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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손민호
관심
국내여행 일타강사⑮ 순천 금둔사
한겨울에도 꽃을 보러 다닌 건 올해로 20년째다. 처음엔 소문으로만 알았다. 전남 순천에 가면 낙안읍성 내려다보이는 금전산(668m) 남쪽 기슭에 금둔사라는 작은 산사가 있는데, 그 절집 매실나무가 동지섣달에도 꽃을 피운다고. 그래?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찾아갔더니 어라? 정말 매화가 피어 있었다. 붉은 매화, 홍매(紅梅)였다. 그때부터였다. 태고종 종정 지허 스님과 연을 맺은 건. 그 겨울 이후 스님은 종종 전화를 해왔다.
꽃 폈당게. 내려오랑게.
금둔사 매화와의 인연은 지허 스님과의 인연이었다. 40여 년 전 폐허 같았던 금둔사를 일으키고 매실나무 씨앗을 구해 와 이윽고 꽃을 피우게 한 주인공이 지허 스님이다. 남도 산사의 노스님이 엄동설한에 전해 주는 방신(芳信)만큼 귀하고 반가운 소식이 또 있을까. 금둔사에 들 때마다 스님은 손수 기르고 따고 덖고 내린 차를 내주셨다. 지허는 그 유명한 선암사 동구 차밭을 손수 일군 선사(禪師)다. 활짝 핀 매화 아래에서 스님은 힘이 되는 말씀을 해주셨고, 그 계절 인연의 힘으로 나는 춥고 매운 계절을 넘겼다.
인연에도 끝이 있는 것일까. 지허 스님이 2023년 10월 2일 입적했다. 1941년 전남 보성 벌교에서 태어났으니 세수는 82세였고, 1956년 선암사에서 사미계를 받았으니 법랍은 67년이었다. 내가 알기로, 오래전부터 건강이 안 좋았던 당신이다. 송구하게도 부고를 한참 뒤에 알았다. 고인 말고는 금둔사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부고를 전해줄 사람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겨울에 들어섰다. 문득 금둔사 홍매가 궁금했다. 스님이 안 계셔도 홍매는 잘 있을까. 수소문 끝에 승국 스님이 금둔사 새 주지로 들어왔다고 들었다. 염치 불고하고 승국 스님에게 전화를 넣었다. 지허 스님과의 인연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며 “매화 피면 연락 주십사” 정중히 부탁했고, 생면부지의 스님이 흔쾌히 “그러겠다”고 답했다. 2023년 12월 초순이었다.
2020년 12월 28일 촬영한 금둔사 매화. 앙상한 가지 끝에 매달린 매화 한 송이에서 생명의 위대함을 새삼 느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새해가 시작돼도 금둔사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애면글면 속만 태우고 있었는데, 1월 6일 승국 스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막 한 송이가 꽃을 피웠다고. 반가웠으나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기상청이 정한 매화의 공식 개화 기준은 나뭇가지 하나에서 꽃이 세 송이 이상 만개했을 때다. 금둔사 매화는 아직 개화했다고 할 수 없었다.
금둔사로 내려간 건 1월 17일이다. 뜸 들이는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았다. 마침 제주도에서 예년보다 32일이나 일찍 매화가 개화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제주도 매화는 보통 2월 중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때쯤 금둔사 매화는 나무 전체가 환하게 타올랐었다. 운이 좋으면 섣달에도 매화 꽃잎 분분히 흩날리는 장관을 조우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금둔사는 아직도 어두웠다. 꽃망울 맺힌 나무에서 한두 송이가 겨우 꽃잎을 열었을 뿐이었다.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았다. 동짓달에도 100송이 넘게 꽃을 피웠던 금둔사 매화가, 제주도 매화가 86년 만에 가장 이른 개화 소식을 전한 이 겨울에는 피지 않았다. 외로이 핀 매화 한 송이를 무연히 바라보다 띄엄띄엄 이어졌던 스님과의 인연을 떠올렸다. 설마 매화도 스님이 떠나신 걸 알았던 걸까.
2020년 12월 : 코로나와 매화
2020년 12월 촬영한 지허 스님. 한쪽 눈을 다쳐 어쩔 수 없이 색안경을 쓰고 있었다. 스님은 오랜 병고 끝에 2023년 10월 2일 입적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겨울 시작됐던 코로나 사태가 다시 겨울이 돌아와도 끝나지 않았던 시절. 겨울보다 혹독한 나날이 1년째 이어지던 그때, 문득 금둔사 홍매가 그리웠다. 오랜만에 지허 스님에게 전화를 넣었다. 2020년 12월 들머리였다.
“스님, 매화가 언제 필까요?”
“아직 멀었제. 동짓달은 지나야 확 피제.”
“크리스마스에는 필까요?”
“일찍 피면 그때 볼 수도 있겄네. 근데 왜 이리 꽃을 찾는가?”
“다들 우울해해서요. 꽃 소식이라도 전하면 그나마 나을까 해서요.”
“알었네. 꽃 피면 연락하겄네.”
202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스님이 전화를 줬다. 핸드폰 너머로 붉은 매화 앞에서 환히 웃는 스님의 얼굴이 그려졌다.
처음이랑게. 이렇게 일찍 핀 적이 없었당게. 희한한 일이제. 며칠 전 겁나게 추웠을 때 있지 않았능가. 여그는 산속이어서 영하 16도로 떨어지고 그랬어야. 그때 꽃망울이 올라오더라고. 지금은 몇 개가 열렸고. 아직은 쬐만해. 그래도 이게 어디여. 고맙지, 기특허고.
10년쯤 전 겨울에 촬영한 금둔사 홍매. 금둔사 홍매는 한겨울에도 꽃을 피워 납월매라고도 불린다. 중앙포토
그로부터 나흘 뒤, 그러니까 음력으로 동짓달 하고 열나흘. 금둔사에 들었다. 요사채 앞 매실나무 한 그루가 붉은 기운으로 온통 화사했다. 가지마다 두서너 송이씩, 얼추 100송이 가까이 핀 듯했다.
크리스마스날 확 펴부렸당게. 나가 야들을 심은 게 35년 전이여. 여태 이렇게 일찍 핀 적이 없었네. 음력으로 12월 8일이 성도일이여. 성도절(成道節), 석가모니가 도를 깨친 날. 용하게도 그날은 꼭 매화가 피었는디, 올핸 한 달이나 먼저 펴부렸네. 이게 뭔 조화당가?
팔순 앞둔 노스님이 아이처럼 신이 나 말하고 있었다. 엄동설한에 꽃 피운 매화보다 큰스님의 해맑은 얼굴이 더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그 기운을 받아 코로나로 버거웠던 날들을 버텼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의심한다고 들었네. 나 같은 중에게는 정말 창피한 얘기네. 불교가, 아니 종교가 하는 일이 사람들이 마음을 바로 쓰게 하는 것인디. 지금 그렇지 못하다는 것 아닌가. 싸워야 할 건 사람이 아닌디. 안타깝네. 부끄럽고.
금둔(金芚) : 부처가 발아하다
드론으로 촬영한 금둔사. 금전산 남쪽 자락에 폭 파묻혀 있다. 손민호 기자
금둔사는 작은 사찰이다. 바로 옆 조계산(887m) 자락에 선암사와 송광사가 있어 이름도 크게 밀린다. 절은 작아도 내력은 길다. 백제 위덕왕 30년(583)에 창건했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제법 번창했었다. 통일신라 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불상과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모두 보물로 지정됐다. 금둔사의 명맥이 끊긴 건 정유재란(1597) 때다. 난리 통에 가람이 전소했다. 이후 금둔사는 오랜 세월 폐사지였다. 1970년대까지 산 아래 주민이 금전산 중턱 절터까지 올라와 밭농사를 지었다.
금둔사를 다시 일으킨 주인공이 지허다. 1979년 금전산 기슭에서 무너지고 부서진 석조불상과 삼층석탑을 발견하고서다. 그 뒤로 스님은 길 닦고 돌 쌓으며 버려진 절을 다시 세웠다. 월간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한 한창기(1936∼97) 선생이 물심양면 큰 도움을 줬다고 들었다. 한창기는 지허와 같은 벌교 출신이다. 지허가 산 아래 낙안읍성에서 600년 묵은 노거수의 씨앗 한 움큼을 받아와 금둔사 곳곳에 뿌린 건 1985년의 일이다. 그 씨앗 중에서 6개가 살아남아 매운 계절에 꽃을 피운다. 생전의 스님은 “매화가 부처”라고 말했었다.
가지를 가져다 심으면 길어야 40년밖에 못 사네. 씨앗이 싹을 틔우면 백 년도 넘게 살고. 매화 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고? 그렇게 기다리던 꽃이 피니 반갑제. 고맙고 반가운디, 부끄럽네. 65년 중노릇을 했는데 여직 화두를 못 풀었잖어. 이놈들은 풀었고. 시방은 매화가 부처네. 화두를 풀면 부처가 되니께. 금둔사(金芚寺)가 부처가 싹을 틔우는 절이란 뜻이여.
금둔사 삼층석탑으로 오르는 지허 스님의 뒷모습. 2020년 12월 촬영했다. 편치 않은 몸으로 스님은 굳이 계단을 올라 석탑을 보여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금둔사 삼층석탑. 뿔뿔이 흩어져 있던 석탑을 지허 스님이 하나씩 모아 다시 세웠다. 석탑은 보물로 지정됐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생전의 지허는 ‘선농일치(禪農一致)’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농사짓는 게 참선이라는 뜻이다. 60여 년 전 선암사 차밭을 일구기 시작했을 때도 한마음이었을 터이다. ‘선다일여(禪茶一如)’도 지허가 자주 부린 말씀이다. 차 생활이 참선이라는 말이니 수행하지 않으면 차를 만들 수 없다는 경구다. 지허는 참선하는 마음으로 차를 빚었고 농사를 지었고 꽃을 기다렸다.
실제로 금둔사는 밭이 많다. 절 주위로 차밭이 에두르고, 대웅전 곁에는 텃밭도 있다. 금둔사에서 홀로 살았던 스님은 배추·고추·갓 등을 손수 키웠다. 차는 예전처럼 많이 만들지 못했다. 7년쯤 전 넘어져 갈비뼈를 다친 뒤로 혼자 마실 만큼의 차만 만들었다. 스님이 내주는 차는 여운이 있었다. 은은한 맛과 향이 입안에서 한참 머물렀다. 매향(梅香) 같았다.
🕵️ 홍매 설중매 납월매
10년쯤 전 촬영한 금둔사 홍매. 음력 섣달에 피는 매화라 해서 납월매라고도 한다. 중앙포토
매화는 꽃 이름이다. 나무 이름을 부르려면 매실나무라 해야 한다. 사과나무를 사과꽃나무라고 하지 않듯이 매실을 맺으니 매실나무다. 매화는 매실나무에서 피는 꽃이다.
매화는 꽃 중의 꽃이다. 예로부터 난초·국화·대나무와 함께 사군자(四君子)로 불렸거니와 잎사귀 한 장 없어도 도도히 꽃을 피워 조선 시대 문사들이 기꺼이 찬사를 바쳤다. 이를테면 ‘백화괴(百花魁)’는 백 가지 꽃의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화형(花兄)’은 모든 꽃의 맏이라는 의미다.
매화는 색깔에 따라 달리 불린다. 홍매도 있고 청매, 백매도 있다. 붉다 못해 검은 매화는 흑매라고 따로 부른다. 화엄사 각황전 앞 매실나무에서 홍매가 핀다. 한겨울에도 피는 매화는 주로 홍매다. 그래서 홍매는 눈 속에서 피는 매화라 하여 설중매(雪中梅)라고도 한다. 설중매 그려진 동양화를 떠올려 보시라. 하나같이 꽃이 붉다. 금둔사 매화는 ‘섣달 납(臘)’자를 붙여 ‘납월매(臘月梅)’ 또는 ‘납매(臘梅)’라고도 한다. 음력 섣달에 피는 홍매를 의미한다. 설중매라 불리든, 납월매라 불리든 아직 나비가 없는 계절이어서 한겨울에 피는 매화는 향기가 강하다.
“새벽에 예불하러 나왔는데 경내가 매향으로 가득한 거라. 햐~ 이 맛에 중노릇을 하는 거라.” 생전의 지허 스님이 으스대며 했던 말이다. 금둔사에는 납월매 6그루 말고도 100여 그루의 매실나무가 더 있다.
2024년 1월 : 스님과 매화
금둔사 일주문. 바위에 새겨진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뜻이다. 손민호 기자
승국 스님은 죄라도 지은 양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스님이 가신 것도, 매화가 피지 않는 것도 다 제 잘못인 듯한 얼굴이었다.
저도 큰스님과 인연이 아주 오래됐습니다만, 올겨울처럼 매화가 안 핀 건 처음입니다.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습니다. 열흘쯤 전 한 송이가 올라와 연락드렸을 때만 해도 이제 연달아 꽃을 피우겠구나 했었는데, 날이 포근해져도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요?
금둔사의 새 주지 승국 스님. 승국 스님은 "큰스님이 안 계시니 매화가 안 핀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손민호 기자
승국 스님과 경내를 돌아봤다. 납월매 여섯 그루를 찬찬히 돌아봤는데, 꽃 피운 홍매는 네 송이가 전부였다. 음력으로 섣달 이렛날이었으니, 예년 같았으면 경내가 매향으로 그윽했을 터였다. 하릴없이 경내를 거니는데 활짝 핀 백매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홍매도 안 핀 금둔사에 백매가 피었다니.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승국 스님도 “한겨울에 백매가 핀 것도 처음”이라며 “어제까지 못 봤는데 아침에 핀 것 같다”고 말했다.
지허 스님이 가시기 전 모습을 승국 스님으로부터 들었다. 오래전부터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었다고, 몇 해 전부터 색안경을 썼던 것도 한쪽 눈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2022년 늦여름께 금둔사 어귀에서 쓰러지셨고, 그 뒤로 돌아갈 때까지 병원에 누워 계셨다고. 노동이 참선이라는 생각에 평생 일만 하시다 보니 팔순 넘은 몸이 견뎌내지 못했던 것 같다고.
2024년 1월 17일 촬영한 금둔사 홍매. 올겨울에는 금둔사 홍매가 좀처럼 피지 않았다. 손민호 기자
2024년 1월 17일 촬영한 금둔사 백매. 겨울이 다 가야 피던 백매가 올겨울에는 서둘러 피었다. 손민호 기자
승국 스님은 “다비식에서 사리 여러 점이 나왔는데, 1주기가 되면 선암사에서 정식으로 모시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허 스님 추모 사업은 태고종 총본산 선암사에서 총괄한다. 태고종 종정을 역임한 큰스님에 대한 예우다. “말씀을 남기신 게 있느냐” 물었더니 지허 스님의 열반송(涅槃頌)을 보여줬다. 생전의 노스님이 “내가 죽거든 열반송으로 쓰라”고 미리 건넨 글귀라고 했다.
뿌리 없는 나무 위에 녹음이 꽃 같고
끓는 물 가운데 흰 연꽃이 활짝 피었네.
지팡이 끝에 걸린 옛 달은 허공을 비추고
하늘 밖에 학 울음소리 길게 떨어지는구나.
도를 깨친 승려가 남긴 열반송은 정신적 사리와 같다고 했다. 스님은 무슨 말씀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뿌리 없는 나무에 꽃 같은 녹음이 지고 끓는 물에 연꽃이 피는 건, 무(無)에서 유(有)가 나온다는 뜻일까. 400년 가까이 버려졌던 옛 절집을 일으켜 세웠던 당신의 업(業)을 말하려고 했을까. 혹 앙상한 가지에서 불현듯 꽃을 피우는 납월매의 기적을 가리키는 건 아닐까. 다시 매화 앞에 섰다. 그리고 코로나로 힘들었던 그해 겨울, 스님이 남긴 말씀을 되새겼다.
매화가 말여. 꽃이 피면 아무리 추워도 안 죽어. 추우면 꽃잎을 요래 오므려. 꽃 안을 지켜야 하니께. 꽃가루를 지켜야 벌레든 새든 날아드니께. 너무 헤프게 살아서 코로나가 온 것 아니겄어? 이제 좀 덜 다니고 덜 만나고 덜 먹어야 쓰겄제. 그렇게 버텨야지, 별수가 있겄는가? 그리움은 떨어져 있어야 생기네. 너무 가까이 있으면 소중한 걸 모르네.
2020년 12월 촬영한 금둔사 홍매. 나비가 없는 한겨울에 피는 바람에 홍매는 향기가 강하다. 그 향기를 맡고 벌레가 날아든다. 그렇게 생명은 또 이어진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낙안읍성과 진일식당
차준홍 기자
금둔사 주변에는 가볼 곳이 수두룩하다. 우선 조계산 자락에 천년고찰 선암사와 송광사가 있다. 선암사에 들면 뒷간에 쪼그리고 앉아봐야 하고, 송광사에 가서는 불일암을 올라가 봐야 한다. 불일암은 법정 스님의 마지막 거처다. 이왕이면 두 절집을 잇는 고개를 걸어서 넘으시라 권한다. 이 고갯길 꼭대기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맛있는 보리밥집이 숨어 있다. 다만 조계산 자락은 봄날이 훨씬 더 좋다. 신록 우거진 계절이 돌아오면 다시 이 고개를 넘을 작정이다.
조계산 자락으로 안 들어가도 가볼 곳이 남았다. 우선 낙안읍성. 금둔사를 거느린 금전산 바로 아래에 있다.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읍성 마을로, 낙안읍성 자체가 사적이다. 국가 지정 문화재 안에서 사람이 산다. 현재 낙안읍성에 88세대 175명이 거주한다. 낙안읍성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초가집이다. 읍성 안에 건물 316동이 있는데, 관아 같은 일부 건물을 제외하곤 다 초가집이다. 이 중에서 원형이 잘 보전됐거나 의미가 있는 초가집 9개 동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읍성 초가집에서 숙박이 가능하다. 모두 36개 민가에서 민박을 운영하는데, 가격은 5만~8만원(2인 기준)이다. 인터넷·TV는 물론이고 개인 화장실도 따로 있다. 낙안읍성에서는 읍성을 에운 성곽을 한 바퀴 돌아봐야 한다. 1410m 길이의 성곽 위로 길이 잘 나 있다.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읍성 전경이 압권이다. 입장료 어른 4000원.
낙안읍성 성곽 위에서 내려다본 낙안읍성 전경. 초가집 모여 있는 풍경이 정겹다. 손민호 기자
낙안읍성 바로 옆에는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이 있다. 한국 잡지사의 아버지 한창기(1937~97) 선생의 유물 6500여 점을 소장·전시 중인 시립 박물관이다. 우리말 잡지 ‘뿌리깊은나무’와 여성 문화잡지 ‘샘이 깊은 물’을 창간한 한창기는 한국 문화를 계승하고 보급한 문화계 거물이었다. 전시 중인 유물이 기대보다 훨씬 다양하고 재미있다. 고서·민속품 등 800여 점을 전시 중인데 전체 유물을 다 합치면 60억원어치가 넘는다고 한다.
진일식당 김치찌개 백반. 반찬만 16가지가 나온다. 김치찌개에는 동네에서 키운 돼지의 뒷다리살과 1년 가까이 익힌 김치를 쓴다. 달짝지근한 국물의 비결은 매실청이다. 손민호 기자
호남고속도로 승주IC 어귀에 팔도 기사식당의 전설로 통하는 ‘진일기사식당’이 있다. 식당 이름 ‘진일’이 ‘진입로에서 제일’이라는 뜻이다. 2019년 ‘진일식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대표 메뉴는 김치찌개 백반이다. 반찬만 16가지가 나온다. 여기에 된장국과 김치찌개가 더해진다. 1984년 배일순 할머니가 시작했고, 며느리 서정엽(58)씨가 물려받았다. 배일순 할머니는 2021년 겨울 돌아갔다.
원조 할머니가 없어도 밥상은 그대로다. 열무김치·갓김치·정어리젓갈 등 모든 반찬이 손수 담근 것이다. 돼지고기 비계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는 얼큰하면서도 달다. 찌개를 끓을 때 매실청을 넣는 게 단맛의 비결이라고 한다. 진일식당은 찌개용 배추를 따로 담근다. 1년에 4번 2000포기씩 담근다고 한다. 1인 9000원이었던 김치찌개가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1000원 올랐다. 5년 전만 해도 공깃밥 1개 추가는 공짜였는데, 지금은 1개 추가할 때 1000원을 더 내야 한다.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