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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한 여성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
역사적 배경
한일합방이 된 1910년부터 조선 여성을 일본으로 팔아넘겨 매춘행위를 시키는 일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그뒤 1932년 상하이 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고 일본군의 강간행위가 빈발하자 그 대책으로 오카무라 야스지[岡村] 중장은 나가사키[長崎]의 지사에게 군대위안부 유치를 요청했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 위안부를 끌어들인 첫 시기로 보여진다. 그후 1937년 난징[南京] 대학살 사건 때 일본군이 일반시민을 강간하는 포악행위가 드러났으며,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종군위안부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여성이 전통적인 유교교육 등으로 성병의 위험이 없으리라는 판단으로 미혼의 조선 여성을 종군위안부의 적절한 대상으로 정했다. 근로정신대의 경우는 전쟁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제사·방직공장 등에 조선 여성을 동원하여 노동력을 착취했다.
모집과 동원
중일전쟁이 전면전쟁으로 확대된 후인 1937년 8월 24일 일본은 각료회의를 통해 '국민정신 총동원 실시 요강'을 가결했다. 이 국민정신 총동원에 따라 여성의 활동이 장려됨으로써 여성의 전쟁 참여가 촉진되었다. 1941년 11월 '국민근로보국 협력령'에 따라 14~25세의 여성에게 연간 30일 이내의 국민근로보국 대협력활동을 하도록 했다. 1942년 8월 국민징용령 제2차 재정에 따라 여성의 징용은 법적으로 가능하게 되었으나 자주적 참여를 원칙으로 여성의 근로동원이 실시되었다. 1943년 9월에는 17개 직종에 관한 남자취업이 제한 또는 금지되고 여성을 취업하게 함과 동시에 일제는 '여자 근로동원 촉진에 관한 건'을 결정, '여자근로정신대'를 자주적으로 편성시켜 모든 여성의 동원을 도모했다. 정신대는 1~2년간에 걸친 장기동원이었다. 1944년 8월 '여자정신대근무령'이 공포됨으로써 1년 동안의 정신근로를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여성에 대해서는 국민등록이 시행되지 않아 원칙적으로는 법적 강제력을 갖는 징용은 행해지지 않았으나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이 행해졌다.
1941년 12월 이후 조선에서의 여자몰이가 본격화되어 지원과 동원을 위한 강연회와 회의가 계속 이어졌다. 1942년 5월 발송된 '제2차 특별요원 진출에 관한 조회'라는 문서에 의하면 병사 29~35명당 1명의 군대위안부가 계획되어 그 수를 배당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군부는 필요한 인원수를 산출해 면사무소 등을 이용해 폭력을 사용하거나 '군인의 심부름을 한다'는 말로 속여 10대 후반에서 20대 전반의 조선 여성을 수송해갔다. 현재 정신대에 여성들이 언제부터 끌려갔고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1937년 중일전쟁 때부터 본격적으로 끌려갔을 것으로 예상되며 정신대의 전체규모는 17만~20만 명으로 이중 80% 정도가 조선 여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신대의 활동
정신대는 노동력을 주로 착취당한 근로정신대와 성적인 착취를 당한 종군위안부로 나뉘는데, 몇 가지의 증언으로 미루어 근로정신대로 차출되었으나 뒤에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던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근로정신대는 일본의 도야마[富山]·시즈오카[靜岡] 등지와 대구·부산·광주 등의 군수공장과 방직공장에서 하루 14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임금도 받지 못하고 굶주리며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종군위안부의 경우는 중국·일본·동남아시아 등지로 끌려가 군의 감시와 통제 아래 군인들의 성적 도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미얀마, 트랙 섬, 필리핀, 테니안 섬, 마리아 군도, 수마트라, 셀레베스, 인도네시아, 오키나와[沖 ] 등에 위안소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유지와 관리, 위안부의 배치와 막사 등도 군이 준비한 것으로 보여진다. 위안소의 규정을 보면 군인이 위안소 안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30분이고 콘돔을 착용하지 않은 자는 여자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위안부들은 보통 하루 12시간 정도 군인을 받는데, 이른 시간에는 병사·하사관을 밤에는 장교를 주로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월 3회가량 성병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았고 외출 등의 사적인 행동은 엄하게 규제되었다. 전쟁에 지쳐 있는 군인들의 유일한 '놀이감'으로 제공되는 위안부에는 매춘업을 하던 일본인 여성도 있었으나 이들은 돈을 선불받고 그 돈을 갚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인 위안부는 '흰밥을 배불리 먹고 돈을 번다'는 말에 속아 갔거나 강제로 끌려간 나이 어린 미혼여성으로 하루 30~100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하는 육체적 고통과 수치심에 많은 수가 자살을 하기도 했다.
패전 후 위안부의 처리와 생활
전쟁이 끝나고 군대위안부의 존재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군 내부에 공창단까지 가지고 있었음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우려한 일본은 증거인멸을 위해 갖가지의 노력을 했다. 각종 문서와 자료들의 인멸과 중국·동남아시아·남양군도, 일본 국내 등에 있었던 위안부들을 현지에 그냥 버려두거나 참호에 가두어놓고 폭파해 일본군과 함께 옥쇄(玉碎)시키는 일도 많았다고 알려진다. 중국위안소의 경우 중국 각지에 있던 징병·학도병·징용부와 함께 상하이에 집결시켜 귀국시킨 경우도 있으나 위안부로서의 경험을 비관하여 자살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현지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운이 좋아 살아서 귀국한 경우에도 성병의 후유증으로 고생하거나 인간기피증·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대부분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잡일로 늙은 경우가 많고 결혼을 하더라도 원만한 가정을 이루기 힘든 측면도 있었다.
일본의 태도와 이에 대한 대응
정신대 문제규명과 배상에 대한 요구에 일본은 이를 방관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배상문제에 대해서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 한국인이 일본 국적을 이탈한 사항과 1965년 김종필-오히라[大平] 간의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1992년 1월 육군이 위안소의 감독과 통제에 관여했다는 육지밀대 일지가 발견되기 전까지 일본 정부와 군의 정신대 개입사실을 거부하고 이를 민간상인의 상행위로 돌렸다. 1992년 2월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 여성을 정신대로 강제동원한 것은 당시 일본 국왕이 재가해 공포한 '여자정신대근무령'에 근거한 것임을 입증하는 관계법령과 문서가 발견됨으로써 일본 정부수뇌부가 정신대 강제모집과 총원 및 관리에 깊숙이 개입했음이 명백히 밝혀졌다.
정신대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198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정신대연구 팀이 후쿠오카[福岡]에서 오키나와까지의 답사를 시작하면서 표면화되었고,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1990년 발족되면서부터는 이 문제를 규명하려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는 정신대 사실 인정과 사죄, 피해유족과 생존자에 대한 배상, 교과서와 역사교육서 등에 정신대 사실 명기 등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일본 정부에 보내고, 위령비 건립을 일본과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정신대에 관한 정부와 군의 개입사실 부정과 책임회피성 발언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취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신대 문제의 진상규명작업과 공식적인 사과를 보다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1991년 8월에는 김학순 씨가 국내 정신대 최초 증언자로 기자회견을 했으며 같은 해 9월 정신대 신고전화 개설에 힘입어 근로정신대와 종군위안부 신고가 지속적으로 들어오고 있다. 1992년 1월에는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일본 총리의 방한 반대와 일본 정부의 정신대 진상규명과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정기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90년 7월 발족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산하 정신대연구회의 지속적인 연구활동과 자료집 발간사업 등으로 정신대문제를 일제식민사에 새롭게 조명하고 기록하려는 움직임이 학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브리태니커 대백과 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그림은 이미 자료실에 올라와 있어 많은 분들이 보셨을 그림입니다. 불행한 역사를 만나지만 않았던들 훌륭한 화가가 되셨을 위안부 할머니의 작품이죠...
혹시 이 그림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아시나요? 사쿠라, 즉 벛나무가 지나치게 아름답게 그려졌다고 생각하진 않은가요. 왜 할머니가 일본을 상징하는 벛나무를 저렇게 그렸을까요. 할머니 입장에서는 땔감으로 써도 분이 안풀릴텐데요. 그리고 다른 그림보다도 유난히 여체에 대한 묘사가 적나라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그림에서는 옷을 입거나 등을 돌리거나 하는데 말이죠. 이제부터 제가 그림을 하나하나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런 말 들어보신적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엔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벛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있다. 벛꽃이 붉은 화려한 이유는 그 시체에서 나오는 피를 빨아올려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이제 대충 짐작이 가실겁니다.
다시 한번 그림을 봐주시겠습니까? 거대한 벛나무 밑에 묻힌 수없이 많은 해골들은 이 땅의 독립을 외치며 항거하다 죽어간 수많은 우리 민족입니다. 시체가 하나 둘도 아니고 아주 많지요... 그 엄청난 피를 양분으로 찬란하게 꽃을 피워내는 벛나무는 잔악한 일본군으로 표현되어있군요.
또 그런 붉은 꽃송이들이 떨어지는 가운데 수치심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있는 나신의 여인은 바로 우리 여인들의 과거입니다.
이제 앞서 가졌던 의문들이 풀리고 있네요. 벛나무가 아름답고 크게 묘사된 것은 그것이 수많은 우리 민족들의 피를 댓가로 한 것이었기에 슬프도록 찬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떨어지는 벛꽃잎의 숫자도 밑에 묻힌 해골만큼이나 많구요...
또 누워있는 여인의 표현이 적나라한 것은 그만큼 일본의 만행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없는 극악무도한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애써 손으로 감추어도 이미 짐승같은 일본 순사들은 그네들의 치부를 까발리고 만 것이죠...
전... 저 그림을 보면서 순간 차오르는 눈물에 가슴이 저렸습니다. 제가 본 위안부 할머님들의 그림중에서 가장 슬픈 그림이었다고 생각해서요.. 내 나라의 역사가 너무 슬퍼서요...
절대로 잊지 마세요. 절대로요..
제 목 : [제발 읽어주세요!!!!!!]북한의 종군 위안부...
사진/위안소에서 도망치다 잡혀 온몸에 문신을 당한 정옥순 할머니.)
일본이 행한 식민지 지배로부터 커다란 피해를 받은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에 그 실태조차 거의 알려진 바 없다.
나는 올해 5월에서 6월에 걸쳐 평양에
19일간 체류하면서 많은 피해자들을 취재했다. 그중에서도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전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과 그들의 몸에 깊이 새겨진
상흔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나는 전후세대이지만 일본이 아시아 여러나라에서 행한 침략의 실태를 일본사회에 알리는 것이 일본인
사진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때문에 십수년간에 걸쳐 아시아 여러나라를 방문해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 600여명을 찾아가 취재했다.
그런데 취재하지 못하고 공백으로 남아 있던 곳이 북한이었다.
취재교섭을 시작한 것은 1990년. 그것이 올해 4월 겨우 허가가 났다. 일본인 저널리스트의 단독취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수년 만의 일이라 한다.
니가타에서 승선한 배는 5월17일 원산항에 입항했고, 나는 약 80kg의 촬영기재를 둘러메고 부두에 내렸다.
19일간 평양에
머물면서 내가 바라던 바를 거의 다 취재할 수 있었다. 전 일본군 위안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사람, 강제연행돼 중노동에 종사한
사람, 징병으로 군인이나 군속이 된 사람, 불교도로서 탄압받은 사람까지 모두 21명을 만났다.
(중략.....)
임신하자 낙태시킨다고 자궁 들어내
북한에서 전 일본군 위안부들을 취재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 더욱이
남성으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육체적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족차별과 여성차별 위에 일본군이 만들어낸 종군위안부 제도의 본질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기도 하다.
등의 칼자국을 보여준
분은 버마에 연행됐던 정송명(鄭松明, 1924년생)씨. “조선인 여성 400명 중 절반이 싱가포르에서 하선하고 나머지는 랑군으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한달이나 걸려 타이까지 걸어왔습니다. 위안부 45명과 남성 15명의 조선인이 2척의 배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그의
등에는 지금도 선명한 상처가 두곳 남아 있다. “너무 피로해 더이상 상대 못하겠다고 하자 마에다 중위가 일본도를 뽑아 내리쳤습니다. 심한
상처인데도 약 한번 발라주지 않아 2년간이나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유선옥씨의 배에는 배꼽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크고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군의관이 자궁째 태아를 들어낸 수술의 흔적이란다.
유씨는 1923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다. 기장밥을 끼니로
할 정도의 빈농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미야모토가 공장의 일자리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는 따라나섰다.
다른 여성 2명과
함께 끌려간 곳은 중국 동북지방의 목단강. 따라온 걸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케코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는 처음에 하루 5∼6명 정도,
많을 때는 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기절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면 다시 군인들이 덮쳐왔다. 불행히도 임신하게 되자 낙태 겸 재임신 방지를
위해 태아가 있는 자궁을 들어냈다. 상처가 낫자마자 다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반항하면 죽여버립니다. 미쓰코라고 불리던 소녀는 목을 쳐
죽였습니다. 여기에 있었던 15명 정도의 여성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6명 정도였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뒤에도 거지 같은 유랑생활을 하다가
1948년 10월에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1981년에 사망한 남편에게도 제 체험을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습니다”하고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도 몸서리치는 증오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일본에 대해 복수하는 일에만 골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때의 군인을 찾아낸다면 찔러죽이고 싶어요”하고 말하고 그때부터는 내 질문에 거의 대답하지 않았다. 일본인과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는 기분을 뚜렷이 읽을 수 있었다.
이경생(李京生, 1917년생)씨의 배에도 유씨와 비슷한 상처가 있었다. 지주집에서 일하고
있던 이씨는 끈으로 묶인 채 경상남도 창원의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장교가 말했다. 하루
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 ‘아직 쓸 만한데’하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냈다.“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여성을 성욕처리의 도구로밖에 보지 않고 낙태와 불임시술로 자궁까지 들어내는
행위는 여성의 존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산 사람 삶아 강제로 먹이기도…
정옥순(鄭玉順)씨의 기억은 매우 또렷했다. 그는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豊山郡 把撥里)에서 1920년 12월28일 태어났다.
1933년 6월3일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제복을 입은 남자 3명에게 연행됐고, 끌려간 파발리 주재소에서 강간당했다. 저항하다가 눈을 세게
얻어맞아 이때부터 왼쪽눈이 차츰 안 보이게 됐다.
그뒤 10일이 지나 7∼8명의 군인에 의해 트럭에 실려 혜산(惠山)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연행됐다. 그곳에는 각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정씨는 하루에 약 40명이나 되는 군인을 상대한 일도 있어 자궁출혈이
심했다.
그해 8월27일, 칼을 찬 군인이 ‘군인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하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다. 발가벗긴 여성을 군인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박은 판자 위에 굴렸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다. 그때의 기분을 “하늘과 땅이 온통 뒤집어진 것 같았다”고 정씨는 표현했다. 그 다음 군인들은 못판 위에서 죽은 한
여성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중대장은 “위안부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운다”고 했다. 군인들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나무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억지로 마시도록 했다.
정씨는 그때 피살된 여성들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한사람씩 짚어나갔다. 중도에서 헛갈리면 다시 처음부터 세어나갔는데 아무리 해도 한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자 몹시 서운해
했다. 그 수비대의 대대장은 ‘니시하라’, 중대장은 ‘야마모토’, 소대장은 ‘가네야마’였으며, 위안소 감독은 조선인 ‘박’이었다고 했다.
매독감염 숨겼다고 달군 철봉을 자궁에…
1933년 12월1일에는 한 여성이 장교가 철봉을 자궁에 꽂아
죽어버렸다. 다음해 2월4일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너무나 지독한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된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질문도 못하고 한숨만 내뿜었다. 놀라운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혜산의 부대는
정씨를 포함한 여자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이동해 대만에서 가까운 곳에 얼마 동안 있다가 1935년 9월에 광둥(廣東)에 도착, 이듬해 6월15일
정씨를 포함해 12명의 여성이 도망쳤는데 이틀 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맨처음 도망치자고 제안한 자를 가르쳐주면 주모자 이외는 모두
살려주마”고 했으나 아무도 고해바치지 않았다.
정씨는 철봉으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았다. 이때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다.
다음에는 물고문을 당했다. 고무 호스를 입에 넣고 물을 틀어댔다. 부풀어오른 배 위에 판자를 올려놓고 군인들이 올라서서 널뛰기하듯 뛰었고,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일이 몇번인가 되풀이되면서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잔인한 행위를 했다. 정씨와 여자들의
발목을 끈으로 묶고 거꾸로 매달아놓고 바늘이 수두룩하게 박힌 검은 몽둥이를 들고 와 먹물을 바른 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의 입 속에 몽둥이를
쑤셔넣었다. 정씨는 앞니가 부러지고 격렬한 통증으로 기절했다.
문신은 온몸에 걸쳐 새겨졌다.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들에게 문신을 했다.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 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명을 옮겨 약 두달간 간호해줬다. 정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하며 의자에
앉아 있는 내 팔을 꽉 쥐며 울부짖듯 소리질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극한까지 학대한 일본 병사와 겹쳐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줬다. 정씨가 손가락으로 뒤집어보인 입술 안쪽엔 선명한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군데 있었다. 수많은 바늘로 혀를 찔렀기 때문에 그뒤로는 말하기도 곤란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다. 등 아래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 같은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서
했음이 분명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버러지처럼 짓뭉갰다. 정씨의 몸에 깊숙이 새겨진 문신은
그 어떤 많은 얘기를 듣는 것보다도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지배의 실태와 천황의 군대의 악랄한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글·사진/ 이토 다카시(伊藤孝司)
1952년생. 포토저널리스트로 과거에 일본이 행한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 그리고 현재 일본이 저지르는 지구환경파괴 현황을 아시아 각지에서 널리 취재하고 있다. 아시아의 피해자에 관한 저서를
일본에서 8권, 한국에서 3권(눈빛출판사에서 <종군위안부> <사할린 아리랑> 등), 환경에 관한 저서를 일본에서 2권
출판했다. 일본, 미국, 유럽에서 수십차례의 사진전을 열었으며 96년에는 서울과 부산에서도 사진전 ‘깨어진 침묵- 아시아의 종군위안부들’을
열었다. 일본 우익들의 테러 위험에 대한 본인의 우려에 따라 얼굴 사진을 싣지 않는다.
첫댓글 참... 인간의 잔악무도한 만행의 한계는 대체 어디까지일까... 이제는 피도안끓고 오직 神만부르게 되는군요.
휴~ 한숨만 나오네여~ 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인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