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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돈을 받고 장사를 하는 사람일지언정 팔기 싫을때가 있다.
싫은 사람이 거래를 하고자 한다면 억만 금을 준다 해도 거절
하는 것이 장사꾼의 배짱.
허유(許裕)의 경유가 그랬다. 초저녁부터 들어와 술을 마시고
있는 두 사람 청성과를 무시하는 양 당문 무복을 버젓이 입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사람의 꼴을 보고 있자니 배알이 되틀렸
다.
"여기 술 다섯 말만 더 주게."
"금존청은 다 떨어졌소. 남은 것은 화주뿐인데...그거라도 마
시려오?"
술이 떨어지기는 왜 떨어져 주루에 술 떨어지는 것 봤나? 곳
간에 하나 가득 쌓인 것이 술인 것을...금존청만 하더라도 열
단지는 넘게 잠자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왠지 좋은 술은 주기
가 싫었다. 독한 술을 들입다 부어 버리고 싶었다. 독술의 대
가들이라는 당문 사람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했을것이다.
청성산은 무당산(武當山), 용호산(龍虎山)과 더불어 도교 삼대
성지였다, 때문에 향화객(香火客)들이 끊이지 않았고 주루는
날로 번창했다. 무일푼으로 관현에 들어와 이만큼 자수 성가했
으니 성공한 인생이었다.
청성파가 존재하는 특수 지역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
다. 중원 어느 주루에나 껄떡거리는 파락호들이 얼씬도 않는
것도 청성파 덕분이었고 취객들끼리 서로 욕지거리는 해댈망정
검을 뽑아 들지 않는 관습이 생긴 것도다 청성 덕분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주루에서 싸움을 벌이려 하다니.
주루를 차린 지 벌써 이십 년에 육박한다. 척하면 착! 산전수
전 다 겪은 몸이 주루에 이는 분위기를 못 읽을 까닭이 없었
다. 젊은 놈과 불곰 같은 거한은 싸움을 걸고 있다. 감히 대청
성파에게, 자연 말이 곱게 나갈리 없었다.
"어허! 그것 참 인심 하고는...취객은 두주불사(斗酒不辭)요
청탁불문(淸濁不問)이라 했으니 화주라도 가져 오시오."
말은 주로 곱살하게 생긴 놈이 했다. 거한은 마치 술에 걸신이
라도 든 양 들이 부어댔다.
'지독한 놈들...뻗어도 벌써 뻗었을 놈들이...'
허유는 구시렁거리면서 술단지를 꺼내려 일어섰다.
아무리 향기로운 술이라도 마시면 취하는 것이 상리(常理).
벌써 다섯 말을 비우고도 다섯 말을 더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이 인간 같지 않은 놈들은 취기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어디 얼마나 마시는지...'
허유는 졸린 눈을 두손으로 비벼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순간,
"엉? 저건 또 뭐야?"
주루 문을 밀치며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나오는 일성이었다.
일남 일녀 육 척 장신의 건장한 체격을 지닌 사내와 침을 꿀꺽
삼킬 만큼 육갑적인 여자.
그들은 들어서기 무섭게 당문 녀석들을 향해 다가갔다. 절대
호의를 지닌 것 같지는 않았다.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이
그걸 말해 주었다.
허유는 몸을 회계대 밑으로 움츠렸다. 싸움이 벌어지려고 한
다. 자칫하면 튀는 불똥에 하나뿐인 목숨을 헌납할 수도 있었
다. 그러나 고개를 빠끔히 내미는 것은 잊지 않았다. 청성파
도인들이라면 두말 않고 숨었겠지만...
"후후후! 호랑이를 잡으려고 했는데 토끼가 걸려들었군."
당자인은 단비하가 들어서는 모습을 곁눈질로 일견하고 가볍게
중얼거렸다.
"저 자식 더럽게 명이 긴 놈이네요. 가만있자...아니 그런데
저 자식이 뒈지려고 여길 기어 들어와?"
조문덕은 투박한 철부(鐵斧)를 불끈 움켜쥐었다.
"내버려둬라. 여기까지 온 데는 그만한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을터..."
당자인은 단비하가 지척에 이르렀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
다.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암중으로는 전신 내
공을 끌어올려 언제라도 반격할 차비를 갖추었다.
단비하, 이놈이 청성에 나타나다니 그럼 무산파의 다른 놈들도
부근 어딘가에 있다는 말이 성립된다. 약한 놈들은 결코 흩어
지지 않으니까.
지금 당자인은 두 가지 큰 착각을 했다. 약한 자들이라 말한
사람들중에 단비하처럼 혼자 행동하려는 사람도 있고 무산파파
와 사망산검은 당자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약한 자들이 아니란
것을...
단비하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당자인의 바로 옆
자리,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그동안 배운 게 좀 있나 보지?"
"아버님의 마지막...알고 싶다?"
"아버님? 아! 그 대장장이 늙은이! 그놈의 죽음이 그렇게 궁금
한가? 그걸 알고 싶다면 먼저 무릎을 끓어라, 귀속칠가의 무지
렁이가 주인을 대하는 예의는 갖춰야지."
당자인은 한 손으로 술잔을 잡고 빙글빙글 돌리면서 여유롭게
웃었다. 그가 아는 단비하는 자신의 일초지적(一招之敵)도 안
되었다.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마위에 올려진 생선이나
다름없었다.
"자인...제안을 하겠다. 지금 당장 아버님의 마지막을 공손하
게 말해라. 그러면 편안하게 죽여 주겠다."
"뭐? 푸하하하핫...!"
당자인은 입 속으로 흘러들던 술을 힘껏 내뿜었다. 배꼽이 뒤
집혀도 서너 번은 뒤집힐 일. 한 살 먹은 어린아이도 제 처지
는 아는 법인데 이런 놈은 천하 영약으로도 구제하지 못할 놈
이다. 그러나,
"허억!"
당자인은 급히 헛바람을 들이키며 검을 뽑아들었다. 갑자기 코
피가 쏟아지고 흉부가 팽만해지며 목에는 무엇에 떠받쳐 막히
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점들은 전신에 걸쳐 일어나는
마비와 경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엇! 주공!"
조문덕은 언제 술을 마셨냐 싶게 탁자를 뒤집어 버리고 당자인
을 끌어안았다.
단비하는 벌써 뒤로 주르륵 물러나 있었고 같이 온 계집은 검
을 뽑아들고 노려보는 중이었다. 조문덕은 그들을 공격하기보
다 당자인의 심상치 않은 상세가 더 급했다.
"괘, 괜찮...품속에 단약...홍색..."
조문덕은 급히 당자인의 품속에서 십여 봉에 이르는 약봉지들
을 꺼내 들었다. 그 중에는 엄지손가락만한 금갑(金匣)도 있었
다. 작았지만 겉면에 새겨진 전갈 문양이 너무도 생생하여 금
방이라도 꼬리를 치켜 올릴 것 같았다.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금갑이 열려지고 심신을 상쾌하게 하는 향
기가 풍겨 나왔다.
"수보리심단(修菩羸心丹)!"
단비하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어찌 모르
겠는가? 수보리심단의 효능을...저 단약을 개발하기 위해 무려
오십여종의 독을 복용해야 했다. 진독과 엉터리 해약을 복용하
기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고통에 몸
부림쳤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수보리심단은 신경독의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었다. 당문 만채
실과 독제실의 합작품. 당문은 어이없게도 해약에 불교의 오상
(五相) 개념을 담았다.
행자가 초발심(初發心)으로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 닦아 익히
는 다섯 단계의 수련 방법을 해약의 이름으로 정한 것이다.
중원 각지에서 약초를 채집하는 만채실 전인원이 실장 만초신
의 당중화의 영도하에 연구한 통달보리심단(通達菩羸心丹).
독제실장 당운담이 주관한 수보최심단(修菩羸心丹). 독을 연마
하는 제사실 수독실(修毒室)에서 실전적인 방법을 고려하여 제
조한 성금강심단(成金剛心丹).
그중에서 성공한 것은 수보리심단밖에 없었다.
만채실이나 수독실에는 진독에 실험용 해약을 복용하고 버릴
만한 강인한 근골이 없었던 것도 실패한 원인 중 하나였다.
수보리심단 제조에 성공했다고 무한대로 만들어 낼 수는 없었
다. 워낙 희귀한 약재들이 섞인 까닭으로 단 네 알밖에 만들어
내지 못했다.
당문의 무가지보(無價之寶)인 수보리심단, 그것이 당자인의 손
에 있을 줄이야.
"끄르륵...!"
백짓장처럼 안색이 하얗게 변한 당자인은 괴로운 듯 인상을 구
기며 가래 끓는 소리를 토해 냈다. 하지만 그의 혈색이 점차
제 색깔로 돌아오는 것으로 보아 수보리심단이 효능을 나타내
는 모양이었다.
"타앗!"
날카로운 소성이 터지며 갈홍아의 신형이 번뜩였다. 그녀의 손
에 들린 보검은 짧은 호선을 그리며 조문덕의 목덜미를 쳐갔
다.
"이런! 개년놈들..."
조문덕은 걸쭉한 목소리로 욕을 쏟아내며 철부를 휘둘렀다.
아! 하늘이라도 쪼갤 듯한 기세...과연 사망산검의 검공을 가
로 막을 만한 부공(斧功). 강맹함, 날카로움, 쾌속함...모든
것이 완숙한 경칙로 접어들었다.
그에 비하니 갈홍아의 무공은 태양앞에 반딧불이었다. 염라사
자 앞에서 갓난아이가 장난감을 들고 까부는 것 같았다.
쉬익! 쉬이익...!
연이어지는 부법. 갈홍아는 선공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번갯
불처럼 쏟아지는 철부를 피하기에 급급했다. 절묘한 신법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위험하다...'
단비하는 손에 낀 흑수투를 흘끗 바라보았다.
청성까지 오는 동안 열일곱 번에 걸쳐 공격해 오던 복면인들이
끼던 장갑. 장심 쪽에 조그만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고 피수투
안쪽으로 조그만 실이 연결되어 엄지손가락에 걸치게끔 만들어
졌다.
독을 주머니에 넣고 주먹을 오므리고 있다가 활짝 펴기만 하면
폭죽 터지듯 터져 나간 독분이 방원 이 장을 휩쓴다. 당문의
조독기보다 빠르지만 중독 범위에는 약간 못 미치는 흑수투,
하지만 당자인을 중독시킬 때처럼 근거리에서 살포하기에는 더
없이 적합했다.
품속에서 사심독과 섬백단을 혼합하여 만들어 낸 구음독(九陰
毒)을 끄집어 냈다. 단비하 역시 당자인이 해독하고 나면 상대
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았다. 흑수투가 있었고, 당자인이 방
심했기에 쉽게 중독시킬 수 있었지만 그가 경계를 하고 있었다
면...
구천에서 떠도는 아버지의 영흔을 위로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 놓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허억!"
단비하는 뜨끔하는 아픔과 함께 전신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복면인...전에 만났던 복면인들과는 다른 청색 북면을 쓴 괴인
이 보였다. 나타나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마혈이 짚히도
록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전신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복면인은 초절정 고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단비하의
눈은 활활 타올랐다. 두꺼운 복면 너머에 있는 얼굴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휘익!
복면인의 신형이 갈홍아와 조문덕의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갈홍아의 완맥을 거머잡고 뒤로 물러서면서 일수를 내저어 바
위라도 으깨버릴 것 같은 철부를 가볍게 밀쳐 냈다.
무림제일의 금나수(擒拿手)라는 소림의 금룡십이수(金龍十二
手)나,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여 천하제일의 강맹함도 물리친다
는 무당의 면장(綿掌)이라 한들 이보다 절묘하지는 않을 것이
다.
신법도 놀라웠다. 새처럼 날렵하면서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힘을 전혀 쓰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굳이 비교하자면 사망산검과 겨룰 때 옷깃을
스치고 지나간 검날같다고나 할까?
"어엇!"
"웬 놈이냐?"
각기 다른 음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갈홍아는 그렇다치고
사망산검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조문덕조차도 복면인이 등장
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듯했다.
"그대의 주공 같은데...지금은 길보다 흉이 많은 것 같지 않
나?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어떨까?"
복면인은 변성(變聲)으로 말했지만 쉰 듯한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나이가 제법 든 사람이었다.
"죽일놈...누구든 앞을 가로...엇!"
철부를 높이 치켜 들며 고리눈을 뜨던 조문덕은 느닷없이 신형
을 날리는 복면인을 보며 경악성을 토해 냈다. 그가 따라가기
에는 너무도 빠른 신법. 한 손에는 갈홍아, 다른 손으로는 단
비하를 움켜쥐고도 그만한 신법을 전개할수 있다면 고수도 보
통고수가 아니었다.
"조문덕...돌...아가자."
철부를 힘없이 축 늘어뜨리고 멍하니 서 있던 조문덕은 당자인
이 간신히 몰아내는 저미한 음성을 듣고 화들짝 제 정신이 들
었다.
"주공! 몸은 괜찮으신지?"
"괜찮아...단비하를...다음에 만나면 이유...불문하고 죽여
라."
약간 홍색으로 물든 당자인의 얼굴에 진한 노기가 배어나왔다.
조문덕 또한 꾸물거릴 상태가 아니었다. 선천적인 강골인지라
억지로 참고는 있었지만 단비하가 터뜨린 독에 중독된 상태였
다. 그것이 갈홍아와의 접전으로 인해 급속하게 퍼져 가고 있
었다.
눈을 뜬 조문덕은 제일 먼저 객사의 천장을 바라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주군을 들쳐 업고 치
달렸는데...다행히 일행이 묵고 있는 객사에 당도했다는 안도
감이었다.
입 속에서 달고 상큼한 맛도 느껴졌다. 단비하 그 쥐새끼 같은
놈이 전개한 독의 해약임에 틀림없을 테고 해약을 복용시킨 사
람은 다름 아닌 주군이리라.
"끙!"
몸을 일으키자 머릿속에서 동종이 울린 듯 굉음이 울리면서 현
기증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눈에 초점이 뚜렷이 잡혔을 때 보인 사람은 당자인이
아닌 당철휘였다. 무수히도 구박하고 천대하던 놈, 그런 놈이
걱정스런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놈이 여긴 뭐 하러 와 있느냐?"
"움직이지 마라. 아직 여독이 남아 있으니, 함부로 움직인다면
정말 몇 달간 요양을 하계 될 거야."
당철휘는 조문덕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시건방진 놈...주공은?"
조문덕에게 당철휘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의 반
말을 용납하는 건 주공 당자인과 친척이라는 이유 때문. 당문
이 무서워서도 아니고 당철휘의 지위를 인정해서도 아니며, 그
의 인품에 호감을 가져서는 더 더욱 아니었다.
"한연지와 중대사를 의논하고 있으니 곧 올 거야. 그럼 정신을
차렸으니 나는 이만 가봐야겠군."
당철휘는 침통과 단약들이 들어 있는 가죽주머니를 들고 일어
섰다. 그러고 보니 해약을복 용시킨 것도 그였던 성싶었다.
조문덕은 당철휘의 꼴이 보기 싫어 눈을 감고 누워 버렸다.
은혜를 입었으니 뭐라 한마디 정도는 해야 옳았지만 이런 유
(類)의 인간에게는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주군의 상세가 심상치 않은 모양이지?"
조문덕은 당자인의 상세를 염려했다. 주루에서 나올 적에는 분
명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는데...
결국 누워 있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띵하고 울렸지
만 주공의 상세를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호호호! 첫나들이치고는 너무 심하군요."
한연지는 기진맥진한 당자인을 바라보며 곱게 눈웃음을 흘렸
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거한 조문덕은 객사(客舍)로
돌아오기 무섭게 주저앉고 말았다. 문지방에 걸린 듯 쿵 하고
쓰러지더니 움직일 줄 몰랐다. 평소 그렇게나 냉대하던 당철휘
가 적시에 손을 쓰지 않았다면 벌써 염라대왕과 대면하고 있을
그였다.
그에 비하면 당자인의 상태는 양호했다. 독에 중독된 듯 안색
이 파리했지만 회복되는 중인지 정신이 또렷했다. 당자인은 당
철휘의 치료를 거칠게 뿌리치고 의자에 몸을 푹 파묻은 채 거
친 호흡을 내뱉었다.
"약속대로 관현을 헤집고 다녔다. 그런데 나타나리라는 청성파
놈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단비하가 나타났어. 후욱! 어떻
게 된 거냐?"
당자인은 숨쉬기가 곤란한 듯 몹시 급박한 호흡을 토해 냈다.
"호호호! 청성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오늘까지는 괜찮
겠지만 내일부터 이 객사에서 함부로 움직이다 가는 죽음을 면
치 못해요. 보실래요?"
말을 마친 한연지는 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호(窓戶)를 활
짝 열었다. 일행이 머문 객사가 이층인지라 길 쪽은 보이지 않
았지만 맞은 편 건물의 열린 창호를 통해서 청성파 도장들의
모습이 언뜻 비쳐졌다. 창호가 갑작스레 열릴지 몰랐던 듯 당
혹해 하는 모습도...
"저들은 당신이 들어서기 전부터 저곳에 자리잡았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 동태를 감시하고 있어요. 예측대로라면 오늘밤
시비가 벌어질 거예요."
"훅! 후욱! 그 말은...우리의 정체가 일찍이 발각되었다는 말
같은데 맞나?"
"맞아요. 관현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는 청성의 감시를 받았어
요. 같은 이치 아닌가요? 만약 성도(成都)에 청성 도장들이 들
어섰다면 당문이 가만있었을까요? 모르킨 몰라도 그림자 두엇
쯤은 붙였을 거예요. 물론 그런 일은 우리 후위대의 몫이지
만."
"그, 그런데...후욱! 숨이 차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군.
빌어먹을! 그런데 나보고 당문 무복을 입고 주루에 들어가라고
했던 이유는 뭔가? 네 말대로라면 가만있어도 일은 벌어질 텐
데."
"확실한 의도를 알고 싶었어요. 삼절은 띄어난 사람. 그가 어
디까지 알고 있고, 무슨 행동을 취하려는지...그건 간단히 알
수 있죠. 비슷하면서도 간단한 상황을 만들어 주고 반응을 살
펴보면 짐작되니까요."
"그럼 나를 미끼로 썼다는 말이 되는군."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아무나 미끼가 될 수는 없으니까
요. 적어도 당신 정도는 되어야지. 당신과 청성오수에 버금가
는 조문덕이 같이 간다면 위험은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후후후! 후욱...! 이제 조금 괜찮아지는군. 그래 삼절의 의도
는 파악했나?"
"물론이에요."
"그 쥐새끼의 의도가 뭔가?"
한연지는 의자에서 일어서 창가로 걸어갔다. 벌써 시월에 접어
든 날씨는 차갑게 다가왔다. 성도(成都)는 넓은 분지(盆地)로
양호한 기후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 축복받은 땅이었다. 사시사
철 습기가 많기는 했지만...하지만 이곳은 산자락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저녁 공기가 무척 차가웠다.
앞섶을 약간 풀어헤친 한연지는 차가운 밤공기를 마음껏 들이
켰다. 일거수일투족에 요염함이 물씬 풍겨 나왔다. 당문에 있
을 때, 정확히 말하면 그녀에게 주눅들어 무슨 일이건 그저 고
개를 끄덕일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그녀만의 염색(艶色)이었
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당자인은 곧 이성을 냉정히 회복하고 한연
지의 뒷말을 기다렸다.
"아까 말했죠? 오늘밤은 괜찮지만 내일이 되면 한 발자국도 움
직이지 못할 거라고...오늘밤이 고비예요. 이제는 반대로 그들
이 시비를 걸어올 거예요. 아주 지능적으로...하지만 마주치면
안 돼요. 만약 시비에 응한다면 청성 전력이 우리를 칠 거예
요."
한연지의 말을 들은 당자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청성 전력이 쳐오다니, 그렇다면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막다
른 궁지에 몰린 쥐새끼 꼴이다. 그렇다면 지략이고 귀계고 다
필요없다. 일치 단결된 힘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활로를 뚫어야
한다.
"끙!"
당자인은 몸을 추스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는 한연지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자신을 사지로 내몬 행동은 괘씸하지만
그런 행동 때문에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는 한연지. 그녀의 지
략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어지는 한연지의 말을 듣고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소 마음이 놓이는지 편안한 신색으로.
"우리는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요. 어떠한 시비를
걸어오더라도 말이죠. 수하에게는 당신이 따로 명령하세요. 제
가 말했는데 개차반보듯 하더군요. 하지만 단비하 그놈이 청성
에 나타났다는 것은 아무래도 개운치 않군요. 혹 제갈문이라
면...맞아요. 단비하가 청성에 나타날수 있었던 것은 무산파의
제갈문이라는 자가 귀뜸해 줬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 사람이
왜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한연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교태스러운 모습, 볼에 움푹 패이는 앙증스런 볼우물, 왈각
껴안고 싶은 욕념이 당자인의 전신을 휘돌았다.
'당철휘와 사연이 있다 이거지 당철휘...그놈을 죽여야해.'
"이상할 것은 아무것도 없소. 조문덕만 하더라도 사망산검과
엇비슷한 무공을 지녔지만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세상
에는 흙 속에 묻힌 진주가 꽤 많은 법이오. 한연지, 그대처
럼."
당자인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다만 이 여인을 꼭
차지하고 말겠다는 집념과 당철휘를 죽이고 말겠다는 살념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생사지경에서 헤매는 조문덕에 대한 염려
도 수하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있다는 것도 까마득히 잊어버렸
다. 당자인의 가장 뛰어난 능력인 영도력에 금이 가고 있는 현
상이었다. 그때,
째째짹! 째짹! 째째짹! 째짹!
느닷없이 밤새 우는 소리가 연속 두번 들려 왔다.
"이제는 가봐야죠? 수하들이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한연지가 말을 던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마치 밤새 소리를 신
호삼아 말을 시작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당자인은 단비하에게
당했다는 충격과 육신의 끊임없는 잔고통, 한연지의 교태로운
몸짓에 정신이 팔려 그런 점을 간과하고 말았다.
"알았소."
맑고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목소리였
다.
"당신의 조문덕 참 대단하더군요. 어디서 그런 수하를 거뒀어
요?"
"운이 좋았지. 거저 주운거나 진배없어."
"그랬군요. 대단한 사람을 거뒀어요. 무공만으로 논하자면 우
리 중 제일일 거예요. 하지만..."
"하지만?"
"사람이 너무 단순해요. 무공이 높지만 단순한 자는 쉽게 죽을
수 있죠. 그런 자를 부리려면 신중해야 될 거예요."
"제 앞가림 정도는 할수 있는 사람이야."
당자인은 탁자를 붙잡고 몸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말했다.
"왜 그가 당신의 수하가 되었을까요?"
"나와 의기(義氣)가 맞았기 때문이지."
"의기요? 호호호! 요즘 세상에도 의기란 게 다 있다니 대단하
군요. 이것 보세요, 세상에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단 세
가지밖에 없어요. 황금으로 움직이든가, 명예욕을 자극하든가,
아니면 권력을 주는 거죠. 사람은 무언가 얻어먹을 게 있어야
달라붙어요. 의기요? 호호호!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하세요. 나중에 뒤통수 얻어 맞으면 꽤나 아플 테니까."
"그는 의심할 필요가 없어. 나 대신 지옥불에라도 뛰어들 사람
이야."
한연지는 당자인이 몸을 일으키고도 나가지 않고 말대꾸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나가야 할지 계속 말을 들어야
할지 종잡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호호호! 세상에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고 했어요. 지금 내가 당신의 마음을 모르고, 당신이 나의 마
음을 모르듯이...시험을 해보세요. 손해볼건 없잖아요?"
"좋은 계책이라도 있나?"
당자인은 복부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한연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조문덕을 확실히 잡아 둘 필요성이 느껴졌다.
지금 시점에서 그가 떠난다면 전력(戰力)에 막대한 손실이 초
래되고 당문을 떠나올 적의 비참함을 다시 겪어야 한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아까 말했잖아요. 황금, 명예, 권력 이거면 충분하죠."
"알았어. 참고로 하지. 끄응!"
당자인이 물러가자 한연지는 동경 앞에 앉아 분갑을 열었다.
저녁 화장, 당문에 있을 때는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습관처럼
몸에배어 하루라도 거르는 날에는 무언가 빼먹은 듯 허전했다.
찬물에 적신 면수건으로 얼굴을 두드리듯 닦아 냈다. 그 다음
마른 수건으로 누르듯이 닫을때.
똑!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 왔다.
"들어오세요."
한연지는 누군지 아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하던 화장을 계
속했다.
"당자인이 쉽게 넘어갔군. 제법 똑똑한 줄 알았는데."
"계략은 쓸 시기를 잘 선별해야 돼요. 심리전(心理戰)이죠. 상
대의 마음이나 환경을 잘 알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난 계략이라
도 실패해요. 하지만 시기를 정확히 안다면 간단한 계략도 치
명적인 타격을 주죠."
"그렇군. 그런데, 그가 이런 상태가 될 줄 어찌 알았지?"
한연지는 얼굴을 다 닦은 다른 수건을 동경 옆에 내려놓으며
당철휘를 바라봤다. 그 얼굴에는 한심하다는 비웃음이 서려 있
었다. 당철휘에게는 이제 만성이 되어 버린 얼굴 표정.
"나는 신이 아니에요. 그가 어떤 심리 상태인지 알 게 뭐예요?
내가 원하는 심리 상태가 되도록 일을 꾸며야죠. 그게 머리가
뛰어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에요."
한연지는 얼굴에 분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백분(白粉)보
다는 산단(山丹:백합꽃의 붉은 수술)으로 만든 색분(色粉)을
애용했다.
밤화장은 낮화장보다 조금 어두운 색을 발라야 한다. 귀 뒤,
턱, 머리칼선, 목 등 잘 보이지 않는 곳도 빼놓지 않고 세심하
게 발라 갔다.
"연지가 아니면 할수없는 일이야."
"정말 한심한 말만 골라 하는군요.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이
모래알처럼 널려 있어요. 가까이에는 무산파의 제갈문, 청성파
의 삼절, 당문의 문주 그리고 우리가 멍청하다고 놀려댔던 단
비하도 뛰어난 지략을 갖줬어요. 먼 훗날 제 말을 되새겨 보면
알게 될 거예요."
한연지는 잇꽃으로 만든 연지를 이마와 뺨, 입술에 발랐다.
기루에있는 여인들에게서나 볼수 있는 짙은 화장이었지만 전혀
천박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화장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 색을 조심스럽게 사용했다. 한가지 색보다 같은 계통의
색을 혼합하여 본인만의 색을 만들었다. 그것은 냉정한 심상
(心象)을 풍기는 한연지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둘째, 다른 여인들과 틀린 점은 얼굴에 그늘을 만드는 것. 들
어갈 곳은 들어가게 나올 곳은 나오게 만들어 평평한 얼굴 형
태를 바꿨다. 그런 화장법은 지루함을 없애고 개성을 더욱 뚜
렷하게 부각시켰다.
셋째는 조화였다.
객사, 주루, 산야...어디서나 그곳에 어울리는 화장을 했다.
입고있는 의복의 색깔이나 귀걸이 목걸이의 분위기와도 어울리
는 화장법. 얼굴이 따로 붙은 듯한 화장, 아름다움과 동떨어진
가면 같은 화장은 절대 아니었다.
"이제는 나가 주시겠어요? 피곤하군요."
"그, 그러지."
얼굴에 흥분한 표정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눈빛은 여전히 흔들
렸다.
'아직은 멀었어. 더 커야해. 더...'
단비하에게, 당자인에게 당한 모욕이 이만큼 성장시켰지만 만
족할 수 없었다. 내심은 살심으로 부글부글 타올라도 겉으로는
웃으며 술잔을 마주할 수 있는 인물,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아무리 둘러봐도 당
철휘밖에 없었다.
약간은 성취를 이룬 셈이다. 당자인이나 조문덕이 그의 웃음에
넘어 갔으니까.
당자인은 객사 아래층에서 반가운 얼굴로 맞이하는 수하들을
보고 적이 안심했다. 소파산에서 각고의 수련을 한 일당백의
용사들, 자신의 말이라면 목숨 걸고 이행할 충성스런 수하들이
었다.
"오늘 안으로 청성파에서 시비를 걸어올 게다. 어떠한 모욕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참아야 한다. 우리는 그저 관현을 통과
하는 나그네, 그 정도로 인식하고 행동해라."
"알겠습니다."
우렁찬 외침이 객사안을 쩌렁 울렸다.
"될 수 있는 한 부딪치지 않는 게 좋겠지. 오늘은 일찍들 들어
가서 문고리를 잠그고 휴식을 취하도록."
"알겠습니다."
"이만 해산!"
육십여 명의 수하들은 당자인의 명을 받들어 일사불란하게 객
방으로 들어갔다.
당자인은 맨 후미로 뒤따라 들어가는 조문덕을 불러 세웠다.
"몸은 좀 어떠냐?"
"호랑이라도 때려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고생되더라도 조금만 참아라. 당문에 복귀
하는 즉시 부대주 자리를 알선해 주마. 먼 훗날 내가 장문직에
오른다면 너는 대북방 부방주의 권리를 그대로 되찾게 될 거
야, 그때는 우리들의 세상이 되겠지. 신나는 일 아닌가?"
당자인은 한연지의 충고를 거울삼아 희망을 제시했다. 이런 말
은 조문덕을 결에 확실히 붙잡아 둘 수 있는 미끼였고 손해될
것도 없었다.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그렇게 할 작정이기도 했
다. 많은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조문덕처럼 타고난 신력을 지
난 사람도, 충성스러운 사람도 본 적이 없었다.
"감읍할 따름..."
조문덕은 감격에 겨웠는지 목이 메여 말을 끝내지 못했다.
"가지고 나온 말굽은이 몇 냥이나 남았는가?"
"스물두냥 올시다."
"그중에서 열 냥은 자네가 가지게."
"열 냥이라면 큰돈인데 저에게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문덕은 선뜻 받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불쾌한 듯 인상까지
찌푸렸다. 말투도 퉁명스럽게 변했다.
'연지의 말이 맞단 말인가? 문덕 너만은 믿었는데...'
말굽은 열 냥이 적단 말인가? 그돈이면 없는 가족이 일 년 동
안 편히 생활할 수 있는데 새삼스럽게 조문덕의 욕심을 발견한
것 같아 씁쓸했다. 수하의 진의를 파악한 것은 좋았지만 커다
란 실망감은 무엇으로도 메꿀수 없었다.
"네가 수고한 대가로 하지. 그 동안 은자 한푼 변변히 주지 않
았잖은가? 소파산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몇 냥 보내 주고..."
"알겠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당자인은 깊게 허리를 숙이는 조문덕을 본 체도 않고 등을 돌
렸다. 역시 한연지의 말은 언제나 틀림없었다.
조문덕은 쇠고기 볶음 요리를 벌써 육 인분이나 해치웠다.
가난하고 배운 것은 없었지만 근심 걱정없이 살아 가던 산중
생활 그러고 보니 아내 얼굴 본 지도 오래됐다.
주공이 치료해 준 덕에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 안심이 되지만
그래도 혹 다른일은 없는지 허겁지겁 볶음 요리를 먹던 조문덕
은 그릇이 비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동안 빈그릇을 향해
부지런히 수저를놀렸던 것이다.
"이봐! 여기 아무거나 가져 와! 나 돈 있단 말야? 알아? 나 돈
있다고? 사람 무시하지 말란 말야. 야! 빨리 안 가져 와!"
괜히 점소이들에게 성질을 부려 보았지만 울적한 마음은 풀어
지지 않았다. 말굽은 열 냥? 가족에게도 몇 냥을 보내 줘? 가
족의 안위를 염려했다면 험한 강호로 뛰어들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주공을 믿고 천하를 질타하고 싶었는데...
"하하하하하...!"
앙천 광소가 터져 나왔다.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점소이가
급히 만든 닭고기 요리를 가져 왔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웃음
만 터뜨렸다.
하지만 눈꼬리에서는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룩 흘러내렸다.
- 세상에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단 셋 가지빡에 없어요.
황금으로 움직이든가, 명예욕을 자극하든가, 아니면 권력을 주
는 거죠. 사람은 무언가 얻어먹을 게 있어야 달라붙어요.
'이런 주군이 아니었어. 이런 주군이...'
아내를 치료할때 그의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그때 그의 눈
에는 진정 수하를 아끼는 의기가 있었다. 천보채현에서 당보권
을 치료할때도 밤을 꼬박 지새웠다. 가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것이 진정이었는데...
주공을 찾아 어지러운 몸을 이끌고 가던 중 주공의 음성을 들
었다. 여우 같은 한연지의 방에서 반가운 마음에 방문을 열려
는 순간 들려 온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수하를 의심하다니, 자
신을 의심하다니...
"떠날때가 되었어..."
극히 저미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입 속으로 찝찔한 눈물이 흩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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