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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6일 주일 [(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사도들은 거룩한 산에서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를 들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 줄 때에,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빛나는 모습을 체험하고 주님의 증인이 됩시다. 다니엘 예언자는,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은 분이 앉으신 옥좌 앞으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인도되는 환시를 본다(제1독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신화가 아니라 목격한 자로서 알려 주었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셨는데,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신다(복음).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도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 1,16-19 사랑하는 여러분,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17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19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9 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실 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말하였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실망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알아챈 예수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갖고 계신 당신의 영광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타볼 산에 올라 기도하시자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변화하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대해,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시는 분이심을 모세와 엘리야도 증언합니다. 빛나는 구름 사이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증언은 예수님의 신원을 결정적으로 확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실 때 세 명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 때까지, ‘거룩한 변모’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그만큼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권능과 재림을 신자들에게 주지시키면서,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고 목격담을 전해 줍니다. 우리는 고통과 희생 없이 영광만을 바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주님의 십자가를 충실히 따를 때 우리가 받는 영광에 대해 알려 줍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잘 본다는 것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 가운데 ‘최측근’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보는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되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변모’라기보다는 당신이 태초 때부터 지니셨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당신 본래의 얼굴, 당신의 본질을 정확하게 보여주시는 것이리라 저는 믿습니다.
갑자기 눈부시게 변모된 예수님 앞에서 두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던 베드로 사도가 횡설수설하는 가운데, 구름 속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은 그의 충실한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를 인생의 나침반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따라가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던져주는 가르침에 순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은 늘 그를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늘 그의 영광스럽게 변모된 얼굴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늘 그의 주변을 떠나지 말고 그와 함께 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관상(觀想)하라는 말씀입니다.
관상한다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겠지만,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정말 중요한 일상의 과제가 있습니다. 바로 관상입니다. 매일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매일 이웃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제대로 된 관상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가져다주는지 모릅니다. 관상에 몰입하게 될 때 제일 먼저 다가오는 은총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 하느님의 선하심, 하느님의 인자하심에 사로잡혀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옵니다.
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나 자신을 잊게 됩니다. 더 이상 나 자신 안에 갇히거나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이란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광대무변하신 하느님 은총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관상에 충실한 사람은 이웃 안에 계신 하느님을 쉽게 발견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신성까지 도달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인정하기에 부족한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결핍투성이의 이웃이라 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잘 본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눈이 참 빛을 보는 그 순간 우리 영혼이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 눈이 천국을 보는 순간, 우리 삶 역시 천국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눈이 하느님을 뵙게 되는 순간, 우리의 나날은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기도는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한다
자신이 옳다는 믿음은 어떻게 갖게 될까요? 어쩌면 기억을 조작하면서까지 자신이 옳다는 믿음을 가지려하지 않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있는데 ‘메멘토’(2000)입니다.
주인공은 누군가가 자신의 아내를 죽이려하고 자신이 아내를 구하려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립니다.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10분 후면 바로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범인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 넣습니다. 범인의 이름은 경찰들을 통해 알아낸 “존 지(John G.)”입니다. 경찰은 그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기 위해 그를 찾아주고 복수하도록 해 줍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복수를 했다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10분만 행복했을 뿐 다시 아내를 살해한 ‘존 지’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으려합니다. 그게 그의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를 돕던 경찰은 그의 단기 기억 상실증을 이용해 ‘존 지’란 이름을 가진 범죄자들을 골라 그를 살인 용의자로 믿게 만들어 그를 죽이고 자신도 한 몫 챙깁니다. 물론 그도 결국엔 자신이 이용하는 주인공에 의해 죽게 되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그도 ‘존 지’란 흔한 이름에 속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단기 기억상실증은 스스로 가지려 했던 자기방어수단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죽이며 챙기는 많은 돈과 좋은 차, 그리고 심판자로서의 우월감에 계속 더 잔인한 킬러가 되어가며 더 많은 이들에게 이용을 당하며 영화는 끝납니다. 그러나 그의 기억상실증이라는 것이 이 모든 행위들을 정당화해줍니다.
영화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사람의 목적은 복수하려는데 있지 않고 복수를 즐기며 사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겐 진실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그는 같은 장소를 반복해 오가면서도 자신이 전에 저질렀던 사건은 하나도 기억 못하고 오로지 ‘존 지’란 이름을 지닌 사람에게 정의를 실행하려고만 합니다.
어쩌면 가장 위험한 인물이 자신을 완전히 믿는 인간일 수도 있습니다. 히틀러나 빈 라덴과 같은 엄청난 살육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는 행동에 갈등이 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면 자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자신의 길을 끝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인간에게 심겨진 원죄의 영향 때문입니다. 뱀은 자기 자신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 자신은 악이요 어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생각만 하는 베드로를 ‘사탄’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게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 곧 ‘사탄’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더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은 다 어둠이요 악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이런 말씀을 들으면 좀 심하게 인간을 악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나타나면 우리 모든 것이 어둠이었음을 명확히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조금만이라도 보게 된다면 우리 자신들의 운영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변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의 스쿠르지 영감처럼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어서 그 이전의 삶으로는 다시 살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살아온 삶이 온통 거짓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이젠 자신을 믿지 않고 주님의 목소리만을 찾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세 사도들을 높은 산 위로 데려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당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믿어왔던 사도들도 그분의 영광 앞에서는 무서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이렇게 증언해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씀이 그들을 여기까지 끌고 온 목적을 설명해줍니다. 이젠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말고 당신의 말씀을 들으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믿지 말고 하느님을 믿으란 뜻입니다. 하느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사람이 자신을 믿어 그것에 손을 뻗었습니다. 하느님은 십일조를 내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그것에까지 손을 뻗었습니다. 이는 아직 자신을 믿고 있는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보는 단계까지는 오르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믿어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지만 자신을 믿는 이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수많은 이들에게 이용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을 이용하기는 너무 쉽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좌신부 할 때 백화점에서 막 차로 나오고 있었는데 어떤 냉동 탑 차가 저를 쫓아왔습니다. 그들이 막 마지막 납품을 백화점에서 하고 나오는 중인데 남은 것들을 떨이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마침 명절이 되어 제주 옥돔 몇 박스를 아주 싼 값에 샀습니다. 그들의 말에 전혀 속이는 기색이 없었고 포장도 잘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그 상자를 열어본 결과 위에만 돔 두 마리가 있었고 속은 텅 비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전혀 속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판단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속고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 자신만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 목소리는 나와 주님을 완벽하게 구분하게 됩니다. 나는 완전한 어둠이고 그분은 그 어둠 속에서 들여오는 불빛임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참 주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다면 그것은 빛에서 나온 말씀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이런 면에서 자기 나름대로 예언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는 우리가 입을 막게 되고, 주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는 우리 모든 말들이 어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사실은 욥이 하느님 앞에서 정당함을 주장할 때 자신이 어둠이고 그분만이 빛이심을 깨닫게 된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그분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빛임을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 주님께서는 친히 당신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빛이 있고 진리가 있다고 믿는 이들은 자신을 포기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빛을 보더라도 자신의 식대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러나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은 주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기에 모든 순간에 주님의 뜻을 여쭙고 그분이 했을 법한 일만 하며 그분이 말했을법한 말만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뜻 안에는 빛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그분을 만날 준비가 안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다가 완전히 망한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들만이 당신 말씀의 가치를 온전히 알고 그 말씀에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할 줄 아는 겸손의 상태에 때문입니다. 자신을 믿는 것이 교만입니다.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완전한 어둠임을 인정해야합니다. 이 믿음이 생기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면서도 절대 실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어둠은 불빛이 필요합니다. 이는 마치 어둠을 헤치며 헤매던 배가 등대를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 그 배는 등대의 불빛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주님의 변모를 본 사람의 경지에 올랐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산에 오르면서 일어나는데, 이런 시간을 기도라 합니다. 기도하면 나는 못 믿게 되고 그분은 완전히 믿게 됩니다. 기도는 나의 주장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분의 주장에 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모세가 주님과 만나 얼굴에서 빛이 날 때 모세만이 빛이고 그들은 어둠이었습니다. 또한 엘리야가 산에 올랐을 때도 그만 빛이었고 나머지는 우상 숭배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누가 빛인지, 누가 어둠인지 가르는 참 빛이 되는 순간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랬듯이 예수님도 참 빛이 되시기 위해 이제 십자가를 찾아 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길로 가는 사람은 빛의 길로 간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참 빛을 보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배가 등대의 불빛을 보았다면 그곳을 향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참 빛을 본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을 잘 따를 것이고, 십자가의 길로 가고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나를 죽이고 이웃을 그 생명으로 살리는 삶입니다. 내가 나로부터 이용당해왔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빛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먼저 나를 의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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