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전기 발상지 최초의 전등소
전기발전소의 위치가 원래 건청궁 뒤쪽이 아닌 현재 새롭게 발굴중인 향원정 남동쪽에 있었다고 필자는 발표하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향원교가 북쪽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향원정 남측지역에서 1887년 점등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직류 볼트 수치가 일정하지 않아 불이 깜빡깜빡 했는데 불이 건들거린다고 해서 건달불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향원정에서 물을 끌어다가 석탄을 연소하여 스팀을 만들어 발전을 했는데 물을 순환하는 과정에서 과열된 물이 향원지으로 흘러들어가는 바람에 향원지의 수온이 상승하여 물고기들이 떼죽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전기라는 것이 불길한 것으로 믿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국에 전기 발상지 표석으로 건청궁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필자는 전기 발상지는 이곳이 아니라 향원지 남동쪽이라고 밝히고 있고, 표석을 옮겨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기 발상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소(電氣燈機關所, Electric light plant)터가 경복궁 영훈당(永薰堂) 발굴현장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리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부터 경복궁(景福宮) 흥복전(興福殿) 권역의 영훈당 터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188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전깃불을 밝힌 전등소의 위치를 향원지(香遠池)와 영훈당 사이로 확인한 것이다.
경복궁 내 흥복전과 향원지 사이에 위치한 영훈당은 고종(高宗, 재위 1863년~1907년) 연간에 건립되어 조정의 내각회의와 경연, 외국공사 접경 등 왕의 편전(便殿)으로 사용되던 흥복전의 부속 전각(殿閣)이다. 흥복전 북쪽 함화당ㆍ집경당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그 쓰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명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다만 궁궐과 관청에 각종 그릇을 납품하던 공인 지규식이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에 영훈당을 대전(大殿)의 곳간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왕의 편전으로 이용되었던 흥복전이 대전이라면, 영훈당은 흥복전 운영을 위한 창고 등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고려대학교 소장 자료인 〈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1887년~1890년 제작 추정)에는 흥복전 권역 북편에 위치한 춘희당(春凞堂)ㆍ보광당(寶廣堂)ㆍ영훈당(永勳堂)이 ‘日’자형의 평면 형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세 건물을 둘러싼 주변 행각의 문 명칭이 1868년 6월 10일자 〈일성록(日省錄)〉에 흥복전 후행각 문으로 기록된 명칭들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춘희당ㆍ보광당ㆍ영훈당은 흥복전의 후행각으로 조성되어 흥복전의 부속 건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1917년 창덕궁 복구를 위해 흥복전 주변 행각들이 훼철될 때 함께 철거되어 왜식(倭式) 정원으로 조성되며 매립되었다가 이번 문화재역구소 발굴조사로 구체적인 건물지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발전소인 전등소 위치까지 보여주는 유지(遺址)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전등소의 위치 규명은 특히 우리나라 근대문명의 상징으로서 전기 도입의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동안 향원지의 북쪽과 건청궁(乾淸宮) 남쪽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온 전등소의 위치가 유적을 통해 향원정 동남쪽의 정확히 규명된 것이다. 그리고 이번 발굴에서는 전등소 위치뿐만 아니라 당시 화력발전에 사용된 석탄연료 저장고인 탄고(炭庫)의 유구(遺構)도 확인되었고, 약간의 석탄과 석탄 슬래그도 발견되었다. 아울러 아크등(arc lamp) 심지(탄소봉), ‘1870’이란 연대가 새겨진 유리 절연체, 세라믹애자, 전구베이스, 로우젯(Rosette, 전등기구의 코드를 접속하던 기구) 등 전기 관련 유물도 함께 출토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경복궁의 전등소 설치는 구한말 조선 정부(고종)가 추진한 근대 과학문명에 대한 개화사업(산업진흥정책)의 하나로서 궁중 전기등 점등계획에 따라 1884년 9월 4일 미국 에디슨전기등회사에 발전설비와 전등기기를 발주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3년만인 1887년(고종 24년) 초에 경복궁 안 건청궁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전깃불이 켜졌다. 당시 발전은 보일러에서 발생시킨 증기로 증기엔진을 회전시킨 다음, 엔진의 플라이휠에 벨트를 걸어 다이나모(직류)의 전기자를 회전시켜 전기를 생산했으므로 발전시스템은 기본적으로 기전(機電)시스템이었다. 전등을 전기등(電氣燈)이라 부른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발전소(전등소) 건립은 에디슨전기등회사의 미국인 전등기사(전등교사) 맥케이(William W. Mckay, 麥巨, 1864년~1887년)를 고빙(雇聘)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전기등설비 건설을 감독하여 건청궁 일원에 전력생산과 보일러 용수의 공급이 용이한 향원지 일대에 발전소 건물을 세우고 건청궁 내 왕의 처소인 장안당(長安堂)과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坤寧閤), 대청과 앞뜰, 궁의 담 밖과 향원정을 위시하여 향원지 주변에 가로등을 설치하고 점등하였다. 실내는 전등을 켜고 실외 가로등은 아크등을 사용한 건으로 보이는데, 아크등 심지가 이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우리나라에 근대 과학기술문명의 상징인 전기조명이 시작된 것은 1879sus 10월 21일 미국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Thomas A. Edison, 1847년~1931년)이 탄소 필라멘트를 사용하여 백열등을 제작하고 실용화에 성공한지 8년만의 일이다.
당시 고종은 새로운 문물 도입의 열망과 개화의지 피력에 효과가 큰 장소로서 왕과 왕비가 거처하던 건청궁을 선택했고, 따라서 여기에 가장 먼저 전기등을 가설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건청궁은 12세에 왕이 되어 10년 만에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벗어나 친정(親政)을 선언한 고종이 정치적 자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의 표명으로서 건축한 건물이었다. 고종은 개항을 통해 서양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청과 일본ㆍ미국 등 여러 나라와 연차적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그들의 앞선 문물을 배워오도록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한편, 청과 일본ㆍ미국 등 여러 나라와 연차적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그들의 앞선 문물을 배워오도록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 가운데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규(朝美修好通商條規)가 맺어진 이후 이루어진 미국으로의 보빙사(報聘使) 파견은 이후 조선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문벌 있는 20대의 개화파 청년들로 구성된 보빙사절단은 미국의 전기회사ㆍ철도회사ㆍ병원ㆍ소방서 등 근대적 국가시설과 제도를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조선에 경복궁 내 전등 가설, 우정국(郵征局)이나 육영공원(育英公院) 등의 설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경복궁 향원정 앞에 설치된 전등소 설비는 석탄 연소식 보일러에 증기엔진, 에디슨 다이나모(직류) 발전기로 구성되어 16촉광(燭光, 1촉광은 양초 1개의 밝기) 백열등 750개를 켤 수 있는 규모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우수한 설비였다. 미국 국립에디슨유적지기념관에 보관된 뉴욕주재 조선명예총영사였던 프레이자(Everett Frazar)의 전문(電文)과 더불어 당시 에디슨 회사의 총지배인인 프란시스 업튼이 에디슨에게 보낸 조선 전기에 대한 보고를 보면, “경복궁의 전등시설은 동양에서 에디슨 제품의 판촉을 위해 모델 플랜트로 시공되었으며, 앞으로 일본 궁성에 설치될 시설과 함께 동양에서는 유일한 일류시설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프레이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설비 도입과 관련한 교섭을 처음부터 담당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주선한 인물로서, 조선 명예총영사에 임명된 직후인 1884년 4월 16일 푸트(Lucius H. Foote, 초대 주한미국공사) 공사에게 에디슨전기등회사의 전등 및 전화 독점권 신청을 제의를 전문(電文)으로 알리고, 조선정부와의 교섭을 요청하였다.
이번 경복궁 영훈당 터 발굴조사를 통해 전등소의 정확한 위차가 밝혀짐으로써 우리나라 전기도입의 역사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한국전력에서 1987년 전기 도입 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세워놓은 건청궁 앞 전기발상지 표지석 또한 새로운 위치로 이전할 필요가 생겼다. 더불어 향우 ‘경복궁 복원정비계획’에 따른 경복궁의 원형 복원 과정에서 전등소 복원도 함께 추진되길 기대한다. 이와함께 불명확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시등일에 대한 규명도 추진되어야 한다. 전등소는 구한말 격동기에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전기설비를 도입하여 근대적 과학문명의 빛을 밝힌 매우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다. 그래서 이번 발굴로 그 유적과 관련 유물을 발견하게 된 것은 전기 도입 128년 만에 개회의 상징적 공간을 다시 만나게 되는 국가적, 문화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글 : 민병근(전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