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제처럼 되려면
-김찬선신부-
우리 수도 전통 안에서 내려오는 얘기가 있습니다.
수호자(원장)와 관련한 얘기입니다.
수호자가 너무 똑똑해서는 안 된다.
수호자는 너무 건강해서도 안 된다.
수호자는 너무 거룩해서도 안 된다.
‘너무’가 들어가면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아무튼 수호자가 너무 똑똑하고, 건강하고, 거룩하면
자신 형제들의 바보스러움과 약함과 죄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오랜 경험이 배어있는 얘기입니다.
바보짓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형제가 바보짓을 해도 이해하고
아픈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의 그 사정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죄에 떨어진 경험이 있는 사람이
유혹 앞에 허약한 인간의 죄를 이해하고 용서하리라는 얘기이지요.
그러나 꼭 그럴까요?
많은 경우 육신이 약한 경우는
다른 사람의 약함을 잘 이해하고 배려하지만
바보짓의 경우,
다른 사람의 바보짓을 딛고 똑똑한 사람으로 올라서려 하고
죄의 경우는 더더욱 죄 지은 사람이 더 남의 죄를 나무라며
자기는 거룩한 사람으로 올라서려 합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자기의 어리석음과 약함과 죄 때문에 낮춰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가 얘기하는 우리의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구해주십사고 울부짖었던 사람만이
고난을 겪음으로써 한껏 낮춰져 순종을 배운 사람만이
약함과 십자가를 통해 사랑으로 나아가고
이 겸손과 사랑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용서하고,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또 다른 대사제가 되게 할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전삼용신부-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한 신부님을 압니다. 그 신부님이 아시는 다른 신부님을 만나려 함께 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사를 함께 드렸는데 성작과 성합이 매우 아름답고 값어치 있게 보였습니다. 저와 함께 간 그 신부님은 미사 도중에도 그 아름다운 성작의 문양을 손으로 만져보는 등 그 화려함에 경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그 신부님은 저에게 “오늘 좋았지? 근데 내가 오늘 그 신부에게 사는 게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충고를 해 주었어.”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그 신부님을 존경하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 각자 삶의 방식이 있으니 당신이 가난하게 사신다고 남에게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성인들이 다 가난했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그 신부님이 “그럼 부자가 성인이 되나?”라고 되묻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황님들을 생각해 보세요. 많은 성인 교황님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은 가난하게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분들이었잖아요.”
그 신부님은 더 이상 저에게 말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다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부자라고 다 죄인인 것도 아닙니다. 속으로는 행려자가 더 부자일수 있고 재벌이 더 가난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부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 어떤 신학생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 충격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무 우리의 심리를 잘 표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따르면, 위의 제가 아는 신부님은 겉으로는 가난하게 살지만 사실은 부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부자로 사는 동료 사제에 대해 화가 났던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억지로 짓누르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다른 이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들이 나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단식은 참 좋은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영적인 능력을 극대화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단식과 기도’를 자주 함께 사용함으로써 단식이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강요되어져서는 안 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혼인잔치에서 단식하는 일은 오히려 잔치에 초대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초대받았을 땐 왕창 먹어줘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신랑이고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음을 일깨워주십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모든 상황에 적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길들이 있듯이 누구나 다 각자의 길로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완덕으로 향하는데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좋은 것이라도 적재적소에 올바르게 적용되어야 함을 말씀하시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내가 따르고 있는 것들이 항상 상대방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헌옷은 헌옷 조각으로 새 옷은 새 옷 조각으로 기워야 옷이 상하지 않습니다. 술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발효하여 터지고 맙니다.
내가 하는 것들을 남들에게 강요하지 않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그들을 다른 방법으로 부르고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하는 말
-조정희 수녀-
새벽 3시쯤 되었을까, 별들이 쏟아질 듯 머리맡 가까이 와 있었다. 별빛이 어슴푸레해진 후 일어나 화마루 공소에서 도보 성지순례를 시작했다. ‘사람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나라가 되도록, 그리고 우리 수도회 회원의 성화와 일치를 위하여’라는 공동 지향을 두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우리 공동체와 고3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기억하며 걸었다.
불안한 가운데 아픈 아이들 생각이 나며 눈물이 흘렀다. 모쪼록 삶의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충실히 살도록 노력하고 자신의 삶을 잘 선택할 수 있기를, 계속되는 삶에서 새로운 진리에 열려 있기를, 그리고 성적을 비관해 목숨을 끊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걸었다. 한 달치 약봉지를 들고 가면서도 “아이들이 힘들지 나는 괜찮아요.” 하시던 고3 담임선생님 생각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바람과 하나 되어 흔들리는 억새와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고, 온몸을 다 내어 주며 우리가 걸어가야 할 땅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어느 순간엔 마음 가득 고독이 밀려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저 내가 더 이상 계획하지 않고,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과 공동체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게 인생이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공동체 안에 이런 은총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늘 당신의 모습을 새롭게 만나고 자유로운 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님께 감사드리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겠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농부가 약간의 땅뙈기를 일구고 암소 몇 마리를 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시에 사는 직업이 의사인 사촌이 방문하여 왜 이렇게 바보같이 사는지……. 좀 더 재산을 불린다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사냐고 따지듯이 말합니다. 사촌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재산을 불릴 수 있는지를 물었지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선 돈이 없으니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대출 받은 돈으로 땅과 가축을 더 사십시오. 그렇게 해서 돈을 더 벌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보다는 의사인 사촌이 더 똑똑할 것 같아서 시키는 대로 은행 대출을 받아 땅과 가축을 사고 죽도록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30년이 지났습니다. 이 사람은 많은 땅과 가축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런데 온 몸은 쑤시고 안 아픈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의사인 사촌을 찾아가 진찰을 받았습니다. 이에 사촌은 이렇게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쉬지 않으면 넌 오래 못 살아. 이제 시키는 대로 해. 땅을 전부 팔고 암소 몇 마리만 남기게. 손바닥만 한 땅뙈기만 있어도 왕처럼 살 수 있는 거야. 내 말만 믿어. 이래봬도 난 알아주는 의사니까……. 단순한 생활만이 건강의 열쇠라네.”
이 말에 농부는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젠장, 그럼 왜 30년 전에는 그 말을 하지 않았어? 말해줬으면 평생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 아냐?”
똑똑한 의사는 항상 자신의 말만이 옳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그 순간에는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맞는 말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자신의 말만이 항상 옳다고 착각하는 모습들, 그래서 남들을 끊임없이 설득시키고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들……. 따라서 어떤 순간에도 자기의 뜻을 억지로 관철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고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따지듯이 말합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모습이 옳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서 요한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올바르게 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지요. 지금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기쁘게 사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임을 이어지는 혼인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수난을 상징하는 신랑을 빼앗길 때에는 슬퍼하면서 함께 해야 함을 지적하십니다. 즉, 기뻐해야 할 때는 기뻐하고, 슬퍼해야 할 때는 슬퍼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슬픔만을 강조하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이 모습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나는 어떠했는지 반성하여 봅시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이 세상을 좁게만 만들뿐입니다.
대화를 하면서 내 생각만 옳다고 우기지 맙시다.
사랑이라는 새 부대
-구경국 신부-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종교박람회>라는 책에 원숭이가 냇물에서 물고기를
나뭇가지 위로 집어 올리고 있어 뭘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빠져 죽지 않게
건져주는 참이라고 대답하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갑에게는 약이 을에게는 독”
이라는 설명을 곁들여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식품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해가 된다는 것은 굳이 한방에서 말하는 체질을 말하지 않더라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단식도 좋은 기도임에 틀림이 없지만 결코
절대적인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복음처럼 잔칫집에서 단식을
한다면 격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들의 흥겨움마저 빼앗는 어리석은
행동이 됩니다. 이처럼 좋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의 의미나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행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뜻에 역행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보다는 사랑에 의해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이 세상에 오신 말씀이신 하느님을 더 잘 맞이하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잘 보존하여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서는 주님의 계명을 율법이라는 헌 부대에 담을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이
사랑이라는 새 부대에 담겨 기쁜 마음으로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친절하신 예수님의 대화법
-김현숙 수녀-
살다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깐죽거리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짐짓 저 잘났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시비를 걸어온다. “…`하는데, 왜 …`하지 않아요?” 그럴 때 “너나 잘하세요.” 하며 상대방에게 무안을 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시비조의 논쟁이나 대답조차 하기 싫은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신다. 온유하신 그분은 상대방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고 자분자분 설명해 주신다. 버럭 언성을 높이는 일 없이 상대를 제압하는 그분의 친절한 태도는 한 수 배우고 싶은 그분만의 매력이다. 예수님은 심술 사나운 말이나 행동을 대면하시더라도 결코 그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과시하지도 않으신다. 다만 차분히 그가 가야 할 방향으로 이끌어 주신다.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 상대를 무시하고 귀찮아 하며 대꾸조차 하지 않고 모욕과 멸시와 냉소로 응답해 왔는가? 차분하게 설명하는 것이 성질 급한 나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돌아보면 지나온 시간이 부끄럽다.
고등학교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마음과 달리 얄미운 행동을 하는 그들을 대면하게 될 때가 있다. 그와 같은 순간에 어린 백성을 불쌍히 여기듯 새로운 전환, 복음적 발상으로 지평을 열어주시던 예수님의 지혜를 청하고 싶다. 사고뭉치 얼렁뚱땅, 깐죽거리며 시비를 걸고 까탈을 부리는 여고생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여유를 가져본다. 그리고 그들의 시비를 들어보자. 친절하신 예수님처럼 신선하고 발칙한 그들의 시비가 나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길 희망한다. 나의 구닥다리 이지(理智)와 그들의 빛나는 까칠함으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보고 싶다.
낯익은 것일수록 더 새롭게 봤으면(마르 2,18-22)
-석찬귀 신부-
저는 새해 첫날에 친구들과 함께 통도사 근처에 있는 정족산을 다녀왔습니다. 그 산을 오르내리면서 한편으로는 해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도 기뻤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산들이 서로 이웃에 자리 잡고 살면서도 서로를 지켜주는 모습은 더없이 제 맘을 기쁘게 해 줬습니다.
그런데 방금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께서 단식 문제를 두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바리사이파들과 논쟁을 벌리면서도 그들을 참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단식은 옛날부터 거의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유대교에 속했던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에 40 일간 단식했고, 엘리아 예언자도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40일간 단식을 했습니다(탈출 34,28) ; 그래서 바리사이파들도 자기 조상의 전통을 따라 단식을 철저히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식을 지키는 형식이나 방법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 단식을 하는 근본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맘의 여유를 갖지를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안식일을 만든 원래의 의미를 망각해 버린 채 안식일 그 자체를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에 더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알맹이는 놓쳐버리고 방법에 더 몰두하던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봤을 때도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상징이라는 예언자들의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이미 자기 곁에 계신 분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신 분임을 눈치 챌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봐도 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은 '당신의 제자들은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을 던지게 됐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선 지금은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 단식하는 때가 아니라 이미 도착해 있는 그 신랑을 위해 잔치를 벌 릴 때'(마르 2,19)라고 질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교회는 원래 기쁨의 원천인 주님을 만나는 곳이어야 하는데, 바리사이들은 주님께로 나가는 형식이나 방법에 머물러 버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신나간 사람을 향해서 프란시스 드 살레 성인은 '단 한 번이라도 정성을 다해 바치는 주의 기도는 습관적으로 해버리는 수 십 번의 주의 기도보다도 훨씬 더 낫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종교생활 안에는 자신을 길들여서 습관으로 만들 것이 제법 있습니다. 또 습관이란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예컨대 매일 성경을 단 3 분씩이라도 읽는 습관은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습관이란 건 신앙생활에 큰 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성당으로 들어갈 때, 성수를 찍어 성호를 긋는 행위가 기계적으로 돼 버리면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세례를 새롭게 기억하고 그것을 새로이 한다는 원래의 뜻을 망각해 버립니다.
또 미사 중에 일어선다든지 무릎을 꿇는다든지 하는 외적인 행위도 너무 습관적으로만 하면, 미사 중에 특별히 주님을 경배하는 마음을 발휘하려는 그 원래의 뜻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원래의 뜻을 망각해 버리고 살면, 그런 사람은 부러진 팔이 다 나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팔에다 붕대를 감고 있는 사람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우리 사회엔 지도층이 없다는 여론을 들을 때마다 정말 고민을 하게 됩니다. 더욱이 지도층이 불신을 당하는 근본 원인이 말과 실제로 사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란 여론을 들을 땐 더 고민이 됩니다. 사실 저도 사제로 또 교수로서, 말은 그럴듯하게 했을지 몰라도 제가 한 말에 대해 제대로 책임 있게 살았는가를 반성할 때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정말 되돌아볼수록 제가 아는 것과 실제 생활이 따로 노는 것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하수구에서 거품을 물고 죽어가게 만든 적이 많습니다. 또한 제가 아는 것과 실제 사는 것 사이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서 피와 땀을 흘리는 일을 게을리 했다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저를 지금 불러 가시면 아마 제 혀를 만발이나 빼버리는 벌을 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또다시 이 신앙의 게으름 때문에 앞으로 성탄절을 몇 번이나 더 지나야 제 정신이 들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우리 안에서 익숙해져 있는 습관일수록 그것을 새롭게 보려고 노력하고 투신하는 만큼 기쁨도 만날 수 있다는 위로의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멘............◆
회두, 회개
-이철구신부-
새로운 삶, 회개의 삶은 방향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옛말에 ‘회두’(回頭)라는 말이 있습니다. 회두를 머리를 돌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머리를 돌려야 합니다. 머리를 돌린다는 것은 내 생각과
내 시선이 바로 하느님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삶은 내 생각과 내 시선이
하느님을 향해 정향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제 내 삶의 터전이
하느님 말씀 위에 더욱 굳건하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새로운 삶, 회개의 삶은 하느님 말씀의 터전 위에서
하느님을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유혹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이 나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느님 편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삶, 회개의 삶일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새로움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내 삶이 회개의 삶, 새로운 삶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 세 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유 루시아 수녀 -
◆예수께서 단식을 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조각에 캥겨 더 찢어지게 된다.” 예수님은 외적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이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낡은 가죽부대에 비유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 사람들이 많이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만든 법보다도 인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고,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무엇보다 법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서로 다른 가치가 공존한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늘 갈등하고 있는 것이 이 성경 구절에 잘 맞습니다.
누구 빽입니까?
- 이찬홍 신부-
우리의 삶에는 당연히 지켜야할 규범, 질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종 이런 규칙, 질서들을 거스르는 사람들을 볼 때면, 좀 비아냥거리는 투로, ‘이야, 이런 규칙을 지키지 않고, 빽이 대단하네!’ 라는 농담을 합니다.
빽과 관련된 체험이 제게도 있습니다.
광주 공항은 안개가 자주 끼다보니, 종종 비행기가 결항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는 날도 그랬습니다.
오전 12시까지 학교에 오라는 통보를 받아서, 10시경에 비행기를 예약했습니다.
그런데, 안개 때문에 제가 타고 갈 비행기가 결항되어버렸습니다.
순간 공항은 발권 창구에서 고함치는 사람... 여기 저기 전화하는 사람... 오후 비행기의 대기자 신청하는 사람 등으로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가 대기자 신청하러 가보니, 대기석이 마감되어 버려, 도저히 그날 학교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순간, 저는 ‘이러다가 학교에 못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물론, ‘교구에서 알아서 해 주겠지.’ 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습니다.
지금 함께 계신 양 신부님께서 성소국장 신부님이셨기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신부님, 비행기 결항되어 버렸습니다.’
‘그래, 좀 기다려!’ 라는 말씀에 전화를 끊고 30분 후 다시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때 신부님께서, ‘너네 4명 오후 비행기 예약했다. 그편에 타고 학교에 가라!’ 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창구에 가서 힘차게 외쳤습니다.
‘오후 3시 30분 광주요’
저의 말에 승무원은 놀라며, 제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표를 구했습니까? 우리도 자기 빼기가 힘든데....’
그 말이 제게는 ‘참 빽이 대단하십니다.’ 라는 말로 드렸습니다.
그때, ‘빽이 좋긴 좋구나.’는 생각과 함께 양 신부님의 대단함(?)을 느끼며 학교에 갔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때, 제가 진정 믿고 의지해야할 빽이 하느님이셨는데, 그 순간에는 하느님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당연히 지켜야할 규칙이었는데도, 의연 중에 ‘양 신부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라는 교만한 마음이 깊었던 것 같았습니다.
복음에도 빽과 관련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식규정이 있습니다.
때문에, 그 기간이 되면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가 단식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를 지키지 않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단식을 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소위, “무슨 빽으로 단식하지 않습니까?” 라는 물음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있는데... “내가 바로 신랑인데, 나와 함께 있는 친구들이 어떻게 단식할 수 있느냐? 먼 훗날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때, 단식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단식은 메시아, 곧 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한... 잘 맞이하기 위한 단식이었습니다.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단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믿고 의지하는 영원한 빽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모든 사람이 지키는 규정을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어떠한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일반사람들의 삶을 넘어서는 특수한 빽을 갖고 생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 안에 가장 중요하고 든든한 빽을 담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의 편... 나를 도와주시는 분을 빽으로 모시고, 그 빽의 힘으로... 능력으로 늘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의지하는 빽은 무엇입니까?
어렵고, 큰일이 닥칠 때, 도와달라고... 청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김정식 님의 ‘예수 내 작은 기쁨’ 이란 노래는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밤길을 가고 있을 때 누군가 등불 밝혀주는 이
내가 미움에 떨고 있을 때 누군가 날 위해 아파하는 이
내가 고난에 울고 있을 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는 이
*음을 생각하니 내 맘에 한 빛이 가득 차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네.
예수 내 기쁨 예수 내 평화 날 위해*
등불 밝히는
아파하시는
기도 하시는
예수 내 희망 예수 내 생명 작은 나의 기쁨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기쁨, 평화요, 가장 든든한 빽이 아니겠습니까?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양승국신부-
<새벽미사란 잔치, 오늘 하루란 잔치>
단식 한번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언젠가 위장계통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단식이 최고’라는 누군가의 감언이설에 넘어갔습니다. 몸에 문제가 생기면 먼저 병원으로 가서 검진을 받았어야 했는데, 워낙 귀가 얇다보니 ‘단식이 최고’라는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식, 그냥 시작하면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나름대로 절차가 있었습니다. 초보자들을 위한 주의사항도 엄청 많았습니다. 교육도 필요했습니다. 준비해야 할 것도 꽤 많았습니다. ‘오늘부터 단식이다’ 하고 바로 단식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무척이나 까다로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시작을 했었는데, 과정이 진행될수록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더군요. 사흘까지는 이를 악물고 견뎌냈었는데, 사흘이 고비더군요. 사흘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하더니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 보겠다는 거지? 내 주제에 단식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단식. 그냥 이대로 그냥 살지 뭐. 아프면 아픈 대로. 그러다 안 되면 죽지. 안 그래?”
그 뒤로 단식기도 자주 하시는 분들, 정말 우러러보이더군요. 단식, 그것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독한 사람 아니면 힘든 것입니다. 웬만한 의지력이 아니면 정말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 4장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단식하시는 광경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일주일 열흘도 아닙니다. 장장 40일간 단식을 하셨습니다. 인간 육체의 한계를 체험하신 단식, 목숨을 건 단식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자주 단식 하셨습니다. 고민거리가 생길 때, 정말 괴로울 때,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싶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주 광야로 가셨습니다. 단식 가운데 기도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단식의 전문가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단식은 꽤 일상적인 그 무엇이었습니다. 자연스런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6장 29절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하루를 속죄의 날(10월 1일)로 정해 의무적으로 단식했습니다.
또 기근이나 전쟁, 가뭄, 대형 참사와도 같은 천재지변을 겪을 때, 이웃들의 고통에 대한 동참의 표현으로 단식일을 선포했습니다. 한 술 더 떠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단식하면 이력이 난 사람들이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스승의 엄격한 생활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단식의 전문가였던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은 정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위선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내가 지금 단식하느라 이렇게 괴롭다, 이렇게 힘이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기를 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일단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뭘 물어봐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겨우 대답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신이 지금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떠들어댔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그런 꼴을 보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라.”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가슴은 비통함으로 찢어집니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삼시세끼 챙겨먹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났기에, 이제 더 이상 그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기에,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듭니다. 안타까움에 할 말을 잃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편안하게 밥을 먹겠습니까?
이처럼 단식은 슬픔의 표현입니다. 애통함의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다들 단식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 저리도 게걸스럽게 잘들 먹느냐고 대놓고 따집니다.
하수들의 차원 낮은 질문 앞에 고수이신 예수님께서는 약간은 애매모호한 표현, 알쏭달쏭한 표현, 그러나 심오한 표현, 신앙의 진리와 핵심이 담긴 차원 높은 답변을 펼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당장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메시아성을 넌지시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과 더불어 그분의 활동무대가 시작됨으로 인해 이제 구약 시대는 마감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온 것입니다.
그간 메시아 오심을 기다리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목숨 바쳐 해오던 단식도 이제는 그칠 때인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아께 감사드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초대하신 잔치에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내어주시는 의자에 앉아 행복한 마음으로 잔치를 즐기는 일입니다.
결혼식이나 고희연과도 같은 흥겨운 잔치 주최한 주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보람은 하객들이 기쁜 마음으로 와주는 일입니다.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일입니다. 준비된 여흥에 기꺼이 동참하며 열심히 놀아주는 일입니다.
사흘 밤낮을 두고 준비한 음식 앞에서 열심히 먹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잔치에 온 누군가가 ‘아, 나 지금 단식기도 중이야’ 라면서 물 잔만 들고 있다면, 주인 입장에서 김이 팍 셀 것입니다.
잔치에 온 사람들이 다들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다든지, 다들 인상을 구기고 있다면 잔치 주인으로서는 정말 괴로운 노릇일 것입니다.
오늘 또 다시 우리 앞에 ‘새벽미사’란 잔치, ‘오늘 하루’란 귀한 잔치가 펼쳐질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행복해하면서 기쁜 얼굴로 잔치를 만끽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대승적 그리스도교
-이중섭 신부-
21세기가 시작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분명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 말씀처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교가 과연 어떻게 해야 주님의 이 말씀을 살 수 있을까요?
불교의 두 조류처럼, 그리스도교 역시 소승적 그리스도교와 대승적 그리스도교로 나
누어 볼 수 있습니다. 대승적 그리스도교는 다음 다섯 가지를 추구합니다.
첫째, 선과 악, 성과 속,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합니다.
둘째, 천국의 복락만을 좇는 개인적 구원관을 버리고 이 세상이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나라로 거듭 날 수 있도록 헌신합니다. 셋째, 원죄만을 강조해 인간의
창조적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숙명론에 빠지는 일 없이 인간이 축복받은 존재임을
일깨워줍니다. 넷째, 율법주의, 교리주의, 광신주의를 극복하고 지성, 덕성,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 자신과 공동체의 쇄신을 지향합니다.
다섯째, 각 민족 고유의 종교와 문화유산을 존중하고, 타종교를 배척하는
배타적 신앙을 극복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가 21세기에는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를 준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현대에서 그리스도교가 살아남는 길입니다.
어머니의 지혜
-문화순 수녀-
알래스카의 여름 하늘은 흰구름 운동장이다. 높은 산이 많고, 산 넘어 구름 공장이 있는지 매일매일 뭉게구름이 끝없이 피어오른다. 구름이 하늘을 도화지 삼아 온갖 그림을 그리는데 멀리서 바라다보면 목화꽃이 무더기로 핀 것 같기도 하고, 배고픈 날은 솜사탕 같기도 하다. 구름을 보면서 나는 늘 아버지의 꽃상여를 생각한다. 이른 봄 아버지를 선산으로 모시던 날, 하얀 꽃상여를 따르던 나는 눈물을 훔치면서도 상두꾼의 상엿소리며 방울소리가 듣기 좋아 귀를 기울였다. 이로써 아버지의 시대가 끝나고 오빠들과 새언니들이 집안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었다.
조금 있으면 우리 수녀원도 소임이동이 시작된다. 한동안 온 수녀원이 술렁거리고 식탁에 앉으면 어느 수녀님이 어디로 갈까, 서로 알아맞히기 내기도 하면서 기다린다. 소임이동이 되면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도 어렵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도 어려움을 겪는다. 지금껏 서로 잘 맞추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새사람과 다시 맞추기 위해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책임자가 바뀌면 더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남은 자의 아픔’이라고 말한다. 본당에서도 신부님·수녀님들이 바뀌면서 신자들이 겪는 혼란을 적잖이 보아왔다. 그래서 어느 땐 한꺼번에 다 바뀌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도 한다. 새로운 사람끼리 맞추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여름에 낡은 인조옷을 꿰맬 때마다 헌 인조 조각을 찾지 못해 새 천조각으로 기웠다가 번번이 낭패를 보기 일쑤였다.
이렇듯 새것은 새것끼리, 헌것은 헌것끼리 해야 무리없이 넘어간다. 그런데 사람이 바뀌고 새로운 시대가 왔는데도 자기 생각을 양보하지 않거나 고집하다 보면 어느새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라지게 된다. 수녀원에서 소임이동 철칙은 ‘새 소임지에서 6개월 동안은 전임자가 했던 것을 바꾸지 않기’이다. 최소한 6개월은 지켜보면서 새것과 헌것이 서로 맞춰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다림이 힘들고 어렵고 무의미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기다림이야말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고 신뢰하게 하고 가까워지게 하며 오래갈 수 있게 해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오빠들이 하자는 대로 조용히 따르셨다. 그리고 우리한테는 새언니의 뜻에 맞추도록 당부하셨다. 어머니는 때로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펴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생각도 못했을 일들이 일어나도 가만두셨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처럼 집안 대소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머니가 고집을 부리며 자식들의 말에 반대했다면 지금처럼 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연중 제2주간 월요일
- 이수락 신부
오늘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혼인잔치의 손님은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자신의 생각과 소신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옷이나 신발은 몸에 잘 맞아야 하는데 얼마 전까지 우리 중고등학생들이 입고 다니던 옷과 신발은 상식적으로는 너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지나치게 크고 긴 옷을 입고 그것이 더 멋있다고 유행에 잘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참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또 신발은 어떤 것을 주로 신었습니까? 자기 발보다 한참 큰 사이즈를 신어서 걸음걸이마저 이상하게 변형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의 이런 현상들이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입니까? 줏대가 없기는 어른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옷이 유행이다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유행을 따라 갑니다. 자신의 체형이나 나이에 어울리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따라갑니다.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사는 집도, 유행을 따라 옮겨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분들이 정말로 행복할까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면 그곳으로 몰려가는 우리의 행태가 과연 소신 있는 삶의 방편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심해지면서 우리 사회는 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생의 진로에 있어서도 기이한 현상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이 인기가 있다고 방송과 매체에서 이야기하면 자신의 적성과 재능은 무시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이 되기 위해 준비합니다. 심지어 대학의 여러 학과에 다니는 학생들 중에도 많은 수가 학교 공부는 하지 않고, 공무원 임용고시를 준비한다는 것이 얼마나 낭비가 심한 일입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좀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소신 있는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소신을 가자고 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매사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의 흐름이 아니라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과 여건을 고려해서 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오늘 예수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어야 한다는 말씀을 좀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다고 봅니다.
왜하는지도 모르면서 남들이 하니까 그냥 따라하거나, 남들도 다 하는 일이라 자기만 안하면 괜히 뭔가 뒤처지는 듯한 느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시류나 유행을 타지 않고 소신껏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하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 신념이 흔들려서는 안 될 테니까요. 작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왜 하는지 목적과 명분을 분명히 알고 행하는 것이 소신 있는 행동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런 소신을 갖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에게 와서는 다짜고짜 당신은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식은 속죄와 참회의 표시로서, 진정한 마음과 행위가 뒤따르지 않으면 위선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교회가 하라고 하니까, 또는 다른 신자들이 그렇게 하니까 등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행하는 단식이나 참회를 반기실 리 없습니다. 아주 작은 기도나 선행이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와 소신껏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사람이 높은 언덕길에서 무거운 수레를 힘차게 끌고, 한 꼬마가 뒤에서 열심히 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언덕을 다 오른 두 사람은 다정히 앉아 서로 땀을 닦아 주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하도 정겨워서 지나가던 사람이 앞에서 수레를 끌었던 어른에게 “저 아이가 당신 아들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 저놈이 바로 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이렇게 고생을 시키고 있어서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답니다.”하고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행인은“저분이 네 아버지로구나. 아버지를 도와주는 네가 무척 대견스럽구나!”하고 아이를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예? 저분은 제 아버지가 아닌데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과연 이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이겠습니까? 두 사람은 어머니와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낡은 사고방식을 가진 유다인들에게, 특히 고정된 가치관에 얽매인 지도층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지혜의 말씀을 들려주시는지를 잘 알아들으려면 자신의 생각과 마음속에 깃든 낡은 것을 모두 비워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내가 비워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선과 악, 성과 속,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입니다. 둘째는 천국의 복락만을 좇는 개인적 구원관입니다. 셋째는 원죄만을 강조해 인간의 창조적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숙명론에 빠지는 일입니다. 넷째는 율법주의, 교리주의, 광신주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낡은 것들을 비워내고 지성, 덕성,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 자신과 공동체의 쇄신을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소신과 현대적 의미의 자기 비움을 통한 새로움을 지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축제와 단식의 긴장감
-박상대신부-
질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관계를 깨어버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공동체를 이루신 예수께서는 분명 이 땅위에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시다. 죄의 용서는 갈라지고 깨어진 관계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공동체에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이 땅위에서 예수 외에 어느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철칙을 알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한낱 하느님을 사칭하고 그분을 모독하는 자로만 인식될 것인가?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오늘복음에서도 계속된다.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신 세리 레위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일(마르 2,16)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단식에 관한 문제로 시비를 건 이야기를 전해준다. 단식(斷食, fasting)은 일정 기간 동안 종교·수행(修行)·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섭취를 끊는 일이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이다.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라마단(Ramadan)을 손꼽을 수 있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규정을 지킨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다.(레위 16,29; 사도 27,9 참조) 유배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신약(新約)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루가 18,12; 마르 1,6; 마태 11,19)
따라서 오늘복음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단식은 율법이 명하는 공식적인 행사로서가 아니라 사적이고 개인적인 수행으로서의 단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잔치에서의 신랑, 새 천 조각, 그리고 새 부대와 새 포도주에 비유하신다.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곡(哭)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이 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이다. 이 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이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하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은 그 어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구원과 축제의 현재만 있으므로 단식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 안 계신 동안에 제자들은 신랑을 빼앗긴 신부처럼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슬퍼하며 단식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의 시대를 기뻐하면서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에 있으면서 축제와 단식의 긴장 속에서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자신의 소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18-22)
-유 광수신부-
아무도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이 그 옷을 당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인간이 왜 사는가?라는 것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지만 누구를 사랑하는가?라는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사랑할 대상만 있으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왜 사느냐? 라는 질문 같은 것이 필요 없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행복인데 왜 사는가? 라는 뚱딴지 같은 질문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런 질문은 사랑할 대상이 없는 이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사랑하는 데 있고 사랑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신랑과 신부이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며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되는 것이다. 즉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보완해주고 채워주는 것이고 그래서 완성시키는 것이다. 신랑 신부가 서로를 진실히 사랑한다면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관계이며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관계이다. 따라서 신랑과 신부는 반드시 서로를 필요로 한 상대이기 때문에 떨어질 래야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하느님은 인간의 신랑이시다. 에제키엘 예언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네가 나던 일을 말하면 네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탯줄을 잘라 줄 사람도 없었고 목욕시켜 줄 사람도 없었으며 소금으로 문질러 줄 사람도 없었고 포대기에 싸 줄 사람도 없었다. 너를 애처롭게 보아 이런 친절을 베풀어 줄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에 떨어지던 날, 너는 들에 내버린 개구멍받이 신세였다. 내가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발버둥이치는 너를 보고, 핏덩어리야 살아라, 들풀처럼 자라나거라 하였더니 너는 자라고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너는 젖가슴이 부풀고 거웃도 자랐는데 알몸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다가 네가 꽃다운 한창 나이가 된 것을 보고 내 겉옷 자락을 펴서 너의 맨 몸을 감싸주었다. 나는 맹세하고 너와 약혼한 사이가 되었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너는 내 사람이 되었다. 나는 너를 목욕시키고 너에게 묻은 피를 닦아 주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수놓은 옷을 입혀 주고 고래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겨 주고 아마포 띠를 띠어 주었으며 비단 겉옷을 입혀 주었다. ”(에제 16,4-10)
하느님은 인간의 한쪽이시다.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기의 한쪽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한 것이다. 결코 인간은 행복할 수 없고 늘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그분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생명이고 행복이다. 그것 때문에 인간이 창조되었다. 즉 인간은 하느님한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하느님한테 사랑받을 때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존귀함이며 동물과 다른 점이다. 즉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한테 사랑받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하느님을 신랑으로 삼은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하느님의 신부이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이고 인간의 품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해야하고 그것이 곧 행복이고 생명이다.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신랑이신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야훼께서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자리잡고 오래 잘 사는 길이다.(신명 30, 19-20)
인간의 위대함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동물은 하느님을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하느님과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된다. 인간을 사랑하면 인간이 되고 돈을 사랑하면 되고 권력을 사랑하면 권력이 되고 쾌락을 사랑하면 쾌락의 노예가 된다. 한편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을 닮아 가고 하느님이 된다.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다.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함께 하셨다.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이다. 그 이전에는 불가능했고 이루워 질 수 없었던 모습이 이루워진 것이다. 그래서 죄인과 하느님이 함께 하는 성찬은 이미 이 세상에서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이고 앞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실현시켜 나가야 할 하느님의 나라이다. 따라서 이제는 헌옷을 입고 있을 때가 아니라 새 옷을 입어야할 때요,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할 때이다.
새 천조각이라는 표현은 그리스어로 구멍을 채우는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충만함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새 천조각은 비록 천 조각이라 하더라도 그 천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충만함이다. 새로운 세계요, 새로운 생명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코후6, 17)
복음을 듣는 자세가 있다. 즉 하나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이 그 옷을 당겨 더 심하게 찢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원칙은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원칙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 새 천 조각이란 복음이고 헌 옷이란 자기의 고정관념, 생각, 자기의 삶의 틀, 선입관 등이다. 복음을 들었으면 자기의 고정 관념에 얽매여 있지 말고 복음의 생각으로 바뀌라는 것이다. 많은 경우 복음 묵상할 때보면 복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 생활에 맞게 말하는 경우를 본다. 그것은 복음 묵상이 아니라 일종의 생활 나눔일 뿐이다. 복음 묵상을 했으면 복음을 통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을 말해야 한다. 복음 묵상을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에 따라서 자기의 생활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때 나날이 새롭게 변화되고 복음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