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은 현재 진행중인 대동사 대승공 ◎◎◎ 프로젝트 추진중 모종원께서 대승공 묘소가 대승공사후 황해도관찰사 희림선조가 참배할 때까지 방치 되었다는 주장을 하였기에 그 주장이 틀리다는 자료입니다.(선조 존칭 생략함) ⓵ 고려초는 본인포함 4대까지 관리했고 불교국가이기에 묘지에 대하여 유학자들과 다르게 생각하였으나 대승공 묘소는 “류릉”으로 내려 왔기에 보존되었으나 문간공 공권 묘지명을 발견하기전까지 대승공2세부터 6세까지 묘지 위치를 알지 못합니다. ⓶ 공권 묘소, 8세 언침묘소는 묘 위치를 알지 못하였는데 송림군에 있는 묘를 1912년 도굴하여 박물관에 보관된 지석을 사들이고 1915년 발견된 묘지명을 1916년 묘지명에 의한 장단군 진서면 전재리 종개천 언덕에 산소봉축 마치고 비석을 세웁니다(상서공 언침(대승공8세) 묘소는 개성군 중서면 덕달리에 있었는데 실전되었으나 1906년 묘지명이 발견되고 덕달리에 봉축합니다) ⓷ 복야공 택(대승공8세)선조와 아들 문정공 경 묘소가 장단군 진서면 전재리 종개천 언덕에 있습니다. ⓸ 대승공 묘소는 하정공 아버지(안택선조, 대승공12세)와 4남 이문(만호공, 대승공14세) 사후 만호공 후손들이 벌초하고 관리한 듯합니다. ⓹ 장단에 문간공 복야공 문정공 묘소가 있어 영조때 장단에 대승공 사우를 건립하려 했고 대승공묘소 관리와 묘제는 갑파(언침후손)에서 사우관리와 향사 그리고 문간공 복야공 문장공 묘소 관리는 을파(택 후손)에서 한 듯하지만 더 탐색(탐구)하여 대승공 자료를 올리겠습니다(이 당시는 갑파 을파 구분이 없었음) 대승공 묘지관리와 향사 재원 탐구 대승공 33세 하곡 류재균 1. 하정공이 1427(세종9)년 아버지를 돌아가신지 67년이 되던해 대승공묘 서쪽 200보로 이장하고 사초하여 모시고 추증(追贈) 영의정 분향교지 禮를 올립니다.(하정보38쪽) ※ 교지 : 2품 이상인 자의 3대 가운데 살아 있으면 봉작, 죽었으면 증직한 것을 추증이라하며 수직 교지는 관찰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리면 80세이상에게 내리며 90세 이상은 통정대부(정3품상) 100세가 넘으면 가선대부(종2품직책) 또는 숭정대부(종1품하) 교지를 내리고 수직교지를 받은 분의 돌아가신 부 조부 증조(3대)에게 분향교지를 내려 그 자손들이 묘소에 가서 내용을 고하고 부본 교지는 불태우지만 기록이 없어 교지를 받을 당시는 잔치를 하기에 교지를 받은 사실을 알고 대감이라 부르지만 몇백년후에는 교지가 없으면 교지 받은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2. 철종조 이후 고종 순종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1946년까지 2008년 무자보에 의한 대승공 묘소 관리 자료입니다(이하 선조 존칭 생략함) 3. 대승류공차달묘표(墓表) 撰 ① 신유 1861(철12)년 27세손 기영 謹誌(삼가 씀) ② 정숙공후 무자보 16권 87쪽 대승공 28세 기영←한위←찬후←취한←일중←격영←시번←수남←덕←문균←승성←실←담←중창←장←정현(정숙공)←진(문화군)←돈(대승공11세,장경공) ※ 문화류씨에서 문화군은 대승공 11세 인기(정신공 승 아들)와 대승공 12세 진(장경공 돈 아들)입니다. 일부 못된 종원들이 좌윤공 효금을 문화군이라하면서 타문에서 허위사실로 말하는 문화류씨 시조가 류효금이라는 망발을 하니 두 선조에게만 문화군이라 하시기 바랍니다. 4. 대승류공신도비銘 ① 계해 1863(철종14)년 대제학 남병철 撰 5. 대승공 위토(묘소 관리용 총50,098평, 무자보 총목 51쪽) ① 50,098평에서 곡수(토지임대료)를 받아 대승공과 안택 이문 묘소를 관리하고 시제를 지냅니다 6. 대승공 묘소 관리 ① 대승공 묘소 : 구월산 ② 대승공12세 증좌의정 안택 묘소 : 구월산 (무자보 총목18쪽) 대승공 묘 우 200보(무자보1권10쪽) 하정보1권 2쪽. ③ 대승공13세 하정공 배위 풍주군부인이씨 묘소 : 신천군 문무면 조령리(무자보20쪽, 무자보1권13쪽, 하정보1권 문헌록8쪽 자손록3쪽) ④ 대승공14세 만호공 이문(하정공4남) 묘소 : 대승공 묘우측(무자보1권16쪽) 7. 대승공 묘지임야대장 명의인(무자보 총목 50쪽) ① 류일균 류무혁 류일균 류동휘 : 8에서 설명 ② 柳處均(무자보 4권 1095쪽 1071쪽 2명 : 대승공29세 하정공 만호공후) ③ 柳笙均(무자보 4권 1077쪽 대승공29세 하정공 만호공후) ④ 柳宗秀(무자보 4권 1062쪽 대승공30세 하정공 만호공후) ⑤ 柳程默(무자보 7권 478쪽, 대승공31세 하정공 만호공후) ⑥ 이하 동명이 많아 생략함 8. 대승공 위토 관리 종중(무자보 총목 51쪽-53) ① 신천군 문무면 추릉리 柳厚臣 묵방종중재산 ◎ 하정공후 무자보 4권 1101쪽 대승공 28세 후신←영창←영유←훈←이정←진←도원←일←대영←지연←영←문형←철산←설(이문2남)←이문(만호공, 하정공4남)←관(대승공13세,하정공), 하정파보 1권374쪽 ② 신천군 초리면 흥학리 柳龍燮 묵방종중 재산 ◎ 대지 323평이 경사루(?)터 추정 ◎ 하정공후 무자보 7권 594쪽 대승공 33세 재수(용섭)←원열←근칠←도영←흥구←한균←성화←귀영←이형←희일←성수←의←철영←승달←택←생←분←반(이문3남)←이문(만호공, 하정공4남)←관(대승공13세,하정공), 하정파보3권 1077쪽 ③ 신천군 초리면 흥학리 柳武赫 묵방종중 재산 ◎ 하정공후 무자보 4권 907쪽 대승공 30세 무혁←흥봉←동로←문준←양하←언학←상희←지양←창호←훈←천재←완←영수←하←종원←렴(이문1남)←이문(만호공, 하정공4남)←관(대승공13세,하정공) 하정보3권 842쪽 ④ 신천군 초리면 흥학리 柳昌河 柳一均 종중 재산 ◎ 하정공후 무자보 4권 947쪽 대승공 31세 창하←명식←성균←찬신←영구←근←이번←정필←득영←충민←몽길←흔←승주←한←종원←렴(이문1남)←이문(만호공, 하정공4남)←관(대승공13세,하정공) 하정보3권 879쪽 ◎ 하정공후 무자보 4권 1073쪽 일균과 1089쪽 익균(일균) 대승공 29세가 2명인데 대승공21세 옥 후손이므로 일균←권신←영상←척유←택←이돈←은←인원←옥←대영←지연←영←문형←철산←설(이문2남)←이문(만호공, 하정공4남)←관(대승공13세,하정공) 또 한명 익균(일균)은←보신←영림←상유←도←이항←함←지원←옥(대승공21세) ⑤ 신천군 초리면 용학리 柳一均 柳武赫 종중 재산 ⑥ 신천군 초리면 거문리 柳東輝 柳基華 종중 재산 ◎ 하정공후 무자보 7권 563쪽 대승공 31세 동휘←흥학←채균←득신←영오←현유←규←이환←형←인원←옥←대영←지연←영←문형←철산←설(이문2남)←이문(만호공, 하정공4남)←관(대승공13세,하정공) 하정보3권 1016쪽 9. 이 자료에 의하면 하정공 아버지와 아들 묘가 대승공묘 옆에 있어 하정공후손들이 선조묘소를 관리하고 시제를 지내면서 대승공묘를 벌초하고 관리하면서 위토답에서 곡수를 받아 대승공 시제를 지냈다는 자료입니다. 10. 무자보에서 대승공 묘소와 위토에 관련 있는 선조중에 동명이인인 분은 검색하지 않았으나 명단을 보면 이름 돌림자가 비슷하여 같은집안 이라 추정합니다. 11. 대승공8세 택(복야공) 묘소를 秉濬(29세) 基榮(28세, 정숙공후, 무자보16권 86쪽)이 圖本을 참고하여 찿았다는 것이며 孫榮祚가 문정공 경(복야공 아들) 묘소를 改封(봉을 고쳐 새로 묘를 만듬)하였는데 형조판서 이용희가 奏啓(상소올림) 함으로 왕이 윤허하니 臨湍縣監(현재 파주시 장단출장소) 이기혁이 명을 받들어 손가묘를 파해치고 복야공 묘를 봉축합니다. ※ 圖本 : (무자보 총목 158쪽)개경에 조윤검이 종개천 오래된절(柳氏齋宮)에서 “儒州柳氏世葬圖”를 가지고 와서 유주가 문화인줄 몰라 류씨 본손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윤검 아들 친척인 許佾(허일)에게 각는데 허일이 돈을 요구하였는데 根喆 泰赫 鼎斗(28세, 검한성공후, 무자보 14권 714쪽) 허일이 도망가면서 떨어진 山圖임(※후손중에 동명이인이 아닌분만 족보쪽수 표기함) 12. (무자보 총목 178쪽) 1866년 병준과 기영 등이 “儒州柳氏世葬圖”를 보고 문정공 경 묘소를 찼았고 1936년(무자보 총목 183쪽) 7월 도굴된 사실을 華均(28세, 검한성후, 모자보14권 280쪽)이 알고 정신공 승(대승공10세) 1936년 11월 15일 문간공 공권 향사에 보고합니다. 좌윤공(대승공2세)부터 문화군(인기, 온정공)까지 연11세의 묘소가 간간히 병화를 겪어 다 실전하여 춘추로 능히 향사를 받들지 못하고 날과 달로 능히 樵牧(땔나무를 하고 짐승을 치는 일)을 禁치 못하여 자손의 마음에 쓰라리고 이마에 땀이 난지 오직 오래 되었으니 다행히 병인년에 복야공과 문정공과 을묘년에 문간공과 병진년에 상서공과 갑자년에 장경공의 묘소를 다 지석으로 인하여 추봉하므로 遠慕(선조를 사모하다)의 뜻을 폈는데 이제 병자년에 정신공 묘소가 또 지석에 의해~~~~ ※ 설전된 선조묘 찾은 년도 ① 대승공 7세 공권(문간공) 을묘년(1915) ② 대승공 9세 언침(상서공) 병진년(1916), 택(복야공) 병인년(1926) ③ 대승공 10세 경(문정공) 병인년(1926) ④ 대승공 11세 승(정신공) 병자년(1936) ⑤ 대승공 12세 돈(장경공) 갑자년(1924), 인기(문화군,온정공)(?) ※ 대승공부터 12세까지 묘중에서 대승공묘는 류릉으로 보존되었지만 모두 실전되었는데 도굴꾼들에 의해 7분 묘를 찾았으며 대승공 12세 중에 북한에 묘가 있는 3분 안택(구월산) 진(문화군, 양주 창화동) 보발(장단 대덕산)은 묘지가 있고 돈과 인기 2분 합계5분을 제외하고 모두 실전입니다. 13. 실전된 선조 묘를 찾을 때 까지 선조들이 묘를 방치한 것이 아니고 실전에 대비하여 묘도(墓圖)를 3부 만들어 묘지 보존에 노력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살전되었고 일제 강점기에 도굴꾼에 의해 지석이 발견되고 묘도에 의해 묘지 위치를 찾아 복원하는 노력 해왔는데 대승공 묘지를 방치 햇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문간공 묘하에 齋宮이 있었다는데 서원록에 있는 대승공 사우인지 알수 없고 대승공이 유학자가 아니기에 영조때 사우철패 때 없어졌는지 연구해볼 문제입니다. 14. 대승공12세 안택(증 영의정) 1427년 대승공묘 옆으로 이장(총목200쪽) 했고 14세 이문이 대승공 묘소옆에 장사하였는데 안택과 이문의 제사나 벌초하면서 옆에 있는 대승공묘는 방치했다는 것도 말이 아닙니다. 15. 시간나면 족보와 대조해 보시고 댓글로 지도 편달 주시면 수정 보완하겠습니다. ※ 2008년 무자보 쪽수를 표기해서 이글을 읽으신분이 무자보를 확인해 보라는 의도인데 이글을 읽은 종원이 제에게 "자네 글의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실망하였습니다. 내가 왜 이런 글을 쓰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살지 모르지만 제가 알고 있는 종사를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 위함입니다. |
출처: 문화류씨하정공파 광주류재균 원문보기 글쓴이: ryu하곡
첫댓글 계속 좋은글 올려줘서 정말로 잘읽었읍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많은 자료를 올려주시요 감사합니다 문화 류씨 화이팅
무자보 세보총목에 류희림이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시어 묵방사 승려에게 부역을 면해주어 산소 관리를 하도록 "묵방사 완복문"을 남기셨는데
117쪽 우측 셋째줄에 후손들이 관리를 못했었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 ㅎ
117쪽 錢氏의 墓가 臨安에 있었는데~~~의 예를 들어 先塋을 관리하게하였고 118쪽에 대승공묘를 盜葬했다는 기사를 山井님 댓글로 확인했습니다. 감사드리며 다음 글 수정할 때 보완하겠습니다
고려조에서는 불교국가이고 보통 4대까지 관리한 것과 조선이 개국했으나 일반 백성들은 나라가 바꾸어 진 것을 알지 못하는 기간이 있었다니 얼마나 대승공 묘를 관리 했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유학이 자리잡은 조선 중기 이후에 선조 묘에 관심을 갖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121쪽 평안도관찰사 상운 묘갈문에도 관리가 잘되지 않은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소설 차원부설원기를 쓴 차천로는 1577문과 병과로 1583증시에 을과로 합격 1586년 대리시험으로 함경북도 명천 유배중에 여러 절을 찾아 다닌다는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보듯 1585년 황해감사 희림이 지은 묵방사완복문과
대승공 시조묘 묘갈문등을 둘러보며 차원부설원기 소설을 집필한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요즘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식이 호를 만들어 묘비를 세우고 족보에 호를 기록합니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대승공 초명 자 호를 계속 사용하지는 종원이 믾아 차씨가 만들어준 호를 사용하면 안된다고 하면 인정은 하는데 며칠 있으면 또 호(대승공 보다 못한 사람도 호가 있는데)를 이야기합니다. 차천로 차원부설원기를 말해버리면 더 혼란이 오기에 자세한 말을 하지 못하지만 이런일을 몇번 당하면 힘들어집니다.
山井류기창 대부님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상운선조 묘갈문을 보고 대승공 묘가 방치되엇다고 하는 종원을 보면서(그분 때문에 이글을 쓰려고 다시 족보를 읽어 보았지만) 고려시대 묘를 조성햇다는 것이 명문가라는 증거이지만 고려때 묘는 거의 실전되었다는 것은(두굴꾼에 의해 찾은 묘를 제외하고) 후손들이 묘도를 그려 보존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지금처럼 벌초를 했는지 제사를 해마다 지냈다면(서원이 없던 고려이기에 묘제) 과연 묘를 실전했겟는가?하는 의문과 제 경험으로 보면 3-5년 지나면 묘가 무너지기 시작하여 사토를 하는데 고려와 조선홍춘경 이전까지 누가 관리했는가? 생각해 봅니다. 하정공이 82세때 아버지 묘를 구월
하정공이 82세때 아버지 묘를 구월산으로 이장한 것을 보면 지금은 10년 정도 지나면 이장(살이 모두 분리된후 깨끗한 곳에 뼈를 모신다는 속설로)하는데 조선초 정승도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67년만에 이장하였는데 당시 평균 생년 나이로 보면 하정공이 돌아가셨다면 이장을 했을지 묘가 관리 되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재산목록을 보면 묘를 관리했다는 증거입니다.
류희림은 1561문과급제
1579충청도, 1585황해도
1587강원도 관찰사를 역임
1592임란시 동지중추부사,
좌우승지로 예조참판으로
선조에게는 호성공신3등
광해에게는 위성공신2등
문양군으로 부조묘의 혜택을
받으시어 문양군과 부친 문원군 복룡, 조부 참의공 인호 3대 묘역이 91.12월 서울시문화재로 지정되어
송파구 오금공원에 있습니다
어느 종원이 대승공 향사를 희림선조처럼 부조묘의 불천위제사를 하자고 하기에 부조묘를 지정할 국가(조선)가 있느냐? 또는 일부 지방에서 시행하는 유림 불천위제사처럼 어느 향교에서 나서며 또 종중불천위제사처럼 어느 종중에서 누가 부조묘를 지정하며 재정적지원을 하느냐?고 해서 그분이 의견을 철회한 일이 있습니다.
불천위 제사건 향사이건 후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문양군 류희림 선조님 불천위로 부조묘의 명예는 얻었어도 후손이 변변치 못하여
송파구 오금동 가락동 3만5천평 종토를 모두 팔아 먹어서 묘역조차 옮겨야 될 형편에서
서울시 문화재 78호 신선경과 류인호(문양군 조부) 묘역과 79호 문양군 류희림 묘역(부친 문원군 포함)으로
지정받았으나 이후 묘역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제실도 춘천(진사공)에 초라하게 있는 실정입니다
네이버나 다음지도에서 "문화류씨묘역"을 치면 바로 오금공원 문화재 지역이 나타납니다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에 모시어서 류재진 정신공 회장님(전 충경공파종회장님)께서
2년때 참석하시고는 문양군 종중에서만 관리할것이 아니고 "서울시 문화류씨 문화재보존회"를 만들어서
관리를 해야 된다고 조언을 하셨지만 무슨염치로 얘기를 꺼내야 될지 난감합니다
수고하십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