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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비가 온 다음이어선지 주루는 을씨년스러웠다. 기온도 많이 내
려갔다.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뜨뜻한 곳이 절로 그리웠다.
갈홍아는 주루에 들어서기 무섭게 죽엽청(竹葉靑)을 시켰다.
그리고 말릴 틈도 주지 않고 무섭게 들이켰다. 원래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지 않은가, 술을 배운지는 얼마 되지 않았
지만 뱃속을 후끈 달아 올리는 독주는 의지할 곳 없는 그녀의
심중에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적당히 마셔."
갈홍아는 술병에서 입을 떼고 단비하를 쳐다보았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이제 이놈도 잡았으니까 빨리 당철휘 그
개놈이나 잡아줘."
속에서는 눈물이 솟구치는데 입에서는 악담이 흘러나왔다.
왜 이럴까? 단비하만 보면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이 느껴졌다.
괜히 투정부리고 싶고, 막말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단비하는
묵묵히 그 모든 투정을 받아주었다.
"눈깔 돌리지 못해?"
갈홍이는 당자인의 눈길을 의식하는 순간 비윗장이 확 틀어졌
다. 단비하의 만류만 아니었다면 벌써 눈알을 뽑아 버렸을 텐
데. 당자인의 눈은 당철휘의 눈을 닮았다. 딴전을 피우며 슬금
슬금 쳐다보는 것에서부터 빨갛게 충혈된 욕정까지.
"빨리 먹고 객사를 정하자. 귀하신 부대주가 땅바닥을 뒹굴면
안되니까."
단비하는 튀긴 돼지고기를 집어먹으며 싱긋 웃었다.
"너도 먹어 둬라. 고통을 참으려면 체력부터 키워 놓아야지."
당자인은 단비하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접시에 머
리를 박고 우걱우걱 씹어먹기 시작했다.
'오냐, 실컷 조롱해라. 언젠가 네놈 목줄을 거머쥘 날이 올 것
이다. 그때는...그때는 살점을 오독오독 씹어 주지.'
하루에 두 번씩 다가오는 고통은 참을 수 없었다. 부지불식간
에 다가오는 고통이라면 그래도 다행일 텐데, 이놈의 고통은
꼭 열두 시진마다 찾아왔다. 아플 시간을 미리 안다는 심리적
인 압박감은 무척 심했다. 고문도 모르면 담담하고 알면 무서
우니까.
뼈마디가 뒤틀리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 그 순간은 정
말 죽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지금 머리를 칭칭 감고 있는
붕대도 죽을 작정으로 담벽에 머리를 박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면 삶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해졌다. 당
문으로 돌아간다면...당문 십절에 포함된 아버지라면 무엇인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텐데.
"어떻게 당씨들은 한결같이 개 같은 놈들만 있지?"
갈홍아의 비웃음이 귓전을 스쳐 갔다.
"크으윽...!"
당자인은 입에 두툼한 헝겊을 베어물고 고통을 참으려고 노력
했다. 헝겊이라도 물지 않으면 이빨이 전부 으스러질 것 같았
다. 실제로 처음 고통이 찾아왔을때 이빨 두대가 깨져 버렸다.
빗속에서...
부지런히 달려 십 리 정도는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나 기뻤던
지...하지만 곧바로 다가온 아픔은 필설로 형용할수 없었다.
첫 번째 아픔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시진 뒤에 찾아온
아픔은 도저히 참을수 없었다. 고통은 발작 횟수를 거듭할수록
심해졌다.
그때 알았다. 단비하가 왜 도망가도록 내버려 뒀는지...
자신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원인을 파악할 수 없는 고통.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독을 복용한 것은 분명한 것 같고...
그 때문에 내력도 상실했을 게다. 자신도 독에 관해서라면 모
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간 차를 두고
발작시키는 내력을 소진시키는 독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
다. 산공독(散功毒)이 있기는 하지만 일시적인 것, 이렇게 장
기간 공력을 무산시킬 수는 없었다. 해약을...치사하지만 해약
을 구걸해야 했다.
해약을 복용하고 난 다음부터는 발작 시간이 길어졌다.
한 시진에서 열두 시진으로...그러나 뼛골이 으스러지는 고통
은 전과 똑 같았다. 지금 당하는 고통처럼...
"제법 뼈대가 있군."
"크으윽...!"
"이제 나흘이라...그럼 네게 복용시킨 것이 무엇인지 말해 주
지."
당자인은 귀가 번쩍 뜨였다.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해법을 찾
기가 용이했다.
"그저 되는대로 칠미단(七味丹)이란 이름을 붙였어. 듣기에 어
때?"
"빌어먹을 새끼...크으윽!"
"당시 혼절한 상태인지라 맛을 느끼지는 못했을 테지만 어떤
음식에 섞어도 알아차릴 수 없지. 신 음식에 섞으면 신맛이,
단 음식에 넣으면 단맛이 나는 단환. 시고, 쓰고, 달고, 짜고,
매운맛 외에도 두가지를 더했지,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무미
(無味), 청량한 맛이 나는 청미(淸味), 무슨 말인 줄 아나? 세
상 어떤 음식에 섞어도 중독시킬 수 있는 독을 개발했다는 말
이야. 바로 독제실에서 그렇게도 만들려고 애썼던..."
당자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리 독제실에서 비밀리에 진행한다해도 같은 문중인 이상
조금의 윤곽은 잡기 마련, 독제실장이 이런 독단을 만들기 위
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가를 잘 안다. 하지만 십 년 넘게 노력
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해야만 했던 단환, 정말 단비하가 그런
독단을 만들어 냈단 말인가? 그렇다면 세상 그 어떤 사람일지
라도 마음만 먹으면...
무영지독도 맛을내지 않는다. 당문주 외에는 만져 본 사람이
없는 독이니 성능을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완벽한 무미지독
(無味之毒)을 만들라고 하명한 것으로 보아 약간의 맛은 나는
모양이었다. 그런 독을 이런 멍청이가 만들어 내다니.
'아! 그렇다고 너무 놀랄 것은 없어. 진짜는 지금부터니까.
먼저 효능부터 설명해 주지 칠미단은 오장육부에 작용하지 않
는다. 몸에 침투하는 즉시 뼈를 찾아가지. 뼈에 찰싹 달라붙어
서 야금야금 파먹어, 종국에는 뼈에 구멍이 생기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어 있어."
"크으윽! 마, 말도 안돼. 그런 건...크윽! 살아 있는 충류(蟲
類)나 가능..."
"호오! 충을 아나? 놀랍군. 아니지, 당문에 있을 적에 나도 충
을 많이 먹어 봤으니까 놀랄 일은 아니지. 맞았어, 칠미단은
바로 충 덩어리야. 자라는 모양이 우산같아서 산충(傘蟲)이라
부르는..."
당자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송알송알
솟구쳤다. 산충의 지독함을 무엇으로 말할까? 산충을 체내로
투여할 수만 있다면...불가능했다. 물에 약한 산충이었다. 피
에 닿으면 침투하기 전에 녹아버리고, 구강(口腔)으로 투여하
면 장으로 내려가기도 전에 위장에서 죽어 버렸다. 무슨수
로...도대체 무슨 방법을 썼단 말인가.
분명한 것은 만약 산충을 복용했다면 내공이 소멸된 것은 당연
했다. 산충은 제일 먼저 정기를 빨아먹으니 기해혈에 내력이
생성될 틈이 없었으리라. 체내로 투여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대붕파를 치러 갔을 적에 계시(啓示)를 받았지. 시험삼아 산
충을 배양해 봤는데 성공하더군. 문제는 하독이었는데 너무 간
단하게 풀렸어. 소 오줌을 발효시켜 만든 부란약(腐蘭藥)에다
가 오화주(五花酒)를 섞었지 어때? 알고 보니 너무 간단하지
않나?"
당자인은 흐릿한 눈을 들어 단비하를 노려보았다. 체내에서 일
어나던 고통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상태였다.
부란약...물욕이 없는 스님들도 몸이 아픈 경우가 있고, 그럴
때면 귀한 약재 역시 물욕이라하여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볼품
없는 약을 사용했다. 그것이 부란약.
오화주는 피부병을 치료하는 데 쓰는 술로 사천 사람들은 누구
나 알고 있는 흔한 술이었다. 도화(桃花) 감국화(甘菊花), 지
마화(芝麻花), 마란화(馬蘭花), 산두견화(山杜鵑花)를 맑은 청
주(淸酒) 다섯 되와 함께 항아리에 넣고 밀봉시켜 일 개월간
저장하면 향긋한 맛을 내는 술이 된다.
이 두가지를 혼합하면...정말 산충이 배양되기 적합한 약재가
만들어지는가?
"그, 그럼...해약은...?"
"해약이 아냐. 나는 너 같은 놈을 살려 주고 싶은 마음이 눈곱
만치도 없어. 하지만 가만 내버려두면 하루가 지나지 않아 죽
고 말지. 그래서 다시 칠미단을 복용시킨 거야. 이독제독(以毒
制毒). 하지만 동종(同種)의 독이라..."
단비하는 말끝을 흐렸다.
"흐...흐흐흐...푸하하핫...!"
당자인은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다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그래서 나흘을 기다렸군. 지독한 놈..."
"인명을 가볍게 생각하는 네놈들에 비하면 별것 아냐. 나 역시
별다를 게 없는 인간이거든. 밟으면 꿈틀할 줄 아는 인간."
허공에서 눈과눈이 불똥을 튀겼다.
단비하의 말이 사실이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스스로 죽지도
못한다.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기력...산충이 체내에 가득 퍼
져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가 되간다는 예고였다.
"편히 죽여 주겠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너도
보답을 할것이 있을 텐데?"
"마, 만약 내가 죽기 싫다면...살려 달라고 애원한다면..."
"미안하다. 칠미단을 만들기는 쉬웠는데, 해약은 연구하지 못
했어. 그건 당문도 마찬가지일 거야."
"결국...결국 이렇게 죽어야 되는 거야. 안 돼...안 돼! 나는
죽을 수 없어. 죽기는 정말 싫어. 억울하단 말야. 너무 억울
해...흑흑흑...사, 살려 줘. 단비하, 네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을 테니까 살려 줘."
웃다 울고, 울다 웃는 당자인이 측은해 보였다. 조금 전까지
복수에 불타던 광망은 온데간데 없고, 수많은 수하들에게 몰매
를 명령하던 위풍당당함도 사라졌다. 죽음 앞에 서면 이렇게
비굴해지는 걸까?
단비하는 동감할수 없었다.
자신처럼 죽음 앞에 많이 서 본 사람이 있을까? 잠자리에 드는
순간이면 오늘도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
오던 시절. 그때는 세상을 전혀 모르는 철부지였는데도 이렇지
는 않았다.
무공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강자들이 쫓아오고, 독으로 상대될
것 같지 않은 독인들에게 쫓겨도 비굴하게 살 생각은 없었다.
당문 차기 문주를 노린 당자인. 당철휘와 한연지에게 모욕을
주던 당자인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스르릉...!
허리에 찬 검이 끌러져 나왔다.
이름도 잊어버린 주막에서 홍분을 살포하여 노인을 죽인 다음
목숨을 위협받을 당시 곽알현에서 은자 두 냥을 주고 샀던 철
검. 사람 목숨을 빼앗기 위해 뽑아들기는 처음이었다.
"안 돼...죽고 싶지 않아. 정말...죽이지만 말아 줘. 당문...
당문에 가면...치료할 수 있을 거야. 모두...모두 말해 줄게.
대협, 제발...모, 모든 것이 문주의 계략...귀속삼가가 반가
...반기를 든 것은 사실이지만...세 세력은 약했어. 문주가 모
두 죽이라고...명령..."
당자인은 몸이 점점 뻣뻣해지는지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은
채 힘없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푸, 품속에...단추강을 죽인...뇌마향...엄가지검...너,너에
게 줄게. 목숨만..."
'다시는 칠미단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는...'
쉬익!
"컥!"
비명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칠미단을 복용한 이상 죽음밖에 찾아올 것이 없었다. 그냥 두
면 하루, 계속 칠미단을 복용시키면 나흘 동안 산충의 발호를
막을수 있었다. 그 다음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가되어
버린다.
전신 뼈마디 구석구석까지 퍼진 산충이 갉아먹는 고통은 견딜
수 없을 것이고 뼈가 상하고 있으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당
연한 일.
심장을 정확히 두조각으로 가른 철검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크르륵...!"
당자인은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몸을 몇 번 움찔거리더니 눈
을 까뒤집고 고개를 떨꿨다.
"갑자기 네가 무서워졌어. 너 참 지독한 놈이야."
문가에 기대 선 갈홍아가 혀 꼬부라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만취 상태. 술을 먹었다 하면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셔댔지
만 왠지 심상치 않은 기분에 올라와 봤는데...
손에 들고 있던 술단지를 기울여 독주를 쏟아 부었다. 입으로
들어가는 양보다 얼굴을 적시는 양이 훨씬 많았다. 그래도 좋
았다. 얼굴을 적시는 차디찬 술 기운이 활활타는 마음을 식혀
주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거센 막말이 튀어나왔다.
언젠가는 당자인을 죽이리라 생각은 했지만 하필이면 칠미단일
줄이야. 빌어먹을! 얼어죽을 칠미단. 방법이 너무 잔인해 보였
다. 복수란 이런 것일까? 원수를 죽이면 통쾌한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단비하가 미워 보이니, 당철휘를 죽이면 이렇
게 가슴이 뻥 뚫린 듯 허전해질까?
단비하는 피 묻은 철검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와 갈홍아의 손에서 술단지를 빼앗아 들었다.
"야! 너..."
갈홍아는 버럭 소리를 지르다 말고 숨을 삼켰다.
흘러내리지는 않았지만 눈가에 반짝였던 물기.
'울고 있어. 사내 자식이 눈물은...'
단비하는 벌컥벌컥 숨도쉬지 않고 술을마셨다.
'그래, 마셔...네가 그랬잖아. 마음이 울적하면 술을 마시라
구. 오늘은 실컷 마셔. 바보같이...'
더없이 강해 보이던 사내가 마음으로 우는 눈물은 더욱 진했
다. 아버지를 해한 원수를 죽였다는 기쁨의 눈물, 너무 잔인하
게 죽였다는 회한의 눈물, 단비하는 어떤 눈물올 흘리고 있을
까.
갈홍아는 안타까움에 젖은 눈길로 단비하를 바라보았다.
'너는 강한 사내야. 하지만 무림과는 맞지 않아. 복수가 끝나
면 은거해서 조용히 살아. 네 마음대로 편하게...'
* * *
< 독제실 부대주 당철휘 보고(報告).
삼절 진인 암살 성공.
후위대 부대주 당자인, 단비하에게 피납.
한연지 부대주와 조우(遭遇)하였으며 당문으로 귀향 중. >
< 급보(急報).
숭저현(崇佇縣) 선인객잔(仙人客殘)에서 당자인 부대주의 시신
발견. 직접적인 사인(死因)은 심장을 가른 검상. 사망하기 전
고문을 받은 듯 독에 중독된 증상이 뚜렷함. 하지만 무슨 독인
지 판별할 길이 없음. 시신은 마차로 호송 중. >
< 후위대(後衛隊) 정찰(偵察) 칠조(七組) 보고(報告).
단비하의 종적 묘연. 신법은 뛰어나지 않지만 변장에 능함.
목적지는 당문으로 추측됨. >
< 후위대(後衛隊) 정찰(偵察) 오조(五組) 보고(報告).
一. 행방 불명되었던 제갈문, 무산 정봉에 모습을 드러냄.
二. 아미파 고공(高空) 대사(大師), 제자 십 명과 함께 무산에
도착. 다섯 번째 지원금을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확신함.
三. 무산파의 세력이 급성장하고 있음. 무산파에 몸담았던 문
도 백삼십여 명 외에 새로 가입한 문도만도 구십여 명에
이름. 문도 규합의 총책은 제갈문임. 속히 제거 요망.
四. 무산을 에워쌌던 복면인들이 사라졌음. 무산을 중심으로
반경 칠십 리 안에서는 행적을 찾을 수 없음. >
후위대주는 날아온 전서 중에서 주요 보고 사항을 간추렸다.
그는 손을 잘게 떨면서 원독에 사무친 붉은 눈동자를 번뜩였
다.
'단비하...네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작고 단단한 몸이 분노로 떨렸다.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당영지가 살아 있을 때는 그저 당문 십
절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별로 기대하지 않던 자식이었
지만, 그가 죽고 문주의 밀명을 받으면서 제발 성장해 주기를
바랬다.
자식은 역시 당가의 핏줄이었다. 온상에서 자란 화초였을 적에
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더니 폭풍이 몰아치는 광야에 내놓자
성난 사자의 위용을 드러냈다.
혹시나 염려스러워 이십 명의 문도에게 뒤따르라고 지시했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했다. 조문덕이라고 들
었는데 부공이 뛰어나다는 사람, 그런 사람을 거둘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공은 또 어떤가? 자신이 직접 전수해 준 구룡십팔변은 변화
난측하고 늘 품에 지니고 다니는 뇌마향은 막기가 무척 어렵지
않은가. 그런 자식이 죽이라는 삼절 진인은 죽이지 못하고 오
히려 일양자란 놈에게 기습을 당하고 당문에서 천대받던 단비
하란 놈에게 끌려가 죽음을 당하다니...
"문주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문밖에서 냉막한 음성이 들려 오자 후위대주는 상념에서 깨어
났다.
"자인이가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야."
"무림이란 불민한 자를 살려 두지 않습니다. 누구를 원망하겠
습니까? 못나서 죽은 겁니다."
당잠청은 집무실에서 보였던 격동의 빛을 감줬다. 아무리 가까
운 사이일지라도 인간적인 약점을 보여서 좋을게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평생을 지켜 온 신조였다.
"대주는 다 좋은데 너무 강직 한것이 탈이야. 자인이 죽었다면
당연히 슬퍼야 마땅하거늘...대주에게 미안한 말을 해야겠네."
"말씀하시지요."
"자인이를 곱게 보내는 것이 도리이지만..."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문규(門規)를 지키겠습니다. 자인이가 오는대로 독제실로..."
목이 메어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하나뿐인 자식,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게 만들다니. 당문도
가 독에 중독되어 죽는다는 것은 비참한 죽음이었다. 독이 지
독해서가 아니라 그후의 일 때문에.
객지에서 독에 중독되어 죽은 문도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문으로 호송되었다. 그리고 독제실로 보내졌다. 천하에 산재
한 모든 독을 알아야 한다는 문규를 지키기 위해서.
시신은 해부되고 중독시킨 독뿐아니라 독제실에서 만든 새로운
독의 시험 재료로 쓰일 것이다. 독제실장이 신경을 써준다면
그런 일은 면할 수 있겠지만 호송되어 온 시신치고 그의 마수
를 벗어난 문도는 없었다.
"문주.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듣지 않겠네."
"문주! 이야기나 들어 보시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네. 단비하를 죽이러 떠나겠다는 게 아
닌가? 그럴 필요 없네. 내 대주에게 약속하지만 단비하 그놈을
한 달 안에 잡아다 주겠네. 그놈 명줄은 대주가 직접 끊게. 되
었나?"
"문주...!"
후위대주 당잠청은 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문주의 입
은 굳게 닫혀졌다. 자신이 당문 밖으로 나가는 것은 절대 반대
할 것이다.
영려해서가 아니라 불신 때문에. 만약 일원 유명원주 염라독객
당치대가 당영지의 복수를 하고자 한다면? 승낙할 것이다.
그는, 유명원주 염라독객은 문주의 분신이니까.
당잠청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러났다.
만초신의 당중화는 말리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
았다. 문주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문파를 벗어난다면 윗사람을
능멸한 죄로 모든 직위를 잃게 된다. 하지만 자식의 복수를 하
겠다는데 어찌 말리겠는가.
"꼭 가야하는가? 자인이의 얼굴이나 보고 떠나지."
"가슴만 아플 뿐이야. 독제실에서 갈가리 찢길 것을 생각하
면..."
이해할 수 있었다. 유달리 사이가 좋지 않은 독제실장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내버려둘 리 없었다. 그런 만큼 사적인 부탁을
한다는 것도 어려웠다.
'이러지 않기를 바랐는데.'
당자인이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후위대주가 무슨 행동
을 할 것인지 불을보듯 알수 있었다. 그래서 준비해 웠던 것.
당중화는 품속에서 조그만 옥병을 꺼냈다.
"받게."
"이게 뭔가?"
"허허허! 통달보리심단이란 걸세."
"통달보리심단! 그건 실패하지 않았나?"
"실패했지. 휴우! 하지만 천하 영약들이 혼합된 통달보리심단
을 어찌 버리겠는가. 단약으로 제조하지는 못했지만 액으로는
만들었네. 물론 애초에 생각했던 통달보리심단보다는 한참 뒤
지겠지만."
"고, 고맙네."
당잠청은 무릎 걸음으로 다가와 당중화의 두손을 감싸쥐었다.
"그렇게 고마워할 것도 없네. 문주가 계획을 일러주었을 때 왠
지 마음에 걸렸네. 이제와 말이지만 살아 생전 다시 볼 수 있
을 것 같지 않았어. 주책 맞은 늙은이의 노파심이 결국 자인이
를 비명에 가게 했구먼."
"그런 소리 말게. 다 제 운(運)이지."
"그래서 생각끝에 수보리심단을 자인이에게 주었네."
"뭐? 네 알밖에 만들지 못한..."
"이제는 세 알 남았네."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군. 자네에게 많은 빚을 졌네. 내 돌아
와서 꼭 갚아주지."
당중화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이야기하려다 그만두었다. 당자
인을 보낼 때 느꼈던 불안감이 또 느껴졌다.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두사람,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 한동안
놓지 못했다.
그날밤 후위대주 당잠청은 당문을 나섰다. 전갈 문양이 새겨진
무복을 벗어 버리고 흔하디 흔한 백의장삼을 입은채.
* * *
고율촌(高栗村), 사람들은 느닷없이 밀어닥친 무림인들을 보면
서 집안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못했다. 특히 딸이라도 가진
집안에서는 무슨 봉변이라도 당할 것 같아 안절부절 못했지만
사태를 관망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청성산 깊은 골짜기에 촌락을 이룬지 벌써 오십여 년 양봉(養
蜂)으로 생업을 꾸려 가면서 가난하지만 평온하게 지내 온 사
람들이었다. 그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가
는 촌민들. 그들은 단연코 무림인들과 접촉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부락민들보다 더 많은 수의 무인들이 들이닥친
것. 비록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무더기로
들이닥친 낯선 타인들이 반가울 리 없었다.
결국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촌장 집에 모여 앉아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것뿐.
"사람을 청성파로 보냅시다. 청성파라면 무림대파이니 무슨 방
법을 강구해 줄 게 아니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딱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
"어쨌든 수상한 사람들이니 알려서 나쁠 것은 없잖소? 만약 이
대로 기다리다가 마음이라도 변해서 칼 들고 설치면 앉아서 당
하기밖에 더 하겠소."
"으음! 청성에 사람을 보내는 것은 좀더 고려해야 할것 같아.
저들의 동태를 보니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 경비가 여간
삼엄한 게 아냐. 청성파가 오더라도 우리 마을에서 싸움이 벌
어진다면 다치는 것은 우리들이잖아."
"하기는 저들의 눈을 피해 빠져 나갈수도 없으니..."
무인들은 전혀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 밖으로 나
가는 것은 철저하게 통제했다. 불가피하게 밖으로 나가야하는
사람들은 무림인들의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뒷길로 해서 간다면 빠져 나갈 수는 있소. 아무리 그래도 여
기서 살아온 사람들이 객지 사람만 못하려고..."
"그럼 자네가 갔다 오겠는가?"
"그건...나는 알다시피 다리가 쑤셔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청성파 도인들이 무림인들을 마을밖으로
쫓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러다 혹 해나 당하지 않
을까 염려되기도 했다. 청성파까지 갈 사람도 없었지만...
"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네. 조만간 떠난다고 했으니 그
동안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문단속들이나 잘하게."
"으음...!"
"그럴 수밖에 없군."
사람들은 오늘도 뾰족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벌써 십 일째 반복되는 일과였다.
"문주의 말씀대로요. 청성오수는 상청궁에 틀어박혀 거의 움직
이지 않고 있소. 문주가 기회를 마련해 준다고 했으니 장기간
체류하면서 한명씩 격살하는 방법 외에는 없을 것 같소."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이목도 있고..."
"결국 문주의 말씀대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야 한단 말인가?"
"으음...!"
한가, 만가, 사가, 풍가의 현임 가주들은 이마에 깊은 골을 드
러냈다. 문주의 명을 받기는 했지만 백여 명에 이르는 마을 사
람들을 모조리 죽인다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런 일은 정도
를 표방하는 당문이 저지를 수도 없는 일이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문주는 태연하게 그런 비도덕적인 명
령을 사가의 가주들에게 내렸다.
"문주는 고율촌에 도착하는 대로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이라고
했소. 어차피 십 일 동안 죽이지 않은 것도 문주의 명을 어긴
것. 조금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청성오수를 밖으로 끌어 내 봅
시다."
제일 먼저 당문에 귀속했지만 인재가 없어 빛을 보지 못한 한
가주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끌어 냈다.
"청성오수가 누군데 쉽사리 유인계(誘引計)에 걸려들겠소. 문
주가 말한 대로 턱밑에 둥지를 틀고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은데, 부락민들을 죽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소. 사
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청성파가 후에라도 우리가 여기 있
었다는 것을 아는 날에는 가만있겠소?"
만가주가 딱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차며 말했다.
그말도 옳은 말이었다. 어차피 문주로부터 비밀리에 척살하라
는 명을 받은 이상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귀속사가가
청성오수를 암살했다는 것이 알려지면...당문은 사가의 가주들
을 버려야할 게고, 그때부터 처절한 추격전이 벌어지리라.
"그렇게 합시다. 문주가 실언이야 하겠소. 이백이십여 명이나
청성으로 집결시킨 것도 다 뜻이 있을 게고..."
풍가주가 만가주의 의견에 동참했다. 원래 풍가주와 만가주는
형제나 다름없는 절친한 사이였으니 그가 만가주의 편을 들었
다해서 이상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오. 두 가지 난관이 있소. 먼저 우
리가 하는 일은 무림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 가장 중요
한 문제요."
사가주는 턱밑으로 한 가닥 염소 수염을 길러 꾀가 많아 보였
다.
"흥! 그거야 당연한 말 아니오? 하나마나 한 소리는 하지 맙시
다."
"잘 들으시오. 먼저 고율촌 부락민들을 죽인 사실이 무림에 알
려지면 우린 무림공적이 되고 맙니다. 일단 그렇게 되면 설혹
당문주라 할지라도 손댈 수가 없죠."
"아, 그러니까 흔적없이 죽이라고 하지 않았소."
사가주는 계속 무시하는 투로 말을 내뱉는 만가주를 흘겨보았
다.
'대가리에 든 거라고는 똥밖에 없는 놈이...'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순식간에 청성오수를 해치워야 한
다는 것. 생각해 보시오. 우리 중 누가 청성오수의 상대가 될
수 있을지. 흥! 아마 그건 당문 십절도 장담하지 못할걸."
"그래서 사가주의 말씀은 뭐요? 문주의 명을 어기고 여기서 철
수하자는 말이오?"
"그럴 수는 없죠 .그러잖아도 미운털이 가득 박힌 귀속칠가인
데 명까지 어기면...내 말은 혹시 이것이 당문주의 계략이 아
닐까 하는거요."
"계략? 사가주는 방금 문주를 모욕했소. 이런 말이 문주의 귀
에 들어가면 아마 사가는...흐흐흐!"
"휴우! 제발 문주의 귀에 들어갔으면 좋겠소.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귀속삼가가 몰살당했다는 점을 상기했으
면 좋겠소. 우리까지 몰살시키고 나면 귀속칠가를 싹 쓸어 버
리게 되지."
사가주의 말이 끝나자 한가주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사가주 도대체 문주가 우리를 죽이려는 이유가 뭐요? 우리는
그동안 당문에 충성했고, 부대주에 오른 인물도 적지 않은
데..."
"후후후! 아마 우리가 귀찮아졌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으면
필요 없어졌거나. 한가주가 말한 부대주들이 모두 여기 와 있
소. 또 하나 당문 서열대로라면 부대주들이 통솔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번 일은 각 가문의 가주들에게 통솔권을 맡겼소. 이
래도 당문주의 계략이 아니라고 말씀하겠소?"
"으음! 듣고 보니 그렇군."
한가주는 깊은 신음성을 토해 냈다.
"아마 청성오수를 죽이라는 것은 핑계일 거요."
"사가주! 말을 삼가시오. 한가주가 데리고 온 사십칠 명은 후
위대에서도 알아주는 정예들이오. 본인이 데리고 온 사십칠 명
도 신법에 뛰어나 제 앞가림은 충분히 하는 무인들, 또한 강하
기로 소문난 전위대 아홉 거력이 있소. 그런데도 청성오수를
격살하지 못한단 말이오? 청성오수가 신이라도 된단 말이오?
쓸데없는 소리 너절하게 늘어 놓을 필요없이 결론을 내립시다.
죽일 거요, 돌아갈거요?"
"으음...!"
"그럼 반대 의견이 없으니 문주의 명대로 시행하겠소."
만가주는 비웃음을 던지며 일어섰다.
'멍청한 놈...물을 엎지르면 다시 주워담을 수 없는데...만약
이것이 당기룡의 계략이라면 네놈부터 쳐죽이겠다 꼭...'
사가주는 옷자락을 거칠게 펄럭이며 문을 나서는 만가주의 뒷
머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컹! 깨앵...!
"아아!"
"사람...아아악...!"
일 년 가야 타지인이라고는 볼 수 없던 촌락에서 때아닌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도 잠깐, 채 일 각이 지나지 않아 깊
은 산속은 다시 무거운 정적에 잠졌다.
피가 흘러 내를 이뤘다.
집집마다 피 냄새가 짙게 풍겨 나왔다.
백여 명에 이르던 부락민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부 죽어
야 했다. 이유도 몰랐다. 죽이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들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즐독 입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즐독 ㄳ
즐감함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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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