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을 비롯해 연천봉·삼불봉, 관음봉, 형제봉 등 20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능선의 모양이 마치 닭 볏을 쓴 용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계룡산(鷄龍山)이라고 불린다
정감록(鄭鑑錄)에는 이곳을 십승지지(十勝之地), 즉 큰 변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라 하였다.
이러한 도참사상으로 인해 한때 신흥종교 및 유사종교가 성행했으나 종교정화운동으로 1984년 이후 모두 정리되었다.
16명의 회원들은 신들이 머물다 떠난 자리, 계룡산에 깃들어 행복한 하루를 만끽하였다.
우리가 일찍 도착해서인지 계룡산 신원사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탐방안내소에서 문화재 관람료로 1인당 3천원씩 내려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내세울만한 문화재도 별로 없는데 이렇게 징수하는 것은 사찰들의 횡포로 생각되었다.
연천봉으로 오르다 보면 모퉁이 길을 한 구비 돌 때마다 소림원·보광원·금룡암·고왕암 등의 암자들이 차례로 나온다.
헌데 몇은 그 성격이 모호하기 짝이 없다.
금룡암 입구 나무둥치에는 ‘많은 신들을 모시고 계시는 보살님 및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알림 글이 걸려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상당 부분 무속과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사종교가 정리되었다고 하지만 신원사가 속한 계룡면 양화리 주변엔 무속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신원사 입구 주차장 오른편으로 무질서하게 꼽혀있는 여러 개의 푯말은 각기 자신이 모신 신의 영역으로 사람들을 손짓한다.
우리는 3천원의 입장료가 아까워서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가장 먼저 나타난 신원사는 옛 모습을 대체로 많이 지니고 있다.
본래 백제 의자왕 때의 중 보덕화상이 창건하였고, 그 안에 있는 영원전은 무학대사가 세웠다
지금의 건물은 그 때 지은 것이 아니고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뒤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성계가 꾼 꿈을 임금이 될 꿈이라고 풀이해준「팥거리할머리」를 천기가 누설될까봐 죽였다.
임금이 된 뒤에 이 할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신원사를 지었는데 옛 이름이 신혼사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 할미는 계룡산의 산신이 되어 매바위라고도 불리는 상봉에 살면서 계룡산을 다스린다고 한다.
신원사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중악단(中嶽檀)은 묘향산(상악), 지리산(하악)과 함께 3악(三嶽)의 하나였다
중악단은 예로부터 하늘에 지내는 제사, 국행제가 열렸던 유서깊은 곳이다
지금도 옛 전통을 이어 일 년에 한 차례씩 국가와 백성의 무사안위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리고 있다.
불교 밖에서 수용한 종교를 절 내부에 모신 산신각이나 칠성각처럼 중악단 또한 불교와 무속, 혹은 유교의 접합지점이 된다.
고왕암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명으로 등운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당나라 소정방과 신라 김유신이 백제를 침공했을 때 의자왕의 아들인 융 태자가 7년 동안 피신해 있다가 잡혀갔다.
그래서 사찰 이름을 고왕암(古王庵)이라고 지었다고 전해내려 오고 있다.
고왕암의 스님은 외출하였는지, 늦잠을 주무시는지 나그네들의 발소리만 가득 찼다
고왕암 대웅전 옆의 범상치 않은 바위 아래 삼성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측에 계룡산산신, 중앙에 나반존자, 죄측에는 칠원성군이 모셔져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불교의 냄새보다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민간신앙의 흔적이 사찰에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 아래 미륵보살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옆에 백왕전이 있었다
고왕암은 지난 2003년에 백제 역대 왕들을 추모하기 위한 전각을 마련하였다
백제왕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해서 백왕전(百王殿)이라고 이름 지었다.
백왕전에는 백제 31대 왕들과 제왕자모 소서노와 의자왕의 아들 풍 태자와 융 태자, 충마, 백제유민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는 지난 2007년부터 매년 10월에 추모제를 올리고 있디고 한다.
해마다 이맘때쯤 당신께 바치는 나의 기도가
그리 놀랍고 새로운 것이 아님을 슬퍼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의 얼음도 풀리는 봄의 강변에서
당신께 드리는 나의 편지가
또 다시 부끄러운 죄의 고백서임을 슬퍼하지 않게 하소서.
살아 있는 거울 앞에 서듯 당신 앞에 서면
얼룩진 얼굴의 내가 보입니다 .................................................이해인 <사순절 기도시> 부분
연천봉으로 가는 길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름길로 서서히 지쳐갔다
눈이 제법 많이 쌓여 있어서 발길을 옮기기에도 많이 불편하였다
그러나 고개 너머로 보이는 연천봉의 머리가 히말라야의 설산처럼 성스럽게 보여서 위안이 되었다
연천봉 삼거리에 올라서니 많은 등산객들이 모여서 앞으로 갈 길을 협의하느라 시끌벅적하였다
연천봉 삼거리에서 조금 올라갔더니 시산제를 지내는 산악회가 있었다
힘들게 지고 올라온 떡을 푸짐하게 나눠 주어서 연천봉을 향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신산회는 주님께서 항상 곁에 계시니 별도의 시산제는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날씨가 좋아서 계룡산의 최고봉이 천황봉이 손에 잡힐듯이 가깝게 다가왔다
천황봉이란 명칭은 보통 큰 산의 주봉에 붙여지는 이름으로 속리산, 월출산 등 주봉들의 이름이다.
과거에는 계룡산의 가장 높은 봉이라 하여 상제봉(上帝峰), 상봉(上峰), 제자봉(帝字峰) 등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현재 천황봉에는 군 레이다기지와 방송수신탑이 설치되어 있어 출입 금지 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눈이 쌓여서 미끄러운 길을 10여분 올라가 오늘 산행의 최고봉인 연천봉에 올라섰다
해발 738.7m인 연천봉(連天峯)은 ‘하늘과 이어진 봉우리’라는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가 이 봉우리에 올라 이곳에 왕도(王都)가 서고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도록 천지신명에게
기원하였는데,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정하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연천봉에서 잠시 내려선 양지쪽에 자리잡은 등운암으로 내려와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2008년 9월 계룡산에서 비를 만났는데 이곳 주지스님께서 법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등운암(騰雲庵)은 신라 문무왕 때인 665년에 정씨(鄭氏)가 나라를 일으켜 계룡산에 도읍을 정한다는 도참설이 퍼지자 등운대사가
왕기(王氣)를 누르기 위하여 창건한 암자라고 전한다.
올라갈 때는 골짜기를 따라 갔지만 하산은 능선을 따라 내려왔다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내려오다가 중간에서 벗어버렸다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보광원에서 쉬고 있는데 스님 한 분이 나와서 둘러보더니 바로 사라졌다
매표소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재미있는 문구를 내붙인 식당이 나타났다
'죽여주는 순두부, 살려주는 도토리묵...'
산꾼들의 이목을 끌만한 멋진 아이디어가 돋보였는데.. 우리는 갈 길이 멀어서 스쳐 지나왔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정호승 <꽃을 보려면> 전문
산행이 너무 일찍 끝나서 논산의 탑정호수변생태공원에 들렀다
너른 저수시 주변에 나무 데크를 깔고, 편의시설을 많이 만들어서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세 명의 미녀를 거느린 마르코 회장님의 흐뭇한 표정이 꿈을 꾸고 있는듯 하다 ㅎㅎㅎ
탑정호수변생태공원 근처에 있는 계백장군 묘소를 참배하였다
이곳은 계백장군의 묘소로 추정되는 곳으로 백제 유민들이 시신을 거두어 매장했다고 전해 온다
계백장군은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에 쳐들어오자 황산벌에 나가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나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첫댓글 닭벼슬을 닮은 계룡산 정말 멋집니다.개인적으로 계룡산 자락에 위치한 대전현충원에 저희 부친께서 자리하고 계셔서, 종종 가보는곳입니다...
문필봉, 선녀봉 두자락도 한번 올라보고 싶은 곳이거든요... 언제 한번 올라봅시다~~~
사람마음이 신이지요
영과 육을 분리하면 신이잖아요 ㅎ
우리들 마음을 거기두고 왔으니 조만간 가지러 육이 가야할랑가 봅니다
계절의 변화 길목
얼음꽃이 장관였습니다
아직도 눈이 많네요...
같이 참석하지 못해 아쉽고 아쉬워요,,
회장님의 세세한 글과 장면으로 감흥 얻어갑니다.
멋진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역시 우리 회장님의 산행기를 읽어야
산행이 마무리 되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