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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번뇌업장(一切 煩惱 業障) 본래공적(本來 空寂)이요,
일체 인연과보(一切 因緣 果報)
실여몽환(實如 夢幻)이라
무삼계가출(無三界可出)이요, 무고뇌가단(無苦惱可斷)이며,
무보리가구(無菩提可求)요,
무열반가증(無涅槃可證)이라.
백운화상 어록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백운선사 호는 경한으로 고려시대의 스님으로 중국 원나라에서
수행을 하신 분이다. 무심선(無心禪)을 증득하는 것이 무심이며, 그 무심의 경계를 위해서 참선하는 것이 무심선이라 하였다.
일체번뇌 와
망상 업장이라는 것은 공적(空寂)한 것이다. 본래 마음에 맑고 밝고 깨끗해서 업장이 없는 것이므로 일체 인연과보 또한 모두 몽환(夢幻)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因)을짓고 연(連)을 만나서 과(果)를 맺는 것이 당연한 듯이 보이지만 그 인연을 지어가는 것은 주인인 자기
자신이다.
나 자신의 마음은 맑고 밝고 깨끗한 것이지만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나 인(因)이 되고, 이 인이 환경을 만나 연(連)이 되고 그
숙성된 인연이 과(果)를 맺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씨앗이 인이요, 토양과 비와 바람 등의 환경조건이 연이 되며, 그 환경조건에서 얻어진
자양분으로 열매인 과가 생기는 것과 같다.
씨를 심었다고 해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은 아니다. 원인이 주어졌다고 해서 결과가 바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원인에는 반드시 환경의 조화가 더 잘 이루어 져야 하기 때문에 그 환경조건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비록
어느 곳에 태어나더라도 태어난 그 바탕만으로는 그 사람의 품성을 판단할 수 없다. 설사 좋지 못한 품성을 가지고 태어났더라도 좋은 환경에서 잘
자라나게 된다면 훌륭한 품성을 갖고 잘 살아갈 수 있다. 좋은 품성을 가지고 태어났더라도 좋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다 보면 좋지 못한 품성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본래는 어느것을 막론하고 번뇌업장이라는 것은 공적한 것이다. 그 공적한 자리에서는 인이나 연, 과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마음자리에 있어서는
무삼계가출- 상계를 뛰어날것도 없고,
무고뇌가단- 끊어야 할 고뇌도 없고, 무보리가구- 구해야 할 보리도 없으며, 무열반가증- 증득(證得)해야 할 열반도 없는 것이다.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수인(手印)을 보면 왼손가락을 오른 손가락으로 감추듯 감싸고 계시며, 석가모니 부처님은 왼손을 가슴에 두고, 오른 손을 무릎에
내리고 계신다. 이에서 보듯왼손은 지혜를 상징하며, 오른손은 실천을 상징한다. 그래서 왼손 즉 지혜는 감추어져 있다.
또 당나라의
임제스님은 고함을 자주 질렀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조금씩 깨우침을 얻었다고 하며, 덕산스님은 주장자를 내리치기도 하고, 사람을 후려패기도
하였다. 그 주장자를 맞은 사람은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임제스님의 임제록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온다.
하북성에 왕사씨라는
지방관리가 임제스님에게 법을 청하였다. 스님은 법산에 올라 “오늘은 물어라”고 하였다. 그때 듣고있던 어느 스님이 “스님, 부처님의 적적대의가
무엇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임제스님은 고함을 질렀다.
이에 질문을 하였던 스님은 절을 하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스님은 ‘조금 깨달은 바가 있구나’라고 생각하였다.
또 다른 스님이 나아와 “스님께서 부르시는 노래는 어느 집의 곡조를 땄고, 그 가문은
어느 가문을 이었습니까?” 라고 여쭈었다.
임제스님께서는 “내가 황백스님께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
스님은 또다시 질문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임제스님이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에 입을 닫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임제스님은 “허공에 말뚝을 박아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비유로 말을 할 필요가 없는데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표현이다.
옆에
있던 강사스님이 또 스님께 여쭈었다. “3성 12부 경인 팔만대장경이 어찌 불성을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스님은 “거친 풀밭에는
호미질을 안하는 것이다.”하였다.
이에 대한 해석으로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본인의 생각으로는 거친 풀밭에는 호미질로는 되질 않는 것이므로
필요없는 말을 하지말라는 뜻인듯 하다.
강사스님이 다시 “부처님께서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하니 “부처님이 어디 있느냐?”하고 다시
되물었다. 그러자 강사스님은 대답을 못하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부처님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경전을 보고 부처님의 말씀인줄을
아는 것은 자기의 마음속에 부처님이 있으므로 부처님의 말씀임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불심이 되고 불도가 되어서 우리도 부처님같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경전의 그 말 모양에만 묶여있으면 안되고, 내 마음으로 실천이 되어서 깨달음을 얻게 될 때 본래 망성번뇌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근심 걱정은 우리 스스로가 앉은 자리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요, 걱정 근심을 없애는 것도 어디든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해결해 가는
것이다.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이 없다면 세상 그 무엇도 소용이 없다. 내 자신이 스스로 본래의 모습을 잘 참구했을 때
나의 무한한 능력을 발견해 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돌이켜 참회하다 보면 뉘우치게 되고 뉘우치면 마음은 점점 맑아지고, 세상은
점점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첫댓글 풀밭에 말뚝 박으러 가옵니다........... _()_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