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유리창은 노을 꽃밭이다 건물 사이 골목들은 저녁을 수혈 받고 다크서클이 진 내 눈가에도 붉음이 감돈다 모니터 서류가 적재물처럼 쌓여있다 바탕화면 아이콘들은 징검돌처럼 건너는 상상을 한다 내일 사표를 낸다면 부장의 표정은 어떨까 과장의 얼굴을 클릭하면 무엇이 쏟아질까 김 대리의 짜증을 압축하면 용량은 얼마나 될까 기획적으로 살아왔는데 나에게 창문은 습관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하드웨어가 대기하고 있던 화면을 곧바로 보여준다
인공 창문에 젖어 인공 풍경을 살았다 가끔 불 꺼져 있는 나의 모니터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죽이며 누군가 방문한 적이 있었을 거다 거기 미끄러져 갔을 당신과 나의 데칼코마니 지난주엔 누군가 날개를 가진 듯 유리창 사이를 퍼득이다 주저앉았다 누군가의 비명소리는 너무나 쉽게 지워졌고 다음달 재계약의 순간은 숨막히게 다가왔다
일순간 환해지던 노을의 몰락 오목새김으로 온전히 내게 남는다 개밥바라기 별은 얼마큼 먼 거리였던가 각오한 듯 창문 앞에 선다 긴 각목처럼 팔이 늘어나는 착각에 빠진다 반대편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나를 닮은 누군가의 등을 만진다 그도 비참을 웅얼거리며 나와 같은 방향을 품었을 거다 핏빛 노을과 내가 서로 자물린다 전화벨이 울린다 뒤돌아보니 모니터 속 서류들이 조금 더 쌓여 있다 이제 그만 계약을 끝내야 할까 죄 없는 죄인처럼 또다시 윈도우 앞에 끌려가야 할까 더이상 기회가 없다며 저녁이 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