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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강해 삼부 두려워하는 이유,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말씀 요한복음 6장 16-요한복음 6장 21
요절 요한복음 6장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중국의 현대 시인 지센의 ‘배’라는 시가 있습니다.
“저 배 바다를 산보하고
난 여기 파도 흉용한 육지를 항행한다.
내 파이프 자욱이 연기를 뿜으면
나직한 뱃고동, 남 저음 목청.
배는 화물과 여객을 싣고,
나의 적재 단위는
'인생'이란 중량.“
이 시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육지에서 사는 나를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배가 바다에서 화물과 여객을 싣고 운행하는 것은 위험할 것 같지요? 육지에서 살아가는 나는 안전할 것 같지요? 그런데 시인은 정 반대라는 것입니다. 배는 오히려 육지를 가는 것같이 안전하고, 내가 살아가는 것은 바다를 항해 것처럼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많은 바람과 파도가 일어납니다. 질병의 파도, 사건 사고의 파도, 인간과 갈등의 파도들이 일어나 살아가는 것이 위험하고 힘이 듭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싣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파도로 인하여 결국은 죽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그런 위험한 인생 항해에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나니 두려워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을 물리쳐주시고 천국의 목적지로 인도하여주십니다. 우리가 위험 중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두려움을 극복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두려워하였습니다.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후 제자들을 보내시고 홀로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왕을 삼고자 하는 사람들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의 인기에 휘들리지 않도록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이미 날이 어두웠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밤 사경이라고 나옵니다. 새벽 3-5시 사이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배에 오시지 않아서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가야 했습니다. 배가 갈릴리 바다에 들어서자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역풍을 만나서 힘겹게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갔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남북의 길이가 21킬로이므로 오십 리의 길인데 한 두 시간이면 충분히 노를 저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제자들은 저녁에 갈릴리 바다를 떠났는데 새벽 네 시까지 노를 저은 것이 겨우 십 여리뿐이 못 갔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다가 제자들이 힘겹게 고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돕기 위해서 바다 위를 첨벙첨벙 걸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오신 이것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다섯 번째 표적입니다. 사람은 물을 밟으면 중력에 의해서 빠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비록 육신의 몸을 있었어도 중력을 이기고 물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더욱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을 올라가셨습니다.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은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특별히 고난 받는 자들을 찾아오시고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온 것보다 더 큰 표적은 고난 받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표적입니다. 고난 받을 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함께 고통하십니다. 고통 받는 자들을 도와주십니다.
요셉이 노예로 살아갈 때 야곱은 아들을 사랑하지만 요셉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죄수 생활할 때도 하나님은 찾아오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그 모든 고난을 이기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노예로 있을 때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돕고자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40년 광야 생활할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70년 바벨론 포로생활 할 때도 찾아오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은 다니엘과 함께 사자 굴에서 사자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들어갔을 때도 하나님은 풀무불 속에 계셨습니다. 친구들이 머리카락 하나 그슬리지 않게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고난 받는 우리를 도와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고난 받는 그들을 돕고자 오신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마가복음을 참고 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유령 곧 사탄으로 착각하였습니다. “유령이다!” 소리 쳤습니다.
예수님을 왜 사탄으로 착각했을까요? 상황이 안 좋기 때문입니다. 바다의 캄캄한 밤입니다. 바람이 불어옵니다. 파도가 일어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배가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안 좋은 상황에서는 사탄이 역사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부정적인 상황에 사탄이 일합니다. 사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파도와 바람으로 제자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탄으로 착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탄으로 착각한 더 큰 문제는 그들이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을 금세 잊어버렸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이 물 위도 걸어올 수 있고 함께 하신다고 적용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힘든 상황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사탄이 함께 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 함께 하십니다. 아픈 자식에 마음이 가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고생하는 우리에게 더 마음이 가시고 함께 하십니다.
사탄은 사람들 위에서 일합니다. 하나님은 사탄 위에서 함께 하십니다. 사탄이 도지사라면 하나님은 대통령입니다. 도지사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습니다. 대통령의 허락 없이 움직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탄을 본다면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탄 위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본다면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사랑과 능력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안 좋은 상황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으로 사탄을 보지 말고, 그 위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담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안 좋은 상황이므로 하나님은 더욱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우십니다. 우리가 안 좋은 상황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두려움을 이기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2) 예수님을 묵상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예수님이니까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나는 유령이나 사탄이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은 감각을 통하여 두려움을 주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평안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사람들은 악조건 속에서 감각을 통하여 대체로 사람을 묵상하고 사탄을 묵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사탄을 묵상하지 말고, 사람을 묵상하지 말고서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악조건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기도를 통하여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말씀을 잡고 풀무 불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갔을 때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잡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묵상하고 넉넉히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다윗과 사울의 차이는 하나님을 묵상하느냐 사람을 묵상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묵상하였습니다. 거기서 시편 23편과 같은 아름다운 시가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의 인기가 떨어지는 순간에 여자들의 노래부르는 소리를 듣고 다윗을 묵상하고 사탄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는 사탄에 의해서 번민하다가 자살하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묵상하면 우리는 두려움이 물러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능력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십니다. 사탄은 나쁜 놈입니다. 비인격적입니다. 두려움을 심어서 우리를 죽이고자 하는 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우리가 악 조건 속에서 크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에 영접하였습니다. 바람과 파도도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목적지에 도달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 모시면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의 목적지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배에 예수님을 모시면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되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십니다.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게 하십니다. 늙어서 고통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가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 나라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결론) 고난 중에 계신 예수님을 묵상합시다
우리는 고난 중에 사탄이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사탄은 나쁜 놈이고 비인격적인 놈이므로 그를 생각하면 두려워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도 고난 중에 함께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사탄보다 더 크시고 좋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사탄은 강압적이지만 하나님은 인격적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며 평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천국 가는 것을 믿고 담대해야 합니다.
욥은 사탄의 시기로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건강을 잃었습니다. 욥은 그때 사탄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계속 하나님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셨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섭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자연과 생명의 섭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지구가 태양을 돌 듯이 그렇게 하나님은 세상을 섭리하십니다. 모든 생명을 섬세하게 돌보듯이 우리를 고난 가운데도 돌보십니다. 하나님이 정확하게 자연과 생명을 움직이듯이 우리를 정확히 인도하십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악한 도지사가 선한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야 일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탄은 악을 행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욥은 하나님을 묵상하고 마음에 평안을 찾고 고난을 잘 극복하였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예로 팔려가도 죄수로 감옥에 갇혀도 하나님을 묵상하였습니다. 자신을 판 형들을 묵상하거나 그곳에 있는 사탄을 묵항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묵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았어도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크고 좋으신 이 하나님을 묵상하면 우리는 담대할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눈을 어디로 향하십니까? 도시사인 사탄만 생각합니까? 대통령이신 하나님을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을까요? 감각기관을 의존하지 말고 말씀을 잡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믿음 있는 무명의 저자가 쓴 모래위의 발자국이라는 시를 읽고 마치고자 합니다.
어느 날 밤에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해변을 따라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늘을 스크린 삼아 그의 지나온
삶의 순간들이 영화처럼 펼쳐졌습니다.
모래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그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발자국이었습니다.
그는 모래 위에 길게 펼쳐진 발자국을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때가 그의 삶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슬펐던 순간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항의하듯이 주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면 항상 저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은 저와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삶의 가장 어려웠던 순간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는데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왜 주님께서는 저를 떠나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소중한 정말 소중한 아이야,
나는 결코 너를 떠난 적이 없었단다.
네가 고통과 환난을 당하는 시간에
모래 위에서 한 사람의 발자국만이 있는 것은
내가 너를 업고 갔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고난의 때에 말씀을 통하여 나를 업고 가시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평안함을 갖고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6장 강해 삼부 두려워 하는 이유, 두려워 하지 않는 이유
말씀 요한복음 6장 16-요한복음 6장 21
요절 요한복음 6장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요한복음 6장 강해 삼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