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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산을 향하여
곱닿게 다 있는 것 잃은 줄만 여겼어라
헤매고 찾던 일이 하도 아니 웃기는가
이 앞에 널리신 것이 다 ‘그’실 줄 알리오.
가녀린 제 재주는 임의 앞에 떠올 뿐을
열두 겹 깊은 저 속 보고 그려 못내 오매
내 손에 단 데 없음을 화 안 낼 수 없어라.
――― 최남선, 『백두산 근참기』에서
▶ 산행일시 : 2015년 1월 10일(토), 맑음
▶ 산행인원 : 12명(영희언니, 버들, 모닥불, 다훤, 악수, 대간거사, 한계령, 챔프, 온내, 해마,
해피, 무불)
▶ 산행시간 : 12시간 26분
▶ 산행거리 : 도상 14.3㎞
▶ 교 통 편 : 두메 님 25인승 버스
▶ 구간별 시간
03 : 31 – 동서울터미널 출발
03 : 30 ~ 04 : 30 –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竹川里) 원통사교 도착, 산행시작
05 : 27 – 880m봉, 국유지경계석
06 : 16 – 망봉(望峰, △1,046.5m), 헬기장
07 : 00 – 1,109m봉
09 : 46 – 덕유주릉, 1,428m봉
10 : 20 – 무룡산(舞龍山, △1,491.9m)
11 : 00 ~ 11 : 48 – 삿갓재 대피소, 점심
12 : 10 – 삿갓봉(1,419m), ┣자 능선 분기
12 : 50 – 1,259m봉
13 : 28 – 1,278m봉
15 : 50 – 시루봉 동봉(1,154m), ┣자 능선 분기
16 : 47 – 임도
16 : 56 – 원통사 입구
1. 남덕유산의 위용, 왼쪽은 동봉, 오른쪽은 서봉, 앞 가운데는 삿갓봉
▶ 망봉(望峰, △1,046.5m)
<장면 #1>
1950년 6월 30일 인류 최초로 8000미터가 넘는 고봉으로 안나푸르나(Annapurna, 8,091m)
를 오른 프랑스의 저명한 등반가인 모리스 에르조그(Maurice Herzog, 1919~2012)는 안나
푸르나 하산 중에 배낭을 풀어헤치다 실수로 장갑을 떨어뜨려 잃고 말았는데 이게 큰 사고였
다. 장갑을 끼지 못한 두 손은 동상에 걸렸고 열 손가락 모두 잘라내야 했다.
한계령 님이 스패츠를 배낭에 넣어 둔 것을 착각하고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퍽 다행스럽
게도 동서울에서 출발하려 할 때 알아챘다. 겨울철 등산장비는 사소한 것이 없다. 겨울철에 스
패츠 없이 (특히 눈이 많은) 덕유산을 오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우리 차는 중부고속도
로 타기 전에 한계령 님 스패츠 가지러 덕소 집을 들렸다.
<장면 #2>
명천호 아래 망봉 들머리에 도착하고 차안에서 산행 채비하는데 온내 님이 미리 얼굴에 선크
림을 바르는 것을 해피 님이 곁에서 지켜보다 궁금증이 일어 한마디 한다. “아니 밤에도 얼굴
이 타나요?” 이때가 새벽 4시 약간 넘었다. 온내 님 왈, “햇빛뿐만 아니라 달빛에도 타는지 모
르나요.” 섣달 스무날 달은 이지러졌지만 무척 밝다.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했다. 특작부대처럼
눈밭을 누빌 것이어서 투입되기 전에 위장한다고.
* * *
차는 명천호(明天湖) 아래 원통사교(지도에는 ‘원통교’라고 표시되어 있다) 앞에 멈춘다. 주섬
주섬 산행채비 갖추고 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싸한 대기를 한 움큼 들여 마시니 졸음이 대번에
달아난다. 스무날 달은 내가 자는 중에도 저렇게 밝았다. 지도 보고 시커먼 산 모퉁이로 가서
냅다 잡목 숲 뚫는다. 잡목들 곤한 잠을 깨웠다. 얼굴 할퀴고 팔 붙잡고 다리 걸고 배낭 낚아채
려 하고 야단이다.
아직 눈은 없지만 간벌한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 있어 초장부터 심설 러셀 못지않게 힘들다. 사
면 한참 쓸다보니 발에 산등성이 걸리고 인적이 보인다. 잰걸음 한다. 내 걸음에 이는 바람이
살에는 듯 차다. 눈앞이 뿌예 안개인가 여겼는데 입김이다. 하늘에는 별들이 천계 성단을 이루
고, 명천 마을에는 가로등이 인간계 성단을 이루고, 산등성이에는 우리들 헤드램프가 중간계
(中間界) 성단이다.
직등한 880m 고지에 국유지경계석이 삼각점마냥 있다. 왼쪽으로 방향 틀어 잠깐 내렸다가 가
파르고 길게 오르기 시작한다. 눈은 옅게 분칠한 수준이다. 그나마 응달져 쌓인 데는 딴딴하게
얼었다. 그렇지만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2012년 1월 28일 설악산 안산-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으랴-에서도 처음에는 이랬다.
바위 슬랩이 나온다. 바위틈 더듬어 올라서고 오른쪽 좁은 테라스로 트래버스 하여 바윗길을
지난다. 망봉이다. 삼각점 안내판 다는 폴이 남아 있어 사방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망봉(望
峰)임을 확신한다.
2. 망봉 정상 약간 내린 헬기장에서 잠시 휴식
3. 덕유산의 아침, 가운데에서 왼쪽이 향적봉이다
4. 덕유산의 아침
5. 덕유주릉
6. 앞 오른쪽이 삿갓봉
7. 오른쪽이 남덕유산 서봉, 왼쪽이 동봉, 그 앞이 삿갓봉
8. 덕유주릉의 서쪽 사면
9. 덕유주릉의 아침
10. 덕유주릉 가는 길에서
11. 덕유주릉 백암봉
12. 무룡산
13. 눈길, 눈은 무릎을 넘는다. 맨 앞은 대간거사 님, 그 뒤는 해피 님
14. 눈꽃, 뒤는 무룡산
▶ 무룡산(舞龍山, △1,491.9m)
망봉 정상을 약간 지나면 너른 헬기장이 나온다. 첫 휴식한다. 캄캄한 중에도 눈에 힘주니 반
공까지 솟은 향적봉이 희미하게 보인다. 원통사(圓通寺)가 이 망봉 중턱에 있어 염불소리가 들
릴 법한데 조용하다. 우리가 도(道, 곧 길이다) 닦는다. 망봉 내린 Y자 갈림길에서 왼쪽이 능선
마루다. 대간거사 님이 척후하여 살핀다. 망봉 이름값으로 뚝 떨어졌다가 1,109m봉을 대차게
오른다.
1,109m봉 내린 안부에서부터 눈길이다. 눈이 얼어서 처음에는 그 위로 동동 걸음하였으나 이
내 눈이 깊어지고 선두 한 사람 발자국으로 여러 사람이 가자니 진행속도가 자연 더뎌진다. 능
선마루에는 눈이 바람에 쓸려 모였고, 사면은 내린 그대로 고스란히 쌓였다. 차라리 산죽 삐죽
솟은 데 골라 허우적대다 슬랩 오른다.
설원. 눈은 무릎을 넘는다. 부실한 눈이 아니라 얼고 켜켜이 쌓인 눈이라 발걸음 떼기가 용이
하지 않다. 발을 꼬박 치켜 올려야 한다. 불과 저 앞이 아득하다. 겨울 산은 오로지 맨 앞장서
서 눈길을 뚫는 자의 것이다.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은 아무리 바짝 따른다고 하더라도 겨울 산
을 제대로 느끼기조차 어렵다. 대간거사 님의 독보적인 맹활약-실은 된 고역이다-은 안쓰럽
기까지 하다.
메아리 대장님과 상고대 님, 신가이버 님의 오늘 산행 빈자리가 유난히 크다. 주력(酒力) 보충
할 과메기 안주한 탁주와 먹거리부터 딸리고(탁주는 내가 한 병 가져간 것이 고작이었다), 무
엇보다 눈길 러셀에서 아쉬웠다. 그들이 왔더라면 나는 러셀을 천신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산
행 후에는 더덕 잔챙이 포함한 세 수 도강주(渡江酒)를 마셔야 했다.
마침내 덕유주릉에 아침 첫 햇살이 장막을 걷어내고 눈부신 신세계를 연다. 마음이 다급해진
다. 어서 가자하고 채근한다. 점입가경은 이런 때를 일컫는 말이다. 눈 한번 깜박일 때마다 설
경이 다르다. 봉봉 올라 향적봉 백암봉 살피랴 무룡산 남덕유 살피랴 바쁘다. 설국에 든다. 나
뭇가지 건들면 눈꽃이 우수수 떨어진다. 햇빛에 반사되는 그 모습이라니, 찰라지만 망막 잔영
까지 합하여 긴 시간이다.
오늘 지나면 앞으로 어떤 설경이 눈에 찰까 벌써 걱정이다. 덕유주릉 1,428m봉에 오른다. 사
방 가경이 펼쳐진다. 육당의 『백두산 근참기』 한 대목이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내 귀는 왜 이리 멍청이이며, 눈은 화경같이 밝아지는 대로 혀는 장작개비처럼 굳어
져감이 어인 일인가? 무엇인지를 보고 느끼고 그리하여 이름 짓고 그려내고 전하게 할 양으로
왔던 길이 아닌가. 그런데 보지 않는 것이 아니요, 느낌 없는 아니건마는, 내 마음과 그것을 울
려내야 할 목청은 어찌 이리 뻣뻣하고 꺽꺽하고 딱딱하기만 한가? 온갖 것을 다 보았다 그러
나 하나만도 일컫지 못한다. (…)다만 스스로 망연할 따름이다.”
이렇듯 화려한 설국을 이룩한 눈 내리는 모습이 그립다.
이식(李植(1584~1647)이 본 「눈(雪)」이었을까?
구구하게 염서의 시 읊어 본다만 區區賦鹽絮
기막힌 이 자연 현상 표현도 못하겠다 未可語天機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염서(鹽絮)였을까?
눈을 대해 높이 읊음은 깊은 뜻이 있으니 高吟對雪有深意
염서 은배는 아름다움만 겨룰 뿐이었네 鹽絮銀杯徒爭姸
염서(鹽絮)는 눈이 내리는 것을 묘사한 말로 진(晉)나라 때 사안(謝安)이 일찍이 자기 집안의
자질(子姪)들과 모여 앉았을 적에 갑자기 눈이 펄펄 내리므로, 사안이 자질들에게 눈 내리는
모양이 무엇과 같으냐고 묻자, 조카인 사랑(謝郞)은 말하기를 “공중에서 소금을 뿌린다고 비
길 만합니다.(撒鹽空中差可擬)” 하니, 질녀(姪女)인 사도온(謝道韞)은 말하기를 “버들개지가
바람에 일어난다기보다 못합니다(未若柳絮因風起)”하므로 사안이 매우 기뻐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방 둘러보다 황망히 무룡산을 향한다. 덕유주릉은 눈길이 훤히 뚫렸다. 이런 길도 간다. 군
데군데 빙판인 바위 밑을 살금살금 지나고는 줄달음한다. 무룡산 오르는 데크계단은 눈으로
덮여 골라진 경사로다. 무룡산 정상도 천하제일의 경점이다. 지리주릉이 하늘금 장릉이다.
15. 남덕유산
16. 무룡산
17. 덕유주릉에서 남동쪽 조망, 멀리 왼쪽은 두무산, 오도산, 숙성산, 그 앞은 금귀산, 박유산
18. 덕유주릉에서 남남동쪽 조망
19. 덕유주릉, 끄트머리가 향적봉
20. 덕유주릉, 무룡산
21. 동엽령 가기 전 1,433m봉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비킨 1,381m봉
22. 앞 왼쪽은 무룡산, 멀리는 남덕유산
23. 무룡산 정상에서
24. 덕유주릉, 끄트머리가 향적봉
25. 무룡산 내리는 중, 멀리는 지리산 주릉, 그 왼쪽 앞은 황매산
26. 무룡산 내리는 길에서, 멀리 가운데는 지리산 천왕봉
27. 남덕유산
▶ 삿갓봉(1,419m), 시루봉 동봉(1,154m)
장쾌 무비한 덕유주릉을 우리 오지산행이 차지한다. 삿갓재 대피소 가는 길이 천상의 길이다.
산첩첩 지리주릉에 이르기까지 보고 또 본다. 삿갓봉을 발걸음 줌인으로 클로즈업한다. 삿갓
봉을 태산준봉으로 일구고서 삿갓재 대피소다. 양광 따스한 야외탁자에 둘러 앉아 점심밥 먹
는다. 평소에 깨작였던 추어탕과 매생이국이 산중일미다. 겨울여자 버들 님과 지리남북종주를
위해 동계훈련 중(?)인 다훤 님이 준비해왔다.
삿갓봉 오르는 길이 되다. 가파르기도 하거니와 잔뜩 부른 배를 안고 가자니 그렇다. 아이젠을
매지 않아 자꾸 뒤로 미끄러진다. 이때만큼은 오뉴월 땀 뺀다. 삿갓봉 북서릉은 삿갓봉 정상
약간 못미처서 오른쪽으로 분기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1급 슬로프다. 눈 또한 깊어 선뜻 앞장
서기 겁난다. 챔프 님이 눈길 뚫는다. 인간 그레이더다.
봉봉 오르내리는 굴곡이 심하다. 암봉인 1,259m봉에 올라 발돋움하여 무룡산과 남덕유산 얼
른 바라보고 발걸음 재촉한다. 번번이 눈 깊은 능선마루를 비켜 사면으로 가자니 산죽이나 잡
목의 거센 저항에 부딪치곤 한다. 산죽 숲 헤쳐 오른 1,278m봉은 사방이 훤히 트여 전망이 아
주 좋다. 1,278m봉 넘으면 눈의 기세가 꺾일 줄 알았는데 조금도 변함없이 기세등등하다.
1,278m봉 다음 봉에서 군계인 오른쪽 방향(북쪽)으로 틀어야 하는 것을 무심코 직진하였다가
북사면 눈밭을 된통 누빈다. 어느덧 햇살도 힘을 잃었다. 챔프 님은 오늘 처음 데리고 온 무불
님의 컨디션을 고려하여 탈출을 생각하도록 권했지만 골은 과거의 사례를 들추어볼 때 그야말
로 골로 갈 게 뻔하여 시루봉 근처에서 지능선을 붙드는 수밖에 없다.
안부. 허기지고 지친다. 비상식량 꺼낸다. 물렁한 고구마 오물거려 삼키는 데도 힘이 든다. 시
루봉 동봉(1,154m)까지 고도 150m를 올라야 한다. 스퍼트 낸다. 설산 관망도 시들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게 시급하고 긴요하다. 시루봉 동봉 정상을 오르지 않고 오른쪽 사면으로
돌아 넘는 길이 있다. 큰 부조다. 시루봉, 명천안산, 사세 부득이 하여 다 놓아준다.
그리고 동진. 통통하게 살 붙은 능선이다. 우람한 소나무 숲길, 나이프 릿지 닮은 데도 지난다.
긴 내리막 눈길을 순식간에 지쳐 임도에 다다르고 곧 명천호 위 원통사 입구다. 두메 님은 빙
판인 이곳까지 차 몰고 올라왔다. 득의의 하이파이브로 무사산행을 자축한다.
28. 멀리는 지리산 주릉, 앞 고갯마루는 남령
29. 무룡산 내리는 길에서
30. 무룡산 서쪽 사면
31. 삿갓봉
32. 무룡산
33. 삿갓봉 북서릉, 멀리 가운데 왼쪽이 시루봉
34. 삿갓봉 북서릉, 앞은 1,278m봉
35. 무룡산
36. 향적봉
37. 오른쪽이 무룡산
38. 삿갓봉 북서릉 1,278봉에서
39. 멀리는 향적봉, 앞 왼쪽 산중턱에 원통사가 보이고 그 왼쪽 봉우리가 망봉이다
40. 산행로(영진지도)
첫댓글 멋진 덕유 설경 사진에 맛갈나는 산행기 많이 즐겼습니다.
수고하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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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눈이 많이 있진 않았내요
휴
다행입니다 많았으면 엄청 서운했을탠데
덕유주능상에 빛나던 황금빛 햇살만으로도 다른 모든 고생을 보삼하고도 남는 선물이었다고 봅니다.
무사히 내려온 것으로 만족합니다.
고생들 많으셨네요^^ 인간 그레이더 챔프님과 대간거사 총대장님 러셀 하시느라 고생한 흔적이 역역하네요,,,해피님도 힘을 많이 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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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