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이 없으면 그동안 쌓은 경제개혁의 성과도 놓칠 수 있다." 중국 권력 서열 3위인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지난달 경제특구 설립 30주년을 맞은 선전을 찾아 정치개혁을 언급한 사실이 보도되면서 중국 민주화의 향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원 총리에 이어 지난 6일 선전을 찾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겠다고 밝히면서 중국 지도부 내에 미묘한 갈등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 아래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룬 중국이 민주화의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마오의 제국'(말글빛냄)은 워싱턴포스트 베이징특파원 출신인 저자 필립 판(Pan)이 2000년부터 7년간 중국 대륙을 취재하면서 민주주의의 싹을 찾아다닌 기록이다. 사스(SARS) 발병을 폭로한 의사 장옌융, '수용소'의 인권 유린 실태를 폭로해서 폐지시킨 남방도시보(南方都市報) 기자 청이중, '한 자녀 갖기'를 강요하는 당국에 맞서 싸운 맹인 천광정…. 저자는 중국 곳곳에서 권력과 싸우면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을 소개한다. 저자는 중국도 소득이 높아지면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중국공산당이 쉽게 권력을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들은 '민주적 개혁은 중국을 약화시킨다'고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국가의 죄수'(에버리치홀딩스)는 1989년 천안문사건 이후 16년간 연금과 반(半)연금을 오가던 자오쯔양 (趙紫陽) 전 총서기가 2000년 무렵 구술한 육성 녹음을 풀어 만든 책이다. 자오는 중국이 법치와 의회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선진국 중에 다른 제도를 실시하는 나라가 하나도 없는가? 한 국가가 근대화를 이루고 현대적인 시장경제, 현대 문명을 실현하려면 정치체제는 반드시 의회민주주의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때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였던 사람의 입에서 다당제와 자유선거에 기초한 서구식 의회민주제 실시까지 나온 것은 말 그대로 '혁명적'이다.
'포브스' '파이낸셜타임스' 편집장 출신 에이먼 핑글턴(Fingleton)은 중국이 한국이나 대만 등 동아시아 발전국가처럼 이행기를 거쳐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변화할 것이라는 낙관에 반기를 든다. 2008년 미국서 낸 '중국과 미국의 헤게모니 전쟁'(에코리브르)에서 그는 "미래의 중국은 부유하면서 동시에 권위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제정치 전문지 '포린 어페어'는 2005년 '경제 성장은 전제(專制)국가에서 민주화의 동력보다 정권을 강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조사 논문을 실었다. 세계 150개국을 검토한 결과 중국이 바로 이런 논지에 잘 들어맞는 사례였다. 핑글턴은 중국 정부가 야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회사들이 중국의 검열 규칙에 굴복하도록 만든 것도 "자본주의가 중국 정부를 변화시키기는커녕 중국 정부가 자본주의자들을 변화시키는 사례"로 거론한다.
서구학자 가운데 드물게 '중국 특색의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나선 이가 미래학자 나이스비트이다. 그는 '메가트렌드 차이나'(비즈니스북스)에서 중국의 성공을 가능케 한 요인으로 중국공산당에 의한 '수직적 민주주의'를 강조한다. 선거를 통해 주기적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서구의 수평적 민주주의와 달리 중국식 민주주의는 타인·공동체와의 조화를 중시하는 수직적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중국은 지도부가 설정한 포괄적인 공동 목표를 향해 하향식 주도권과 상향식 과정의 조화를 통해 자국의 역사와 사고에 적합한 민주적 모델을 형성하는 초기 단계를 밟고 있다고 설명한다.
중국 정치 전공인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펴낸 '21세기 중국이 가는 길'(나남)은 한국 입장에서 중국의 미래를 객관적으로 전망하는 데 참고할 만하다. 조 교수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은 지난 30여년의 경제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의법치국'(依法治國)을 국책(國策)으로 내걸고, 인민대표대회를 활성화하는 한편 촌민(村民)위원회와 현(縣)·향(鄕)급 지방 인민대표를 경쟁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등 정치개혁을 실시해왔다. 원자바오 총리의 정치개혁 발언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2007년 2월 '사회주의 제도와 민주정치는 서로 배치되지 않고, 고도의 민주와 완비된 법제(法制)는 사회주의제도의 내재적 요구이며 성숙한 사회주의제도의 중요한 지표'라는 요지의 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공식적으로 내건 '중국 특색의 민주주의'는 철저하게 공산당 지배와 인민 독재를 전제로 한 것이다. 원자바오 총리의 이번 발언도 크게 보면 이런 틀 안에서 중국공산당이 추진해온 정치개혁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 교수가 전망한 중국의 선택은 네 가지다. 첫째, 한국·대만처럼 정치 민주화를 통해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동아시아의 길. 둘째, 싱가포르·말레이시아처럼 정치 민주화를 소극적으로 추진하는 연성권위주의(soft authoritarianism)의 길. 셋째, 정치 민주화를 시도하지 않으면서 사회·정치적 불안이 장기화되는 라틴아메리카의 길. 넷째, 국내외의 돌발사태로 정치체제가 갑자기 붕괴하는 소비에트의 길이다.
저자는 중국이 이 중 라틴아메리카의 길을 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중국이 연성권위주의나 라틴아메리카의 길을 가게 된다면 한국에는 기회보다는 도전이 많아질 것이다. 이 경우 가장 우려되는 것은 중국이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정치적 불만을 잠재우면서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을 제고하기 위해 대중민족주의를 더욱 고취시키고, 이로 인해 중국의 대외정책이 강경하고 공격적으로 변할 가능성이다." 중국의 정치적 미래가 한국의 진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