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꼰따르도 페리니 (C.FERRINI)
축일 : 10월 20일
그는 수학과 물리학 교사의 아들로
밀라노에서 태어나 빠비아의 보로메오 대학에서
공부하고, 1880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베를린 대학에서도 2년 동안 공부하였다.
1883년에 귀향한 그는 유스띠니안 법령을
발간하였다. 또한 그는 몇 개 외국어에
능숙하였고, 빠비아에서는 로마 형사법,
그리고 메씨나에서는 로마법 교수를 지냈다.
1894 년, 그는 빠비아 대학으로 돌아왔는데,
로마법의 최고 권위자로 높은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사회활동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성 빈첸시오 데 바울로의 회원이고,
프란치스꼬 재속 회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대학생들을 위한 성 세베리노 보에씨우스회를
만들었고, 1895년에는 밀라노 시의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북 이탈리아의 수나에서
장티부스로 사망하였다. 그는 200편 이상의
전공 논문을 발표했고, 학문과 일상생활의
조화는 물론 거룩한 생활로까지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꼰따르도는 대학교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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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르타(Martha)
성녀 사울라(Saula)
축일 10월 20일
로마 순교록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사울라(Saula)가 다른 많은 이들과 함께
독일의 쾰른에서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들을 성녀 우르술라
(Ursula, 10월 21일)와 11,000명의 동정 순교자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에 포함된 인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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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막시모(Maximus)
축일 10월 20일
이탈리아 중부 라퀼라에서 태어난
성 막시무스(또는 막시모) 부제는 그 열성에
있어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중에 자신의 고향 도시 근처
낭떠러지에서 던져져 순교하였다. 그래서 그는
라퀼라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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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리아 데레사 드 수비랑 (Mary)
축일 : 10월 20일
그녀의 세례명은
소피아 데레사 아우구스티나 마리아이다.
그녀는 성직자이던 삼촌의 지도를 받고 일찌기
수도생활에 관심을 표명했으나, 19세에 들어간
단체는 평신도들의 공동체여서, 더욱 엄격한
수녀회를 원하게 되었다.
그녀의 삼촌 루이 드 수비랑은 이 평신도
공동체를 "베긴 수녀회"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이들은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세속을 드나들면서
수도생활을 하는 공동체이다.
그녀는 결국 이 공동체의 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863년, 마더 마리아 데레사 수녀는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따른 피정 중에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됨으로써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를 새롭게 창설하였다.
이 회는 주로 고아를 돌보고 불쌍한 아이들을
가르치며, 여성 노동자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마더 마리아는 예수회 규칙을 따랐는데,
1867년에 뚤루즈 대주교의 승인을 받았고,
1868년에는 성좌의 승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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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르사바(Barsabas)
축일 10월 20일
정확한 자료는 아니지만 성 바르사바의
간략한 생애를 전해주는 기록에 의하면,
그는 페르시아 수도원의 원장이었다가
국왕 사푸르 2세의 박해 때 그의 수하
수도자 11명과 함께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끝내 참수 당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용감성과
인내심에 감복한 어느 조로아스터교 신자
한 사람도 그들의 편을 들다가 함께
처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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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베르틸라 보스카르딘(Bertilla Boscardin)
축일 10월 20일
안나 프란치스카 보스카르딘
(Anna Francisca Boscardin)은 이탈리아
비첸차(Vicenza) 근교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고,
1904년에 고향의 산타 도로테아회에 입회하여
베르틸라라는 수도명을 받고 3년 동안 주방
일을 한 후 트레비소(Treviso)의 어린이 병동에서
간호사로서 일하였다. 1917년의 대공습 때
성녀 베르틸라 수녀는 자신의 환자들을 아주
태연한 자세로 돌봄으로써 코모(Como) 근교의
야전 병원 당국으로부터 놀라운 찬사와 더불어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원장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탁 일을 하도록 명하자, 고위 장상에게 하소하여
어린 환자들을 위하여 일하도록 간청하였다.
마침내 1919년에 그녀는 트레비소의 어린이
격리 병동의 소임을 맡았으나,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서 모든 활동을 포기해야 하였다.
큰 수술이 필요하여 실시했지만 생명을
건질 수 없었다.
성녀 베르틸라의 생애는 힘든 일로 점철된 극히
단순했지만, 그녀는 어린 환자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베풀어 깊은 인상을 심었고, 그녀의
중재로 수많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
1961년의 시성식장에는 그녀의 간호를 받았던
당사자와 그 부모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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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신둘포(Sindulphus)
축일 10월 20일
프랑스 남서부 가스코뉴(Gascogne)에서
태어난 성 신둘푸스(또는 신둘포) 신부는
랭스 근교에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성실한 기도와 엄격한 생활을
살았으며,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를 찾는 이들에게 지혜로운 조언을
해준 것으로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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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까(acca)
축일 : 10월 20일
성 아까는 잉글랜드의 노스움브리아 출신이다.
그는 성 보사의 지도와 표양을 본받아 뛰어난
인물로 등장하였다. 그후 그는 성 윌프리드
수하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그를 수행하여
로마를 여행하였다. 성 베다에 의하면, 그는
교회 관리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709년, 그는 성 윌프리드를 계승하여 헥삼의
주교가 되었는데, "지극히 활동적이고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흠없는 위인"이란 평판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성서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졌고,
도서실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 음악을 위하여 헌신하였는데, 그 자신이
훌륭한 성악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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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아델리나(Adelina)
축일 10월 20일
성녀 아델리나는 정복자 윌리엄(William)의
손녀이며 사비니(Savigny)의 성 비탈리스
(Vitalis)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베네딕토
수녀회에 입회하여 수녀가 된 후 그녀의
오빠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Normandie)의
모리통에 설립한 라 블랑쉬(La Blanche)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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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르테미오(Artemius)
축일 10월 20일
성 아르테미우스(또는 아르테미오)는
아리우스파(Arianism)의 거두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으로 공경을 받는 보기 드문 경우이다.
한때 그는 콘스탄틴 대제군의 사령관이었다.
그 당시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에
아리우스파인 게오르기우스 카파도치아가 부임했다.
성 아르테미우스는 아타나시우스를 찾으라는
명을 받고 이집트 사막에 산재해 있는 여러
수도원과 은둔소를 헤매었다. 그 역시
정통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지만
성 아르테미우스는 이교도의 신전과 신상을
파괴하는 등 열렬한 신앙인이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 즉 그는 신상파괴죄로
참수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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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드레아(Andrew)
축일 10월 20일
콘스탄티누스 5세 황제가 성상 파괴 정책을
강행할 때 성 안드레아(Andreas)는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오히려 적지인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갔던 인물이다. 황제의 임석 하에 이루어지는
정통파 그리스도인들의 박해 현장에서 그는
용감하게 항의하였다. 그는 황제 바로 앞에까지
질질 끌려가서 황제는 우상숭배자라고 욕하며
황제의 그릇됨을 질책했다. 그는 경호원들에게
이끌려 투옥되면서 이렇게 외쳤다.
“신앙을 거스르는 당신은 곧 무력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 날에도 그가 계속하여 황제를 비방하자
황제는 시범적으로 그를 길거리로 끌어내어
죽이도록 명하였다. 형리들은 그를 오물구덩이
속으로 던졌으나 다시 기어 나오자 하는 수 없이
불태워 죽여 버렸다. 교회는 나중에 그의 순교지에
대성당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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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카프라시오(Caprasius)
축일 10월 20일
프랑스 아쟁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성 카프라시우스(또는 카프라시오)는
이 도시의 첫 번째 주교였고, 그의 교구민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그는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사목하였다. 그는 은신처에서 나와
몽-생-뱅상으로 갔다가 성녀 피데스
(Fides, 10월 6일)의 장렬한 순교 현장을 목격하였다.
이때 그는 하느님의 위대한 섭리를 깊이 깨닫고,
성녀 피데스의 유해가 방치되어 있는 곳으로
다가가다가 총독 다키아누스를 만났다.
그의 이름을 묻는 총독에게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며
더욱이 주교라는 사실을 용감하게 말하였다.
다키아누스는 그의 인품에 크게 감명을 받았으나,
황제의 칙령에 따라 배교하라고 요구하였다.
그가 단호히 거부하자 형리들에게 인계되었는데
형리들도 그의 신앙심과 항구심에 오히려 감명을
받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고 한다.
총독 자신도 그러하므로 하는 수 없이 그를
감옥에 보냈다. 그 다음날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성녀 피데스와 마찬가지로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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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칸시오(케티) St.John Cantius(JOHN of Kanty)
축일 : 10월20일
1390년 크라쿠프(폴란드) 교구의 케티시에서 태어났다.
크라쿠프 대학에서 우수하게 학업을 마친 다음
그는 사제로 서품되어 신학 교수가 되었다.
성인들이 부딪혀야 하는 반대는 그에게도 있었다.
그는 경쟁자들에게 쫓겨난 다음에 올쿠시의
본당 신부가 되었다.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던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선의는 본당 신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가서 신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얼마후에 그는 크라코프로 돌아가서 남은 일생 동안
성서를 가르치며 보냈다.
자신이 탁월하게 가르친 올바른 신앙 위에다
여러 가지의 덕행들 특히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쌓아 자기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참된
모범이 되어 주었다.
그는 신중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친절하였으므로 크라코프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재산과 돈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쓸 수 있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시시 때때로
그것을 이용했다.
그는 자신을 지탱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돈과
옷가지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잠을 적게 잤으며 그것도 마루에서 자고
음식은 검소하게 먹었으며 고기는 전혀 먹지 않았다.
그는 터키 인들에게 잡혀 순교하기를 바라면서
예루살렘을 순례했다.
의사로부터 건강을 돌보라는 경고를 받았을 때
그는 즉시 사막의 교부들은 그들의 극히 엄격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오래 살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요한 케티는 전형적인 성인이다.
그는 친절하고 겸손하고 너그러우며 적대자들에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엄격한 참회 생활을 했다.
풍요로운 사회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모든 요소를 잘 이해할 수 있지만
운동 선수들이나 무용가들은 마지막 에 가서야
안일한 자기 수양 이상의 그 무엇을 준비해야
함을 알게 된다.
성탄절은 적어도 자기 방종을 제어하는 좋은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