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중국 북부에서 흥망한 국가군(國家群) 또는 그 시대. 5호란 흉노(匈奴), 갈(흉노의 별종)·저(티베트계)·강(羌;티베트계)·선비(鮮卑;투르크계 설이 강함)를 가리키는데, 이들이 중국 북부에 16개의 왕조를 세웠으므로 5호 16국이라 한다. 16국 가운데에는 한인(漢人)의 나라도 포함된다.
5호시대의 대세
흉노의 유연(劉淵)이 자신을 한왕(漢王)이라 칭하고, 파만(巴蠻)의 이웅(李雄)도 자신을 성도왕(成都王)이라 칭함으로써 304년, 5호16국시대가 시작되었다. 한(漢)나라는 311년에 뤄양[洛陽(낙양)]을 함락시켜 회제(懷帝)를 사로잡고(永嘉의 亂), 316년에는 장안(長安)을 함락시켜 민제(愍帝)를 사로잡아 서진(西晉)을 멸망시키고 국호를 조(趙;前趙)라 하였다. 그 뒤로는 남방에 동진(東晉)이 있고 화북(華北)에는 5호제국의 패권다툼이 계속되었는데, 5호의 패권다툼 과정에서는 동·서 양대 세력이 대립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즉 전조에 대해서는 전에 유연의 무장(武將)이었던 석륵(石勒)이 세운 후조(後趙)가 양국(襄國)에 도읍을 두고 전조를 정복하여 화북을 통일하였으나, 후조도 내부분열로 멸망하였다. 이후 업에 세워진 모용씨(慕容氏)의 전연(前燕)과 장안에 세워진 전진(前秦)이 대치하였는데, 5호 제일의 명군으로 평가되는 부견 통치하의 전진이 전연을 쓰러뜨리고, 뒤이어 대(代)·전량(前凉) 2국도 멸망시킴으로써 376년에 화북의 통일에 성공하였고, 서역(西城)으로도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중국통일을 꾀하여 동진을 원정하다가 383년 비수의 싸움에서 패하자 전진 지배하의 각 종족은 일제히 독립하여, 400년에는 9국이 분립하는 극도의 분열상태를 나타냈다. 그 가운데서도 중심을 이룬 것은 전연의 계보인 후연(後燕)과 장안에 성립된 후진(後秦)이었는데, 옛날의 대국 후신인 북위(北魏)가 후연을 중원(中原)에서 몰아내고 439년에 화북 통일에 성공함으로써 5호 16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후로는 동진 대신에 420년 강남에 성립된 송(宋)나라와 북위가 대치하는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다.
5호시대의 배경
16국 이외에도 단명으로 끝난 서연(西燕)·위(魏)나 북위의 전신인 대(代)와 같은 나라들이 있었고, 또 정령(丁零)의 적씨(翟氏) 등의 소정권도 있었으므로 이 시대는 정치적 분열을 제일의 특색으로 한다. 그러나 5호만이 이를 야기한 것은 아니다. 후한(後漢) 말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 즉 2세기 말부터 삼국분립 등 이미 분열의 양상은 깊었는데, 이는 호족세력의 신장이라는 중국사회 내부의 변화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배경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5호의 봉기를 촉발시킨 요인은 8왕의 난에 의한 진(晉)의 중앙정부 약화였으며, 더욱이 8왕들은 이민족의 무력까지 끌어들여 서로 싸웠던 것이다. 또 5호 여러 부족의 대부분은 한(漢)나라 이후에 중국의 이민족 정복으로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온 존재이다. 1세기에 후한에 항복하여 장성 남변에 살고 있던 남흉노는 3세기에는 산시성[山西省(산서성)] 전역에 분포하였고, 서방의 저·강도 후한의 토벌을 받아 간쑤[甘肅(감숙)]·산시[陝西(섬서)]에 옮겨져 있었다. 더욱이 이들 부족은 한인(漢人)의 압박을 받고 예속적 지위에 있었으므로, 봉기는 그러한 상황에서의 자립성 회복의 시도였다. 이와 같이 중국 사회의 내부적·대외적 발전이 초래한 모순이 5호시대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호족(胡族)에 의한 지배
이 시대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색은 호족에 의한 한족 지배의 성립에 있다. 지배종족을 중심으로 한 비한족(非漢族;호족)이 유목시대의 부족제를 유지하면서 조직화되어 군사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핵심을 형성하였다. 군사를 분장(分掌)하는 것은 대개 종실(宗室)의 일원인 제왕(諸王)이었다. 한편, 한족에 대해서는 대개의 경우, 진(秦)·한 이래의 군현제(郡縣制)를 적용하여 관료를 통하여서 지배했으니 한족과 호족으로 형태를 달리한 이중지배체제가 실시된 셈이며, 그 전체를 통치한 것이 황제 또는 천자였다(왕 또는 공의 칭호로 머문 나라도 있다). 또한 호족을 통치하는 칭호로서 전조·후조 등에서는 대선우(大單于)가 있었는데, 전연에서는 제호(帝號)를 취함과 동시에 폐지되는 등 그 존폐는 일정하지 않았고, 또 여기에 취임한 자가 황태자 등 차기의 황제 후보자였던 데서 볼 수 있듯이 황제보다 하위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의 체제는 군사를 분장하는 제왕의 내부항쟁으로 동요되기 쉬웠고, 5호의 여러 나라는 대부분 단명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 5호의 제국은 한인통치의 필요상 한인 호족(豪族)을 지방관이나 장군에 임명하여 그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한인 지식인을 등용하였다. 후조의 석륵이 설치한 군자영(君子營)은 특히 유명하여 명신 장빈(張賓)이 나왔으며 전진의 제패에는 한인 출신의 명재상 왕맹(王猛)의 공이 컸다. 또 5호 여러 나라에서는 정복지역의 백성이나 병사를 수도 주변으로 이주시켜 그들의 지배를 굳히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많이 취하였다. 5호의 여러 군주는 일반적으로 불교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후조는 승려 불도징(佛圖澄)에게 대한 것같이 고승이 지닌 신이적(神異的) 능력의 이용, 또는 인심수습을 꾀함으로써 불교의 성행을 가져왔다. 둔황[敦煌(돈황)]의 석굴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전진의 통치 때부터였다. 군주의 보호를 받는 승려로는 그 밖에 전진의 도안(道安), 후진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유명하며, 특히 구마라습의 역경사업은 귀중하다. 5호시대는 정치적 분열과 호족(胡族)이라는 새로운 세력과 함께 수(隋)·당(唐)으로 이어지는 과도적 시대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