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4일 오전 月刊朝鮮社로 한 중년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산중학교 교장 박승용』이라고 소개했다.
朴교장은 月刊朝鮮 5월호에 실린 「창원군 진전면 치안대 사건의 진실(615~618쪽)」을 읽었다며, 그 기사에 나온 被(피)학살자 卞百燮(변백섭) 면장이 자신의 장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처가 사람들이 盧武鉉의 장인 權五晳씨가 진전면에서 양민학살을 주도한 사실에 대해 證言(증언)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朴교장의 부인은 학살당한 卞면장의 여섯째 딸이다.
5월6일 오후 2시쯤 釜山 해운대구에 있는 朴承用(박승용) 교장의 아파트에 들어섰다.
「진전면 치안대」 사건으로 숨진 卞百燮, 卞曾燮(변증섭), 鄭奉柱(정봉주)씨의 자녀와 조카들이 기자 일행을 맞았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盧武鉉씨는 지난 5월3일 慶南 마산市 진전면에 있는 장인 權五晳씨의 묘를 부인 權良淑(권양숙)씨와 함께 참배했다. TV와 일간신문에 일제히 보도된 盧후보의 장인 묘 참배는, 盧武鉉씨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 당선을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卞百燮 면장의 자녀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盧후보가 장인 묘소 앞에서 던진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이들의 가슴에 「匕首(비수)가 되어 박혔다」고 한다. 卞百燮 면장의 둘째 딸 慶淑(경숙·69)씨는 이렇게 말했다.
『盧武鉉씨의 장인 權五晳이 묻혀 있는 곳으로부터 3km 안쪽에 權五晳이 학살한 11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묻혀 있습니다. 權五晳은 공산당에게 끌려가 억지로 부역을 한 게 아니라 양민을 재판하고 처형한 사람이에요. 盧武鉉씨가 「사리상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같지만, 장모와 처남은 다시 들추기 싫어한다」, 「조금 가담하고 더 가담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둘러댈 일이 아니에요』
세 피살자의 가족들은 憤怒(분노)와 울분을 감추지 않았다.
「양민학살은 우리에게 현재 진행형 사건」
盧후보는 장인 묘 참배時 이런 말도 했다.
『성역도 금기도 없는 좋은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장인은 얼굴도 본 적이 없다. 다들 말하기를 꺼리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얼굴도 못 본 분이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변명하자면 나는 모른다.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의미를 붙인다면 그것은 백성의 몫이 아니다. 지난 날의 일이다』
卞면장의 여섯째 딸 善子(선자·58)씨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으로서, 또 자신의 장인이 관련된 양민학살 문제를 「모르는 일」이라는 말로 덮으려고 할 수 있느냐』면서, 『최소한 당시의 피해자 가족들에게 사과의 말 한 마디는 하는 게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의 도리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말했다. 善子씨는 또 『우리 가족에게는 양민학살 문제가 盧후보의 말처럼 「지난 날」이 아니라 지금도 아픔이 지워지지 않는 현재 진행형』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빨갱이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우리집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 가족은 딸 일곱과 막내아들까지 아홉 식구였습니다. 막내딸은 피란길에 굶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지역 유지였던 아버지가 빨갱이들에게 끌려가지 않았다면 막내 여동생은 죽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 가족은 지금도 아버지와 막내 여동생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지난 날의 일입니까』
유족들을 격앙케 하는 것 중 하나가 盧후보 측의 「맹인이었던 權五晳씨가 부역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느냐」는 주장이다. 卞百燮 면장과 8촌 간으로 함께 학살당한 卞曾燮씨의 장남 在雄(재웅·63)씨는 『당시 나는 아버지와 卞면장이 갇혀 있는 치안대 본부에 있었다』면서 『權五晳씨가 장님이었기 때문에 그가 주도적으로 학살을 준비하는 현장에 있었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卞百燮 면장의 친조카 在奐(재환·55)씨는 『일부 언론이 盧武鉉 민주당 대통령 후보 측의 말만 듣고 盧후보 장인의 죄상 자체를 호도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6·25 때 양민을 학살한 權五晳씨의 죄상을 사실 그대로 알려 주고 싶다』고 말했다.
학살당한 사람은 9명 아닌 11명
대검찰청 수사국이 펴낸 「좌익사건 실록」에는 權五晳 등이 가담한 학살사건의 민간인 피해자가 9명으로 돼 있다.
피해자 가족들은 『그때 학살됐던 사람은 모두 11명이고, 1950년 12월쯤 11명의 희생자가 합동 영결식을 가졌다』고 기억했다. 서울에 올라 와서 정부가 1952년에 작성한 「6·25 사변 피살자 명부」를 확인한 결과, 창원군 진전면에서 좌익들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 피살자는 卞百燮 前 면장을 비롯한 11명임이 드러났다.
학살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성명, 나이, 직업, 주소 順으로 기록한다.
<卞百燮·43·농업·창원군 진전면 양촌리
卞先燮·34·농업·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卞曾燮·33·농업·창원군 진전면 양촌리
金玉甲·53·농업·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金万祚·32·농업·창원군 진전면 시락리
金聖甲·46·농업·창원군 진전면 창포리
朱正浩·28·군인·창원군 진전면 봉암리
朴宗洙·51·區長·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朴周漢·47·농업·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鄭奉柱·32·농업·창원군 진전면 광촌리
權五乾·28·군인·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피살자 명부에는 「진전면 치안대 사건」과 관련이 없는 吳逑伊(오구이·33·농업)씨도 창원군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어떤 사건으로 처형됐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창원군에서 6·25 때 학살된 사람은 모두 12명이다.
盧후보 측 설명- 『구속됐다가 곧 석방됐다』는 사실과 다르다
卞百燮 면장 등 彼학살자 가족들은 전쟁 이후 權五晳의 행적에 대해 混沌(혼돈) 을 느끼고 있었다. 「학살 주범」으로 알고 있는 權五晳이 「전쟁 이후 구속됐다 풀려나고,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자녀까지 둘을 새로 뒀다」는 언론보도에 이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이들은 『전쟁 이후 「權五晳씨 가족이 진영으로 도망갔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權五晳씨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아무도 모른다』며 『혹시 장님이라는 걸 내세워 法網(법망)을 피해 간 것이 아니겠느냐』고 추측했다.
법원에서는 權五晳씨 재판기록 열람을 요청하자 『權五晳씨의 재판기록은 權五晳씨 직계 가족이 아니면 볼 수 없다』고 답변했다. 權五晳씨의 행적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을 盧武鉉 후보와 부인 權良淑씨는 이 부분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盧후보 측의 李恩姬(이은희·36) 여성특보는 지난 4월28일 中央日報 기자와 權良淑씨가 인터뷰하는 자리에 있다가, 權良淑씨 대신 權五晳씨의 행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친(權五晳씨)은 1948년 막걸리에 메틸알코올을 잘못 타 먹어 사모님이 두 살 때 실명했다. 그 상태에서 6·25 당시 공산군의 부역을 강요받아 수복 후 구속됐으나 곧 석방됐다. 그런데 5·16 이후 사회불안 요소를 격리한다는 차원에서 벌어진 「예비검속」으로 다시 투옥돼 1971년 마산 교도소에서 옥사했다』
『부역문제의 진상이 뭐냐』는 중앙일보 기자의 물음에, 權良淑씨는 『기억이 나지 않아 상세하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고 했다. 權씨는 부친의 부역문제가 『개인의 가정사이면서도 우리나라 전체의 아픔』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런데 그게(아버지 문제) 갈등을 부르는 소재가 돼 공격당하니… 사실 저는 부모님 일은 잘 모릅니다. 부모님 일을 모른다는 게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땐 나이가 어려서…』라고도 말했다. 權良淑씨는 李恩姬 특보의 설명에 말을 보태지도 않았고, 바로잡지도 않았다.
그러나 李恩姬 특보의 설명은 실체적 진실과 동떨어져 있다.
宋正鎬 법무장관이 밝힌 진실
지난 4월10일 宋正鎬(송정호) 법무장관은 국회 본회의 對정부 질문 답변에서, 「양민학살로 수감중이던 權五晳씨가 자유당 정부 시절인 1956년 폐결핵 등의 질병 때문에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고, 5·16이 나기 두 달 전인 1961년 3월27일 再수감됐다」는 요지로 답변했다.
한나라당 李元昌(이원창) 의원과 宋법무장관 사이에는 이런 문답이 오갔다.
<李元昌 의원 :민주당 盧武鉉씨의 장인 권오석씨가 6·25 때 인민재판에 재판장으로 일해 가지고 양민을 9명이나 처형하는 데 가담했습니다. 죄목은 무엇으로 나와 있습니까.
宋正鎬 법무장관:권오석은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았습니다.
李元昌:그렇지요. 그것은 남한에 있어서는 어떤 처벌이 되는 것입니까.
宋正鎬:남한요?
李元昌:우리 측에서 보면 어떤 처벌이 되는 것입니까.
宋正鎬:예, 그 당시 저희 법입니다.
李元昌:그러니까 저희 법이 그런데 그러한 죄목으로 양민을 처형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宋正鎬:예.
李元昌:어떻게 생각하세요.
宋正鎬:제가 특정 개인의 범죄전력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고….
李元昌:아니 그 분은 6·25 때 인민재판의 재판장이었습니다.
宋正鎬:다만 그와 같은 법으로 처벌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李元昌:예, 곤란한 질문은 너?? 계속하지는 않겠습니다. 권오석씨가 수감된 것은 1950년이었는데 자녀가 생산된 해가 수감 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1957년과 1961년입니다. 그런데 그의 사망은 1971년 입니다. 그러면 수감 중에 일단 석방이 되었다는 뜻인지, 어떻게 자녀들을 생산했습니까.
宋正鎬:그렇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권오석은 1956년 8월19일에 폐결핵 양안 실명 등의 사유로 형집행정지가 되었습니다. 그랬다가 1961년 3월27일에 잔형집행을 위해서 再수감됐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는 해야』
「수복 직후 붙잡혀 갔으나 곧 석방됐다. 5·16 이후 예비검속으로 붙잡혀 가서 옥사했다」는 李恩姬 특보의 설명은 사실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權五晳씨는 양민학살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았고, 그에 대한 형집행정지는 자유당 시절에 이루어졌고, 再수감은 張勉 정부下에서 이뤄졌다. 權良淑씨는 열 살부터 중학교 2학년 무렵인 열다섯 살까지, 아버지 權五晳과 함께 살았다.
『나이가 어려서』라는 얘기는 부적절하다.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을 權良淑, 盧武鉉 측에서 왜 이런 엉뚱한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일까?
5월8일 오전 李恩姬 특보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權五晳씨에 대해 사실과 전혀 다른 얘기를 중앙일보 기자에게 했느냐』고 묻자, 李특보는 『(盧武鉉 캠프의) 공보팀에서 전해 들은 얘기다. 확인한 것이 아니다. 공보팀의 김만수씨에게 물어봐 달라』고 대답했다.
공보팀의 김만수씨는 전화통화에서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확인한 것은 아니다. 친척분들의 얘기를 종합한 얘기다. 李恩姬 특보도 그걸 전해 들은 것으로 안다』고 대답했다. 『權五晳씨의 구속과 재판, 수감생활을 제일 잘 알고 있는 權良淑 여사와 가족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 왜 확인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그건 잘못됐다』고 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盧武鉉씨 부부는 장인 權五晳씨가 저지른 진전면 양민학살 사건의 심각성과 피해 가족들의 분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살당한 卞百燮 면장의 한 딸은 절규하듯 기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학살당한 피해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양민을 학살한 데에 대한 사과의 말 한 마디 없이 어떻게 「우리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살인한 죄인의 묘를 쓰면, 유족들은 피해자들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성묘를 합니다. 백주 대낮에 당당하게 온 국민이 보라고 학살 주범의 묘를 찾아도 되는 겁니까』●
노무현 대통령의 장모 박덕남(朴德南)씨도 여성동맹 진전면 위원장으로서 좌익활동을 주도했다는 [독립신문]의 9월 22일자 보도(관련기사 참조)를 한나라당 박성범 의원이 뒤늦게 인용, 발언함으로써 1주일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됐다.
노무현의 장모 박덕남의 좌익활동
- 「좌익사건실록」 총 13권 중 제10권의 노 대통령 장모 박덕남씨 관련부분. 여성동맹 진전면 위원장으로 임명됐음이 기록돼 있다.
박 의원은 29일 보도자료를 통해 “1973년 대검 공안부에서 발간한 ‘좌익사건실록’ 제10권에 따르면 박씨는 1950년 9월 21일 창원군 진전면 여성동맹위원장으로 임명돼 활동했다”며 “박씨는 본적 및 주소지가 노 대통령의 장인 권씨와 같은 경남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628번지로 기록돼 있어 동명이인이 아니라 노 대통령의 장모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독립신문]의 보도내용을 그대로 언급했다.
또 “박씨는 본적 및 주소지가 노 대통령의 장인 권씨와 같은 경남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628번지로 기록돼 있어 동명이인이 아니라 노 대통령의 장모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부분이나 “당시 여성동맹은 북한 관련 정세 선전과 시국강연 포스터 배포 및 부착, 유치장 간수, 식사 제공 등의 활동을 해왔다”는 지적도 모두 [독립신문]의 보도내용 대로였다.
박 의원이 보도자료를 통해 이같이 주장하자 [연합뉴스],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등 주요신문사와 MBC 라디오, KBS 인터넷 홈페이지 등이 관련내용을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박성범 의원측의 한 보좌관은 30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독립신문의 보도내용을 늦게 알게돼 어제야 의원님이 관련 발언을 하게됐다"며 "작은 언론사의 이런 특종보도를 왜 중앙언론이 안 받아쓰는지 의원님도 매우 궁금해 하셨다"고 말했다.
첫댓글 그 장모님이라는 분은 보도연맹 완장차고 자랑스럽게 다녔다는군요
저들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열심히 달리는 꼬리를잡고 10년을 끌려 다닌 국민들의 분노가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불여우님은 박덕남이를 높이모시는 사람처럼 보입니다.사실은아니지요? 박덕남 그인간 고향이 어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