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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의 지식
하박국 1:1-2:14
2024년7월14일 주일 낮 11시
인도,설교 선형수 목사
주은혜교회 진천
하박국은 "팔을 벌려 안다", "포옹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안고 씨름하다 즉, 그 시대의 문제와 씨름한다는 말입니다.
하박국이 예언의 말씀을 환상으로 받았습니다(1:1).
다음 내용은 환상 중에 하박국이 주께 묻는 내용입니다.
제가 도와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폭력입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구해주지 않으십니다(1:2).
제 눈으로 억압과 폭력을 봅니다.
다툼과 소송이 벌어집니다.
왜 이런 고통과 어려움을 보게 하십니까?(1:3).
법은 힘을 못 쓰고 정의는 영영 무너졌습니다.
사악한 자가 의로운 사람을 둘러싸니 정의는 뒤틀리고 맙니다(1:4).
율법이 해이해지고 공의가 시행되지 못합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개인이나 사회는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요즘은 덜하지만, 과거 우리나라, 한국 사회도 그러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법보다 폭력이 난무하는 유다를 하나님께 고발했습니다.
모세 율법이 해이해 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는 하박국 시대였습니다(이순한, 92).
오늘 이시대 우리나라도 불의가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유권무죄, 유전무죄의 사회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예레미야와 동시대 활동했습니다.
하박국은 이스라엘 종교 전통에 깊이 근거한 활력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niv study bible, 1411).
바벨론의 침공 예언(1:6)은 하박국이 요시야 통치 말기까지(주전 640-609) 혹은 여호야김 통치 초기까지(609-598) 유다에 살았음을 암시합니다.
그 예언은 갈그미스 전투(605) 전.후에 행한 것입니다.
갈그미스 전투는 이집트 군이 마지막 앗수르 왕을 지원하러 갈때, 바벨론의 나보폴라살과 느브갓네살에 의해 궤멸되어 이집트 국경까지 추격당했습니다(예레미야 46).
하박국은 예레미야처럼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597년 공격당한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niv study bible, 1411).
하박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직접적 메시지는 없고, 그 선지자와 하나님 간의 대화 형식입니다.
1,2장에서 하박국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 논쟁을 벌입니다.
그가 답을 얻은 후 3장에서 아름다운 신앙 고백으로 답합니다(niv study bible, 1411).
다음은 환상 속에서 하박국의 처음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첫번째 답입니다.
하박국서 1:5-11 KOERV
"내가 악랄하고 성질 급한 바빌론 사람들을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땅 끝까지 진군하여 남들이 사는 성읍들을 차지할 것이다"(1:6).
바빌론은 두려운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곧 법이요 권위인 자들이었습니다(1:7).
그 말들은 표범보다 빠르고 황야의 늑대들보다 사나웠습니다.
그 말들은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처럼 먼 땅에서부터 날쌔게 날아왔습니다(1:8).
바빌론은 모래알처럼 많은 포로를 잡아갔습니다(1:9).
그들은 왕들을 조롱하고 장수들을 비웃었습니다.
모든 요새들을 우습게 여기며 흙 언덕을 쌓아 모든 요새들을 점령했습니다(1:10).
그들은 자기들의 힘이 곧 하나님이라고 믿으며 죄를 짓는 자들이었습니다(1:11).
하박국이 활동할 때는 유다가 여호야김 왕 통치아래 있었습니다.
여호야김은 야망이 넘치고, 잔혹하고 부패한 자였습니다.
하박국은 유다의 사회적 부패와 영적 배교를 묘사했습니다.
주전 7세기 후반이었습니다(1:2; niv study bible,1413).
다음 내용, 예레미야서 36:21-26 KOERV은 여호야김 왕의 패역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여호야김 왕은 여후디를 시켜서 예레미야가 불러주고 바룩이 기록한 그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여후디는 엘리사마의 방에서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왕과 왕 앞에 서 있는 모든 신하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예레미야 36:21).
[22] 그 때는 아홉째 달이어서 왕은 겨울 별관에 머물렀으며 왕 앞에 있는 난로에는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23] 여후디가 두루마리를 서너 단씩 읽어 내려갈 때마다, 왕은 읽은 부분을 서기관의 칼로 잘라 내어서 난로 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이렇게 왕은 두루마리를 모두 난로 불에 태웠습니다.
[24] 왕과 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 모든 말씀을 듣고도 두려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슬퍼하며 옷을 찢지도 않았습니다.
[25]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에게 두루마리를 태우지 말라고 간청하였지만, 왕은 그들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26] 왕은 오히려 왕자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에게, 서기관 바룩과 예언자 예레미야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숨겨주셨습니다.
여호야김 시대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말씀 두루마리를 난로 불에 태우는 자들이 살던 시대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볼 때, 하나님은 잔혹함과 폭력을 묵인하는 것처럼 여겨져서 놀랐습니다(1:2;1:13).
"파괴와 폭력이 제 앞에 있나이다"(1:3).
그는 예레미야와 비슷한 불평을 하나님께 했습니다(1:3; 렘 20:8; niv study bible, 1413).
"법이 마비되고...정의가 구부러졌습니다(1:4)."
부유한 지주들이 뇌물로 왕궁 지도자들을 매수했습니다(1:4; 참고 미가 3:11; 7:3; niv study bible, 1413).
힘없고 가난한 평민들은 더욱 착취와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바빌론 사람들을 일으키노라"(1:6; 이사야 10:5-6).
유다의 배교는 바빌론 침공에 의해 심판받게 됩니다.
바빌론은 주전 626년 앗수르에서 독립했습니다.
612-605년 앗수르 권력을 멸망시켰습니다.
539년까지 융성했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신흥 강대국 바빌론 인들을 지칭합니다(niv study bible,1413).
교만한 자들의 특징은 자기들의 명예를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1:7).
바벨론 군대의 특징은 빠른 기마병력과 기동력이었습니다(1:8).
빠른 몽골 기병과 유사했습니다.
앗수르 제국이 많은 포로들을 잡아가고 혼혈정책을 폈던 것처럼, 바벨론 군대는 많은 포로들을 잡아갔습니다(1:9).
그들은 토성을 기존 도시, 성벽 높이까지 쌓아서 성벽을 타고 넘어가 성을 점령했습니다(1:10).
바벨론 사람들은 자신들의 막강한 군사력을 믿었습니다.
그 군사력이 그들의 섬기는 신이었습니다(1:10).
그들의 신은 폭력이었습니다.
조폭들의 신은 폭력입니다.
폭력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은 모든 것을 무력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할 것이다"(마 26:52)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박국 선지자 첫번째 질문과 하나님의 답은 대조적입니다.
하박국은 유다 사회 폭력과 불의와 배교를 왜 그냥 보고 계시는지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벨론 군대의 잔혹함과 빠른 기동성을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말썽부리는 자식을 좀 혼내 달라는데 조폭을 동원한 셈이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바벨론 제국에 비해 아주 약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벨론 나라를 도구로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박국의 두번째 질문 혹은 불평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박국서 1:12-17 KOERV(쉬운성경)
[12] "주님께서 정의를 세우시려고 바빌론을 임명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을 혼내시어 깨닫게 하시려고 바빌론을 세우셨습니까?"
하박국은 유다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 왜 더 악한 바빌론을 사용하시는지 묻습니다.
[13] "사악한 자들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집어삼키는데 어째서 잠자코 계십니까?"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독한 바빌론을 사용하여 의로운 유다를 유린하도록 하십니까? 라고 하박국은 질문합니다.
사실 유다 역시 패역과 불의와 배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볼때 유다의 악은 더 악랄한 바빌론에 비할 바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14]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바다의 고기처럼 다루시고 우두머리가 없는 바다의 생물들처럼 다루셨습니다.
[15] 바빌론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낚시로 낚아내고 그물로 끌어냅니다. 기뻐하며 그물에 모아들입니다."
바빌론에 희생 당하는 자들은 무기력하여 그물속에 든 물고기과 같다고 합니다.
바빌론은 인간을 인격이 없는 물고기 취급했습니다.
그들에게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함은 바람처럼 헛소리로 여겨졌습니다.
[16] "바빌론은 자기 그물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그물에게 향을 태워 바칩니다. 그물이 고기를 넉넉히 주었다고 음식을 기름지게 베풀어주었다고 감사하며 그렇게 합니다."
바빌론은 자기들의 힘, 무력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무력을 고기잡는 그물처럼 여기고 숭배했습니다.
폭력이 그들의 신이었습니다.
[17] "그가 계속 칼을 뽑아 무자비하게 뭇 민족들을 죽여야 하겠습니까?"
바빌론이 계속 칼로 여러 민족을 죽이도록 놔두셔야 합니까? 라고 하박국은 질문합니다.
하박국서 2:1 KOERV
[1] 내가 내 망대에 올라가 성벽의 내 자리에 서서 지켜보겠다. 주님께서 내게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내 질문에 무어라고 대답하시는지 지켜보겠다.
파수꾼이 성벽 망대에 올라가서 적의 침투를 살피듯, 하박국은 깨어서 하나님의 답을 기다립니다.
하박국서 2:2-17 KOERV
[2] 주님께서 내게 대답하셨다. “이 환상을 서판에 분명히 기록하여 누구든지 뛰어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달려가면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3] 정해진 때가 오면 이 환상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다. 끝은 정해졌으며 바뀌지 않는다. 그 때가 더디 온다고 해도 기다려라. 그 때는 지체하지 않고 온다. 반드시 온다.
바벨론 심판과 멸망의 때가 정해져 있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체되는 것처럼 여겨져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 사후 약 66년, 주전 539년 바벨론은 멸망당합니다(niv study bible, 1414).
어떤 분은 "믿음이란 우상 없이 기다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4] 의로운 사람은 이 환상에 대한 믿음으로 살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 개혁 모토(강령,구호,표어)였습니다.
켐벨 몰간은 믿음의 사람이란 모든 문제를 하나님
과 마주앉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5] 거만한 자는 많은 재산에 속으며 스올처럼 탐욕스러운 자는 결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그런 자는 죽음과 같아서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나라들을 제 것으로 만들고 모든 민족들을 잡아온다.
이 세상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만족스럽다, 이제 그만 모은다 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탐욕은 무덤과 같이 만족이 없습니다.
바벨론의 탐욕은 끝이 없었습니다.
바벨론은 하박국 당시 폭력의 제국이기도 하지만, 어느 시대나 바벨론 같은 폭력과 탐욕이 있습니다.
러시아와 그 수장 푸틴은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수년간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개인 역시 무한한 탐욕을 추구합니다.
[6] 그러나 이 모든 민족과 나라들이 그를 웃음거리로 삼고. 그를 조롱하는 수수께끼를 만들어 내지 않겠느냐?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남의 것을 긁어모으는 자야 너에게 재앙이 닥치리라. 제 몸 위에다 빚을 산더미처럼 쌓는 자야 그것이 얼마나 오래가겠느냐?’
[7] 빚쟁이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지 않겠느냐? 너를 놀라게 하는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겠느냐? 그들이 너를 약탈할 것이다.
[8] 네가 많은 나라들을 털었으니 이제 남은 모든 민족들이 너를 털 것이다. 네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고 그 땅과 마을과 거기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바벨론이 저지른 악은 약탈, 살인, 폭행이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듯이, 그들은 더욱 크게 보복과 응징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 힘과 가진 것을 의지하는 국가나 개인은 반드시 망하게 하십니다(Elizabeth Achtemeier, 48).
바벨론 처럼 가진 것으로 약자에게 폭력과 횡포를 일삼는 모든 자들과 단체는 화가 있습니다.
[9] 돈을 가지고 남들 위에 올라서서 재앙을 피해 보려고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폭력을 휘둘러 재산을 모으는 자야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10] 네가 많은 민족들을 죽이려고 계획을 꾸몄지만 그것은 네 집안을 망신시키는 계획이 되었고 너는 네 목숨을 잃게 할 죄를 짓고 있다.
탐욕은 재앙이 따릅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나 나라를 희생시키고 약탈하고 재화를 쌓는 국가나 개인의 탐욕은 반드시 심판과 벌이 내립니다.
정당하지 않은 부, 빼앗은 재화는 많은 이들의 증오와 시기를 부릅니다(John Calvin, 101).
하나님은 바벨론이 영광과 명예로 여기는 것을 수치로 바꾸십니다.
다른 나라나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그 가해자와 그 가해 단체의 영혼을 해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악이 그들 자신에게 돌아갑니다(John Calvin,103).
[11] 네 집 담장의 돌 하나가 외치면 들보가 맞장구칠 것이다.
[12]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서 도시를 짓는 자야 불의 위에 마을을 세우는 자야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담장 돌과 나무 들보를 의인화 했습니다.
바벨론이 쌓은 담장과 나무 기둥은 다른 이들과 나라의 피와 눈물과 포로들의 노역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악행과 잔혹함으로 약탈하여 지은 건물, 혹은 집은 기둥의 나무가, 담장의 돌들이 울부짖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집이나 건물은 그 약탈자의 가문이나 집안 사람들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온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현재도 남의 노동이나 재화를 착취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행위 자체로 저주입니다.
원수가 집안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남남이고 모르는 사이면 서로 탈법이나 불의를 저지르면 법으로 해결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안 가족끼리, 형제끼리 상속 재산이나 부동산 보상금 등을 혼자 다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살아계신 부모님 체면을 보아서 서로 속앓이만 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서로 모르는 남남보다 더 악하다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이해관계가 얽힌 경우라 하더라도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그 기도하는 신자들에게 더욱 은혜와 평강을 더하실 것입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했습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기도하면 분명 주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13] 보라. 이것이 만군의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일이 아니냐? 뭇 백성들은 결국 불에 타 없어질 것을 위해 죽도록 수고했고 뭇 나라들은 헛된 것을 위해서 지치도록 노력했다.
믿는 자들, 의인들이 낙심하지 말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불의를 행하는 것은 더욱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남의 피를 흘리게 하거나 눈물과 탄식을 짜낸 재화나 권세나 명예는 불에 타 사라지듯, 바람이나 물에 쓸려가듯 헛된 것입니다.
악한 수단이 아닌 정당한 수고로 얻은 것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14] 물이 바다를 덮듯이 땅이 주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찰 것이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 도시가 멸망당할 때, 팔레스틴 지역이 도륙과 약탈 당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진듯 했습니다.
앗수르를 이어서 바벨론이 모든 주변 국가들을 집어삼킬때 하나님의 영광은 비추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침묵했습니다.
그들이 너무나 큰 고난 중에 있어서 하나님을 송축할 수 없었습니다(John Calvin, 108).
그러나 하나님은 정하신 때에 바벨론에 손을 뻗으시고 복수하시게 됩니다.
그때 유대인들과 온 나라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그의 섭리 속에 다스리심을 온세상이 인정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이 온 땅에 기득하게 됩니다.
인간의 권세 중 하나님이 통제할 수 없는 권세는 없습니다(같은책,108).
바다의 깊이는 너무 깊어서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물론 현대 기술과 장비의 도움을 받으면 지금은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바다의 깊이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이 세상을 덮고 하늘과 땅을 채우고 남아서 넘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지식은 무한하고 제한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그분의 다시 오실때까지 영원히 넘쳐흐릅니다.
또한 선지자 하박국은 정한 때에 바벨론을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위대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John Calvin, 109).
왜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시는데 바벨론을 사용하셨습니까?
그 시대 상황에서 하나님의 최선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다를 멸망시키시고 바벨론 칠십년 포로 생활을 통해 남은 자들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과 자녀들 자손들 되시길 주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