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후반기를 거쳐서 멸망 이후에 중세 시대가 시작이 되는데, 이때부터가 가장 유태인들이 박해를 받은 시기가 시작이 된다. 그것은 같은 유태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좀 더 혁신적인 기독교의 시대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기독교가 처음 나올 때는 유태교와 같이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유태교의 한 파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유태교 사제는 기독교를 추방하였다. 그때만 해도 그곳에서는 역사가 짧은 기독교에 비해 유태교가 갑이었던 시대이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신자들에게는 예수가 로마의 박해에서 해방할 메시아이었지만 정작 유태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태교의 선민사상을 없앴고 또 똑똑한 제자들이 있었기에 폐쇄적안 유태교보다도 훨씬 많이 퍼질 수 있게 되었다.
로마 시대에 콘스탄티누스나 테오도시우스 등의 황제에 의해 기독교는 공인을 받고 심지어 국교로 까지 되자 유태교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는 시작이 되었다.
로마 시대를 이어 중세 시대는 어떤 천재지변이 생길 때마다 특정 상대를 타킷으로 박해를 가하는 사태는 항상 일어나는데 그때를 지배하던 중세 시대의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유태인은 예수를 죽였다는 명목으로 항상 손쉬운 가해 상대로 택하였다.
예수도 같은 유태인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논리이기는 하였다.
기독교도( 기독교이지만 당시에는 종교 개혁 이전이라 가톨릭과 정교밖에 없었다 )들에 의해 유태인은 유럽에서 농지도 가질수가 없었고 조합(길드)에도 가입도 불허不許가 되었기에 농업이나 상공업에도 종사할 수 없었다. 결국 이런 판국이니 유태인들은 대부업貸付業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수 밖에 없었다. 가톨릭의 해석에는 돈에 이자를 받는다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물론 모든 기독교라 해서 대부업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유태인들을 고리대금업이라는 등식을 갖다 붙이지만, 유태인만 대부업을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리高利란 딱지를 붙였다. 오늘 날이라면 그냥 금융업이다.
사실 고리대금업은 일반 기독교가 더했다.
오히려 유태인은 몸조심을 하여야 하였기에 일반 기독교도들보다도 더욱 신용을 지켰고 이율이나 원금 상환에 대해 훨씬 너그러웠다.
더 악질적인 일반 기독교에 비해(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의 “ 푸거 가문 ”이 이런 점에서 유명하다 )신용을 비교적 잘지키고, 너그러운 유태인들이 대부업에 장기적으로 보면 점점 두각을 나타낼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중부 유럽에서는 유태인들이 살기가 몹시 힘들었지만, 유럽의 중심지를 벗어나서 기독교를 엄격하게 지키지는 아니하는 나름대로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 몇 군데 존재했었다.
당시는 문화적으로 기독 세계인 유럽보다도 이슬람 세계가 문화나 경제력의 수준이 높았는데 이슬람의 교리에는 “ 종교에는 강요가 없느니라 ”란 구절이 있어 기독교에 비해 개종에 강제성이 거의 없었다. 세금에서만 약간 차별이 있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달리 유태교에 대한 박해가 미미했다. 물론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권력을 쥔 지도자가 근본주의에 가까우면 박해를 받고 너그러우면 유태교는 살아났다.
원래 미즈라힘이 존재하는 중동 이외에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는 거의 800년간 이슬람이 지배했는데 그곳에서 유태인들은 정착을 많이 하여 번창할 수 있었다. 유태인은 특히 계산에 밝았기 때문에 상업이나 무역 등에 특히 두각을 나타내었기에 유태인이 정착하는 곳은 경제가 부흥했었다.
즉 상업이나 무역은 계산에 밝고 정보가 있어야 한다. 유태인은 학문을 하여 계산을 하여 타국이라도 유태인 공동체끼리 정보 교환이 있어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황영조가 금메달을 딴 바르셀로나의 몬쥬익 언덕의 몬 쥬익은 그대로 유태인의 산이란 뜻이니 얼마나 유태인이 많이 살았는지 알 수가 있다. 이 이베리아 반도의 유태인이 이른바 “ 세파르딤 ”의 시조라고 할 수가 있다. 이때 나타난 유태인 중에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 이른바 “ 마이모네데스 ”란 인물이다.
또 한쪽 유럽의 동쪽에서는 폴란드의 전성 시절이라 할 수 있는 야기에우워라 왕조 시절은 타 종교에 너그러웠기에 수많은 유태인들이 몰려와서 유럽에서 가장 밀집도가 높은 곳이 되었다.
이 유태인들이 이른바 아슈케나짐의 원조라 할 수가 있다.
오늘 날에도 미국 같은 곳에서 유태인인데 이름 끝에 스키가 붙으면 거의 폴란드 출신으로 보면 된다.
아슈케나짐이 동부 유럽의 폴란드, 체코 등 출신이 많은데 이름은 독일식으로 된 경우 많다. 이것은 그 부근이 자주 지배자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독일어 계통의 지배( 예컨대 프로이센이나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가 지배하면 그런 식으로 이름이 바뀌고 슬라브 계통이 독립을 하면 슬라브어에 많이 쓰는 이름으로 변하게 된다.
witpo
마이모네데스
마이모네데스란 이름은 이븐 루시드 등과 함께 상당히 낯설 것이다. 마이모네데스란 이름은 유럽의 영어식 이름이고 정확하게는 “ 모세 벤 마이몬 ”이다. 이븐 루시드도 이름이 영어식으로 “ 아베로에스 ”로 알려져 있다. 둘 다 현재 스페인의 남부인 당시 이슬람 지배하에 있었던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유태교나 이슬람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의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는 이베리아 반도에는 근본주의자 알모하드(Almohad)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종교적 탄압이 심하여 방랑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둘 다 실용적인 의학 지식을 익혀 지배층의 주치의로 생활한 것도 비교적 공통이다.
그들은 고대 희랍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연관이 있는 것도 닮았다.
신앙을 이성을 통한 합리적인 해석의 시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기존의 신학자들에 의해 반발을 샀지만 이것은 나중에 중세 철학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