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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九 章. 부상(浮上), 떠오르는 의문들
( 一 )
오랜만에 무산은 사람 사는 듯 활기를 띠었다.
최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무산파를 일으키기 위해서 하나뿐인
손녀가 강호로 나갔음에도 손을 뻗치지 못했다.
설혹 죽는다면 그 아이의 운명...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들
어줄 거라는 무산파파의 아집이 대의에 의해 꺾인 것도 큰 변
화였다.
무산파가 직면한 현실은 너무 곤궁했다. 죽어서 선조들을 대한
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한때는 무림의 일각을 지배했던 무
산파, 옛날의 영광을 다시 찾고자 부심하는 사람들을저버리지
못했다.
제갈문이 일으킨 역사는 눈부셨다. 무산파로서는 진정 보배가
굴러 들어온 셈이다. 흩어졌던 문도들이 모이고 새로운 문도가
꾸준히 들어오고...사백여 명에 이르는 문도들이 약재를 채집
하고 독술을 익히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갈홍아가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온 것이다.
옛날의 밝은 성격도 되찾았다. 달라진 것이라면 천방지축 동서
구분없이 날뛰던 망나니에서 사고가 깊어졌다는 것뿐. 당철휘
에 대한 복수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언젠가 벌을 받게 되어 있어. 당철휘는 꼭
내가 손대지 않아도 천수를 누리지 못할 거야. 이제 그런 이야
기는 그만해. 그런 인간은 잊어버렸으니까."
갈홍아는 변해도 너무 변했다. 강호에서 무슨 일을 겪었기에
성품이 저리 변할수 있는지...하지만 바람직한 변화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단비하가 당문을 치려고 해. 도와 줄 방법이 없을까?"
"허허허! 소저가 도와 주라는데 어떻게 거절합니까? 도와줘야
지요. 어차피 사천에서 당문과 공존하려면 그에 걸맞는 실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합니다. 무림이란 이상한 곳이라서 실
력이 없으면 철저히 무너뜨리지만, 만만치 않다 느끼면 가만히
내버려두죠. 그게 무림의 생리랍니다."
제갈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당문에는 상대조차 되지 않는 미미한 실력이지만 한번쯤
공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당문 십절이
고수들을 이끌고 온다면 멸문은 피할수 없는 일. 그러기 전에
독사는 죽더라도 그냥 죽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워야 한다는 생
각.
무산파파와 무산이괴에게 반대 의견이 있을 수 없었다. 얼마
되지 않은 기간야지만 그들은 제갈문을 친형제처럼 신뢰했다.
그러나 사망산검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무산파의 일이라 끼여들긴 뭐하지만 그래도 친구니까...현재
무산파의 실력으로 당문을 친다면 벌집을 건드리는 것밖에 안
됩니다. 당문이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 이상 조금 더 실력을 쌓
는 것이 좋습니다. 단공자는 사리가 분명한 젊은이입니다. 그
런 그가 무턱대고 당문을 치지는 않겠지요."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애써 벌통을 건드릴 필요가 있는가.
중인들의 눈은 갈홍아에게 향해졌다. 오랜만에 밝은 성격을 찾
았는데 혹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해서 심기를 건드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우려를 담고...
"단비하는 우리가 도와 주든 말든 당문을 칠 거야. 정면으로
안 된다면 침입을 해서라도 복수는 할 사람. 그는 어느 길로
가든 당기룡이란 사람을 겨누고 있어. 된다면 좋고 안된다고
해도 할 수 없어."
갈홍아는 의외로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변한 성품이
단비하에 의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었는
데 이경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걱정스런 낯빛을 감추지
않았다.
'혹시 그가 잘못되는 날에는...'
금방이라도 눈물보가 터질 듯 울먹였다.
단비하가 떠난 후 이경화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무슨 생각
을 했는지 하루 온 종일 태청검법과 사망산검의 수련에 몰두했
다. 마치 무귀(武鬼)가 몸에 달라붙은 듯 밥 먹는 시간에도 손
에서 검을 놓지 않았다. 검의 수련이 유일한 낙처럼 비쳐졌다.
그래서 단비하를 잊은 줄 알았는데.
"호호호! 언니는 단비하가 그렇게 좋아? 야아...이제는 아예
내놓고 좋다고 말하는데? 역시 사랑에 눈이 멀면 세상에 보이
는 것이 없다고 하더니만 옛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니까."
"동생!"
빽 소리를 지르는 이경화의 볼은 능금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낄낄낄! 모두 다 아는 사실인데 새삼스럽게 뭘 숨기냐? '낭군
님의 안위가 염려되니 도와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될걸 안그
래?"
"백부(伯父)! 정말 놀리실 거예요?"
독사우공의 짓굿은 농담에 이경화는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사망산검과 독사우공이 의형제를 맺었으니 당연히 백
부가되는 셈이다. 독사우공은 새로 생긴 조카를 갈홍아만큼이
나 사랑했다.
"허허! 경화야, 어른들 계신 곳에서 자중하지 못하고..."
"낄낄낄! 내버려 둬. 자네는 사랑할때 위아래를 구분했나?"
"어허! 내 참...왜 화살을 나한테 돌리시오?"
"자식을 보면 아비를 안다고. 자식이 저 모양일진대 자네는 어
떻겠어? 안봐도 훤하다 훤해."
"백부, 정말 나빠요."
이경화는 눈물 머금은 눈으로 독사우공을 흘겨보고는 달음질쳐
나갔다. 하루 온종일 무공을 생활화해 온 그녀의 신법은 경쾌
하기 이를데 없었다.
"엇! 언니의 무공이 놀랍게 발전했네."
"홍아야. 너도 이 소저를 본받아 부지런히 무공을 연마해라.
손녀라고 장문이 그냥 되는 것은 아니야. 심성이 올바르고 무
공이 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문이 될 수 있어."
"피이! 나는 장문 같은 것 안해. 그냥 이대로가 좋아."
갈홍아는 혀를 날름거리고 이경화가 뛰어간 방향으로 쫓아나갔
다.
"휴우! 한시름 덜었네."
무산파파는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기분을 맛봤다.
"낄낄낄! 여보게, 제갈 선생 당문을 치되 벌떼가 움직이지 않
는 방법은 없나?"
"허허허! 왜 없겠습니까? 당문은 지금 청성에 대하여 차도살인
(借刀殺人)을 하고 있습니다. 청성파로서는 당문 짓임을 빤히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죠. 똑같은 방법으로
당문을 치는 겁니다. 먼저 구파일방에 사람을 보내 무산이 정
식으로 재기했음을 알려야 합니다. 정도문파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당문이 칠 수 있는 빌미를 없애는 겁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지요."
"자네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지만 한치의 틈도 있어서는 안
되네. 문도들의 희생도 없어야 하고."
"명심하지요."
제갈문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본 무산파파는 일독문
주와 그릇이 달랐다. 황학산에서는 실패할 줄 알았다. 당시 무
산파파는 손녀에 대한 애정이 모든 것이었다. 감정에 휘말린
사람은 대세를 그르치는 법, 실패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단지
무산파파가 당문을 상대로 얼마만한 투지(鬪志)가 있느냐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족했다.
두번째 시험을 했다.
단비하에게 무산에 깔린 비홍사에 대해서 모두 말해 주었다.
당자인 일행이 청성으로 향한다는 사실도 말해 주었다. 모든
정보는 청성파를 통해 입수했다. 단비하가 달려갈 것은 뻔한
것. 갈홍아에게 단비하의 동태를 말해 주었다. 그녀 역시 한달
음에 달려 가리라, 복수에 눈이 먼 사람들은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니까.
목적은 하나였다.
무산파파가 손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무
산에 남아 무산파의 재기를 도모하느냐 하는 점을 확인하기 위
해서였다.
갈홍아의 생명보다 자신의 꿈을 이룰수 있는 터전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기에 서슴없이 갈홍아를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사천 무림으로 밀어 넣었다.
무산파파는 무산에 남았다. 자신이 아는 모든 독술을 한 권의
책으로 적어 문도들에게 습득시켰다. 무산파가 하루 빨리 일어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대체적으로 검법 하나를 개발하는 데는 검을 수만 번 휘둘러야
한다. 문파 하나가 일어서는 데는 십 년 세월로도 모자란다.
특히 재건은 창립보다도 어렵다. 그런데 무산파파는 짧은 몇
개월 사이에 골격을 갖줬다.
그의 안목이 정확했다. 일독문은 멸문했고 무산파는 살아남아
재기중이다. 단지 흠이라면 일독문처럼 절정의 독이 없다는
것. 무산파파의 사심독으로는 당문과 싸움이 안되고 그나마 살
상력있는 독이라면 독사우공의 비홍사가 가장 바람직하지만 몇
마리 남지 않았다.
'앞으로 오년은 지나야 당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어.'
제갈문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 몸을 일으켰다.
'절정독만 있다면 일 년으로 족할 텐데...독이라...단비하의
독이 무섭다는 말을 들었는데 혹시 홍아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
군.'
발걸음이 갈홍아에게 돌려졌다.
"그는 건강하지?"
"누구?"
"갈매! 정말 놀릴 거야?"
"호호호! 안 그럴게. 걱정 빼 하루 밥 세끼 착실하게 먹으니
아플리 있겠어?"
"소문에는 당잠청과 겨루면서 치명적인 독상을 입었다고 그러
던데 정말 괜찮아?"
"푸훗! 여독에 스쳤던 것 뿐이야. 잠깐 휘청한 것이 치명적인
독상이라면 나는 죽어서 귀신 할머니가 됐겠네. 걱정 마 천리
마처럼 종자 자체가 튼튼하니까."
"종자?"
"호호호! 왜? 탐나? 그것도 걱정 마. 조만간 그 씨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정말 갈매는 못 쓰겠다. 어떻게 사람한테 그런 말을..."
"원래 천성이 그래. 참 이상하지? 좋은 말을하려 하는데 그게
안돼. 영원히 부술 수 없는 벽인가 봐. 왜 그런지 모르겠어."
갈홍이는 자신의 말투가 누구와 닮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이 났다. 단비하가 하던 말...
- 참 이상하지? 청성파는 두렸지 않은데, 당문은 어렵게 느껴
져. 영원히 부술수 없는 벽처럼...왜 그런지 모르겠어.
보고 싶었다. 억지로 맺은 단 한번의 관계였지만 물씬 풍기던
강렬한 사내의 체취는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
"노력해 봐. 노력해서 안되는 일은 없어."
이경화의 목소리가 바람결처럼 다가왔다.
"그래, 노력해야지...잊도록...보이는 것은 찰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니까..."
갈홍아는 자신이 무슨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지 몰랐다. 그 말
을 듣고 이경화의 안색이 급변했음도 알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 때려 죽이고 싶은 당철휘를 잊게 만들어 준 사람, 그러
나 영원히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혼자 가슴속에 묻어 두어야
할 정인이었다.
'갈 매가 단공을...'
이경화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언뜻 들은 말이지만 여인이 사내를 그리워하는 말이란 것쯤은
쉽게 짐작되었다. 아마 갈홍아의 성격이 변한 것과도 무관하지
는 않으리라. 성격까지 변할 정도라면 보통 이상의 관계...
확실히 갈홍아를 보다보면 넋이 빠진다. 풋사과처럼 싱그러운
웃음 꼭 껴안고 싶은 탄력적인 몸매, 아름다운 얼굴...무엇보
다 갈색 피부는 건강미를 나타내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무엇 하나 자신보다 빠지는 것이 없는 갈홍아였다. 당철휘와의
관계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사랑을 하고 버림받
고...버림받는 과정이 잔인하기는 했지만...진정으로 사랑한다
면 그런 결점 정도는 덮어 버리는 것이 사내들의 속성 아닌가.
단비하를 갈홍아에게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갈홍아보고 물러서라고 말할 입장도 아니었다. 앞날이 두려웠
다. 지금은 같이 웃고 있지만 이를 갈면 암코양이처럼 표독스
럽게 변하는 갈홍아. 언제 그 독아가 자신에게 향할지... 깨고
싶지 않은 우정이 사랑때문에 갈라선다면...아니 꼭 그럴 것
같았다.
"갈 매, 단 공을 사랑해?"
이경화는 쭈빗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호호! 그런 목석을 사랑하냐고? 걱정하지 마. 내가 단공을
가로잴 것 같아서 묻는 거지? 언니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자꾸
그러면 정말 가로잴 거야. 아니야, 혼자는 살아도 그런 목석하
고는 못 살아. 허유! 얼마나 지독한 목석인 줄 알아? 그런 사
람을 사랑하다니 나는 정말 언니를 이해하지 못하겠어."
갈홍아는 밝은 웃음을 흘리며 농담조로 대꾸했다.
그모습에 이경화는 다시 한번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맛보았
다.
강력한 부인은 긍정을 뜻한다. 확실히 갈홍아는 단비하를 사랑
하고 있다. 명랑하게 말하고 있지만 미간 한가운데 그늘져 있
는 어둠이 그사랑을 증명해 줬다.
'단 공이 갈 매를 선택한다면...아! 모르겠어. 그때는 머리 깎
고 비구니나 되지 뭐.'
이경화는 복잡한 심정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함박눈이 쏟
아지려는지 회색으로 가득 뒤덮인 혼탁한 하늘을...
무산파파는 제갈문이 적어 온 단방전(丹方箋)을 보고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보라해서 보기는 봤네만 이게 도대체 무슨 단방전인
가?"
"대조독의 단방전입니다."
"대조독!"
무산파파는 경악 어린 눈초리로 다시 단방전을 세밀히 연구하
기 시작했다.
대조독은 이미 독문의 화제 거리였다. 당문이 생체 실험이라는
패악한 방법을 썼다는 사실이 무림에 알려져 소림장문이 특사
를 파견했다는 소문도 공공연하게 들려 왔다.
전에 단비하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미궁에 빠졌을 극악
무도한 방법. 만약 사실이라는 것이 판명되면 당문은 무림공적
으로 몰릴 위기였다. 제갈문은 그런 점을 노리고 들은 사실에
살을 보태 무림에 유포시켰다.
발없는 말이 천 리 간다던가? 이미 무림의 대부분이 소문을 기
정사실처럼 받아들이며 치를 떨었다. 어떻게 당문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설혹 그런 사실이 없다 손 치더라도
당문의 위상에 금이 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단비하란 인물이 당문 십절 중 당잠청을 독으로 살해했
다. 당문의 생체 실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소문난 것과 묘하
게도 시기가 맞아 떨어졌다. 바로 그가 사용한 독이 대조독.
누구 입에서 나온 말인지는 몰라도 중소 독문들은 대조독의 제
조 방법을 얻고자 혈안이 되어 사천으로 몰려가는 중이었다.
"이해할 수 없네. 이해할 수 없어...이런 엉터리 단방전이 어
디 있단 말인가? 이걸 어떻게 구했나?"
"후후후! 장문께선 갈 소저가 단비하와 같이 있었단 사실을 잊
으셨습니까? 갈소저가 직접 작성해 준 것이니까 틀림없을 겁니
다."
"홍아가? 그렇다면 틀림없겠지만...이게 정말 독이 될까?"
무산파파는 단방전을 쳐다보고 또 쳐다봤다.
독을 제조할 때는 약재의 효용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혼합과
열기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최대 관건이었다. 아무리 독성이
강해도 혼합을 잘못하거나 제련을 잘못하면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무산파파가 보는 단방전은 혼합 자체가 엉터리였
다.
이삭바꽃과 돌쩌귀풀을 같이 쓰다니 둘다 독성이 강하지만 같
이 쓰면 서로 중화된다. 독문 사람에게는 기초 지식이었다.
거기에 촛대승마까지? 촛대승마의 풀 포기는 해독제로 쓰이고
있지 않은가, 바구지는 또 어떤가? 육칠월에 노란색 꽃이 피는
풀로 부스럼 등의 치료약으로 쓰이며, 어린 잎은 먹기도 한다.
그러나 독성이 강해 농가에서 살충제로 쓰기도 하는 풀...단방
전에 쓰인 약재들이 모두 이런 식이었다.
"어디 제가 한번..."
대조독의 단방전이라는 말에 벌써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미
독환사가 장문의 손에서 단방전을 건네 받았다. 하지만 곧 그
의 고개도 좌우로 돌려졌다.
"낄낄낄! 사형, 나도 좀 봅시다."
독사우공은 사두열목 마대와 늘 같이 다녔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했고, 비홍사라는 독사에 대한 관심도 같은지라 백년지기
처럼 어울렸다.
게다가 지금은 비홍사가 동면에 들어서 할 일이 없어 적적하던
차였다.
"보게나 나는 도무지..."
미독환사 전유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단방전을 넘겨주었
다. 어려서 무산파에 입문하여 오십여 년을 독과 살아 온 인생
이니 결코 지식이 적다고 할수 없으나 단방전을 이해하지 못했
다.
"이런... 이런 엉터리 단방전이 어디 있어? 아무리 독에 무지
한 놈이라도 이런 단방전은 못 만들겠다. 안그래?"
"맞아, 이런 단방전은 독사우공인지 뭔지 하는 놈도 만들지 않
을 걸. 하지만 이대로 만들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독사우공은 놀리는 말에 성을 발끈 내려다 이어지는 뒷말을 듣
고는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이런 엉터리 단방전을 믿어 보자는 말야?"
"손해 볼 건 없잖아. 물두꺼비, 이삭바꽃, 돌쩌귀...모두 한겨
울에는 구할수 없는 거지만 건조된 것은 시중에 널려 있어. 여
기 적힌 대로 구하면 은자 두 냥이면 족할 것 같은데?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을거고..."
무산파파는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갈홍아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들어서 아는 터였다. 겨우 은자
두 냥이 없어 산으로 들로 쫓아 다녔단 말인가. 그랬으니 고초
가 어련하랴.
시기가 지난 독물들은 독효가 떨어진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맞아 해보는 거야. 단비하는 독성이 떨어지는 독초로 대조독
을 만들었다고 했어. 건초(乾草)로 만드는 것이 생초(生草)보
다는 못하겠지만 단비하가 만든 것보다는 효과가 좋아. 해볼
만해.'
"전 장로, 약재를 구해 주시게. 가급적이면 상질(上質)로."
"알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구할 수 있겠는데 물두꺼
비, 흔하디 흔한 거지만 지금은 한겨울이라 있을지 모르겠습니
다."
"홍아가 구했다니 같이 구해 보게. 성도에서 구한 것을 무산이
라고 못 구하겠나?"
"알겠습니다."
장내는 기이한 열기로 휘감겼다.
이해할수 없는 단방전, 하지만 단비하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
다. 만약 이런 단방전이 당문에서 흘러 나왔다면 십대절독의
단방전이라 해도 만들 생각을 안했을게다. 그러나 중인들은 단
비하의 방사를 견식한 사람들. 어처구니 없지만 천하절독을 만
들수있다는 예감이 흥분을 불러왔다.
갈홍아를 치료했던 산곡의 동굴은 개미 한 마리 침입할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삼엄했다.
사활(死活)이 걸린 연단(煉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
약 대조독이 정말 당문십절 중 한사람을 찰나간에 죽일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면, 강력한 독문으로 재기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
다.
째재잭! 째짹...!
겨울산새가 나무위에 덮인 눈송이를 흩날리며 날아다녔다.
'사부...'
미독환사 전유는 늘 엄하기만 했던 사부가 그리웠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연단 호법을 서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벌
써 이십여 년이나 지났으니까. 무산파를 떨쳐 울리던 흑풍사는
이제 한물간 퇴물 취급을 받았다.
무산파파가 애용하는 사심독은 대량으로 살포해야 된다는 단점
이 있었고, 사제 독사우공이 사용하는 비홍사 역시 생물이기에
약점이 있었다. 황학산에서 독비독심 당철목이 전개한 후란독
따위에 몸을 틀지 않았던가.
이렇다 할 독이 없는 독문...하지만 대조독만 완성된다면...
미독환사는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제갈문이
빙글거리며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기에 사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내가 만약 적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응? 음! 자네군."
"이상 없습니까?"
"조용하네."
튼튼한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것이 제갈문의 성격이었
다. 처음에는 무척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만성이 되어
아무 느낌도 없었다.
"독사우공에게 비홍사가 없으니 걱정입니다."
"걱정 말게. 비홍사는 없지만 사독(蛇毒)은 있네. 정 장로의
하독 솜씨를 한번도 안 봤나?"
"볼 틈이 없었지요."
"우(遇) 형(兄)을 능가하는 솜씨라네. 사실 무산파에서 가장
독술에 뛰어난 고수는 독사우공이야."
"아니, 장문보다도 더 뛰어나단 말입니까?"
"절체절명의 상황이 아니면 신기를 보이지 않는다네. 하지만
장문보다 더 뛰어난 것은 틀림없어."
제갈문은 몰랐던 것을 알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독사우공과 사두열목이 제이선을 맡고 있는 이상 걱정하
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를 쓰러뜨리고 올라오는 적이라면 우 형도 막을수 없다네.
단지 시간을 조금 벌어 줄 뿐이지. 참 연단 제조는 잘돼 가
나?"
"장문과 홍아가 같이 하고 있으니 별일이야 없겠지만...정말
단방전이 그렇게 형편 없었습니까?"
"허허허!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좌우지간 내 생전 처음
보는 단방전인 것만은 틀림없네. 허허허!"
미독환사의 웃음은 서글펐다.
겨울이 되면서 먹이가 줄어든 탓인지 이리 떼는 갈기를 곤두세
우고 다가들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는
철저한 강자존(强者存)의 세계였다.
약자는 오직 강자를 위해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배고픈 강자
의 먹이가 되어 주기 위해서 그러기에 동물들에게는 위험을 감
지하는 특이한 본능이 있었다. 그런 본능이 얼마나 뛰어난가에
따라 목숨올 부지할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명을 다할 때까지 생존한다는 것은 어려운 모양이다.
위험본능을 망실한 이리 떼처럼.
끄르릉...!
이리들은 송곳니를 곤두세우고 머리를 앞발 사이로 낮게 가라
앉혀 공격 준비를 끝냈다. 이제 무리 중 우두머리의 포효가 터
지면 일제히 달려들 차례였다.
쉬이익...!:
무산파파는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결에 오른손을 가볍게 내밀었
다. 순간 피수투에 얹혀져 있던 적색 분말이 바람을 타고 사방
으로 흩날렸다. 비 온 뒤 떠오르는 무지개처럼 하얀 설지 위에
피어나는 붉은 운무는 너무 아름다웠다.
끄릉!
유난히 덩치가 크고 갈기에 흰색 털이 나 있는 이리가 나지막
하나 소름이 쫘악 돋는 포효를 발했다. 무산 촌민들에게 낭중
지왕(狼中之王)이라 불리는 백랑(白狼)이란 놈이었다.
끄르릉! 끄릉!
수십 마리의 이리가 일제히 하얀 설지를 박차고 일행을 향해
도약했다. 속도는 일류고수를 능가할 정도로 빨랐고, 공격 범
위는 광범위하여 어느 놈부터 막아야 될지 난감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중 이리들의 공격에 당황할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이리 떼가 언제 어떻게
죽느냐였다.
께앵! 께에앵!
처참한 비명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무산파파가 독을 푼 바로
직후나 다름없었다.
"저럴 수가!"
사망산검 이철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 이리들이 죽는 모습은 너무도 처참했다.
허공에 몸을 날리자마자 묵직한 돌맹이처럼 뚝 떨어져 내렸다.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내민 채 숨을 헐떡거리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동공이 풀리면서 붉은 혀를 쭈욱 내밀었다. 그것이 끝
이었다. 하지만 이리들은 아직 죽지 않은 듯 끊임없이 사지 경
련을 일으켰다. 백랑 역시 미물에 불과했던가 다른 이리의 죽
음과 한치도 틀리지 않았다.
무려 삼십여 마리의 이리들이 한봉지의 대조독에 몰살하고 말
았다. 독에 관한 한 사람보다 생명력이 질기다는 야생 동물이
이 지경이면 정작 사람은...물으나마나 즉사 할 것이 자명했
다.
"이, 이런 독이..."
"세, 세상에..."
모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살상 반경이 넓으면서도 독
성이 지독하다 못해 전율스러웠다. 하독하자마자 즉사하는 독.
당문주만이 사용한다는 무영지독과 겨루어도 충분하리라.
무산파파는 대조독을 만졌던 피수투를 쳐들어 보았다. 아무 이
상도 없었다. 무슨 독이라 규명할수가 없었다. 피부 발진이 없
으니 살갗을 통한 것은 아니고 구강으로 침투했음이 분명했지
만 겉으로 이는 발작 정도로는 내부에 어떤 이상이 있는지 파
악할 수가 없었다.
이리들의 경련은 근 한 시진 만에야 멈췄다. 그 동안 내부로
스며든 독이 끊임없이 작용한 것이다. 설혹 내공이 높아 즉사
를 면한다 할지라도 한 시진 동안 계속되는 고통을 참을 만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천하제일독의 반열에 설 수 있는 독의
등장이었다.
품에서 은침을 꺼내 죽은 이리에게 던졌다.
피윳!
길이 두 치의 은침은 이미 굳기 시작한 가슴을 뚫고 정확히 절
반정도 파고들었다.
"아니 변색조차 되지 않다니."
침착하기로 소문난 미독환사까지도 경악성을 토해 냈다.
독에 중독되었다면 당연히 검게 변색되어야 마땅한데 은침의
색깔은 변함없었다.
독사우공이 급한 성미를 참지 못하고 한달음에 내달려 이리의
뱃가죽을 소도로 부욱 그어 내렸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내장도 피의 색깔도...단지 간이 조금
부어오른 것이 달랐다. 그러나 그 정도는 과음(過飮)만 해도
나타나는 증세였다.
"뇌를 절개해 봐."
무산파파의 음성을 들은 독사우공은 급히 이리의 머리를 갈랐
다. 일순,
"허!"
독사우공은 흠칫 놀라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아니!"
무산파파는 대조독에 진저리를 치면서 피수투를 멍하니 들여다
보았다. 이리의 골수는 텅 비어 있었다. 뇌가 녹아 내린 것이
다. 약간의 분량을 흡입하고도 뇌가 녹아버릴 정도라면...
"처, 천하제일독이야!"
무산파파의 음성이 가늘게 떨려 나왔다. 그때였다.
"푸훗! 단비하는 아직 멀었다고 말했어. 독을 십 단계로 분류
한다면 대조독은 겨우 삼단계 정도라나 전에 관현에서 청성파
의 일양자에게 하독했는데 내력으로 몰아 냈어. 그때 한 말이
야."
"내, 내력으로 몰아 내? 그게 정말이냐?"
사망산검이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무당파의 태청신공을 익히
고 있었기에 독술을 경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 차이지 대조독 같은 절정독을 몰아 낼 자신은 없었다.
그런데 무공이 비슷할 것 같은 일양자가 대조독을 몰아 냈다면
자신 또한 가능하다는 말이된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시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식은 밥먹은 줄 알아...요? 헛소리 아니야...요."
갈홍아는 이상하게 사망산검에게는 반말을 하지 못했다. 할머
니에게도 무산이괴에게도 스스럼 없이 하던 반말을 사망산검이
나 이경화를 볼 때마다 단비하를 대신해서 잘해 줘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느껴야했다.
"낄낄낄! 당문 십절은 일양자에 비해 겨우 반수 아래다. 그런
사람이 즉사했는데 일양자가 내력으로 밀어 냈다니 그 말을 누
가 믿겠니?"
"안 믿으면 관둬. 하지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야."
"아니야, 그럴 수 있어. 일양자는 독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야.
그렇기 때문에 붉은 운무를 보는 순간 중독되었다 느끼고 즉시
운공조식을 시작한 거지. 반면에 당잠청은 독에 관한 자부심이
강했기에 오히려 경시했어. 이 정도쯤이야 했겠지만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었지. 여기서 세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무산파파는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는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
겼다. 하나 곧 확인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문을 열었다.
"첫째는 담장청이 느꼈듯이 초기 증세가 극히 가볍다는 점. 그
러나 그 점을 간과하면 당잠청 같은 독공 고수도 어처구니없이
죽게 되지. 둘째는 운공조식으로 해독할 수 있다는 점. 방심하
지만 않으면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하지만 그런 건 꿈에서
나 기대할수 있겠지. 운공조식할 시간을 주지 않을 테니까. 마
지막으로는 독의 침투 경로인데 이건 혈액독이면서도 신경독이
야. 구강으로 흡입하는 독치고는 특이한 증세지."
충분한 설명이었다. 과연 무산파파는 무산파의 장문답게 독에
관한 지식이 풍부했다. 단지 몇 가지 들은 사실로 대조독의 모
든 것을 파악해 냈으니.
"대조독이 절정독이기는 하지만 이걸로 당문을 상대할 수는 없
어. 당문에는 특이한 관습이 있지, 독에 당한 사람의 시신을
부검하는 것. 이미 당문도 대조독에 관해서라면 손금 보듯 알
고 있을 거야."
"으음...!"
"그럼, 장문! 당문을 치는 일은..."
"제갈문, 우리가 전면에 나서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서?"
"있지요. 감히 완벽하다 말씀드립니다."
"그럼 해보자. 더불어서 무산파의 위명도 날릴 방법을 모색해
봐. 대조독이면...당문을 어쩌지는 못해도 옛날의 성세는 찾을
수 있을테니."
"낄낄낄! 대조독이라는 이름은 버려야 할 것 같은데요? 단비하
가 쓰던 독을 우리가 쓴다면 체면이 영 구겨져서..."
독사우공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더욱이 재기하는 입장에서
남이 개발한 독을 도용했다면 멸시받을 확률이 높았다. 무림인
들이 대조독에 관해 모른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랄까?
"단비하에게도 말해 줘야 되잖아? 그건 언니가 말해 주면 되겠
다."
"갈 매,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피이! 애인이 그런 말도 못 전해?"
"누가 애인이라고..."
"그럼 내가 가로 채도 돼? 그건 싫지?"
"하하하...!"
중인들은 벌게진 이경화의 얼굴을 쳐다보며 오랜만에 시원한
웃음보를 터뜨렸다. 대조독은 백랑을 죽였다 하여 백랑독으로
개명되었다.
이리들의 시신을 묻는 함박눈이 내리던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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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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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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