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팔복 글 모음 3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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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는 세월
신팔복
물이 흐르듯 시간이 간다. 삶의 흔적들이 빠르게도 시간의 뒤편으로
밀려나고 있다.
묵은 달력을 뜯어내고 새 달력을 걸었다.
붉은 닭의 해, 정유년이 되었다.
새 아침을 여는 닭처럼 우리 사회도 혼란한 병신년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새 달력엔 아직 메모한 내용이 없어 빈 노트처럼 깨끗하다.
올해도 예년처럼 평범한 날들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지난 달력을 넘겨본다.
크고 작은 여러 모임과 가족 행사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면서 살아온 나날이었다.
나 혼자만 보내는 세월이 아닌데 무심하게 내 곁을 지나가 버렸다.
허송세월한 것 같아 아쉽다.
올해는 게으름 피우지 않고 알찬 한 해를 만들어가야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끊임없이 계절이 가고 나이테가 굵어진
추억들을 곱씹으며 속절없이 보낸 세월의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많아졌다.
사진첩 속에서 내 인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젊은 시절이었지 싶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그저 흡족했었다.
자식들이 결혼하여 살림을 차려 나갔고, 어머님을 여의니
텅 빈 둥지처럼 허전하다.
그 옛날 가족이 함께 모여 살던 그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많다.
세월의 뒤안길로 접어든 지금은 인생을 깊게 들여다보는 노년의
세월을 보낸다.
예나 지금이나 세월을 잡아두고 싶은 인간의 마음은 마찬가지일 것 같다.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서 매어나 볼까.”하고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옛사람들은 노래하지 않았던가.
꽃다운 시절을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의 욕망이다.
그러나 어쩌랴! 눈치 빠른 백발이 지름길로 오는 것을…….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청춘 시절이 있는가 하면,
잊어버리고 싶은 파란만장한 삶도 있을 게다.
즐겁고 행복하게 보낸 세월은 짧고, 어렵고 고통스럽게 겪은 세월은
길게 느껴진다.
집 떠난 객지 생활이나 군대생활은 그래서 더욱 오래 기억되는 게
아닐까 한다.
시간은 끊임없이 영속되지만, 잊고 함부로 넘겨서도 안 될 일이다.
여느 재화처럼 아껴 써야 한다.
써버린 돈은 모을 수 있어도 잃어버린 시간은 모래밭에 뿌려진 물과 같다.
어린애같이 시간이 금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의 세월이나 암으로 투병하며 보내는
시간은 얼마나 절실할까.
자신도 모르는 세월에 편승해 무임승차한 여행객처럼 종착역에 도달한
시한부 인생이라면 환자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의 세월을 모를 일이다.
'재깍재깍’ 시간은 흐르고 촛불처럼 타들어 가는 자신을 되새기며
세월을 약으로 알고 살아가겠지만, 모르면 몰라도 하루 하루가
금쪽 같은 시간일 것이다. ‘
오늘 하루가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살아라.’하는
명구는 시간을 성실하게 써야 한다고 강조한 말이다.
이 세상을 함께 사는 우리는 같은 세월을 공유하고 있다.
누구의 세월은 좋고 누구의 세월은 나쁜 것이 아니다.
세월을 탓하기보다는 좋은 세월을 만들어 가는 현명한 지혜가
필요하려니 싶다.
내가 병원에 다닐 때 밤잠을 못 자고 뒤척인 적이 있었다.
그 날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암인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소견에 아내도 나도 머릿속이 텅 빈
하얀 밤을 지새웠다.
결국, 끈질기게 병원에 다니면서 음성판정을 받아 천만다행이었다.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었다.
그땐 세월이 야속했었다.
세월 앞에 누가 당당할 수 있겠는가?
인생은 세월에 묻혀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다.
과거는 역사의 세월이고 미래는 희망의 세월이다.
새 달력 앞에 서서 살아온 지난날에 감사하며 새해의 작은 소망을
빌어본다.
가족 모두가 건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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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름이 그려주는 명화(名畵)
신팔복
하늘에는 두둥실 구름이 떠있다.
하얀 구름이 마치 솜털처럼 곱다.
높이 뜬 구름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무척 평화롭다.
일상생활의 번거로움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어 좋다.
자연의 조화(造化)로 생성되는 구름이지만 저렇게 유유자적할 수가 있을까.
잠깐사이에 스스럼없이 모양을 바꾸는가하면 한데 뭉쳐
또 다른 그림을 만들어 낸다.
거침없이 보이는 구름은 평화와 자유를 간직한 신비의 존재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적막하고 공허하다.
청청한 하늘에 무한하게 펼쳐지는 공간은 우리에게 허무와
비애만을 줄뿐이다.
지상에서 증발한 수증기가 하늘로 치솟아 구름이 되어 노닐다가
다시 비가 되어 지상으로 내리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영광이다.
농사에는 더 없는 단비가 된다.
나무가 산과 어울리듯 구름 또한 하늘과 궁합이 잘 맞는다.
그래서 구름은 하늘로 뜨는 성싶다. 평온하던 구름도
얄궂은 바람에 쫓기면 제자리가 아니라는 듯 홀연히
먼 곳으로 사라지고 만다.
정체가 없어져 버리니 아쉬운 일이다.
만물은 무상하다 했는데 구름도 예외일 수는 없다.
지칠 줄 모르고 매미가 운다. 한 무리의 뭉게구름이 마이산을 넘는다.
여러 번 보아왔지만 오늘따라 산수화의 한 폭처럼 더욱 곱다.
어디로 흘러갈까.
구름을 타고 다닌다는 신선이 부럽다.
한반도를 내려다보고 지구의 지붕이라는 에베레스트도 넘고 싶다.
차마고도를 따라가 중국의 장족이 살고 싶어한다는 이상향,
어딘가에 있을 샹그릴라(香格里拉)에 가보고 싶다.
북극의 빙하지대 만년설과 운해로 가득한 구름의 나라도 찾아가고 싶다.
구름의 문을 통과해야 도달한다는 도연명의 무릉도원은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을까?
구름 속의 상상은 기쁨으로 가득하다.
인생에 꽃구름과 같은 희망이 있으면 행복하다.
젊은 날의 청운의 꿈은 삶을 활기차게 만들어주지 않았던가.
오가는 길에 만나는 소나기구름은 잠시 피하면 되지만,
먹구름을 만나면 곤란해진다.
인생에서도 먹구름은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한다.
떼로 몰려오는 먹구름에 빠지면 오리무중에서 헤어나기란
어려울 테니 말이다.
알 수 없는 인생 여정, 먹구름은 비켜가고 양털 같은
꽃구름만 피어나기를 바라야 할 일이다.
낮에 보는 구름도 아름답지만 청량한 밤하늘에 달빛 머금고
떠가는 구름은 시인이 아니라도 오래토록 감상하게 된다.
달이 가는 것인지 구름이 가는 것인지 황홀한 혼돈에 빠지게 된다.
달이 구름을 유혹하듯 구름도 사람을 유혹하지만
어디 구름처럼 살 수 있는 인생이라던가?
속세의 인연 따라 살아야 되니 말이다.
구름에 달 가듯 가는 세월 속에서 사람의 한평생이
구름의 생멸과 같다고 옛 스님은 말하지 않았던가.
구름은 말이 없으나 크나큰 자연철학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가끔씩 운해로 가득한 마이산은 마치 바다에 떠있는
쌍 돛단배처럼 보여 무척 아름다운 경관이 연출된다.
구름이 만들어 주는 대자연의 예술품이다.
파란 하늘에 뜬 뭉게구름을 보면서 마냥 행복해지는 하루다.
천재 화가도 흉내 낼 수 없는 구름이 그려주는 명화(名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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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금반지
신팔복
금은 금색이다.
그래서 황금이다.
아내가 화장대 서랍에 있던 금반지 한 개와 내 넥타이핀을 찾아와
보여주며 금팔찌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기 전에 준 것이라 했다.
한 개라도 남아 있구나 하며 만져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신혼 초에 반지를 끼웠으나 성격에 맞지 않아 빼놓고 다녔다.
아내도 거의 반지를 끼지 않고 살아왔다.
나는 어릴 때 가입한 반지 계가 있어서 지금도 부부간에 만나
여행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는다.
모두가 자녀를 출가시켜 홀가분하게 살고 있다.
계원이 결혼할 때면 금반지 서 돈씩을 해주었는데 그때 금반지는
선호의 대상이었다.
번쩍이는 금반지를 금은방에서 처음으로 찾았을 땐 특별한
보석을 가진 것처럼 기뻤다.
손가락에 끼워보고 친구들에게 자랑도 했었다.
아내도 금반지를 끼고 결혼식에 나왔었다.
청춘 시절의 예뻤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돌이 되었을 때 금반지를 받았다.
장인어른이 주셨고 이모들이 축하 선물로 주셔서 귀하게 간직하고
있었는데 모두를 털렸으니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30여 년 전 일이다.
아버지가 전북대학병원에 입원하셔서 온 가족이 경황이 없었다.
집을 비운 틈을 노려 낮도둑이 뒷문 고리를 뜯고 방에 들어와
결혼반지와 목걸이, 아이들 돌 반지까지 몽땅 가져갔다.
상당한 양이었는데 귀신같이 금만 가져가고 잡다한 것들은 빼놓고 갔다.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
즉시 경찰서에 신고했으나 결국 도둑은 잡지 못했다.
잘 보관하지 못한 내 실수였다.
금은 오래전에부터 쓰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들의 유적지에서 금제품이 발견되었다.
3천 년도 넘은 이집트 왕의 유적에서는 황금마스크가 나왔고,
우리나라 경주와 공주 등지에서도 화려한 금관과 금제품이 나왔다.
금은 이렇듯 권력과 재산의 상징으로도 여겨졌다.
금의 쓰임새는 아주 많다.
귀금속 분야로 장식품, 패물 등에 유통되는 금이 절반 이상이고,
전자산업 분야로 금화, 도금, 용접과 그 외에 치과 분야와 의약품 등에도
상당량 쓰인다.
이렇게 쓰이는 곳이 많으니 매년 생산도 는다고 한다.
금을 많이 보유한 나라는 경제와 문화가 앞서 있고 부강한 나라이다.
금을 제일 많이 가진 나라는 미국이다.
작년 통계로 2위인 독일의 2.4배에 해당하는 8,133톤의 금을 보유해서
전 세계 금 보유량의 33%를 차지한다.
이어서 이탈리아, 프랑스, 중국, 러시아, 스위스, 일본 등이다.
우리나라는 104톤을 보유해 34위를 차지하며 0.4%에 지나지 않지만,
전 국민의 금 모의기로 국가부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금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고 국민의 단합된 의지의 결과였다.
한국보석학회에 따르면 남아프리카와 미국, 호주는 금 생산량이
조금씩 감소하는데, 중국과 러시아는 증가하고 있다 한다.
개인 소유로는 중국인과 인도인이 계속 금을 모으고 있다 하니 훗날
세계 경제의 판도가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해진다.
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부자다.
금은 귀금속으로, 보관할 수도 있고 또 현금으로 처리할 수도 있어
환금성이 매우 좋다.
그래서 재벌들은 금괴를 사서 은행에 맡기기도 하고 금 펀드에
투자하기도 한다.
요즘 말로 금수저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은가락지 하나 없는 서민들은 그저 부러워할 뿐이다.
요즘 금배지를 노리는 열풍이 일고 있다.
자기가 적임자라고 주장하며 사리분별도 모르는 낯두꺼운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뛰어들고 있다.
금배지를 달려고 환장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대의정치로 심부름꾼을 자처하지만, 일단 당선이 되고 나면 초심은
잃어버리고 나라야 어찌 되든 사욕에 빠지는 정치꾼들이 많아 걱정이다.
금배지를 올바로 사용 못 하고 금수 저로 아는 사람들이려니 싶다.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꾸준히 기량을 연마해서 따낸 운동선수의
금메달은 순수한 땀의 대가여서 좋다.
배지와 메달이 명확히 비교되는 점이다.
아내가 찬 금팔찌는 황금색으로 빛나 보인다.
나도 금을 찾아야겠다.
내가 만약 바위만 한 금덩이를 갑자기 발견하는 행운을 얻는다면
금수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이웃을 돕고 흙 수저로 남을 것인가
고민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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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쁨을 주는 스마트폰
신팔복
영상전화는 참 재미있다. 대화 내용은 물론 상대방의
행동까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어 언제라도 영상통화를 할 수 있다.
특히 손자 손녀와 전화를 할 때는 더욱 필요하다.
여러 가지 재롱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오늘도 아들의 스마트폰에 전화를 걸어 손자와 영상통화를 했다.
장난감이 쌓인 거실에서 제 누나와 놀다가 할아버지를 본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이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까지 한다.
제 누나가 손을 흔들고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흔들어 보이니
저도 따라 한다.
웃는 얼굴이 환하다.
건강하게 노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된다.
내가 손을 흔들면 거울처럼 저도 따라 손을 흔든다.
장난감 자동차를 밀고 거실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난다.
옆에 있던 아내가
‘성준아, 할머니야! 어린이집 잘 다녀왔어?’ 하고 물어도
이젠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제 할 일만 한다.
재원이는 할머니의 묻는 말에 유치원에서 배운 자랑을
실타래처럼 풀어놓는다.
지난날의 전화기가 생각난다.
전화를 처음 받았을 때 먼 곳에서 어떻게 말이 전해오는지 무척 신기했다.
그땐 전화기 옆에 달린 손잡이를 손으로 돌려 발전을 해야
상대방 전화기에 “따르릉!” 하고 신호가 울렸다.
자석식 전화기였다.
그리고 전화기 옆에는 큰 건전지가 붙어 있어 통화를 유지했다.
그 다음은 공전식 전화기가 나왔다. 수화기만 들면
“윙∼”하고 신호음이 울렸다. 그러면 우체국 교환원이
나와 상대방 전화코드에 연결해주어 통화를 했다.
이때 전기는 우체국에서 공급되었다.
이어서 자동전화기가 나왔다.
전화기에 달린 번호판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상대방
전화번호를 차례대로 돌리면 “스륵 착, 스르륵 착, 스르륵 착”하고
자동으로 연결되었다.
전자식 버튼 전화기에 이어 무선전화기로 발전했다.
전화기는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자가용차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처럼 전화기를 신청하고
얼마 동안 기다려야 전화기를 놓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백색 전화기와 청색 전화기가 생겨났다.
내가 처음 받은 전화번호는 843번이다.
진안읍 군하리 141-8번지에 살 때였다.
“따르릉! 거기가 신 선생님 집이지요?” 하고 전화가 걸려오면
무척 반가웠다.
술을 마시러 갈 때면
“여보! 나 좀 늦겠어. 애들하고 먼저 밥 먹어요.”하고 전화하면 되었다.
이웃과 쉽게 소통하고 빠르게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전화는 생활의 필수품이 됐다.
학창시절 대학신문에 나왔던 기사다.
전화로 데이트를 약속했는데 목소리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그는 당장 데이트를 신청했단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 나가 아가씨를 만났다.
보는 순간 기대는 어긋났다.
처음 데이트에 이렇게 못생긴 여자를 만나게 되다니 하고
후회가 되었지만, 불러놓고 헤어질 수 없어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고
다음 약속은 하지도 않고 왔단다.
다른 친구는 만난 여자가 아주 예쁘고 교양이 있어 보인다며
다음에 또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 바람에
그만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단다.
그래서 신문에 기고한 글의 제목이「외눈이라도 붙었더라면」 이었다.
전화기에 눈이 있었다면 실망은 없었을 것이다.
그게 현실이 된 요즘이다. 스마트폰 전화기는 눈을 달고 나왔다.
정보통신기술(IT)은 극초단파의 이용과 컴퓨터기술을 결합해
각종 정보를 수집, 생산, 가공, 보존, 전달은 물론 활용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좋은 세상이다.
스마트폰이 생활을 더 가깝고 친근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인공위성이 태양계의 끝을 날고 우주공간에 정거장도 만든 시대다.
상상력으로 창작된 만화가 현실이 되는 게 요즘의 과학시대다.
멀리 떨어진 가족도 같은 자리에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가상현실이 실현될 수 있는 3D(3차원) 전화기가 개발되는 것도
멀지 않으리라.
영상전화가 기쁨을 주니 좋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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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비가 날다
신팔복
가정의 달 5월은 가족들이 자주 만나서 좋은 달이다.
아내와 나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큰손님을 기다리듯 손자를 기다렸다.
아내는 손자와 손녀가 좋아하는 메추리알을 조리고 햄도 볶아
반찬을 만드느라 바빴다.
1년에 몇 번 만나니 어린 손자 손녀의 얼굴이 눈에 밟히는 듯 흥겨워 보였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어도 징검다리 연휴라 고속도로의 정체로
오전을 넘겨 도착했다.
유치원생 손자를 보듬은 아내는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부비며 사랑을 주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손녀도 어루만지고 예뻐했는데 요즘 친구들을 사귀고
잘 논다고 했다.
가족이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옛날처럼 생활이 단순하지 않은
요즘은 그것도 그리 쉬운 게 아니다.
할아버지 집에 왔으니 어떻게 즐겁게 해줄까 생각했다.
아내가 오늘부터 제19회 함평나비축제가 열린다며 함께 가보자고 했다.
내가 운전을 했고 피곤한 아들은 옆 좌석에서 졸았지만, 뒷좌석 할머니와
제 엄마 사이에 앉은 손자와 손녀는 신이 나는지 계속 동요를 따라 부르고
잠시도 입을 가만두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귀여운 애들이다.
함평나비축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꽃과 나비라 했다.
어느 곳이나 꽃이 피어 있었고, 수백만 송이의 꽃으로 웅장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축제라서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가 많았다.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걷는데, 얼굴에 그림을 그려주는 곳에서
저들도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이라 그냥 말 수 없었다.
손자 성준이는 붉은 게를 그리고 손녀 재원이는 하얀 나비 날개를
왼쪽 뺨에 그렸다.
3천 원짜리 그림이 애들의 얼굴에 그려졌으니 더욱 예뻐 보였다.
우리도 아이들을 보면서 함께 웃었다.
인증사진은 필수였다.
축제장은 아주 넓어서 전체를 둘러보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 걸음을 재촉했다.
손자의 손을 잡고 나비·곤충생태관에 들어갔다.
커다란 온실 속에 각종 꽃이 만발했고 배추흰나비가 수도 없이 날고 있었다.
꽃의 향기도 물씬 풍겼다.
먼저 온 아이들이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를 따라다니며 무척 좋아했다.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분위기에 젖어 웃고 좋아했다.
배경 좋은 장소를 골라 사진을 찍느라 온실 속은 시끌벅적했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을 불러 세우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이색 분위기에 신이 나서 나비를 따라가는 손자의 뒤를 따랐다.
재원이가 유심히 들여다보는 탱자나무 이파리에 알록달록한 애벌레가 숨어 있었다.
호랑나비 애벌레였다.
성준이도 꼬물거리는 모습이 신기한 듯 바라보더니 무섭지도 않은지 고사리 손으로
만져보며 좋아했다.
하나둘씩 사물을 체험하는 순간이 되는 것 같이 보였다.
알에서 애벌레로 커가고 다시 번데기의 허물을 벗고 성충(나비)으로 이어지는
곤충의 한살이가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생명의 연속성이 마치 우리네 인생과 같이 보였다.
어린 손자는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와 같이 귀여운데 나이든 우리 내외는
노인으로 익어가고 있다.
아들이 손자만 할 때 부모님을 모시고 멀리 광주동물원으로 나들이 간
기억이 떠올랐다.
두 분은 이승을 떠나셨지만 이제 내가 할아버지로 남았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이 내가 손자 손녀를 보는 것처럼 아끼고 사랑했으리라
생각하니 깊은 감회가 일었다.
건강하고 올바르고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만의 욕심일까.
나비는 자유롭게 하늘을 난다.
이슬과 잎을 먹던 애벌레는 번데기의 긴 어둠 속에서 화려한 우화로 나비가 되어
꽃을 찾아 꿀을 빨며 자유를 만끽한다.
좋은 날 짝을 찾고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한다.
애벌레는 어미의 얼굴을 모른다.
그러나 훌륭하게 자랐다.
세상을 헤쳐 나가는 의지가 영장류보다 낫게 보이는 순간이다.
제 나름의 삶의 법칙이 몸에 밴 나비들이다.
나비들의 춤이 가족을 즐겁게 만들었다.
맛있게 저녁밥을 먹고 한참을 오다가 아내의 모자를 놓고 온 것을 알았다.
아무렇게나 잘 어울려 아끼던 것인데 몹시 서운해했다.
그 말을 들은 손자가 “오늘은 행복한 날인데, 한 가지가 슬프다.”했다.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할머니 모자를 잃어버려 슬프다고 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할머니 모자를 사주어야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아내가 “오냐! 기특한 내 손자, 그렇고말고,
너는 서운해하지 마라.” 했다.
오는 동안 어린애가 ‘행복과 슬픔을 어떻게 말할 줄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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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 고향 진안 가는 길
신팔복
진안으로 가는 버스 속에서 듣는 고향 말씨는 정겹다.
귀에 익은 억양과 사투리가 잠자던 향수를 깨운다.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눈에 익은 산천이다.
여기저기 자리 잡은 마을들이 평화롭다.
내 어린 뼈가 자랐고 흙과 물과 나무와 바람이 삶의 지혜를 주었으며,
하늘을 떠가는 구름과 별들이 희망을 키워주던 곳이다.
개울물 얼음 사이로 버들강아지가 피어나고, 다랑논 웅덩이에서
개구리 연가가 퍼져갈 때, 고향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이산에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고, 보리밭에 종다리가 날아다닐 때면,
기다리던 제비도 변함 없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 제비들이 빨랫줄에 앉아 반갑게 인사를 했고,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새끼를 치고 살았다.
뻐꾸기 산에서 울고 뜸부기가 논에서 살다가 떠나면 어느새 벼는 누렇게
고개를 숙였다.
메뚜기와 고구마도 구워 먹었다.
눈 내리고 얼음이 얼면 썰매를 타고 팽이를 쳤다.
친구들과 어울려 해 가는 줄도 몰랐다.
눈 내린 날이면 사랑방에 모여서 고향 이야기도 들었다.
먹을 것을 찾던 노루가 집으로 뛰어 들어왔고, 밤늦게 늑대가
나타나 돼지새끼도 물어갔다.
덕태산 호랑이가 개를 물어가더니, 이번엔 밤길 가던 사람을 해쳐서
포수들이 경찰서에 잡아다 놓았다는 등, 도깨비에게 홀리고 귀신이
나타나는 이야기도 많았다.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장끼전과 해님과 달님이 된 오누이 이야기가
구전되었다.
이야기를 배워 동생에게 해주려고 물어보고 또 따라 해 보기도 했다.
이야기가 차츰 무서우면 방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세찬 북풍이 문틈으로 몰아쳐 호롱불이 꺼지면 모든 친구들이
질겁을 했고, 관솔불 밝혀 집으로 돌아올 때도 뽀드득 하는
발걸음 소리에 놀라서 등골이 오싹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고향은 이렇듯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보물 창고다.
그래서 누구나 잊지 못하는가 보다.
설이나 정월 보름날, 추석, 동짓날에는 으레 농악을 쳤다.
풍물 옷을 갖춰 입고 꽹과리를 따라 일제히 가락에 맞춰 장구와
북을 치면 징은 한 박자씩 리듬을 맞췄다.
이들이 한데 어울려 고운 화성을 이뤘다.
들을수록 경쾌하며 저절로 흥이 솟았다.
특히 정월 대보름날엔 길 굿, 당산 굿, 샘 굿, 지신밟기가 이뤄졌다.
꼬마들이 모여 풍물을 따라다니고 아낙네들이 구경나와 어깨춤도 추었다.
집집이 싸리나무 문을 열어놓고 마당놀이 농악 패를 기다렸다.
장독과 부엌에서 굿을 치고 잡귀를 물리치는 액땜을 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술상도 차렸고 말에 쌀을 담아 촛불을 켜고
새해의 건강도 빌었다.
달이 뜨면 달집태우기가 이뤄졌고 너도나도 신명 나게 마을
축제를 즐겼다.
그러면서 온 마을이 화합했다.
요즘엔 경제적 이유로 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려갔다.
내 자식도 그렇지만, 빼곡한 빌딩 숲에서 밀리는 차량과
인파로 정서적 여유를 갖지 못하고 사는 것 같다.
어찌 보면 객지를 떠도는 유목민의 생활과 같아 보인다.
퇴직자들이 농촌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것을 보면,
추억이 묻혀있는 고향을 찾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사고가 깊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여유를 찾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이미 어머니 품속 같은 고향에서 변화하는 계절을 느끼고
인정 넘치는 고향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으니 참으로 행복하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의 편리한 시대로 변하면서 명절풍속도
가족 중심으로 달라져 버려 전통문화가 사라져가고 있다.
이번 설에도 사랑하는 자식들이 손자들과 함께 고향을 찾아오겠지만,
옛날처럼 함께 즐길 마을축제가 없어서 아쉽기 그지없다.
나는 내 고향 진안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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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논두렁을 깎으며
신팔복
제초제를 뿌리지 않은 논두렁이라 풀이 무성하다.
모내기를 앞두고 식전에 논두렁 풀을 베러 나갔다.
예초기(刈草機)에 휘발유를 넣고 시동을 거니 ‘앵앵’ 소리를 내며
빠르게 돌아간다.
등에 메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논두렁 잡풀들이 새파랗게 날을 세운 칼날 앞에 무참히 쓰러져갔다.
잡풀은 천하무적 예초기에 대적할 상대가 못 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예초기 칼날을 옮겨가며 조경사가 나무를 다듬듯 풀을 깎았다.
예초기가 지나간 논두렁은 털 깎은 양의 등처럼 곱다.
지금은 기계로 논두렁 풀을 깎는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실 때는 기계가 없었으니 낫으로만 풀을 베었다.
논두렁, 밭 두렁 풀을 베러 가려면 보통 두 자루의 낫을 챙겨
바지게에 얹고 가셨다.
숫돌도 챙기셨다.
날이 무뎌지면 바꿔 쓰셨고, 논두렁에서 숫돌에 갈아 쓰기도 했다.
산골의 다랑논, 길고도 높은 논두렁의 많은 풀을 베려면 허리 펼 시간도 없이
종일 바쁘게 일하셨다.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할아버지도 가끔 나가셨는데 농촌에선 누구나
논두렁 풀을 깎았고, 농사철이 되면 항상 바빴다.
논두렁이 깨끗해야 주인이 게으르게 보이지 않는다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다른 사람의 논과 경계하는 논두렁은 더욱 깨끗하게 정리해야 이웃과도 사이가
좋아진다고 하셨다.
일요일에는 아버지를 따라 재 너머 미재실 논에 가기도 했다.
뻐꾸기와 꾀꼬리가 산에서 울고 논 위로 제비도 날아다녔다.
소 방울 소리를 들어가며 길가의 풀을 소에게 뜯길 땐 이마에 땀도 흐르고
얼굴도 붉어졌었다.
몸으로 하는 게 농사라서 농사철에는 집안 식구가 모두 바빴다.
논두렁 풀은 꼴 이외에는 모두 논에 넣어 거름으로 썼다.
비료가 모자라던 시절이라 산에 올라가 가랑잎을 베어 몇 짐씩 지어다
논에 넣고 소 쟁기로 갈아엎어 써레질을 해서 모를 심었다.
그땐 제초제가 없어서 친환경 농사가 되었다.
논에는 풀도 많아 돌피, 가래, 올 방개, 생이 가래, 개구리밥, 물달개비 등이 흔했다.
모내기를 마치면 피를 뽑고 두어 차례 논을 맸다.
논에는 개구리도 많았고 물방개, 물자라, 물맴이, 소금쟁이, 잠자리 유충,
송장 헤엄치게, 장구애비 등이 살았는데 지금은 이름도 잊은 곤충들이다.
뜸부기가 집을 짓고 알을 낳아 새끼도 키웠다.
황새와 두루미도 먹을 것을 찾아 논으로 날아들었다.
메뚜기도 잡았고, 우렁이와 미꾸라지도 논에서 잡았다.
농사를 잘 지어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가장의 임무였다.
보릿고개를 넘기고 긴 기다림 끝에 누렇게 익은 벼를 베는 기쁨은 컸다.
방아를 찧어 하얀 햅쌀밥을 지어 오순도순 가족이 나눠 먹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
‘자식의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것은
우리네 부모들의 자식 사랑이었다.
아버지는 그때야 피로를 잊으셨을 것 같다.
주름은 늘어 가도 마음의 미소는 커졌으리라.
농기계와 농약도 발달해서 요즘 농사는도 무척 수월해졌다.
하지만, 우려할 점이 있다.
14세 이하 유소년 인구보다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더 많아지면서
고령 농업인이 대부분인 농촌은 지킬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농사는 인간 만사의 근원’인데 농업이 뿌리째 무너지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논두렁이 깨끗해졌다.
몸은 피곤해도 일을 끝낸 마음은 홀가분하다.
비료도 넣고 모내기를 기다리련다.
얼마 되지 않은 농사지만 올해도 잘 지어야겠다.
자식들이 찾아오면 쌀가마니를 내어주는 행복을 누려보고 싶다.
수저를 들고 밥을 먹을 손자 손녀의 얼굴을 떠올리면 행복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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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눈 내린 계곡 길
신팔복
바람 없이 좋은 날씨다.
문득 산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 차를 몰고 모악산으로 갔다.
중인리 주차장에는 벌써 등산객들의 자가용이 빼곡했다.
한 무리의 등산객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길은 여러 갈래였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생각하다가 안내 푯말을 보고 갑자기
계곡 길로 발을 돌렸다.
이 길은 처음이다.
몇 사람이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앞서 가고 있었다.
지난밤에 내린 눈으로 산이 하얗다.
아이젠을 차고 걸었다.
젊은 부부가 내 뒤를 따라오더니 이내 앞서 간다.
눈을 밟는 소리가 음률처럼 이어졌다.
몇 구비를 돌아 좁은 계곡에 이르렀다.
물은 맑고 청정하게 흐르고 있었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정적을 깨고 낙엽을 떨군 겨울나무 사이로 퍼졌다.
웅덩이에 빠진 낙엽들이 시체처럼 차갑게 보였다.
물 속 어딘가에 가재가 추위를 견디며 잠자고 있을 것 같다.
딱딱한 껍질에 까만 자루 눈, 더듬이를 이리저리 흔들며 집게발을
포신 처럼 내밀고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가재다.
위험을 느끼면 꼬리 채로 물을 급하게 휘저어 뒤로 내뺀다.
1급수 청정지역에서만 살고 있는데, 지금은 보호종이다.
여름철 맑은 냇가에 돌을 떠들면 웅크리고 있는 가재를 잡을 수 있다.
암컷은 배다리에 좁쌀 모양의 검정 알을 포도송이처럼 달고 다닌다.
부화가 된 작은 새끼들은 어미의 배다리를 붙잡고 독립할 때까지 살아간다.
말랑거리는 얇은 껍질을 가진 작은 새끼들은 여느 동물처럼 귀엽다.
동식물의 사체를 먹고 몇 차례 허물을 벗으며 성장한다.
가재는 맛도 좋다.
파를 조금 썰어 넣고 장조림을 하면 게보다 맛이 더 낫다.
작년에 손자에게 보여주려고 가재를 잡아 보았다.
농약과 쓰레기로 냇물이 오염되어 찾기 힘들었지만, 다행히도
한두 마리를 잡아 보여줄 수 있어 좋았다.
작은 다리를 건너 비탈을 오르다가 폭포 쪽으로 향했다.
보이는 사람이 없어 적적했다.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먼저 간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지팡이로 조릿대에 쌓인 눈을 휘휘 저으며 걸었다.
복조리를 만든다는 대나무다.
뿌리를 달여 차로 마시기도 하고 잎을 동치미 만들 때 넣어 시원하게 만들었다.
물레로 북실을 만들 때도 조리대 잎을 넣어 감았다.
산을 오를수록 흐르는 물은 적고 눈은 많았다.
발목을 덮기도 했다.
폭포에 작은 고드름이 매달렸고 물은 그 안에서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물이 적어서 폭포도 작다.
내려오는 사람을 만나 반가웠다.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가파른 길로 접어들었다.
힘이 들어 깔판을 펴고 눈 위에 앉아 간식을 먹고 물도 마셨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쏟아졌다.
벌써 정오에 가까웠다.
소나무 사이에 서어나무와 참나무, 물오리나무가 언 듯 단단해 보였다.
따뜻한 계절이 오면 새잎이 나고 꽃피고 열매 맺을 꿈을 꾸며
이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있다.
빼곡한 나무들이 앞을 가렸다. 아름드리나무도 있다.
나무가 없어 벌거숭이산에서 고자배기까지
뽑아다 땔감으로 쓰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
도배도 못 한 초가집에서 화롯불에 추위를 녹이며 살았다.
번번한 옷 한 벌이 아쉬웠고 양말도 기워 신었다.
산림을 가꿔야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 정책으로 매년 나무를 심었다.
식목일이면 전 국민이 나무를 심고 산림녹화에 힘썼다.
학생들도 식목행사에 동원되었다.
문고리가 철썩 달라붙는 추위와 가난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지금은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이다.
산등성이로 올라채어 무제봉으로 갔다.
구이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흰 설산에 울긋불긋한 등산복들이 꽃을 피웠다.
대부분이 좋은 상표의 값비싼 옷들이다.
등산화도 내 것보다 좋은 것들이 많다.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며 쉬었다.
모처럼 등산을 해서 그런지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오르기 싫어졌다.
꼭 정상을 가고 말았는데 나도 이제 나이가 든 모양이다.
운장산에 갔을 때도 몸을 사렸다.
내려오는 길은 미끄러웠지만, 비단길처럼 수월했다.
복숭아나무를 전지하는 노인을 보았다.
희망을 손질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복숭아 농사가 잘되어 환하게 웃는 노인의 얼굴을 상상해보았다.
신발의 먼지를 털고 차를 몰았다.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등산은 몸도 마음도 치유해주어 좋다.
자연이 주는 큰 혜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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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설 단풍
신팔복
단풍나무의 자태가 환하다. 대설이 지났는데도 지금까지 남아있다.
모두가 잎을 떨구고 겨울나무로 변했는데 편백나무를 배경으로
몇 그루가 친구 되어 빛깔이 곱다.
붉은 색과 주황색이 짙고 옅게 어우러져 보기 좋다.
세월의 아쉬움을 달래려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다.
가을의 전령인 붉은 단풍을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대비해 보고
있노라면 무한한 추억과 상념에 빠져든다.
계절이 우리의 심성을 자극하기 때문일 게다.
시공을 넘는 상상과 개성 깊은 사고가 인간의 감성을 일깨우고,
서정적 시심에 끼치는 영향은 크고도 넓다.
그래서 인간은 술과 더불어 자연을 노래하고, 춤추며, 그림 그리고,
인생을 구가하면서 삶의 예술을 창조해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봄·여름·가을·겨울 네 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축복 받은 나라다.
사계절이 주는 의미는 참으로 무한하다.
동토인 한대지방의 극한 생활이나 열대의 변화 없는 지루한 생활은 삶에
정서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찬바람이 단풍을 흔들고 지나간다.
세월도 함께 흘러간다.
푸르른 날들을 뒤로하고 뭐가 그리 바쁜지 재촉하듯 내닫는다.
붙들어 맬 수 없는 세월이다.
물처럼 흐르는 세월이고 물레방아같이 돌아가는 계절이다.
따스한 봄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하얀 눈이 내렸다.
편백나무 위에도 단풍나무에도 수북이 쌓인 눈이 나무를 떨게 한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제 길을 순행하듯 우주는 쉼이 없고,
내 곁을 스치는 만물도 변함 없이 흐른다.
자연의 순리가 형언할 수 없이 경이롭다.
뜨거운 태양 아래 지칠 줄 모르던 녹색 잎이 뿌리를 살리고 가지를 키워내고
세월에 익어 단풍이 된 지금, 이제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낙엽 지고 눈 내리는 계절이다. 일생을 계절에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 인생은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금년이 고희인 나는 분명 가을을 가고 있다.
꿈 많던 어린 시절이나 혈기 왕성하던 젊음은 벌써 옛 이야기가 되었다.
술자리에서나 되살아나는 추억으로 남았다.
단풍나무가 넌지시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당신도 이젠 무거운 짐일랑 서서히 내려놓고 구름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라 한다.
어차피 가는 세월, 늙는 게 인생이다. 알게 모르게 세월에 찌든 때를
씻어가며 마음을 다잡아 내가 받은 은혜를 소중히 생각하며
이웃에 어울리는 고운 색이 되어 살아가야겠다.
아름다운 단풍 색으로 물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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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동피랑 벽화 마을
신팔복
동피랑은 벽화로 유명한 마을이다.
담벼락이 온통 그림으로 가득하다.
마을 전체가 마치 커다란 갤러리(gallery) 같다.
경상남도 통영 중앙시장 뒤쪽에 자리한 동피랑은 ‘동쪽’과 비탈의
통영사투리인 ‘비랑’이 합쳐져 생긴 이름이다.
통영항을 내려다볼 수 있는 가파른 언덕배기 마을이다.
텔레비전으로 소개되어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마침 오늘 진안읍 외사양동 마을 영농법인이 선진지 견학을 하고
자투리 시간이 있어 찾게 되었다.
오르막길로 이어지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검푸른 바다를 누비던 녀석이 용궁을 빠져나와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육지 생활을 체험하려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수많은 벽화를 감상하느라 내 눈도 바빴다. ‘
동피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란 인사말도
‘당신이 오심은 우연이지만, 마음을 나눔은 영원입니다.’라는
정감이 넘치는 글도 벽화였다.
젊은 남녀가 정답게 걸어가는 좁은 길로 따라 올라갔다.
좁은 골목길 바닥도 그림이고 벽면도 그림이었다.
혹시나 피해를 줄까 봐 조심하며 걷는데 붉은 장미가 피었고
해바라기도 활짝 웃었다.
이쪽은 금붕어가 놀고 저쪽 벽에서는 거북이가 앙증맞게 기어오른다.
충무공이 바다를 지키고 거북선이 벽을 뚫고 나온다.
무역선 뱃머리 위로 굴뚝같은 연기가 솟는다.
항구에 도착한 마도로스파이프였다. 순간의 여유를 즐기는가 싶었다.
전봇대도 옷을 입고 굴뚝도 색깔이 있다.
벽화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감시하려는 듯 쳐다본다.
시가지를 그린 벽화와 하늘에 닿는 사다리도 있다.
초가지붕 처마에서 참새 알을 꺼내던 사다리는 이제 꿈 많은
어린이가 별을 따려고 잡고 오른다.
사막이 있고 호랑이가 있다.
야자수가 늘어지고 갈매기가 훨훨 난다.
고양이가 있고 어린아이가 있다.
꿈이 넘치는 상상의 날개가 펼쳐진다.
어린 왕자가 다녀간 것일까?
시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도 있다.
날개는 또 있다.
활짝 편 천사의 하얀 두 날개가 여행객을 기다리고 있다.
수많은 사람에게 주고도 아직도 더 주려고 남아있는 날개다.
어여쁜 아가씨가 천사의 날개를 달고 별나라로 여행하려나 보다.
여러 번 찍는 것으로 봐서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사진일 것 같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統制營)인 동포루가 있던 자리다.
통영시는 낙후된 마을을 철거해 동포루를 복원하고 주변에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그러자 2007년 10월에 주민과 뜻있는 시민이 ‘푸른 통영 21’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색다른 시선으로 공공미술을 통한 마을 살리기
사업에 착안했다.
‘동피랑 색칠하기 전국벽화공모전’을 열어 전국 미술대학
재학생과 개인 등 18개 팀이 모여 낡은 담벼락에 벽화를 그렸다.
벽화는 80여 가구에 모두 그렸고 낡은 벽을 보수하며 2년마다
새로운 옷을 입혀 벽화를 만들어 내니 이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매년 외국인을 비롯한 방문객이 20만 명을 넘는다고 하니 달동네
사람들이 시름을 잊고 행복이 넘치는 마을로 변신하게 됐다.
동피랑 구판장, 할머니 바리스타, 몽마르다 언덕 등에서 크고 작은
관광 영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제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벽화마을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마을 만들기 사업이 성공한 사례이다.
사람이 살면 문화가 생기고 역사가 되는가 보다.
커다랗게 쓴 통영 사투리가 내 입가에 미소를 그린다.
‘기림을 온 베르빡에 기리노이 볼끼 쌔빘네’ 동피랑 할머니의
토박이말이다. 이 고장 출신 김춘수 시인의 <꽃>도 피어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나는 어떤 꽃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지 아리송하다.
몽마르다 언덕에 도착했다.
“퍼뜩 올라 오이소. 갱치 보이소.” 통영의 절경이라더니 옥상
전망대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조망하는 통영항 강구안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동포루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고 시간에 맞추려니 숨이 찼다.
동피랑 바리스타 할머니의 지역 토속요리인 뼈대기죽은
어떤 맛일까 생각하며 울긋불긋한 벽화마을, 꿈이 살아있는
동피랑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다음에 또 오이소.”하는
할매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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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음을 열면
신팔복
창문을 열고 밖을 본다. 가려졌던 시야가 선명히 보인다.
겨우내 움츠렸던 온갖 생명이 기지개를 켠다.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양지쪽 매화나무에 꽃이 피었다.
산책하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벼워졌고, 잣나무에 앉아 조잘대는
까치 소리도 명랑하다.
새롭게 느껴지는 봄의 풍경이다.
벽은 안과 밖을 차단한다.
그러나 창문은 소통하기 위해 만든다.
차단과 소통은 우리의 마음에도 있다.
마음의 문을 닫고 보는 세상과 열고 보는 세상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가 있다.
마음이 즐거우면 세상도 아름답게 보이지만, 우울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쓸쓸하고 허무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이렇듯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사물에 대한 가치부여가
다르게 나타난다.
마음이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수시로 변하는 게 마음이기도 하지만 삶에 있어서 올곧은
마음은 참으로 중요하다.
마음을 닫고 보면 부정적이고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 잘못은 생각지 않고 남은 틀리고 나는 옳다는 그릇된
이분법적 판단을 하기 쉽다.
원인을 핑계삼고 이유를 전가하게 된다.
이웃과 타협할 줄도 모르고 아집만 키운다.
결국, 마음속에 불씨를 키워 인과관계를 악화시키고 반목과
독선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보면 긍정적이고 희망적일 것이다.
‘내 탓이오.’ 하는 말처럼 남의 작은 허물이나 잘못도 마치
내가 원인인 것처럼 상대방을 감싸 안으려고 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며 협동하고 화합하는 마음은,
이웃과 더불어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 것이다.
다시 말해 열린 마음은 평화를 가져온다.
열린 마음은 자신을 내려놓는데서 출발할 것으로 생각한다.
옛날 어느 시골에 장가들어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있었다.
살림이 서툰 새 며느리가 나무를 때어 밥을 지었다.
남편은 아내의 거칠어진 손을 보고 안쓰러워했다.
나무가 좋으면 아내가 덜 고생할 것 같아 한 번은 깊은 산에 들어가
좋은 삭정이만 골라 나무를 해왔다.
밥을 안친 아궁이에 불을 때는데 어찌나 활활 잘 타던지 불만 지피다가
그만 밥을 바싹 태우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큰일이 벌어졌다.
아들과 며느리는 어머니께 용서를 빌었다.
아들은 이번에 너무 좋은 나무를 해다 주어 그렇게 되었노라고
제 탓을 하며 아내를 감싸줬다.
자식의 아내 사랑을 끔찍하게 생각한 어머니는 할 일 없이 방에 앉아
부엌을 둘러보지 못해서 그렇게 됐노라고 자기 불찰로 돌렸다.
그걸 본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염치없어할까 봐 짐승에게 주면 된다고
며느리를 달래주었단다.
하찮은 이야기지만 남의 실수를 내 탓으로 여기는 가족들의
따뜻한 마음이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 가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딸을 결혼시키면 아들을 얻고, 아들을 결혼시키면 아들을
뺏긴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세상의 변화로 여성의 권한이 커진 탓도 있겠지만, 고부간 갈등이
우상처럼 자리 잡아 매듭이 풀리지 않는 세태다.
말못하고 사는 시어머니가 넘쳐나는 것 같다.
부모는 자식에게 모두 주고 싶은 마음뿐일 텐데, 받는 것 자체를
간섭의 빌미로 알고 일체 거부하고 전화 한 통 없이 살아가는
며느리들이 늘고 있다 하니 닫힌 마음이 아닐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마음이 열려야 행복한 가정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회생활은 이웃과의 접촉이다.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다.
다툼도 있고 미움도 따른다.
매일 만나는 수많은 사람 중 내 생각과 일치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자라난 환경이 다르고 살아온 방식도 다르지 않던가?
직장이나 사회에서 잘못 얽혔던 일들이 마음속 응어리가 되어 남아있다면
그것은 대개 자기의 닫힌 마음에서 오는 괴로움 때문이다.
괴로움의 불씨가 화로 번지면 자신과 이웃의 평화를 깨뜨리기 쉽다.
내 응어리는 어느 것이 남아있을까? 따스한 이 봄에 옹졸했던
지난 일을 반성하고 이제부터라도 이해하고 용서하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겠다.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숙제이지만 마음을 열어 이웃
사랑을 넓혀나가야겠다.
비우면 가볍고 버리면 깨끗해진다.
마음을 열면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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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이산 메아리
신팔복
암마이봉(686m) 정상에서 둘러보는 전망이 훤하다.
하늘엔 구름이 떠 있고, 넓게 펼쳐진 산줄기가 병풍을 두른 듯 곱다.
맑은 공기에 가슴까지 확 트인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관은 이곳 정상이 아니면 볼 수 없다.
진안읍이 저만치 펼쳐져 있고, 마이산이 품은 작은 마을
사양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내가 태어난 고향이다.
눈앞에 우뚝 선 수마이봉(680m)의 웅장한 모습에 마음이 압도된다.
호기심에 올랐던 옛일이 아련하다.
마이산에 불이 나서 죽은 나무를 베러 가는 친구들을 따라 올라갔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으니 세월도 참 많이 흘렀다.
전경은 이곳과 차이가 없었다.
위험도 모르고 올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다.
할아버지도 오르셨다니 대물림이었지 싶다.
마이산은 보는 곳에 따라 모양이 아주 다르다.
그래서 계절 따라 이름도 다르게 불린다.
봄에는 운해에 뜬 돛대처럼 보여 돛대봉이고, 여름에는 장마 속에
솟는 용 뿔 같아 용각봉이다.
가을에는 말귀처럼 선명하게 보여 마이봉이며, 겨울에는 하얀 눈 속에
뾰족한 붓끝 같다 해서 문필봉이라 한다.
내가 어릴 때는 금이 들어있다고 해서 속금산이라고도 불렀다.
마이산은 조선 건국의 꿈이 시작된 곳이다.
남원 운봉의 황산싸움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물리치고 이곳에 들른
이성계 장군이 꿈속에서 마이산 신령으로부터 금척(金尺)을 받아
국가창업의 꿈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태종이 조선 건국의 계시(啓示)를 받은 속금산을 찾아와
말귀를 닮았다고 해서 마이산이라 이름짓고 천지신명께
국운흥성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한눈에 보아도 콘크리트로 만든 것과 같은 거대한 마이산은
중생대 백악기 후기, 지금으로부터 약 1억 년이 넘는 시기에
한반도가 화산과 지진활동의 반복으로 지각이 형성되면서
만들어지게 되어 7,500만 년 전까지 지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학설이다.
모래와 자갈 등 수 많은 암석이 홍수 때마다 내륙에서 몰려와
어마어마한 폭포의 깊은 웅덩이 속으로 쓸려 들어가 매몰되었다.
얼마나 큰 홍수가 계속되었던지 암마이봉 중간 부분에는 내 몸집만큼
큰돌도 굴러와 묻혀있다.
계속 쌓이는 압력으로 굳어져 생긴 수성 퇴적 역암이다.
지각이 안정화 단계로 접어들면서 전설처럼 솟아올라 생긴 부부봉이다.
경관이 아름다운 마이산은 벌집 모양의 풍혈(風穴)이 듬성듬성 보인다.
풍화와 침식으로 형성된 것으로 세계에서도 드문 지형이다.
지질학계뿐만 아니라 세인들의 관심을 저버릴 수 없는 신비로운 명산이다.
오랜 세월의 흔적과 자연의 섭리에 경외감을 느낀다.
백두대간에서 빠져나와 금·호남정맥을 이어주고 금강과 섬진강이
부근에서 발원되어 서해와 남해로 돌아 나가니 마이산은 진안고원의
중심에 있는 호남의 지붕이다.
산세는 태극을 닮았고 물줄기는 산세를 따라 흘러
산태극수태극을 이루고 있어 기(氣)가 모이는 곳으로 옛날부터
선인(仙人)들이 찾아와 신심을 닦았던 영산이다.
그래서인지 탱화를 소장한 금당사, 천지탑과 오방탑이 있는 탑사,
법고가 울려 퍼지는 은수사가 있고, 보흥사, 나옹암, 마이사가 주위에
자리하고 있다.
천왕문에서 조금 오르면 좋은 기도터가 나온다.
치성으로 소원을 빌면 뜻이 이뤄진다는 화엄굴이다.
바위틈에서 나오는 이곳의 약수로 밥을 지어 공양을 올리고
마이산 신령님께 아들을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 해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불심이 깊은 할머니를 어머니와 함께 따라와 향을 피우고
공양을 올린 적도 몇 번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가족의 건강과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태고의 신비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마이산은 나도봉,
봉두봉, 관암봉, 처사봉, 광대봉 등의 기암괴석이 어울려 거대한
조각품을 모은 것 같은 비경이다.
더욱이 이산묘, 주필대, 용바위, 나옹터, 태자굴, 사양제와 탑영제 등이
곳곳에 있어 옛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묻어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한반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진안을 지켜 온 수호신이다.
봄에는 진달래 꺾고, 여름에는 계곡을 물에 멱을 감고 가재도 잡았다.
가을에는 머루, 다래를 따먹고 도토리도 주웠다.
눈 오면 토끼몰이도 즐겼던 내 놀이동산 같은 곳이었다.
눈감아도 생생한 기억 속의 산이다.
천왕문에서 소리 지르면 마치 지난 일들이 메아리 되어
들려 올 것만 같다.
만고풍상에도 변함 없는 마이산을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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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못줄 없는 모내기
신팔복
이앙기는 지치지 않는 상머슴이다.
모판을 가득 싣고 우릉 우릉 소리를 내며 무논을 성큼성큼 기어간다.
꽁무니에 달린 기계손이 한꺼번에 여섯 포기씩 척척 모를 심는다.
한 배미 논은 금방 심는다. 논두렁에 서서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를 보니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 손과 기계 손, 그것은 느림과 빠름,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다.
엄청난 일을 순식간에 처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논을 소작할 사람이 없어 겨우내 마음이 짓눌렸다.
처음 짓는 벼농사라서 두려움이 앞섰다. 이웃의 도움을 받으며
농사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이른봄부터 밭으로 쓰던 논을 논두렁을 다시 만들고, 물을 채워 수평을 잡았다.
로터리작업을 하던 날, 이웃 논 주인을 만나 부탁한 모를 물었다.
내가 협동조합에 의뢰한 줄 알고 자기 것만 길렀다고 한다.
철석같이 믿었던 일이어서 듣는 순간 당황했다.
내일 모래에 심어야 하고, 한두 판도 아닌데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어쩌면 올해 농사를 짓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고향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도 구해줘서 모를 사 왔다.
내 일이 아니면 나 몰라라 하는 세상인데 정말 고마웠다.
모내기철은 바쁘기도 하지만 무척 힘이 든다.
같은 시기에 너도나도 벼를 심어야 하므로 일손이 부족하다.
내가 어렸을 때 농촌에선 가족은 물론 어린아이도 거들어야 하는 게
농번기였다.
학교에서도 시기에 맞춰 2, 3일간 농번기방학을 주었고, 행정기관에서도
농촌 일손 돕기로 모내기를 도왔다.
모내기 날이면 새벽부터 논에 나간 아버지는 논을 갈고 써레질을 했고,
할아버지도 논에 나와서 도우셨다.
바지게를 짊어지고 일찍이 논에 모인 일꾼들은 담배쌈지 담배를 꺼내
곰방대에 넣어 피우고서 바지를 걷고 모판으로 들어갔다.
이쪽저쪽에서 한 뼘 이상 자란 모를 양손으로 잡아당겨 찌고,
훌렁훌렁 논물에 흔들어 흙을 떨고 모를 모아 한 춤으로 만들어 짚으로 묶었다.
한 바지게 짊어진 모는 논배미 여기저기에 던져 놓고 모를 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는 못줄을 잡았다.
긴 막대에 감은 못줄에 빨간 리본을 25∼30cm 간격으로 일정하게 달아
눈금을 표시했다.
모를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로 리본 밑에 3, 4개 정도씩 심었다.
앞 둑과 뒤 둑에서 ‘주울!’하고 소리내어 외치면 또 못줄을 뗐다.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며 모를 심었다.
못줄을 힘주어 잡지 않으면 가운데는 논물에 잠기어 흙탕물에
꽃(리본)이 보이지 않아서 야단을 맞기도 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거머리는 물결을 따라와 어느새 종아리에 붙어서
피를 빨아 제 배를 채웠다.
한 곳에 두세 마리가 붙기도 했다.
거머리를 떼면 붉은 피가 종아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당장은 쑥이나 토끼풀로 지혈시켰지만, 상처가 아물고 나면 얼마 동안은
무척 가려웠다.
지금 같으면 파상풍이 염려되어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할 일이다.
햇빛을 쬐며 논두렁에 걸터앉아 먹는 점심밥은 정말 맛이 있었다.
지금도 먹어보고 싶은 못 밥이다.
간 고등어에 햇감자를 넣어 지져 놓은 반찬은 잊을 수가 없고,
검정 콩장과 머위탕은 점심의 단골 메뉴였다.
시장한 일꾼들은 고봉밥을 감쪽같이 치웠고, 때를 맞춰 아이들이
모여들면 일꾼보다 어린이가 훨씬 더 많았다.
배고픈 시절이라 그랬을 것이다. 종일 못줄을 잡고 나면 밤에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곯아 떨어졌다.
못줄을 대고 심은 모는 반듯하고 간격이 일정하여 논매기도 좋았다.
소주밀식(小株密植) 방법은 수확량을 높였는데, 너른 논에는 장줄과
옆줄을 놓고 눈금에 맞추면 거의 가로세로가 잘 맞았다.
줄을 떼지 못할 정도의 다랑논이나 천수답은 쇠스랑으로 논바닥을 파고
허튼 모를 심었다.
사람마다 눈썰미나 손놀림에 차이가 있어 심고 나면 줄은 비틀 배틀 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모내기에 동원되기도 했다.
수업을 몇 시간 끝내고 논에 나가 모를 심었고, 주인으로부터 조금의
수고비를 받으면 필기도구를 사서 나눠주었다.
또 자율학교 기금으로도 냈다. 모내기는 달포가 넘었는데 지금은
이앙기로 모를 내니 열흘 정도면 끝이 날 정도였다.
못줄은 떼지 않아도 간격이 반듯하게 잘 맞는다.
쉽고 편리하게 농사짓는 세상이 됐지만, 농촌은 차츰 어려워지고 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농촌을 이어갈 젊은 농부가 없기 때문이다.
힘들고 소득도 낮고 문화적 혜택까지 적어 농촌을 떠나고 있다.
농업은 인간 삶의 뿌리다.
살기 좋은 농촌이 되도록 서둘러 필요한 정책을 개발해야 할 때려니 싶다.
가을 들녘이 희망의 황금물결로 넘쳐나고, 농민의 얼굴에 생기발랄한
웃음꽃이 활짝 피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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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백수가 된 우체통
신팔복
작은 구멍가게 앞에 멀쩡한 빨간 우체통이 서 있다.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그곳을 지키고 있다.
기쁜 소식을 빠르게 전달하라는 듯 그 우체통에는 제비가 그려져 있다.
강남에서 날아온 제비는 무척 바쁘게 집으로 드나들었다.
요즘 우체통은 관리하는 집배원들이 다녀갈 뿐,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개점휴업 상태다.
우리나라에서 명실상부한 통신국이 설치된 것은 1895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편업무를 시작해서 경향 각지로 소식을 전한지 120세의 나이가 되었다.
그동안 빠르게도 번창했다가 그 효용을 다하고 현대의 통신기술에
밀려 점점 사라지고 있다.
서울시에서도 전화부스와 더불어 매년 조금씩 철거한단다.
진안읍에도 여덟 군데서 발견된다.
전화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교통수단도 없어 이웃이나 타향에 소식을
전하려면 인편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게 옛날이었다.
그 시절, 멀리 시집보낸 딸의 소식을 들으려면 몇 날 며칠을 기다려야 했으니,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애틋했으랴.
내 학창시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급하게 부고를 만들어
몇 사람을 여러 마을로 보내 전달한 적이 있었다.
편지로 띄우면 도착 날이 늦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부고를 띄우는데 스마트폰
문자메시지를 이용했었다.
통신이 발달해서 우리 생활이 무척 편리해진 것을 실감했다.
내가 처음 편지를 쓴 것은 아마 국군장병 위문편지가 아닌가 싶다.
초등학교 시절 연말이 다가오면, 고사리 손으로 연필을 꾹꾹 눌러
이름도 모르는 국군장병 아저씨에게 편지를 썼다.
내용은 잊었지만, 나라를 지켜줘서 감사하다는 것과 추운 겨울에
몸 건강하시라는 기원이었다.
내가 편지를 처음 읽은 것은 객지 생활을 하는 자식이 집으로 보내 준
편지를 읽어준 것으로 기억된다.
누런 편지봉투도 많았는데 받는 이와 보내는 이의 주소와 이름을 적고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으면 편지가 발송되었다.
우편번호는 없었다. 형제자매나 친척간에 안부를 묻는 내용이
일상의 편지였다.
나도 목포에 살던 사촌 형으로부터 편지를 처음 받았었다.
일 년에 몇 통 받는 편지였지만, 편지를 받으면 무척 기뻤다.
집에서 보낸 편지를 군대에서 받을 때는 내용의 희비를 떠나
콧등을 찡하게 울렸다.
객지에서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읽으며 집안 사정과 농사일정도 알 수
있었던 때가 엊그제 같다.
그래서 두 아들이 번갈아 공군에 입대했을 때도 내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인생에 젊은 시절이 있듯이 우체통도 화려했던 전성시대가 있었다.
전 국민의 의무교육이 주창되어 국민교육을 시행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교육세대가 우체통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연말연시가 되면 연하장이나 연하 엽서를 보내는 게 유행이었다.
문방구마다 연하장 판매가 성업이었고 우체국도 넘쳐나는 편지로
특별 근무를 했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주고받는 편지나 연하장은 큰 기쁨이 되었고
새해의 희망으로 이어졌다.
그때는 우체통의 배가 불렀다. 학창시절과 연애시절에는 보내고 싶은
편지도 많았고, 받고 싶은 편지도 많아 빨간 우체통은 기다림의 상징이었다.
가끔 편지를 받게 되는데 문학 동호회의 알림이나 친구간의 모임,
애경사에 참여한 고마움을 전하는 편지가 고작이다.
그런데 이 편지들은 전자우편으로 보내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수취인만 바꿔서 보내는 것으로 편지 대행업체의
전자우편이라서 우표 없이도 날아든다.
편리하지만 새겨 볼 문장도 없고 정도 깊지 않아
한 번 읽고 버리기 일쑤다.
취미로 우표를 수집하는 사람도 많았다.
독립기념우표, 대통령의 근영, 무궁화 꽃, 태극기, 한국의 사계절과 철새,
아름다운 동물 등 아주 다양했다.
또한, 매년 국가 행사가 있을 때마다 발행하는 기념우표가 있어
수집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결혼하고 아내가 가져온 우표수집 책 두 권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우표로 병풍을 만들 목표로 수집했다는데 뜻을 이루지 못해
명품을 잃은 것처럼 아쉽기만 하다.
편지글 속에는 가족의 사랑과 애환이 들어있고, 삶의 길과 인생의
역사도 묻어있다.
온갖 비밀을 말없이 간직한 우체통은 오늘도 잠자는 듯이 지난
세월을 보듬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세월의 무상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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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복사꽃 향기
신팔복
봄이 오고 있다.
겨울을 지키던 골짜기 얼음도 어느새 녹아 내렸다.
냇물은 졸졸졸 흐르며 봄의 소리를 들려주고, 따스한 봄기운이
산과 들로 퍼져 나간다.
양지는 푸른 새싹이 돋는다. 벌써 개울가 버들강아지가 봄소식을 전한다.
뽀얀 솜털에 싸인 꽃들이 가지마다 촘촘하게 붙어 앙증맞다.
속으로만 웅크리고 겨울잠에 빠져있던 생명이 기지개를 켜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긴 겨울 추위에도 쉬지 않고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 나오고, 종다리가 보리밭 언덕에서 흥겹게
노래할 때면, 산과 들에 수많은 꽃이 피기 시작한다.
노랑 개나리가 피고 분홍 진달래도 무리 지어 피어난다.
이곳저곳에서 꽃소식이 전해오면 상춘객을 부르는 꽃 축제도 시작된다.
제주도 봄은 유채꽃 축제로 시작되지만, 육지의 봄은 섬진강 변 꽃을 따라
내륙으로 올라온다.
섬진강 매화마을에서는 매화축제가 열리고 뒤질세라 구례 산동면
산수유 마을에서도 산수유 꽃 축제를 연다. 섬진강과 매화꽃,
지리산과 산수유 꽃은 서로 잘 어울려 한 폭의 산수화를 만든다.
완연한 봄바람을 맞으며 피는 복사꽃은 옅지도 짙지도 않은
붉은 색이 매혹적이다.
양지바른 언덕에 저절로 자란 복숭아나무에 촘촘히 붙은 복사꽃은
사춘기 어린 마음에 그리움을 주었다.
도회지로 떠난 친구의 모습이 어렸고, 시집간 사촌 누이가 생각나기도 했다.
복사꽃이란 시조를 지어 교지에 싣기도 했었다.
그런 추억의 산물이었을까? 결국, 복숭아 과수원을 만들었다.
매년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온 과수원을 붉게 물들였다.
마이산을 찾는 길손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 꽃을 감상하곤 했었다.
그 뒤로 우리 동네는 과수원이 많아졌다.
산자락 과수원에 복사꽃이 한창 어우러지면 사진작가들이 몰려와
마이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때 작품들은 지금도 아름다운 사진으로 남아 있다.
복숭아나무에 잎이 나고 꽃 속에 숨었던 보송보송한 열매가 커져 낯빛
고운 봉숭아가 되면 입가에 군침이 돈다.
물에 잔털을 씻어내고 한 입 베어 물면 아삭한 식감이 맛을 돋운다.
아내는 복숭아를 좋아했다.
첫 아이를 가진 뒤 입덧으로 복숭아를 찾았다.
싱싱한 복숭아를 먹으면 속이 가라앉는 듯 보였다.
겨울에는 황도 복숭아 통조림을 사다 주었다.
남자들은 모를 일이지만 숫제 먹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고, 시래깃국을
찾기도 하고, 철이 지난 과일을 찾기도 한다.
밭가에 한두 그루씩 있었던 복숭아는 과일이 부족했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맛이 썩 좋았다.
이웃집에서 따오는 복숭아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복숭아를 갉아먹는 애벌레도 많았다.
농약이 없던 시절이라 복숭아벌레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복숭아는 저녁에 먹어야 좋다는 말이 있었다.
애벌레가 먹은 곳을 파내면 남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먹을 것이 귀했던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곱게 피는 꽃은 봄의 전령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꽃을 좋아하는 데는 나이가 따로 없다.
옛날 보았던 꽃들이지만, 지금 그 꽃이 더욱 곱게 보이는 것은
세월이 덧붙여주는 감정일지 모르겠다.
꽃을 보면 누구나 행복을 느낀다.
꽃 같은 젊은 시절은 정열적으로 꽃을 보지만, 나이 들어 노년에 보는
꽃은 깊은 감상이 흐른다.
어느 꽃인들 안 좋은 꽃이 있겠는가?
이 봄에도 복사꽃은 추억과 행복으로 내 곁에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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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봄 찾아 달려간 순천
신팔복
햇볕은 따스하고 봄기운도 완연하다.
여기저기 꽃이 피고 새싹이 돋아 초록빛이 넘친다.
이런 날씨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전주 역 승강장(platform)에는 아까부터 여수행(7시 15분)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전라선의 중심 역이라는 게 실감났다.
기차는 요란스럽지도 않게 스르르 내 앞에 도착하더니 우뚝 멈춰 섰다.
우람한 덩치만큼 바퀴와 스프링도 튼튼하다.
기다리던 승객들이 짐을 챙겨 우르르 기차에 올랐다.
아내와 나도 뒤따라 2호 차에 올라서 좌석을 찾았다.
좌석은 안락하고 객실은 조용했다.
잠깐 사이에 속도가 붙은 기차는 빠르게 달려갔다.
차창 밖의 풍경도 바람처럼 스쳤다.
산이 달려오고 밀려가고, 마을과 들이 번갈아 내 뒤쪽으로 사라져갔다.
기차는 봄 향기를 뚫고 거침없이 달려갔다.
오래지 않아 객실은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소곤거리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10여 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내 건너편에 앉은 젊은
사람은 삶은 달걀을 까더니 소금에 찍어 연거푸 세 개를 먹었다.
아침밥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여행 중 간식의 즐거움은 매우 크다.
또 저 앞쪽에 앉은 대여섯 명의 젊은 여성들도 간식을 먹더니,
아예 좌석을 돌려놓고 앉아 김밥과 치킨까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즐겼다.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어 서로 보여주며 좋아했다.
음료수와 맥주도 한 잔씩 마시더니 이내 깔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봄의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나도 지난날 저럴 때가 있었지 했다.
치킨과 맥주라니, 환상의 궁합이 아니던가! 내 입안에도 침이 고였다.
사탕 한 알을 입에 넣고 달콤한 맛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으로 내가 기차를 타본 것은 중학교 수학여행 때였다.
전주에서 출발해서 서울로 갔는데 창문 밖을 내다보며 무척 즐거웠다.
검정 학생복에 학생모를 썼지만, 촌티는 벗어날 수 없었다.
먹을 것은 없었어도 기차를 타본다는 게 정말 신이 나서 기차 안은
시끌벅적했었다.
기차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칙칙폭폭’ 달려갔다.
석탄을 사용하는 증기기관차였다.
가끔 ‘홰-액’ 하며 귀청을 찢는 기적을 울려 다음 역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다음엔 디젤기관차가 나오더니 이젠 전기기관차로 바뀌었다.
매연과 소음이 거의 없어 쾌적하고 안락하다.
나이 들어 경로우대까지 받으니 기차여행은 정말 쏠쏠하다.
새삼 기차의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 내외는 순천 역에서 내렸다.
순천 역 시장으로 갔다.
시내버스를 타고 순천만 습지에 도착했다.
입장 순서를 기다려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무료입장을 했다. ‘
세계 5대 연안습지’에 속한다는 이곳을 구경하려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아치형 무진교 다리 밑으로 강물이 흘러 갈대숲을 돌아 바다로 나갔다.
겨울 철새 몇 마리가 날아와 갈대 숲 뒤로 숨어들었다.
갈대를 베어낸 자리에서 푸른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마치 청보리밭을 연상케 했다.
새싹들은 일렁일 때마다 고운 빛깔을 선사했다.
쉼터에 앉아 보는 전경은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물이 빠진 갯벌에는 작은 짱뚱어가 꼬물거려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자세히 보니 작은 게들도 갈대 사이를 돌아다녔다.
붉은발말똥게를 비롯해 도둑게, 농게, 칠게, 등이 살고 있었다.
제집 근처를 맴돌았다.
살아있는 연안습지 순천만 갈대 숲은 생명을 키우는 고향의 텃밭 같았다.
영상체험관에서 도둑게들이 갈대를 타고 올라 집게발로 잎을 잡고
뜯어먹는 것과 아무르 강에서 찾아온다는 흑두루미의 자유로운
비상을 볼 수 있어 아주 다행이었다.
대한민국 제1호 순천만 국가정원(약 34만 평)은 입장하는 순간부터
환상적이었다.
꽃으로 장식한 조형물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와! 이러니 사람들이 안 올 수가 없겠구먼.’ 수많은 인파 사이를 오가며
꽃길과 정원 길을 걸었다.
한국정원에 가는 길에 나무도 감원에 들렀다.
200여 종의 다양한 나무와 화초류를 볼 수 있었다.
그 중 아담하게 가꿔진 홍가시나무 어린잎의 붉은 빛이 맑은 하늘과
어울려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팝나무 꽃도 활짝 피어 눈이 부셨다.
수목 사이로 굽어진 정원 길은 낭만을 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양반가로 꾸며진 한국정원에도 꽃들이 만발했다.
개울가 조팝나무 하얀 꽃이 시선을 끌었다.
여러 꽃밭을 지나 꿈의 다리를 건넜다.
국가정원 개원을 축하할 때 학생들이 그린 도자기 그림을 벽면에
붙여놓아 감동을 주었다.
여러 나라의 정원 중에 풍차와 어울리는 네덜란드 정원은 매혹적이었다.
형형색색의 튤립(tulip)꽃이 집단으로 가꿔져 있어 포토존(photo zone)은
쉽게 차지할 수 없었다.
활짝 웃으며 자세를 취하는 모습들은 보기 좋았다.
이 정원의 으뜸은 호수정원이었다.
영국의 세계적 정원 디자이너(Charles Jencks)가 순천의 지형과 물 흐름을
잘 살린 정원이라 했다.
호수 안 봉화언덕에 오르는 달팽이 길은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복장도 울긋불긋 다채로웠다.
연인원 620만 명이 넘게 찾아온다니 제1호 국가 정원임이 분명했다.
봄꽃 축제를 즐기며 꽃의 향기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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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라지는 택호(宅號)
신팔복
우리 동네는 택호가 거의 없었다.
그냥 큰애 이름을 불러 호칭했다.
내 어머니의 택호를 쓴다면 단양리 댁이다.
어머니는 단양리에서 사양동으로 시집 온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결혼해서 진안군 마령면 모사실 처가에 가니
그곳은 택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내 장모님의 이름은 이봉남이고 택호는 영광 댁이다.
출생지는 진안군 부귀면 거석리다.
왜정 때 전주사범학교 심상과를 1기로 졸업한 장인어른 이일수와 결혼했고,
장인이 맨 처음 전남 영광으로 발령받아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얻어진 택호다.
그 뒤로 교장 댁, 교육장 댁으로 불리게 되었다.
작은 키에 말수가 적었고. 알뜰한 살림솜씨로 내조를 잘 하셨다.
그 시절 부잣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했어도 남에게 아는 체하지 않고
항상 겸손하셨다.
아들 셋에 딸 셋을 낳아 잘 기르셨고, 가족과 사위 사랑이 깊었다.
처 작은어머님은 북천 댁이었고, 큰고모님은 상전면으로 시집을 가셨다가
가족이 다시 친정 동네로 이사를 와서 살게 되어 이동 댁이다.
안동 댁, 수무지 댁, 용담 할머니 댁 등이 가까운 집안이었다.
택호는 남녀가 혼인하게 되면 아이들이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막기 위해 지어주는 전래 풍속이었다.
한 마을에 사는 이웃들과 변별력을 주어 혼돈을 피하는 택호는
이름 대신에 부르는 별칭이다.
보통 여자의 출신지 이름에 댁을 붙여서 만들며 관직이나 당호(堂號)를
붙여 쓰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택호는 집안의 어른들이 모여 지어주거나, 학식이 있는 분에
의뢰해 짓기도 했고, 남편의 친구들이 모여 지어주기도 했다.
택호를 받으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다.
남편은 여자의 택호를 따르게 되었다.
이 또한 남편이 형제와 구별하기 쉽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렇게 보면 사양동으로 시집 온 내 처는 마령 댁이 되고
나는 마령 양반이 된다.
그렇지만 내 처가 친정에 가면 사양동 신 서방네(신실)가 된다.
나는 사양동 신 서방이다.
택호는 촌수에 따라서 호칭이 변한다.
동기간에는 영광 댁, 영광 새댁, 영광 형님 등이고, 숙질간에는
영광 아주머니, 조손간에는 영광 할머니로 부른다.
직함에 따라 부인(夫人)은 생원 댁, 현감 마님 등으로 부르고,
남자는 부사 양반, 판서 영감 등이다.
당호는 그 집 이름을 말하는 고유명사이므로 당호를 쓰면 변별력이
좋은 택호가 된다.
긴요하게 쓰였던 택호는 좋은 뜻을 심어 지어주고 뜻과 같이 좋은
세상을 살라는 조상들의 염원이 담긴 별칭이었다.
택호도 시대가 변해서 쓰지 않는 망태기처럼 사라지고 있다.
농업사회에 잘 맞던 택호는 산업사회의 핵가족 시대에 필요한
호적 이름에 밀려나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좀 더 활동 범위를 넓혀 큰 범위로 이어가면 택호가
무수히 겹치게 되어 변별력을 잃는다.
또한 그 사람의 성품이나 인격을 고스란히 나타내기도 어렵다.
그래서 오늘날 택호보다는 실명을 더 많이 쓰게 되는 것이다.
가부장제의 권위시대에 가려졌던 여성들의 이름이 당당하게
튀어나오고 있다.
현대 생활의 폭을 넓혀가면서 누구의 아내나 누구의 댁으로 살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남녀 평등시대에 자기 이름으로 사는 게 훨씬 인격적이라 생각된다.
학자, 경제인, 체육인, 정치인 등 수 많은 여성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며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여성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농업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고 전통사회의 삶의 방식이 점점 사라지면서
택호도 그 전승이 약화되고 있다.
변화하는 사회를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옛날 가족과 친척이 한 마을에 살며
정겹게 부르던 택호가 아직도 내 마음 한 편에 빛 바랜 사진처럼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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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람 냄새
신팔복
시장에 가면 사람도 많고 물건도 많다.
가는 곳마다 수북수북 쌓인 상품들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를 비켜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보면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곳을 볼 수 있다.
호기심이 생겨 어깨너머로 들여다보면 장사꾼의 호객과 재담으로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재래시장에 가면 대형 마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시장만의
매력 중 하나인 흥정이 있다.
자기가 파는 물건이 가장 좋다느니,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거저 준다느니
하며 능수능란한 솜씨로 후딱 팔아 넘긴다.
고객들도 반신반의하며 속마음으로는 ‘장사니까 으레 그러려니?’ 하며
값을 치른다.
시장과 흥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생관계다.
터무니없는 가격만 아니라면 적정한 선에서 흥정이 이루어지고
흥정을 통해 정이 오고 가서 단골손님도 생기니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가게(廛)마다 모양도 색깔도 다양한 물건들이고 풍기는 냄새도 다양하다.
꽃가게의 꽃향기부터 방앗간의 고소한 기름 냄새, 생선가게의
비린내까지 가지가지다.
시골의 흙 냄새, 바닷가의 갯 내, 외국에서 온 이름 모를 냄새들까지
모여 수많은 사람이 스칠 때마다 유혹을 한다.
뿐만 아니라 시장을 찾는 사람들 모습에도 모두 다양한 삶의 방식과 세
월로 만들어진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곱게 단장한 여인의 모습, 수수한 차림의 중년 남자, 미소 띤 환한
얼굴도 있고, 걱정 가득한 입을 꽉 다문 초췌한 얼굴도 있다.
시장을 가면 요즈음은 옛날과 달리 자기만 알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나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기주의나, 남의 눈치를 볼 필요 없다는
막무가내 얌체족이 늘고 있다.
장사한다고 걸어 다닐 길도 없이 물건을 내어놓고, 옆집은 생각지도 않고
큰소리로 호객하는 행위나 고객을 속여 폭리를 취하는 야릇한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격이 바닥임을 나타낸다.
상도의가 없는 야박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내 물건은 팔아야 하고 남의 물건은 팔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사람들은 사람 냄새보다는 꾀죄죄한 돈 냄새가
더 많이 난다.
돈이 좋기는 해도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이웃 사랑의 마음을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장사를 해도 이웃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인정을 베푸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외모만 반지르르한 사람보다는 속이 꽉 찬 사람들이다.
빠듯한 살림에도 남의 처지를 내 아픔으로 생각하고 어린이 재단이나
불우 이웃 돕기에 동참하여 적은 성의라도 모아주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평생을 절약하며 꼬박꼬박 모은 돈을 어려운 이웃에 써달라고
사회에 맡기는 사람들은 마음씨가 고운 세상의 천사들이다.
이웃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진정한 사람의 향기가 풍긴다.
나는 어렸을 때 무척 내성적이었다. 말수가 적었고 혼자서 노는
일을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내 편협한 생각이겠지만, 은근한 사람이 좋다.
호들갑스럽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며, 이웃에 인정 베푸는
양심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살아가면서 멀리 있어도 찾고 싶은 친구가 있고 가까이 있어도 만나기
싫은 사람도 있다.
자기와 성격이 잘 맞거나, 하는 일이 서로 비슷해서 잊히지 않는 이도 있다.
옆에만 있어도 너그러움이 느껴지고 마음이 포근한 사람과 가까이하며
산다면 정말 행복한 삶이겠다.
큰 행운을 얻은 사람이다.
사람 냄새가 그리워지는 시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려진 내 자화상은 어떤 냄새일까?
내 안에 있는 허접스러운 쓰레기를 찾아 버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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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는 세월
신팔복
물이 흐르듯 시간이 간다. 삶의 흔적들이 빠르게도 시간의 뒤편으로
밀려나고 있다.
묵은 달력을 뜯어내고 새 달력을 걸었다.
붉은 닭의 해, 정유년이 되었다.
새 아침을 여는 닭처럼 우리 사회도 혼란한 병신년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즐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