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들어 다소 뜬금없는 우크라이나 측의 주장으로 시작된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설이 국내에서는 불가역적(不可逆的)인 진실로 굳어진 상태다. 하지만, 국제 정세에 관한 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정보의 신(神)격인 미국은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우크라이나 측의 주장→서방 외신의 보도→김용현 국방장관의 사실상 확인→젤렌스키 대통령 등 우크라이나 측의 구체적인 파병 주장→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의 자료 제공및 확인→우크라이나 측의 추가 증거 사진(영상) 제시 순으로 이어지면서,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됐다. 전체 흐름을 보면 러시아 군사력 증강에 예민한 우크라이나와 북한의 대(對)러 군사협력 움직임을 주시해온 우리나라가 서로 핵심 정보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 건' 한 듯한 느낌이다.
북한군의 모습/사진출처:스트라나.ua
하지만, 북한 동향에 관한 한 지금까지 거의 미국, 일본과 기밀 정보를 공유하고, 또 견제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어쩐지 낯선 장면이다. 정보자산의 노출 위험을 무릅쓴 국정원의 자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확인되지 않는다는 미국측 태도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정황 증거들
북한군의 파병을 입증하는 증거는 크게 우크라이나 측 주장과 여상, 그리고 국정원 제공 자료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17일 유럽 평의회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가입과 제2차 평화정상회담 개최 등 화급한 현안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을 문제삼았다. 그는 “북한이 러시아를 돕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병력 파견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며 “나는 이에 대해 미국과 주요 파트너들에게 이야기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정보 파트의 일방적인 주장을 일부 서방 외신이 인용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 악수를 나누는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그는 또 마르크 뤼터 나토(NATO) 사무총장과 가진 공동 브리핑에서 "북한이 우크라이나로 파병할 병력 1만 명을 준비했다"며 "서방 동맹국들도 이에 대응해 우크라이나군을 대체할 수 있도록 병력 파견 등 준비 태세를 갖출 것"을 촉구했다. 그는 "모든 국가에게 보내는 우리의 메시지는 여단(급 규모의 병력)을 준비하라는 것"이라며 "그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예비 병력이 될 수도 있고, 지친 우리 병사들을 대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크라니아군 정보총국(GUR)의 키릴 부다노프 국장은 이날 "약 1만1,000명의 북한군이 훈련을 마치고 이르면 11월 1일부터 우크라이나와 싸울 준비가 될 것"이라며 "러시아 무기로 무장한 2,600명의 북한군이 처음으로 (우크라이나가 점령한 러시아의) 쿠르스크 지역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정원의 적극 대응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확증(確證)은 우리의 국정원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국내 언론계는 북한 관련 기사의 '팩트 체크'는 주로 국정원에 의존해 왔다. 외신이 아닌 국내 특정 언론이 북한 정세와 관련해 놀라운(?) 특종 보도를 하더라도, 국정원이 확인해주지 없으면 사실상 무시하는 게 관례였다. 그런 국정원이 직접 나서서 몇 장의 위성 사진과 함께 보도자료를 제공하니, 언론으로서는 믿을 수밖에 없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은 18일 ‘북한 특수부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참전 확인 보도’라는 제목의 자료를 내고 북한군 파병 사실을 확인하면서 수송 방법과 투입 지역, 부대까지 특정했다. 특수부대 등 4개 여단 1만2,000명을 러시아에 파병하기로 했으며, 이 중 1,500명의 파병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자료는 또 "선발대 성격의 북한군이 현재 러시아 군부대에 주둔 중이며, 적응 훈련을 마치는 대로 전선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북한군은 러시아의 함정을 타고 이동하고 있다"고도 했다.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이 제공한 증거용 위성사진 3장 중 2장은 사진 하단에 유럽 위성사진 민간업체 에어버스의 출처가 표기돼 있다. 나머지 1장의 사진에는 출처가 없었다. 청진항에서 북한 병력을 태우고 러시아로 떠나는 러시아 함정이 찍힌 흑백 위성사진이다. 소식통은 "출처가 표기 안된 위성사진은 우리의 인공위성으로 촬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국정원은 또 전투에 투입된 북한산 미사일 ‘KN-23’의 전문가로 활약 중인 북한군 추정 인물의 사진을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확보해 제시했다. 국정원은 AI 안면 인식 기술을 활용해 이 인물이 작년 8월 2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술미사일 생산공장 방문을 수행한 북한군 미사일 기술자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했다.
사진의 상단과 하단에는 영어로 기밀 표시와 함께 미국과 한국에만 배포된다고 적혀 있다. 한국과 미국에만 은밀하게 제공한 기밀 자료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국정원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 미사일 기술자들은 북한제 미사일 발사를 지원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기술적 문제점을 확인하는 한편, 추가 기술 확보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드디어 러시아 현장 영상까지..
국정원의 이같은 주장을 추가로 뒷받침할 만한 영상들도 우크라이나 측에 의해 공개됐다.
국정원 발표 이튿날인 19일 미 CNN방송은 우크라이나 전략소통·정보보안센터(SPRAVDI)를 통해 입수한 자료라며 러시아 파병 북한 군인들에게 지급할 군복과 군화 등 보급품의 사이즈를 파악하기 위한 한글 설문지를 공개했다. 이 설문지는 우크라이나 SPRAVDI의 공식 텔레그램에도 올라와 있다. SPRAVDI는 러시아 측의 프로파간다(선전 선동)에 맞서는 기구로 파악된다. '가짜뉴스'라고 규정한 콘텐츠도 사이트와 SNS에 올리고 있다.
텔레그램 캡처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설문지에는 러시아어와 한글로 "모자 크기(둘레), 체복/군복 치수와 구두 문서를 작성해 주세요"라고 쓰여 있다. 다만, '여름용'이라고 적혀 있어 그 시점이 좀 의아하다.
옷의 치수(사이즈)를 나타내는 러시아와 북한의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에 설문지에는 '러시아씩(우리 식으로는 러시아식) 군복의 치수(키와 관련)'라는 항목에 '2, 3, 4, 5, 6' 등의 숫자가 적혀 있고, 해당 치수에 맞는 신장이 '162-168', '168-174' 등으로 설명돼 있다. '조선씩 크기'라는 항목은 빈칸으로 남겨져 있다.
이 자료를 CNN에 제공한 우크라이나 SPRAVDI는 이에 앞서 연해주 세르기예프스키 훈련소로 보이는 장소에서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동양계 군인들이 러시아군으로 추정되는 군인으로부터 각종 물품을 배급받는 모습을 담은 영상도 공개했다. 이 영상에는 북한 억양으로 "나오라 야"와 같은 음성도 확인된다.
북한군 병사들로 추정되는 군인들에게 보급품을 배포하는 장면/텔레그램 영상 캡처
철조망이 처진 부대 안에서 군인들이 줄지어 이동하고 있다
정문쪽에서 군인들이 끊임없이 부대안으로 들어오고 있다/영상 캡처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텔레그램 채널 '파이터봄버'(Fighterbomber)은 러시아로 파병된 북한 군인들로 보이는 병사들이 부대 안으로 들어가는 영상을 올렸다. 미국 매체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영상속 군인의 군복에 러시아 동부군관구의 부대 상징이 부착돼 있으며, 촬영된 장소는 연해주 세르기예프스키 훈련소로 보인다는 전문가의 분석을 소개했다. 해석하면 북한군 추정 병사들이 러시아군으로 변장했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누구나 북한의 러시아 파병을 믿을 것 같다. 하지만, 미국과 나토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왜?
주요 7개국(G7) 국방장관 회의에 참석한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19일 '북한이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하는 러시아에 파병한 게 사실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직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그는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사실이라면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미 백악관과 국무부 등도 “보도가 정확한지 확인할 수 없다”면서 "사실이라면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라는 입장이다.
그동안 한·미 정보당국이 군사위성 등으로 북한군 움직임을 감시하고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등 긴밀하게 정보 공조를 해온 것을 고려하면, 미국의 이같은 반응은 이례적이다. 지난해 북-러 정상회담을 전후해 북한이 러시아에 포탄을 제공하기로 했다는 정보를 선제 공개하며, 강한 경계의 목소리를 낸 미국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우크라이나의 주장과 국정원 자료, SPRAVDI의 북한군 관련 영상 등을 못 믿는다는 건 절대 아닐 것이다. 북한군의 파병설이 처음 제기된 곳이기 때문에 더욱 철저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확인 발표 시점을 내부적으로 고려 중일 수도 있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여부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우크라이나나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미국 측 입장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 그래도 남는 의문점은?
다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파병설이 나온 시점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달 말부터 미국과 유럽을 잇달아 순방하면서 '승리 플랜'과 '제2차 평화정상회의'와 같은 자신의 종전 프로그램을 홍보해왔다. 결과는 신통찮다는 게 외신들의 평가. 자칫하면 우크라이나가 서방 측의 협상 압력에 떠밀려 러시아와의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현재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남은 선택은 단 하나다. 나토를 전쟁 속으로 깊숙히 끌어들이는 것.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만이 전쟁을 끝내는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라고 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초대→나토 헌장 5조 부분 발동→나토군 우크라이나 파병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가 우크라이나에게는 최선이다.
문제는 나토의 일부 회원국들이 우크라이나의 호소를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망한 우크라이나가 나토군 파병의 또다른 구실을 찾는다면?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설도 하나의 카드가 될 수 있다. 북한이 러시아로 군대를 파견해 전쟁의 판을 바꾸고 있는데, 서방 동맹국들은 지금 (우리를 돕지 않고) 뭘하고 있느냐고 항변할 만한 구실거리가 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 브리핑에서 "서방 동맹국들도 (우크라이나로의) 병력 파견 등 준비 태세를 갖출 것"을 촉구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스트라나.ua는 18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의 '북한군이 우크라이나로 오나요?(Едут ли в Украину корейские солдаты)' 코너에서 "북한군이 곧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배치될 것이라는 말이 계속 들려오고 있다"며 부다노프 GUR 국장과 국정원의 발표를 소개했다.
이 매체는 "부다노프 국장과 국정원은 북한군 파병 규모에 관해 서로 다른 수치를 제시했다"고 전제한 뒤, "두 가지 정보에 대해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우려할 만한 것'이라고 답변했으며, 미국 또한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모스크바가 그동안 이(북한 파병설)를 부인해온 점을 근거로, "러시아가 실제로 이와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지, (파병) 실현이 얼마나 가까운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동시에 "서방 측이 대(對)우크라 전쟁 지원과 참전의 폭을 넓히도록 설득하는 우크라이나의 정보 캠페인도 진행되고 있다"고 이 매체는 짚었다. 국정원 증거 자료로 나온 위성사진에는 러시아 함정이 북한 나진항을 떠나는 모습이 담겨 있지만, 정확히 무엇을 수송하고 있는지, 군인인지 무기인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또 북한군의 훈련 영상도 공개됐으나, 영상의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파병 북한군의 역할은
북한군 파병이 기정 사실이라면 어느 전장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할까?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영국 텔레그라프지는 19일 "북한이 러시아를 돕기 위해 특수작전부대(SOF)를 러시아로 파견할 수 있다"며 "SOF는 세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부대 중 하나"라고 전했다. 또 서방 분석가들에 따르면 SOF는 위험하지만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잘 훈련된 부대라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북한의 SOF는 20만명 규모로, 경보병여단 12개, 정찰부대 3개, 공수부대 3개, 저격부대 3개로 구성돼 있다며 서방의 특수 부대 규모보다 훨씬 크다고 밝혔다. 영국 SAS 요원은 500명, 미국 델타(포스) 규모도 약 2,000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트라나.ua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현지 전문가들은 북한군이 언어 장벽 등으로 인해 최전선보다 후방에 배치될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후방에 배치된 러시아군이 전방으로 전진배치할 수 있도록 후방 지원에 나설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방이든, 후방이든 러시아 군사 전문가들은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이 전황을 바꾸는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알렉세이 주라블료프 국가두마(하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은 “우리는 어떤 나라의 도움도 환영할 것”이라면서도 “그들(북한군)이 전선 상황에 결정적 영향을 주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전투 경험이 충분하지 않고, 훈련을 거쳐야 전선에 배치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6일 "북한이 러시아 파병을 실전 경험을 쌓는 기회로 활용하려 한다"고 분석하면서 "한반도에서 군사대비 태세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라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한반도에서 써먹기 위한 것이지, 우크라이나 전쟁의 판을 바꾸기 위한 파병은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