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바꾸고 싶다면 어제를 돌아보라.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글을 해석한 나를 깨닫는다는 것, ‘다산의 마지막 질문’을 읽고 나는 소제목으로 ‘내일을 바꾸고 싶다면 어제를 돌아보라‘로 정하고 요약한다. 다산 정 선생은 ’여유당 전서’를 저술했다. 182책 508권이다. 요즘은 1권이 책 1권이지만, 옛날은 종이와 인쇄술의 문제 등으로 책이 묶음 단위 수량이고 그 책 안에 여러 권의 글을 싣고 있다. 다산은 (1762~1836), 부친 압해정씨 정재원과 모친 해남윤씨의 넷째아들이다. 고조, 증조, 할아버지가 벼슬이 없는 포의를 입고 조부만 진사다. 부친은 음사로 호조 좌랑을 지낼 때 서울에서 살아 다산은 15세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화순 현감, 예천군수, 진주 목사를 지냈다.
다산은 23세에 진사, 27세에 급제한다. 그리고 1801년 신유교란으로 40살에 형조참의에서 천주학책을 읽은 것을 공서파의 공격을 받아 귀양살이가 시작된다. 1818년까지 18년의 긴 세월 하늘의 명을 안다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좌절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며, 당당하기 위해 자신을 가다듬을 때 천명에 도달함을 깨닫는다. 새벽마다 귀양지 마당을 쓸며 하루를 시작하고,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날 정도로 앉아서 집필을 한, 바탕은 예의 힘이었고 그 힘은 소학에서 깨닫는다. 자찬 묘지명에 이렇게 말한단다. “내 나이 예순, 돌아보니 한 갑자를 다시 만난 시간을 견뎠다. 나의 삶은 모두 그르침에 대한 뉘우침으로 보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어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빈틈없이 나를 닦고 실천하고, 내 본분을 돌아보면서 내게 주어진 삶을 다시 나아가고자 한다.” 기록한단다.
자신에게 자신이 없는 이들은 귀천과 부귀를 구분하려 든다. 사람 중에는 군자도 있고, 소인도 있다. 백성은 올바른 도리를 알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고, 지도자들이 이들을 가르쳐 줄 의향이 없던 것이다. 생산에 종사할 사람이 없으면 나라 유지가 어려우니, 백성은 평생 일을 해야 하는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한다 여겼다. 겪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소통하겠는가? 스승이라면 옛것을 전하면서 새것을 받아야 한다. 다산은 비천한 사람이라고 가르침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가르침에는 직접 가르침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 도움을 줄 책을 저술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산은 저술에 온 힘을 쏟는다. 공부란 평생 하는 것이지만, 한 사람의 일생에서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배움과 가르침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졸업식을 시작이라 부른다”라며, 강봉수 박사가 73세에 캘리포니아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한 말이다.
삶의 목표를 찾았다면 흔들리지 않고 거리끼지 않으며 두렵지 않다. 때와 상황에 맞게 행동한다면 어른이라 불릴만하다. 자기보다 못한 자를 벗으로 사귀지 말라는 말은 가르침에는 차등이 없다는 말을 깔고 이해해야 한다. 작은 근심은 버리고 항상 큰 근심을 품어야 한다. 아들에게 부인이 보낸 시집올 때 입은 치마에 써준 글귀다. 이를 하피첩이라 이름 붙였다. “ 이 치마를 재단해 조그만 첩을 만들어 손이 가는 대로 두 아들을 훈계하는 글을 썼다. 훗날 이 글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한다면 그리는 마음이 뭉클하고 솟아나지 않을까.”
예의란 다가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다. 중용이란 올바르지 않은 도리에 대한 저항, 정해진 이치가 아닌 것에 대한 거부의 의미를 지닌다. 중은 시간이 바뀌고 사물 간의 차이와 변동에 따라 거기에 알맞은 도리이며, 일상 상황에 따라 변하는 타당함의 극치이다. 용은 언제 어디서나 있고 불변한다는 뜻이다. 타인을 물들이려 하기 전에 나의 농도를 살펴라. 아무리 학식과 수양이 높아도 욕심과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산도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날마다 ‘자기를 이겨내고 禮로 돌아간다’를 실천하려 노력했다. 옛 선비들은 날마다 어제 저지른 것과 끝내 행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인간을 변하게 하는 유일한 동인은 후회다.
사람을 깨닫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仁과 知는 人材의 아름다움이다.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지란 사람을 아는 것이다. 남을 사랑하면 포악한 형벌이 없고, 사람을 볼 줄 알면 어지러운 정치가 없다. 그러므로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지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 두 가지가 성립되어 있지 않으면 비록 밝은 지혜와 민첩한 기교를 갖추고, 근면과 노력을 다하더라도 難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을 베푸는 것은 우리 삶을 아름답게 가꾼다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처신하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첩경이다. 아름답고 품격 있는 삶,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사람의 인문학이다.
누군가를 꽃으로 불러주면 그는 꽃으로 변할 것이다. 천리마를 구해 오라는 연나라 소 왕에게 곽외가 3달 동안 전국을 뒤져 죽은 천리마를 비싸게 사 온다. 왕은 죽은 말을 어찌 쓰느냐? 곽외는 왕이 천리마를 구하지 못한 것은 없어서가 아니라 백성이 왕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은 말을 비싸게 샀다 소문이 나면 전국의 천리마들이 모여들 것이다. 결국 일 년도 안 돼서 연 왕은 몇 마리의 천리마를 구했다. 전국책에 실려 있는 고사다. 천리마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을 때 천 리를 달린다.
본심을 속인 채 세상에 영합하고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자들이 鄕愿향원이다. 현실에 타협하고 잇속만 챙기는 기회주의자들이다. “후세의 학문은 갈수록 그 참됨을 잃어 향원이 상층의 인간형이 되었다. 거처할 때 공손한 척하고, 어른은 공경하는 척한다. 말을 할 때는 세속에 아부하고, 주장할 때는 옛것을 그르다고 하며 지금 것이 옳다고 한다. 분명히 흰 것을 알면서 검다 하고, 곧은 것을 알면서 많은 이가 굽었다 하면 따라서 굽었다 한다. 그래서 헛된 영예가 세속에 가득 차고 음해가 착한 부류에 미친다. 세대가 오래될수록 이를 깨닫지 못하는 현상이 있게 된다.” 다산이 지적한 말이다. (다산의 직관대로 조선은 70년을 안동 김씨 세도로 망치고, 다산 사후 70년 후 왜와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경술의 국치를 맞이한다) 겉은 희고 속은 검은 향원과 같은 존재, 사이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직 우리 국회와 지선의 선출직 단체장과 지방의원, 법원의 판사, 언론의 기자, 검경의 일부 관리, 초중고대학의 선생 중 적지 않은 무리의 향원을 본다.)
후세에 한 줄의 글도 전할 것이 없다면 헛산 것이다. 다산은 귀양살이 시작부터 집필을 업으로 삼아 붓과 벼루를 옆에 끼고 살았다. 어깨 마비증세가 나타나 폐인의 경지에 이르고, 눈도 어두워져 안경에 의존한다. 다산은 34년을 집필한다. “우리는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으며 종신토록 근심 없이 지내다가 죽는 날, 사람과 뼈가 썩어버리고 한 상자의 글도 전할 것이 없다면 삶이 과연 없는 것과 같다. 그런 삶을 일컬어 삶이라고 한다면, 그 삶이란 금수와 다를 바 없다”라고 제자 정수철에 쓴 편지글이다.
공부는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위로 상달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됨됨이에서 바탕 性과 단계 品을 합쳐 성품이라 일컫는다. 바탕에 무엇을 쌓는지에 따라 인간의 단계는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그래서 공부는 품성을 쌓아서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공자의 주장을 다산 선생이 설명한 것이다.
2022.05.25.
다산의 마지막 질문-2
조윤제 지음
청림출판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