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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들
요한복음 20:1~10
찬송가 160장(무덤에 머물러), 170장(내 주님은 살아 계셔)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들을 잠시 살펴봄으로써 우리 믿음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의 기초 위에 더욱 굳건히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들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과 우리 구주의 여러 차례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이신다는 약속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기록한 시편 16편 9절로부터 11절 말씀에 이르기를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거룩한 자란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인데, 그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며 그로 인하여 자신의 영혼도 스올 곧 죽음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리고 하나님 앞에서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가 죽지 아니할 것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친히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체포되어 이방인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군중들에게도 공개적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적으로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있었다가 나온 것처럼,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는 표적을 보일 것이라고 말씀을 분명히 해주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여러번에 걸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수많은 예언들이 주어졌다가 때가 차매 예수님의 생애 속에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오랫 동안 말씀해오셨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믿을만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실로 우리는 성경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숱하게 보아왔지 않습니까? 주전 이천년 경에 갈대아 우리에서 가나안 지역으로 나그네로서 이동해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장차 그의 후손들이 이방 지역에 사백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손자 때에 애굽으로 그 자손들이 흘러 들어가더니 사백년 동안 그곳에서 종살이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예언대로 큰 민족이 되어 은금을 가지고 무사히 나오게 된다는 예언대로 그렇게 모세를 통하여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가나안 일곱 족속들이 터주대감 노릇하며 살던 그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주신다고 예언하였더니, 놀랍게 그 가나안 족속들을 내어쫓으시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후일에 이새의 가문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나오리라고 하였는데, 그 말씀대로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기를 그의 후손이 계명을 잘 지키면 대대로 영원히 왕위에 있겠다고 하더니 그의 후손들로 이어진 다윗 왕조가 바벨론에 망하기까지 약 5백년을 이어가는 오랜 기간 보존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등불을 끄지 아니하셨다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 가문의 왕위가 영원하리라 하시더니 다윗 사후에 천년 후에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가문에 태어나셔서 마침내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받으셨으니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 역시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부터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말씀해오신 예언이었고, 그 예언이 때가 차매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시고 예언하신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확실한 역사적 사실인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예수님의 빈 무덤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묻히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골고다 언덕 한쪽 기슭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여제자들이 안식일 후 첫날인 지금의 주일에 그 시체에 향품을 더해주고 기름을 바르려고 찾아갔을 때 이미 돌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본래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 일행들은 예수님의 부활 예언을 들어 알고 있기에 군사들을 불러 철통같이 그 장소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은 열렸고 시체는 사라졌습니다. 그 때 당시에 군인들은 만약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아니하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대제사장들이 퍼뜨린 소문의 내용처럼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한다면, 그 보초병들은 무덤을 제대로 지키지 아니한 일로 인하여 직무 태만, 직무 유기로 인하여 반드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임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덤이 열리고 천사들이 나타나자 그것을 보고 벌벌 떨다가 달아나서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그 병사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말을 퍼뜨리도록 사주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한다면, 당일에 그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머리를 싼 수건도 발견하지 않거나 함부로 구겨져 버려져 있어야 하고, 그를 감싼 세마포는 예수님의 시체와 함께 당연히 사라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주님이 부활하신 그 아침에 소식을 듣고 달려온 베드로와 요한이 그 열린 무덤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가 본래 예수님을 감쌌던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또 머리를 감쌌던 수건도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도는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만약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면 남아 있을 리 없는데 그대로 있는 것도 이상하고, 또 수건과 세마포가 폭싹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은 마치 예수님의 몸이 투명하게 그대로 쏙 빠져 나가고 옷과 수건은 처음 감싼 모양으로 그대로 놓여져 있는 것이 정말 기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이 혹시 부활하셨는가 하고, 의심과 믿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돌아갔습니다. 물론 그 날 오후에 베드로가 혼자 있는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한 그 날 저녁에 다락방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사도 요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게 되었고 그 이후로 여전히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세상 사람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의 무덤은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의 무덤이 확실하고 거대하고 아름다운 묘석으로 꾸며져 내려오는 것과 확실하게 다릅니다. 불교의 석가모니의 뼈는 인도의 여러 군데로 흩어져 모시고 있고, 유교의 창시자 공자의 묘도 산동성에 크게 꾸며져 있고, 이슬람의 교주 마호메트의 묘도 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안치되어 해마다 수백만 이슬람의 성지 순례의 처소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종교들은 교주들이 잘 꾸며진 무덤 아래 그 뼈가 썩어 흙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무덤은 비어 있고 어디 있었는지조차 전혀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분명한 증거 중 하나인 줄 믿습니다.
셋째로, 제자들의 현저한 변화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다들 슬픔과 두려움과 낙심에 사로잡혀서 이제 다 끝났다는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마수에 잡혀서 자기들도 죽을까 겁을 내서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고 다 고향으로 내려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삼일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여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분명히 손과 발에는 대못 박힌 상처가 보이고 옆구리에 창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몸이 없는 유령이나 혼령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몸을 가지고 음식을 드시고 따뜻한 살을 가지신 분이요 미소를 가지신 분이시며 제자들에게 자상하게 말씀하시며 가르치시는 영낙없는 예수님의 동일한 인격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벽을 통과하며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시고 때로는 그 얼굴을 바로 알아볼 수 없을 만치 신비하신 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렇게 사십일 동안 그들 가운데 자주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시며 사명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보는 앞에서 구름을 타고 승천하신 후에 약속대로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오십 일 후에 성령을 받자 제자들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 확신에 찼고 담대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인 죽인 유대인 최고 종교회의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을 때에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저 이방 지역에까지 나아가서 죽기까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하여 일세기가 다 지나기 전에 사도들은 동쪽으로는 인도에게까지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이디오피아까지, 북쪽으로는 흑해 연안까지, 서쪽으로는 그리스, 로마, 서바나 곧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사도들 중에서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한결같이 겁쟁이들이었다가 갑자기 사자같이 담대해져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기꺼이 순교의 피를 흘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확실히 자기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을 자기 눈으로 보고 부활하신 주님 몸을 자기 손으로 만지고 자기 귀로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그렇게 전하다가 기꺼이 죽는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거짓이나 추측한 이야기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걸고 그것이 진리라고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 이상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도들은 전부가 그렇게 다 주님의 부활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 부활 진리를 증거하다가 사자 밥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직접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사흘만에 확실하게 영광스럽게 살아난 것을 보고 들었고 만졌기에 이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순교하기까지 증거한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의 완전하고 극적인 변화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넷째로, 사도들의 전도의 핵심 진리가 바로 죽은 자의 부활이었다는 점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전도할 때나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에 언제나 그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할 사실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에 사도 베드로의 첫 설교 중에 사도행전 2:32,33 말씀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또한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도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 3:14~16 말씀에서 이르기를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차 선교 여행 때에 그리스의 문화적 수도인 아테네 광장에서 전도 설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말을 듣고 조롱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믿고 다시 듣고자 하였노라고 사도행전 17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데네 그 유서 깊은 철학과 예술의 문화 도시에서 다른 것 전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도 바울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을 열렬하게 증거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사도행전 26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체포되어 로마 총독 베스도와 이스라엘의 헤롯 아그립바 2세와 공주 버니게와 유대의 고위 관리들 앞에서 자기를 변명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부활 사실만을 증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26:21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신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그러자 베스도 총독이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서 바울은 이렇게 즉각 대답합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개역판 성경)
그렇습니다. 온 세상이 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복음을 들으면 다들 미친 소리라고 목소리를 높여서 비방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그렇게 미친 소리를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 앞에서 자기가 지금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는 것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너무나 분명하여 절대로 숨길 수 없으며 적당히 철학적인 말로 포장할 수 없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메섹 도상에서 친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바울은 이처럼 미쳤다는 말을 들어도 왕이나 총독이나 공주 앞에서도 저돌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라고 도전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세상에 나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를 믿는 자들의 부활을 증거할 때 비방과 조롱과 박해가 자기에게 닥쳐올 것을 전혀 모를 만큼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기에 이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의 복음의 가장 중요한 모퉁잇돌이기 때문에 핍박과 조롱이 겁이 나서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차라리 아니 전한 것과 다를 바 없기에 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이 진리를 전면에 내세워 증거했던 것입니다. 주 예수의 부활 사실에 대한 믿음이 바로 사람의 구원을 좌우하는 근본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온갖 박해에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소식을 그토록 소리 높여 전하고 또 전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사도들의 복음 증거의 근본 주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진리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역사적 부활은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역사적 부활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인생관, 내세관, 사생관이 달라집니다. 그런 사람은 삶의 이유와 목적도 달라집니다. 이런 사람은 이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권력자 앞에서도 기죽지 않습니다. 눈앞의 이익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사도행전 26장에서 보여준 사도 바울의 태도입니다. 다시 한번 그 때의 장면을 생각해봅시다. 당시 사도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았던 사람이었기에, 사도는 가이사랴 감옥에서 자기를 심문하기 위하여 잘 차려 입고 모인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2세 왕과 공주 버니게와 훈장을 찬 화려한 천부장들 앞에서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비록 권력과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영혼은 가난하고 초라하여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당시 자신의 양손이 결박된 상태에 있었고 옷은 초라한 죄수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화려한 왕과 총독과 고관들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을 증거하였습니다. 베스도는 사도 바울에게 미쳤다고 소리쳤습니다. 사도는 자기가 정신 차린 말을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사도는 계속하여 전도의 초점을 아그립바 2세에게 집중합니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비록 에돔의 혈통을 갖고 있지만 유대인들의 분봉왕이기에 유대인의 종교에 조예가 있으리라고 사도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에게 신앙적인 믿음을 가지라고 계속 전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은 거절하기를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사도행전 26:28,29)
아무리 왕의 화려한 옷을 입고 공주의 옷을 입고 천부장의 훈장을 차고 있더라도 그것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 영광에 불과하고, 곧 죽게 되면 한 줌 먼지로 돌아갈 것에 불과함을 사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는 그들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영혼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량한 권력과 재물에 취하여 자신의 영혼의 가난함과 비참함을 모르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들이 가이사랴 법정에서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고 난 지 7년 후에는 유대인 1차 반란이 일어나서 로마 제국의 군대와 무서운 전쟁이 약 5년 동안 일어나서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헤롯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와 그의 군대 천부장들은 다들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나서 로마로 피신을 가거나 죽거나 하는 허망한 신세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을 때에 자기들의 세상 영광은 영원할 줄 알았을 것이지만, 그들의 그 권력은 이처럼 몇 년도 채 못가는 들꽃과 같이 허망한 것들이었던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바로 그 절호의 전도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이 말씀대로 사도 바울이 직접 부활의 주님을 만난 간증을 하면서 권면한 그 때야말로 아그립바 2세로서는 구원을 받을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이 은혜의 때를 모르고 기회를 다시 뒤로 미루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자기 앞에서 위엄과 권세로 옷 입고 교만하게 자기를 재판한다고 앉아 있지만, 조금도 기 죽지 않고 도리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를 증거하였고 그들이 결박된 것 외에 다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선언했던 것은 사도가 영적 관점에서 그들의 영적 가난함과 자신의 영적 영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담대한 태도는 그가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직접 목격한 데서 우러나온 것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세상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 어떤 권세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는 사람은 죽음까지도 겁내지 않고 진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조금도 아까와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세상 조롱을 마다하지 않고 부활의 진리를 힘써 증거하며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요 세상을 전복시키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굳건히 믿고 이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또한 사도와 같이 진리의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이 부활의 진리를 힘써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는 영광의 주님을 눈으로 직접 뵈며 그의 영광을 찬양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이 확실한 역사적 터 위에 우리의 삶을 굳게 서 있나이다. 그 어떤 세상의 요동함이 있을지라도 흔들림없이 이 믿음으로 살고 이 믿음으로 영적 싸움을 싸우며 이 믿음으로 사랑하며 살다가 이 믿음으로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이 부활의 능력과 소망이 늘 충만하여서 세상에 있는 죄와 저주와 죽음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살리는 주님의 일꾼으로 써 주옵소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