를 차지했고 한국은 금메달 8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1개로 종합 12위에 머물러 당초 목표에 미달했다. 북한 역시 기대했던 역도-유도-체조 등에서 금메달 획득에 실패, 1980년 모스크바 대회 이후 20년 만에 노골드의 수모를 당했다. /조선
[1996년] 블라디보스토크 최덕근 영사 피살/1996
← 1996년 10월 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의료원에서 고 최덕근 블라디보스토크 영사의 영결식이 행해졌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 총영사관의 최덕근(54)영사가 1996년 10월 1일 오후 8시 30분에서 9시 사이 자신의 아파트 3층 계단에서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흉기로 습격당해 현장에서 사망했다.
우리 외교관이 해외에서 살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이번 사건은 북한이 1996년 9월 27일 강릉 해안 무장간첩 소탕작전을 '학살'이라고 비난하면서 "백배 천배로 보복하겠다"고 위협한 후 발생해 북한의 소행 여부가 주목됐다.
최 영사는 이날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식당 코리아 하우스에서 한국에서 온 방문객과 현지 대학관계자와 저녁식사를 마친 뒤 귀가도중 살해됐다. 그는 러시아 전문가로 러시아어에 능통해 1993년부터 1995년 12월까지 우크라이나에서 근무하다 1996년 초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다. 특히 북한 문제가 전공으로 북한의 납치테러 등에 대비한 현지 교민 보호업무 등을 주로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블라디보스토크 현지에서는 치안상태가 불안할 뿐 아니라 우리 외교관 등에 대한 북한 요원들의 위협이 적지 않게 발생해 그는 현지 경찰과 정보기관과의 연락 업무도 담당했다. 점잖은 성격에 꼼꼼한 일 처리 솜씨를 평가받았다./조선
[1990년] 인간 게놈 계획 정식 출범
1990년 10월 1일 유전자 지도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게놈 계획이 정식 출범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연구팀은 이 날 인간 염색체 내의 모든 염기서열(유전정보)을 밝혀내기 위한 연구 계획을 실행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출범 당시 인간 게놈 계획은 15년간에 걸쳐 5년씩 3차로 나누어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1차에서 전체 유전자 지도의 절반 정도를 완성하고 1% 정도의 염기서열을 밝히고, 2차에서 나머지 절반 유전자 지도의 완성과 10% 정도의 염기서열을 결정하며, 3차에서 나머지 90%의 염기서열을 밝힘으로써 인간 게놈 전체의 염기서열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전세계 18개국의 연구진들이 참여하는 국제 컨소시엄으로 발전하면서 속도를 더하게 되었다. 1998년에는 미국의 민간 생명공학회사인 셀레라 제노믹스사가 이 계획에 뛰어들면서 HGP와 경쟁을 하게 되자 유전자 해독 작업은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5년까지 완료하기로 한 애초의 목표가 2003년으로 앞당겨졌고, 2000년 6월에는 HGP와 셀레라 제노믹스사가 공동으로 인간 게놈 지도 초안을 완성하여 발표했으며, 마침내 수정된 목표보다 2년여가 더 빠른 2001년 2월에 두 회사는 전체 인간 게놈 지도를 완성했다고 공식 발표했다./브리태니커
[1969년] 영-불 공동 개발한 여객기 '콩코드' 세계최초로 초음속 비행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개발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1호'가 1969년 10월 1일 9분동안 마하1을 넘은 비행을 기록, 3월 2일 첫 비행이래 처음으로 음속을 넘어섰다. 45번째 비행만이었다.
1970년 11월4일 1백2번째 시험비행에서 마하 2(시속 2천1백55km)의 굉속으로 53분간 순항하는 기록을 세웠다. 영국과 프랑스의 화합을 상징하는 '콩코드' 프로젝트 출범 18년 만의 개가였다. 이제까지 더글러스 DC8 여객기가 강하비행중 음속을 돌파한 적은 있어도 수평비행에서 마하1을 기록한 여객기는 콩코드가 세계최초였다. 소련의 초음속 여객기 Tu144는 이미 비행테스트를 개시했지만 아직 음속을 넘지는 못했다.
초음속여객기는 미국에서도 국가적 사업으로 콩코드보다 크고 더 빠른 보잉2707 여객기 개발이 진행됐지만 1972년 봄에야 비행에 성공했다. 콩코드는 1976년 1월 21일 상업운행을 개시함으로써 민간 항공여행의 초음속 시대를 열었다. /조선
[1964년] 세계최초 고속전철 신칸센(新幹線) 개통
일본 국철이 5년반의 기간동안 3천8백억엔의 비용을 들여 건설한 동해도 신칸센이 1964년 10월 1일 개통됐다. 신칸센은 세계최초로 개발된 고속전철로 동경올림픽에 맞춰 도쿄에서 오사카간 운행을 개시했다.
신칸센은 전후 급속하게 증가해가는 동해도 본선의 수송량을 분산할 목적으로 구상돼 1957년 일본국유철도간선조사회가 설치된 후 본격적으로 심의에 들어가 1958년 국무회의에서 건설을 결정했다.
처음에는 시속 200Km로 운행했으나 1997년부터 신차종 'JR 500'을 투입해 시속 300Km로 운행하고 있다. 신칸센은 도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도카이도선(東海道線) 이외에 1972년 3월에 개통한 산요선(山陽線), 1982년 6월에 개통한 도호쿠선(東北線)이 있다.
[1962년] 한국-파나마, 국교 수립 발표
파나마는 1948년 12월 12일 한국을 승인, 1962년 9월 30일 국교를 수립했다. 북한과는 외교관계가 없다. 1973년 5월 5일 파나마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었으며, 1979년 3월 1일에는 주한 파나마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84년 7월 대통령 당선자 바를레타가 방한하여 우호를 다졌다. 양국간에 문화협정(1974. 6)·항공협정(1979. 12)이 체결되었다. 해외지사 14개, 교포상사 9개가 진출해 있다. 한국은 의류·선박을 수출하고, 파나마는 선박·석유를 수출한다. 1996년 현재 대한수입액은 31억 9,501만 달러이고, 대한수출액은 5억 4,765만 달러이다. 1997년 현재 교민수는 89명, 체류자는 239명에 이른다.
[1962년] 한국-가봉, 국교수립
1977년 5월 9일 가봉공화국의 대통령인 봉고(Bongo, El HadjOmar)가 대한민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독재정권 특유의 동원능력과 통제능력으로 서울 시민들을 대량동원하여 환영하는등 대통령을 귀하게 대접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아프리카를 포함한 제 3국가들과 교류하고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경쟁의식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한과 북조선의 아프리카에서의 외교능력 경쟁은 서로의 감정대립 격화와 외화낭비만 불러왔다. 지금도 그 흔적인 남한 백화점의 폐허가 가봉공화국 수도에 남아있다. 가봉은 1977년, 1984년, 1996년, 2007년 대한민국을 방문한 봉고 대통령 덕분에, "봉고"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며 대한민국과 친숙하다. 대한민국에서 승합차를 ‘봉고차’라고 부르는 것이 봉고 대통령 방문 기념으로 출시한 ‘BONGO’라는 차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위키백과
가봉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한국 1962년 10월 1일, 북한 1974년 2월 1일)이며, 남북한의 상주공관이 설치되어 있다. 주한 가봉공관은 1975년 6월 설치되었으며, 1975년 7월에는 대통령 봉고가 방한하였다. 1982년 8월 대통령 전두환이 가봉을 방문한 데 이어, 1984년 9월 대통령 봉고가 내한하여 양국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1996년 8월에는 비공식적으로 방한하였다. 두 나라는 1969년 의료협력협정, 1975년 경제·기술·문화·과학협력에 관한 협정, 공동위원회 설치에 관한 협정, 무역협정, 1984년 항공협정을 체결하였다. /naver
[1961년] 미 프로야구 선수 로저 매리스, 연간 61홈런 신기록 수립
← 1961년 베이브 루스의 한 시즌 홈런 기록을 깬 매리스
로저 메리스가 기록을 깨기 전까지는 베이브 루스의 60개가 최고 기록이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베이브 루스는 미국인들의 우상이었다. 그런데 로저 메리스가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깨기 위해 돌진하자 사람들은 그에게 비난을 했다. 그런 와중에도 로저 메리스는 꿋꿋히 올라갔다.
그런데 베이브루스 시절의 경기 수보다 로저 메리스 시절의 경기 수가 더 많았다.
루스의 60홈런 기록을 깨면 몰살시키겠다며 가족에게까지 협박이 들어가는 가운데 매리스는 정확히 154번째 경기(포드 프릭 커미셔너는 시즌 중반 ‘루스처럼 154게임에서 신기록을 세우지 못하면 인정할 수 없다’는 발표까지 했다.)에서 3회에 59호 홈런을 터뜨렸다. 그러나 상대 팀의 견제와 팬들의 일방적인 야유 속에 그 경기에선 더 이상 홈런을 추가하지 못했고, 루스와 매리스의 홈런 기록 비교는 그 후 끝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매리스의 방망이는 쉬지 않았다. 양키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시즌 159번째 경기 오리올스전에서 잭 피셔의 공을 두들겨 우측 담장으로 넘기며 루스와 동률인 60호 홈런을 기록했다.
그리고 두 게임 동안 홈런이 없던 매리스는 시즌 최종전에서 당시에는 아무도 반기지 않던 새로운 신화를 썼다.
상대는 다름 아닌 보스턴 레드삭스. 4회 레드삭스 투수 에반 트레이시 스탤라드와 맞선 매리스는 볼카운트 0-2에서 3구째 공을 힘차게 잡아당겨 시즌 61호 홈런을 친 것이다. 그러나 그날 양키스타디움의 관중석은 곳곳에 빈 자리가 눈에 띄었고, 그 기록적인 홈런 공은 5000달러에 팔렸다.
결국 베이브 루스 때 경기 수 안에 기록을 깨진 못했지만 베이브루스보다 늘어난 경기 수 때문에 기록을 깼다. 공식적으로는 홈런기록을 인정했지만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베이브 루스는 그들에게 영웅이었기 때문에 기록이 깨지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1958년] 한국-태국, 국교수립
1949년 10월 21일 대한민국을 승인, 1950년 11월 1일 6·25에 참전하였다. 1958년 10월 1일 공관급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으며 북한과는 1975년 5월 8일 수교하였다. 두 나라는 무역협정(1961.9)·무역전시품면세통관협정(1963.5)·항공협정(1967.7)·관용여권사증 및 수수료면제협정(1967.10)·이중과세회피 및 탈세방지협정(1977.10)·운수소득면세협정(1981.1)·일반여권사증면제협정(1981.11)·과학기술협력협정(1984.4)·해운협정(2002.5) 등을 맺고 있다. /yahoo
[1956년] 제1회 국군의 날
1956년 9월 14일 국무회의에서 1950년 10월 1일 3사단 23연대 병사들이 강원 양양 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한 것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했다. 종전의 육군기념일은 10월 2일, 해군기념일은 10월 11일, 공군기념일은 10월 1일 등 3군이 기념일을 각기 달리했다. 이날 오전 10시 제1회 국군의 날을 맞이한 서울운동장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과 다우링 주한미국대사, 외국외교관 등 내외귀빈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거행됐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625 휴전협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이승만 대통령의 고민도 한층 깊어졌다. 휴전회담을 깨고 북진통일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휴전반대를 무기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미국으로부터 분명한 안보공약을 얻어낼 것인지... 단독으로 북진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이승만이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안전보장이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미국도 안보공약의 필요성은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자칫하면 전쟁위험이 상존하는 이 지역에 발이 묶일 것을 경계했다.
그들 손에는 3장의 카드가 놓여있었다. 이승만을 축출하는 안과 유엔사령부 철수안은 채찍이었고 휴전협정을 준수한다는 조건하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안은 당근이었다. 그들은 당근을 선택했다.
이즈음 미국의 기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승만이 전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이다. 자신의 협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이승만의 고단수 전략이었다. 당황한 미국은 특사를 파견해 의견을 좁혀나갔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덜레스 미 국무장관까지 달려와 최종안을 조율했다.
마침내 1953년 10월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미 워싱턴에서 조인됐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200만달러 상당의 경제원조를 제공받고 한국군 20개 사단병력을 증강한다는 계획을 승인받은데 비해 미국이 얻은 것은 이승만이 작성한 ‘휴전 불방해’ 친서 한 장 뿐이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49년 1월에 공산당 세력에 패배한 국민당의 장제스가 총통직을 사임하고, 곧이어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이 베이징과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까지 점령함으로써 일본 패망 후 본격화됐던 국공내전도 막을 내렸다. 공산당이 새로운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각계대표를 소집, 9월21일부터 열흘간 베이징에서 인민정치협상회의를 열어 국기국가를 제정하고 신정부의 요직을 구성했다. 마오쩌둥,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핵심인사였다.
구름 한점없이 쾌청했던 1949년 10월1일, 천안문 누상(樓上)에는 마오쩌둥의 거대한 사진이 걸려있었고 군중들로 가득한 광장 곳곳에는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오후 3시, 마오쩌둥이 누상위로 오르자 오성홍기가 게양되고 의용군행진곡이 광장에 울려퍼졌다. 이윽고 마오쩌둥이 입을 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오늘 여기에 수립됐다. 새로운 정치실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60주년되는 날이다.
[1949년] 공군 창설, 초대 참모총장에 김정렬(金貞烈) 대령
1948년 5월 15일 경기도 수색(水色;현재 서울 恩平區 水色洞)에서 통위부직할부대로서 항공부대가 창설되었고, 그해 7월 27일에 항공기지부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1년 뒤인 49년 6월 28일 육군본부에 항공군을 설치하고, 그해 10월 1일 모든 항공인의 노력으로 육군에서 분리되어 공군으로 독립하였다. 독립 당시 공군 병력은 1897명(장교 242명, 사병 1655명)이었고, 항공기는 20대였다. 독립직후 육군항공사관학교는 공군사관학교로, 비행부대는 비행단, 항공기지부대는 항공기지사령부로, 여자항공교육대는 여자항공대로 각각 개편하고 공군병원과 보급창이 신설되었다. 또한 수원(水原)·군산(群山)·광주(光州)·대구(大邱)·제주(濟州)에 5개 공군기지부대를 전개하였고, 50년 1월 5일 육군헌병요원 28명을 전입시켜 공군헌병대를 창설하였다. 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53년 7월 27일 휴전의 성립 때까지 적의 후방보급로 차단, 적 지상군 공격 및 공군지원작전 등 8267회 유효출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전쟁중에도 한국 공군은 교육·훈련을 강화하여 조종사 양성에 힘썼으며, 모든 기구와 체제를 점차 발전시켜 휴전 당시의 공군병력은 1만 1461명(장교 1382, 준위 140, 장교후보생 1036, 사병 8903), F-511D 전투폭격기 79대 및 기타 항공기를 보유하였다. /Google
[1942년] 일제, 조선어학회 핵심인물 검거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의 핵심인물들이 일제에 검거되었다. 한글을 통해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려 한 조선어학회는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우리말 사전인 <큰사전>의 편찬을 진행하고 있었다. 일제가 방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학회 회원들은 출판을 서둘러 1942년 4월 그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인쇄하기 시작했다. 강제해산의 구실을 찾던 일제는 함흥학생사건을 꾸며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을 맡고 있는 정태진을 검거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거짓자백을 받았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0월 1일 이중화․장지영․최현배․이극로․한징․이윤재․이희승․정인승․김윤경․권승욱․이석린 등 핵심인물 11명이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된 뒤,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어 고문을 당했다. 실형을 받은 사람들은 1945년 해방을 계기로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는 강제로 해산당했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해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1957년 <큰사전>을 완간했다./브리태니커
[1926년]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 단성사에서 개봉
← 민족영화 ‘아리랑’의 한 장면(1926)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두번째작품으로 제작된 영화 "아리랑"은 1926년 10월 1일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개봉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다. 개봉첫날부터 유례없는 관중이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이 영화를 보기위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리랑을 연주하는 악대, 그리고 검열에서 이리저리 찢기운 선전지를 본 민중들은 이 영화가 지금까지의 영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는 당시의 정황에 대해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다고 표현할 만큼 영화 “아리랑”이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영되어 온 겨레 에게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3․1운동 실패의 충격으로 미친 영진은 광인 특유의 사랑으로 여동생 영희를 아끼는데, 영진을 찾아온 영진의 친구 현구는 영희와 애틋한 사랑에 빠진다. 악덕지주의 머슴이자 친일파인 기호는 농악제가 벌어지던 날 영희 를 겁탈하려 하는데 이를 본 현구는 영희를 구하기 위해 기호와 난투극을 벌인다. 실성한 영진은 오히려 이 모습을 재미있게 여긴다. 이때 갑자기 환상에 빠져든 영진은 반사적으로 낫을 휘둘러 기호가 그 낫에 찔려 죽고 그 충격으로 영진은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 일본경찰에게 끌려가는 영진 의 뒤로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난다.
주제가인 민요아리랑은 마치 조국을 잃은 민족의 애국가처럼 부르게 되었고 삼일운동의 좌절로 울분과 허무감이 팽배하던 시대적 분위기를 청렬한 민족 정신으로 일신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리랑"은 영화로서도 뛰어난 걸작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일저항정신을 필름에 아로새긴 민족영화였다.
나운규는 당시의 유치한 번안모작물이나 신파영화와는 달리 농촌의 생생한 모습을 수려한 리얼리즘으로 묘사하여 그 진실감을 뒷받침했고 주인공을 통해 올바른 정신으로는 살 수 없었던 당시의 민족심리를 잘 표현하였으며 내용 저변에 항일혁명사상을 나타내었다. 나운규는 이 영화 "아리랑"의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했으며 주연하므로서 일약 천재적인 영화작가로 평가되었고 문자그대로 민족적인 우상이 되었다./조선
[1924년] 카터(James Earl Carter) 출생
카터는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이다. 미국 정치권력의 소외지로 인식되어온 남부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곳에서 정치적 기반을 쌓았다.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인권보호와 세계평화유지를 내세워 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정책들을 펼치고 캠프데이비드 협정 체결, 전략무기제한협상 체결, 중국과의 외교관계 정상화 등의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국내 경제의 악화와 이란과의 외교적 마찰에 대한 우유부단한 대응으로 인기를 잃어 재선에 실패했다.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혹평도 받았으나 퇴임 후 한층 활발한 사회․외교활동을 펼쳐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 국제분쟁의 노련한 중재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퇴임 후 카터 센터와 카터 도서관을 설립했으며 세계 기아퇴치운동, 보건증진운동 등의 사회운동을 펼치고 있다./브리태니커
[1908년] 포드자동차 'T카' 생산
포드가 자동차 대중화의 효시로 내놓은 모델 T카(사진)가 올해로 출시된지 100년을 맞았다.
포드가 '자동차는 부자 만의 것이 아니다'라는 마케팅 슬로건을 내걸고 1908년 10월 1일 출시한 모델 T는 첫해 6천800대 이상 팔린 것을 시작으로 1927년 단종될 때가지 모두 1천500만대가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포드는 첫해 가격을 850달러로 책정했다가 대량생산 시스템을 개선한 덕택에 1925년에는 250달러로 대폭 인하해 판매량이 급격히 늘어나도록 했다.
포드는 21일 리치먼드에서 창업자 헨리 포드의 증손자로 포드차 이사진인 에드셀 포드 2세 등이 참석해 기념 저녁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이 자리에는 미국 각지에 소장돼있던 모델 T 900여대가 선보였다.
기념식에 참석한 데이턴대의 자동차 역사학자 존 하이트먼 교수는 "보통 사람이 보통 자동차를 처음으로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 모델 T"라면서 "모델 T가 대중화되면서 미국의 자동차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모델 T가 인기 속에 팔리면서 포드가 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하고 이민자와 소수 민족을 본격적으로 고용하기 시작한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면서 "번듯하게 사는 노동자층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포드의 모델 T 100주년 기념식은 그러나 북미시장에서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지난달 혼다를 제외하고 모두 판매가 위축된 가운데, 그리고 무엇보다 포드의 경우 한 해 전에 비해 27.9%나 판매가 급감한 상황에서 치러진 것이다..
[1865년] 프랑스의 작곡가 뒤카스(Paul Dukas, 1865~1935) 출생
유일한 오케스트라 작품인 〈마법사의 제자 L'Apprenti Sorcier〉(1897)는 현란한 아름다움과 독창성으로 유명하다.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칸타타 〈벨레다 Velleda〉(1888)로 제2회 로마 대상에서 우승한 후, 1892년에 초연된 피에르 코르네유의 〈폴리왹트 Polyeucte〉 서곡과 1896년의 〈C장조 교향곡 Symphony in C Major〉으로 젊은 프랑스 작곡가들 사이에 자리를 굳혔다. 그의 다른 작품들(자신의 작품에 대해 엄격하게 검열을 하는 그는 작품수가 많지 않았음)은 주로 극음악․표제음악․피아노를 위한 작품들이다. 관현악법의 대가인 그는 1910~12년 파리음악원에서 관현악법 교수로 있었으며, 1927년 이후에는 작곡 교수를 지냈다. 파리의 여러 신문에 음악 비평을 기고했고, 자신의 글을 모은 〈뒤카스의 음악 에세이 Les Ecrits de Paul Dukas sur la musique〉(1948)에는 장 필리프 라모, 크리스토프 글루크, 엑토르 베를리오즈에 대한 훌륭한 에세이들도 있다.
괴테의 〈마법사의 제자 Zauberlehrling〉를 기초로 한 그의 〈마법사의 제자〉는 묘사음악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틸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Till Eulenspiegel lustige Streiche〉과 같은 시기에 쓰여졌으며 양식도 비슷하다. 그러나 음악적 재능은 이 작품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의 〈소나타 Sonate〉(1901)는 베토벤, 로베르트 슈만, 프란츠 리스트의 전통을 마지막으로 잇는 위대한 피아노 작품 중 하나이며, 〈라모의 주제에 의한 피아노 변주곡․간주곡․종곡 Variations, interlude et final pour piano sur un theme de Rameau〉(1903)은 프랑스 음악의 기법과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 Diabelli Variations〉 작품 120을 우아하게 해석하고 있다. 한편 발레 음악인 〈페리 La Peri〉(1912)는 인상파 음악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희곡에 곡을 붙인 오페라 〈아리안과 푸른 수염 Ariane et Barbe-Bleue〉(1907)에서는 부족한 극적 효과를 분위기와 음악적인 요소로 보충했다.
1912년 이후에는 그가 존경하는 클로드 드뷔시를 기념하여 쓴 피아노 작품인 〈아득히 들려오는 목신의 탄식 La Plainte au loin du faune〉(1920)과 매력적인 가곡 〈롱사르의 소네트 Sonet de Ronsard〉(1924) 외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죽기 몇 주 전에 그는 자신의 작품 몇 개를 없애버렸다. 라모, 프랑수아 쿠프랭,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작품들과 베토벤의 피아노 작품들의 현대판을 준비할 때, 파리의 뒤랑출판회사와 함께 협력했다. 뛰어난 교육자이기도 했던 그는 음악계의 예리한 관찰자였으며, 고대 및 현대 음악과 문학 작품을 쉬지 않고 연구하기도 했다.
[1791년] 러시아의 소설가 악사코프(Sergey T. Aksakov, 1791~1859) 출생
러시아 우파 출생. 오래된 중간귀족 집안에서 자라나 1807년 카잔대학 중퇴. 이듬해 모스크바에 가서 법안심의위원회의 번역관 ․검열관, 콘스탄티노플의 측량전문학교의 학감(學監) ․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처음에는 연극평론을 썼는데,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40세 이후이다. 수렵을 주제로 한 《큰 눈보라》(1843) 《조어기(釣魚記)》(1847) 《오렌부르그현(縣)의 사냥꾼 일기》(1852) 《사냥꾼의 이야기와 생각나는 일》(1855) 등의 사실적이고 색채가 풍부하며 평이한 문장으로 자연을 묘사한 작품을 써서 문명을 올렸다. 대표작은 《가족의 연대기 Semeinaya khronika》(1856), 그 속편인 《손자 바그로프의 유년시절 Detskie gody Bagrova-vnuka》(1858)의 2대 장편인데, 이것은 각각 그의 부조(父祖)들 및 작자 자신의 전기적 기록으로 볼 수 있다. 극히 평명(平明)하고 간소한 현실주의적 표현으로 러시아 동변(東邊)의 신개척지에 있어서 지주의 족장적인 생활을 묘사하고, 농노(農奴) 소유자로서의 지주의 계급적 심리를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1207년] 잉글랜드의 왕 헨리 3세(Henry III, 1207~1272) 출생
잉글랜드의 왕(재위 1216~1272). 존의 맏아들. 어머니는 앙글램 백작가의 이사벨라. 왕비는 프로방스 백작가의 앨리너. 9세로 즉위하여, 펨브루크 백작 윌리엄 마샬 등 정신(廷臣)의 보좌를 받다가, 20세로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어머니와 왕비의 출신관계로 프랑스인을 궁정에 중용(重用)하고, 또한 로마 교황에 대한 신종(臣從)의 자세를 취하는 등으로 영국 귀족의 반감을 샀다. 특히 둘째왕자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위에 앉히려는 책모, 프랑스에서 잃은 영지(領地) 회복을 꾀하여 거듭 파병함으로써 다액의 증세(增稅)와 헌납금(獻納金)으로 귀족․평민 양쪽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1258년 S.몽포르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의 반항으로, 왕과 귀족 대표가 국정(國政)의 지도방침을 정한 '옥스퍼드조례' 등을 양보해 놓고 얼마 뒤 이를 부인하여, 1264년 몽포르 등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해 5월 왕군은 루이스 전투에서 몽포르군에 패하였고, 반란군에 잡힌 왕은 그들의 강요로 이듬해 최초의 의회를 열었다. 그러나 곧 왕자 에드워드 1세의 군사가 이브샴전투에서 몽포르군을 패퇴시킴으로써 권력을 회복하였으나, 이후 사실상의 국권은 에드워드에게 넘어갔다.
[BC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 대왕 다리우스 3세의 최후 결전-가우가멜라 전투
← 전투 중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모습을 새긴 대리석 부조(BC 310경), 레바논 시돈에서 출토,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Archaeological Museums 소장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 대왕 다리우스 3세가 맞붙은 최후의 결전이 기원전 331년 10월 1일 티그리스강 동쪽의 가우가멜라에서 벌어졌다. 이미 이수스에서 결정적으로 패해 도주한 바 있는 다리우스 3세는 병력을 늘려 전투에 임했다. 보병 100만명, 기병 4만명이라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동원 군대는 보병 3만명에 기병 7천명인 알렉산드로스 군대보다 훨씬 많았다.
전투가 진행되자 다리우스 3세는 또 다시 겁에 질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쉽게 끝났으나 의미는 컸다. 그리스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가 융합하기 시작한 출발점이었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세계 제국의 창출이었다. 도주한 다리우스는 패전 몇 개월 후 파르티아 사막에서 그의 사촌인 박트리아(아프가니스탄 북부)의 걸출한 왕 베소스에게 살해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예를 갖추어 다리우스의 시신을 장사지냈다.
그밖에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 2년 3개월만에 완공, 개통
2005년 인도네시아 발리 폭탄테러
2000년 전자서명법, 미국에서 정식 발효
1998년 정부기록보존소, 구월산유격대 기록 공개
1998년 제3차 북미 미사일 회담(뉴욕, ~10.2)
1996년 블라디보스토크 최덕근 영사 피살
1994년 KBS 1TV 광고 폐지, 시청료징수 시작
1994년 팔라우, 미국으로부터 독립
1987년 우리나라, 세계저작권조약(UCC) 가입
1982년 서독하원, 슈미트수상 불신임안 가결. 새수상에 헬무트 콜 기민당수 선출
1982년 CD(콤팩트 디스크) 플레이어 발매 시작
1981년 동서독, 대규모 간첩교환
1980년 중국항공기, 미국-중공(시애틀~북경)간 첫 취항
1978년 투발루,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5년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에게 14라운드 TKO 승
1973년 유엔정치위, 남북한 무조건 동시초청안 가결
1971년 ‘퇴폐풍조’ 단속
1963년 알제리아 벨라대통령, 모든 프랑스인소유토지의 국유화 선언
1963년 한국신문연구소 발족
1962년 동경서 한국 등 21개국 참가 아시아반공대회 개막
1962년 네덜란드, 34년간의 서부 뉴기니아 통치 종식
1962년 사이프라스와 문화교류협정 체결
1960년 나이지리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1959년 세계은행총회, 제2세계은행 설립 가결
1958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발족
1957년 일본,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 선출
1955년 해방10주년기념 산업박람회 개최
1953년 미국의 화가 존 마린 사망
1951년 대한신문 발족
1950년 유엔군, 38선 돌파
1949년 유엔총회, 한국단독초청안 가결
1948년 한글전용법 국회 통과
1947년 방송호출부호 HAKA Z까지로 변경
1946년 대구폭동 발생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 판결(독일 전범 12명에게 교수형 판결)
1945년 조선체육회 발족(회장 이병학)
1942년 조선청년특별연성령 공포(17세~21세까지 훈련 실시)
1936년 프랑코, 스페인 국가주석 취임
1935년 철도박물관 개설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 준공
1925년 페르시아의 카쟐왕조 멸망
1923년 영국의회, 자치령 제국의 외국과의 조약체결권을 승인
1922년 경성시립도서관 개관
1920년 총독부, 전 사법관에 법복 착용을 지시
1918년 조선 식산(殖産)은행 설립
1917년 면(面)제 시행
1914년 최남선, 대중계몽잡지 ‘청춘’ 창간
1910년 조선총독부 설치, 초대 총독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임명
1908년 학회령 실시(한일학회의 단속강화)
1904년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출생
1903년 미국 프로야구 제1회 월드시리즈 개막
1884년 독일-소련-오스트리아 3제(帝), 폴란드에서 회담. 독일-소련 밀약 성립
1882년 게룬 국제금은양본위회의 개최
1728년 미국 정치가 로버트 리빙스턴 사망
1685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6세 출생
1593년 임진왜란으로 피란간 선조 한성으로 환도
1542년 서애 유성룡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