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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로드 국토종주 통일대장정
피스로드 국토종주 통일 대장정 ㅡ그것은 한편의 장엄한 역사의 대 드라마였다. 동시에 필자에 있어선 잊지못할 꿈의 한 순간이었으며,무모한 도전과 기적의 역사가 펼쳐진 기록의 장이기도 하다, 필자는 2015년 행사에는 직접 선수로 참가하여 부산에서 서울 광화문광장에 이르는 전 구간을 자전거를 타고 국토종주를 완주 하였으며 그 이듬해 2016년 행사에도 직접 선수로 뛰어보길 희망했지만, 그럴수 있는 기회를 갖지못하고 마지막 일정에서나마 천안에서 임진각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참여하였었다. 이렇듯 이태에 걸쳐 참여했던 국토종주 통일 대장정은 이미 지나간 일이긴 하나, 그 순간들의 추억이 너무도 소중하고 혼자 가슴에 묻어두기엔 심히 아깝다는 생각에 필을 들어본다.
피스로드 국토통일 대장정은 남북통일과 평화세계이상을 실현하시고자 평생을 몸바쳐 살아오신 문선명총재님의 성화(타계)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축제의 일환으로 시도된 전 지구촌이 함께했던 역사적인 행사였다. 이렇듯 뜻 깊은 2015년 행사에 참여할 싸이클 국토종주 희망자 모집공고가 올라왔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모집공고를 접한것은 마감 마지막 순간에야 알게되었는데,이때부터 전개된 모든 일들은 나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기적의 역사가 펼쳐졌다 고 보지않을수 없다. 우선 서류 접수부터 그러 하였다. 모집공고를 접한 순간 내 가슴은 울렁거렸고, 나는 반드시 피스로드에 가야만 한다는 숙명같은 생각이 느껴졌다. 그래서 서류를 제출하겠다고 하니, 주위에선 모두가 하나같이 만류를 했다. 젊은 사람도 아닌 70고객이 무슨 망령이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나는 그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도전에 임하기로 했다. 그래서 즉시 서류를 냈는데,다행이 서류접수는 무난히 통과되었고, 다음번 걸림은 싸이클 타는 실습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문제 로 등장했다. 나의 일정상 오리엔테이션 참여가 도저히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까닭은 제주도에 20여일간 내려가 있어야만 하는 스케줄이 잡혀있어 진행본부에 불가피한 상황을 알렸다. 다행이 오리엔테이션을 생략토록 수락을 해주었는데, 그것은 내가 자전거를 타본 경험이 있다는 자신감의 답변과 내가 행사 홍보를 위해서 필요할거라는 주최측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선수로써 참여는 무난히 통과되었는데, 다음번에 또 다시 큰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제주도를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가다가 뜻밖에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내려간것은 아들의 팬션 사업을 도와주기위해 가던길이 었는데, 기왕가는 김에 오토바이로 제주일주 여행을 하고자 가던 차에 목포에서 넘어지는 불상사를 당한것이다. 사고 상황은 다리를 다쳐 피가 흐르고 절룩거리는 입장이어서, 우선 제주를 갈건가 말건가부터가 망설임의 기로였지만,모처럼 찾아 온 절호의 기회를 놓칠수 없다는 욕심에 응급처치만 취하고서 예약된 배에 올라 제주에 도착했다. 당시에 제주엔 아들 가족도 없었고, 빈집에 혼자 들어가 우선 환부 점검부터 해보았는데,그런대로 견딜만하다는 내 나름의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하여 첫날부터 정원손질도 하고, 가까운 인근 해변을 구경도 나갔다 왔다. 그러나 다음날 심각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다리가 아파 한발짝도 움직일수 없도록 꼼작못하게 나를 옭아매지 않는가! 얼마나 심각한지 밥도 해먹을수 없는상황에다 화장실도 아픈 다리를 이끌고 겨우 갔다올 그런 정도였다. 하지만 견디다보면 좋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누구에게도 알리지도 않고, 이틀동안을 참아가며 혼자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당진에 있던 며느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눈치빠른 며느리는 내 목소리를 듣더니, 사고임을 직감하고 즉시 119를 불러 병원으로 입원조치를 시켜주었다. 병원에선 X ㅡRay를 찍어보더니 당장 기부스를 하자는 권유를 하였지만, 나는 거기에 거부의사를 밝혔다. 왜냐하면 기부스를 하게되면 제주도 일주여행은 커녕, 피스로드 참여는 아예 물건너 가기때문이었다. 나의 거부 의사에 처음에는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어떻게 생각했는지 고맙게 내 의사를 수용해주었다. 그리고 입원 3일만에 나는 퇴원신청을 했다. 상식적으론 퇴원아란 도저히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열흘 이상은 입원이 필요한 상황인라 했는데 퇴원 신청이라니.... 하지만 퇴원도 무난히 통과시켜 주었고,빈집에 돌아와 하룻동안은 컨디션 조절을 하고,이튿날부터 제주일주여행을 출발했다. 이 과정들이 보통사람으론 생각할수없는 모두가 상식을 벗어난 일들임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렇게 퇴원한 이후 틈나는데로 정원손질을 해가며,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서 코스를 새롭게 정하여 제주도 전체를 돌아보기 로 계획을 세웠다. 실은 전년도에 제주일주여행을 하고자 목포까지 내려갔다가,카메라를 분실하는 바람에 그 계획이 무산되기도 했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진 꿈을 실현할 기회였으니 얼마나 꿈에 부풀었겠는가! 나는 가능한 제주도 전역을 샅샅이 돌아보고자 지도를 펼쳐놓고 스케줄을 꼼꼼히 체크해나갔다. 숨겨진 은밀한 곳까지 돌아보는데는 오토바이만큼 좋은 여행수단은 없다고본다. 오토바이를 타고서 제주도 구석구석을 일일히 답사하였는가하면,한라산 등반까지도 힘들긴 했지만 무난히 마칠수가 있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치며 제주도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천안에 돌아온 다 다음날이 피스로드행사 참여일이었다.
피스로드 2015 자전거 종주 통일대장정
'피스로드 2015'국토종주는 2015년 5월 30일부터 대장정의 막이 올랐다. 미국 라스베가스와 남미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출발된 남미종주단은 북미대륙과 일본으로 들어와 일본 북해도에서 최남단 오키나와에 이르기 까지 1만 2천여 km를 종주하고 그 대표단이 21일 부산에 들어오게 되었고.... 한편 아프리카 남아공 희망봉(케이프 타운)에서 출발된 종주단은 아프리카 전역을 연결하여 유럽대륙을 횡단,러시아에서 1만 5천km 를 주파하여 블라디 보스톡을을 경유, 북한 평양에 들어갔다가 이들도 부산에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세계가 동원되어 한국까지 연결된 이들 일행과 한국 종주단이 부산에서 만나, 역사적인 국토종주는 출발을 하게되는데, 한국 종주팀은 국내에 있는 각국의 유학생(11명)과 지원자 (19명)및 스탭(3명)등 종주단 일행은 모두 33명이나 되었다. 선수들은 대개가 30을 전후한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으며,1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이었다. 이렇게 동원된 한국팀은 두팀으로 나누어졌는데, 한팀은 군산에서 출발하여 금강을 따라 부여와 공주를 경유하여 청주와 괴산을 지나 충주 수안보에서 본대와 합류토록 예정되어 있었고..... 반면 본대는 20일 서울에서 천안을 경유, 부산으로 이동하여 21일 부산이벤트를 갖고 창녕 합천보까지 91km를 달린다음, 22일엔 달성보까지 91km,23일엔 대구이벤트를 한 후 상주보까지 106km를 타게되며, 24일엔 대전에서 이벤트를 갖고 수안보까지 86km를 달려 금강팀과 합류토록 예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팀이 분류되어 금강팀은 21일 군산에서 종주를 시작하기로 하고, 본대인 낙동강팀은 20일 부산에 내려가 하룻밤을 묵기로 하여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20일 부산으로 내려가는 그 날, 공교롭게도 북한에서 포탄도발을 감행하여 우리측이 이에 반격하는 사태가 발생되어, 그야 말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한치 앞을 예측할수 없는 초긴장 상황이 일어났다. 자칫하면 국토종주를 아예 할수도 없을는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종주단일행을 더욱 긴장시킨것이다. 이러한 긴장상태하에서도 우리의 종주는 차질없이 진행되어져 갔는데, 출발직전에 필자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심각한 절망에 봉착 하게된다. 그것은 바로 싸이클을 어떻게 탈것인지가 암담했기 때문이다. 멋진 유니폼과 싸이클을 지급받을때까지는 기분이 하늘을 날을듯 들뜬 마음이었지만,정작 싸이클에 올라타 시운전을 해보니 아뿔사,내 생각과는 전연 다른게 아닌가! 필자는 일반 자전거는 어느 정도 걱정없이 탈수있는 실력은 되지만, 실상 선수용 싸이클을 타보긴 시셋말로 머리 털나고 처음 경험 하는 순간이었다. 우선 안장에 올라타니 부자연스럽기 이를데 없고,페달은 제멋대로 돌아가질않나, 기어변속은 내 맘대로 되는게 아니었다. 순간 잘 못왔다는 판단이 앞섰고, 후회스러움이 느껴지는데 이를 어찌해야 좋을까 심히 난감하기 이를데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 같에서는당장 자신없다고 포기하고도 싶었지만,그러나 기어코 타고야 말겠다는오기같은 마음이 발동했다. 처음엔 혼자서 연습해보다 좀 잘 탄다는 고수들을 찾아 방법을 의논해보았다. 싸이클 다루는 법과 타는 방법까지 손에 쥐어주듯 가르쳐 주었지만,워낙 쌩둥이다보니 그게 쉽게 터득될리 만무했다. 이렇게 어설프고 서툰 상태에서 나는 일행과 더불어 국토종주라는 대망을 향해 패달을 밟아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하기 그지없는 모험의 출발이었다.첫날 일정은 자전거 대행진에 앞서 러시아와 일본에서 들어오는 종주단 환영식과 부산시청에서 열리는 국토종주 출발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 종주단을 환영하기위해 우리 일행은 부산 여객터미널에 나가 그들을 환영하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는 부산 UPF지부 간부단및 평화대사들도 자리를 함께하였고, 중앙에서는 UPF손병호 회장,송광석사무총장등이 현장에 달려와 해외종주단을 따뜻이 환영하여 주었다. 여객 터미널에서 환영식을 마치고, 다음 옮겨간 장소는 부산 시청이었다. 부산 시청 대회의실에 들어들어서니 거창한 환영행사가 준비되어 있었으며,서병수부산시장도 행사장에 나와 환영사를 해주기도 하였다. 이곳 부산 시청에서의 행사는 사실상 우리 피스로드 대장정의 출발식을 갖는 자리였다. 부산관내의 각급기관장들과 지방유지는 물론 수많은 싸이클 동호인까지 자리를 함께하여 우리들의 장도를 축하해주기도 하였다.
부산 시청에서 대장정 출발식을 갖고 다음엔 UN공원으로 자전거 레이스를 펼쳤다. 8Km거리를 부산 자전거 동호인들과 경찰 에스코트를 받으며 질주하였는데, 마침 비가네려 우의들을 걸치고 달려야만했다. 비를 맞아가면서도 수십명의 자전거 행진이 펼쳐진것은 참으로 진풍경의 연출이기도 했다. UN공원에 도착하였을때까지도 비는 멈추지 않아, 비를 맞고 추모행사를 벌여야만 했던 것도 잊을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6,25동란시 대한민국을 지키기위해 16개국이 참전하여 희생된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역사의 현장인 UN공원ㅡ 우리 조국을 지키려다 거룩한 희생을 당한 영령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먼저 가신 님들도 우리의 숙원인 남북통일에 협조를 바라 는 기원으로 참배하며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UN공원 관장님께서도 우리 종주단을 환영하며 특별 메세지를 발표하시기도 하셨는데,관장님은 부친께서 한국전에 참전하여 희생 되신 유가족이기도 하단다 참배 행사를 마치고 종주단은 국토종주 출발지인 낙동강 하구둑 을숙도로 자리를 이동했다. 을숙도에 도착하니 <낙동강 자전거길>이란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자전거길이 열린것은 불과 3년전인 2012년 4대강 개발사업을 완공시키면서부터란다. 을숙도에서도 지역 유관단체와 자전거 동호인들이 자리를 함께하여 피스로드 대장정 출발식을 가졌다. 지역 여러 단체에서 나온 그분들은 음료수와 간식등을 종주단에게 전달하며 피스로드의 장도를 격려해 주기도 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국토종주단의 금번 피스로드 2015 출발은, 이곳 낙동가 하구둑인 을숙도에서 부터 시작되는셈이었다. 을숙도 출발행사까지 오전중에 행사를 무려 4차례나 하다보니, 점심시간이 따로 없어 햄버거를 차내에서 먹어가면서 대행진의 출발시간을 갖기도 했다.
종주 출발지인 을숙도까지 유관단체에서 나온 분들은 종주완주의 성공을 기원하며 각종 선물들을 전달해 주셨는데, 그중에도 인상에 남는 것은 통역사를 지냈다는 한 여성분께서 초코파이를 전달해 주시며 이건 대단히 액시팩시한 초코파이라고 조크를 하여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고,나이든 그 통역사의 유창한 영어 실력에 우리는 깜짝 놀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선 러시아와 일본을 횡단하고 돌아온 대표단들의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도 있어 잔잔한 감동의 자리가 되기도 했다. 낙동강 하구둑 을숙도에서 국토종주출발식을 갖고, 우리 종주단 일행은 힘차게 패달을 밟으며 장장 7일간의 레이스가 펼쳐졌다.
대행진 첫번째 휴식처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던 장면들이다.
우리 종주단은 낙동강 하구둑에서 창녕 함안보까지 91km를 달리고, 종주 인증들을 찍고 첫날 레이스를 마쳤다. 이곳에서 다시 차편으로 이동, 경남 창원으로 내려가 마금산 온천 비앤비 호텔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내 개인적인 애로사항을 쓰지 않을수 없다. 첫째는 신체상으로 느꼈던 고통이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부위는 다름아닌 엉덩이였는데, 까닭은 하루종일 엉덩이가 안장위에 올라있다보니 엉덩이가 불이 나는것처럼이나 화끈거려 견딜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뜨거운 것도 고통이지만 얼마나 아픈지 도저히 안장위에 오르고 싶지않을 만큼 힘이 들기에 그 고통을 조현석팀장에게 하소연을 했다. 당시 종주단 총 책임을 맡았던 조현석팀장은 필자와 함께목회를 했던 조인권목사의 자제이자,여류시인으로 나와 친근한 관계이기도 한 고 종우여사의 사위였기에 나에게 많은 편의와 여러모로 특별배려를 해주었다. 엉덩이 고통의 하소연을 듣고 조 팀장은 자신이 타던 안장을 쑥 뽑아 교체해 보라는 것이었다. 자신도 자전거를 타고 달려야할 판에 자기 안장을 뽑아주다니 눈물나게 고마운 일이었다. 안장을 바꿔보니 한결 부드럽다는 느낌이었는데,안장이 50만원짜리라니 역시 비싼 제품은 어디가 달라도 다른점이 있었다. 다음 두번째 어려움은 인터넷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점이다. 나는 자전거를 타면서도 수시로 활동상황의 사진들을 찍어 인터넷으로 홍보를 해야할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사용이 서툰점도 있지만, 숙소에서 제공받은 인터넷이 접속이 잘 안되니 답답하기 이를데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사진은 찍긴했어도 즉시 내보내지는 못하고,다만 스마트폰 문자로만 우리의 활동상황을 전달시켜나갔다. 비엔비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 날 우리는 경남 창원에있는 경남도청을 찾았다. 이곳에 도착하니 환영행사를 준비하는 풍물패가 미리부터 행사분위기를 신나게 돋우고 있었고....
경남 도청에서 뜨거운 환영식을 갖고 창원지역 자전거 동호인들과 함께 종주를 하게되는 시간이 있기도 했다. 경남 창원에서 대장정 출발식을 갖고 어제의 도착지 창녕 함안보로 다시 이동하여 종주 2일째를 맞았다. 이날은 어제 내리던 비는 그쳐 다행이었지만, 태풍이 올라온다는 뉴스에 또 다시 긴장이 되기도 했다. 만약 태풍이 올라온다면 그 비바람을 맞고 어떻게 무사히 완주할수 있을까 심히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다행이 비가 개이니 개인 날씨가 종주하기엔 안성마춤이었다. 여기서 다시 내 개인적 이야기를 아니쓸수가 없다. 내용은 기어 변속문제인데,아직 싸이클 다루는게 익숙치 못한 상황이다보니 오르막길은 변속을 제대로 못하여 도저히 차고 오를수가 없어 오르막길이 나타나면 그때부터 나는 끌고 올라갈 준비를 해야만 한다. 잘 타는 선수들은 왠만한 고개쯤은 그냥 타고 올라가기 마련인데,나는 그게 몇번 시도는 하였지만 영 자신이 없어 차라리 미리부터 끌고 올라가기 위해 자전거에서 하차를 해야했다. 하차도 함부로 했다간 도미노 현상으로 큰 사고로 이어지기에,뒤에 오는 동료들을 요령껏 피하여 하차해야만 한다. 이렇게 뒤로 빠져나와 고개를 자전거를 끌고 오르고 보면,이미 동료들은 저만치 앞서 달린다. 나는 일행들을 따라잡기위해 그때부터 전속력으로 달려가야만 하는데,이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보통 평지나 내리막길은 순탄하게 레이스를 자신있게 펼칠수가 있었지만, 고갯길이 나타나면 그때부턴 아예 죽었다 고 복창을 해야했다.
종주를 하다보면 쉬고 싶어지는 명소들이 있기도 하고, 사진 한컷 남기고 싶은 풍치좋은 경관들이 있기도 하였다. 우리는 가능하면 그런 휴식처를 찾아 잠시나마 쉬어가는 시간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마냥 쉬어가진 못했다. 휴식시간도 그리 여유있게 푹 쉬었다 가는 길은 아니었다. 보통 5분 내지 10분 정도 휴식시간을 가졌는데,그 시간은 대부분 큰 고개마루를 오를때나 고개 정상에 이르러 그런 시간이 주어졌뿐,평지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또한 달리는 속력도 서서히 달리는게 아니었다. 맨 앞에서 리더가 어느정도 속도 조절을 해가며 달리긴 해도, 뒤쳐지는 사람은 언제나 죽을 힘을 다해 달려야만 했다. 지금와서 말이지만 사실 나의 하루하루는 기적의 연속이었다. 그 탈줄 모르는 자전거를 선수들과 똑같이 한두시간도 아닌 1주일을 버티며 타낼수 있었다는것은 엄청 힘든 과정이었다. 합천 창녕보를 지나 달성보를 가는 길목엔 <다람재 고개>라는 큰 고개가 나타났다. 젊은 선수들은 중턱까지 거뜬히 자전거로 올라갔지만,나에게는 아예 처음부터 끌고 올라가야만 했던 코스이다. 땀을 뻘뻘흘리며 높은 고갯길을 자전거를 끌고서 올라간다는게 상상만해도 아찔한 코스였다. 아마도 종주기간내에 가장 힘든 코스가 다람쥐 고개였을 것이다. 다람쥐고개 정상까지 끌고 올라가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정상에 도착하니 동료들이 기다려주어서 그곳에서 모처럼 상당시간 휴식시간을 취하며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서 달려간 곳은 대구 달성보였다. 이날 종주는 창녕 함안보에서 합천 창녕보까지 55km,그리고 그곳에서 달성보까지 36km,도합 91km를 주파한 셈이다 대구 달성보까지 종주를 마치고 신라 해장국에서 꿀맛같은 저녁시간을 맞이했다. 신라 해장국에서 저녁을 먹고 인근 스타모탤에서 숙박을 했다. 다음 날은 아침 일찍 행사를 대구 달성보에서 하도록 되어있어 우리가 대절해 갔던 관광버스편으로 그곳으로 달렸다. 대구 달성보에는 경북 UPF지부와 달성 자전거 동호회에서 떡과 음료수등을 준비해 왔다. 그들이 정성껏 준비해온 음식들을 함께 나누고 달성 자전거 동호회원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는 시간을 가졌다. 자전거 동호회원은 무려 100여명이나 되었는데, 어린 꼬마학생들까지 동참하여 더욱 흐믓하였고, 그들 동호인들과 함께 레이스를 펼쳐나가는 장면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대구 달성보에서 대구 시청까지 아침 레이스를 펼치고, 시청앞 광장에서 대구시와 경북 UPF지부에서 베푸는 환영행사가 거행되었다. 행사가 거행되면 우리 종주단들에겐 꽃 목걸이가 걸려지고, 우리를 격려하기위한 여러 문화행사가 전개된다 자전거를 타고 달릴때는 힘이들고 마냥 주저앉고 싶을때가 수없이 있기 마련이지만,이렇게 매일 펼쳐지는 환영행사에서 우리는 무한한 보람과 기쁨을 느껴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환영회와 출발식을 마치고 대전 현충사를 찾았다. 대전시청에서 현충원까지는 10km 떨어진곳.이곳에서도 지역 동호인들과 자전거 퍼레이드를 멋지게 펼쳤다. 대전에서의 환영식에는 UPF 조 용옥 충남지부장도 만날수 있었고,대전에서 활동중이라는 사또 요코 말라위선교사도 만나볼수 있어 무척 반가운 만남의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사또 요코 선교사는 수년전 말라위에서 함께 고생하며 활동했었는데, 오랜만에 이곳에서 우연히 만나보는 자리여서 더욱 반가웠다. 충남과 대전지역 기관장및 자전거 동호회원들과 우리 종주단 일행은 현충원 참배후, 기념촬영을 하고 냉면으로 시원한 점심식사를 하기도 했다.
점심식사를 한후 우리는 다시 상주보로 이동하여 자전거 종주는 다시 시작되었고.... 이날은 본부측에서 특별취재를 위해 드론을 띄워 항공촬영까지 해갔고,필자와 인터뷰를 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상주보에서 출발한 우리는 상주 상풍교 휴식공원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며 공원구경을 하는가운데 기념촬영을 하기도했다. 우리 종주단은 상주 상풍교 공원을 지나 문경새제에 도착하였고.... 문경새제는 충북 괴산군과 경북 문경사이에 있는 험준하기로 유명한 영남의 관문이다. 문경 새제에 도착한 일행은 선수를 두팀으로 나누어 분류를시켰다. 까닭은 여기서 금번 종주구간 가장 난코스로 알려진 이화령고개를 넘어야하는데,그 고개는 아예 등산하는셈치고 가야한다며, 자신있게 자전거를 탈수 있는 선수들만 이화령고개를 넘도록하고, 다른 팀은 그 전반부 코스를 달리도록 한것이다. 문경새재와 이화령고개는 난 코스이긴 하였지만 경관이 가장 수려한 곳이기도 하였고,경북 UPF지부에서 열렬한 성원을 해주어 매우 기억에 남는 곳이 되기도 했다. 특히 UPF대구 경북 변사흠 지부장의 열성이 대단하여 풍성한 간식을 문경새제와 이화령고개까지날라와 주셨다. 이화령 코스는 직접 달리진 못했지만 우리는 차편으로 이화령에 이르러 이화령의 아름다운 야경에 도취되고 말았다. 이화령은 소백산맥의 조령산과 화양산사이에 있는 해발 540m에 달하는 높은 준령이다. 이화령고개는 예전엔 무서운 산 짐승이 많아 함부로 넘을수도 없었고,워낙 험한 고갯길이라 넘기 힘든 고개로 유명한 곳이다. 어린 학생들까지 이곳에 달려와 밤 늦은 시간까지 이화령의 야경을 구경하고 관광버스편으로 수안보로 옮겨갔다. 수안보온천에 도착하니 금강팀도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금강팀에는 내 나이 또래의 70전후한 선수들도 몇분 계셨는데,이 분들은 자전거 동호회원들이라서 단체로 참여를 하게되었단다. 그들은 멀리 강원도 원주에서 왔다고 하며, 평화대사로써 활동하는 분들이기도 하였다. 내가 경험없이 처음 참여하게 되었다고 했더니 그들은 모두가 놀라면서 기어변속방법을 자상하게 알려주기도 하였다. 금강팀과 합류하여 저녁식사를 끝내고 숙소인 대림호탤에 들어가니, 충주지역 환영단이 복숭아를 선물로 가져왔다. 대림호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은 충주 호암체육관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곳에서 환영행사와 출발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주 호암체육관에서도 여러 연예인들이 출연하여 흥겨운 시간과 뜨거운 환영회를 베풀며 출발식이 거행되었다. 충주에서 출발했던 종주 대장정은 탄금대를 지나 목행교, 비내섬, 강천보를 경유하여,여주보에 도착하였다. 어제의 문경새제와 이화령의 경치도 아름다운 풍치였지만, 충주호반의 경치도 빼어난 아름다움이 펼쳐지는 곳이다. 이때도 충주지역 자전거 동호인들이 우리일행과 동행하여 강천보지점까지 함께 달리는 응원을 해주어 대단히 고마웠다. 여주에 도착하여 여주 일성콘도에서 하룻밤을 묵고,다음 날은 여주보에서 이포보,양평군립 미술관을 거쳐 북한강 철교를 지나 서울로 향했다.
여주는 남한강이 흐르는 멋진 풍광이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여주에서 출발된 대장정은 이포보와 양평군립미술관을 경유한후 양수리 두물머리에 들어왔다. 이 날은 유일하게 이벤트가 없는 날 ㅡ 오로지 자전거 종주에만 전념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양평에 들어서니 긴 터널들이 수없이 이어진다. 매우 훌륭한 터널들인데 이곳은 오로지 자전거를 타지않고는 통과할수 없는 곳이라 생각하니 더욱 뿌듯함이 느껴왔다. 자전거 도로를 이렇게 터널들을 뚫어가며 멋지게 만들어 놓았다는게 참으로 대단한 역사였다. 오늘은 불행이도 부상자가 두사람이나 발생했다. 하필 완주가 코앞에 이르렀는데 우째 이런일이....?? 어제는 자전거를 운송하던 화물트럭이 사고를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 필자도 딱 한번 사고가 있었다. 이틀째 되는 날에 길이 두 갈래로 나있던 곳에서, 리더가 방향을 잘못잡아 유턴하는 과정에서 가벼운 무릅상처를 입었던것이다.
우리는 두물머리에 있는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앞에 종주팀 전원이 무사히 완주를 마칠수 있기를 바라는 기원을 올렸다. 두물머리에는 사진찍기 좋은 곳들이 너무도 많았다. 시간적 여유도 있고해서 좋은 경관에 취하며 사진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두물머리란 두 강물이 머리를 맞대듯이 만나서 하나의 강으로 흐르는 지명을 말한다. 이를 합수머리,두머리,이수두,양수두등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두물머리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에 위치한 북한강과 남한 강이 하나로 만나 한강이 시작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양수리 두물머리에는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와 일출,황포돛배,그리고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어우러진 각종 테마와 컨텐츠 를지닌 관광 명소이기도 하여 이곳을 찾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 한 두물머리는 팔당댐 건설로 물길이 끊기기 전에는 강원도와 서울을 잇던 번창했던 나루터가 있던 곳이기에 역사와 문화의 이야기 가있는 관광명소이자 자연 생태관광 학습지로도 각광을 받고있는 곳이기도 하단다.
통일로 가는길
우리는 만나야 한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듯 굴절된 역사의 매듭을 풀고 우리는 기필코 만나야한다
우리는 달려야 한다 가다가 쓰러지고 넘어진다해도 우리는 결코 좌절할순 없다 가는 길에는 평탄한 길만이 있을수 없는 법
높고 험준한 준령과 때론 모래벌판이나 가시밭길도 있을테고 가다가 힘들어 지칠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달려야만 한다
남과 북은 본디 한뿌리 우리는 본래 원수가 아니었다 서로가 조상이 같고 한 형제로 만나야할 숙명적 존재
그래서 우리는 통일을 염원한다 그리고 평화를 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야하고 만나는 그날까지 우리는 또 달려갈 것이다
통일로 가는길 그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남과 북 너와 내가 만날수 있다면 나는 나의 발걸음을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
두물머리에서 휴식시간을 취한후 이름있다는 기와집 순두부집을 찾아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이제 서울을 향해 달리는 레이스가 펼쳐졌다. 이제 길고 길었던 우리의 종주도 벌써 목표지점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고 들뜬 기분이기도 했다.. 본래예정은 서울에 도착한후 임진각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었고,또 주최측 이야기는 원하는 사람만이라도 임진각 코스를 달리도록 해보겠다고 하였지만, 그게 모두 취소되어 무척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반면 서울 도착후 청평까지 들어가 해단식이 있을 예정이 있기도 하였지만 그 일정도 생략되었단다. 그러기에 우리 종주의 대단원은 서울도착후 국회의사당 행사와 광화문환영행사가 그 마지막이 되는 셈이다.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에 광진교 다리밑에서 휴식시간을 가졌다. 광진교에서 휴식을 취한후 서울 외곽지역인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일화연수원을 향해 달렸다. 그쪽으로 들어간것은 하룻 밤을 그곳에서 쉬도록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화연수원에서는 밤새도록 쫑파티가 벌어졌다. 통닭에다 수박등 푸짐한 먹거리가 나와서 싫컷 배를 채우기도 했고, 유학생 종주팀은 춤과 노래로써 흥겨운 시간들이 이어져갔다.
일화연수원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우리는 다시 광진교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부터 한강을 끼고 마지막 레이스를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광진교에서는 특기할 이야기가 하나있다. 그동안 필자는 종주단 전 기간에 걸친 사진들을 찍어주고,수시로 활동상황을 카톡으로 수십명 지인들에게 날려 주었는데,그중에서 사랑이란 이름의 아역배우 어머니는 열렬한 응원의 팬이었다. 격려의 전화와 메시지를 남겨준 분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사랑이 엄마는 우리 종주단을 직접 한번 보고 싶다는 연락이왔다. 우리 일정이 국회의사당과 광화문에서 환영식이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그 시간대는 자신이 교사신분이기에 참여가 어렵단다. 그러니 출근 시간대에 두 자녀인 사랑이와 서준이를 데리고 광진교로 직접 달려왔다. 우리 종주단을 위해서 드링크까지 준비해서 달려와준 일은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였지만,사랑이 엄마의 얘기는 더욱 감동적이었다. 나라사랑의 산교육을 위해서 일부러 오고 싶었다며 태극기를 손에쥐고 달려온 것이다. 본래는 한복을 예쁘게 입혀 오려고 했는데,출근시간이라서 불가피 평상복으로 오게되었다고도 하였다. 애써 찾아왔지만 약속 장소가 차질이 생겨 별로 이야기 나눌 시간도 갖지못하고, 겨우 사진 한 두컷 찍고 헤어지는 아쉬움을 남겼다. 사랑이 엄마와 헤어진 우리는 한강변을 끼고 광나루를 거쳐 동작동 현충원쪽으로 달려,다시 서울 시청쪽을 향해 질주했다. 서울 한강변을 자전거를 타보다니 역시 감격적이고 잊혀질수 없는 추억의 한장면들이다. 환영식 행사장소인 광화문광장으로 가기전에 우리 종주단은 시청앞광장에 먼저 집결을 하였다.
시청앞광장에서 광화문에 도착하면 드디어 국토종주의 마지막 지점에 다다른다. 부산과 낙동강 하구에서부터 1주일간에 걸쳐 평화와 통일의 염원을 가슴에 품고 숨가쁘게 달려온 종주단 건각들이 대견스럽다. 시청앞 광장에는 우리 종주단만이 집결했던 게 아니고, 일본과 러시아에서 들어온 선수단도 자리를 함께 하였고,세계 120개국을 대표하는 연합 종주단이 합류하여 그야말로 선수단만도 대규모 인원이 되어졌다. 시청광장 연도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운집하여 우리 종주단 퍼레이드를 보기위해 구경나와 있었고.... 경찰들도 에스코트를 하기위해 미리 차들을 대기시켜놓고, 행사준비에 만반을 기하고 있었다. 잠시후 우리는 러시아에서 온 선두차를 앞세우고 경찰 에스코트를 받아가며, 멀지않은 광화문광장을 향해 서서히 패달을 밟았다. 자전거 종주단의 행렬은 참으로 장엄하고도 멋진 퍼레이드였다. 지난 5월 30일 출발되어진 피스로드 대행진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고,인종과 종교를 초월하며 전세계 121개국가가 참여하여 비로소 오늘 그 대장정의 휘날레를 장식한다 생각하니 실로 감개무량하지 않을수 없었다. 피스로드 프로젝트는 장장 90일에 걸쳐 연인원 30여만명이 참여하여 3만Km에 달하는 긴여정을 숨가쁘게 달려온 것은 참으로 역사적인 사건이라 아니할수 없다. 금번 대행진에는 자전거종주뿐 아니라 사정에 따라 자동차나 말을 이용하기도 했고,심지어는 맨발로 뛰기까지 했다고도 한다. 무엇때문에 이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뛰고 달려왔단 말인가? 그것은 오로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한반도 조국통일의 염원과 평화세계실현이라는 인류 보편적 이상의 가치를 현실화하려는 몸부림의 일환이었으리라....
광화문 광장에서 펼쳐진 환영행사는 참으로 장엄하고도 감격적인 순간들이었다. 식전행사인 연예푸로에서 부터 일본과 러시아에서 달려온 선수단들의 종주체험담, DMZ 철조망을 걷어내는 퍼포먼스가 이어지기도 했고, 종주 선수단들을 격려하는 찬사가 쏟아지기도 했다. 광화문에서 피스로드 대장정 종주완료 기념식을 마치고 오후에는 국회의사당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1주일을 쉬임없이 달려왔던 국토종주 통일대장정이 드디어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고... 의원회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곧이어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 증진 국제 심포지엄> 행사에 참여했다.
국회의사당 심포지엄 행사는 사할린에서 달려온 젊은이들의 사물놀이와,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국부인과 서울에서 합류된 부인으로 형성된 평화연합 부인 합창단의 축가 순서로부터 막을 올렸다. 이어서 피스로드행사에 기여한 공로자들에 대한 감사패 전달과 조명철 국회의원의 인사말씀이 있기도 하였고..... 이날 행사에는 주호영, 쟈스민,설훈의원등을 비롯한 다수의 국회의원들과 각계 지도자 내외 귀빈들이 자리를 함께여 뜻깊은 행사가 진행되었다. 특히 전 미국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타드 티아트 전 미 하원의원,크루츄크 전 우크라이나 대톨령을 위시한 세계적인 VVIP급 귀빈들이 다수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기도 하였다.
2016년 피스로드 참여기
2016년 피스로드 마지막 종주행사가 8월 16일 임진각에서 펼쳐진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가기로 했다. 피스로드 종주단이 8월 9일 부산에서 출발하여 마지막 종주구간인 임진각 민통선 종주가 이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해 피스로드에 참여한바 있어, 금년도에도 반드시 동참할 계획이었지만, 아무런 소식을 접하지 못하여 국토종주단에는 들어가진 못하였지만, 마지막 구간만이라도 함께하고 싶어 임진각을 찾은것이다. 천안에서 새벽 5시 반에 기상하여,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초행길을 네이게이션도 없이 무작정 달려, 서울을 경유하여 무사히 현장에 도착할수 있었음은 그 자체가 기적같은 사실이었다. 나는 그동안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곳곳을 가면서도, 오직 이정표하나 보고 달리는게 습관이 되어있긴 하나,서울 방면은 아직 한번 가보지 않았던 상황이라 내심 저으기 걱정을 하면서 출발했던 것이다. 서울은 수없이 두루 가보긴 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리가 어두운 곳이 서울인지라 선듯 자신이 없는 지역이기도 하며, 오토바이는 단 한번도 가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통큰 마음으로 가보자는 심사로 서울을 향해 출발했던 걸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는 어쩌면 무모한 도전을 즐기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지난해 한번도 타보지 아니한 자전거를 무모한 도전으로 피스로드대장정에 참여하여, 부산에서 서울까지 완주한 사실 역시 지금 돌아 보면 기적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목적지 임진각에 도착하니 기념행사는 이미 시작 되었지만, 민통선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전거 종주단과 함께 생생한 현장을 동행할 수 있었음은 참으로 무한한 감동이었고, 감격의 순간이 아닐수 없었다. 종주단에 참여한 일행중에는 작년도에 함께 달렸던 일본 선수들을 다시 만나볼수 있어 더없이 기뻤고, 행사 전반을 취재하고 민통선 종주가 시작되자, 곧바로 민통선 안으로 뛰어들어 사진을 담을수 있어 참 다행이었다. 본래는 선수가 아니면 민통선 안에 입장이 불가했지만,피스로드 유니폼 덕분에 안으로 들어간건 뜻밖에 행운의 기회가 된것....
피스로드 임진각 기념식은 이혜연 아나운서와 김현우MC가 공동 진행하였는데, 오전 10시부터 시작하여 먼저 국토 종주단 환영식과 걸그룹 '홀릭스'의 축하공연이 있은 다음, 정 태익 한국 외교협회 회장의 환영사에 이어, 송 광석 피스로드 한국 실행 위원장의 경과 보고및 종주기 전달식이 있었고, 임 종성 국회의원과 홍 승표 경기관관공사사장의 축사에 이어, 조성일 가정연합 세계본부장의 격려 사가 있기도 했다. 그런 다음 63개국 대학생 대표단의 평화 선언문 발표가 이어지고, 한반도 통일 기원 퍼포먼스가 펼쳐진 다음에야 민통선 종주가 출발 되어졌었다. 민통선 종주는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코스와 도보로 일정구간까지만 돌아오도록 되어있는 두개팀으로 나누어 입장되었다. 한반도 통일기원 DMZ 피스로드 행사는 민간인은 아무나 들어갈수 없도록 제한된 통제구역을 달린다는게 더욱 의미가 컸다.
세계 63개국 1200명의 건각들이 마지막 종주에 앞서 결의를 다지고 민통선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당도했다. 필자도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볼까 하였지만 이미 허락받은 선수만이 가능하단다. 사전 승락이 없어 자전거를 탄다는건 불가능 하였지만, 피스로드 유니폼을 착용하였기에 도보행진은 가능하다는 승낙을 받고 민통선안으로 자전거 종주단과 함께 들어갈수 있는 행운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입장하는데는 일일히 군인들이 통과지점에서 숫자를 카운터를 하고 있었고....
자전거 종주단은 대부분 남녀 대학생들이 주류인데, 35도를 넘나드는 무더위를 극복하며 부산에서 이곳 임진각까지 달려온 장한 선수단들이기에 마음으로 뜨거운 성원을 보내며 그들을 격려해 주었다. 자전거로 달리는 코스는 약 3시간 소요되는 거리라고 해서 도보로써 그 거리를 함께 동행한다는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 그래서 밖으로 돌아 나오려는데 도보팀이 입장하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도보행을 할까 생각 하다가 임진각 주변의 사진도 찍어두고 싶었고,가능하면 판문점을 가보고 싶은 욕심이 발동하여 도보행도 포기를 했다.
민통선 밖으로 나와 여기 저기 사진을 담다보니 어느새 도보행 일행들은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오는 장면까지 지켜보고 나는 판문점을 가보려고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건 헛탕!,사전에 승낙이 없으면 입장이 불허란다. 하는수 없이 발길을 돌려 귀로에 가볼만한 곳들을 들려보기로 했다. 귀로에 들려본 곳은 이율곡 선생 유적지인 화석정과 고려말의 최영장군 묘소였다.
화석정은 임진강변에 이율곡 선생이 정자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란다. 정자아래 푸르게 흐르는 임진강이 퍽 시원하고 아름답게다가왔다. 화석정에 올라 잠시 율곡선생을 생각에 떠올려보고, 그곳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율곡 기념관을 돌아보았다. 기념관안에는 휴관이라서 들어가볼수는 없었지만 밖에서나마 한바퀴 휘둘러보고 다음 찾아간곳은 최영장군 묘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했다던 최영 장군 ㅡ 그 분의 출생지는 충남 홍성인데 묘소는 너무도 의외의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묘소를 찾아가는 길은 꽤나 먼길을 달려가야 했고, 묘소를 오르는 길도 가파른 길로 500여m나 거슬러 올라가야했다. 장군의 묘소 뒤에는 또 다른 묘가 한기 자리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선친의 묘소였다.
최영장군 묘소까지 돌아보고 서울에 도착하니 소나기가 엄청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짝스럽게 쏟아진 폭우를 무릅쓰고 한참 달리다 뜻밖에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오토바이 바퀴가 빗길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넘어진 것인데,다행이 큰 사고는 아니었다. 팔꿈치가 약간 상처가 났고 유니폼이 찢겨나간게 사고 전부인데,차들이 계속 달려오던 상황에서 그 정도 사고로 끝난게 천만 다행... 오토바이 사고는 자칫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지는게 상례인데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피스로드 참석 전에 전혀 사고가 날 상황도 아닌곳에서 사고가 나더니,이날도 멀쩡히 내려오다 갑짝스런 비를 만나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되었고,지난번에는 다리와 무릎을 다쳤는데, 이번엔 팔과 팔꿈치를 다쳤으니 희안하지 않은가! 암튼 큰 문제없이 사고가 수습된것은 무척 다행스런 일이었고,서울을 거쳐 수원에 이르러선 수원화성까지 돌아보는걸로 하여 이날 여행은 마침표를 찍었다. 피스로드 국토종주는 처음부터 모험의 도전이었고,그 과정은 모두가 기적의 연속이었기에 이날 사고도 그 중 기적중의 하나로 각인 되어 나의 추억담을 더욱 스릴로 장식하게 하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귀한 피스로드행사에 값지게 참여하여 멋진 추억을 남길수 있음에 대하여, 하늘앞에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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