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 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두 단어는 할렐루야 아멘,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두 단어는 할렐루야 아멘 좀 많이 하십시오. 찬양대가 끝나고 났을 때도 내가 찬양하지 않았지만 그 찬양의 내가 동의하면서 그 찬양 그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좋아요. 찬양대가 찬양해 주고 나는 아멘으로 동참하고 설교를 들을 때도 또 말씀을 읽은 다음에도 아멘 이렇게 하면 됩니다.
할렐루야 물론 한 달 지나면 다 까먹을 줄 알아요. 그래도 자꾸 훈련을 하고 습관을 드려야 합니다. 이번 주부터는 주기 드문 강의를 시작을 합니다. 주기 드문 강의 괜찮아요 들어올리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 강의 그전에도 몇 번 했는데 이번에는 강의 시리즈 큰 제목을 미셔널 주기도문 야 하다 하다 주기도문까지 미셔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맞습니다. 주기도문도 미셔널입니다. 그 안에 깊은 뜻이 들어 있어요. 하나님의 선교적 관점에서 오늘부터 주기도문을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선교 신학을 정리하면서 영향을 받은 큰 신학자 두 분이 있는데 한 분은 예일대학교의 역사학자였던 케네스 스콧 라투렛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이 기독교 확장사를 썼어요. 그다음에 그의 영향을 받은 분이 랄프 윈터라는 플로 신학교에 선교학자입니다. 이분들이 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이분이 제가 선교 그리고 신학 또 사역의 사역을 정리하고 방향을 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줬어요. 그래서 이 강의 설교를 하는 동안 자주 이 두 분 이름이 나오게 되는 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아 그렇구나 이렇게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랄프 윈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문명 전체를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대서사다. 종교가 그저 개인의 안녕, 개인의 행복, 또 개인의 안전을 지켜주는 그런 개인적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가 그런 종교가 아니라 우리 기독교는 복음이 전파되고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문명 문화를 넘어선 문명 자체의 변혁을 일으키는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그 기독교의 정신, 그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 우리가 이제 공부하게 되는 주기도문,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는 이 기도를 흔히 개인의 영성이나 소원 성취 를 위한 기도로 사용을 합니다.
불안할 때 마음이 불안하면 막 주기도문 외우고 또 어떤 경우는 작은 모임 예배를 마칠 때 축도할 수 없을 때 예배 마침용 기도로 아무 생각 없이 영혼 없이 외우곤 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 기도는 그보다는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넓고 훨씬 차원 높은 신학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고 문명을 변혁시키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대역사가 이 주 기도문 안에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안에 들어 있어요. 그래서 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우리가 들어가서 분석해 보면 이것은 로마 제국을 비롯한 수많은 제국들을 뒤엎은 세계 변혁의 설계도가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돼 이게 보통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정말 믿음으로 하고 이 기도대로 살아가면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세상도 변하고 문명이 변한다. 유럽이 변한다 프랑스가 변하고 아프리카 대륙이 변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강의 주기도문 강의를 진행하는 동안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영적 시야가 넓어지고 또 깊어지고 또 여러분들의 기도가 더 영감 있는 기도가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제일 먼저 이 초성이 중요하며 일성 처음 하신 말씀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요. 이 짧은 민족 이 문장 안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짧은 문장 안에 2천년 기독교의 역사가 다 들어 있어요.
우리의 선교에 미래가 들어 있고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이 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나 엄청난 것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기도하면 이 기도가 우리 삶에서 응답되면서 우리 인생과 세상이 변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늘에 계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땅 위 땅, 세상 위에 있는 하늘에 계시는 분이다. 이것은 단순히 장소적인 의미를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에도 계시고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이시잖아요. 어디든지 만물에 충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어디에 계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우리에게 끌려다니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은 본인의 뜻을 가지시고 세상을 주관해 나가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이 예일 대학 교수이면서 기독교 확장 운동사를 쓴 케네스 스콧 라트레 박사는 이렇게 설명했어요.
기독교 확장이 뭐냐 이렇게 기독교의 폭발적 성장은 기도와 신앙에서 출발해서 새로운 정체성에서 비롯됐다. 기도와 신앙에서 출발한 새로운 정체성 우리가 기도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자기 자신을 자리매김하게 된다는 거. 그것이 이루어지면서 폭발적인 기독교의 성장이 이루어졌고 또 우리의 영향력이 또 기독교의 영향력이 세상에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매일 드리는 이 주기도문은 우리가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기도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줘요. 그냥 주문 해오듯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가지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문제에까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까지 확장돼야 된다는 거예요. 절대로 주기도문이 개인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우리가 우리 기도를 축소시키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세상을 변혁시키는 문명을 바꾸는 하나님의 역사까지 우리가 염두에 두면서 이 기도를 할 때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돼요. 라트레 박사는 또 이렇게 말했어요.
기독교는 위로부터 오는 종교이면서 아래에서 올라가는 종교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법칙을 정해주시고 그냥 법칙대로 돌아가라 하면서 뒷짐지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이 땅으로 찾아오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고 성도는 뭐냐 그 하나님의 그 행동에 응답하면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존재들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래서 온 세상을 주권적으로 다스립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 찾아오셔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에요. 그걸 가리켜서 미시오 데이 하나님의 선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는 선교 선교는 교회가 시작하는 프로그램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시작하셨기 때문에 교회가 따라가는 거예요.
선교는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교회가 참여하는 서사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존재예요.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하고 이 주기도문을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에요. 그냥 내가 하나님 나라에 뭘 기여한다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창조주이신 그분이 진행하시는 그 원대한 역사에 우리가 부름을 받아서 동참하는 거예요.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육신 그 일을 이루시고 오신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교회와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 일을 위임하셨습니다. 일에 동참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에 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제자들이 맡은 미션,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가 감당하는 미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시작돼서 아들 예수님이 위임하신 것이고 그리고 그 일에 성령님이 동참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닌 거예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는 선교가 궁극적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궁극적 목적 우리가 뭘 하든지 단기적으로는 여러 가지 우리가 목표와 목적이 있지만 인생과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세상을 구원하는 그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그 거룩한 역사에 우리가 부름을 받고 거기에 동참하는 거예요. 그래서 크리스천이 됐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 감격스럽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잘 감당한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성공적 인생이라고 불러요. 인생의 성공은 죽을 때 압니다. 아무리 평소에 잘 나가도 죽을 때 그 사람이 진정한 평가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고 세상에서는 별로 성공한 것 같지 않아도 우리 숨이 넘어가는 그때 성공한 인생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잘 나갔는데 그때 후회하는 인생이 있어요. 그럼 마지막 그것은 궁극적 목적의 도달한 사람입니다. 궁극적 목적을 위해서 산 사람은 후회가 없어요. 그 사람이 성공적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은 또 어떤 분입니까?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 선교는 공동체의 사명입니다. 예수님 나의 아버지요. 이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우리의 아버지요. 기독교는 처음부터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요. 제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 받은 사람들이 곧바로 교회라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구원은 개인적으로 받습니다. 누가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 이후에 우리의 삶은 공동체적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주님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개인주의로 빠지려고 하는 그 중력을 극복하고 공동체가 되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룰 때 그리스도의 몸을 진정한 몸을 이룰 때 그때부터 세상을 바꾸는 역사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개인주의가 극대화된 사회입니다. 코로나 이후에 이것은 정말 더 극으로 갔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함께하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상당수가 그때 교회를 떠나서 신앙 신앙을 버린 건 아니에요. 다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고 있어요. 그런데 공동체는 불편해야 합니다. 그 3년 기간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렸어요. 혼자 있는 것을 영적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혼자 있는 건 되게 편한 일이에요.
물론 어떤 사람은 혼자 있으면 막 외롭고 고독을 느끼고 힘든 사람도 있지만 사람들하고 부딪히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게 그게 습관이 되면 그거 되게 편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제가 이번에도 지난주에 우리 예장 유럽 선교대회를 다녀왔는데 다 목회자들이나 선교사님들이잖아요. 만나보면 여러 이제 그동안 일들을 얘기하다가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해요.
자기는 코로나 때가 제일 행복했대요. 왜냐하면 만나서 회의하는 일이 없어 만나가지고 막 회의하고 서로 의견이 대립되고 마음 상하고 그런 일이 없고 그냥 회의 줌으로 쭉 하고 끝나면 어떻게 해요?
딱 꺼버리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너무 그게 좋았는데 코로나가 끝나고 나서 또 만나야 되고 회의해야 되고 의견 대립이 있고 그러니까 그게 너무너무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여러분도 그러지 않습니까?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해지면 그거 되게 편한 겁니다. 굉장히 고상해 보이고 또 굉장히 영적으로 보이기도 해요. 저 사람은 혼자 무슨 도 닦듯이 그런데 기독교 공동 기독교는 도 닦는 종교가 아니에요. 도를 닦는 게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신 그 도의 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언제 어떻게 함께 우리 함께 공동체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뜻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우리 아버지로 모시고 영적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교회가 중요한 거예요. 누군가 불편한 사람이 있어도 절대로 교회에서 이탈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성장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투렛 박사는 이렇게 말했어요. 기독교는 개인 구원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가 문명을 변혁시켰다. 한 사람 탁월한 사람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게 아니고 기독교 기독교의 역사는 함께 공동체가 돼서 생활을 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파워로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를 때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선교적 공동체가 되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이 되고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세상이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구역으로 모이고 청년들이 모이고 이런 모임들이 우리 눈에는 그냥 모이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그런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마음을 나누고 주님을 찬양하고 하는 그런 모든 순간들을 통해서 지금 세상에 변화가 오고 있는 거예요. 그걸 여러분들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인종 계층 언어를 뛰어넘는 선언입니다. 우리 아버지 할 때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을 뛰어넘는 공동체 그게 교회입니다. 한국인과 프랑스인의 벽을 뛰어넘고 여러분 우리가 프랑스에 오래 살지만 우리가 프랑스 사람하고 함께 앉아 있으면 편해요. 안 편해요 불편해요.
프랑스 사람은 우리 만나면 불편한가 안 불편할까 불편합니다. 이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게 힘든 일이에요. 그리고 여기 와서 이 한국 공동체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오늘 몇 분 계신가 모르겠는데 이 프랑스 분들은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에요. 숫자적으로 벌써 다르잖아요. 1 대 1로 만나도 불편한데 다수 속의 소수로 와서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진짜 훌륭한 분들이에요. 흑인과 아랍인, 유럽인과 또 아시아인 이런 벽들을 뛰어넘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한 아버지를 두고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기독교 공동체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매우 혁명적인 조직이에요.
예수님 당시 아니 근래에 우리나라에 이제 지금 금년에 금년이 한불 수교 140주년입니다. 어제 갑자기 한국 우리 교단 신문에서 그 즈음에서 글을 써달라고 해서 선교대에 갔다 와서 어제 밤늦게까지 쓰느라고 이거저것 좀 뒤져봤는데 우리나라가 조선 시대에 세 번의 큰 박해가 있어요. 캐톨릭에 대한 그 박해의 요인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이 기독교가 들어와서 이 조선사회가 세워놓은 여러 가지 체계와 그 계급 체계가 있는데 벽이 있는데 그것을 무너뜨리는 거예요.
임금과 신하 엄격합니다. 부모와 자식, 양반과 상인 그렇죠 그런 경계가 분명한데 아니 교회가 들어와가지고 첫째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왕이라고 자꾸 그러고 또 제사도 안 지내려고 그러고 근데 더 충격적인 건 뭐냐 하면 양반과 상인과 그다음에 노비가 함께 모이는 거예요.
함께 모여서 예배드린 다음에 같이 밥을 먹으면서 형제님 자매님 그러는 거예요. 이 조선 사회에서는 이게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놈들은 부모도 없고 왕도 없고 질서도 없다 그래서 대박해를 한 것이죠.
여러분 기독교 공동체는 그만큼 세상에 충격을 줄 만큼 충격적인 매우 혁명적인 변역 공동체입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모든 벽을 무너뜨릴 만큼 그것이 첫 번째가 뭐냐면 오늘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을 무너뜨린 거예요.
초대교회 제일 큰 이슈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옵니다. 복음을 받고 나가서 이제 복음을 전하는데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이제 난리가 났습니다.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래서 논쟁을 하다가 베드로가 또 야고보가 야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 보니까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더라.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오순절 날에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받은 그 성령이 그들에게도 임하더라. 그러므로 이제는 이방인도 우리의 형제요 자매가 되었다 하는 선언이에요. 그게 기독교 1차 공예에서 결정한 최초의 결정입니다.
교회는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는 사건입니다. 혁명적 사건이에요. 그것이 세계 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어요.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제국도 이루지 못한 공동체적 포용성과 평등을 기독교가 가지게 됐어요.
그러니까 기독교는 가는 곳마다 이런 경계를 다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교회의 보편성이라고 우리가 사도 신경을 외울 때도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할 때 그 공 교회가 만약에 유니버설 추어치 캐톨릭 처치라고도 해요. 캐톨릭이라는 말이 로만 캐톨릭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모든 교회가 퀘톨릭이에요. 유니버설하다 이거예요. 이 안에서는 차별이 없다 이거죠. 우리 모두가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형제 자매입니다.
동의하시면 아멘 우리도 이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존재하는 언어, 문화, 인종 국가, 개인적인 성향의 벽을 넘어서 하나가 돼야 돼요. 잘 안 맞는 사람이 사실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래도 내가 양보하고 나를 무너뜨리면서 함께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때 그것이 진정한 주기도문의 첫 구절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진행되면 그것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선교가 확장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다음에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어요. 아버지 누구에게 기도하느냐?
아버지 우리 아버지 이것이 선교의 동력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로 묘사가 돼요. 주님 왕, 심판자 전능자.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쳐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있어요. 아버지라는 거예요. 구약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감히 부르지 못했어요. 감히 두려운 왕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 벌벌 떨면서 나갔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가리켜서 아바 아버지요. 이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는 거예요.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느냐고 그런데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가르치신 거예요. 너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부르라는 거예요.
그것이 기도의 첫 성입니다. 아버지는 관계이고 아버지는 사랑이고, 아버지는 용서이며 아버지는 환대입니다. 물론 왜곡된 아버지 상이 있어요.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님 아버지가 보여주시는 아버지 상이 가장 정상인데, 인간이 죄인이니까 비슷한 아버지가 있지만 대부분 왜곡된 아버지가 있어요.
자식을 막 쥐어패는 아버지도 있고 아버지 역할을 못하는 아버지 막 무서운 아버지, 비겁한 아버지. 옛날 내가 어릴 때 보면 아버지들이 참 신기한 분들 많았어요. 정말 빨리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도 꽤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왜곡된 아버지 상입니다. 진정한 아버지는 뭐냐 하면 혈연 관계 관계 끊을 수 없는 그러면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환대하는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소개했어요. 둘째 아들이 어느 날 와가지고 내 몫을 주세요 그러잖아요.
물론 법적으로는 자기 몫이 있겠지. 근데 자기가 한 게 뭐가 있어?
그 아버지가 그 재산을 일구는데 맨날 얻어먹기만 벌대 꽂고 얻어먹기만 한 거지.
자식이 뭘 했냐고
그런데 자기 몫을 챙기는 거야. 그 아버지가 다 줬어요. 두 말 하지 않고 주는 게 아버지입니다. 물론 요즘은 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요즘은 이제 저도 나이가 들었는지 노후를 어떻게 살 것인가 유튜브를 가끔 알고리즘이 이제 뜨면서 이렇게 오면 노후의 제일 큰 리스크 중에 하나가 자식 리스크래요. 자식 리스크 한국 부모들이 마음이 열어가지고 자식이 달라고 하면 다 주는 거야. 그 자식이 내가 정말 아버지 모시고 어머니 아버지 이것만 주시면 내가 모시고 한다고 하지만 그거 그거 한 달 못 넘어요. 조금 지나고 나면 소식을 끊고 연락을 하면 속된 말로 쌩 깐다고 그러잖아요. 아버지 오히려 더 불편해요. 아버지를 그래서 요즘 교훈은 절대 주지 마라 죽을 때까지 그게 이제 자기의 그 노후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근데 사실은 아버지는 주님이 보여주신 아버지는 그런 줄 다 알고도 주는 아버지 아버지가 왜 몰랐겠어요?
그 아들이 가서 그 가산 탕진할 지 다 줬어요. 그리고 그 아들을 기다립니다. 다 까먹고 허랑방탕하고 그 자식이 뭐가 예쁘겠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기다려 어느 날 돼지우리에서 구르다가 더 이상 못 견뎌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는 자식이 저 뭔데 성경은 상거가 서로 거리가 멀어 아무도 몰라봐.
그런데 그 아버지는 벌써 눈치채고 벗은 발로 뛰어나가는 거 그리고 과거를 한마디도 묻지 않습니다.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냥 끌어안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 그림 보면 어머니 손이 있고 아버지 손이 있어요.
모든 사랑을 다해서 그 아들을 끌어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고 모든 지위를 회복시켜줍니다. 속도 없는 아버지 그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아버지 상이에요. 그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거예요. 그것이 복음입니다.
랄프 윈턴은 기독교 문명 운동의 핵심이 이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한 문명을 넘어 대대로 이어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운동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산하지도 않고, 그래서 이 탕자의 비유를 사실은 탕자가 아니라 탕부입니다.
탕자가 뭐냐 하면 규모 없이 재산을 허비하는 사람을 탕자라고 한 거예요. 여기 사실 아들도 허비했지만 아버지가 허비하고 있어요. 그래서 탕부 하나님이 탕부예요. 재산을 제대로 쓰셔야 되는데 그 아들을 위해서 막 낭비에 가까울 정도로 쓰는 거예요. 그게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늘 아버지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우리에게 소망이에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우리 삶을 날마다 파악하시고 그 계산하시고 따지신다면 어떻게 살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걸 포용해 주시느라 알면서도 속아주시는 하나님 기독교 문명은 힘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그렇게 왔어요. 그런데 기독교가 왜곡될 때가 있었어요.
중세 오늘날도 막 큰 무슨 힘을 가진 대형 그런 교회가 되면 왜곡될 가능성이 있어요. 힘을 가지면 힘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확장되면서 부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고 감격하여 살면서 그것을 이웃에게 흘려보낼 때 세상은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시대는 아버지를 잃은 시대입니다. 세속주의와 고립, 극도의 개인주의와 그로 인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시대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 세속주의, 고립, 개인주의, 외로움, 우울증 다 얘기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이 물 붓듯 부어지면 다 눈 녹듯이 녹아버리는 거예요. 아버지의 용서와 하늘 아버지의 환대가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오늘부터 주기도문을 다시 여러분 읽으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요. 이렇게 기도하면서 우리와 함께 공동체를 회복하고 세상에 그 무한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흘려보내면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시는 저희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