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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글,편집: 묵은지
한 나라의 임금이 버젓이 있는 궁중에 이웃나라 무장 괴한들이 함부로 난입하여 칼을 휘두르며 남의 나라 국모인 왕비를 죽이고 이에 놀란 임금은 대궐을 나와 다른 나라 공관으로 피신을 하는 이렇게 상상도 못할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진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습니다. 나약하고 어리석은 선장을 만난 불행한 선원들처럼 풍파에 만신창이가 되고도 뒷감당까지 떠안아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며 충정이라는 미명아래 소중한 내 목숨까지 초개같이 여겨야 하는 너무도 야속한 나라의 백성인 것이 애통해 저마다 내뱉은 탄식과 신음은 시커먼 재가되어 산천 곳곳에 흩날리는 한이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이때는 1890년대로 조선의 안팎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살얼음판 같은 시기였는데 특히 주변국들은 조선을 두고 자기들끼리 힘겨루기를 하며 전쟁을 하니마니하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고 안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집단적인 저항과 여러 사건이 겹치며 매우 혼란스런 상황이 펼쳐지던 때였습니다.
◀흥선 대원군.
당시 흥선 대원군은 며느리 민비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나 아들 고종과도 매우 껄끄러운 관계로 지내고 있었으며 며느리와의 앙숙 관계는 더욱 골이 깊어져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조정은 조정대로 대신들간에 세력다툼과 이전투구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지라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고 관료들도 기강이 해이해져 곳곳에서 탐관오리들의 횡포는 날로 심해지니 그야말로 전국은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수탈의 대상인 힘없는 백성들만 죽어나고 있었습니다. 1893년 전라도 고부지역(지금의 정읍일대)에 몰락한 양반가였던 전창혁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곳의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게 되어 고을마다 백성들에게 부조금을 거두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병갑은 고을의 훈장까지 지낸 사람으로서 부조금을 거두는데 협조하지 않은 전창혁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고 나중에 그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관아로 끌고와 모진 곤장질을 하였으며 전창혁은 결국 지독한 매질이 화근이 되어 골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전창혁에게는 전봉준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니 전봉준은 당시 호남에서 교세를 확장중인 동학의 지도자였으며 삼례에서 '교조신원운동(탄압으로 죽은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회복시키기 위한 운동)' 등을 벌이는 등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에 관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전봉준은 평소에 동학 정신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 탐관오리들의 악랄한 수탈 행위에 응징을 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날 졸지에 자신의 증오 대상이었던 조병갑에게 아버지를 잃었으니 그 분개한 마음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봉준은 절치부심하여 마침내 자신을 따르던 동학교도들과 그동안 수탈의 등쌀에 증오심이 가득차있던 백성들까지 한데모아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들고 일어나 고부군수 조병갑을 척살하고 세상을 향해 고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전봉준의 동상.
전봉준은 사실 동학에 입교 한지는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았으며 다만 그에게는 시대를 바꿔보려는 개혁정신과 혈기넘친 활동력으로 야심에 차 있었고 고향인 전라도 지역을 넘어 중앙 무대를 향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35세가 되던 해인 1890년, 다분히 의도적인 면도 있기는 했겠지만 한양으로 올라가 운현궁에 식객으로 머물렀는데 당시 섭정의 권좌에서 밀려난 흥선 대원군이 절치부심하며 운현궁에 기거하고 있던 중이어서 자연스럽게 그와 가까이 하며 교분을 쌓는 기회가 만들어졌습니다. 흥선 대원군 역시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넓혀 정계로 재진입하려는 생각이 굴뚝같은 처지 였던지라 과거 종교 탄압으로 교조인 최제우를 처형하는 등 자신이 핍박하고 내쳤던 동학에 새롭게 관심을 보이며 도리어 나아가서는 전봉준과 동학의 힘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 보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전봉준은 그뒤 2년여의 문 식객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잠시 서당 훈장으로 소일하다 1892년 초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접주(接主:동학에서 지역조직의 장)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전봉준은 그 과정에서도 대원군과의 접촉을 소홀히하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대원군은 지나가는 식객에 불과했던 전봉준을 극진하게 대해주어 같은 동학교도들 사이에서도 이를두고 전봉준이 대원군과 모종의 정치적인 담합이나 밀약이 있었지 않았을까라는 의심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동학 농민군이 사용한 '척왜양창의' 깃발.
처형 직전의 동학 교주 최시형▶
실제로 전봉준 자신도 사람들을 규합하면서 공공연하게 대원군이 자기들을 도와줄 것이라는 말을 하며 다녔고 이 말은 입소문을 타며 수많은 청년들이 구름떼 처럼 몰려드는 효과가 되어 그 수가 1만을 헤아릴 정도가 되었고 이들의 숙식도 이 말을 철석같이 믿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기부와 참여로 해결될 정도였습니다. 1893년 초에 이들은 다시 50여명의 대표자들로 구성하여 경복궁 앞에서 교조신원을 탄원하는 연좌 시위를 벌였는데 이것을 대원군의 반대파들은 대원군이 이들을 이용하여 아들인 고종을 왕위에서 끌어 내리고 적장손 손자인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동학 교주인 최시형 또한 전봉준이 동학 초창기에 자신들을 탄압했던 대원군을 가까이 하는 것에 매우 못마땅히 여겼으나 전봉준은 대원군이 반드시 동학농민군을 지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사발통문(격문) ▼동학 교조 최제우.
조선 땅에서도 전라도 고부 지역은 지리적 여건과 기후가 좋아 비교적 곡물 농사가 잘되고 넓은 농토로 인해 농산물의 생산량이 타지역보다 많은 지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당시 조선 최고의 곡창지대로 알려진 반면에 탐관오리들에 의한 집중적인 수탈의 지역이기도 하여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는 눈물과 고통의 지대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갖가지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내던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는 극에 달하였는데 그는 거둬들이는 세금의 명목도 다양하여 굳이 필요 하지도 않은 시설이나 알지도 못할 명목을 적용하여 사용료나 세금으로 받아 내었고 이를 거부하거나 항의를 하면 잡아다 가두거나 곤장을 쳐 기어코 받아내곤 하였습니다. 그래도 고부 지역에서는 비록 몰락한 양반가이지만 덕망과 청렴으로 존경을 받으며 살았던 전봉준의 아버지는 철저한 조병갑의 이런 착취의 술수에 걸려 죄를 뒤집어 쓰고 관아로 끌려가 혹독한 매질에 골병이 들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관군에 붙잡힌 동학 교도들.
이에 전봉준을 위시한 동학 지도부 2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이를 응징하고자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는데 순식간에 수백 명의 농민들이 모여 들었으며 이들로 조직된 농민군은 이마에 흰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로 무장하여 고부 관아로 쳐들어 갔습니다. 고부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먼저 조병갑을 붙잡아 처형하고 그동안 재물과 곡식을 쌓아 모아둔 곳간을 개방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이들은 여세를 몰아 집권층의 부패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전주 감영으로 향하였습니다. 상황이 이쯤되자 심각함을 감지한 조정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급히 신임 군수에 박원명을 임명하고 박원명으로 하여금 동학농민군을 달래는데 전력하도록 하였습니다. 박원명의 노력으로 동학농민군이 진정이 되었고 조정은 다시 안핵사(지방에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을 조사나 처리하기 위해 파견하는 관리)로 장흥부사 이용태를 임명하여 파견하였는데 우선 농민군이 요구하는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것과 내란에 참여한 농민군의 선처를 약속하여 전봉준은 일단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도진개진이라 했나요? 조정에서 안핵사로 임명하여 보낸 이용태라는 인물 역시 행실이 그다지 깔끔하지 않은 탐관오리였습니다.
▼백산에서 동학군이 발표한 4대 강령 ▲1894년 12월 순창에서 체포되어 교자위에 포박된채 한성부로 압송되는 전봉준
가재는 게편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용태는 동학군이 잠잠해지자 즉각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는데 일단 모든 사건의 책임을 농민군에게 전가하더니 연일 가담자를 색출해 내어 무자비한 탄압과 처벌을 강행하였으며 자신과 같은 탐관오리들의 역성을 드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전봉준과 측근들은 매우 분노하여 다시 봉기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고 백산에서 '4대 강령'과 함께 이 기회에 썩어빠진 조정의 정치 제도와 백성들을 괴롭혀온 신분제도의 타파 등 모순 투성이인 사회를 개혁하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또한 동학 사상인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보국안민의 정신을 펼쳐나가자는 결의를 하였으니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불같이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탐관오리들에 대한 응징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로까지 개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동학농민군들의 개혁안과 요구사항 등이 담긴 폐정개혁의 요구는 농민들의 기세와 함께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대규모 농민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일이 눈덩이처럼 커지게 되자 다급해진 조정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관군을 이끌고 이들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동학농민군 ▼양호초토사 홍계훈과 전봉준이 맺은 전주 화약
동학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본격적으로 맞붙으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 그리고 전주성의 함락까지 사기가 오른 동학농민군은 연일 승전보를 알리며 승승장구 하였고 당황한 조정은 청나라에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 파병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청군이 파병을 하자 갑신정변 이후 체결된 이른바 텐진조약을 들먹이며 일본군이 전격적으로 제물포에 상륙하였고 이에 놀란 조정은 황급히 동학농민군과 전주화약을 맺어 모두 해산시키고 동학농민군으로 하여금 전라도 지역에 집강소를 세워 농민 자치기구로서 민생안정을 꾀하도록 하였습니다. 조정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에게 철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본시부터 꿍꿍이가 있었던 일본은 당연히 이를 거부하고 일본군은 한발더 나아가 경복궁을 점령한 후 고종에게 압력을 넣어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강요하였는데 이 사실을 알게된 청나라가 가만있을리 만무하니 결국 조선이라는 허약한 나라를 놓고 서로 자기들이 먼저 차지하겠다는 욕심을 보인 끝에 전쟁으로 치달아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기세가 등등해진 일본은 친일 세력에 의해 추진하던 갑오개혁과 맞물리면서 조선에 대한 노골적인 내정 간섭을 하였는데 이에 다시 동학군은 일본을 쫒아내기 위한 결의로 2차 봉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봉준 ▲항일 의병들
여태까지의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던 목적과 투쟁 방향이 부패의 척결과 사회 개혁을 위한 투쟁 운동이었다면 다시 일어난 2차 봉기는 항일 투쟁이 그 핵심이었으며 특히 대원군의 복위를 도모하고 조정의 친일 세력들과 외세를 모두 몰아내는 것에 대한 혁명으로 그 성격과 차원이 많이 달랐습니다. 동학 교주이자 북접을 이끌고 있는 최시형은 그동안 남접의 전봉준이 대원군과 가까이 하며 본래의 순수한 농민운동의 목적과는 달리 정치적인 방향으로 거병한 것을 탐탁치않게 여기고 있었으며 수시로 전봉준을 비판하며 동학농민군의 활동에도 협조를 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군과 관군이 동학과 동학농민군을 압박해 오면서 위기감이 커지게 되자 최시형은 전봉준의 무장투쟁 노선에 동참하며 북접을 혁명군에 합세 시켰습니다. 이로써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과 최시형,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이 세력을 합치니 숫적으로도 무려 20만을 넘어섰으며 그 방대한 규모에 사기는 실로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지경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조선인들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목적으로 공개 처형시킨 의병들. 전봉준의 遺詩▼
그러나 그 충천하던 사기는 잠시,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는 동학농민군은 아무리 숫적으로 우세하다고는 하지만 훈련은 커녕 농기구나 구식 총기로 싸워야 하는 농민군으로서는 큰 부담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그 부담감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니 음력 9월부터 시작된 공주 전투에서의 패배와 이천, 목천 등지에서 연이은 패배는 물론 11월에 금구 전투와 태인에서의 전투까지 패하면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다니기 급급하는 농민군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전봉준을 도피자로 만들었습니다. 전봉준은 몇몇의 수행인들과 함께 정읍의 입암산성과 내장산 백양사를 거쳐 순창으로 피신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옛부하와 동학농민군에 반감을 가진 주민들의 고변으로 1894년 12월 말경에 결국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의금부로 압송된 전봉준은 무수한 고문이 가해지기 시작했는데 주된 이유는 흥선 대원군과의 내통에 관한 것이었으며 끝내 자백을 얻지 못하자 일본 영사관으로 옮겨 그곳에 설치된 고문실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수없이 고문을 당하다 음력 3월 30일에 의금부로 옮겨져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가렴주구(苛매울가 斂거둘렴 誅벨주 求구할구), 고대 중국 유교 5경 가운데 하나인 예기에서 나온 구절로 노나라 조정이 백성을 상대로 각종 세금의 명목으로 수탈과 가혹 행위를 일삼았다 해서 나온 말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조선왕조가 수명이 거의 끝나 이름만 대한제국으로 바꿔 근근히 버티다가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아 일본의 먹잇감이 되어야 했던 역사도 가슴 쓰리지만 그런 몰락의 과정에서 애꿋게 당하기만한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다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교적 사상의 조선 사회가 그동안 인륜의 명분에 대한 가르침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겹도록 이어진 내우외환을 겪는 과정에서 사회 전반적인 빈곤으로 선비의 정신과 양심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절박한 생존의식 속에 현실적인 위기감마저 들게 되니 그나마 유지되던 유교 사회의 정신마저 흐려져 버렸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틈타 권력을 휘두르는 가진 자의 착취와 횡포가 점점 노골화 되어 갔고 약탈과 삶의 황폐화로 원성이 극에 달한 백성들은 빈번한 민란을 일으키며 맞서야 했는데 전봉준 역시 착취와 수탈에 지친 백성들과 함께 탐관오리들을 응징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뜻으로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가렴주구에 맞서 싸웠던 것입니다.
※동학농민군의 그 뒷 이야기
전봉준을 위시한 김개남 등 지도자들의 연이은 체포와 사망으로 기반을 잃은 동학농민군은 접주급 지도자 25명이 다시 모여 마지막 결사항쟁을 결의하고 산세가 험난한 대둔산 정상부에 요새를 정하고 1894년 12월 중순부터 대략 석달간 신식 병기로 중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1895년 2월 18일을 마지막으로 포로로 붙잡힌 나이 어린 소년 1명을 제외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심지어는 갓난 아기까지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 이로써 동학의 항일 투쟁은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