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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와의 만남
이 문 열
아우가 오지 않은 것은 갑작스러운 사정의 변경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약속 자체가 그리 정확하지 않았던 탓인 듯했다. 김한조 씨는 일이 거듭 어그러지는 것을 변명하면서 자신이 그런 일을 처음 하기 때문임을 유달리 힘주어 말했다. 검고 깡마른 얼굴에 이따금씩 알아보게 붉은 기운이 번지고 중요한 대목에서는 무언가를 잘못한 아이가 그러듯 몸까지 비꼬는 폼이 정말 그런 일에 처음 손대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돈도 되고 일도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아 남 따라 시작해 본 건데 영 쉽지 않구먼요. 인차(금세) 될 것 같던 일이 터지고, 이 사람 저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 꿩 궈 먹은 소식이 되고…… 허궁에도 딸라 참 많이 뿌렸디요. 그러다 보니 춘부장님 계신 곳을 알아낸 게 하마 장례 끝난 지 보름 뒤라……. 하지만 이번 일은 걱정하지 마시라요. 하루 이틀 늦기는 해도 오기는 꼭 올 거야요.”
나는 이미 알릴 일은 다 알리고도 금방 일어나지 않는 그가 조금씩 지루해졌다. 김한조 씨도 그런 내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이번에는 북한 얘기를 꺼냈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내가 이미 익히 알고 있거나 그 자신이 전에 얘기한 적이 있는 북한의 비참한 실상이었다. 악화된 식량 사정을 중심으로 조금씩 과장된 것인데 그도 대부분의 그곳 사람들처럼 남한 사람들에 대한 호의의 표시나 고급한 아첨 삼아 정색을 하고 그 실례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북한에 자주 드나드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내이기 때문인지 정작 내가 알고 싶은 부분에 이르면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남에게서 들은 것이거나 추측뿐이었다.
잔금을 원하는가. 나중 그나마 할 말이 없어져 서로 얼굴만 쳐다보게 되어서야, 나는 속으로 그런 짐작을 해 보았다. 사람을 못 믿는 것 같아 야박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 마당에 잔금까지 치르고 싶지는 않았다. 연변 사람들도 요즈음은 약아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여러 번 듣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제껏 그가 해 온 일이 그리 미덥지가 못해서였다.
하지만 잔금 부분은 지레짐작이었다. 내가 차마 이제 그만 가 보시란 말까지는 못 해 피로한 표정으로 지루함을 감추며 말없이 앉아 있자 뭔가를 망설이던 그가 불쑥 말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거 알긴 하지만 연길 구경은 다 했습네까? 뭣하면 제가 안내나 좀 해 디릴까 해서…….”
비로소 나는 그의 까닭 모를 뭉그적거림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호의는 고마워도 그리 반가운 제안은 못 되었다. 80년대 후반 첫 여행 때 이미 해란강도 돌아보고 용정 우물가도 찾고 하는 식으로 하루 꼬박 연길을 돌아본 적이 있는 데다 이제는 관광에도 전 같은 흥미가 없었다. 첫날이나 겨우 희미한 이국 정취를 느낄까, 다음 날부터는 이미 국내에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심드렁해지는 게 요즘의 해외 나들이였다.
그의 호의가 무색하지 않도록 이리저리 말을 둘러 가며 김한조 씨를 객실에서 내보내고 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몇 마디로 끝날 통보에 김한조 씨는 두 시간 가까이를 쓴 셈이었다. 무슨 국영 기업체의 대외 합작부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주초의 오전을 그렇게 어정거릴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근무가 아주 헐거운 듯했다.
김한조 씨를 내게 소개한 것은 연길 대학의 류(柳) 교수였다. 나는 그를 백두산 관광을 위해 어거지로 얽은 거나 다름없는 지난번 세미나에서 만났다. 거기서 그는 동북사(東北史), 특히 발해사(渤海史)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는데 나는 그 학문적인 조예보다 소박하고 겸손한 인품에 호감이 가서 개별적인 친분을 맺게 되었다.
귀국을 위해 옌타이〔煙臺) 로 떠나기 이틀 전 내가 두만강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자 류 교수가 선뜻 안내를 맡아 주어 함께 혜산으로 갔을 때였다. 두만강 가에 이르러 북한 땅을 건너보니 절로 술 생각이 났고, 술에 취하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과장돼 나중에는 강변에서 북한 쪽을 향해 절을 하며 눈물을 떨구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그때는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인 만큼 예(禮)에도 없는 망제(望祭)를 지낸 꼴인데 말없이 그런 나를 보고 있던 그가 내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말했다.
“이 박사님도 그러시지 말고 사람을 넣어 보시지요. 아버님을 이리로 초청하게 하고 그때 박사님이 한 번 더 오시면 부자간에 만날 길이 영 없는 것도 아닐 겝니다.”
물론 나도 그런 수가 있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 아니, 실은 그 뻔한 세미나에 없는 시간을 내 참석하기로 한 것 자체가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그런 수를 노리고 있어서였다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내 소심함에 비해 안기부의 경고는 너무도 삼엄했다. 함부로 그런 일을 벌이기에는 국립대학 교수라는 내 신분이 아무래도 부담이 돼 떠나기 전 나는 연줄을 따라 그쪽 요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내 말을 몇 마디 듣기도 전에 강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한중(韓中) 수교가 정식으로 조인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연길은 준(準)북한 영토라 할 수 있습니다. 설령 저희 요원들이 따라간다 해도 그런 비밀스러운 접촉이 있을 때는 박사님의 안전을 보장할 길이 없으니까요. 막말로 그때 저쪽 특무(特務) 몇이 아버님을 따라와서 이 박사님을 북한으로 끌고 가 버리면 그게 바로 의거(義擧) 입북이지요. 그때 가서 납치당했다고 끝까지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또 그리 주장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단념하십시오. 아직은 이릅니다. 박사님이 별 이름 없는 보통 사람이어도 우리가 나서서 이렇게 말리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박사님과 가족분들만 불행해지는 게 아니라 남한 사회까지도 심각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신중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물론 아버님 되시는 분의 연령이 팔순에 가까운 만큼 다급하신 심경은 저희들도 이해하겠습니다. 살아생전에 한 번이라도 아버님을 뵙고 싶은 게 자식 된 분의 당연한 심경이겠지요. 그러나 무리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해 볼 테니 이번에는 그냥 세미나만 참석하고 돌아오십시오.”
그 바람에 결국 내 은밀한 시도는 손대 보기도 전에 포기되고, 이미 이런저런 사진으로 눈에 익어 새삼 감동스러울 것도 없는 백두산 관광과 마음에도 없는 세미나로 연길에서의 닷새가 헛되이 가 버리자 그날 내 감정이 더욱 그렇게 과장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끔찍한 범죄라도 결행하는 기분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류 교수는 다음 날로 김한조 씨를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보내왔다. 처가가 북한에 있고 그의 아내도 그와 결혼할 때까지는 조교(朝僑, 연길에 있는 북한 국적의 교포)였다는 사람이었다. 처가는 청진이지만 처삼촌이 셋이나 되어 평양과 의주, 회령에 흩어져 산다는데 특히 내가 김한조 씨에게 일을 맡길 생각을 한 것은 청진과 평양에 아울러 연고가 있다는 점이었다. 80년대 중반에 받은 아버지의 편지는 주소가 평양으로 되어 있었는데 근년에 나를 찾아온 재일 교포 친척은 청진에서 아버지를 만나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모조리 적어 주고 동료들의 여윳돈을 거두어 삼천 달러를 채워 주며 김한조 씨에게 일의 착수를 부탁했다. 실제로 든 경비 외에 최소한 이만 원(元)의 수고료를 보장하고 아버지의 신분이 특수해 초청에 특별한 경비가 나도 이의 없이 부담한다는 다짐에다 류 교수가 개인적인 보증을 서 주어 이루어진 묘한 계약이었다.
그쪽 수준으로는 큰 벌이여서인지 내가 연길을 떠나던 날 아침 마지막으로 부인과 함께 찾아온 김한조 씨는 아주 신이 나서 낙관적인 전망을 다짐처럼 늘어놓았다. 빠르면 두어 달 뒤인 그해 겨울 방학에 맞추어 아버지를 만나게 될 것이고 늦어도 지난봄까지는 만나게 해 줄 수 있으리라는 얘기였다. 북한에도 중간 간부층은 적당히 썩어 있어 달러로 안 되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게 그러한 낙관의 근거였다.
김한조 씨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일은 예상 밖으로 진전이 더뎠다. 애초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해 겨울방학은 아무런 소식조차 없이 지나가고 다시 여름방학이 와도 이렇다 할 진전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아직은 실정법에 걸리는 일을 꾸민 터라 나도 드러내 놓고 편지를 내거나 인편을 이용할 수 없어 막연히 답답해 하며 1년을 넘겼다. 그러다가 그 뒤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내 답답함은 한결 더해졌다. 이제는 전에 안기부 요원이 우려했던 바와 같은 부담이 없어진 까닭이었다.
그런데 올해 정월 친척의 초청으로 서울에 온 류 교수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안됐습니다. 아버님께서 작년 여름에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는군요. 김한조 그 주변머리 없는 사람이 벌써 그걸 알아 놓고도 우물쭈물하다가 이제야 제게 알려 주지 뭡니까? 그의 안해(아내)가 몇 달 앓아눕는 바람에 일이 늦어졌던 모양인데 어쨌거나 자기편에서 늑장을 부리다가 일을 그르쳤다는 생각에 낯이 없었던가 봅니다. 게다가 이 박사님한테 받은 돈은 그 뒤 두어 차례 북조선 왔
다 가면서 흐지부지 날아가 버렸고…….”
그러고는 자신의 생각인지 김 한조 씨의 부탁이 있어선지 넌지시 새로운 제안을 했다.
“지금 김한조 그 사람은 이 선생님에게서 받은 돈을 물어 줘야 한다고 걱정이 태산입니다만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본 건데…… 아버님은 이미 그렇게 되셨고, 대신 동생분을 한번 만나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쪽에 여럿 되는 모양이던데요.”
솔직히 그때만 해도 나는 그런 류 교수의 새로운 제안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디. 거의 반세기에 걸친 애증과 은원이 느닷없이 스러져 버리는 순간의 어떤 허망감이었으리라. 젊은 날처럼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수시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는 그리움과 원망의 대상이 그렇게 느닷없이 이 세상을 떠나 버릴 수 있다니…….
실은 내가 그 무렵 들어 아버지와의 만남을 부쩍 서둘게 된 것도 여든에 가까운 그 고령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내게는 아버지의 죽음이 턱 없이 갑작스럽고 어이없기만 했다. 나에게 남은 마지막 기억 이 50대 중반의 젊은 아버지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렇다 할 언질 없이 류 교수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한동안 아버지의 죽음만을 생각했다. 우선 어머니에게 그 일을 알려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부터 그럴 때 내가 마땅히 치러야 할 의례에 이르기까지 시급하게 결정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어머니는 북쪽에 내 아래로 다섯 남매가 더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된 80년대 중반 이후 한 번도 아버지를 입에 담지 않았다. 서른셋에 홀로 되어 어린 삼 남매를 키우면서 행실 면에서는 한 번도 남의 입 끝에 오르내린 적이 없는 당신에게는 아버지의 중혼과 그 같은 다산(多産)이 배신처럼 느껴지신 듯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이제 아버지의 부음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맏이인 내가 치러야 할 의례도 그랬다. 늦었지만 빈소라도 차리고 상복을 입어야 하나, 탈상은 어떻게 하며 기제사는 여기서 내가 지내도 되나, 절이나 교회를 통한 천도(薦度) 의식은 필요하지 않을까, 아직도 생존한 것으로 되어 있는 남한의 호적은 어떻게 되나, 이제는 사망신고를 하면 받아 주려나. 파보(派譜)를 다시 꾸미고 있는 문중에는 알려야 하나, 북의 다섯 남매를 족보에 얹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렇지만 막상 어떤 결정을 내리려고 보니 묘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풍문에 흡사한 죽음의 소식뿐 구체적인 그 정황도 심지어는 정확한 기일(忌日)조차 모르면서 누구에게 알리고 무슨 의식을 치른단 말인가. 어머니에게는 알려도 되지 않을까 싶었으나 그것마저도 마땅치 않았다. 겨울 들면서 드러나게 노인성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는 어머니에게 그 말을 했다가 어떤 돌발 행동으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 정확한 정황을 확인한 뒤에. ― 이윽고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비로소 나는 남의 일처럼 흘려들은 아우를 만나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통일이 되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 막연한 존재였던 아우가 그때서야 겨우 내 삶과 구체적인 관련을 맺는 존재로 전환된 것이었다.
나는 귀국하는 류 교수에게 아우와 만나겠다는 뜻을 전했고 일은 빠르게 진척되어 이번에는 두 달도 안 돼 김한조 씨에게서 그 날짜가 왔다. 물론 일반의 북한 편지에 한글로 쓰여 있기는 했지만, 우리끼리 약속한 암호와도 같은 표현 뒤에 숨어 있는 날짜는 바로 오늘이었다.
나는 학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연길행을 서둘렀다. 그러나 중국과의 수교는 이뤄져도 그런 목적의 여행을 위한 개인 비자를 얻기가 쉽잖은 데다 혹시라도 험한 세상이 되면 잠입과 접선의 혐의를 받게 될지도 모르는 혼자만의 여행은 여전히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궁리 끝에 흔히 연길을 중간 기지로 삼는 7박 8일의 백두산 관광코스를 이용하기로 하고 마침 내게 맞는 일정표를 가진 여행사의 관광단에 묻어 서울을 떠났다.
김한조 씨의 등을 떠밀듯 내보낼 때만 해도 내가 벗어나고 싶어했던 것은 그의 어눌함. 특히 뜻 없는 말의 되풀이가 주는 지루함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정작 혼자 있게 되자 내게 오히려 절실한 것은 우선 쉬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며칠 마음에도 없는 관광에 지친 탓도 있지만 아우와의 만남을 앞두고 쌓여 온 마음속의 피로가 더 큰 원인인 듯했다
얼굴도 모르는, 난생처음 만나는 아우, 그것도 배다른 아우 40년 가까이나 생판 다른 문화, 다른 환경에서 교육받고 자란 성년의 아우 하지만 처음 연길행을 결심할 때만 해도 내 머릿속에는 꽤나 상세하고 감동적인 만남의 시나리오가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시간이 가고 만남이 가까워질수록 그 첫 순간의 어색함과 서먹함이 과장되게 느껴져 와 머릿속의 시나리오를 점점 더 자신 없게 만들었다. 특히 간밤에는 그렇게 자신 없어진 시나리오를 새로 꾸미느라 늦게까지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 아침에는 또 모든 게 온전히 백지가 되었는데 그동안에도 마음 속으로는 꽤나 피로했던 듯했다. 아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묘한 안도감과 함께 앞뒤 없이 홀로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우선 잠이나 한숨 푹 자 둘 요량으로 커튼을 둘러치고 누웠다. 류 교수가 찾아오기로 된 오후 세 시까지는 시간이 넉넉했다. 그는 아침 일찍 내게 전화를 걸어 며칠 전 한국에서 온 무슨 단체를 위해 ‘조직’할 일이 있다면서 금세 달려오지 못하는 것을 무척 미안해 했다.
그러나 잠자는 일은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 침대에 누웠을 때 잠깐 깜박했을 뿐 무언가 대수롭지 않은 소음에 깨어난 뒤로는 애를 써도 잠들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그래도 많은 돈 들여 떠나온 여행길인데, 싶자 대낮부터 호텔 방에서 잠이나 자기에는 아무래도 좀이 쑤셨다.
이윽고 배길 수 없게 된 나는 아래층 커피숍으로 내려가 커피나 한잔 하려고 방을 나왔다. 그 뒤에는 연길 거리나 돌아보며 그동안에 달라진 모습이나 살피다가 한국 식당에서 점심이나 때울 생각이었다.
호텔 커피숍은 지금까지 지나온 도시들에서와는 달리 제법 붐볐는데 남한 여행객들이 주로 투숙하는 곳이라 그런지 대개는 남한에서 온 사람들과 현지 동포들 간의 만남으로 보였다. 나는 빈자리를 찾아 앉은 뒤 커피 한 잔을 시켰다. 그런데 미처 커피가 오기도 전에 방금 누군가와 얘기를 끝내고 일어나던 사내가 알은체를 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이구 선생님도 남으셨군요. 전에 천지(天池)를 보신 모양이지요? 하기야 요즘 세상에 아직 백두산 천지 구경도 못 했으면 그것도 촌놈이지.”
그러면서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맞은편 자리에 앉는 걸 보니 함께 거기까지 온 관광단 중의 하나였다. 비교적 수다스러워 여럿 가운데서도 눈에 띄던 사람이었는데 내게는 그가 남은 것이 좀 뜻밖이었다.
“네에. 지난봄에 와서 한번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그럼 사업차 오신 모양이네. 요즘은 상용(商用)으로 하면 개인 비자도 잘 나온다던데, 왜 관광단에 끼셨습니까?”
내가 밝히지 않은 탓에 그는 내 직업을 저 나름으로 추측해 그렇게 물어 왔다. 나는 차라리 잘됐다 싶어 되는대로 받았다.
“사업이란 게 그리 대단할 게 없어서. 겸사겸사 관광도 좀 하고 하다가 여기서 하루 이틀 볼일이나 보려고……. 사장님은 어떻게?”
내가 대답 대신 오히려 되물은 것은 정말로 그가 왜 남았는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내 여행 목적을 밝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사내도 선뜻 자신이 일행에서 떨어져 남게 된 이유를 밝히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나도 비슷합니다. 사업이란 게 좀 있기는 하지만 드러내 놓고 말할 것도 못 되고……. 또 연길로 바로 오는 비행기도 없고 해서. 마침 코스에 들어 있는 계림(桂林)과 서안(西安)도 못 본 곳이고…….”
사내가 그렇게 대강 얼버무렸다. 수다스러움에 비해서는 조심성이 있는 편이었다. 그게 슬며시 내 호기심을 일으켰다. 이 사내는 또 무슨 일로 일행에서 처졌을까. 그러나 사내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이어질지 모르는 내 질문을 피해 버렸다.
“그러고 보니 남은 게 세 사람이네. 나는 통일꾼과 나 둘뿐인 줄 알았더니.”
통일꾼이 남은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 내세워 통일꾼이란 별명을 얻은 그 통일 운동가는 이 정체 모를 사내와는 다른 의미의 수다로 일행에게 진작부터 알려져 있었다. 주로 국수주의적인 상고사(上古史) 지식을 바탕으로 한 비분강개를 통해서였다. 관광 중에 잠시라도 일행의 귀를 끌 수 있는 기회만 있으면 그는 무언가 비분강개로 사람들에게 감동이나 교훈을 주지 못해 애를 썼다.
“여기는 옛날 백제 땅이오. 백제가 요서(遼西), 진평(晉乎) 두 군(郡)을 다스릴 때 이 북경은 진평군에 속해 있었지. 아니, 원래는 이 중원 전체가 한족들이 밀려들기 전까지는 우리 땅이었단 말이오.”
북경 공항에 내리자 첫마디가 그랬고, 자금성에서도 비슷했다.
“그때 이성계가 그대로 밀고 나가 이 자금성을 우리가 차지했어야 하는 건데. 청나라는 뭐 별건 줄 아슈? 청 태조 누르하치가 겨우 팔기병(八旗兵) 삼만을 보내 중원을 삼킨 거란 말요. 그런데도 이성계는 그보다 이백 년 전에 오만을 가지고도 벌벌 떨다 돌아왔으니.”
모르기는 하지만 그는 아마도 환단고기(桓檀古記)며 비류백제설(沸流百濟說), 임나대마도설(任那對馬島說) 같은 것에도 정통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고대사의 영광을 일깨운 뒤에는 공식처럼 그 회복을 위한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어 통일꾼이란 별명을 얻었는데, 연길에 내린 뒤로는 그 비분강개의 강도가 더해졌다.
“이 산천을 보시오. 바로 우리 산천 아닙니까? 우리 동포가 많이 살아서가 아니라 산과 물이 생긴 모양이 하마 중국과는 무관하다니까. 이게 경상도나 충청도 어디라고 해서 이상할 게 뭐 있겠소?”
“왜놈들이 몹쓸 짓을 너무 많이 했어. 반도 삼킨 것도 모자라 간도협약(問島協約)이니 뭐니 남의 경계까지 줄여 놓았으니……. 슬금슬금 옮겨 살며 기득권이 생길 때를 기다렸으면 영락없이 우리 땅이 되는 건데.”
공항에서 연길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부터 그렇게 떠들던 그는 어제 저녁 식탁에서 갑자기 무슨 심각한 망명객처럼 선언했다.
“나는 팔자 좋게 천지 유람이나 다닐 생각 없소. 천지 유람은 통일된 뒤에 흥겹게 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 이틀 북한 실정에 밝은 여기 동포들과 함께 지내면서 통일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소.”
무심히 보면 치기가 도를 넘은 아마추어 국학자의 황당한 결정 같지만 내가 관찰한 바로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치기라는 게 묘해서 어떤 때는 어리석음 덜떨어짐 같은 말과 동의어로 우스꽝스럽지만 어떤 때는 순수 열정과 혼동되어 상당한 감동을 자아내기도 한다. 내가 나가는 대학에는 이따금씩 그 방면으로 이름깨나 얻은 통일꾼들이 이런저런 행사의 연사로 초청되어 오는데 그 치기만만함에서는 대학 하급생이 대부분인 그 청중이나 별반 차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통일꾼의 말도 닳고 닳은 40대가 대부분인 관광단을 상대로 해서 그렇지 대학 축제 때 국수적인 동아리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뗘들었다면 적잖은 감동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따라서 내 추측은 그가 그 방면의 상당한 전문가로서 오히려 처음부터 연길에서 나름의 어떤 활동을 목적하고 있었을 거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내가 굳이 일행에서 떨어져 있는 동안의 객실료를 따로 물기로 한 것도 실은 그 통일꾼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여행사 측은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그 통일꾼과 나에게 한방을 쓰도록 했을 것인데 나는 그게 싫었다. 내 잔류 목적이 그에게 노출되는 것도 반갑지 않거니와 그가 저지를지 모르는 어설픈 실정법 위반의 증인이 되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자칫하면 둘의 실정법 위반이 고약하게 얽혀 서로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사업가가 그 통일꾼과 한방을 쓰게 된 것 같았다.
“선생님도 남으신 줄 알았으면 선생님과 한방을 쓰게 해 달라는 건데……. 당최 그눔의 통일 사업이 얼마나 요란한지.”
사업가가 낯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했다. 한발 떨어져서 부담 없이 듣게 되니 문득 그 통일 사업도 궁금해졌다. 내게는 그저 막막하기만 한 통일이란 말이 그토록 구체적이고도 급박한 사람들, 통일을 위해 당장 해야 할 일의 순서며 방법까지 훤히 꿰고 있는 그런 운동가들은 국내에 있을 때도 적잖이 궁금한 사람들이었다.
“도대체 그 통일 사업의 내용이 뭡디까?”
“어디서나 말이지요 뭐, 말. 오늘 아침에도 두 패가 다녀갔는데 이건 뭐 금세 혈서라도 쓸 것 같은 정치 집회 같더라니까요. 뭐라더라, 같은 핏줄기의 따사로움을 가슴에 새기고 소중한 민족의 동질성을 보듬어 이념의 장벽을 뛰어넘자, 라고 하던가.”
“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데요?”
“교수니 작가니 하는 게 여기 연길에서는 말깨나 하는 사람들 같습디다만, 우리 통일꾼하고는 첨 만나도 그 사람이 관계하는 무슨 단체 사람들하고는 전에 만난 적이 있고……. 그런데 우스운 것은 우리 통일꾼이 그들을 무슨 재외(在外) 민족 대표라도 만난 양 열을 올리는 거예요. 신식민주의를 까부시어 자주성을 쟁취하자느니, 민족 반역 세력을 쓸어 없애 통일의 날을 앞당기자느니, 하는 이북 방송 비슷한 말도 하고, 자칫하다간 며칠 한방 쓴 죄로 귀국 후에 안기부에 불려 가 시달릴까 걱정이라니까요.”
무얼 하는지 모르지만 그 사업가는 꽤나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되도록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그의 얘기를 계속해 끌어내려고 한마디 거들어 주었다.
“통일을 위해서는 그런 일도 필요하겠지요. 소련 망하고 나서 미국 하는 짓이 워낙 돼먹지 않으니.”
“에이, 틀렸더라구요. 사람들이 벌써 아니던데. 그 사람들 통일 때문에 온 것 같지 않더라구요. 어떻게든 남한 단체나 개인과 친분을 맺어 여기서 합작을 하거나 남한으로 초청받을 길이 없나 하는 게 관심사인 듯하던데 우리 통일꾼이 눈치 없이 떠드니 마지못해 맞장구를 쳐 주는 거지. 그러나저러나 그 사람 어쩔려구 그리 헤픈지 몰라.”
“뭐가요?”
“오늘 아침에 벌써 두 사람에게 초청을 약속하고 무슨 단체에는 적잖은 책을 기부하겠다더군요. 어디 학교엔가는 도서관 건립도 돌아가 성사시키겠다 장담했고……. 내 보기에는 그만한 힘 있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던데, 공연히 순진한 여기 사람들 실망시키는 거 아닌지 몰라.”
사내가 통일꾼 험구를 시작한 게 자신의 여행 목적을 추궁받지않기 위해서라면 그리 신통한 방책은 못 되었다. 시작은 남의 얘기로 통일을 껴냈지만 얘기가 진행되다 보니 다시 자신도 거기 얽혀들고 만 까닭이었다.
“사람들 참 이상하지. 어째서 통일, 하면 민족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을까. 선생님도 그러세요?”
조심하느라 했지만 그래도 내게서 먹물 냄새 같은 걸 감지한 탓인지 장사꾼이라 밝혀도 굳이 선생님이라 부르며 그가 그렇게 물어 온 게 시작이었다.
“그럼 사장님은 통일, 하면 뭐가 생각나십니까?”
“평양 시민 뺀 저 이천만 난민을 어찌 먹여 살리나, 무슨 돈으로 저 북한 땅 껍데기라도 남한 비슷하게 싸 바르나…….”
“그거야 뭐 대기업들이 어찌 휘어 내겠죠. 값싼 노동력 많이 늘어나고 멀리서 지하자원 안 들여와도 되고 하니…….”
“모르는 소리 마십쇼. 내 단골 중에 제법 크게 사업하는 분이 있는데 북한 노동자 정말 걱정 많이 하더라구요.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필리핀 노동자라면 값싸게 부리는 재미라도 있겠지만 명색이 한민족인데 그럴 수 있겠냐는 얘깁니다. 그랬다가 새로 생길 지역감정 문제는 어쩌구요? 전에 말썽 많던 영호남 문제는 저리 가라가 될 거라는 겁니다. 거기다가 노동의 질도 문제라고 했습니다. 사회주의국가 일반의 비능률에다 ‘우리 식으로’ 어쩌고, 하는 구식의 노동 개념이라 현대화된 우리 노동자와는 많이 다른 모양입니다. 그 노동의 질을 우리 사회에 맞게 재교육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더군요. 지금으로는 필리핀 수준도 기대하기 어려운데 임금은 우리 노동자와 같이 쳐 주어야 한다면 쓸 수 있는 곳은 몇 군데 안 된다는 거예요. 막노동이나 일차산업 현장밖에 없을 거라던가 결국 그 노동력은 우리 산업에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많은 노동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지하자원 문제도 그리 좋을 게 없는 모양이던데요. 그저 남한보다 풍부하다는 거지 그쪽 지하자원, 국제적으로 비교 우위가 있는 품목은 손꼽을 정도라는 겁니다. 잘못하면 우리 땅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싸고 질 낮더라도 사 써야 하는 꼴이 나기 십상이라는 거지요. 한마디로 기업들에게는 역시 부담으로 작용할 위험성이 더 많은 게 북한 지하자원이라는 겁니다.”
“그것도 넓은 의미로는 통일 비용에 들겠지요. 통일 비용을 산출하고 거기에 대비하는 작업도 시작되고 있으니까 무슨 수가 나지 않겠습니까? 경제적 측면의 통일 준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통일꾼과 같은 정치적 측면의 준비도 마찬가지로 필요할 것 같은데요. 사상적, 정치적으로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마구잡이 통일을 했다가는 통일 뒤에 피나는 내전을 치르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친구 중에 이런 계산 하는 사람도 있습디다. 우리가 적화될 수 있는 가장 위태로운 시기는 통일 후 3년째 되는 해라나요. 통일 비용으로 남한의 살이가 전반적으로 악화되어 극빈층이 늘어난 데다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이 합쳐지면 불만층이 체제유지를 원하는 계층보다 훨씬 많아 사회주의에 가장 취약한 형태의 인구 구성비를 이루게 된다는 겁니다. 어쨌든 내가 장사꾼이라 그런지 내게는 훨씬 급한 게 경제적인 준비 같아 보입디다. 소련 동구 무너지는 것 보셨겠지만 사상은 경제를 따라가게 되어 있는 거 아닙니까?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그 사람들 주장도 그렇고.”
거기서 그가 다시 스스로를 장사꾼이라고 하자 그게 억눌러 온 내 궁금함을 일깨웠다. 얘기를 계속할수록 그가 장사꾼이라도 예사 장사꾼은 아닐 것이라는 추측이 강하게 인 까닭이었다.
“그런데 아까 기업가가 단골이라 말하셨고……. 말씀도 들어 보니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새로운 게 많은데…… 무슨 사업을 하십니까?”
나는 그가 애써 피하려 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다시 한 번 그렇게 물어보았다. 일순 망설임의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쳤으나 그는 끝내 시원스레 밝혀 주지 않았다.
“별거 아닙니다. 이것저것 돈 되는 것은 좀…….”
그러더니 방금 무언가 큼직한 비닐 백을 들고 커피숍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자 구원이라도 요청하는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있던 해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연길은 사회주의국가의 도시들에 공통된 인상이 짙었다. 곧 하드웨어는 그럴듯한데 소프트웨어가 시원찮은 구식 전자 기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재작년 4년 만에 다시 왔을 때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도시의 외형은 얼른 보아 크게 변하지 않은 듯했지만 내용은 이게 그때의 연길인가 싶을 정도로 딴판이었다. 긍정적 이든 부정적이든 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한 변화였다.
그때로부터 다시 1년 반, 나는 무슨 심각한 점검이라도 하듯 그 동안의 변화를 보기 위해 우의로(友宜路) 쪽으로 갔다. 듣기로 그곳은 연길 시내에서도 가장 변화가 심한 곳일 뿐만 아니라 한국 식당들이 많이 몰려 있다기에 한 바퀴 돌아보고 적당한 곳에서 점심이나 때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시의 변화란 게 보겠다고 해서 쉽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거니와 쉰을 넘겨 무디어진 호기심을 오래 사로잡을 만한 것도 아니었다. 재작년에도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새 변한 것 같기도 한 거리를, 그저 왔으니까 한번 봐 둔다는 기분으로 걷다 보니 얼마가지도 않아 피로부터 먼저 왔다.
그래서 두어 블록 걷다가 들어가게 된 곳이 카페 ‘한강’이었다. 한국인 관광객을 위한 것인 듯 한글로 크게 쓴 상호(商號) 위에 ‘카페 겸 식당’이란 영어 표기가 반원형으로 쓰여 있는 그 집 간판이 왠지 눈에 익은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서울 거리에서 자주 보던 형식이라 그랬을 터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장식도 서울의 싸구려 카페를 그대로 떼다 옮긴 듯했는데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열두 시가 채 안 되기는 해도 그 시각에 그렇게 한산한 걸로 보아 식당보다는 카페를 위주로 하는 집인 것 같았다. 실은 나도 거기서 밥을 먹을 생각은 없었다.
“어서오세요.”
어둑한 계산대 쪽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나를 맞았다. 짧은 한마디라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연길에서 흔히 듣는 억양은 아니었다. 이어 빈자리를 찾아 앉는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서른 이쪽저쪽의 안주인이었다.
“뭘 드시겠습니까?”
다시 내게 메뉴판을 내밀며 묻는 소리가 거의 서울 말씨에 가까워 여자를 살펴보니 차림도 서울에 있는 카페의 마담들과 비슷했다. 서울서 왔나, 싶었으나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남쪽 사람들이 연길 쪽에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말은 있었지만 그런 허름한 카페까지 열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렇다고 서울 여자가 연길까지 얼굴마담으로 왔을 것 같지도 않았다.
“주스나 한잔 주시오. 마담도 생각 있으면 한잔하시고.”
나는 그런 안주인에게 실없는 호기심이 일어 시골 다방에서나 쓰는 수법을 슬쩍 써 보았다. 그런데 안주인은 그런 일에 익숙한 사람처럼 주스 두 잔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청하지도 않았는데 앞자리에 앉았다. 손님도 없고 하니 심심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왠지 내게는 그녀가 그곳 사람이 아닐 거라는 짐작이 갔다.
“이곳 분이 아니신 듯한데 어디서 오셨어요?”
그녀가 친절을 과장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먼저 물어 왔다. 나는 잠시 호기심을 눌러 두고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서울서 왔습니다.”
“혼자 오셨어요?”
“일행이 있긴 한데 볼일이 있어 혼자 떨어져 나왔죠.”
“사업하시는 분이세요?”
“사업이랄 것까지는 없고 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일행은요?”
“그저 관광단입니다. 지금 천지에 가 있습니다.”
“언제 돌아오죠?”
“내일 저녁은 호텔에서 같이 묵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까지 숨길 까닭이 없어 대개는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제 알 것 다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내일 저녁 일행분들 데리고 이리루 놀러 오세요. 내 잘해 드릴게요. 이래 봬도 여기 가라오케까지 있다구요. 예쁜 아가씨들도 많고. 남조선 말로 끝내드리죠.”
“일행에게 물어보지요. 그런데 마담은 여기 사람이오?”
그제야 틈을 얻은 내가 그렇게 지나가는 말투로 물어보았다. 그녀는 별로 경계하는 빛 없이 대답해 주었다.
“네. 바로 연길은 아니지만 부근에서 자랐어요. 왜, 여기 사람 같잖아요?”
“말투가 아니라서……. 그럼 서울에 가신 적 있소?”
“아, 말. 네, 서울에 한 2년 가 있었죠. 거기서 여기 말을 하니 모두들 이상하게 봐서. 또 여러 가지로 불리한 점도 많고……. 그래서 힘 들여 서울말을 배웠는데, 비슷하게 들리는 모양이네.”
“불리하다니, 뭐가?”
“연길서 온 걸 알면 속여 먹으려 들거나 공연히 깔보는 것 같아서. 취직해 있으면 턱없이 지분거리는 것들도 많고.”
아마 돈벌이를 갔던 모양이었다. 2년이나 어떻게 머물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동안을 어떻게 보냈는지가 다시 슬몃 궁금해 왔으나 그들의 신산스러운 생활은 달리도 들은 게 많아 묻기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되니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그래, 장사는 잘되시오?”
한참 후에 내가 그렇게 묻자 주스를 홀짝거리던 여자가 깊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서울서는 여기에 이런 가게 하나만 열면 떼돈을 벌 거라 생각했는데 어려워요. 여기 사람들에게는 아직 무리고, 관광객만 기다려야 하는 판이니 이런 어중간한 규모로 잘되겠어요? 이러다간 저이 하고 나하고 2년 동안 할 짓 못할 짓 다해 가며 뼈 빠지게 모은 돈 다 날리게 생겼어요.”
여자는 그러면서 주방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때마침 주방의 쪽문으로 겉늙어 보이는 사내의 얼굴 하나가 우리 쪽을 불만스럽게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임에 틀림없었다. 그의 찌들고 지쳐뵈는 얼굴을 대하자 나는 어렵지 않게 그들 부부의 서울 생활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는 막노동판에서 일요일도 쉬지 않을 정도의 악착을 떨었을 것이고 여자는 월급 많은 재미로 험한 허드렛일로만 떠돌았을 것이다.
나는 문득 아까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던 사업가가 말한 통일 후의 북한 노동자를 떠올렸다. 꼭 들어맞을지는 몰라도 그들 부부가 앞질러 한 체험은 통일 뒤의 북한 노동자에게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 돈은 제대로 줍디까?”
내가 그렇게 앞뒤 없이 불쑥 묻자 잠시 눈을 깜박거리던 여자가 이내 알아듣고 입을 비쭉했다.
“제대로 주긴요. 우리가 연길에서 왔다는 것만 알면 무조건 싸게 부려먹을 궁리라니까요. 제대로 주는 곳은 남조선 사람들이 아무도 안 하려는 더럽고 험한 일뿐이구요. 저이는 막노동판에서도 제대로 못 받았지, 아마 뭔가 명목을 붙여서 얼마씩은 떼더라는 거예요.”
“그래도 비슷하지는 않았습니까? 필리핀이나 방글라데시에서 온 사람들은 남한 노동자 절반도 못 받는다던데요.”
그러자 여자의 두 눈에서 새파란 불길 같은 게 언뜻 비쳤다가 사라졌다.
“그것들하고 우리하고 어떻게 대요? 그래도 명색이 한 핏줄 한겨렌데, 아무리 오래 떨어져 살았다지만…….”
여자는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 놓고, 힐끗 주방 쪽을 보더니 낮고 빠른 목소리로 보탰다.
“서울서 오셨으니 다 들으셨겠지만 제가 어떻게 이만 돈이라도 모아 온 지 아세요? 이거 다 술집 아가씨들 피빨래 해 주고 짓궂은 손님들에게 손목 잡혀 가며 술상 날라 번 돈이에요. 남편 있는 여자가 다른 마뜩한 일 두고 왜 그랬겠어요? 바로 그 때문이라구요. 여기서는 그래도 교육받은 축인데 마뜩하고 돈 되는 일은 아예 차례가 없고 공장에 가서 일하려니, 세상에, 필리핀 애들하고 같이 주겠다고 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해요? 말을 못 알아듣나 걔들같이 게으름을 피우나 세상에, 같은 동포끼리…….”
그러면서 입술을 잘끈 깨무는 여자의 표정에는 새삼 분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우연히도 나는 그 사업가가 호텔 커피숍에서 잡담처럼 제기한 문제의 실례를 한 시간도 안 돼 그 카페에서 보게된 셈이었다. 나는 쓸데없이 그녀의 상처를 건든 게 미안해 얼른 두루뭉술한 위로로 화제를 바꾸었다.
“고생 많이 하셨군요. 그래서들 안 되는데…….”
“서울, 거기 몇 해 돈 벌어 오는 곳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천금을 준다 해도 살 곳은 아니에요.”
여자는 거기까지 말해 놓고서야 조금 진정이 되는지 인사치레처럼 덧붙였다.
“뭐, 그렇다고 남조선 사람들이 다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고마운 분들도 계시고 친절하게 대해 준 이도 많았죠.”
얘기가 그렇게 마무리될 무렵 해서 나는 갑자기 주스 한 잔으로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냥 일어나기는 더욱 난감했다.
“여기도 식당인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실은 며칠 제대로 된 한식을 먹어 보지 못해서……. 점심을 먹긴 먹어야겠는데.”
내가 솔직히 그렇게 속을 털어놓자 여자도 그 일로 부담을 주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저희도 간판만 걸어 놨지 식사 준비는 변변치 못해요. 게다가 경양식 중심이고. 그런데 어떤 걸 잡숫고 싶으세요?”
“육개장이나 해장국 같은 얼큰한 것하고 김치만 좀 있으면 되는데…….”
“그럼 좋은 식당 하나 소개해 드릴게요. 이 아래로 조금 내려가시면 서울식당이라고 있는데 그리로 가 보세요. 이름뿐만 아니라 음식도 서울서 오신 분들 구미에 맞을 거예요. 주방장을 서울서 데려 왔다나요.”
덕분에 나는 더 미안해하지 않고 그곳을 나와 며칠 그리워했던 한식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서울식당의 육개장과 김치는 남한에서 온 관광객의 구미에 맞춘다는 게 기껏 요리에 미원과 설탕을 퍼부은 것으로 표현되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북경을 떠난 뒤로는 줄곧 느끼한 중국 음식만 먹어 온 뒤라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그런데 우리 사업가가 알았으면 득의해 할 만한 일은 그날 한 번 더 있었다. 오후 세 시쯤 해서 약속대로 호텔 방을 찾아온 류 교수가 정말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 박사, 나는 남조선이란 사회 아무래도 이해가 안 돼요. 사람도 어지간히 만나 봤고 서울까지 가 봤는데 영…….”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오늘뿐만 아니라 벌써 몇 번짼데, 남조선 사람들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어요. 남북 문화 교류 도와달라구 해서 일껏 조직해 놓으면 다 될 무렵 해서 엉뚱한 주문으로 사람 난처하게 만드는 거우다. 이번에도 남쪽의 조통(組統)문학회란 곳에서 북한 문인들과 교류하고 싶다기에 그 방면으로 발이 넓은 우리 대학의 장 교수가 힘을 다해 북쪽에 다리를 놓고 나도 곁다리로 도와 일을 거지반 성사시켰지요. 특히 북쪽에서 올 사람들 고르는 데는 머리깨나 썼습니다. 이쪽이 뭐라 할까, 약간 혁신적인 데가 있는 것 같아 저쪽에는 좀 개방적이고 덜 정치화된 사람들을 붙여 주려 했더니 이제 와서 뭐라는지 아십니까? 공훈 작가급은 못 되더라도 일급 작가 몇쯤은 낀 저쪽의 핵심적인 문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미 문인이라기보다는 정치에 편입된 사람들이고 만나 봤자 주체사상 선전 밖에 들을 게 없다고 했더니 놀랍게도 이쪽에서 만나고 싶은 건 바로 그런 사람들이란 겁니다. 이왕 만날 바에야 북을 대표하는 문인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 욕심은 이해해요.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꼭 그런 욕심만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조통문학회 쪽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 와야 이야기가 잘 통할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은근히 자기들의 사상성을 과시하는데 정말 기가 막히더라구요. 이미 여기서도 한물간 김일성 신화나 60년대 초에 잠깐 반짝했던 북쪽의 우위를 나타내는 수치 따위를 어디서 주워 모았는지 시시콜콜히도 주워 모아 어정쩡한 북한 지식인 뺨치게 열을 올려 댑디다. 모르기는 하지만 북쪽의 공훈 작가나 일급 작가와 어울려도 그런 쪽으로는 조금도 지지 않을 사람들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게 무슨 문화 교류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만나는 게 어떻게 남북 문학자 교류 대회가 됩니까? 기껏해야 접선이나 내통이고, 주체문학자 단합대회지. 남쪽의 보수파 문인들도 비슷해요. 그들이야말로 북쪽의 공훈 작가나 일급 작가를 만나야 할 사람들인데 원하는 것은 요새 개방 바람에 간들거리는 햇내기 작가나 연애소설로 인기 있다는 아무개예요. 또 다른 접선과 내통, 또 다른 단합대회나 주문하는 거지요. 도대체 문화 교류의 목적이 뭡니까? 이질화된 남북의 문화를 동질화시켜 다가오는 통일에 대비하자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기껏 추진되는 교류라는 게 그 모양이니……. 흡수당하거나 흡수하겠다는 식이니……. 그게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사고라는 겁니까? 장 교수가 시달리는 거 보고 앉았다가 분통이 터져 그만 일어나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정치화된 문화 교류의 한 폐해를 든 셈인데, 논의를 넓히면 통일을 정치적으로만 접근할 때의 경고로도 기능할 수 있을 듯했다.
“첫술에 배부르겠습니까? 우선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요, 뭐. 처음부터 극단하게 이질적인 문화를 붙여 놓으면 충돌밖에 더 일어나겠습니까?”
그 자리에서는 그런 반론으로 류 교수를 달랬지만 그때부터 내 마음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만나게 될 아우가 어쩌면 바로 그런 이질의 문화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내 가슴을 짓눌러온 까닭이었다.
거기다가 그런 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 것은 그날 밤에 온 김한조 씨의 전화였다.
“왔시요, 동생 되는 분. 저물녘에 도착한 모양인데 오늘 밤은 외삼촌 집에서 묵고 내일 아침 호텔로 가겠답니다.”
외삼촌이 초청한 형식이 되어 있기는 했지만 내게로 먼저 오지 않고 그리로 가 버린 게 왠지 아우의 내키지 않아 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듯 느껴졌다.
이튿날 아우는 생각보다 일찍 왔다. 무슨 언질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아우가 아침 열 시는 넘어서야 나를 찾아올 것이란 예상을 했었다. 그래서 여덟 시에 일어나고도 늑장을 부리다가 아홉 시쯤 겨우 세수나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가려는데 김한조 씨를 앞세운 아우가 바로 내 방문을 두드렸다.
이미 말한 대로 나는 아우와의 첫 대면의 순간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심했다. 마흔이 다 되도록 보지 못한 아우, 그것도 묘한 생래(生來)의 적의가 끼어 있는 이복 아우와 마땅한 대사는커녕 말을 바로 낮출 수 있을까조차가 쉽게 가늠되지 않았다.
그런데 김한조 씨를 따라 쭈볏거리며 들어서는 아우를 바라보는 순간 내가 그동안 아무 쓸모없는 고심을 해 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주 낯익은 얼굴이 ― 기억에서는 거의 지워져 가지만 몇 장 남은 옛 사진의 도움으로 그 윤곽과 음영은 아직 내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 있는 아버지와, 유복자 격으로 태어났으나 가엾게도 마흔을 못 채우고 죽은 아우를 연상시키는 얼굴이 군에 가 있는 큰아이의 좀 휘인 듯한 등과 흔히 ‘잔나비 허리’라 불리는 우리 문중의 특징적인 체형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낯선 것은 다만 우리 70년대 풍으로 잔뜩 멋 부린 것 같은 아우의 신사복 차림뿐이었다.
무언가 굳어 있는 듯한 얼굴로 들어서던 아우도 나와 눈길이 마주친 순간 흠칫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어 눈에 띄게 표정이 풀리는 것으로 보아 마음속으로는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형님이라도 10년 이상 손위니까 절하고 보도록 하기요.”
김한조 씨가 아직 자리를 못 잡고 있는 아우에게 그렇게 시켰다. 그것도 내가 아우에게 하는 첫마디가 수월해지는 데 적잖게 도움이 되었다. 나도 반절로 받기는 했으나 절을 받고 나니 이미 말을 놓을까 말까는 망설일 필요조차 없는 결정이 되고 말았다.
“듣기는 했다만 이름을 어떻게 쓰지?”
내가 물은 것은 이름의 한자였다. 나는 처음 아우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항렬에 따른 것 같다는 짐작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봉건제의 잔재라 할 수 있는 대가족 제도의 항렬을 그대로 따랐을 것 같지 않아 아우를 만나면 물어보리라 마음먹은 적이 있는데 그게 나도 모르게 첫마디가 되어 나왔다. 그런데 아우는 내가 이름을 묻고 있는 줄로 잘못 안 것 같았다.
“혁입니다. 리혁이라 합니다.”
“이름이 아니라 이름의 한자를 물었다 또 형한테 이름을 대는데 성을 쓰는 법이 아니고. 혁이라면 붉을 혁(爀)자 아니냐? 불 화(火) 변에 붉을 적 자 둘 있는 거.”
“맞아요.”
“동생들도 다 한 글자로 된 이름…….”
“아니야요. 누님 과 막내는 두 글자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희 자나 섭 자가 들어 있겠구나.”
“그렇습니 다. 문희와 무섭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희미한 전율 같은 감동이 내 가슴속을 쓸고 지나갔다. 불구덩이 속에 어린 삼 남매와 젊은 아내를 팽개치고 갈 수 있었던 이념가도 가문과 항렬만은 용케 잊지 못했구나…….
“북쪽에서도 모두 항렬을 쓰니?”
물음이 되풀이되자 웬 이름 타령인가 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짧게짧게 대답하던 아우가 문득 나를 뻔히 쳐다보았다. 그 까닭을 몰라 나도 멀거니 아우를 바라보고만 있는데 김한조 씨가 알아차리고 끼어들었다.
“거 왜 돌림자 말이야. 보니까 예전에는 북에서 더러 쓰는 것 같더니 요즘·은 안 쓰는 모양이두만.”
“돌림자 이젠 아무도 안 쓰는데요. 우리도 돌림자는 쓰지 않았구요.”
그제야 아우가 알아듣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가슴속에서 점점 더해 오는 감동을 억누르며 길게 우리 항렬을 설명했다.
“항렬이란 게 꼭 돌림자로만 쓰이지는 않는다. 대개는 오행(五行)을 따라 정하는데 순서도 성씨마다 조금씩 다른 것으로 안다. 우리는 토(土), 금(金), 수(水), 목(木), 화(火) 순서로 돌아가고 돌림자는 거기 맞춰 규(圭), 현(鉉), 호(浩), 병(秉), 섭(燮) 또는 희(熙) 를 쓰지. 하지만 그 돌림자들을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대의 돌림자는 섭이나 희지만 만약 외자를 쓰게 되면 불 화 변이나 아래에 점 넷만 있으면 된다. 따라서 너희 다섯 남매는 철저하게 항렬을 따른 이름이야. 모르긴 하지만 네 아이들도 아버님께서 이름을 지으셨다면 양토 규(圭) 자를 돌림자로 쓰거나 흙 토(土) 자가 들어간 외자일 거다.”
그러다가 어딘가 어이없어하는 듯한 김한조 씨의 표정을 보고서야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참 내가 묻는 순서를 바꾸었구나. 그래, 아버님은 무슨 병환으로 돌아가셨느냐?”
“대장암입니다. 김책시 인민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는 아우의 눈이 갑자기 충혈되며 물기가 돌았다. 나도 아버지의 부음을 들은 뒤 처음으로 콧마루가 시큰해 왔다.
“선종(善終), 음…… 편안히 눈감으셨니?”
“병원에 친척이 한 분 의사로 있어…… 경호 아재라고, 같이 남에서 들어온 일가 아저씬데, 잘 돌봐 주셨습니다. 한 이틀 혼수상태로 계시기는 했지만 딴 이들보다는 덜 괴로우셨을 겁니다…….”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하는 아우의 어조에는 조금씩 울먹임이 섞여 들었다. 그러나 시큰한 콧머리에 이어 눈앞에 흐릿해 오기는 해도 내게는 전혀 실감 나는 슬픔이 아니었다. 돌아가신 지 1년 가까이나 되는 아버지를 추억하는 몇 마디에 울먹일 수 있는 아우가 경이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 같은 자식인데 그럴 수가 없는 자신이 쓸쓸할 뿐이었다. 그것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아버지의 죽음과 별 상관 없는 의문까지 챙기면서. 경호 아재라면 일제 때 상고를 나와 은행에 나가다가 월북한 문중 조항(祖行) 같은데 어떻게 의사가 되었나…….
“그건 다행이로구나. 그런데 기일은 정확히 언제냐? 맏이로서 뭘 어찌해 보려 해도 기일을 알아야지.”
“자네 아버님 제삿날 말이야.”
김한조 씨가 다시 충실한 통역처럼 그렇게 끼어들어서야 겨우 알아들은 아우가 대답했다.
“8월 21 일과 3월 28일입니다.”
기일이 둘인 게 이상했으나 이번에는 내가 짐작으로 알아들었다. 아버지의 생일이 3월 18일이니 북에서는 생일에도 제사를 드리는 듯했다. 이어 제례에 들어가면서 한동안 그 비슷한 혼선이 일었다. 빈소, 위패, 탈상 같은 게 그랬는데 아우가 역시 못 알아듣는 걸로 보아 그곳의 제사는 우리 전통의 의식보다는 기독교식의 추모제 비슷하게 되어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 제사 얘기 끝에 처음으로 아우에게서 강렬한 저항 내지 거부의 감정을 느낄 일이 있었다.
“어차피 너희들에게는 빈소도 없고 위패도 없으니 혼백은 내가 모셔도 되겠구나. 기제사와 설 보름 차사는 내가 받들기로 해야겠다.”
내가 결론처럼 그렇게 말하자 아우의 눈빛이 번쩍했다. 뭔가 예사롭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는 눈빛이었다.
“그럼 제사를 뺏아 간다는 거외까?”
그런 목소리도 다분히 항의조였다.
“제사를 뺏어 가겠다는 게 아니다 어차피 너희 제사는 사진 걸어두고 생일날까지 상을 차리는 추모회 같은 거니 예법에 맞는 제사는 내가 따로이 받들겠다는 거다. 너 우리 집안을 가볍게 보제 마라. 이래 봬도 영남에서는 알아주는 집안이고 나는 또 12대 봉사를 하는 주손(胄孫)이다. 밑천 짧은 집안 같으면 종손 행세를 하고도 남을. 그런데 위로 11대를 모시면서 아버님 제사만 빼란 말이냐? 그건 내가 그리하고 싶어도 문중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게다.”
나는 그래 놓고 비록 증직(贈職)이지만 이조판서 좌승지 호조참판의 직함을 가진 조상들과 실직(實職)으로 영해 부사며 의령 현감을 사신 조상들을 들먹인 뒤 김한조 씨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어지간히 중개역을 해낸 그도 이번에는 좀 어려워했다. 그저 양반집 가문에서는 제사를 중히 여긴다는 것과 제사는 반드시 맏이가 모시는 법이라는 걸 그 좋은 말재주로 이해시키려 애쓸 뿐이었다. 그러나 아우의 눈길에는 여전히 강한 거부의 빛이 엿보였다. 나는 약간 어이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까닭이 궁금했다.
“듣기로 너희들은 귀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걸 믿지 않는다던데.”
“형님은 그걸 믿으십니까? 제가 듣기로는 남조선도 양코배기 예수꾼 다 돼 그런 거 믿지 않는다던데요.”
아우가 처음으로 형님이란 말을 썼으나 나는 거기 감격할 여유가 없었다.
뜻밖으로 완강한 아우의 반발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는 게 급해서였다.
“사람따라 다르지만 나는 믿는다. 미신적으로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그쪽에서도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지만 질량 불변의 법칙과 운동 불변의 법칙, 에네르기 불변의 법칙쯤은 너도 알고 있겠지. 영혼은 육신이 살아 있을 때는 정신이고, 정신 활동은 운동이며 에너지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던 물질은 형태만 바뀌고 사라지지 않는데 정신은 어째서 죽음으로 사라져 버리겠느냐. 다만 기억과 동일성을 유지하느냐 않느냐가 문제인데 나는 그건 어느 편이라도 상관없다고 본다. 종교에서 믿는 것처럼 영혼이 생전의 정신과 동일성을 유지하며 존재한다면 우리 조상의 영혼보다 우리를 더 따뜻이 보살필 신이 어디 있겠느냐? 그렇지 않고 정신도 육체처럼 해체와 재결합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도 우리 몸을 있게 한 조상의 영혼을 존중해 나쁠 것은 없다. 따라서 나는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승배의 의식으로 제사를 모신다.”
나는 우리 논의의 엉뚱스러움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조상신 숭배에 대한 평소의 내 견해를 그렇게 거칠게 요약했다. 내 말을 어느 정도는 알아들었는지 아우의 표정이 조금 풀리긴 해도 아직 수긍의 기색은 아니었다. 까닭 없이 몰리는 기분이 된 내가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런데 뭐가 못마땅하냐? 너는 내가 제사를 받들겠다는 게 아주 불만스러운 모양인데.”
그제야 아우도 말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형님이 갑자기 나타나서 진짜 자식은 마치 형님 혼자라는 듯 우기시는 것 같아…….”
내가 아우를 받아들이는 데도 꽤나 거부의 감정을 자아냈던, 적서(嫡庶)의 구별에 바탕한 이복(異腹)의 적의였다. 그러나 아우의 솔직함이 다소간 위로가 되어 그리 마음 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서로든 장유(長幼)로든 우월할 수밖에 없는 내 친족법적 위치는 그런 것에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는 아우를 느긋이 내려볼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다시 화제를 바꾸어 새로 꾸미는 우리 파보(派譜) 얘기를 꺼내고 거기에 얹겠다며 그들 오 남매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까지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게 한 것도 어쩌면 그런 느긋함에서 나온 일종의 선심이었을 것이다. 아우는 그런 일을 생소해하면서도 반발은 보이지 않았다. ‘새삼…….’ 하는 냉소의 기미는 있었으나 내가 내놓은 수첩에 차례로 적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심코 아우가 적는 걸 따라 읽던 내 쪽에서 감정의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강명순(康明順) 본관 진주 1931년 6월 2일, 문희(文姬) 여(女) 1955년 8월 17일……. 그렇게 따라 읽다 보니 절로 아버지의 재혼 과정 이며 아우의 어머니 강명순의 신분이 어렴풋하게나마 잡혀 온 까닭이었다.
첫아이 문희가 55년에 났다면 아버지의 재혼은 54년쯤에 있었고 강명순은 우리 나이로 스물넷, 과부거나 이혼녀이기보다는 처녀였을 가능성이 훨씬 큰 나이였다. 서른여섯의 한창 나이로 월북한 아버지는 4년이나 홀아비로 지내다가 마흔에야 결혼했으니 남쪽에 두고 온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다한 셈이 된다. 매음은 금지되고 연애도 자유롭지 않았을 그때의 상황에서 처녀로 시집왔다면 학벌이나 신분은 다소 낮더라도 강명순 또한 정처(正妻)로서 아무런 결격사유가 없었다. 거기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들이 산 세월은 거의 40년, 남쪽에서 어머니와 함께한 세월의 세 배가 넘었다.
그런 아버지의 재혼과 다산에 대해 배신이나 부도덕의 혐의를 걸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새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그녀에게서 난 다섯 남매에 대해 누가 서얼(庶孼)의 불결함이나 비천함을 덮씌울 수 있는가. 어쩌면 남쪽에서의 결혼 생활 12년이야말로 아버지에게는 괴롭기는 하나 한때의 덧없는 추억이었고, 어머니와 우리 삼 남매 또한 북쪽의 새 가족들에게는 다만 아버지의 지워지지 않는 흉터 같은 것이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너 혹시 가족사진 가진 거 없니? 궁금하구나. 너희 남매와 어머니 모두”
아우가 내미는 수첩을 받아 챙기면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아우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지갑을 꺼내 거기 끼여 있던 사진 한 장을 빼냈다. 아우가 찍어서인지 아우만 빠진 그들 여섯 가족이 바닷가 모래사장을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아버지 만년의 단란한 한때였던 것 같았으나 어딘가 누님의 처녀 적을 연상시키는 스물네댓 살가량의 여자애를 빼고는 아이들이 어렸다.
느닷없이 삯바느질로 어렵게 살아가던 홀어머니와 그 고단했던 우리 삼 남매를 떠올린 나는 시기 비슷한 걸 느끼며 그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아버지는 물론 아이들은 모두 낯익은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으나 북쪽의 새어머니 강명순은 아무래도 낯설었다. 드러나게 검붉은 얼굴에 크고 건장한 체격, 억세 보이는 콧날. ― 내가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의 지적인 풍모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그 어울리지 않음이 내게서 전혀 예정에 없던 물음을 끌어냈다.
“너희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하게 된 얘기 들은 거 있니?”
아우가 무엇 때문인지 한동안 나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님이 원산농대에서 가르치실 때 어머니가 학생으로 배우신 적이 있답디다. 인민군 녀전사(女戰士)로 낙동강까지 내려갔다가 돌아오신 뒤라지요, 아마. 그리고 문덕 열두삼천리벌에서 다시 만나서 결혼하셨다고 합니다.”
“문덕 열두삼천리벌? 아버님은 거길 왜 가셨는데?”
“54년에 당의 명령으로 열두삼천리벌 관개 사업 현장에서 일하게 되셨다는군요. 저도 문덕에서 난걸요.”
“대학교수를 공사판에다? 그것도 농(農)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을 관개 사업 현장에? 무슨 까닭인지는 듣지 못했니?”
그러다가 속으로 나는 아, 하는 기분으로 아버지가 월북한 뒤의 경력 중에 석연찮게 얽혀 있던 한 매듭을 풀어낸 기분이 들었다. 54년은 남로당 계열이 숙청된 해였다. 아버지는 그때 원산농대 교수에서 의주의 관개 사업 현장으로 밀려났음에 틀림없었다. 그게 휴전 직후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된 친척의 전언과 60년대에 남파되었다가 전향한 친척의 전언이 연결 안 된 원인이었구나. 한 사람은 원산농대 교수라고 했는데 한 사람은 무슨 현장 기사로 이름조차 귀에 선 곳에 있다고 우겼구나. 그러나 아우는 거기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어 보였다.
“당의 명령인데 리유가 어딨겠습니까?”
“80년에 받은 편지로는 농업성 과학원인가, 어디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찌 된 거냐?”
“돌아가실 때까지 거기 소속이셨습네다.”
“그런데 살기는 왜 청진이냐?”
“청진은 고등중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주욱 살고 있는 곳이야요. 아버님이 문덕 관개 사업소의 기사장으로 계시다가 송도정치경제대학을 거치실 때 평양에서 삼 년인가 살고 그 뒤에 청진으로 이사왔디요.”
차례로 캐묻다 보면 북으로 간 뒤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삶의 유전(流轉)이 윤곽을 드러내겠지만 나는 그쯤에서 질문의 내용을 바꾸었다. 쓸데없이 아우의 경계심을 건드릴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그런대로 풀려 가던 대화를 꼬이게 만든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 애들은 모두 살 만하냐?”
내 딴에는 혈연의 정을 나타낸다고 그렇게 물은 것이나 아우의 눈길이 드러나게 실쭉해졌다. 표정도 미리부터 각오하고 있던 험한 일을 이제 당하게 되었구나, 하는 데가 있었다.
“뭘 말입네까? 우리가 강냉이죽도 변변히 못 먹고 고생하는 얘기 듣고 싶습네까?”
“그럴 리야 있겠니? 어차피 통일 되면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할 형제라서 궁금해 그런다. 어떻게들 지내니?”
“누님은 외교관에게 시집가서 외국 나가 계시고, 녀동생은 지난 해 경공업위원회 지도원과 결혼했습네다. 동생은 교원이고 또 하나 막동이는 금년에 평양외국어대학에 들어갔고……. 또 저는 지금 김책연합기업소 당위원회 조직부에 나가구요. 형님 보시기는 어떨지 모르지만 다들 끌끌합네다.”
“아버님께서 편지에서 쓰신 대로 바친 것보다 받은 것이 많은 집 같구나. 반갑다. 떠도는 말을 다 믿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했는데.”
아우가 워낙 걸고 들어오는 바람에 나도 조금은 뒤틀린 기분이 되어 그렇게 말했다. 아우가 그런 내 속을 한 번 더 긁었다.
“우리는 형님이 남조선에서 고생이 많을 줄 알았는데 국가보위부에서 처음 형님 소식을 가지고 왔을 때 실은 많이 놀랐습네다. 아버지는 모두들 학살당했을 거라고 하신 적도 있으니까요. 미국놈 앞잡이들이 어째서 그렇게 형님에게 선심을 쓰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용은 그랬는데 들리기로는 무슨 짓을 해서 미국 놈 앞잡이들과 붙어먹게 되었습니까, 라고 묻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한 번도 내가 사는 체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할 필요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우의 그 같은 물음을 받고 나자 갑자기 내가 무슨 남북회담의 대표라도 된 듯 까닭 모를 호승심이 일었다.
“실제로 학살당할 뻔도 했다 고생도 많이 했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굶기도 많이 하고 괄시도 많이 받았다. 지금도 내게는 탐식의 악습이 남아 있는데 아마도 그때 고생하면서 생긴 것일 게다. 다음에 언제 먹게 될지 모르니까 있을 때 많이 먹어 두자는 생각 말이다. 감시도 많이 당했다. 대학교 때부터는 내 담당 형사가 있어 한 달에 한 번씩 동태 조사를 하는 바람에 가정교사 노릇도 하기 어려웠다. 그 뒤로도 한 20년은 더 시달렸지. 대학에서 전임강사 노릇을 할 때까지도. 그러다가 82년에야 겨우, 그것도 군사정권의 특전으로 끝나더구나. 지금 내가 사는 것도 그리 시원찮다. 집은 닭장 신세나 면한 서른여덟 평짜리 아파트고 자동차도 작년 정교수가 되면서야 국산 중형차로 바꿨다. 이번에 이렇게 한 열흘 다녀가는 데도 이래저래 월급의 절반 가까이 날아간다. 부자들은 대궐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며 큼직한 외제 자동차 굴리고 다니는데 말이야. 그것들 중에는 골프 치러 하와이나 호주까지 다니는 것들도 있지. 그런데 이나마 살기 위해서도 조심 많고 때로는 비굴하기까지 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대학생 때는 그 흔한 데모에 한번 끼어들지 못하고, 눈코 제대로 붙은 지식인이면 모두 민족주의, 진보 외쳐 대던 그 80년대도 나는 보수 반동의 딱지를 명예처럼 달고 살았다.”
얘기를 시작할 때의 내 정직은 다분히 악의에 찬 정직이었다. 마치 우리 집은 가난합니다. 가정부도 가난하고 정원사도 가난하고 자가용 운전수도 가난하고……. 해서 오히려 부유함을 과시하는 이중적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떠난 뒤의 비참과 굴욕을 요약하다 보니 나도 몰래 격앙이 되어 말을 맺을 때는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 바람에 내 악의는 의도한 대로의 효과를 거두기는 커녕 엉뚱하게 아우의 감동만 사고 말았다.
“역시 고생하셨군요. 어렸을 적 아버님이 홀로 눈물 지으시는 것을 몇 번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이제 그 리유를 알 만합네다.”
아우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야 펄쩍 놀란 나는 잠시 낭패한 심경이었다. 그러나 이왕 내친김이라 그대로 밀고 나가 보았다.
“근래 여유가 생겨 위토(位土) 겸 고향에 땅도 좀 샀다만 어디 옛날 우리 땅에야 비교되겠느냐. 동해안에도 한 삼벡 평 마련해 별장이라고 지었다만 차라리 오두막이라는 편이 옳다.”
“남조선 매판 재벌가들은 땅을 수천만 평방메타씩 가지고 있다면서요. 산 좋고 물 좋은 데는 그것들이 젊은 계집 끼고 노라리 치는 별장이 들어차고.”
그렇게 되면 두 손 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순진한 아이를 상대로 내가 고른 작전이 도대체가 너무 고급했던 것 같았다. 그때 김한조 씨가 뭐가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느꼈는지 나를 도와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도 류 교수님 얘기 들으니 선생님 재산도 여기서 보면 대단하던데요. 미화로 치면 백만 딸라는 훨씬 넘을 거라지, 왜. 거기다가 박사니 교수니 이름은 같아도 대우는 남북이 썩 다른 모양이고.”
미화 백만 달러라는 말이 아우에게는 충격이 된 것 같았다. 조금전의 다분히 동정적이었던 표정 대신에 감출 수 없는 혼란이 아우의 얼굴을 스쳐 갔다 그러나 일순이었다. 갑자기 모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이 벌게진 아우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따지듯 물었다.
“그럼, 입때 말한 거 다 가진 거 많은 자랑한 거야요?”
“그럴 리가 있니? 남쪽에서의 살이 얘기하다 보니 나온 얘기다. 또 저기 김 선생님 말씀대로라 해도 남쪽에서는 어디다 재산이라고 내세울 만한 재산은 못 되고.”
나는 황급히 부인했으나 왠지 저질한 수를 쓰다 들켰을 때처럼 낯이 화끈해졌다. 내가 서둘러 술과 과일을 꺼낸 것도 그래서 생긴 어색한 분위기를 다독이기 위함이었다. 나는 서울을 떠나기 전에 일부러 고향을 들러 안동소주 한 병과 고향 뒷산에서 딴 밤 대추에 역시 고향에서 깎아 말린 곶감을 갖추었다. 아우를 시켜 아버지의 영전에 바치기 위함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우리가 형제됨을 한층 더 정감 있게 느끼게 해 주리라는 기대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가 겉돌거나 무엇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부적처럼 쓰기로 작정하고 있었는데 이제 서둘러 내놓게 된 것이었다. 나는 자연스러우려고 애쓰며 여행 가방을 풀어 먼저 반 되들이 도자기에 든 안동소주를 꺼냈다.
“이거 안동소주다. 네가 대신 아버님 영전에 따라 드려라.”
나는 안동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술을 내밀었으나 이미 심사가 틀어진 아우는 내 섬세한 기대를 채워 주지 못했다. 마지못해 받으면서도 퉁명스럽기 짝이 없이 말했다.
“술은 우리 북조선에도 좋은 거 많수다. 고생스리 먼 길에…….”
그러다가 이어 내가 꺼내는 과일들을 보고는 아예 핀잔 투가 되었다.
“밤 대추 몇 푼 한다고 그런 걸 다 들고 오셨습네까? 북조선에는 제상 차릴 밤 대추도 없다고 들었습네까?”
그런 아우의 반응이 내게는 오히려 호기가 되었다. 나는 별로 떠벌린다는 기분 없이 아우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이 술은 아버님이 나서 자라신 곳의 물로 빚었다. 원래는 고향 술도가의 막걸리를 가져오고 싶었으나 변할 것 같아 소주로 했다. 북쪽의 술이 아무리 좋다 한들 아버님께는 이보다 더 .딴 술이 있겠느냐? 이 밤과 대추도 그렇다. 밤은 뒷골에서 딴 것이고 대추는 옛 장터 큰 산소 둔들빼기(둔덕바지)에서 땄다. 곶감은 재 너머 솔실〔松谷〕에서 말린 것이고, 모두 아버님이 어렸을 적 뛰놀던 땅에서 난 것들이다. 젊어서도 가끔씩 돌아보셨으나 한번 북으로 가신 뒤에는 다시 보실 수 없었던 땅 40년 넘게 그리워하시다가 끝내 다시 밟아 보지 못하고 눈감으시게 된 그 땅…….”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나도 몰래 목이 메어 이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아우도 숙연해져 듣고 있었다.
“빈소가 없다니 산소에라도 차려 올려 다오. 세상에 이상한 불효도 있지…….”
“알겠습니다. 형님.”
어느새 작은 적의의 그늘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는 아우는 다시 어김없는 내 핏줄로 돌아와 있었다.
그날 아우는 원래 달리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내가 가져간 안동 소주와 과일 꾸러미를 넘겨받은 뒤 얼마 안 돼 일어나려 했다. 내가 다음 날 열한 시 비행기로 연길을 떠나게 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다시 오겠다는 말조차 없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작별이 되는 셈이라 나는 아무래도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내가 그렇게 보아선지 아우 또한 작별을 서두르면서도 무언가 미진해하는 데가 있는 듯했다. 그래서 점심이라도 한 끼 같이하고 헤어지자고 제안하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아우가 받아 주어 우리는 가까운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혹시라도 아우의 심기를 건들까 봐 이번에는 선택을 김한조 씨에게 맡겨 그리 호화롭지 않은 한국 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점심에 곁들인 술이 뜻밖의 효과를 내어 난생처음 만나서인지 어딘가 겉도는 느낌이 있던 우리 형제의 우의를 새롭게 되살려 주었다. 맥주지만 내가 따라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시는 아우를 보고 핏줄이 어디 가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우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형님, 술 드시는 게 어째 꼭 아버님하고 닮았구만요. 얼굴 한번 찡그리는 법 없이 찬물 마시듯 조용히 마시는 모양하며 술 드시면 유난히 높아지시는 웃음소리까지. 어려서 헤어져 제대로 보신 적도 없을 덴데…….”
“사랑에서 허허거리시던 웃음소리는 조금 기억할 것도 같다만……. 그렇게 닮았니?”
아버지는 내가 여덟 살 때 떠나셨지만 그 웃음소리는 그 한두 해 전의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전쟁 전 한 해는 지하에 잠복해 계셔 그렇게 웃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전쟁 뒤에는 늘 분주하셔서 좌정하고 허허거리며 마실 틈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그 무렵의 것이라면 커다란 웃음소리로서보다는 그저, 아버지가 사랑에서 친구분들과 술을 마시는구나 하는 분위기의 기억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 추억은 다시 한 번 우리를 형제로. 묶어 아직도 남은 나의 멈칫거림을 훨씬 덜어 주었다. 나는 곧 조금 전 호텔 방에서 내가 품었던 그 턱없는 악의를 변명하지 않고서는 아우를 보낼 수 없다는 기분이 들어 새삼 그 얘기를 꺼냈다.
“아까 말이다. 너 기분 상했다면 풀어라. 이제 살 만하다는 얘기는 하고 싶었지만 결코 잘산다는 자랑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고생은 해도 이제는 이만하니 너희들은 걱정 마라는 뜻으로 들어 둬라. 남한이라고 모두 돈, 돈 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해 놓고 나니 전혀 거짓도 아니었다. 아우를 만나기 전 나는 언뜻 그들의 살이를 걱정한 적이 있고, 그들도 내 살이를 걱정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끝에 덧붙인 말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또 다른 부끄러움이 일었다. 나 자신은 뒷짐 지고 못 이긴 체하며 아내에게 끌려가는 시늉은 해도 작년 이른바 ‘개혁’이 시작되면서 뒤늦게 매스컴에서 요란스레 지탄받게 된 일들 가운데 내가 무죄한 것은 사실 별로 없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아내가 홀로 사는 처형의 이름을 빌려 싸게 분양받은 것이고, 동해안 별장이라는 것도 이제는 제법 값나가는 물건이 되었지만 10년 전 아내가 헐값으로 사들일 때는 외진 포구 끄트머리에 있던 농가에 지나지 않았다. 고향에 있는 삼천 평의 논은 남의 이름을 빌려서 산 것일 뿐만 아니라 구입 대금조차 불법 대출에 의한 것이었다. 그 밖에도 창구에 앉은 옛 친구의 배임(背任)에 가까운 사정(私情)으로 순서에도 없고 요건도 맞지 않은 은행 대출이 몇 번이었던가. 그게 대학교수 봉급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내 ‘백만 딸라’의 진상이었다. 그런데도 아우는 내 변명을 진심으로 선선히 받아들여 주었다.
“일없시요. 내 속이 좁아 그런 거니 형님이나 마음에 담아 두지마시라요.”
그러고는 뭣 때문인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다가 진작부터 들고 있던 작은 손가방에서 손바닥만 한 비단 갑 하나를 꺼냈다. 그런 아우의 표정은 이제 제가 진심을 보일 차례입니다, 하는 것처럼 진지한 데가 있었다. 김한조 씨가 그 갑 안에 든 것을 짐작하고 가볍게 긴장하며 물었다.
“그걸 왜 가져 왔나?”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결 형님에게 전해 주라고 하셔서요.”
아우가 그러면서 비단 갑을 열었다. 안에서는 잘 닦은 훈장 하나가 나왔다. 아우가 다루는 태도로 미루어 매우 소중한 것인 듯했으나 솔직히 내 눈에는 간수가 잘돼 좀 반짝거린다는 것뿐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마침 그곳을 찾아볼 기회가 있었던 나는 장벽 근처에서 동독 훈장 하나를 20마르크에 산 적이 있는데, 아우가 내민 것도 어딘가 그것과 비슷한 인상을 주었다.
“국기훈장 1급입니다. 일생을 공화국을 위해 노력하시다 받은 아버님의 훈장들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야요. 60년대 농촌 테제 실현을 위한 투쟁이 한창일 때 열두삼천리벌 수리화(水利化)에 앞장서신 10년의 공훈을 인정하시어 수령님께서 직접 달아 주셨다고 합니다.”
아우가 이번에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전 같으면 아마도 나는 대학교수와 수리 기사의 높낮이를 가늠하고 마흔이 넘어 전공을 바꾸는 어려움에서 아버지의 신산스러운 살아남기를 먼저 헤아려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달랐다. 아마도 아우가 바란 이상의 크기로 세찬 감동이 나를 사로잡았다.. 아버지는 일생에 얻은 것 중에 가장 값진 것을 내게, 남쪽의 우리 모두에게 전하라고 했다. ― 나는 그 뜻을 대강 짐작할 것 같았다. 내가 얻은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나로 인해 받았던 너희 고통에 작은 위자(慰藉)가 되기를……. 그러나 그 못지않게 나를 감동시킨 것은 아우의 다음 말이었다.
“내가 이걸 들고 나오려니 집에서는 말들 많았시요. 이게 어떤 거라고 남조선 괴뢰 도당과 붙어먹은 형님에게 보내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결국은 내가 이겼시요. 무엇보다 아버님 말씀이 그러셨고 ― 또 형님도 어떤 사람인지 만나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지 않느냐고 우겼더니 모두 물러납디다.”
“그래, 만나 보니 어떠냐?”
나는 다시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형님 같습니다. 아니, 아버님의 맏이 같습니다. 양코배기나 남조선 괴뢰 도당과 붙어먹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훈장을 가져가 욕보일 아들 같지는 않아서…….”
아우는 그렇게 대답하고 엄숙한 훈장 수여자처럼 두 손으로 그 비단 갑을 내밀었다. 내가 혜산을 떠올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미 식사가 끝나 있을 때라 어쩌면 아우는 그걸로 우리 만남의 의식을 마감하려 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나는 아우의 의중을 알아보지도 않고 김한조 씨에게 불쑥 물었다.
“작년에 류 교수님과 갔던 두만강 가 그게 어디지요?”
“혜산 가지 않았습네까?”
“거기까지 가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더라?”
“왕복에 한 시간이면 거진 될 거외다.”
그제야 나는 아우를 돌아보았다.
“얘, 너 오후에 무슨 일이 있다고 했지? 꼭 가야 될 일이냐?”
“네?”
“우리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 이 형을 위해서 두 시간만 더 내줄 수 없겠니?”
그제야 말뜻을 짐작한 아우가 힐끗 시계를 보았다. 표정을 보니 시간 여유에서도 마음 내킴에서도 결정이 아주 애매한 상태인 듯 했다. 잠깐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던 아우가 나를 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두 시간을 어디 쓰시려구요?”
“나와 혜산을 다녀올 수 없겠니? 두만강 가엘.”
“거긴 무엇하시려구요?”
“우리 예법에도 망제(望祭)라는 게 있다. 전쟁이라든가 천재지변으로 부득이하게 산소를 찾을 수 없을 때 될 수 있는 한 산소 가까이 가서 그 방향으로 제례를 올리는 법이다. 나도 어차피 산소를 찾아가 아버님을 뵈어야 하는 거라면 차라리 형제가 두만강 가에서 나란히 망제를 드리는 게 어떻겠니? 멀리서나마 나도 아버님 영전에 술 한잔 따르고 절이라도 한번 올리고 싶구나.”
내가 얘기를 끝낼 때쯤은 이미 아우의 얼굴이 결심으로 굳어 있었다.
“좋습네다. 시간을 내디요.”
그렇게 우리의 혜산행은 결정되었다. 김한조 씨도 그만한 눈치는 있어 우리 형제의 망제에까지 동행하려 들지는 않았다. 근처 시장에서 어과(魚果)로 지낼 망제에 빠진 장보기를 도와준 뒤 조선인 운전수가 모는 택시를 잡아 주고는 제 갈 길을 갔다. 나와의 정산(精算)은 밤에 호텔에서 만나 할 작정인 듯했다.
연길 거리와는 달리 혜산의 두만강 가는 그새 변한 게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황사 현상 때문인지 이상하게 휘뿌연 하늘 아래 달라진 게 없는 북한의 산들이 강 건너 음울하게 엎드려 있고 그 한 중턱에 걸어 둔 ‘천리마’와 ‘속도전’이란 입간판도 그대로였다. 실망스러울 만큼 대단찮은 수량(水量)에다 이미 공해 찌들어 가는 기미를 보이는 두만강도 1년 전과 마찬가지였다.
돗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우리는 강변 잔디가 잘 자란 곳을 골라 신문지 위에 젯상을 차렸다. 그 아이에게는 이제 더는 필요 없는 것이 될 줄 알면서도 나는 홍동백서(紅東白西)니 동두서미(東頭西尾)니 하는 제례의 상식과 더불어 우리 문중 특유의 조율시이(棗栗枾梨)의 과일 진설법을 일러 주었다.
“오늘은 내가 헌관(獻官)이다. 마음 같아서는 메(제밥)를 뜨고 삼헌(三獻)을 올린들 넘칠까마는 시절이 이렇고 제관도 없으니 어과에 단헌(單獻) 밖에 안 되겠구나. 술은 네가 쳐라.”
비록 남의 나라에서 드리는 망제라도 격식은 고향의 부조위(不祧位: 불천위) 산소를 모실 때처럼이나 경건하게 치렀다. 우리를 태워 간 운전수가 흥미로운 듯 강둑에서 구경하고 섰고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이 기이한 듯 힐끗거려도 어색한 느낌이 조금도 없던 것으로 보아 나는 그때 단순한 추모의 정을 넘어 어떤 맹목의 종교적 열정 같은 것에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아우도 그런 내 열정에 휘말린 듯 생소할 것임에 틀림없는 제례 용어 한 번 물어보는 법 없이 집사와 제관의 역을 잘 해냈다.
진정한 추모의 정은 잔을 지운 뒤 남쪽을 향해 읍(楫)을 하고 있을 때에야 먼저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의 형태로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수그리기 전에 얼핏 눈에 들어온 북의 산하가, 희뿌연 황사를 안개처럼 둘러쓰고 삭막하면서도 음울하게 웅크리고 있는 아버지의 공화국 산하가 갑자기 당신의 일생을 요약한 인상처럼 내 가슴을 쑤셔 온 게 그 발단이었다.
욕심 많은 홀어미의 외아들로 태어나 태반은 조작되었을 신화와 전설 속에 지나간 유년, 동경 유학생으로 상징되는 야심에 찬 청년기, 그리고 젊은 이념가 ― 비록 군데군데 파란을 겪기는 했으나 남쪽에서의 서른여섯 해는 아직 실패의 예감이 별로 없는 세월이었다.
그런데 임종의 순간에 돌아본 북쪽에서의 40여 년은 어떠했을까. 물론 아버지는 찬연한 이념의 광휘로 스스로를 훈도(燻陶) 했고, 실제로 어머니께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마음속의 공화국이 오면 그때 나는 소학교 소사(掃使)라도 좋고, 이름 없는 노동자로 살아도 괜찮소……. 하지만 과연 그러했을까.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긴 세월 당신을 물어뜯었을 남쪽의 처자 마흔이 다 돼 바꾼 전공과 힘겨운 살아남기로밖에는 해석되지 않는 10년의 각고. 경제학 교수에서 노무자나 다름없는 현장 기사 기사장 그리고 엉뚱한 관개(灌漑) 전문가. 설령 당신께서는 만족하며 눈감으셨다 하더라도 내게는 당신의 삶을 실패로 규정하고 슬퍼할 권리가 있다 ―. 나는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허둥대면서도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렸을 적 휴전선의 긴장이 과장된 소문으로 떠돌 때마다 나는 백마에 높이 오른 장군으로 남하하는 인민군을 선두에서 지휘하고 있는 아버지를 상상했다. 제법 북한의 내부 소식이 일반에도 공개되기 시작해 북한의 권력 서열이 매스컴에 오르내리게 되었을 때 나는 서열 일백 위 안에 아버지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문제없이 그것이 부정확한 정보원(源) 탓이라고 단정했으며, 조교 시절 남한 공산주의 운동사에 관한 문건을 어렵게 손에 넣었을 때도 남로당은 물론 그 흔한 외곽 단체의 간부 명단에서조차 아버지의 이름이 없는 것은 거물들이 흔히 그러했듯 아버지가 가명을 쓴 까닭이라고 의심 없이 믿었다. 그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 그렇지 않고서는 어머니와 우리 삼 남매가 겪어야 했던 비참과 고통을 보상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믿음의 근거는 내가 아버지의 실패를 슬퍼할 수 있는 권리의 근거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의 실패를 슬퍼하며 울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를 위해 울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보상의 기약조차 없어진 내 지난 비참과 고통을 슬퍼하며 나는 울었고 언젠가 올 ‘그날’을 위한 살아남기를 핑계로 방치된 내 정신의 굴절을 슬퍼하며 울었다. 감정이 점점 과장되면서 80년대에는 정작 당당하게 뻗대었던 민중·민족 사학 쪽의 표독스러운 비난까지 어찌도 그리 뼈저리게 닿아 오던지. 제국주의 군대와 해방군을 혼동하고, 신식민주의를 혈맹 우방으로 착각하며 기껏해야 마름〔舍音〕의 풍요에 불과한 개발독재의 과일을 달디달게 핥고 있는 반동 사학(反動史學)…….
그 바람에 읍이 턱없이 길어졌으나 아우는 겨우겨우 감정을 수습한 내가 읍을 끝내자는 헛기침 소리를 낼 때까지 기척 없이 내 곁을 지겼다. 눈물을 닦고 제상을 거두며 보니 아우의 볼에도 눈물 자국이 번질거렸다. 이번에는 내 두서없는 슬픔에 압도된 듯했다. 나는 그런 아우에게 더욱 진한 혈육의 정을 느끼며 거두려던 신문지 곁에 앉았다. 그리고 아직 지우지 않은 잔을 들며 말했다.
“제삿술 마시는 걸 음복(飮福)이라 하는데 아는지 모르겠구나. 자, 우리 형제 이제 음복이나 한잔씩 하자.”
그런데 술잔을 받던 아우가 뜻밖의 말을 했다.
“이거 전에는 제비원 소주(안동소주의 옛날 상표)라고 하지 않았시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아버님 생전에 들은 것 같아요.”
그러고는 안주 삼아 밤을 집으면서 희미한 웃음과 함께 물었다.
“뒷골에는 아직도 밤나무가 많습네까?”
“60년대에 개량종으로 바뀌긴 했다만 아직도 밤나무 언덕이지. 그런데 뒷골은 또 어떻게 알지?”'
“솔실〔松谷〕도 알아요. 돌내〔石川〕도 적병산(赤屛山)도 관어대(觀魚臺)도.”
아우는 그 밖에도 고향 여기저기를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댔다. 그런 아우에게서 아버지의 끈끈한 향수를 읽고 다시 가슴이 찌르르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내게는 계산하는 버릇이 남아 있었다. 감동을 주고받는 데도 밑져서는 안 된다는 듯이나 엉뚱한 순발력으로 내가 받았다.
“청진은 아직도 그렇게 춥고 바람이 세냐? 모래바람이라던가 뼛골을 쑤시게 한다는 그 찬바람. 그리고 십리자갈벌은 그대로 있니? 김책제철소의 연기와 먼지도 여전하고?”
“형님이 그걸 어드렇게 아십네까?”
“아버님과 너희들이 사는 곳인데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느냐? 쌍연산(雙燕山), 낙타산(駱駝山)도 알고 수성천(輪城川)도 안다.”
그 같은 나의 대답에 순진한 아우는 자신의 감동을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냈다. 반드시 어떤 악의가 있었던 계산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런 아우를 보며 묘한 자책 같은 걸 느꼈다. 그때부터 내가 조금씩 말수를 잃어 간 것은 아마도 그 자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멀리서나마 아버님 영전에 나란히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는 점도 그동안의 내 조급을 많이 덜어 주었다. 그때까지 나는 무슨 강박관념처럼 아우와의 친화를 서둘러 왔다. 배다른 아우와의 첫 만남이란 점이 부담이 되어 나를 급하게 몰아낸 탓인데, 어떻게 보면 내가 계산적이 되고 평소보다 수다스러워진 것도 그 탓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충분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우가 나서서 얘기를 이끌었다. 아우도 원래는 그리 수다한 편이 아니었던 듯했으나 새로 들어간 술기운에다 형제의 정을 믿게 된 까닭인지 그동안 억눌러 왔음에 틀림없는 궁금함들을 하나씩 드러내 보였다.
“남조선 그곳은 정말로 어때요?”
“궂은 일도 많고 더러는 흉한 꼴도 보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다.”
“살기는 어떻습네까? 통 섞갈려서요. ‘남조선 실상’ 자료를 보면 아주 비참하던데, 외국물 먹고 잘난 척하는 것들 저희끼리 수군거리는 거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어제저녁 여기 와서 들은 것도 그렇고.”
“당장으로 보면 북쪽보다 좀 흥청거리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그리 미더운 건 못 된다. 어떤 사람들은 남쪽의 그 같은 흥청거림을 마름 살림에 비유하기도 한다. 작인과 지주 사이에 있는 마름 말이다. 아주 심하게는 첩살림에 비유하기도 하고. 빚을 지든 엎어지든 당장 잘 먹고 잘 쓰는…….”
내가 더는 마음속에 접어 둔 것 없이 그렇게 대답해 주자 아우가 답례라도 하는 양 기대 밖으로 트인 소리를 했다.
“저도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습네다만, 가끔씩은 이런 생각을 해봅네다. 어차피 다시 개인 재산을 인정하고 시장경제 아래서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된다면 결국 소작인보다는 지주가 되는 쪽이 낫지않겠습네까? 그리고 지주가 되는 일이라면 소작인보다는 마름 쪽이 쉽지 않겠어요? 첩살림이라면 그건 좀 곤란하지만, 마름 살림이라면 자본주의 세계로 보아서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을 듯합네다. 국제적 착취 구조 속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말입네다.”
“좀 뜻밖이구나.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그쪽에도 너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많니?”
나는 아우의 논조가 이상해 그렇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아우가 무언가 당황해하는 표정으로 털어놓았다.
“실은 대외 경제위원회에 있는 친구에게서 들은 말입네다. 부역 이등 서기관으로 해외 나들이를 좀 한 친군데, 처음 그 말을 들을 때는 참 반동적인 발언이드먼요. 그런데 형님과 얘기하다 보니 문득 그 말이 떠올라……. 하지만 형님을 떠보거나 뭐 딴 뜻이 있어 한 말은 아닙네다.”
“그 사람은 남쪽을 좋게만 본 것 같구나. 실은 남한 경제가 희망하는 바도 바로 그런 쪽이겠지. 선진국 진입이니, 세계화니, 기술 입국이니 하는 구호는 바로 그런 국제적 착취 구조 속의 지주 자리에 끼어들기 위한 안간힘이 아니겠느냐? 그렇지만 곧 쉽지는 않은 모양이드라.”
“그래도 지금까지는 잘해 오지 않았습네까? 경제만을 뚝 떼어서 본다면 특히나…….”
“그럭저럭 견뎌 온 셈이지만 이제는 나날이 주름이 늘어나고 있다. 선진국들의 견제도 만만찮고 경제 발전과 더불어 종속의 경향이 심화되는 것도 문제고.”
“미국한테 말입네까? 듣기는 했지만 미국 놈 종살이가 그렇게 어렵습네까?”
거기서 반짝 본능적인 경계심이 일었으나 이미 그것을 유지할 기분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분야에 관해 들은 풍월을 기초로 내가 이따금씩 우려한 것들을 좀 과장스럽게 표현했다.
“정치적 자주성의 문제도 있지만 정말로 심각한 것은 경제적 증속이다. 이제 우리에게 더 무서운 것은 미국의 정치적인 제재가 아니라 거대한 미국 시장을 배경으로 하는 경제적 위협이다.”
“까짓 미국 놈들하고 손 끊고 우리 식으로 하면 안 됩네까?”
“말하자면, 비탈밭 몇 뙈기 가진 자작농으로 오두막이든 잡곡밥이든 만족하며 살자는 거냐? 지금은 좀 달라진 것도 같지만 북쪽에서 근래까지 해 온 게 그건 줄 아는데 어떻더냐? 살 만하더냐?”
“안 될 거도 없디요. 주체성을 가지고 로력하면…….”
그러나 아우의 말투는 북한 방송에서 들을 때처럼 힘차지는 못했다.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보다 어떤 면에서든 열 배는 힘이 있는 일본도 그렇게는 자신이 없는 모양이더라. 얼마 전에 미국에게 한 번 대들었다가 몹시 혼이 나고 싹싹 비는 꼴이 되는 걸 보면.”
그때 멀찍이서 둑 위를 왔다 갔다 하며 얘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택시 운전수가 우리를 깨우치듯 크게 기침 소리를 냈다. 마침 술도 다 되고 얘기도 점점 까다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느낌이 있어 내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간 괜찮겠니?”
내가 그렇게 묻자 아우도 문득 급해진 얼굴로 시계를 보았다.
“가 봐야겠습네다. 웬 시간이 이리 빨리 가는지.”
그러고는 주섬주섬 남은 제수들을 싸 들었다. 톺은(제례에 쓰려고 아래위를 잘라낸) 과일 몇 개에 음복 안주 하다 남은 밤 대추 몇 줌과 생선포 정도였지만 싸 들고 보니 어찌 된 셈인지 올 때보다 보따리가 커 보였다. 그걸 든 아우의 왼쪽 어깨가 유난히 처진 것 같아 내가 손을 내밀었다.
“무거워 뵈는구나 이리 다오. 내가 들고 가마.”
“일없시요. 제가 들고 가지요, 형님.”
아우가 그러면서 보따리를 오른손으로 옮겨 쥐었다. 술기운 탓인지 순간적으로 고향에서 시사(時祀)를 드리고 산소를 내려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산소에서 쓴 물건은 음복이라 하여 제궁지기나 인근 문중에 골고루 나누어 주고 집으로 가져가는 법이 아니다. 어디 음복 보낼 만한 데가 있니? 보낼 데가 마땅치 않으면 운전수에게나 주어라.”
연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얘기는 더 있었다. 하지만 술기운이 제법 걸음걸이에까지 비치던 아우였는데도 운전수를 의식해서인지 말투는 둘이 있을 때와 많이 달랐다.
“형님, 남쪽에서는 왜 그런답니까? 핵 문제 말입니다. 우리가 핵무기 개발해 두면 어디 갑니까? 언젠가 통일은 될 게고, 그리되면 남쪽은 가만히 앉아서도 핵 보유국이 되는 셈인데 왜 미국 놈들하고 장단이 맞아 안달이랍니까? 설마하니 우리가 남쪽에다 그걸 쏠까 봐서요?”
그렇게 현안 문제를 두고 자신이 속해 있는 체제를 옹호하기도 했고, 그 체제를 향한 흔들림 없는 믿음에 내가 미심쩍어하는 반응을 보였을 때는 묘한 근거를 대기도 했다.
“우리 북반부 사람들은 땅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있시요. 청진으로 보면 수성천 강둑과 낙타산 방공호는 고등중학교 때 로력 동원으로 내 땀이 배인 곳이고 라남(羅南) 들도 모내기 지원으로 발 안 빠져 본 곳이 없을 지경이야요. 아니, 시가지, 항구 철도 어디 하나 내 손이 안 간 데가 없다는 게 옳지요. 다른 곳 사람들도 마찬가지야요. 자신이 사는 땅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모두 그들의 손길이 미쳐 있다고 봐야 합네다.”
하지만 기특하게도 ‘위대한 수령님’이나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를 들먹여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나도 그때는 이미 그 같은 믿음이나 애착을 굳이 무시하여 아우를 자극하고 싶은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게 진정한 것이든 반복 학습에 따른 조건반사이든 아우가 자신이 살고 있는 체제에 믿음과 애착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걸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며 말을 받고 물음에 답했다.
그러다가 차가 연길 시가로 집어들 무렵에야 나는 다시 잠시 잊고 있었던 조급에 빠져들었다. 그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무언가 우리가 꼭 치러야 할 의식을 빠뜨리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나는 내일 아침에 떠난다. 다시 만날 수 있겠니?”
이야기가 뭣 때문인가 잠깐 끊어진 틈을 타서 내가 아우에게 그렇게 물은 것은 어느새 차가 저만치 호텔이 보이는 거리로 접어든 뒤였다. 얘기에 취해 있던 아우가 퍼뜩 정신이 든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다가 자신없이 말했다.
“글쎄요.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에 짬을 내어 한 번 더 들르도록 할게요.”
“안 되면 이게 마지막이 되는구나.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그래 놓고 나니 새삼 우리가 공연히 쓸데없는 얘기로만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아 후회스러워졌다 아우도 나와 비슷한 기분인 듯했다.
“곧 다시 만나게 되지 않겠습네까? 머지않아 통일의 날이 오갔디요.”
대답은 그래도 자신의 말을 별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때 다시 아우를 만난 때부터 줄곧 내 마음속을 오락가락했으나 망제 뒤의 굴곡 심한 정서에 한동안 밀려났던 망설임이 되살아났다.
서울을 떠날 때 나는 아우를 위해 따로 여분의 달러를 조금 마련했다. 북한이 어렵다고는 해도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아우에게 그 돈이 절실하게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나를 만난 비용으로 아우가 어떤 부담을 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배려에서였다. 그런데 아우를 만나고 보니 그 돈을 내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살이나 물질적 여유 같은 말만 나오면 유난히 민감해지는 아우의 반응 때문에 미루다가 깜박했는데 그때야 다시 어떤 다급함 같은 감정과 함께 떠올랐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에도 거침없이 달린 차는 그새 호텔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아우의 표정에서 어떤 단서를 찾기 위해 가만히 그 얼굴을 훔쳐보았다. 아우는 그런 나를 아랑곳 않고 시계를 보더니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그런 아우의 얼굴 어디에도 내게서 어떤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표정은 엿보이지 않았다. 말로 한번 넌지시 떠보기라도 할까 싶었으나 이제는 그럴 틈도 없었다.
뒤따라 차에서 내린 나는 드디어 아우에게 달러를 쥐어 주는 일을 단념하고 대신 가만히 그 손을 잡았다. 내게 무어라고 말하려던 아우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네가 다시 오지 못하면 이게 바로 작별이 되겠구나.”
“될 수 있으면…… 와 보도록 로력할게요.”
“무리할 건 없다. 네 말마따나 통일이 곧 될 테니. 그때는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겠지.”
연합기업소 당위원회 조직부가 무얼 하는 곳인지는 모르지만 아우의 손은 뜻밖으로 거칠었다. 나는 그런 아우의 손등을 남은 손으로 쓸어 쥐며 작별 인사를 했다.
“어쨌든 만날 때까지 몸 성히 지내라. 넋이 있다면 아버님도 아마는 너희를 못 잊어 하실 게다. 매사를 신중히 하고 부디 자중자애해라.”
그래 놓고 나니 정말로 오래 함께 지내던 아우를 기약 없이 보내는 기분이었다. 아우의 눈가에도 금세 눈물로 맺힐 것 같은 감동의 빛이 떠올랐다.
“형님도 건강하십시오.”
“다른 동생들에게도 안부 전해라.”
나는 그래 놓고 중대한 결심이라도 하듯 덧붙였다.
“어머님께도.”
내가 아우를 만나기로 작정한 뒤 한동안 힘들여 짰던 만남의 시나리오에는 아우의 어머니를 어떻게 부를까 하는 고심도 있었다. 북(北)의 어머니, 새어머니, 작은어머니……. 그러나 종내 마땅한 호칭을 찾아내지 못하다가 아우를 만나서는 ‘너희’란 관형어를 얹어 그럭저럭 넘겨 왔는데 이제 그 모든 관형어(冠形語)가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특수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옛 예법에도 유처취처(有妻取妻)는 있었고 현대의 합리적인 사고로도 아우의 어머니는 아무런 흠이 없는 내 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머님’이란 호칭이 그토록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것에 나는 스스로도 놀라 움찔했다. 아우에게도 그 같은 변화의 의미는 바로 느껴진 듯했다. 자우룩한 술기운이 일시에 걷힌 듯한 얼굴로 나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머리를 꾸벅하며 받았다.
“누님과 조카들에게도 저희 인사 전해 주십시오. 어머님께도.”
남쪽의 내 어머님에 대한 아우의 호칭에도 아무런 관형어가 없었다.
로비에 들어서니 새로운 관광단이 도착했는지 안이 몹시 어수선했다. 꽤 큰 단체인 듯 스무 명이 넘어 뵈는 남녀가 부려지는 짐 가운데 자신의 트렁크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시끌벅적 주고받는 소리에 사투리가 많이 섞인 것으로 보아 지방에서 온 여행단 같았다.
내게도 해외여행 중에 한국인 관광단을 만나면 반갑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다가가 어디서 왔는가를 묻고 그 도시 관광에 내가 선배 격이라도 될라 치면 이것저것 친절한 조언까지 곁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들에게서 민망함을 느껴 오던 나는 차츰 그들과 만나는 걸 곤혹스러워하다가 마침내는 외면하고 피하게까지 되고 말았다.
그날도 그랬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차림부터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남자들은 백두산 호랑이 사냥이라도 떠나는지 저마다 수렵용 조끼들을 유니폼처럼 걸치고 턱에는 줄 달린 카메라를 하나씩 걸었는데 태반은 일제 비디오카메라였다. 바지는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청바지 아니면 반바지에, 신발은 대개가 혀를 한 발이나 빼문 유명 메이커의 운동화들이었다. 여행과 품위
가 반대말이라도 되는 듯 색상부터 디자인까지 저질한 양풍(洋風)이 넘쳐흘렀다.
대개는 부부 동반인 듯하고 그래서 또한 대개는 가정주부들 같은 데도 여자들의 차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바지를 입은 것은 여행 중의 편의를 위한 것이라고 봐준다 쳐도, 그놈의 바지가 어울리지 않게 육체의 곡선을 드러내는 형태거나 핫팬츠를 겨우 면한 치마바지 일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또 무슨 저질한 양풍인가. 여행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단정하고 품위 있는 차림이면 출국을 금지시키는 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거기다가 안중에 사람이 없는 듯한 태도는 또 어디서 온 자신감인지. 남자들은 아무 데나 서너 명씩 둘러서서 남의 길을 막는지 기분을 잡치게 하는지 아랑곳 않고 떠들어 댔고 여자들은 모두 갑자기 무슨 서양 영화 속의 탕녀라도 된 듯 로비 쏘파에 왼다리를 꼬고 앉아 허연 허벅지 살을 드러내거나 가방 위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제 집 안방처럼 늘어졌다. 국력에 바탕한 자신감으로만 읽어주기에는 너무 지나친 무례요 방자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내심을 드러낼 것까지는 없어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가는데 누군가 뒤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알령하십네까아…….”
말투가 연길에서 흔히 듣는 북한 사투리 같아 얼른 돌아보니 한 호텔에 묵으면서도 그 이틀 눈에 띄지 않던 통일꾼이 불쾌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를 너무 정중하게 말하느라 내게 그리 들린 모양인데, 차림은 거기 있는 사람들과 같은 여행객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정중했다. 회색 정장에 갈색 바탕의 넥타이, 검은 단화가 한결같이 위엄을 강조하는 듯한 색조였다.
“네에. 남으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일은 잘돼 가십니까?”
내가 그렇게 인사를 받아 놓고 다가오는 그를 보니 뭔가가 이상
했다. 양복과 와이셔츠며 얼굴 가장자리 같은 데가 그놨는데, 음식
물을 뒤집어썼다가 황급히 닦아 낸 듯 물기는 이미 말라도 종류가 다른 얼룩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렇게 보아 그런지 그가 곁에 와 섰을 때는 정말로 음식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아, 이거 말입니까? 점심 먹을 때 음식점 종업원이 부주의로 접시를 쏟아서…….”
통일꾼도 그런 내 눈치를 알아차렸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그 얼룩들을 해명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종업원이 하필이면 이 사람 머리 꼭대기에서 실수를 했나, 싶게 어깨와 와이셔츠 깃에도 얼룩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내색 없이 말했다.
“정장 여벌이 없으시면 빨리 호텔에 맡기십시오. 지금이면 내일 출발 때까지는 세탁해 줄 겁니다. 북경에서도 하루 묵게 된다는데 혹시 점잖은 자리에 나갈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거기서는 나도 남 따라 이화원(頗和苑)하고 명십삼릉(明十三陵) 이나 돌아볼 거니까 간편하게 입고 다니지요.”
그가 애써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하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로 함께 옮겨 탄 나는 별생각 없이 객실이 있는 팔 층을 눌렀다. 그도 자신의 객실이 있는 층 번호를 누르려다 문득 나를 보고 물었다.
“누구 찾아올 분이라도 있습니까?”
“당장은 없습니다.”
나는 얼핏 김한조 씨를 떠올렸으나 약속이 저녁 식사 이후라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은근해진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럼 빈방에 올라가 무엇 하시겠습니까? 백두산에 간 패들은 저물어야 돌아올 거니까 저하고 라운지에 올라가 얘기나 나누시지요. 보아하니 전주도 좀 있으신 듯하고…‥ 제가 맥주 한잔 사겠습니다. 박사님.”
박사님이란 말에 내가 놀라 쳐다보자 그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진작부터 알아보았습니다. 저야 별 볼일 없는 인간이지만 관심이 그쪽이라. ― 새한대학교의 이 박사닙 맞으시죠?”
그 뜻밖의 말에 내가 아연해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8층에 멈춰섰다. 통일꾼이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엘리베이터 문을 닫은 뒤 라운지가 있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호텔 라운지는 아래층 커피숍과는 달리 한적했다. 나는 꼼짝없는 포로가 된 기분으로 그와 함께 전망 좋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하기야 그 통일꾼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아우와의 작별에서 받은 찡한 느낌 때문에 결국은 빈방 안에 홀로 처박혀 있지 못하고 그리 올라와 한잔 더 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했다.
동의를 구하는 둥 마는 둥 맥주 세 병과 마른안주를 시킨 통일꾼이 갑자기 입가에 심술궂은 웃음을 띠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쯤 그 호리꾼 한창 일을 벌이고 있을 거라. 방으로 돌아가 한바탕 훼방을 놓고 오는 건데.”
“네?”
“이번에 우리하고 같이 여기 남은 장사꾼 말입니다. 어제 커피숍에서 만났다면서요?”
“아, 그 사업하시는 분. 네, 어제 잠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만.”
“사업은 무슨 썩어 빠진 눔의 사업. 그게 사업이면 도둑질도 사업이겠다. 박사님. 그 작자 여기 뭐 하러 왔는지 아십니까? 문화재밀반출을 노려 온 거란 말입니다. 인사동에 있는 가게는 겉치레고 틀림없이 도굴로 한몫 잡은 호리꾼일 겝니다.”
그런 통일꾼의 이죽거림에 나는 비로소 그가 진작부터 나를 알아보고도 시치미를 떼어 온 일로 받은 충격에서 깨어났다. 내 그런 반응은 어찌 보면 전공(專攻)의 무서움이기도 했다.
“그래요? 하지만 여기서 몰래 문화재를 빼내 가기는 쉽지 않을 텐데. 그런 일에 하마 오래 시달려 온 나라라 세관에서 골동품 같은 것에 꽤나 엄격한 모양입디다.”
“저희 문화재가 아닌데 잘 알아보기나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 호리꾼이 들고 나가려는 것은 중국의 문화재가 아니니까요.”
“고구려나 발해의 것이라도 중국 문화재로 취급될 덴데요.”
그 장사꾼이 노리는 게 당연히 고구려나 발해의 유물들이라 보고 한 말이었으나 전혀 아니었다.
“그게 아니고 이조 백자나 우리 고서화(古書畵)란 말입니다.”
“연길에 그런 것들이 일부러 수집하러 올 만큼 있겠습니까? 잘 아시겠지만 여기 자리 잡은 사람들은 대개가 일제 때 먹을 게 없어 흘러든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이 수천 리 걸식이나 다름없는 길을 오면서 값진 자기나 족자를 지니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연길에 있는 게 아니라 북한에 돌아다니는 것들을 빼내는 모양입니다. 실은 나도 놀랐습니다. 그게 한 번도 아니고 벌써 여러 번째 같던 데요.”
그제야 나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갔다. 김한조 씨처럼 사람도 빼내오는데 안 될 게 없다 싶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 방법이 긍금했다.
“그걸 어떻게……?”
“지난 이틀 한방 쓰며 감으로 때려잠은 바로는 대강 이런 방법 같습니다. 우선 북한에 친지가 있거나 무슨 일로 출입이 잦은 사람들을 골라 후한 선금을 주고 북한에 들여보냅니다. 그리고 오래됐다 싶으면 무엇이든 달라 몇 푼 쥐어 주고 거두어 가져오게 하는 거지요. 백자 항아리에 고추장을 담아 오고 청자 병에 참기름을 담고 하는 식으로. 꼭 이름 있는 청자 백자 아니라도 북한에는 흙이 좋은 데가 많아 괜찮은 도요가 꽤 있었던 것 같더군요. 개중에는 우리 계룡요(鷄龍窯)처럼 개성 강한 분청도 있고…… 어디라더라? 함경도 어디라고 듣긴 들었는데……. 또 북한 정부에서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지는 않지만 남한으로 가져가면 큰돈이 되는 서화나 책자 같은 것들도 우리 생각보다는 많이 민간에 돌아다니는 모양입디다. 호리꾼 말로는 겸제(謙齊)라던가 단원(壇園)이라던가, 아무튼 많이 들은 낙관이 있는 그림을 큰 인심 쓰듯 천 달라에 얻어 와 서울에서 몇 억 원에 넘긴 경우도 있고, 무슨 경(經)인가 오래된 금속활자본을 전기밥솥하고 바꿔 와 서울에서 역시 억대에 넘긴 경우도 있다는 겁 니다.”
“그래도 고서화나 희귀본은 당장 눈에 띌 텐데…….”
“중국과 북한 국경의 세관 검색은 대단치 않은 것 같더라구요. 국가에서 지정해 관리하지 않는 골동품에 대해서는 소홀한 점도 있고, 또 달라도 꽤나 힘을 쓰는 모양이고.”
이제는 더 안 물어도 모든 게 환했다. 그저 감탄스러운 것은 벌써 거기까지 손을 뻗친 자본주의의 집요한 상혼(商魂)이었다. 그때 통일꾼이 비뚤어진 웃음을 풀풀 날리며 묻지도 않은 걸 말했다
“늙은 말이 콩 마다하지 않는다더니 거기다가 계집질까지. 이건 완전히 말로만 듣던 현지처라니까.”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것이었다는 듯한 그의 표정에 나는 점잖지 못한 짓이라는 것도 잊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또 무슨 애깁니까?”
“중간에서 심부름하는 교포 처녀 애가 하나 있는데 몇 천 달라나 쑤셔 박았는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게까지 그 호리꾼 마누라 행세를 하더라니까요. 뭐 처음 사업차 왔을 때 한 열흘 개인 통역 겸 비서로 쓰던 아가씨라나. 한족(漠族) 꾸냥이라면 또 모를까, 이거 그야말로 살이 살을 먹는 거지. 어젯밤도 함께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는데 아까 점심때 나오다 보니 또 찾아와 둘이 들어앉았습디다.”
그때도 나를 으스스하게 한 것은 다만 무엇이든 상품화하고 마는 자본주의의 집요한 상혼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나를 알아보는 판이라 더는 길게 붙들고 있을 화제는 못 되었다. 그때 우리는 이미 칭다오(靑島〕 맥주를 세 병이나 비운 뒤였고 내게는 또 그 전에도 적잖은 낮술이 있었으나 아직 그만한 분별은 남아 있었다. 나는 그쯤에서 화제를 바꿀 양으로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은 그의 입을 막듯 물었다.
“그런데 통일 사업은 잘돼 가십니까?”
나는 무심코 그 장사꾼이 한 말을 되뇐 셈이었으나 통일꾼은 통일 사업이란 말에서 어떤 빈정거림을 느꼈는지 금세 후끈해 내가 꺼낸 화제로 끌려 들어왔다.
“그 호리꾼을 만나셨다더니 무슨 소릴 들으신 모양이군요. 제겐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주제도 못 되는데 통일 사업이라니. ― 도대체 그 친구 뭐라고 합디까?”
“들은 게 아니라……. 하시는 일, 말하자면 그런 셈 아닙니까? 하기 쉬워 통일 사업이라고 했는데 어폐가 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통일꾼은 더 따져 묻지 않았다. 느끼기에 그가 겪해진 것은 내 말에 들어 있는 빈정거림의 뜻이 아니라 그 말이 상기시킨 딴 일 때문인 듯했다.
“그러실 거까지는 없고……. 혹시라도 거기 무슨 도움이라도 될까 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고는 있습니다만 신통치 않습니다. 백두산 천지나 보고 오는 게 나을 걸 그랬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처음부터 백두산으로 갈 생각은 없으셨던 것 같던데.”
이번에도 나는 별 뜻 없이 내 느낌을 말한 것이었으나 듣는 사람에게는 다시 적잖은 충격이 된 듯했다. 통일꾼이 애써 그 충격을 숨기고 해명하듯 말했다.
“학자시라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눈이 매서우시군요. 하긴 뭐, 숨길 것도 없지요. 실은 제가 여러 해 몸담아 온 단체가 이번에 발전적 해체를 하고 국내외를 망라한 통일 운동 단체를 하나 만들려고 추진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연길의 지리적 정치적 위치에 주목하고 이곳 교포들의 역할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데, 말하자면 제가 그 특사로 온 셈이지요. 전부터 우리 단체와 연관을 맺어온 이곳 유지들을 만나보고 쓸 만한 사람을 찾아보는 게 제 일입니다. 이렇게 관광단에 끼어 온 것은 공연히 주목당해 귀찮은 의심받는 게 싫어서였습니다. 미국으로 간 사람은 다르지만 소련으로 간 사람은 역시 나와 비슷하지요. 모스크바와 타슈켄트 위주로 짜여진 여행단에 끼어. 그런데 지난 이틀 여러 사람 만나 얘기해 보았지만 생각만큼 우리 취지가 먹혀들지가 않는군요.”
“혹시 접근이 잘못된 거 아닙니까? 통일을 오로지 정치적으로만 파악하려 한다던가…….”
그때는 나도 술기운으로 어지간히 느슨해져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쉽게 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문제 제기를 단순히 전날 들은 말을 옮긴다는 기분으로 불쑥 말해 버린 까닭이었다. 그런데 술기운이 효력을 내기는 통일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반응이 예상 밖으로 맹렬했다.
“통일에는 경제 문제가 우선되어 고려돼야 한다, 경제에 소홀한 통일 논리는 유치한 감상밖에 안 된다, 뭐 그런 논리 말입니까? 박사님도 그쪽이십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 아십시오. 통일 얘기 하는데 경제니 뭐니 딴 거 앞세우는 놈치고 사기꾼 아닌 놈 없다는 걸. 아니면 극우 반동의 흡수통일 논리거나.”
그래 놓고 자기가 심했다 싶었던지 조금 진정해서 하는 소리가 이랬다.
“통일은 원래 하나였던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고 원래 한 나라였던 땅이 다시 한 나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자연이고 당위(當爲)입니다. 그런데 그런 논리를 정치적이라고 몰아붙이고 경제적인 고려니 문화의 동질성 회복이니 하는 다른 조건들을 우선시키는 것은 위장된 반통일 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합리적입네, 사려 깊네, 어쩌고 하지만 그자들의 속셈은 따로 있다구요. 특히 경제를 우선 시키는 자들이 고약해서 그들의 내심에는 단순한 흡수통일 이상의 제국주의적 발상까지 들어 있지요. 통일을 북한만 한 크기의 식민지를 획득하는 것으로 보거나 시장이 두 배 넓어지고 이천 몇 백만의 신규 고객이 생기는 일로 보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의 경제 상태나 우리의 여유가 무엇 때문에 그리 중요합니까? 북한동포를 진정으로 한 핏줄 한 형제로 여긴다면 통일 비용 어쩌고 하는 개수작이 어디서 나옵니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나눠 먹고 입는 게 바로 형제고 핏줄 아닙니까?”
“글쎄요. 지금은 한 어머니 몸에서 난 형제라도 반드시 모든 걸 나눠 쓰는 세상이 아니라서. 그 방면으로 수십 년 면밀한 준비 끝에 통일한 독일도 몸살깨나 앓는 듯하고. ― 우선 정치적으로 통일부터 하고 본 예멘은 끝내 남북 간에 피투성이 내전이 터진 모양이던데…….”
나는 전날 장사꾼과 얘기할 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경제주의 통일론을 슬그머니 지지해 보았다. 내가 통일 문제에 천지하게 몰두해 본 적이 없어 그런 입장 바꿈이 쉬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짐작대로 통일꾼이 다시 열을 냈다.
“그게 바로 그자들의 개수작이란 말입니다. 그럼 바꿔 생각해봅시다. 경제적으로 서로 살 만해 손해 날 거 하나 없고, 문화도 수준이나 내용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남북 칠천만이 희희낙락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통일이란 게 도대체 얼마나 허황된 이상론입니까? 정말 그런 날이 온다고 믿어 그 같은 통일 논리를 내세운다고 봅니까? 그따위 수작하는 놈들일수록 계산은 빤해 그런 날이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겁니다. 그보다는 통일 뒤에야 우리끼리 지지든지 볶든지 엎어지든지 자빠지든지 우선 통일부터 해 두고 보자는 주장이 훨씬 윗길이지. 최소한 정직하지라도 않은가 이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 박사님.”
그렇더라도 해방 뒤처럼 지지고 볶고 하다가 6·25 같은 거 한 번 더 겪고 남북으로 다시 엎어지고 자빠지게 된다면. ㅡ 그렇게 반문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갑자기 피곤해졌다. 고백하면 내게는 통일 문제뿐만 아니라 일체의 이데올로기 논쟁에 끼어서는 안 된다는 자격지심 같은 게 있었다. 아버지의 월북으로 뒤틀린 자의식의 일종인지, 아니면 엄격한 반공 교육이 강요한 원죄 의식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런 논쟁에 끼어들게 되면 나는 피곤하기부터 했다. 그래서 다시 한쪽으로 비켜선다는 게 다시 일을 냈다.
“실은 뭐 내 생각이 꼭 정치 우선의 통일 논리를 반대한다는 건 아니고……. 남에게 들은 소리 한번 전해 본 것뿐입니다. 혹시 선생님께 참고가 될까 해서.”
솔직히 나는 전날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그 사업가에게서 들은 얘기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통일꾼은 용케도 그 남이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반드시 술 탓만이라고 할 수 없게 얼굴이 시뻘개져 목청을 높였다.
“고 쥐새끼 같은 호리꾼 놈이 한 소리 아닙니까? 어제 내게도 고렇게 밴장거리더니. 바로 그겁니다. 고런 놈들이 세상일 혼자 다 아는 체하면서 통일 얘기만 나오면 경제가 어떻느니, 신중하고 사려 깊게 살펴야 한다느니 갖은 요사를 떨어 멀쩡한 사람들까지 헷갈리게 만든다니까요. 신작로 닦아 놓으니 양갈보 먼저 지나간다고, 연길도 길 열리자 맨 고따위 못돼 빠진 사기꾼 놈들만 들락거려 순진한 동포들 다 버려 놨습디다. 벗겨 먹고 알겨 먹고 하면서 저희가 뿌린 푼돈에 맛을 들여 민족이고 이념이고 다 뒷전으로 미뤄 놓고 그저 돈, 돈 하게 만들어 놨단 말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고 호리꾼 놈은 벌써 북한 쪽에도 그 짓을 시작한 겁니다. 지금은 골동품이나 낱개로 빼내고 있지만 흡수통일이라도 하는 날엔 어찌 될지 아십니까? 소유 관념에 서툴러진 북한 사람들 부동산 석 달 안으로 고런 놈들에게 다 헐값으로 넘어갈 겁니다. 그들 경제적 약점 이용해 고리대금 인신매매 서슴지 않을 것이고 위세도 이만저만이 아니겠지요. 일본 놈들 이 땅에 와서 한 식민지 놀음보다 훨씬 지독한 짓들을 할 놈들입니다. 좋은 산 바위에다 김일성 부자 이름 새긴 거 자연 훼손이라고 나무라지만 고런 놈들 풀어놔 두면 그건 아주 약과일걸요. 금강산, 묘향산 좀 볼만하다 싶은 곳에는 그것들 별장이나 여관으로 엉망이 될 겁니다. 통일 전에 그것들부터 먼저 싹 쓸어 없애야 하는데…….”
세상에는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상하리만치 서로의 단점과 약점을 잘 알아보면서도 또한 이상하리만치 그걸 서로 참지 못하는데 그 통일꾼과 전날 만난 사업가가 바로 그런 사이 같았다. 내가 알기로 그들은 이번 여행 전에는 서로 몰랐고, 더구나 같이 방을 쓴 건 겨우 이틀인데도 통일꾼은 그 사업가를 일생에 걸친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말했다.
그 경위야 어찌 됐건 분위기가 그리되고 보면 나로서는 그 자리가 그만큼 거북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저 덮을 공사로 양쪽 모두를 편들어 한동안 성의 없는 대꾸를 해 주다가 여섯 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그 통일꾼에게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어딘가 가서 내처 마시다가 취해 곯아떨어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참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김한조 씨에게 잔금도 치러야 하고 아우가 다시 찾아올 수도 있었다. 다음 날 북경으로 이동하는 데도 과음은 부담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잘한 일이었다. 김한조 씨는 내가 방으로 돌아간 지 반시간도 안 돼 방문을 두드렸다. 우리 정산은 아주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자신의 말대로 그런 일은 처음이라 그런지 김한조 씨는 계산에 영악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실제 경비에다 사례로 미리 정한 중국 돈 이만 원을 얹어도 내가 예상한 금액보다는 적었다.
그 바람에 달러 여유가 늘자 나는 다시 아우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차피 마음먹고 가져온 돈이라 아우가 다시 찾아오기만 하면 어떻게든 쥐어 보내리라 마음먹고 구실까지 새로 짜내 보았다. 내가 모셨으면 응당 물었을 장례비를 네가 대신 문 셈이니 받아 둬라. 혹시 네가 나 만난 게 알려져 곤란하게 될 때 쓰일지 모르니 받아 둬라……. 그러나 김한조 씨의 말은 그런 나를 맥 빠지게 했다.
“동생분 다시 오기는 어려울 겝네다. 요즘 여기는 북조선에서 도망 나오는 사람들 때매 조교(朝僑)들이 부쩍 설쳐요. 몰래 들어온 북조선 특무(特務)들도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아까 낮에 그만 시간 낸 것도 용하다 생각했시요. 이런 일은 재구재구(빨리빨리) 해치우고 며칠 그냥 외삼촌 집에 놀다가 물건이나 좀 가지고 돌아가는 게 좋을 거웨다.”
그런데……. 아우가 다시 왔다. 여덟 시가 넘어서야 백두산에서 돌아온 일행과 늦은 저녁을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온 지 한 시간 쯤이나 되었을까. 내일의 남은 여정을 위해 샤워로 낮 동안에 여기저기서 마신 술기운을 씻어 내고 있는데 누가 쿵쾅거리며 문을 두드렸다. 급히 몸의 물기를 닦고 나가 보니 알아보게 취한 아우가 건들거리며 문밖에 서 있었다.
“형님, 저야요. 내래 못다 한 말이 있어서리…….”
나는 그런 아우를 얼른 방 안으로 맞아들이고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았다. 내가 다시 출입문이 제대로 닫겼나까지 확인하는 걸 보고 취한 중에도 내 뜻을 짐작한 아우가 큰소리를 쳤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요. 내래 다 수를 써 놓고 왔디요. 특무가 와도 일없습네다. 술이나 있으면 한잔 주시라요.”
나는 아우를 의자에 앉히고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재작년에 묵었던 호텔과는 달리 거기에는 제법 여러 종류의 술이 갖춰져 있었다. 아우가 독한 술을 원해 나는 양주 작은 병 하나와 쇠고기 육포를 꺼냈다.
“그래 다 못 한 얘기가 뭐냐?”
따라 준 술을 얼음도 넣지 않고 단숨에 마셔 버리는 아우에게 내가 가만히 물어보았다.
“많디요. 원망도 많고 한도 많고 후회도 많고…….”
아우는 넋두리같이 그래 놓고 코를 한번 훌쩍 들이켜더니 갑자기 막혀 있던 말문이라도 터진 사람처럼 한꺼번에 쏟아 놓았다.
“형님, 직접 만나 보기 전에 형님은 내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나 하십네까? 아버님은 돌아가실 무렵 해서야 겨우 직접으로 형님 얘기를 하셨지만 나는 벌써부터 형님을 알고 있었시요. 한없이 자애로운 아버님의 눈길을 느끼다가도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디요. 나를 보시는 것 같으면서도 내 뒤에 누군가 다른 사람을 보고 계시다는 느낌……. 내래 어렸을 적에는 그게 누군지 잘 몰랐디요만, 중학에 가니 하마 알겠드만요. 그게 바로 형님이라는 걸. 또 있습네다. 항시 누군가와 비교당하는 느낌 말이야요. 내 딴에는 잘했다고 받아온 시험지나 성적표를 보실 때의 그 마지못해 하시는 듯한 칭찬,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잠시 넋을 놓는 듯한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내가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있는 순간이디요. 아버님의 멍한 눈길에는 누군가의 시험지와 성적표가 떠올라 있었을 거야요. 그게 누군가도 중학교 가기 전에 하마 알았습네다…….”
나는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내 어린 날의 시험지와 성적표를 떠올려 보았다. 그랬다.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은신해 계시느라 서울 근교의 시골에 머물렀을 때 국민학교에 입학한 내 1년의 성적은 화려했다. 언젠가 열 번을 내리 만점을 받아 오자 아버지가 수염 꺼칠꺼칠한 턱을 내 볼에 비벼대 비명을 지른 적도 있었다. 과제물을 해내기만 하면 거기에 어김없이 그려져 나오던 다섯 개의 붉은 동심원(同心圓)……. 그러나 그 1년 이후 내 성적은 한 번도 그때의 영광을 회복해 보지 못했다. 어린 삼 남매와 어렵게 떠돌며 사는 홀어머니의 맏아들로서는, 더구나 이태에 한 번 꼴은 전학을 다니고 그나마 전학과 전학 사이에는 몇 달씩 학교에 나가지 못하게 되는 학생으로서는, 기를 써도 상위권 유지가 빠듯했다.
“또 다른 형님의 모습도 있시요. 우리 아버님만큼 평생에 걸쳐 그렇게 열심히 로력한 이도 드물 거야요. 내 기억에는 나중에 병들어 누우신 때 말고 이부자리 속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없습네다. 어렸을 적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아버님은 벌써 일터로 나가 안 계시고, 밤에 잠자리에 들 때 보면 아버님은 주무시지 않을 사람처럼 무언가 끝없이 읽고 계셨디요. 게다가 아버님만큼 많이 아시는 분도 나는 아직 보지 못했습네다. 대학 마칠 때까지 과학이든 수학이든 력사든 내가 물어 모르시는 게 없었으니까요. 그 덕에 우리는 먹는 것 어려운 줄은 모르고 살았지만 머리가 굵으니 슬며시 의문이 나드만요. 아버님이 그렇게 로력하시는데도 왜 우리는 이 정도로밖에 못 사는가고 말이야요. 대학까지 나온 우리 오마니, 머리 좋고 출신 좋은 우리 오마니가 체니(처녀)로 반해 시집갔을 만큼 잘나고 유식한 아버님이 왜 언제나 당 간부들의 눈치만 보고 살아야 하는가고 말이야요. 그렇지만 그것도 절로 알게 됩디다. 우리는 김일성대학을 가도 정치학부나 외교학부는 갈 수가 없고, 군에 가도 군관(軍官)은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당 간부나 국가보위부는 아예 쳐다보아도 안 되고 사회안전부조차 지원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성분 좋고 유능한 일꾼인 매형이 누님과 결흔한 탓으로 받게 된 온갖 불리익을 보면서……. 바로 남반부와 이어져 있는 아버님의 삶, 특히 다른 것은 다 끊을 수 있어도 그것만은 끊을 수없는 혈연의 사슬 때문이었습네다. 남반부 출신의 지식인에게 일반적으로 품는 당과 인민의 의심은 아버님의 로력과 열성으로 충분히 씻길 수 있었으니까요. 따라서…… 그때 우리에게 형님으로 대표되는 남반부의 가족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재앙이고 저주였습네다…….”
거기서 나는 잠시 아연했다. 참으로 기묘한 전도(顚倒)였다. 아우가 말하는 나의 이미지는 바로 내가 괴로운 젊은 날을 보낼 때 품었던 아버지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또 내가 그러 했단 말인가. 아버지에게는 주관적인 선택이 있었지만 나는 아무런 선택 없이 부여받은 대로 존재했을 뿐이지 않은가. 역사 속에서 개인의 선택이란 것이 하찮음을 이미 희미하게 실감하면서도 막상 아우로부터 그런 말을 듣자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아우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만은 섬뜩할 만큼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에 떠나올 때 제 심경이 어땠는지 아십네까? 솔직히 말해 아버님의 유언 따위는 뒷전이었시요. 그건 오히려 이상한 경쟁 심리를 자극했을 뿐이야요. 어째 아버지는 자기가 받은 가장 높은 훈장을 거기다 주라 하는가고. 우리는 뭐인가고……. 내가 형님을 만나기로 한 건 오히려 그런 아버님의 유언보다는 궁금함 때문이었시요. 우리의 오랜 재앙과 저주가 실제로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나가 못 견디게 궁금했시요. 아니, 그 이상으로 한평생의 원쑤를 찾아 떠나는 심경이었시요……. 그런데 형님을 만나 보니 첫눈에 벌써 아니었습네다. 아직도 내래 잘 설명은 못 하갔지만 만나는 순간부터 형님은 그저 우리 형님일 뿐입디다. 함께 쓸어안고 울 사람이지 원망하고 미워할 사람은 아니더란 말이야요. 시간이 갈수록 내가 품고 온 적의가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지더란 말입네다. 되레 오래 그리워 해 온 사람인 듯한 착각까지 들고……. 글티만 그럼 이거 어드렇게 된 거야요? 형님의 한은 어디 가서 풀고 우리 한은 어디 가서 풀어야 하는 거야요? 뭐이가 잘못돼 일이 이렇게 된 거야요? 형님은 아십네까? 니거 덩말 어드렇게 된 겁네까…….”
나도 모르겠구나, 아우야. 실은 두만강 가에서 흘린 내 눈물에도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그 황당함과 허망감이 들어 있었단다. 알수 있는 것은 다만 이제 한 시대가 끝났다는 것, 내 인생도 어떤 식으로든 새로 추슬러야 할 때가 왔다는 것 정도이다. 삶은 어떤 경우에도 나 아닌 다른 것에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가혹한 것일지 모른다는 어렴풋한 짐작뿐이란다.
“내래 형님한테 속인 거 많시요. 김책연합기업소 당위원회 조직부? 새빨간 거짓말이야요. 내가 들고 싶은 곳이지 실제 일하는 곳은 아니야요. 나는 고작 돌 부스러기나 주무르는 선광부(選鑛部) 기사일 뿐입네다. 경공업위원회 지도원한테 시집간 녀동생? 맞긴 하지만 매제는 나보다 나이 많은 홀애비였시요. 자식새끼 둘이나 딸린. 그런 홀애비기 때매 가래(그 아이가) 시집갈 수 있었디요. 체니 때는 참하고 똑똑한 아이였는데……. 평양외국어대학에 간 막동이도 머리 하나는 똑소리 나는 아이야요. 김일성대학 정치학부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는데 그리밖에 못 됐시요. 아버님도 일평생 고된 현장과 허울 좋은 연구직 (硏究職) 사이의 오르막 내리막만 거듭하며 불안하게 사시다 가셨디요. 바친 것보다 받은 게 많은 삶 ― 그건 북반부에서는 대중가요 가사처럼 흔한 아첨이야요. 임종도 고생스러우셨습네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모은 걸로 경호 아재를 통해 진통제를 구해 댔지만 막바지 사흘은 그마저 안 돼 몸을 뒤트시며 괴로워 하시는 거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시요…….”
아우야, 그런 소리는 더 듣고 싶지 않구나. 아직은 한동안을 그 체제 안에서 살아야 할 너를 위해. 구두가 발에 맞지 않으면 발을 구두에 맞추는 수도 있단다. 구두를 발에 맞추는 게 가장 좋지만 그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못 되니. 역사의 구둣방은 언제나 엉터리 화공(靴工)들이 차고앉아 왔으니. 남쪽의 진보주의자들은 형의 이런 역사적 허무주의를 비난하지만 그래도 나는 네게 권하련다. 내 혈육이기에 더욱 간곡히 권하련다. 현재의 완전성을 믿어서도 안 되지만 미래에도 너무 성급하지 마라. 어떤 방향으로든 산술(算術) 없는 혁명에는 유혹되지 마라. 때가 오리니. 때가 오리니.
“누님 일도 속였시요. 낮에 말한 대외경제위원회 경제 2등 서기관, 사실은 친구가 아니라 매형이야요. 대학 시절 연애 끝에 누님과 어렵사리 결혼하게 됐지만 그 때매 출세에 지장 많았디요. 김일성대학 외교학부 츌신이면서도 쉰이 다 돼 가는 이제 겨우 2등 서기관입네다. 그것도 대외경제위원회 소속으로. 지금 누님과 북경에 나와 있시요. 그러나 떠나올 때 가족회의 결정은 누님의 얘기를 형님에게 하지 말자는 거였습네다. 형님이 누님을 찾아가게 되면 누님과 매형 모두에게 이로울 게 없을 것 같아서. 하지만 일 없습네다. 이게 누님 전화번호야요. 북경에서 시간 나거든 한번 만나 보시라요. 남매간 만나는 게 해로워 봤자 얼마나 해롭캤습네까?”
아우는 그 말과 함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 한 장을 꺼내 주고 마침내는 곯아떨어졌다. 다행히 내 방의 침대는 트윈이어서 나는 그런 아우를 여분의 침대에 끌어다 눕혔다. 겉옷을 벗기다 보니 첫물인 듯싶은 아우의 새 양복이 까닭 없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튿날 나는 왠지 새벽 일찍 눈을 떴다. 아우의 침대 쪽을 살피니 간밤 내가 꼼꼼히 여며 준 담요를 걷어찬 아우가 새우처럼 몸을 꼬부린 채 자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일어나 한 켠으로 밀려나 있는 담요를 다시 아우에게 덮어 주었다. 그래 놓고 이어 베개를 바로 해 주고 있는데 아우가 기척을 하며 깨어났다.
간밤 취해서 떠들 때와는 달리 아우는 몹시 수줍어하면서 서둘러 겉옷을 걸치고 방을 나갈 채비를 했다.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호텔을 나서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싶어 나는 그런 아우를 잡는 대신 간밤에 준비한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거라. 이천육백 달러다. 네게 쓰일 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더는 머리를 짜내 구실을 마련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아우가 멈칫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더니 이내 생각을 바꾼 듯 손을 내밀어 공손하게 봉투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형님.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우는 꼭 초등학생이 경례하듯 꾸벅 절을 하고 방을 나갔다.
그런데…… 자칫하면 아우를 만난 이야기에는 사족이 될지 모르지만 나는 아무래도 북경에서 있었던 나머지 일을 마저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전혀 생각 못 했던 여동생을 만나려 한 것도 아우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일이거니와 통일꾼과 장사꾼의 시비도 넓게 보면 아우와의 만남과 한 끝에 이어진 얘기일 수 있으므로.
어쩌면 통일이란 게 바로 한꺼번에, 대규모로 일어나는, 이런 낯 모르는 아우와의 만남이 아닐는지.
우리 관광단이 다시 북경에 내린 것은 그날 오후 한 시경이었다. 나는 호텔 방이 정해지자마자 아우에게서 받은 전화번호대로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를 받은 것은 어떤 젊은 여자였는데 내가 여동생의 이름을 대자 짤막하게 외출 중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차고 단호해 좀 망설여졌으나 나는 곧 호텔 객실 호수와 내 이름을 알려 주고 돌아오는 대로 전화를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하지만 오후 내내 전화기 곁에서 기다려도 끝내 여동생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저녁 무렵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 보았다. 이번에도 그 젊은 여자가 받더니 같은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날 밤과 그 이튿날 아침에 각기 한 번씩 전화를 걸었으나 그때마다 전화기 곁에서 기다리기나 한 사람처럼 그 여자가 나와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럭저럭 호텔에서 체크아웃 해야 할 시간이 왔다. 일행은 명십삼릉 관광을 떠나면서 체크아웃을 마치고 나만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열두 시가 다 돼 객실을 더 쓸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다. 나는 은근히 다급해져 다이얼을 돌리다가 갑자기 아, 하는 기분으로 그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은 듯함을 기억해 냈다. 앳되게 들리기는 해도 젊은 날의 누님 목소리……. 그때 수화기에서 다시 그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심히 들으니 더욱 누님과 닮은 목소리였다. 너였구나. 네 나이가 마흔이라는 걸 계산해 안 게, 그래서 중년 부인의 목소리만을 예상한 게 그 닮은 점을 진작 느끼지 못하게 하였구나.
하지만 나는 그런 여동생에게서 명확한 거부 또는 회피의 의사도 동시에 확인할 수 없었다. 아우의 전화가 있었거나 해서 여동생은 아마도 진작에 내가 전화할 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 말 못 할 이유로 나를 만나 줄 수 없었고, 그래서 줄곧 전화기 옆에 불안하게 대기하고 있으면서 나를 따돌리려 한 것인지 모른다. ― 추측이 거기 이르자 나는 잠시 망설여졌다. 사정 이 있어 나를 만나 줄 수 없는 아이를 굳이 만나야 할 까닭이 있을까, 오라비되어 아무것도 해 준 거 없으면서 어쩌면 이 아이에게 해로울지 모르는 이 만남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만 이대로 돌아서기도 못내 아쉽구나. ― 그러다가 나는 어중간한 절충을 했다.
“이문희 씨가 돌아오시면 남쪽에서 온 오라비가 만나고 싶어 전화했더라고 전해 주십시오― 네 시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가는데 언제 북경엘 다시 올지 몰라 몹시 서운하군요. 다시 온다 해도 그때 문희가 여기 남아 있을지 모르고. 그렇지만 한 시까지는 이 호텔 로비에 그대로 있고, 두 시 이후부터는 공항에 있게 될 테니 혹시라도 그 전에 돌아오시면 그 말이라도 전해 주십시오.”
나는 그 여자가 바로 문희일 것이라 단정하고 그렇게 간접화법과 직접화법을 섞어 내 뜻을 전했다 짧은 침묵 뒤에 그 여자가 받았다
“알겠습니다. 돌아오시면 꼭 그렇게 전해 드리지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그렇게 들어서 그런지 인사 부분에서 말소리가 묘하게 떨리는 듯했다.
그 뒤 호텔 로비에서 두 시간, 그리고 공항에서의 한 시간 남짓을 나는 줄곧 기다렸으나 문희는 결국 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전화 때의 인사가 바로 그 아이의 작별 인사로 되고 만 셈이었다.
“선생님, 귀찮은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이제는 거의 단념하고 눈길을 공항 출입구에서 우리 일행 쪽으로 돌릴 무렵 언제부터인가 내 주위를 맴돌던 골동품상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
아직 제대로 마음을 가다듬지 못한 내가 눈길로 묻듯 말없이 쳐다보자 골동품상이 그림이 든 길쭉한 종이갑 둘을 내밀며 말했다.
“선생님은 별로 짐도 없으시니 이거 둘만 서울까지 맡아 주십시오.”
받아 보니 관광지에서 흔히 파는 동양화 족자가 든 마분지 갑이었다. 중국 여행이 끝날 무렵이면 누구든지 한두 개쯤 사게 되는 물건이라 굳이 남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내게 맡기는 게 이상해 다시 그를 쳐다보니 골동품상이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께 속여 뭐하겠습니까? 통은 그래도 그 안에 든 그림은 요새 것이 아닙니다. 참, 혹시 요수제(樂水齊)란 낙관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는 아마도 통일꾼을 통해 내 직업과 전공을 들은 것 같았다.
“요수제? 글쎄요. 처음 들어 보는 호(號) 같은데.”
“조선 후기쯤의 실경산수(實景山水)인데 제법 맛이 있습디다. 실은 그 그림 두 통이 거기 들어 있습니다.”
그 장사꾼은 다 알지 않느냐는 듯 눈까지 찡긋하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 탐탁지 않으면서도 마지못해 그 그림들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무심코 공항 대합실을 돌아보는데 문득 내 주의를 끄는 게 하나 있었다. 다른 일행들은 공항을 전세라도 낸 것처럼 휘젓고 다니는데 한구석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는 통일꾼의 모습이었다.
의기소침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에 상심해 넋을 놓고 있는 듯하기도 했다.
“맥 빠지게도 됐지. 저 냥반 씁데없이 큰소리 펑펑 치고 책임지지도 못할 약속 마구 남발하다가 된통 당한 모양입니다 전에 그 비슷한 사람에게 넘어가 며칠 술이야 밥이야 잘 대접해 보냈다가 서울 초청은커녕 편지 한 장 못 받자 속았다고 분해하던 연길 교포 하나가 한참 열을 올리는 그에게 술상을 덮어씌워 버렸다는군요. 엉뚱하고 억울한 날벼락 같지만 어찌 보면 그런 꼴 당해도 싸지. 소련 동구 넘어가는 거 두 눈 뜨고 뻔히 보았으면서도 그저 뭐든지 말로만……. 내 진작에 그런 험한 꼴 당할 줄 알았다니까.”
아직도 주위를 맴돌던 장사꾼이 내 눈길이 머문 곳을 짐작하고 다가와 속삭이듯 그렇게 말해 주었다. 전날 연길에서 보았던 통일꾼의 양복에 남은 얼룩을 연상시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런 통일꾼의 낭패를 비웃어 줄 기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장사꾼의 웃음이 역겨우리만치 간교하게만 느껴져 아무런 대꾸 없이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그때 여행사 직원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나타나 소리쳤다.
“오 분 후에 탑승이 시작됩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두 여권들 찾아가십시오.”
(1994년)
2016년 2월 7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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