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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당자인은 목함 속에 들어 있는 사람 머리를 보며 얼굴색이 하
얗게 탈색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되살아났다. 당문주 당
기룡과 본의 아닌 접전을 벌일 때 느꼈던 공포.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였다. 칼날위에 사는
인생이라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죽음이 가까이 있을수록 공포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매번 적을 대하면서 느꼈던 짜릿한 전율, 이번에는 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상대의 심장에 검을 쑤셔 박을 때 느껴지
는 감촉, 부릅뜬 눈이 절망에 물드는 과정...
쇄석부법은 절기라 할 수 없었다. 강호에 이름이 알려진 명숙
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무공이었다. 그런데 조문덕은
그런 무공으로 사망산검과 버금가는 무공을 쌓았다. 초식보다
수련이 앞선 결과였다.
만약 초절정 비기를 전수 받았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강해졌
을까? 그건 장담할 수 없었다. 초절정 비기들은 그만큼 난해했
고 수련하기 힘들었으니까.
'조문덕이 죽었어...조문덕이...'
그 누가 뭐라 해도 살점이 베어지는 아픔이 절절이 스며들었
다. 그만큼 정을 준 사람이었는데...
그러나 인간적인 정리는 빨리 지울 수밖에 없었다. 조문덕을
벤 사람 적수광인이 차분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물밀듯이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절감했기 때문에...
당자인은 고개를 돌려 한연지를 바라보았다. 무의식중에 돌려
진 눈길이었다. 어찌하면 좋을지...한연지만은 방법을 알고 있
을텐데.
"조문덕은 청성문도를 살해했다.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다면 무림 동도들의 비웃음을 사겠지. 무릎을 꿇고 사죄해
라. 그러면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
일양자라 신분을 밝힌 도인의 눈빛은 치가 떨릴 만큼 싸늘했
다. 누명이었다. 조문덕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단
언할 수 있었다. 절대로 청성문도를 해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일양자가 헛된 소리를 할리도 없고, 청성파가 누명을 쒸울리도
없을텐데...
당자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막 대꾸를 하려는 순간.
"말학 후배 한연지가 노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한연지가 가볍게 포권지례를 취하며 끼여들었다. 그녀는 어느
새 말쑥한 경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분까지 살짝 바
른 모습, 밤새 잠을 자지 않았거나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음이
분명했다.
"네가 한연지? 말은 많이 들었다."
"소녀를 알아주시다니 고맙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
씀드리지요. 무릎 꿇고 사죄하라는 말씀은 너무하시는군요. 일
의 진의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답답하군요. 진상을 말해
줄 조문덕은 죽어 버렸으니..."
일양자는 한연지의 말을 듣고 더욱 눈을 가늘게 떴다.
"건...방진 것! 네가 감히 나를 의심한다는 게냐?"
"그럴 리가 있겠어요? 대청성파 장로님을...하지만 저희 입장
도 생각해 주세요. 조문덕은 당자인 부대주를 떠났어요. 그런
데 갑자기 목이 잘려 돌아왔어요. 저희가 무슨 사과를 드려야
되죠?"
이유있는 항변이었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어감에 따라서 듣
는 사람의 기분이 좌우되는 법. 냉랭하고 싸늘했으며 약간의
비웃음도 담겨있어 자연히 부아가 치밀었다.
"개의 잘못은 주인에게 있는 법이다."
"집 나간 개는 주인이 없어요.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라도 내
집에 온 손님의 잘못은 덮어 주는데...더욱이 조문덕은 당자인
부대주를 떠난 사람...선배님은 후배들을 너무 핍박하시는군
요."
한연지의 말을 듣는 당문도들은 속이 다 후련했다.
서로간에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고 개인적으로는 아무 원한도
없지만 같은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원수. 회색 도복과 전갈문
양이 새겨진 당문 무복만 아니라면 술잔을 기울일 수도 있는
사람들. 지금은 적이었다. 적을 궁지로 몰아넣은 한연지의 말
솜씨는 유창했다. 눈이 점점 작아지는 일양자를 보면서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당자인은 곱게 빗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한연지의 뒤
통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싸움을 하자는 건가 말리자는 건
가. 더욱이 말 끝마다 당자인, 당자인...조문덕이 당자인의 수
하라는 것을 재삼재사 확인시켜 주는 말투...그런 도전적인 말
투를 듣고 곱게 물러설 일양자가 아님을 잘 알 텐데.
과연 일양자는 말 대신 검을 뽑아들었다. 극히 느린 동작으
로...또 한번 삼절 진인의 예측이 맞아들었다.
한연지의 도발적인 발언을 듣는 순간 울컥 분노가 치솟았다.
선배를 능멸하려 들다니 이미 치욕스런 행동은 망각되었고 우
선 제압해서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절 진인은 이런 점을 노리고 일양자를 추천한것이다.
"호호호! 저희 중에는선배님의 일검을 맞받을 만한 사람이 없
어요. 검은 집어 넣으시지요."
이번에는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재롱이라도 부리듯이 사근거리
는 목소리였다. 진작 이런 말투를 사용했다면 일양자의 성미를
건드리지 않았을 텐데.
"네가 나를 모욕하는 게냐? 실로 건방지구나. 무림 명숙을 눈
에 두지 않다니, 내 오늘 따끔한 맛을 보여 주지 않으면 사람
이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란 것은 잘 아시잖아요? 휴우..."
한연지는 갑자기 처연한 한숨을 몰아쉬었다.
"선배님께서 이렇듯 몰아붙이시니 어쩔 수 없군요. 사과를 드
릴게요. 하지만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우
선 조문덕과 청성의 청운 도인이 어떤 경위로 싸움을 벌였고
어떻게 진행돼서 조문덕만 죽었는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아는 조문덕은 부공의 달인이거든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청운 도인 정도로는 죽일 수 없는 사람이라서..."
한연지는 말을 중도에서 끊고 당자인을 돌아보았다.
"사과를 드리세요. 일의 잘잘못은 나중에 문주님을 통해서 파
악해도 늦지 않아요."
한연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말했다.
당자인은 기가 막혔다. 무를을 꿇고 사죄를 올리라니, 그런 행
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서 하는 소린가. 당문의 차기 문
주는 아직 미정. 당씨 직계혈족 세 명 중 한 사람이 차지하리
라. 만약 다른 문파의 장로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경력이 있
다면...아무리 똑똑한 후계자라 할지라도 버릴 수밖에 없으리
라. 더욱이 삼절 진인을 죽이러 왔다가 오히려 사죄를 해야 된
다면...
"한연지..."
당자인은 이를 부드득 갈며 한연지를 노려보았다. 빙지설화?
흥! 차라리 독장미라는 편이 어울렸다.
'어쩐다...'
지금은 한연지의 말따위에 연연할 계제가 아니었다. 화살은 쏘
아졌다. 사죄를 하느냐 아니면 검을 들고 싸우다 죽느냐를 선
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한연지라고 했나? 말은 청산유수로군. 우선 너의 사과부터 받
아야겠다. 감히 선배를 능멸하다니."
일양자는 검을 비스듬히 내려뜨리고 저미한 음성을 흘려 냈다.
표정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고 눈동자는 더욱 차게
굳어졌다.
'검을 전개할 기세다.'
허투루 볼 성질이 아니었다. 일양자는 검을 전개할 것이고 그
대상은 육십여 명, 애써서 기른 자신의 수하가 될 것이다. 허
망했다. 그 누구라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겨우 청성오
수 중 한 명도 상대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니, 당문주가 그만한
세력을 갖추고도 청성이나 아미파를 칠 수 없었던 이유를 깨달
았다.
하지만 방금 일양자가 한 말은 한줄기 구원의 빛이나 다름없었
다.
한연지...빙지설화, 무음무영...그녀는 절대 무릎을 꿇지 않으
리라. 그런 행동을 한다면 차후 어떻게 낯을 들고 무림에 입지
(立志) 할 수 있을까? 무인이 무릎을 꿇었다는 소문이 무림에
퍼진다면...일양자의 말은 있을수도, 해서도 안될 억지였다.
"선배님, 먼저 청운 도인의 상처를 보고 싶군요."
"건방진 것..."
"조문덕은 철부를 무기로 사용했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
만 청운 도인은 조문덕의 상대가 되지 않아요. 또한 그의 성격
상 싸움을 하면 머리를 반쪽으로 갈라 깨끗이 끝장을 내지 귀
때기 하나 자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이상한
구석이 많군요. 사과는 상처를 보고 난 후에 하도록 하죠."
"청운!"
일양자는 고함을 빽 질렀다. 결코 도인이랄 수 없는 폭급한 성
정을 담고...그의 성격은 종잡을 수 없었다. 수십 년 동안 도
를 닦은 도인답게 느긋한 곳이 있는 반면에 시중 잡배들처럼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청운은 붕대를 풀어 핏자국이 얼룩진 빨간 속살을 드러냈다.
'놀라운 검공!'
한연지는 눈을 부릅떴다.
조문덕을 죽일 만한 사람은 흔치 않다. 더욱이 목을 잘라내는
솜씨는 너무 깨끗했다. 살결의 이지러짐이나 비틀림이 전혀 없
이 단 일 검에 베어 냈으니까.
청운의 귀를 자른 솜씨도 그와 흡사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으되 어깨에는 전혀 상처가 없었다. 그게
가능할까? 조문덕의 철부에는 만근 거력이 담겨 있는데...굳이
귀 한쪽을 잘라내고 부를 거둘 이유가 없는데.
한연지는 귓불마저 깨끗이 절단된 빨간 속살에 눈을 고정시켰
다. 병기를 알아 낼 수 없었다. 마치 거친 흉기로 잘라 낸 듯
우들투둘했기에...만약 검흔(劍痕)이라면...보는 사람으로 하
여금 전의를 상실케 하는 검공이었다.
한연지는 안색을 평정하고 고개를 돌려 일양자를 직시했다.
"소녀 무례하게 나섰습니다. 부디 용서를..."
당자인은 얼굴색이 헬쑥하게 변했다. 조문덕이 청성 도인을 상
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말.
'주루에 갈적만 하더라도 조문덕은 충성스러웠다. 그렇군...그
에게 하사한 은자 열 냥...후후후! 한연지, 너의 음모였군. 나
를 준일 작정이었어. 무서운 계집...'
당자인은 삶을 포기했다. 사천 왕거미에 걸려든 나방 신세. 움
직일수록 끈끈하게 달라붙는 거미줄에 걸린 이상 피할 곳은 없
었다.
'좋아. 마음은 홀가분해졌어.'
당자인은 한연지에 대한 미련도 버렸다. 기회가 생긴다면 제일
먼저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은 계집...그녀의 애정을 바랄 수
도 없었고 바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휘이익...!
처연하게 느껴지는 긴 휘파람 소리. 신호음인가? 당자인의 수
하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당문에서부터 따라 나온 열
여섯 명도 포함해서.
"미쳤어요? 당신은 일양자의 일검도 받지 못해요. 어쩌려고 이
렇게 무모한 짓을..."
"닥쳐!"
당자인은 매서운 눈길로 한연지를 쏘아보며 단호한 일갈을 내
질렀다. 그녀의 입기에 떠오른 노골적인 웃음. 이렇지는 않았
는데...혈반사접을 잡으러 당철휘와 함께 떠날 적만 하더라도
이렇게 독하지는 않았는데 떠나기 전날 제일실 만채실장의 거
처에서 나눈 이야기는 뭐란 말인가. 그때는 분명 자신을 염려
해 줬고, 걱정스런 눈길을 보냈었는데.
'당철휘, 이놈이 무슨 짓을...당철휘?'
당철휘가 보이지 않았다. 이만큼 떠들썩하니 얼굴이라도 비칠
만도 한데 코끝도 내밀지 않고 있다. 당자인은 깊은 절망감이
온몸을 휘감는 충격에 몸을 휘청거렸다.
"한연지...네가 선택한 사람은..."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곱게 떠올린 웃음 그거면 충분했
다.
"여기 온 목적은?"
이번에도 한연지는 고운 웃음을 지었다. 잘 익은 능금처럼 도
홧빛으로 물든 얼굴, 볼우물을 함박 피워 내며 짓는 웃음...
"그럼 나만 죽어 주면 되겠군."
"부탁이 하나 있어요. 저는 살고 싶거든요. 최선을 다해 주세
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일양자의 손에서 벗어나려면...당신이
최선을 다해 준다면 최소한 그의 발목을 붙들 수 있을 거예
요."
"뭐? 와하하하핫!"
당자인은 처절한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쉬릭! 쉬이익! 참! 차창...!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객사를 뒤흔들었다.
"으악!"
"으아악!"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도 끊이지 않고 새어나왔다.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당자인은 피를 토하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파산에서 온갖 고통을 이겨 내며 닦은 무예들...인간의 한계
를 거쳐 왔다고 생각했던 수하들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아직도
일양자는 검을 비스듬히 내려뜨린 채 요지부동으로 문가를 지
키고 서 있는데, 수하들은 절반 이상이 유명을 달리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전멸이다.'
생각은 곧바로 행동을 불러 왔다. 소맷자락에서 조독기를 꺼내
듬과 동시에 타악! 탁! 날카로운 음향이 좁은 공간을 울렸다.
"피햇! 독이다!"
일양자의 다급한 외침, 그러나 후위대 부대주는 그냥 얻은 것
이 아니었다.
"커억!"
"크으윽!"
머리에 붕대를 어설프게 감고 한쪽에 멀뚱히 서 있던 청운 도
인이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청상, 청호, 청하...청 자배 도
인들이 무더기로 주저앉았다. 그들은 실벌레처럼 몸을 꿈틀거
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이런... 때려 죽일 놈!"
제자의 완맥을 거머쥐고 진맥을 하던 일양자의 도포는 바람도
없는데 부르르 떨렸다.
"무슨 독을 썼느냐?"
찰나간에 찾아온 죽음. 당문 십독이라 일컴는 절독이 아니고는
불가능했다.
"자포독이라고 들어 보셨소?"
당자인은 말을 하면서 조독기를 새것으로 바꿨다. 전신은 솜털
까지 긴장했고, 눈동자는 얼마나 크게 부릅떴는지 흰자위 밖에
보이지 않았다, 단 한번의 격돌 그것이 남았다.
"자...포독! 좋아."
무엇이 좋은가? 일양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나 곧바로 한
연지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한연지라 했나? 가서 당문주에게 전해라. 당문에서 축출된 놈
이 자포독으로 청성문도를 살해했다. 앞으로 당문은 자포독을
사용새서는 안 된다. 만약 경고를 어기고 무림에 자포독이 나
타난다면 연판장을 돌려 무림공적으로 만들겠다. 똑바로 전해
라."
한연지는 곧바로 포권지례를 올렸다. 이런 상황이 발생할 줄
미리 알았다는 듯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한마디도 어김없이 그대로 아뢰지요."
"가봐!"
"그럼 소녀는..."
다시 한 번 포권지례를 올리는가 싶었는데 한연지의 신형은 어
느새 허공 중에 걸렸다.
쉬이!
그녀가 일으킨 경풍이 뒤늦게 혈향을 흩뜨렸다.
"네놈은 가장 비참하게 죽을 게다. 특별히 네놈에게는 청운적
하검법을 견식시켜 주지. 잘 들어라. 청운적하검법은 모두 팔
초로 이루어졌다. 각 초마다 다섯 개에서 일곱 개의 식이 내포
되어 변화가 무궁하다. 그런 만큼 청운적하검법에 걸려들면 전
신이 넝마조각처럼 갈가리 찢겨져 죽는다. 너를 그렇게 죽여
주마."
일양자는 검을 수평으로 들어올렸다.
"그런 고명한 검법을 견식시켜 주겠다니 영광이오."
왼손에 한 개, 오른손에 두 개, 조독기 세 개를 한꺼번에 사용
해 본적은 없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방법일지라도 모조리 동원
해야 했다.
설혹 그렇게 해도 살수 있는 방도는 만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파앗!
일양자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은 순간 당자인은 조독기의
단추를 힘껏 눌렀다. 오른손의 조독기 두 개는 중앙과 오른쪽
으로 왼손의 조독기는 가장 왼쪽으로...절독을 피할곳은 허공
뿐 당자인은 언젠가 단비하가 자신에게 절독을 살포했던 방법
을 그대로 활용했다. 당시 등골이 서늘할 만큼 놀랐으니까.
쉬이익...!
"아!"
당자인은 절망에 가득 찬 탄식을 토해 냈다.
허공으로 솟구친 신형, 물샐틈없이 조여 오는 검기. 혹시나 했
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일양자는 역시 무림 초절정고수
중 일인이었다. 그때,
우직끈! 파악!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인영이 뛰어내리며 붉은색
이 감도는 독분을 뿌려 냈다.
"헉!"
경악에 찬 탄성이 터지며 일양자는 급히 뒤로 훌쩍 물러섰다.
천하의 초절정고수도 급작스럽게 날아온 독분을 마주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헉!"
당자인도 놀람에 가득찬 헛바람을 쏟아냈다.
자르르 마비되어 오는 전신,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 세상이 빙
글도는 어지럼증...괴인이 터뜨린 독분에 중독된 현상이었다.
"왜 나까지...?"
당자인은 눈을 부릅뜨고 나타난 인영을 보려 했다. 하지만 벌
써 흐릿해진 동공에 비친 것은 희뿌연 세상뿐이었다.
"당문 십절..."
당자인은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촉망간에 보았지만 괴인의
독술은 상당히 고명했다. 허공에서 독분을 터뜨렸음에도 불구
하고 일양자에게 집중적으로 흩날릴 수 있다는 것은...조독기
를 사용하지 않고 고형질로 된 독단도 아닌 독분을 한 사람에
게만! 당문 십절이 아니면 불가능한 독술이었다.
"음...! 뭣들 하고 있는 게냐? 한놈도 살려 두지 마라!"
일양자는 제자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아무도 보이지 않는 허공
너머를 바라봤다. 유유히 나타났다. 유유히 사라진 단비하...
그에 대한 인상을 결코 지울수 없었다.
"당자인은 부친의 원수 내 손으로 죽여야 마땅합니다."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단비하였다. 무도심창의 말마따나 경
시해서는 안 될 놈이었다.
"건방진 놈! 여기가 네 집 정원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모양
인데 지금이라도 물러선다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자인에세 알아볼 것도 있고...그럼 이
만 물러가겠습니다."
단비하는 당자인의 허리를 잡아올리며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이놈! 주공을 내려놓아라!"
당자인을 추종하던 무리들은 황급히 단비하를 에워쌌다. 도대
체 누가 적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 그러나 단비하가 적인
것만은 분명했다. 사망산검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모래주머니처
럼 두들겨 팬 놈이니까.
'후후후! 너희들에게도 갚을 게 있지."
단비하의 남은 한손을 품속에 깊게 찔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이 빠져 나올 때 종류를 알 수 없는 무서운 독이 허공에 살
포된다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목숨으로 주공을 지켜...헉!"
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힘껏 검을 움켜쥐고 있던 장한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것도 잠깐, 곧 코에서 검은
피를 주르륵 흘리더니 힘없이 무너졌다.
"독! 허억!"
"크윽!"
단비하를 에워쌌던 여섯 명은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황천
길로 직행했다. 단비하가 살포한 독의 성분은 당문 십독의 자
리를 차지한 자포독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약하지는 않았다.
청운, 청상등 자포독에 당한 도인들은 피부빛이 청동색으로 물
들었을 뿐 별다른 증상은 없었다. 하지만 단비하에게 당한 무
인들은 이미 절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몸을 꿈틀거렸
다.
사자(死者)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축 작용이 무척 빨리
진행된다는 증거였다.
"사악한 놈..."
일양자는 노기를 참지 못하고 검을 들었다.
이번 일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문의 조무래기를
치기위해서 자신이 나선다는 것이, 아니 그런 것은 고사하고
애제자 청운의 귀를 잘라야 한다는 데는 동조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청성이 이렇게 약해졌는가. 약해진 정도가 아니라 추
잡한 짓거리.
물론 대의명분은 있었다. 삼절 진인이 하는 일은 언제나 명분
이 뚜렷했으니까. 귀속칠가 사람들은 당문도들이지만 어찌 보
면 희생 양에 불과했다. 그들이 노예나 진배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림에 널리 알려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들을 벨수는 없지 않은가. 가능하다면 아미파처럼 혈기있는
젊은이들에게 후원을 해줘,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는
게 일거양득 아닌가. 명문정파로서의 위상을 드높이고 당문 세
력을 삭감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우선 청성파는 가볍게 건드릴 수 없다는 점을 일깨워 줘야 한
다. 그러면 귀속칠가는 사기가 고양될 테고 당문은 성도를 벗
어나지 못한다.
청운은 대의를 위하여 목숨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을 것이다.
청성이 이유없이 당문을 칠 수는 없는 일. 청운의 결단을 물어
보자, 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사부가 원하는데 거절할 제자가
어디 있을까, 귀를 자르면서 한 팔이 절단되는 아픔을 느꼈다.
해를 당한다는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으려고 칠십이로 파검식
을 펼쳐 눈을 현혹시켰다. 못난 사부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렇게 마음을 아프게 만들던 제자가 차디찬 시신으로 드러누
웠다. 그런 놈을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게 할 수는 없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목을 베어 내야 한다.
일양자는 전신 진기를 한 자루 검에 담았다.
어차피 죽일 놈들이었지만 죽어서도 몸부림치는 모습이 너무
잔인했기에 방심할 수가 없었다. 무도심창도 봉을 꺼내 들 만
한 시간이 없었다고 했지 않은가.
단비하는 흥분이 싸하게 스쳐 지나는 것을 느꼈다.
검을 마주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무림의 대선배...자신이 터득
한 독술과 천하절공. 청성의 검공과 부딪쳐 보고 싶은 무인으
로서의 욕망. 하지만 지금은 한가롭게 무예를 논할 계제가 아
니었다.
"선배님의 가르침은 후일 꼭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독분을 마구 뿌렸다. 이럴 작정으로 충
분히 준비해 둔 독분. 당문에서 몸으로 체험한 각종 독들과 단
가 비전, 그리고 무산파파의 독공을 참조로 하여 스스로 만들
어 낸 독 이름을 대조독(大調毒)이라 지었다. 대조독에 비하면
사심독과 섬백단을 썩어 만든 독은 어린아이 장난이었다.
"물러섯!"
일갈을 내지른 일양자는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순간 코끝으로 스며드는 비릿한 독향(毒香).
"으음...!"
일양자는 제자리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황급히 운기
하여 몸안에 스며든 독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 흡기(吸氣)의 방법은 하나이나 호기(呼氣)에는 육통(六通)이
있으니 취(吹), 호(呼), 희(口希), 가(呵), 허(噓), 히(口四)
라 한다. 취(吹)는 풍(風)을 없애고, 호(呼)는 열을, 희(口希)
는 번민을 없애며, 가(呵)는 기를 내리고, 허(噓)는 맞혀 있는
것을 분산시키며, 히(口四)는 고통을 완화시켜 준다. 육통의
방법으로 진기를 이끌면 병인(病因)이 몸에 침범하는 일이 없
으며, 설혹 침해한다 할지라도 장부에 도달하기 전에 완치시킬
수 있다. 구규(九竅:눈, 코, 입, 귀의 칠혈과 음부, 항문)를
폐쇄시켜서는 안되며...
조령신공의 요상편에 수록된 구결들이 시전되었다.
파아앗...!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지만 일양자는 몸에 스며든 독기가 전
신 모공을 통해 안개처럼 스물스물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천하절독일것 같던 단비하의 독공도 조령신공 앞에서는 잠시
시간을 벌어 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 * *
당철휘는 익숙치 않은 산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마른 나뭇가지가 밟히며 내는 소리는 천둥 소리처럼 크게 들렸
고 그럴 때마다 등골에서 솟는 식은 땀을 어쩌지 못했다.
'연지의 생각이 맞아야 하는데...'
문주에 버금가는 지략을 소유한 여자는 오늘 새벽 당자인의 죽
음을 예고했다. 적어도 청성오수 중 한 명이 올 터이고 조문덕
을 잃은 당자인은 변변히 대항도 못해 보고 죽을 거라고...
산으로 오르란 소리는 명령과 다름없었다. 상전이 수하에게 말
하듯 냉정하고 단호한 말투였다. 애정이 있였다고는 도저히 생
각할수 없는 명령.
왜 거부하지 못했을까? 당당한 독제실의 부대주가, 차기 문주
를 노리고 있는 야심이...무엇이 부족하다고 그녀의 한마디에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슬그머니 물러서고 말았을까?
"삼절 진인을 죽일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는 오늘뿐이에요.
그것도 당사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필패(必敗)...알려지지
는 않았지만 삼절은 청성오수에 버금가는 무서운 고수예요."
요악했다. 눈에서 파르스름한 귀광이 번득이는 듯 했다.
"그 동안 숨죽이며 길러 온 실력을 보겠어요. 더 이상 나에게
배울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제부터는 스스로 움직일 차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저는 당신을...버릴 거예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말...하지만 이번에는 진짜였다.
만일 삼절을 죽이지 못한다면 한연지는 자신을 정말 버릴 것이
다. 그 다음은...당자인을 죽음의 사슬에 옭아매듯 칼날을 돌
리리라.
'삼절...너는 죽어야겠다.'
당철휘는 한연지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일에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처럼 생각되었
다. 혼자서는 도저히 문주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
다. 만약 그녀가 도와준다면...세상에서 가장 덜떨어진 바보,
멍청이라도 문주가 될 텐데.
'음...!'
상청궁을 멀리 돌아 후면에 이르자 산정 위에 조그만 정자가
보였다. 탈속한 기품으로 학이 노닐 듯한 선경 속에 자리잡은
정자. 과연 한연지의 생각이 맞아떨어질까?
수백 개의 돌계단이 까마득히 펼쳐져 있었지만 당절휘는 수림
을 헤치며 산정으로 기어올랐다.
- 청성은 도문이예요.무예를 연마하는 것도 도를 깨우치기 위
한 일종의 공부죠. 때문에 소란스러움을 극히 싫어해서 경비도
눈에 보이지 않죠. 사람이 없다고 계단을 밟아 올라가다간 절
반도 가지 못해 첨성문도들에게 진퇴가 막힐 거예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잡복을 헤치고 가세요.
한연지의 말이 귓전에서 욍욍거렸다.
그러나 말이 쉽지 근 백여 장의 거리를 그것도 수직에 가까운
험로를 헤치며 나아간다는 것은 무척 고역스런 일이었다.
호응정이란 편액을 본 것은 해가 중천에 뜬 정오 무립이었다.
꼬박 열다섯 시진 동안 산을 오른 셈. 평소 다섯 시진이면 충
분한 거리라는 것을 감안하면 무척 느린 행보였다.
'저 사람이 삼절...'
회색 도복을 입고 화선지에 붓을 놀리는 사람.
당철휘는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은신했다. 삼절 진인의 맞은
편에 바늘같이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 내는 도인이 좌정해 있어
함부로 나설수가 없었다. 설혹 그렇지 않더라도 삼절 진인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걸 만한 배짱이 그에게는 없었다.
"미청(眉淸), 안수(眼秀), 순홍(脣紅), 치백(齒白)...사형 말
마따나 사내를 정신없게 만드는 계획이었소."
"허허허! 자네는 공부를 게을리했군. 그 나이를 먹도록 험한
말을 쓰다니...쯧쯧! 이럴 때는 사내의 사랑을 받기에 족한 여
인이라고 하는 걸세."
"사형 말대로 그계집은 놓아 주었습니다."
"수고했구먼."
"범상치 않은 계집이었습니다. 여인이라고는 하나 눈에서 발산
되는 총명은...살려 두기가 께름직했습니다."
"나중에 알 날이 있을거네. 그여인을 왜 살려 두라고 했는지."
"그리고 당자인 그놈을 놓쳤으니 천려일실이 되지는 않을
지..."
"그다지 염려하지 않아도 되네. 단비하가 나포해 갔다면 필히
죽을 것 아닌가? 살부지원수(殺父之怨讐)이니...그보다는 단비
하의 독술이 그토록 무섭던가?"
"젊은 날 호승심을 이기지 못해 검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상대는 현 당문 독제실장인 무독천살 당운담. 당운담은 칠십이
로파검식에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습니다. 한치만 더 힘을 줬어
도 심장을 가를 수 있었는데...저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지요.
당운담이 전개한 독에 중독되었고 조령신공도 숙달된 상태가
아니었으니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마침 사부님이 나타나
지 않았더라면...휴우! 어쨌든 당시의 당운담보다는 훨씬 고명
한 솜씨였습니다."
"허허허! 자네도 그렇고 조양도 그렇고 단비하란 젊은이를 만
나기만하면 입에 침이 마르지를 않으니...허허허!"
"죄송합니다."
"아니야, 청성오수 중 두사람이 중독을 당했었다면 우연이 아
닐세. 방심으로 돌릴 수도 없는 문제고...실력이 없다면 그렇
게 할 수 없지. 조만간 내가 만나 봐야겠군."
붓을 놀리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죽였어야 했어...'
당자인은 청성파의 손에 죽어야 한다. 그래서 복면을 쓰고 단
비하의 손에서 구했는데 다시 잡혀 가고 말았다. 무도심창이
일설하던 단비하...사내답게 각진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놈을 만나서 뭐 하시려고...?"
"세상에 쓸모없는 물건은 없는 법일세. 나무뿌리, 돌멩이 하나
도 다 나름대로 효용 가치가 있지. 그토록 독술이 뛰어난 젊은
이라면 크게 쓰일 날이 있을거야."
쓰일 날? 그런 날은 없을 것이다. 그런 놈은 죽이는 것이 상책
이었다. 하지만 일양자 앞에서 본심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당철휘는 삼절과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의 정체를 파악했다.
일양자였다. 당자인의 잔당을 말끔히 청소하고 돌아와 삼절과
한담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세 가지 사실을 알았다.
한연지의 예측은 옳았다. 청성오수 중 누가 올지 모르지만 자
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대담한 발상이.
하나는 틀렸다. 당자인이 죽지 않고 단비하에게 나포되었다.
곧 죽을 놈이라고는 하지만 현장에서 죽지 않은 것은 한연지의
생각에 빈틈이 생겼다는 증거였다. 듣자하니 삼절도 그 부분은
예측하지 못한 듯...그렇다면 단비하란 존재는 두 모사의 중대
한 변수였다.
마지막은 아버지의 가슴에 난 검흔. 당시 부친은 근 이년여 동
안 상처를 치료했다고 말했다. 언젠가 반드시 그놈을 죽이겠다
는 말과 함께.
'"그럼 저는 이만..."
"수고하셨네."
당철휘는 전신의 모든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가슴을 가른 사람의 사형과 일척건곤의 승부를 결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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