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화북의 패권을 장악한 군벌이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장안은 파괴하기로 결정한다. 904년 1월 26일 당나라 소종은 동쪽의 낙양으로 향했다.
황제가 낙양으로 향해 출발할 즈음, 군벌은 장안을 조직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궁전, 관청, 민가는 철저히 부수어졌고 해체된 건축물의 목재는 황하에 띄워져 낙양으로 운반되었다. 새 왕도 낙양을 건설하는 데 이 목재가 활용되었다.
현무문: 황궁 가운데 북쪽 문이름 같은 이름의 대명궁 북쪽 문도 있다.
춘명문은 황궁 동쪽 가운데에 있다. 또한 흥경궁의 동남쪽에 있다.
금광문은 황궁 서쪽 가운데에 있다. 춘명문과 대로로 이어진다.
춘명문 아래에는 연흥문이 있고(동쪽), 금광문 아래에는 연평문이 있다(서쪽).
당대 장안성은 동서 약 9.7키로미터, 남북 8.6킬로미터에 이른다. 또한 궁성 북쪽에 펼쳐진 금원은 장안성 보다 더 크다.
장안성 남족 교외 숲에는 성 안에 저택을 가진 왕후귀족의 별장이 곳곳에 지어졌다.
아케메네스 왕조(하카마니슈 왕조)
집시(Gypsy)는 이집트에서 온 사람(Egyptian)에서 유래 한 말이다.
이란 고원의 동북부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성지이자 거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슬람교를 수용한 이유 중 하나가 시아파의 이맘 알리(600년경~661)가 사산조 마지막 왕의 공주에게서 태어났다는 구전설화가 유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내 면적은 7500평방킬로미터이다.
바그다드가 원형으로 건설된 것은 원의 중심을 통해 우주 중심에 접속한다는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전통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이며, 원형은 세계를 안은 공 모양으이 천체를 상징하는 데 페르시아인의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바그다드('신이 내려주신 것'이라는 의미)는 페르시아어 이다.
바그다드는 지금이 2350미터에 이르는 원형의 서애로서 삼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도시 계획의 목적이 기본적으로 칼리프를 핵으로 하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을 나타내는 데 있었기 때문에 일반 주민의 생활이 고려되지 않았다. 일반인의 거주지나 시장은 원형 성곽 밖에 분포하였다. 원형 성곽을 포함한 바그다드 시가지의 면적은 약 4만 평방킬로미터이다.
장안성의 면적은 금원을 제외한 궁성,황성, 외곽성 부분만 8만 4천평방킬로미터이다.
수대에 불교 사찰은 서부에 많이 세워졌다. 도관은 가운데에 많이 있었다.
은나라의 수도였던 안양(安陽)의 근교에는 위나라등의 수도였던 업(鄴)이 있다.
6대 고도에 안양시를 추가해 7대 고도로 해야 한다는 주장은 탄치시앙(담기양)이 1981년에발표한 글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고도에 관한 논의는 1920년대에 처음 시작되어 중국 통일 왕조의 수도인 서안, 북경, 낙양, 남경 개봉등 다섯 도시가 대표적인 고도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항주를 포함하여 6대 고도설이 제기된것은 1930년대 들어서 였다.
중국 왕도의 입지에는 중국사 전기에는 왕도가 동서 방향으로(즉 장안,낙양,개봉)으로 입지하지만 후기에는 남북 방향(남경,북경)에 입지한다.
史念海에 따르면 3000년 전(은나라 말기, 주나라 초기) 황토고원은 원시산림과 초원으로 덮인 편평한 대지가 쭉 이어져 있었고 유량이 풍부한 맑은 하천이 흘렀으며 갖가지 생물이 서식하는 녹음의 땅이 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과학자들은 약 1만년 전인 홍적세 말기에도 황토고원과 오르도스 사막은 이미 현재와 유사했다고 주장한다.
후한에서 위진남북조 시대까지 기후의 한랭화 되었다가 당대에 이르러서는 기후가 따뜻해졌다.
조읍(朝邑), 화음(華陰)
현재 진령 남쪽의 성도에서는 벼를 많이 수확하지만 관중평야에서는 밀밭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명 초기(1374~1378)에 축조된 서안성의 성벽은 높이는 12미터, 동서 길이는 3.3킬뢰터, 남북 길이는 2.6킬로미터, 성벽 상부의 폭은 12미터에서 14미터 사이이다.
4 5세기에 북반부를 엄습한 자연환경의 변화(연평균 기온의 저하와 그에 따른 건조화) 일어난다.
북위는 494년 낙양으로 천도하고 502년 낙양의 외곽성을 확대하는 공사를 마친다.
관중평야의 낙양성을 거점으로한 서위는 처음에 인구수, 병사수, 경제력 등 어느 면에서도 형세상 동위에게 불리했다. 그러나 서위는 전투 경험이 많은 소수의 숙련된 기마전사층이 통치권을 잡아서 선비족의 전통적인 기마군사 조직을 기반으로 황토고원 남부의 지방 호족과 일반 주민을 편입해 체계적인 군사 지휘 계통을 만들었다.
돌궐의 동서 분열로 북방의 위협이 약화되어 수나라가 남방 전선에 주력할 수 있게 되었다.
581년 2월에 즉위한 수 문제는 한대 이래 사용해 온 장안성을 폐기하고 그 동남쪽에 있는 용수원(龍首原, 혹은 龍首山)이라는 구릉지대에 전례 없는 규모로 왕도를 새롭게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수 문제는 대흥성 건설을 시자한지 넉 달째인 6월에 위수를 사이에 두고 대흥성 건설 현장의 정북쪽에 있는 함양에 돌궐 침입에 대비하고자 황태자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또한 돌궐이 관중평야로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황토고원 각 요충지에 정예병을 배치했다. 그런데도 돌궐은 관중평야의 서쪽과 북쪽을 종종 침입하였고, 수의 군대는 582년 대패를 경험한다.
그런데 583년 돌궐이 동서로 분열되어 버린다.
583년 3월에 무제는 전한초에 지어진 이래 수축을 반복하며 780년 동안 사용해왔던 옛 장안성에서 새로운 왕도로 거주지를 옮겼다. 불과 9개월 남짓의 공사 기간 이었다.
옛 장안성은 토지를 오랫동안 사용한 결과 염소 함량이 높아졌고 염분이 지하수에 들어가 생활 용수로 이용하기가 어려워졌다. 또한 옛 장안성의 북쪽 위에 바짝 붙어 흐르는 위수의 침식작용과 홍수로 성벽이 소실된 상태였다.
애초에 대흥성 건설 계획에서는 한대 이래의 옛 장안성을 모두 금원에 포함시켰고 동시에 동서 9킬로미터 이상, 남북 8킬로미터 이상이나 되는 대규모 성곽 면적에 알맞는 장소를 선정했기에 황제의 궁전인 대흥궁에서는 습기자 찼고 염화작용의 심화로 그곳에거 길어 먹는 음료수의 수질이 나빠졌다. 이것이 7세기 후반에 궁성의 동북쪽의 높은 대지에 대명궁을 새롭게 건설한 이유 중 하나다.
장안은 그 규모가 금원을 제외하더라도 동서 9721미터, 남북 8651.7미터에 이르는 전례 없는 격자형(Grid, 보통 바둑판이라고 하는) 계획 도시다. 바그다드가 직경(지름) 2.3킬로미터이고 콘스탄티노플도 동서 5킬로미터 남짓인 것을 고려하면 장안의 규모는 놀랍도록 거대하다
궁성 아래로는 관청인 황성이 있었다.
장안성에서는 방이라는 장벽(흙이나 벽도로 쌓은 벽)으로 둘러싸여 출입이 제한되었다.
방장제는 북위 평성에서 시작되었다.
방 몇 개를 시장 전용 구역으로 삼은 시장은 방과 똑같이 장벽(시장의 장벽은 시벽이라고 한다.)으로 둘러 싸여 있다.
주작대가 양쪽의 네 열의 속한 방은 가장 작지만 동서 550~570미터, 남북 500~590미터나 된다. 관청가인 황성 양쪽의 방 여섯 열의 방이 가장 큰데 동서 1020~1125미터, 남북 660~838미터에 이른다. 이들 방의 크기를 당대 다른 도시의 방과 비교하면 장안의 방 규모가 현격하게 커서 오히려 장안성 안 한 방의 크기가 현성 규모에 필적할 정도다.
8세기 말에서 9세기까지 주작대가 동쪽 부분인 가동(街東) 지역은 관인이 다수 거주하는 주택가가 되었지만 이때에도 관인만이 거주한 것은 아니며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방에서 생활했다.
당대 장안성에는 남북대가 셋, 동서대가 셋 해서 대가가 여섯 있었다. 이것을 육가 라고 한다.
남북대가 가운데 가장 정중안 대가인 주작문가의 폭은 실제로 150~155미터이며, 주작문가 동쪽으로 두 번째에 위치한 대가의 폭은 실측으로 134미터, 주작문가 서쪽으로 두번째에 위치한 대가의 폭은 실측으로 108미터일 만큼 대가의 폭은 매우 넓다.
동서대가 가운데 가장 큰 대가는 자안성 동쪽의 위에 있는 통화문에서 궁성의 소양문(당대의 승천문)을 지나 장안성 서쪽 위에 있는 개원문으로 이어지는 길로 그 폭은 147미터라고 문헌에 나와 있다. 그리고 춘명문에서 황성의 주작문 앞을 지나 금광문을 이어지는 대가의 폭은 실측으로 120미터이고, 연흥문와 연평문을 연결하는 대가는 실측으로 55미터 이다. 대가가 좁은 것은 궁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한 남쪽에 위치하여 교통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장안성에는 가동의 55방, 가서의 55방해서 모두 110방이 있었다. 방장의 기단부 두께는 발굴된 몇몇 방을 통해 2.5~3미터임이 밝혀졌다. 방장의 정확한 높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3미터쯤으로 추정된다. 각 방의 방장 바깥쪽에 배수구가 똑같이 파여 있어 방은 하나의 작은 성곽 형태를 띠고 있다.
연흥문과 연평문을 잇는 동서대가 남쪽의 다섯 열에 있는 방은 성 안에서도 인가가 드문 지역으로 밭이 많았다.
대흥성의 외곽성 성벽을 쌓은 본격적인 공사는 613년 수 양제 때 비로소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당 고종이 653년과 654년 사이에 장안성이 속한 행정구역인 경조부의 백성 4만 1000명을 징발하여 외곽성의 성벽을 쌓은 대규모 공사를 벌였다. 이때 비로서 외곽성이 완성되었다.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외곽성 성벽의 기단부 두께는 보통 9~12미터며, 성벽은 약 5.3미터로 그다지 높지 않았다.
대흥궁 서쪽에 접한 액정궁은 황후가 머무는 공전 지역이다. 액정군 서남부에는 가로로 길게 환관이 담당하는 내시성이 배치되었다.
액정궁 북쪽에는 곡물 창고인 태창이 있었다.
중서성은 태극궁의 왼편에 문하성은 오른편에 배치되어 있었다. 홍문관은은 문하성의 오른편에 있다.
장작감은 황성의 서북쪽으로 북쪽으로는 궁성의 내시성및 액정궁이 있다.
중서외성은 황성의 승천문가를 사이에 두고 왼편의 바깥의 가장 북쪽에 있다. 문하외성 승천문가의 오른편의 바깥의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다. 중서외성과 줄을 맟추고 있다.
상서성은 6부의 가운데 있었다.
태묘는 황성의 동남부에 있고, 대사는 홍성의 서남부에 있다. 태묘 아래 황성 바깥에는 국자감이 있다.
화류마방은 대사의 왼편의 위에 세로로 길게 자리 잡고 있다.
서시의 큰길의 폭은 17미터 정도 된다(가운데에 차도(14미터 , 양쪽에 배수구가 각각 0.3미터, 그리고 보도가 1미터씩 있다)
각방에는 문(門) 있는데(즉,방문) 여기에 가까울 수록 방 외부와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에 재산이 있는 사람이 방문 쪽에 많이 거주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3품 위상의 고위 관리는 방장에 구멍을 뚫고 직접 방 밖의 도로를 향해 문을 만들 수 있었기 대문에 고위 관리는 방의 혼잡함을 피할 수 있는 방의 꼭지점 부분에 저택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다.
해마닷 동짓날이 되면 원구에서 제천의례가 거행 되었다.
전한 장안성 이전에는 주택 건축에서 서남쪽이 종족 내의 예제 때문에 존중되어다고 한다. 그러한 관례에 따라 황제의 궁전과 관청이 서남쪽으로 배치되었고, 신하가 군주를 알현할 때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동쪽으로 바라보는 예를 취했다고 한다. 그런데 후한 낙양성 이후 황제권이 신장됨과 더불어 황제가 남쪽을 향하며 신하와 대면하는 예제가 중시되었다.
문묘는 공자를 모시는 곳으로 태묘(혹 종묘)의 아래에 있다.
무묘는 강태공을 모시는 곳으로 대사의 아래에 있다.
음양 오행에 따라 시장과 상업을 음으로 규정하여 시장의 영업시간은 법령에 따라 음인 오후로 제한되었다. 시장의 영업은 정오를 알리는 징소리로 시작하여 일몰 전 7각(일몰 약 1시간 30분 전)을 가리키는 징소리와 함께 끝내야만 했다.
정치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5품 이상의 고관은 시장에 갈 수 없었다.
수해 때 날이 개기를 기원하는 기청제나 가문 때 비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도 시장에서 거행되었다.
주작대가의 길이는 4킬로미터이고 그 폭은 아까 말한 대로 150미터 정도 된다.
소어지전(所御之殿)에서는 황제가 번사의 표와폐를 받거나, 황제가 번국 왕이나 사절을 만났다.
길례(吉禮)는 천지의 우주적 또는 자연적 힘이나 황실의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의례인데 중요도에 따라 대사, 중사, 소사로 구별 되었다.
의례서가 유교 정치 철학에 바탕을 두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불교 의례가 왕조 의례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음데도 의례에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각종 의례 가운데 원구에서 치르는 남교 의례가 가장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의례는 원구에서는 유교의 최고신이며 우주의 최고신이기도 한 호천상제에게 올리는 제사다.
대규모 가람을 가진 불교사원이 백 곳 이상 있는 반면 도교의 도관은 열 곳 밖에 없었다.
수나라의 국가 사원인 대흥선사를 주작대가 동쪽(양의 방향)에 두어 서쪽(음의 방향)에 있는 도교의 도관인 현도관과 서로 대칭으로 배치하였다.
원구에 제사를 올리기 8일 전부터 제사 전날까지 황제와 제사에 참여하는 관인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ㅏ며 부정한 것을 멀리한다.
제사 전날 황제가 태극궁을 출발하여 원구 근처에 설치된 행궁에 도착한다.
제사 당일 원구에서 황제가 호천상제에게 옥과 비단을바친다. 이때 원구 제사가 최고조에 오른다.
호천상제 이하 천신들의 신위가 그 서열에 따라 원구의 네 단과 원구 주위에 배열되는데 원구 꼭대기 단에는 호천상제와 함께 당조 최초로 천명을 받은 고조 이연(신요황제)의 신위가 배열된다.
662년에 고종이 대명군을 중건하고 663년 고종은 종래거주하던 태극궁에서 나와 대명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곳에서 정무를 보기 시작했다. 대명궁이 태극궁을 대신하여 당조 정치의 중심지로 확정된 것은 안사의 난을 거친 8세기 말이었다. 중종과 예종은 대명궁이 아니라 태극궁에 거주하였고(무측천은 태극궁에 있다가 대명궁으로 이주했지만 결국 낙영으로 거처를 옮겼다.), 현종은 개원 2년(714) 태극궁에서 대명궁으로 이주해다가 개원 16년(728) 이후에는 개원 2년에 완성된 흥경궁에서 지냈다. 따라서 대명궁이 태극궁을 대신하여 황제가 일상적으로 거주하는 궁전으로 확정된 것은 안사의 난 당시 함락당한 장안을 지덕 2년(757)에 숙종이 수복한 이후부터다. 안사의 난 이후 낙양성은 중앙정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군사 입법 사법 행정 등 여러 기관이 장안에 밀집하였지만 실질저그로 정치와 경제의 기능이 왕도에 집중한 것은 오히려 대외적으로 당조의 세력이 약화된 후기부터다.
대명궁에서는 태극궁과는 대조적으로 행정과 재정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관들이 내조의 자신전을 에워싸듯 자리잡아 황제를 핵으로 정치를 기능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황제가 궁전을 옮김에 따라 관료들은 조회에 참여하는 데 편리한 대명궁 앞의 가동의 중북부에 밀집했고, 반면에 가서는 서민가가 되었다. 9세기 전반에는 전용 시장 지역인 동시와 서시를 주임으로 한 동서 지역에서 주민 계층에 따라 토지를 기능적으로 이용하는 현상이 일어났고, 방장으로 둘러싸인 거주 지역 제도도 점차 이완되었다.
장안의 인구는 현존하는 호적 통계를 근거로 하면 100만 명에 이르지 않는 다는 것이 오늘날 일치된 견해다. 필자는 8세기 전반의 장안 인구는 약 7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한다. 관려와 일반인 등 호적에 등록된 인구가 50여 만 명, 호적에 누락된 자는 십수만 명으로 본다.
말타고 하는 놀이인 폴로가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와 황조과 귀족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당나라 초기의 왕조의례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당 고종대부터 왕조 의례에서 호천상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지만 수대와 당 초기의 다신교적 색체는 약해졌다. 현종대에 들어서자 남교 제천 의례를 거행하는 과정에 황실의 선조로 노자를 숭배하는 의식을 도입했다.
천보 원년(742)에는 당 황실의 선조라는 노자에게 제사지내는 태청궁이 대명궁 앞 대녕방에 지어졌다. 따라서 남교 제천 의례는 대명궁->태청궁(제천 이틀 전 아침 제사)->태묘(제천 전날 아침 제사)->원구 순으로 변경 되었다.
천보 3년에는 방술사의 상주를 계기로 동쪽 교외에 있는 일단(日壇) 동쪽에 태일, 섭섭, 헌원, 초요, 천부, 청룡, 함지, 태음, 천일 등 북극을 중심으로 배열된 별들에 대응하는 아홉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구궁귀신(九宮貴神)의 제단이 새롭게 설치되어 태청궁처럼 대사에 편입되었다.
동쪽 교외에서 거행하는 구궁귀신 의례나 가동 북부의 태청궁 의레는 새 궁전인 대명궁과 흥경궁 건설과 관련이 있고 정치와 의례의 중심을 장안성 동부로 이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사면의 시행이나 사원에서 속강(대중에게 하는 불교 강론)이 조칙에 의해 거행되었다는 것은 남교 의례가 단지 황제와 관료만 참가하는 의례가 아니라 민간 생활에 영향을 주는 행사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매우 흥미롭다.
장안의 도시 문화가 더욱 난숙해져 지방 문화인의 동경 대상이 된것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진 당 말기였다.
친왕들은 장안성의 동북쪽 에 위치했있고,서역인들은 황성 서쪽에 주로 거주해 있었다. 하층민들은 서시 쪽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근위병 가운데 우군의 군이도 가서(街西)에 많이 거주했다.
환관의 세력이 커진 8세기 이후는 대명궁 앞 지역이 환관의 대저택이 늘어선 장안의 최그급 주택가임을 알 수 이다.
당 후기에는 가운데 주작문가와 서쪽, 남쪽으로 관인들의 별장들이 많았다.가동에 거주하는 관인의 가묘도 성 안 남부의 한적한 지역에 많이 세워져 가묘 건립이 제할될 정도 였다. 그리고 가동 관인의 집안 묘지는 대부분 성 동쪽의 구릉지에 조성되었다.
동시의 서쪽에 있는 평강방(平康坊)의 동북부에는 관인이나 부유한 상인을 고객으로 하는 대규모 유곽 지역인 북리(北里)가 등장했고, 그 평강방 북쪽인 숭인방(崇仁坊)에는 상경한 지방관과 여객이 숙박하는 여관가가 출현해서 성 안에서 가장 떠들써한 곳임을 과시하였다. 더욱이 동시 주변의 방에는 어음 발행 등 금융기능을 겸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각 도의 진주원이 밀집해 있었다.
시장 안의 음식점 수 자체는 소비 인구의 수 때문에 가동의 동시보다 가서의 서시 쪽이 많았다.
동서 두 시장은 고고 조사에 따르면 각각 1평방킬로미터에 조금 못 미칠 정도로 광대한 면적을 차지한 거으로 나타났다.
9세기가 되면 상거래 장소도 성 안팎의 상업경제의 발달을 배경으로 동시와 서시 외의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장안성을 동쪽에서 들어간다면 동쪽 성벽의 정중앙에 잇는 춘명문을 통과하는 것이 보통이다.
동시에는 폭 30미터의 시장 도로가 정남쪽으로 1킬로미터 곧게 뻗어 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상인이 직접 운반해 온 상품을 보관하거나 분산하는 창고업과 도매업에 종사하는 사는 사람은 도매상점(邸)은 외부에서 온 상인이 쉽게 짐을 부리도록 시장 안의 동서남북 네 벽을 따라 자리를 잡았고 일반 소비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매점(店, 鋪)은 시장 안의 큰길을 바라보고 시장 네 벽 쪽에 있는 소매재 도매상에게 상품을 구입하여 가공한 후에 소비자에게 팔았다.
관중평야의 밀은 가을인 10월쯤 심어 이듬해 5월에서 6월 사이에 수확한다.
본래 중국 대륙에서 겨울 밀을 재배한 지는 오래되어 전한대 이후 이미 관중평야에서 재배했다는 기록이 이다. 그러나 한대 화북의 중심 곡물은 조로 낟알을 먹었으며 밀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으로 재배할 뿐이었다. 그런데 4 5세기 이후 서아시아풍의 분식류가 화북에서 급속히 유행하여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겨울밀이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8 9세기에 이르자 재분기가 개량되면서 겨울밀이 조를 대체해 완전히 주식이 된다.
북경의 가운데로 나누어 덕승문은 북쪽의 왼편에 있고 안정문은 오른쪽에 있다. 그 동북쪽 근처에 지단(地壇)이 있다.
조양문은 북경 동쪽의 위에 있다.
신무문은 자금성 뒤 즉 북쪽 중앙에 있다.
높이 약 10미터, 지층부의 폭 약 8미터의 벽돌로 쌓은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자금성은 동서 약 760미터, 남북 약 960미터, 면적 7만 2000평방미터의 크기로 약 800채의 건물이 그 속에 있다고 한다.
오문은 성벽의 높이 12미터, 문루의 높이는 38미터로 자금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자금성의 태극궁과 장안 궁성의 태극궁의 크기를 견주해 보면 장안쪽이 북경의 약 1.3배 더 크다.
일본군이 화북을 침략하여 강소성 북서부의 요충지인 서주를 잃은 장제스의 국민군은 패주 도중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고자 하남성의 화원구에서 황하의 제방을 붕괴시켜 인위적으로 황하가 범함하게 했다.
이때 익사자가 하남성을 중심으로 80만 명이었고, 수재민은 2000만 명에 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