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412 묵상글 ( 성주간 화요일. - 허무감이 들 때. 등 )
----------------------------------------------------
220412. 성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허무감이 들 때
오늘 독서는 어제에 이어 야훼의 종의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야훼의 종의 두 번째 노래인데
지금 야훼의 종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면
힘이 빠지고, 지치고, 허탈감까지 드는 상태입니다.
야훼의 종으로서 소명을 받고 그것을 수행하는 중인데
현재까지는 그 수고가 헛수고가 된 것입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이런 마음이 들 때 심사가 복잡하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마음이 산란한 겁니다.
지금까지 고생고생하면서도 근근히 버텼는데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며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해도해도 안 되는데 괜히 고생을 더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지금까지 해온 일이 과연 내가 할 일인지, 아니면 허망한 일인지 의심도 들면서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도 들면서 마음이 갈라져 복잡한 겁니다.
어제는 힘든 하루였습니다.
원래 주말을 쉬었다가 다시 하는 월요일의 식당 일이 많은데다
손님도 평소보다 배로 많이 오셨고,
문제를 갖고 찾아온 분들의 상담도 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울한 기분이 새벽부터 제 안에 들어와 똬리를 틀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의 나눔에서 그런 낌새를 채신 분들도 있을 텐데
그래서 저는 어제 사뭇 어두운 나눔을 하였지요.
그래서 왜 이런 우울한 기분이 제 안에 들어왔을까 생각해보니
하나는 성주간에 들어서면서 주님의 가까워진 죽음이 저를 우울케 한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제 주변에 제가 사랑하고 그래서 계속 기도해드리는 분들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거나 나빠지는 얘기가 쌓이면서 우울감도 쌓였던 것입니다.
사실 며칠 전에는 하느님께 원망하고 분노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물론 제게가 아니라 주변의 아프거나 어려운 분들에게.
그러다가 이런 반성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데 그분들과 그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까.
내가 이렇게 우울감에나 빠져 있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악마적인 감정이다.
그러니 그분들을 조금이나마 사랑하고 진정 사랑한다면
내가 이렇게 우울감에 빠져 있었서는 안 되고 '끙'하고 힘을 내야겠지.
어제는 여기까지 반성하고 새롭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묵상하면서 새로운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원망과 분노만 하였지 하느님께 힘을 얻지 않은 저였고,
하느님 빼놓고 내 힘으로만 우울감에서 일어서려고 한 저였습니다.
오늘 야훼의 종은 허탈감을 노래한 뒤 이렇게 이어 노래합니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복음의 주님께서도 제자들의 배반을 생각하며 심란해하시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으시고 이렇게 미래를 내다보시며 힘을 내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배반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눈을 두지 않으시고,
하느님께 시선을 돌리심으로 희망을 되찾으신 겁니다.
나든 남이든 인간에게 시선을 두면 우울하고 허무합니다.
희망은 하느님께 시선을 둬야지만 가능하며
먼 희망도 가까이 가질 수 있음을 다시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
220412. 성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4월 12일 성주간 화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요한 13,24)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그래서 요한은 [베드로의 고갯짓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라고 합니다. ‘기대어 앉아 있었다’는 말과 그들의 스승께서 그들에게 그런 대담함을 허락하셨다는 말씀에서 여러분은 뭔가 깨달으셨습니까? 그 이유를 알고 싶으신가요? 이 행동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라고 합니다. 저는 요한이 그렇게 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그 비난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드러내 놓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다른 때도 아니고 사도들의 우두머리가 고갯짓을 했을 때만 이 말을 했을까요?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한 것이 그가 더 높은 이여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요한은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신 큰 사랑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왜 여전히 그분 품에 기대어 앉아 있을까요? 제자들은 아직 주님의 지고함에 대한 의식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의기소침한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풀어 주셨습니다. 그 시점에 제자들의 얼굴은 무척 어두웠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산란했다면 표정은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물음으로 그들을 달래느라고 주님은 먼저 분위기를 잡으시며 요한이 당신 품에 기대도록 허락히·십니다. 한편 요한의 겸손도 눈여겨보십시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고만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대성당을 위한 돌 하나
이런 일은 그대에게 놀랍고도 너무 과감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감한 일을 감히 말할 필요가 있다. 택스트의 의미는 만일 그대가 공헌을 기피하면, 만일 그대의 내밀하고도 개인적인 주석학으로서 보편적인 주석학의 충만함에 기여하지 않으면. 그 총체적인 충만성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주석학에 신비체의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공헌을 보탤 것이기 때문이다.(109)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4월 성령 열매성월 2주간 인내 / 친절 /성실✝️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7-10장
✝️ 1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당신을 직접 뵈올 수는 없지만 성모님과 함께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성모님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당신이 처음부터 지니셨던 장엄한 영광과 빛나는 당신 얼굴을 언제나 미리 내다보셨나이다. 영광스러운 당신의 얼굴을 보고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은총을 주신 사도 베드로 · 야고보 · 요한과 함께 당신을 홈숭합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티볼산에서 머물고 싶은 깊은 열망이 일어났던 그 순간을 찬양합나다. 그는 타볼산이나 다른 산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이름답고 장엄한 당신의 얼굴 때문에 그곳에 머물고 싶어했나이다.
예수님, 사도들이 당신과 함께 타볼산에 있었던 것처럼 저도 지금 당신과 함께 있고 싶나이다. 예수님 저는 기도하고 경청하고 성찰하며 묵상하고자 합니다. 또한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관상하며 당신 현존에 대한 강한 열망을 느끼고 싶습니다.
저는 지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당신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았으며, 당신을 뵙거나 갈망하지 못했사오니 저를 용서하소서.
저는 이제 그 열망을 느끼고 있나이다.
0 예수님, 제 마음콰 영혼이 향상 당신 현존의 기쁨을 느끼게 히소서!(침묵 가운데 반복한다.)(191)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
220412. 성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산업 혁명 이후 유럽의 강대국들은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이 식민지 쟁탈전의 선두 주자는 영국과 프랑스였는데, 특별히 영국의 식민지 중 오스트레일리아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의 죄수들을 수용하는 식민지였던 것입니다. 죄인들을 모두 배에 태워 보내 버리면 영국은 진정한 평화가 오리라 생각했고, 더 번영할 것으로 본 것입니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는 삶의 질이 매우 우수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죄인을 수용하기 위해 점령한 나라인데, 지금은 영국보다도 더 살기 좋은 나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죄인을 무조건 없애면 진정한 평화가 올까요? 아닙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가릴 것 없이 모두 같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차별 없이 서로를 받아들이며 살아갈 때, 분명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늘 용서와 사랑을 말씀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악을 그 자리에 없애지 않는 것은 모두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합니까? 끊임없이 판단과 단죄를 하면서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반에도 그들 모두 사랑으로 함께하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신을 배반할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빵을 적셔서 유다에게 주시지요. 이는 유다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인 욕망에 젖어서 자기 길을 바꾸지 않습니다. 어둠의 길로 달려 나갑니다.
예수님의 외로움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이 직접 뽑은 제자가 배신하고,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베드로는 곧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다른 제자 역시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당신 수난과 죽음을 온전히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짊어져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장담을 보게 됩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 13,37)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주님 앞에 호언장담할 때가 많습니다. 목숨을 내놓을 것처럼, 끝까지 주님과 함께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유혹에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조건을 내겁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아무 일도 없으면, 건강이 허락되면, 가정이 평화로우면, 돈을 많이 벌면, 높은 지위에 올라가면…. 이런 조건이 해결되면 또 다른 조건을 내세우면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핑계를 만드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은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윌리엄 제임스).
-----------------
----------------------------------------------------
=========================================================
08:10 추가
----------------------------------------------------
----------------------------------------------------
220412. 성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우리는 <성삼일>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밝아져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제자들을 덮치자,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사실,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제자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빵을 적셔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적셔서 주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베푸는 충실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랑을 등지고서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면밀히 계획한 바를 어둠 속에서 행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으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12,10).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어둠과 악으로부터오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약함과 과신으로부터오는 밤입니다. 또한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베드로같이, 유다같이 곧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넘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일어서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까달아 알고 뉘우치고 성사를 본다고 해도,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비록 용서는 받았다할지라도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서서 넘어졌던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속으로 건너와서 어둠을 바라보아야 할 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이요,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걷을 것입니다.
하오니, 빛이신 주님! 저를 비추소서! 제가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오늘 제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빛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주님!
어둠에 휩싸여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빛을 비추소서.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넘어지기도 전부터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보게 주소서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 걷게 하소서.
빛을 받아 빛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
220412. 성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배신의 죄보다 사랑입니다
배신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등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하게 되며 차라리 몰랐던 사람만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에 서운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폭과 깊이, 넓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역사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한 것을 보면 인정받던 제자입니다. 그가 유감에 빠져 배신을 합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알고 내내 번민하셨습니다. 속을 다 아시고 그것을 품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안에서 침묵으로 철저히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그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는 마음을 주고받는 소통이 없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유다처럼 약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릅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사람이지만 회개하여 주님의 도구로 항구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한 탓입니다. 유다의 파멸은 자비를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비 안에 굳건해야 합니다. 주님의 가장 큰 약점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결코 용서하는 데 더디지 않습니다. 인간은 죄에 따르는 벌을 생각하지만, 주님은 용서와 자비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용서를 청하는데 굼뜬 것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나를 볼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혹 앞에서 나를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하느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커다란 공로가 될 것이고, 사탄의 편에 서서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파멸의 길,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는 항상 사탄의 말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늘 하느님의 말씀만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선택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단호하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혹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나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보다는 자비를 갈망하는 만큼 예수님 곁에 꼭 붙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절대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던 제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사랑을 받는 제자였습니다.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궁금한 것이 있으면 가까이 다가가 부끄러움이 없이 묻고 답을 얻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주님과 소통을 잘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수난에 앞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후,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 말씀이 생각나서 울었습니다. 그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명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자책으로 목숨을 건 유다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결국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은 주님과 끊임없는 소통입니다. 주님과의 대화로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20412. 성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하느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하느님께서는 메시아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셨습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이 말씀은 이사야가 전한 메시아 예언 중 둘째 꼭지의 결론입니다(이사 49,6). 메시아께서 민족들에게 빛을 비추시기 위한 역할의 첫 번째는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는 일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심으로써 참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그 열두 제자를 주춧돌로 하여 ‘이스라엘의 생존자들’, 즉 아나빔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우상숭배에 물들어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했던 유다인들은 모조리 제외시키시고, 하느님 신앙에 충실한 그들만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우선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어(마르 6,7-13) 불러 모으신 예순 제자들까지 해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루카 10,1-12). 이 일흔두 제자들 말고도 니코데모, 아리마태아의 요셉, 라자로 등을 비롯한 토박이 제자들까지 합하여 도합 백 스무 명이 또 포함될 수 있습니다(사도 1,15).
그런데 이들 남성들 말고도 여인들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비롯해서, 수산나, 요안나, 막달라 마리아, 라자로의 두 동생인 마르타와 마리아 등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도 들던 여인들이 그들입니다. 이들까지가 모세 시절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의 유다인 혈통 중에서 예수님 곁에 남은 자들입니다. 이 남은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이 셋째 역할로 남아 있습니다만, 이 남은 자들 중에서 배신자들이 나왔습니다.
애초에 열두 제자 중 하나로 부름을 받았던 이스카리옷 유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스승을 팔아넘기는 배신을 저질렀고, 열두 제자 중 수제자로 임명을 받았던 베드로는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배신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뭇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빛을 전하는 이 세 번째 과정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질 것인데, 이 유다와 베드로에서 일어난 바와 같은 배신의 유형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보다 앞서서 자신의 뜻대로 끌고 가려 하다가 배신을 저질렀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뒤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기를 거절하다가 배신을 저질렀습니다.
메시아적 백성으로서 우리 민족이 민족들의 빛을 비추고자 하면 첫째, 예로부터 제천의식(祭天儀式)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하느님 신앙의 전통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는 한민족이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천손의식(天孫意識)의 발로였는데, 원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던 아담처럼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빌고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처럼 감사를 드리는 한편, 무엇보다도 속죄와 감사의 지향을 담아 하느님의 축복을 바라는 제사의 전통을 계승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미사는 그리스도를 제물로 삼아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기도는 제물 없이 바치는 제사입니다. 여기서 제사를 거부하는 일이 배신입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자신의 뜻을 하느님께 강요하려 들면 유다적인 배신이 될 것이요, 제사를 지내되 하느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짊어지기를 싫어하면 베드로적인 배신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공동체적인 문화를 이룩해온 역사를 계승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하시며 공동체를 원형질로 하는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개인의 존엄성이 짓밟히지 않고 존중되면서도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의 문화를 꽃피우라는 믿음의 요청이 이 ‘우리’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사실 미사는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이면서도, 믿는 이들이 형제자매의 ‘우리’로 모여서 성찬을 나누는 공동체의 잔치입니다. 그런데도 개인들의 존엄성을 존중하기보다 억지로 끌고 가려 하면 유다적인 배신이 되어서 집단화되어 버릴 것이요, 우리가 되려 하지 않고 제각기 살려 하면 베드로적인 배신이 되어서 모래알처럼 흩어진 개인들의 집합이 되고 말 것입니다.
셋째는 공동선을 이루는 지혜를 성령의 이끄심에서 얻어서 우리 사회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로서 일체이시듯이, 다양한 가운데에서도 일치를 이루는 것이 공동선의 지혜입니다. 그러자면 우선, 전쟁을 잠시 멈추고 있을 뿐인 남북한 겨레가 평화의 가치를 위하여 서로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민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룩해야 할 과업을 강대국들의 시혜에 의존하거나 정부에만 맡겨두어서는 메시아적 백성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는커녕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요원해질 것입니다.
유다 최고의회의 힘을 이용하려 했던 유다가 걸려 넘어진 유혹입니다. 또한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양극화 현상에 대하여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정책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대동세상을 이룩해야 할 과업을 부자와 기득권 세력의 자선에 기대하거나 정부에만 맡겨두어서는 내부 갈등이 무한증폭되면서 메시아적 백성이 대동세상을 이루기는커녕 민족들의 빛이 되기 전에 내부 동력을 소진하고 말 것입니다. 십자가를 피하고자 했던 베드로가 걸려 넘어진 유혹입니다.
----------------------------------------------------
220412. 성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네티컷 한인 성당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립니다. 신부님과 공동체 분들을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를 보았습니다. 일기예보에는 비와 천둥 그리고 벼락이 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걱정하면서 출발하는데 하늘은 흐리고 안개는 끼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해가 나오며 오히려 조금 더웠습니다. 일기예보는 다행히 맞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밤늦게 잠자리에 들면서 비와 천둥 그리고 벼락이 있었습니다. 일기예보는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과 기술의 예측입니다. 인공위성과 컴퓨터는 거의 정확하게 일기예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자연현상을 현대의 과학과 기술로도 아직은 100%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서에 ‘예언서’가 있습니다. 예언서는 일기예보처럼 앞으로 드러날 일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서는 무속인들처럼 사람의 앞날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해주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직무는 사람의 미래를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의 직무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역사를 통해서 현재의 상황에 대한 미래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은 예언을 하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하느님의 자비는 이방인이었던 시렙다의 과부에게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하느님의 자비는 이방인이었던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에게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과 갈망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누가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을까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는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고 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가 있습니다.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레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충실하게 따라갔던 이들이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의 삶이 전혀 달라졌음을 알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며 또한 희망을 버렸습니다. 희망을 버렸던 유다는 용서받을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유다는 쓸쓸하게 자신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다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베드로는 절망을 버렸습니다. 마음 안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완벽하게, 깨끗하게 살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잘못과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정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로 우리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또한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
220412. 성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는 누구인가?
- 삶은 선물膳物이자 과제課題이다 -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뱃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시편71,5-6ㄱㄴ)
‘나는 누구인가? 삶은 선물이자 과제이다.’ 어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써놓은 제목입니다. 참 중요한 물음이 ‘나는 누구인가?’ 내 정체성을 묻는 물음입니다. 어제 어느 수녀와의 면담성사 시 드린 충고도 생각납니다.
“삶은 한폭의 그림같기도 하고 한권의 성경책 같기도 합니다. 언젠가 갑자기 성공적인 우연한 인생은 없습니다. 아무리 삶의 그림 잘 그려가다 막판에 망치면 좋은 그림 완성은 불가능합니다. 내 삶의 고유한 성경책도 그러합니다. 마지막 까지 하루하루 정성껏 써내려 가야 할 아직은 미완의 내 삶의 고유한 성경책입니다.
인생 노년에 공든 탑이 무너지듯 결정적 실수로 신뢰를 상실하면 회복하기도 불가능합니다. 인생 과제의 완성을 향해 살아갈수록 깨어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몸이 영혼을 끌고 가선 안되고 끝까지 영혼이 주인이 되어 육신을 끌고 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내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내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이래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라는 제 좌우명 시의 첫연을 좋아합니다. 2012년에 수도원 설립 25주년 기념 잔치에서 발표했으니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날마다 읽어보는 또 참 많이 인용했던 7연에 걸친 긴 좌우명 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각기 고유의 나무들이 흡사 믿는 이들의 삶을 닮았습니다. 하늘을 향하지만 각자 제 자리에서 고유의 기품있는 제 모습으로 커가는 나무들입니다. 나무는 모두가 ‘꽃나무’이고 사람 역시 모두가 끊임없이 사랑의 꽃들 피어내며 살아가는 ‘꽃사람’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물어가며 하루하루 내 인생을 아름답게 완성해가야 합니다. 삶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써놨던 ‘오직 한 권뿐인 내 인생성경’이란 글입니다.
“알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지극히 소중한 살아있는 성경 하느님의 책이다
모두 나름대로 순례자되어
하느님 바다 향해 굽이굽이 은총 반짝이며
때로는 고요히 또 때로는 힘차게
쉼없이 흐르는 강같은
죽어야 끝나는 오직 한 권뿐인 살아있는 인생성경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하느님을 대하듯
존경과 사랑으로 그 인생 성경을 대할 일이다.
때때로 내 인생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성독聖讀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을 일이다.”-2006.4
16년전 고백의 시인데 이렇게 오늘 강론에 인용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으니 하느님의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일어나는 일이 모두 하느님의 뜻은 아닐지라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치에 희생된 옥중서간의 저자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의 말입니다. 만약 이랬더라면 하는 가정법 물음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어쨌든 오늘 지금 여기까지 우리 하나하나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화답송 후렴이 적절합니다.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시편71,15ㄴㄷ)
회개하여 시작하면 언제든 늦지 않습니다. 심기일전 하여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하며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정성을 다해 써내려 가며 날마다 새롭게 시작해야 할 새날의 선물들입니다.
왜 이런 묵상입니까? 오늘 복음의 배반자 유다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이런 실패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변절, 배신했을 때의 누구나의 가능성이 바로 유다입니다. 다음 대목의 묘사가 충격적입니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예수님을 배반함으로 결국 어둠에 심연에 떨어진 실패인생으로 끝난 유다입니다. 어제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던 마리아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오늘 복음의 부정적 주인공 유다입니다. 운명으로 돌리기에는 유다의 책임도 큽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결단과 분별의 자유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책임입니다.
아마도 유다는 평소 기도생활의 소홀로 주님과의 관계도 소원했던 듯 합니다. 유다의 배반 역시 하느님 섭리의 맥락에서 읽는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 예수님입니다. 유다가 나가자 즉시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셨다.”
설상가상으로 유다의 배반에 이어 베드로까지 배반이 예언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베드로를 향한 마지막 말마디도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의 심중은 얼마나 착잡했겠는지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유다와 베드로의 결정적 차이는 베드로는 신속히 회개하여 다시 새롭게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의 마리아와 오늘 복음의 유다와 베드로는 우리를 비춰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됩니다. 우연한 존재는 없습니다. 모두가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사람들인 존재들입니다. 결코 함부로 방치하며 되는 대로 자포자기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가 예수님은 물론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을 알려 줍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네가 나의 종이 되어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스라엘이 지칭하는 바 예수님이자,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 하나하나입니다. 얼마나 활짝 열린 하느님의 광대한 시야요 지평인지요! 성주간 예수님을 지칭한 예언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새 이스라엘인 우리의 자랑스런 신원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의 하루, 내 고유의 성경책 한 패이지를 잘 써가시길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
220412. 성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목숨을 건네 생명을 낳는 사랑 ♣
요한복음은 제 2부가 시작되는 제 13장부터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때에 관한 긴박감이 더해가는 생명의 신비의 핵심 사건을 전해준다. 오늘의 복음 대목은 이른바 예수님의 고별 담화(13,31-14,31)의 머리말에 해당된다.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함께 묵상해 볼 수 있다.
먼저 배신자 유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실제로 예수님을 팔아 넘겨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사건은 밤에 일어났다. 여기서 어둠은 보다 깊은 상징적인 뜻이 있다. 어둠은 예수님께는 유다의 배반에 뒤따르는 영광의 도래를 뜻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이 어두운 밤은 현세적인 것들에 눈이 멀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태도요, 이기심과 탐욕과 냉정함이요 시기 질투로 가득한 마음이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교만 덩어리이다. 유다가 급류에 빨려가듯 사라져간 어둠의 자리에는 죽음의 공허만이 남았다. 오늘의 유다는 누구일까? 나는 지금 무엇을 쫓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13,33)라고 유다인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이제는 베드로에게 하신다. 장면이 예루살렘 성안으로 바뀌면서 십자가의 죽음은 더욱 가까워지고 있는데, 이제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은”(13,33)이란 말은 베드로로 하여금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기다리라는 말이다. 곧,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 이는 누구나 자신의 의지를 끊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13,35) 하고 물으며,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13,37) 하고 장담한다. 그러나 그는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다. 사실 베드로만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버리고 도망갔고, 한 제자는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갔다(마르14,50-51).
우리는 이러한 제자들의 태도를 보면서 그분을 따르는 ‘추종의 자세’를 돌아보아야 하겠다. 신앙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각자의 삶이 말해준다. 안다는 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됨의 의미는 그분과의 존재론적인 일치, 사랑의 긴밀한 친교에 있다. 제자됨은 그래서 요란한 외침이 아니요 일시적인 정열이나 과시나 감정이 아니라, 그분을 그윽한 사랑으로 응시하는 것이다. 가슴이 타 버리도록... 그리고 우리는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의 전 삶의 여정을 함께 했던 모든 제자들의 도망가는 모습을 비통한 마음으로 떠올리면서 참으로 겸손하고 항구한 마음으로 그분의 길을 걸어가자. 오늘 나의 몸짓은 어떠한가?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통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고통 없는 안락의자를 향해 도망가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 그리고 당신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 나아가 당신을 배반하고 팔아넘긴 유다에 대해서도 한마디 책망조차 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피와 땀을 쏟아 그 모든 것을 녹이시고 감싸시며, 배척도 판단도 단죄도 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아시고 ‘마음이 산란하시어’(13,21) 몹시 고통스러웠음에도 손님을 대하는 우정의 표시로 ‘빵을 적셔주셨다.’(13,26) 그분은 배반한 유다에게 끝까지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태도는 거미와도 같았다. 거미는 암수가 교미를 한 뒤 암컷이 수컷의 몸을 먹고 새끼를 낳는다고 한다. 그런데 또 새끼 거미들은 어미 거미를 먹고 영양분을 취해 성장한다. 이렇게 거미들은 자신의 전 생명을 서로에게 건네준다. 예수님께서는 거미와 같은 삶을 사셨다. 나는 오늘 어디에 나의 생명을 쏟을 것인가? 나의 모습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밑거름이 되고 있으며, 과연 모두에게 구원을 희망을 가져다주는 수난 받는 야훼 종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가?
----------------------------------------------------
220412. 성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 불행한 유다여! 아, 불쌍한 유다여!
최후의 만찬이 거행된 성목요일의 하루 전날인 수요일 밤, 유다는 제자단에서 몰래 빠져나와 수석사제들을 찾아갑니다. 행여 누군가가 볼세라 여우처럼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은밀히 원수들과 내통합니다.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합니다.
사실 유다는 스승 예수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열두사도단에 뽑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탁월한 수완을 인정하셔서 사도단 가운데서도 중책인 총무 역할까지 맡기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유다는 이토록 예수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풍성한 예수님의 은총과 자비 속에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 유다가 이제는 스승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마치 물건처럼, 종처럼 말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태연히 자신의 계획을 말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다가 원수들과 가격을 흥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적대자들은 예수님의 몸값으로 은돈 서른 닢을 유다에게 지불합니다. 유다는 스승이자 만왕의 왕 예수님을 팔아넘긴 대가로 겨우 한 명의 노예 몸값을 받았습니다.
은돈 서른 닢을 챙긴 유다의 행동을 보십시오. 너무나도 태연하게 제자단에 합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한 식탁에 앉습니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 보십시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님을 팔아넘긴 당시 배반자 유다의 심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당시 유다는 사도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재정 담당은 아무에게나 맡기는 것이 아닐 텐데,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그 책임을 맡겼습니다. 그만큼 신뢰가 가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유다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전도 여행에 파견되었고,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고 치유와 구마 활동도 행하였습니다.
그러던 유다가 왜 배반을 하게 되었을까요? 유다는 세월과 더불어 그 순수하고 좋았던 첫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제자단의 모든 경제를 책임지던 유다였습니다. 때로 막대한 금액의 기부금도 만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특별대우에도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졌습니다. 유다의 몸과 마음은 조금씩 예수님이 아니라 돈에로 기울어져만 갔습니다.
이미 돈맛을 알아버린 유다였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유다였기에 스승마저도 팔아치웁니다. 스승을 팔아넘기기 위해 스승에게 입맞춤할 정도까지 파렴치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유다가 얼마나 불쌍했던지 예로니모 성인의 이렇게 외쳤답니다.
“아, 불행한 유다여! 아, 불쌍한 유다여!”
예수님의 일을 하는 우리 교회 구성원들 역시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사랑의 실천이나, 복음 선포는 뒷전인 채 돈만 밝히기 시작할 때, 물질만능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 우리 인생 역시 유다처럼 불쌍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투명성을 상실할 때, 달콤한 금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때 우리 역시 유다처럼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
220412. 성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는 살아있는가? 산 사람은 살리고 죽은 사람은 죽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해하는 베드로에게도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새 계명인 이유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때는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후입니다.
계명은 누군가의 뜻이고 그 뜻을 따라주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영광을 올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사랑으로 당신에게 영광을 올리면 당신도 미래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2)
사랑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내 목숨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면 하느님은 나에게 다시 생명을 주셔서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유다도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는 일을 한다고 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의사는 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일까요?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또 열심히만 하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의사 이국종 선생의 아버지는 6·25 때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급 국가유공자입니다. 그런데 국가유공자의 자녀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아 국가유공자 의료 복지 카드를 내밀며 병원을 전전했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고 다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다오직 ‘이학산’이라는 외과 의사만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너에게 받을 의료비는 없단다”라며 이국종 어린이를 치료해주었습니다. 이 말에 감동한 이국종은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자는 꿈을 품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환자는 돈 낸 만큼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받아야 한다”라는 삶의 원칙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국종 선생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아덴만 작전으로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석해균 선장을 치료하겠다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총상이 심해, 마치 떨어지는 칼날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욕을 먹는 일이었습니다.
이국종 선생은 자원하여 그를 살리기로 합니다. 하지만 상태가 심해 그곳에서는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이미 딱딱해지고 팔다리 네 개 중 세 개도 겨우 붙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지혈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국종 선생은 환자를 급하게 이송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환자를 수송할 수 있는 비행기를 빌리는데 4억 4,000만 원이었습니다. 외교부의 보증이 필요했는데 국가는 여러 절차를 이야기하며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이국종 선행은 “이송비 4억 4천은 내가 낼 테니 일단 이송하라”라는 말을 하고 이국종이라는 이름으로 비행기를 빌려 한국에서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석해균 선장은 6개월 만에 두 발로 걸어서 퇴원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명세를 치른 이국종 선생 덕분으로 아주대 병원은 유명해졌지만, 진짜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사실 이국종 교수팀이 긴박하게 데려와 살리는 환자가 많아질수록 병원은 적자가 누적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돈으로는 한 사람을 살리는 데 무리가 있었고 그 이후 추가 비용은 병원이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료 의사들도 자신들이 벌어 좋은 기계를 사야 할 돈들이 다 중증외상센터 적자 메우는 데로 들어간다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중증외상센터로 오시는 분들은 다 험한 직종에 종사하는 경제력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국종이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수술환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병원은 더 큰 부담을 떠안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국종 교수는 잠도 자지 못하며 일하는데 윗사람과 동료 교수들에게 종일 욕을 먹으며 견뎌야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의료시스템의 문제를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국종은 결국 권역외상센터 지원 예산 201억을 받아내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변한 게 없었습니다. 7년 동안 고장 난 무전기를 바꿔 달라는 말만 수백 번을 했다며 분노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일개 의사가 세상을 바꾸기에 역부족이라고 여긴 이국종 교수는 결국 아주대병원에 사퇴 의사를 밝히게 됩니다.
“한국에서 다시는 이거 안 할 거예요. 이번 생은 망했습니다. 두 번 다신 외상센터에서 근무하지 않을 것입니다.”
[출처: ‘이국종 교수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 결국 사퇴하고 떠난 소중한 인재’, 유튜브 채널, 그시절 그배우]
물론 동료 의사들이나 나라 관리들도 살자고 그런 결정들을 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자기 뜻을 위해 지나치게 에너지를 다 빼버려 소진된 이국종 교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의사지만 결국엔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살려내지 못하는 시스템 속에 갇힌 현실에서 어떻게 두 부류로 갈리는지는 볼 수 있습니다.
병원과 나라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나와 전혀 상관없고 이익도 안 되는 가난한 이들을 살릴 것인가. 병원을 살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환자를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병원을 살린다는 것 안에는 ‘내가 살겠다’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병원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만 내가 살겠다는 마음이 조금만 들어있어도 누군가는 죽게 되는 데 협조를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던 이들도 많은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였습니다. 가리옷 유다도 그 말에 동의하여 자신의 나라를 위해 예수님을 넘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안에 ‘그래야 나도 살지!’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은 나를 죽이려는 뜻이 아니면 실천될 수 없는 계명입니다. 그래서 살려고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위가 다 하느님의 뜻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이웃이 죽는지, 혹은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는 일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이 두 부분에 속하게 됩니다.
내가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알아보는 법은 간단합니다. 나의 모든 행위는 누군가는 살리고 동시에 누군가는 죽입니다. 오직 산 사람만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생명이 필요하여 타인을 죽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빛으로 갈 것인지, 어둠으로 갈 것인지는 명확합니다. 빛으로 가는 길만이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