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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의 시험 받으신 예수(눅4;1-13)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은 첫 아담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를 믿는 모두를 살리기 위함이다(롬5;18).
그것위해 말씀대로 여인의 후손으로 오셨다(창3;15,마1;16).
그런 그의 공생애는 세상죄를 전수받는 요한의 세례부터이다.
이는 구약에서 짐승에게 사람의 죄를 안수하여 넘기고
대신 피흘리게 하는 제사법의 종결이다.
그런후 첫 행보로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광야에 가신다(눅4;1).
왜? 그가 시험 받으러 가셔야 했나?
첫 아담이 마귀에게 져서 마귀의 종된 때문이다.
이 마귀의 권세를 깨트리는 것이 그가 오신 이유다(요일3;8).
그것은 사망 권세안에 들어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다.
때문에 마귀를 끌어들이기 위해 광야에 가신 것이요,
오히려 마귀가 예수께 시험을 당하는 것이다.
마귀는 이 세상에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려 하는데,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
당연히 예수님도 아시고 마귀의 불법을 드려내려 기다리신 것이다.
마귀가 세 번에 걸쳐 40일간 금식한 예수님을 시험한다.
첫째,“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돌들을 명하여 떡 되게하라”(3절).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이가 돌을 떡만드는 것이 어렵겠는가?
그러나 마귀가 하라 했기에 하면 마귀의 종되므로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니라”고 응수하신다(신8;3).
둘째,"내게 한번 절하면 천하의 권세와 영광을 네게 주리라“(5-7절).
천하 모든 영광은 원래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것이다(창1;28).
그런데 마귀에게 졌으므로 이 영광을 마귀에게 넘겨준 것이다.
곧 말씀에 대한 불순종 때문이기에(신6;13)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고 기록되었다”로 이기신다(8절).
셋째,“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꼭대기에 뛰어내리라.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리라”(10-11절).
하나님의 말씀이 참인지를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시91;11-12).
이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말라”로 물리치셨다(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시험용이 아닌 믿음용이다.
마귀는 오늘도 동일한 잣대로 성도를 시험한다.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요일2;16).
이 유혹으로부터 이기는 모범을 예수님이 친히 보이셨다.
우리앞에는 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의 두 길이 있다(신30;15).
첫 아담처럼 순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나와 내 자손이 살기 위해 생명의 길을 택하자!(신30;19).
그것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위에 서는 것이다!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를 통한 가르침(누가복음5;12-26)
예수께서 한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신후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증거하라’ 하신다(눅5;12-13)
모세의 명한 예물이 무엇인가?(레14장).
문둥병자가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로 산 새 두 마리를 드리되,
한 마리는 잡아 피 흘려 문둥병자에게 뿌리고,
다른 한 마리는 산채로 두었다가 들에 놓아준다.
그런후 속건제로 드린 어린양의 피를 문둥병자의 우편 귓부리,
오른손 엄지가락, 오른 엄지 발가락에 바른다(레14;14).
그리고 피를 발랐던곳에 기름도 바른다(레14;17).
이 의미는 문둥병은 말씀에 불순종한 죄 때문이라는 것이요,
그러니 네 귀에 말씀받고 말씀따라 일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둥병자가 고침받은 것은 죄사함 받았다는 것이요.
그러므로 그 일을 행하신 이를 네가 제사장에게 증거하라는 것이다.
이 뜻을 제사장이 알았다면 예수께 달려왔어야 했다.
이 소문으로 많은 무리가 오니, 그중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도 있다.
그 무리가 심히 많은지라 어느 중풍병자 일행이 지붕을 뚫고
침상을 예수앞에 내리매, 저희 믿음을 보신 예수님이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신다(20절).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참람하다.
하나님외에 누가 죄를 사하느냐‘하며 수군거린다( 눅5;21).
이에 저들의 속을 아시는 예수님이 ‘죄사함을 받으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중 어느것이 쉽겠느냐 하신다(23절).
당연히 예수님 입장에서는 병 고치는 것이 쉽다.
병 고침은 선지자를 통해서도 할수 있다(왕상17장, 왕하5장)
그러나 죄 사함은 누가 대신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만 감당할수 있는 것이다.
그러시며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하니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돌아간다(눅5;24-25).
이런 일련의 사건은 특히 제사장 서기관등 지도자들에게
죄 사하는 권세가 인자에게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들은 열심은 있었으나 믿음을 좇은 것은 아니었다(롬10;2).
그러나 중풍병자 일행은 주님이 감동하시는 믿음이다(눅5;20).
이들의 믿음은 초림하사 죄 사하시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중풍병자는 자신의 인생을 역전시켰다.
주님이 감동하시는 믿음 드리면 오늘도 이런 역사 일어난다.
오늘은 ‘다시오리라’는 주의 약속을 믿고 행하는 믿음이다.
각 처지에 따라 내어놓는 믿음의 형태는 다르지만,
그 핵심은 많은 이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단12;3).
다시 한번 허리를 동이고 우리 함께 나아가자!
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27-32)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한번 죽는 것은 정한것이요 이후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히9;27).
죽는다는 것은 육신만이 아니라 영의 죽음이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천국에서 영생할 사람을 여기서 생육 번성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세상 끝나는 날 선한 일을 행한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일을 행한자는 심판의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요5;29).
이 선악의 판단 기준으로 준 것이 율법이다.
율법 있기 전에도 모두가 죄인이었으나, 이를 주심은
너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율법의 뜻을 왜곡하여 자신들의 행위로
자칭 의롭다 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요
이들로 부터 매국노, 죄인이라 정죄받는 이가 세리다.
그래서 그들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 한다.
반면,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한다(눅18;11-12)
그렇다면 과연 누구에게 구세주가 필요한가? 죄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세리에게 나를 좇으라 하신것이요,
마태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 버리고 예수를 좇은 것이다(눅5;28).
이에 감사한 마태가 주를 위해 큰 잔치를 벌리니
여러 세리들과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 소문 듣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와서
“너희는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비방한다(30절).
이에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대답하신다(31-32절).
이들은 행위의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다(롬10;2).
하나님의 원하심은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다(시51;17).
상한 심령이란 주님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것이다.
행위보다 중한 것은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아는 것이다(마23;23).
“의” 하나님의 옳음으로 그 기준이 율법이다.
“인” 율법으로 정죄하는 것은 용서가 전제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신” 예수로 죄사함받고 영생한다는 믿음이다.
이 뜻 모르고 행위가 초점되는 것이 헛 제사요, 헛 예배다.
어떤 행위로도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에 갈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내어 “의”를 삼으신 것이요
그러므로 누구든 예수를 믿으면 “의롭다” 칭함 받아 구원받는다.
지금 우리의 일은 주의 명하심대로 이 은혜를 전하는 것이다(행1;8).
우리 모두 순종하여 더 좋은 생명의 부활의 때를 준비하자!
인자가 영광으로 오실때에(마25;31-46)
천하의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목적을 이룰때가 있다(전3;1)
농부가 씨 뿌리고 돌보고 추수할때가 있듯이
신앙생활도 은혜받고 구원얻을 때가 있고, 일할 때가 있다.
구원의 기회 놓치면 그대로 지옥이요
구원 받은 후 일할 기회 놓치면 하늘의 상급은 없다.
일할수 있는 기회는 육신의 때 뿐이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도 자기의 때를 따라 행하셨다(요8;6).
하나님이 때를 따라 세상에 이루실 일이 세가지다.
곧 유월절과 맥추절, 초막절이다(신16;16),
그리스도의 피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유월절이요,
그 다음이 구원된 이들을 열매로 거두는 맥추절과 초막절이다.
맥추절은 여름 농사의 열매인 밀 보리를 추수하는 것이요.
초막절은 가을 농사 열매를 추수하는 것이다.
맥추절은 이방인, 초막절은 이스라엘을 추수함에 대한 비유이다.
먼저 된 이스라엘이 나중되는 것은
이방의 충만한 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롬11;25).
이는 예수께서 재림하실때까지요,
재림하시면 천년왕국 펼쳐지고 그때가 끝나면 마지막 심판이 있다.
이것이 세계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스케쥴이다.
주님이 마지막 심판 하실때는 지구상에 있던 모든자를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하여 서게 한다(마25;31-32).
오른편에 있는 자는 의인이라 불리는 천국 갈자요,
왼편에 있는 자는 영벌에 처해 불과 유황못에 던질자이다.
세상에 태어났던 누구도 이날을 피할 수가 없으니
내 부모 형제가! 이때 왼편에 서지 않게 해야 한다!
그 일을 위해 주님이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신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둘째 사망, 곧 지옥의 심판은 없다.
그러나 행위에 대한 심판은 있다.
오른편의 복받을 자들은 주님이 목마르고 주릴때 대접한 자들이다.
형제중 지극히 작은자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한 것이다(40절).
곧, 복음을 전하는 자를 대접하면 결코 상이 있다(마10;40).
유월절은 이천년전 주님의 십자가로 이미 이루어졌다.
이제는 마지막 여름 추수하러 주님이 곧 다시 오신다.
인자가 영광으로 오실때에 내가 내놓을 열매가 있는가?
주님에게 기쁨 드린자는 첫 열매되어 첫째 부활에 참예하여
천년동안 주로 더불어 왕노릇 할 것이다(계20;6).
우리도 할수 있다! 한번 해보자!
우리가 육신의 때 드리면, 열매는 주님이 맺게 하신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눅5;33-39)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3;23).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 약속하셨으니 크게 두가지다.
첫째는 죄인 구원을 위한 구세주에 대한 약속이요(창18;10).
둘째는 구원된 이들을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약속이다(요14;3).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만날 이들은 당연히 죄인들이다.
그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으로 네가 죄인됨을 알고(롬7;7)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참뜻과 달리 율법의 행위로만 의로워지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을 만나 먹고 마시며
자기들처럼 금식하지 않는다고 비방한다(눅5;30-33).
금식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죽게되어 애타게 구세주를 기다리는 죄인들이 하는 것이다.
죄인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기에 초상집과 같다.
그렇다면 죄인의 신랑으로 오신 구세주 만난후에는
눈물 씻고 금식 멈추고 잔치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인줄 아는 마태는 잔치를 벌렸다.
그러나 자칭 율법을 잘지킨다는 바리새인 등이 오히려 힐난한다.
이미 세례요한이 이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증거한바 있고(요1;36),
예수님도 여러 표적을 통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나타내신바 있다.
곧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자를 고치심은 이사야로 예언된 것이요(마8;17)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받았으니 걸어가라 하심도
그가 죄를 사하실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낸 것이다(눅5;24).
그런데 늘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노래 부르던 자들이
눈 앞에 오신 그리스도를 보고도 모른다. 왜?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부어주었기 때문이다(사29;9-10)
그러나 또 이르시되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것이요‘ 하신대로 저들 불러 신부 삼을 날이 올 것이다(사54;7).
아브라함에게 하신 첫 언약은 이미 이루어졌다(창18;10).
그러므로 이제 양잡고 금식하며 죄 사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 아니다.
이제는 다시 오리라 하신 새 언약아래서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첫 언약안에서 제사 드리는 행위가 묵은 포도주요 헌 부대다.
다시 오리라는 언약이 새 부대요,
새 포도주는 생명의 부활의 때를 위한 것이다.
첫 언약 마칠 때 유월절 믿음 지켜오느라 수고했다고 사례하셨다(마26;27)
이처럼 새 언약 아래서도 주님은 금세나 내세나 사례하신다(마19;29).
이제 우리의 목표는 더 좋은 생명의 부활이어야 한다.
그것위해 우리의 신앙생활의 초점은 영혼 구원에 맞춰져야 한다.
그것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눅6;1-11)
안식일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6일 창조후 제7일째 안식하신 날이다.
하나님이 6일 창조의 마지막에 진짜 하시고자 한것은
하나님과 영생할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딛1;2).
율법으로는 이날 일하지 말라고 했다(출20;10).
왜? 하나님이 사람을 지은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복주사 6일과 구별 하셨다(창2;3).
6일은 생육 번성의 복이고(창1;28), 7일은 영원히 안식하는 복이다.
따라서 우리는 6일에 속하지 말고 7일에 속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거룩한 안식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이다.
이 참 뜻을 모른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비벼먹으므로 일하는 죄를 범한다고 비난한다(눅6;1-2).
이에 예수님은 다윗이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들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다(눅6;4).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제사장이 먹는 떡은 우리에게 주실 떡이다(요6;63).
다윗은 배고파 죽을 지경되어 찾아온 것이다.
죄인이 살기 위해 성전 찾아왔을때는 이 생명의 떡 주어야 한다.
손으로 지은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이다.
성전에서의 모든 규례는 결국 죄사하실 예수 만남이 목적이니,
그가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성전안에서는 제사장들이 안식을 범해도 죄가 안되었는데(마12;5).
하물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안에서 무엇이 죄가 되겠나?(마11;6).
그리스도 예수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
그러나 여전히 바리새인들은 계속 트집을 잡으려 엿본다(눅6;7).
그러므로 저들 생각을 아시는 주님이 손 마른자를 세워놓고,
“안식일에 선과 악중 어느것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하시며,
병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하시니 그 손이 곧 회복된다(눅6;9-10)
이에 저들이 분기가 가득해 어떻게 예수를 처치할까 의논하니(11절).
이들은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다(롬10;2).
안식일에 일하면 죽는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 참 안식을 주려고 한것이다.
목장 울타리는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호키 위한 것이다.
구약의 제사는 죽은자가 살기 위하여 죽을자를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예배는 산자가 사신자를 위해 드리는 것이다.
곧 죄가운데서 살아난 산자가 부활의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 믿음이 없는 예배는 외식하는 바리새인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을 알되 힘써 알아, 우리는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
제자들을 택하고 가르치심(1)-가난한 자는(눅6;12-26)
첫 아담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으므로
창세전 예정하신 대로 하나님이 구세주를 보내셨다(엡1;4-5).
이때 택하여 쓰임받은 이들이 이스라엘 12지파이다.
그들에게 율법과 선지자를 주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구세주를
찾아가게 하였으니, 그 마지막 역할자가 세례 요한이다(눅16;16)
그가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증거했고(요1;29)
예수님은 그 증거대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실때
“다 이루었다”하시면서 그의 임무를 끝내셨다(요19;30).
그러므로 이젠 누구든 예수 믿으면 죄사함과 구원받는다.
그러나 듣지 아니한 이를 어찌 믿을수 있겠는가?(롬10;14).
그래서 12제자를 택하시고 가르쳐 전파케 하신 것이다(마28;19-20).
그 첫 말씀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시니(눅6;20).
이는 물질적 가난이 아니라 심령의 가난이다.
곧 율법과 양심따라 열심히 할수록 자신의 죄를 더 깨달아
‘나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라는 가난이다.
반대로 부요한 자는 모든 계명을 다 지키었다는 어느 부자
청년과 같은 이들이니 예수님은 이런이들이 천국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했다(마19;16-24).
그러나 ‘의’에 주린자들은 결국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천국 갈것이다(롬5;18)
이것이 죄로 죽게된 인간에게 복음이요,
그럼에도 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다.
그러나 핍박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은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이다(눅6;23).
그러면 핍박하는 자가 누구인가? 불신자들이 아니다.
왜?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의 차이 때문이다.
모름지기 설교는 사람의 귀를 가려주는 사랑방 이야기가 아니라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하는 말씀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구약의 하나냐 같은 거짖 선지자는 사람 귀 듣기에
좋은 말만 하며 참 선지자 에레미야를 핍박했다(렘28;2-4).
사람들의 비위 맞추는 것은 결국 예수 팔아 장사하는 것이요,
그것으로 부귀영화 얻을수는 있어도, 주 재림때 주의 진노 피하려
산과 바위틈에 숨어 살려달라 애원하게 될것이니, 과연 될까?(계6;15-17).
세상 것으로 부하려 말고 주님의 것으로 부하려 하자!.
주님의 것으로 부한자가 모든 것을 가진자이다(고후6;4-10)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환난과 궁핍과 곤란을 당했다 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의 빚을 갚는 것이요.
주님은 약속대로 그런이들에게 반드시 보상하신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눅6;27-36)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심은
그들과 함께 천국에서 영생 하려는 것이다(딛1;2).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이 길이 막혀 버렸다(창2;17).
이에 하나님은 창세전 예정대로 여인의 후손을 선포하셨고(창3;15)
때가 되매 독생자를 보내시니 이는 마귀의 일을 멸하며(요일3;8),
죄인을 용서하고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하심이다(요3;16).
그러나 용서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먼저요.
그래서 죄를 깨닫도록 주신 것이 율법이다(롬7;7).
율법으로 낱낱이 죄를 드러내는 것은 낱낱이 용서하려는 것이요.
그렇게 용서해 주실이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 예표로 주신것이 율법아래서 피흘려 제사하는 것이다.
드디어 예수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율법을 이루셨으니,
이제 죄란 구세주이신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다(요16;9).
때문에 이제는 가르침이 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 12제자를 택하시고, 그 첫 가르침으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하시니(눅6;21),
곧 죄를 깨달아 하나님의 의에 대한 심령의 가난이다.
이어서 ”듣는자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다(27-28절).
무엇을 듣나? 율법이다.
눈에는 눈! 처럼 받은대로 원수를 갚는 것이 율법이다(출21;22-25).
법대로 해야지 임의로 형량을 낮추거나 용서를 한다면 직무 유기다.
그러면 율법이 죄냐? 그렇지 않다.
율법 그 자체는 의로우며 선하며 거룩한 법이지만(롬7;12)
다만 용서가 없기에 온전치 못할 뿐이다,
그래서 선지자를 통해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하지만 대신
죄값 치루고 용서해줄 이 오시니, 그분을 기다리라‘ 한 것이다.
이것이 죄인에게는 복음이다.
그렇게 해서 오늘 우리는 예수 믿고 용서받은 자들이다.
지옥갈 죄도, 삶의 허물들도 회개할 때마다 용서 받는다.
이것은 돈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 증거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든 구하는 자에게는 꾸짖지 아니하시고 주신다(약1;5).
용서와 구원을 구하면 거절치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주께 받은 용서를 주고, 함께 내 용서도 주어야 한다.
내가 용서치 아니하면 마지막때 하나님앞에 심판받는다(마18;35).
용서하며 살자! 그리고 용서의 이유를 말하자!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요. 율법의 완성이다!
용서의 주초위에 집을 지라!(눅6;37-49)
주라! 그리하면 흔들어 넘치도록 줄것이니...(눅6;38).
무엇을 주나? 네가 받은 용서를 주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옥갈 죄를 용서받고 탕감받은 자들이다.
이 은혜를 알고 남을 용서한다면 너희도 그 헤아림으로
누르고 넘치도록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않고 정죄 한다면 네 받은 것도 무효된다(마18;35).
고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처럼 자비해야 한다(마6;12.눅6;36).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이들이
소경이요, 그러면 모두 구렁텅이에 빠진다(눅6;39).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참 뜻은
남의 죄를 보면서 자기 죄를 함께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 죄인되어 구세주 예수를 기다리라는 것이다(눅16;16).
그래서 예수 오셔서 용서 하심으로 율법이 온전케 되었으니,
곧 율법에 용서를 더한 것이 복음이다.
그러기에 자기 죄를 보고 먼저 하나님께 용서 받은후 남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며 죄에서 용서 받을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혹이는 자신의 죄도 모르면서 형제의 티 같은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것으로 착각한다(마23;24).
오늘 행여! 나도 이런 바리새인 같지 아니한가?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 없고, 좋은 열매맺는 못된 나무없다(43절).
율법을 주심은 좋은 열매 맺도록 함이니, 곧 회개요.
주님은 회개하는 자는 용서하신다.
이렇게 자신의 죄를 용서 받은자가 남도 용서할수 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을 보면 그가 용서 받은자인지 알수 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선이 쌓이면 선이 나오고
악이 쌓이면 악이 나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다(45절).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짓되 주초를 반석위에 세우는 자요.
그렇지 않은 자는 흙 위에 주초없이 세운 집과 같은 것이니
탁류가 부딪치면 곧 무너져 버린다“(46-49절).
무슨 뜻인가?
이 주초는 주님의 죄사함과 용서함이다.
우리는 한량없는 주님의 용서위에 집을 지었으므로 안전하다.
설사 잘못 있어도 회개하면 또 용서 받는다.
그것이 주초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없는 가난한 자였으나(눅6;20).
값없는 주님의 용서위에 지금 영혼의 내 집을 짓고 있다.
주여! 이 큰 은혜를~ 이 큰 은혜를~ !!!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계시뇨?(마2;1-1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뇨?
동방 박사들의 이 말에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다.
이들은 왕의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한다(마2;2).
정작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있던 이들은 모르는데
먼 바벨론 지역에 있던 이들은 알고 찾아왔다.
그들만이 볼수 있었던 이 별이 무엇일까?
혹이는 이 별을 천사라 하고,
또 어떤이들은 목성,토성같은 별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별을 알고 따라 왔느냐 하는 것이다.
천지간의 모든 것이 예수를 나타내도록 지음
받았을 지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면 헛것이다(롬1;20).
만물도 빛이 있어야 볼수 있는 것 처럼
그 별의 정체를 알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비춰주는 빛이 있어야만 한다.
곧 예수를 주시라 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춰주셨기 때문이다“(고후4;6).
이처럼 주의 별을 알게 하는 빛을 동방 박사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들은 다니엘이 전한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곧 유대가 바벨론 포로일 때, 다니엘이 느브갓네살의 신상 꿈을
해몽한대로, 세계역사는 바벨론-페르시아-헬라-로마로 패권이
진행되어 왔고, 그 역사의 현장속에 있던 이들이다.
이들이 가진 다니엘의 믿음은 유대인의 왕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때부터 69이레 지나면 오신다는 것이다.
햇수로는 483년이요, 그 계산 기점은
이스라엘에게 성전을 건축하라는 영이 내릴 때 부터이다(스6;7)
그 햇수가 다되어져 가는 때가 예수 탄생 즈음이요,
또한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리라’는 예언도 있었기에(민24;17)
더 유심히 별을 살피던중 유난히 밝은 별이 떳고,
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빛의 감동으로 그 별을 좇아 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이방에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하나님의 경륜을 나타내는 것이요.
그 중심에 있는 이들이 동방 박사 들이다.
이제는 우리가 어둠에 있는 이들에게 이 빛을 비춰야 할 차례다.
그런 전파자들을 하나님은 별이 되게 하신다(단12;3).
성경의 예언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를 찾아오게 만들자!
오 ~ 이만한 믿음!(눅7;1-17)
사람의 말은 보장이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보장하시니, 못 이룰것이 없다(민23;19).
이를 믿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은 이런 믿음있는 자를 찾으신다.
주님이 감동하시는 믿음 내놓으면 이땅에서도 여러배 받고
이후 천국에서도 큰 영광 받는다 약속 하셨다(마19;28).
이렇게 주님을 감동을 시킨 이가 있으니 한 백부장이다.
그가 내놓은 것이 어떤 믿음인가?
그가 병들어 죽게된 종을 위해 예수께 구원을 청했고,
이에 예수께서 그의 집으로 향하실 때 백부장이 한 말이다.
“주여 수고하지 마소서, 말씀만 하옵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눅7;2-3).
이 말에 예수님이 깜짝 놀라시며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다 하신다(9절).
이 말은 예수가 전능자 하나님이심에 대한 고백이다.
이런 믿음은 들음으로부터 난 것이다(롬10;13-17).
성경은 모두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요5;39).
그런데 정작 전한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믿음이 없는데.....!!
백부장은 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알고 있다.
곧 아람의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은 사건이다(왕하5장).
그가 문둥병에 걸렸을 때 잡아온 이스라엘 계집종의 말대로
엘리사를 찾아가 모든 권위 체면 다 버리고,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는 말에 순종할 때, 문둥병이 나았다.
믿음은 듣고 배우는 것이다(롬10;10).
백부장은 나아만의 사건을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면 되어진다는 믿음으로 받은 것이다(롬10;10).
하나님의 말씀은 감상용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이다(히4;12).
고로 “네 믿은대로 될찌라”하시니, 바로 하인의 병이 나았다(마8;13).
또한 이후 한 장례 행렬을 만나신 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하시니 죽었던 자가 살아난다(눅7;11-15).
이는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요6;63).
곧 살리고 생명을 주는 것은 예수께서 이르신 말씀이다.
신앙생활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복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시다.
지금도 명하신 말씀은 세상에 속히 달려가고 있다(시147;15).
그 말씀 떠내려 가지 않도록 믿음으로 붙잡아야 한다(히2;1-3).
이런 이들에게 하나님은 방패가 되시고 승리케 하신다!!!(시5;12).
하나님의 뜻을 세우자(요6;38-40)
우주안에는 세가지 뜻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과 마귀의 뜻과 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영생(요6;40), 마귀의 뜻은 멸망(요10;10),
사람의 뜻은 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나, 사람의 뜻은 죽음으로 끝나고,
사탄의 뜻은 천년 왕국 뒤면 폐기된다(계20;10).
어차피 무너질 뜻이라면 빨리 묻는 것이 좋다.
모든 사람이 아담이후 사망과 흑암의 그늘에서
곤고함과 쇠사슬에 묶여 있으니 곧(시17;10-11),
죽기를 무서워하여 마귀에게 종 노릇하고 있다는 것이다(히2;15).
그러므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으니.
이는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 첫째요,
둘째는, 사는 동안 하늘의 부요와 재물을 주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은 더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어 구원얻었다 하나,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경제적 고통과 가정 문제등의 쇠사슬에 묶여있다.
왜? 지존자의 말씀과 뜻을 멸시하기 때문이다(시107;11).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세우면
그 후손이 강성해지고 부요와 재물을 채워 주신다 했다(시112;1-3).
어떤 하나님의 뜻인가? 누구의 몫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는 손이다(시112;9).
곧 내가 받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함에 쓰이는 재물이다.
세상은 박애주의로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한다.
이것이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요,
그런이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보화를 채워주신다.
하늘의 보화는 세상의 어떤 조건에도 요동치 않는다.
어찌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한 부자의 질문이다(마19;16).
스스로 의로워 부자되었다 하나, 그의 것은 땅의 것이다.
땅의 것이 하늘의 보화로 바뀌는 것은
이 재물을 빈궁한자에게 주고 주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이 말에 근심하며 돌아갔다(마19;22).
행여! 우리는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지 말자!
물질과 시간과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우리는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루었다.
이젠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 사랑의 계명 이뤄야 한다(눅10;37).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성령으로 그 믿음이 잉태되게 하자!
엉클어진 내 뜻은 2017년도에 묻어두고,
하나님의 뜻 가슴에 품고 2018년도 출발하자!
예수로 실족치 않는자가 복있다!(눅7;18-35)
예수께서 명하시니, 병든자가 일어나고
죽어 관에 들어갔던자도 벌떡 일어나 말을 한다!! (눅7;10,14).
이런 쇼킹한 일이!!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나간다(17절).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도 이 소문듣고 제자보내 묻는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20절)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한이가 왜 이런 질문 했나?(요1;26).
그분이 맞다면 나를 돌봐야 하지 않는가 라는 뜻이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고하라 하신다(22절).
곧 소경이 보고, 죽은자가 살아나는 것등은
메시아의 증거로 이미 성경에 예언된 것이다(사29;18,35;5).
그러므로 실족지 말라 하시니 이는 네가 나를 소개한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23절).
세례 요한이 누구인가?
예수 앞서 그의 길을 평탄케 하도록 보냄 받은자이다(말3;1,사40;3).
즉 모든 사람에게 죄를 확정시키는 세례를 베풀고,
죄인 만나러 오신 예수께 인계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그는 모두가 보고자 했던 구세주를 눈으로 직접보고
소개했기에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자이다.
그러나 그는 죽으러 오신 예수를 소개하는데 그쳤지만,
더하여 죽고 부활하사, 다시 오실 예수까지 소개한다면
이것이 요한보다 큰 것이니, 오늘의 우리다!(눅7;28).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 요한의 세례 받았던 이들은 ‘아멘’하지만
율법의 행위로 의를 찾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비웃는다.
이를 보고 ‘장터에서 아이들이 피리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하신다(32절).
죄인들에게는 구세주의 소식이 최고의 기쁨이요.
그러면 기뻐서 춤을 춰야 하는데 춤추지 않고, 또
너희는 죄인이요 그 값은 사망이다 해도 회개치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요한이 안타까워 먹거나 마시지 않았다(33절).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먹고 마시니, 이번에는
이 사람이 식탐 걸린 사람이요,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한다(34절).
이는 주님은 죄인 만나러 오신 분이요, 그들이 내놓는 죄가
그분의 양식임을 모르는 어리석은자의 소리이다! (요4;32).
세상의 참 지혜는 예수를 아는 것이니,
그가 죽고 부활하사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것이다.
지금도 그 지혜가 모두에게 소리쳐 부르고 있다(잠1;20).
율법과 선지자의 안내로 오신 예수외에 다른길을 찾는 것이 실족이다!
참 지혜이신 예수위에 우리의 삶을 올려놓고 달려가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눅7;36-50)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나타나는 많은 표적들을
보고 시몬이라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한다(눅7;36).
이는 주님을 구세주로 앎이 아니요,
큰 선지자라는 이에게 자기의 의를 검정 받아보리라는 것과
또 주님을 시험해 보려는 마음에서다.
이를 모르실리 없음에도 초대에 응한 주님앞에
그 동네에 죄인이라 하는 한 여인이 향유 옥합들고 와서
눈물과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기며 향유를 붓는다(38절).
시몬은 의례히 내놓는 발씻을 물도 내놓지 않았는데,
여인은 물 대신 회개와 감사의 눈물로 영접한 것이다(44절).
이를 본 시몬은 이 사람이 선지자더면
이 여인이 누구며 어떠한 죄인인줄 알았으리라 한다(39절).
즉 죄인도 못알아보니 나같은 의인도 모를것이다는 뜻이다.
이에 주님은 두 빚진자의 비유를 들어,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자가 더 존경과 사랑을 하노라 하시며(43절),
여인에게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신다(47-48절).
이에 사람들이 ‘이가 뉘시기에 죄사하는가’ 의아해 한다(49절).
이는 ‘인자가 죄사하는 권세가 있는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눅5;24).
그러시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하신다(50절).
주님이 확인하신 여인의 믿음은 어떤 것인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발걸음을 알고 영접하는 믿음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후13;5).
이 여인의 형편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믿음의 표현은
자기의 눈물과 향유로 예수님을 씻기고 부어드리는 것이었다.
이 믿음으로 여인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이다.
곧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한 범죄로 천국의 길이 막혀있는
인류에게 새롭고 산길을 열어주시기 위함이니,
첫 아담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것이다(롬5;18).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믿음외에 천국에 이를길은 전혀 없다(요14;6).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 하니,
예수님은 이 여인을 통해 저들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믿음은 계속 성장해야 하는 것이요,
그 단계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를 체크하신다.
주님이 우리 믿음 인정하시고 평안 명하시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함이 없으리라!(시23;4).
여인이 눈물과 향유 옥합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했다면,
과연 오늘 내가 내놓을 향유 옥합은 무엇인가?
네게 있는 말씀의 빛을 세상에 비추라.(눅8;1-18)
예수님이 천국 복음과 함께 여러 표적들을
행하시니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예수를 좇는다.
이에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들어 이르시기를,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
더러는 길가에 떨어져 밟히므로 새가 먹어버렸고,
바위위에 떨어진것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는 가시의 기운에 막혀 자라지 못했으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배의 결실을 맺었노라”(5-8절).
"들을 귀있는 자는 들어라” 하신다".
제자들이 이 뜻을 물으니, 하나님의 비밀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비유로 하는 것이라 하신다(10절).
이는 이미 선지자로 예언된 것이니(시78;2).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너는 가서 이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라“하신바 있다(사6;9-10).
과연, 이것이 복음인가?
기가 막힌 이사야가 어느때까지 이니까 하매 “성읍들이 황폐하여
사람들이 멀리 옮기워서 이땅에 폐한곳이 많을때까지라“하신다(사6;11-12).
왜!! 이런일이 ?
첫 아담의 범죄로 죽음에 이른 인류의 구원을 위해(롬5;12)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는 십자가에 오르셔야 한다.
이일을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언약하신 것이다.
그들의 중요한 일은 메시아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과
또한 오신 예수를 양의 제물로 제사하듯 십자가에 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구세주인줄 알면 누가 그 일을 선뜻하겠는가?(고전2;7-9)
그러므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를
완악케 하신 것이니(롬11;25),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다(고전2;8).
곧, 씨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모두가 말씀을 받기는 했으나,.
그 말씀을 마음에서 빼앗기면 길가에 떨어진 씨 처럼 되는것이요,
바위의 것은 기쁨으로 받아도 뿌리가 없어 어려울때면 곧 배반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진것은 세상의 염려와 근심에 막혀 결실치 못하는 것이나,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지켜 결실하는 자이다(11-15절).
왜 예수님은 그때 이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좇았어도
그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앎이 아니요, 표적을 본 까닭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리말고 받은 말씀을 세상에 비추라는 것이다(16절).
있는자는 더하여 주시나, 없는자는 있는것도 빼앗긴다(18절).
과연 나는 어떤지~, 스스로 점검해보자!(고후13;5).
예수 그리스도의 참 가족 (눅8;19-21)
예수 그리스도! 그가 누구신가?
그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시다(요1;3).
그가 잠시 본체를 버려두고 우리같은 몸으로 오심은
첫 아담의 죄를 대속키 위해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다(빌2;6-8).
이를 위해 말씀대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고(사7;14),
공생애를 시작하시니 여러 표적들로 무리들이 좇아 다니나,
그중에는 예수를 미쳤다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막3;20-21).
이에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와 뵙기를 요청하나(눅8;20),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고 형제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모친이니라“하신다(눅8;21,막3;35).
왜 이 말씀을 하셨나?
그 형제들은 아직 예수가 누구신지 모른다(요7;5).
예수님은 육신의 혈육 만들기 위해 이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홀로 계실때에 약속하신바,
사람과 함께 하는 영생의 소망을 위해 오신분이다(딛1;2).
그것위해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시되(창1;26),
생기를 불어 넣어 사는 영이 되게 하셨다(창2;7).
육신은 잠시지만, 생령은 영원한 존재요,
육신은 떡으로 살고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신8;3).
그런데 하나님이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만 지으신 것은
혹 첫 아담이 잘못되었을 때 구원할이는
하나님의 안의 독생자 한분 뿐이기 때문이다(말2;15).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인류의 구원을 예정하신 것이다(엡1;4-5).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매 예수님이 예정대로 오셨으니,
곧 아담을 범죄케한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요일3;8),
마귀의 종되어 있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요(히2;15).
그러므로 영원한 때 전에 세우신
예수님의 참 가족된 이들과 영생하기 위함이시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가?
예수 말씀하심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란, 예수가 누구신지 알고
그를 믿어 생명의 부활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세상의 혈육 관계는 곧 사라진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참 가족이 출생하는 잉큐베이터 같은 곳이다.
이 육신의 장막 벗고나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이 있다(고후5;1).
혈육인가?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될것인가?
한번 뿐인 인생의 성공은 예수님의 영원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8;22-25)
예수 그리스도!
그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마1;21)
말씀대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요1;14).
그래서 그는 죽을 계명과 살 계명을 가지고 오셨다(요10;17-18).
죽을 계명이란 첫 아담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오르심이요,
살 계명이란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는 것이니
그의 의의 한 행동으로 모든 사람이 살게 된 것이다(롬5;18).
예수님의 이 죽을 계명을 위해 택함 받은이가 이스라엘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에게 율법과 선지자를 주어 구세주
약속에 대한 증거로 흠없는 어린양을 잡아 제사케 한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먼저 말씀을 주신후 행하신다(암3;7),
그래서 성경은 모두 예수에 대한 말씀이다(요5;39).
그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심이나(사7;14),
행하시는 표적과 기사들도 이미 말씀하신 것이다(사35;5-6,눅7;22).
때문에 그런 표적으로 예수가 누구신지 알아야 하는데
많은 이들은 다만 나타나는 현상에 흥분하며 좇아 다닌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에 이어 예수를 증거할 증인들로
택한 이들이 예수님의 12제자이다(요15;27).
이를 위해 예수님이 어느날 그들을 데리고 배에 오르신다(눅8;22).
그런데 중간쯤 광풍이 부니, 제자들이 당황하여 주무시는 주님에게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부르짖는다(24절).
이에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하시며(마8;26)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니 아주 잔잔하여 진다.
이에 제자들은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이 순종하는고 한다(눅8;25).
예수님이 이렇게 하심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곧 이는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장면이요(시107;23-30).
때문에 믿음있다면 이 기이한 일앞에 기뻐뛰며 찬양해야 옳다.
풍랑속에 주무신다는 것은
말씀 이뤄지는곳이 그의 안식처임을 나타내는 것이요.
주님은 이런 현장을 통해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시107;30).
풍랑속의 평안이라는 것은 죄로 말미암은
저주속에 있는 자에게 평안주려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어떤 인생의 고통에도 주님 함께 하시면 평안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셨으니
그곳은 곧 주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현장이다(마28;19-20).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붙들어 주리라’(사41;10).
그러니 주 말씀하시면,
우리는 다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로 믿음을 보이자!
귀신 들린자를 구원하신 예수(눅8;26-39)
성경은 예수께서 이땅에 오셔서 하실 일들의 기록이다(요5;39).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 일행이 풍랑 만난 사건이 그중 하나요.
바람을 잔잔케 하신 것은 예수가 구세주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장면을 보고도
‘이분이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한다(눅8;25).
그런데 정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가실 때 만난 귀신들린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여 ~’ 한다(28절).
제자들은 모르는데 귀신은 단번에 예수가 누구신지 안다.
그러면서 나와 무슨 상관있나이까. 나를 괴롭게 마소서 한다(28절).
귀신들린자는 정상적으로 그 도시에 살던 사람이다(27절).
그런데 귀신 들리매 벌것벗고 무덤사이에서 살며,
그 힘이 얼마나 센지 쇠사슬로 묶어도 다 끊어 버릴 정도다(29절).
이는 그의 말대로 군대 귀신이 그속에 있기 때문이다(30절).
그 귀신들의 정체는 예수와 상관없는 영혼들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육신을 구하러 오신 것 아니요,
그 영혼을 주님과 상관있는자 만들어 구원하기 위하심이니.
곧 죄인과 구세주의 관계이다.
그런데 귀신된자들은 육체 있을때는 이런 영의 세계 몰랐다.
그러다가 육체를 벗고 보니 영의 세계를 훤히 보게 된 것이다.
예수믿는 영혼은 육체 떠나면 곧장 낙원으로 가지만(눅16;22-23)
믿지 않는 영혼은 육체 떠나면 남은 수명 기간 여기서 머물다가
밑도 끝도 없는 무저갱으로 던져진다.
그래서 귀신에게 나가라할 때에 내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무저갱으로
말고 그곳의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 한 것이다(마8;29).
이에 허락하니 귀신들이 돼지떼를 몰아 다 익사시켜 버린다(33절).
이를 목도한 많은 이들이 두려워, 예수께 떠나시기를 구한다(37절).
돼지떼가 또 죽으면 재산 손실이 날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떠나려하니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나,
주님은 ‘집으로 돌아가 네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고하라’하신다(39절).
곧, 예수와 상관없으면 귀신되고, 상관되면 구원이라는 것을
너의 가장 가까운 친속에게 먼저 전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귀신 쫓는 목적이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귀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았다면,
나의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부터 이를 전해야 한다.
다른 사람도 전도해야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해야 한다.
이것 안하면서 사랑한다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정말 그들이 지옥가는 것 안다면 그냥 놔두겠는가?
혈루증 여인과 회당장 딸 살리신 예수(눅8;40-56)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마귀의 일을 멸하고(요일3;8).,
죽기를 무서워 마귀의 종된 이들을 놓아주려는 것이다(히2;15).
이를 위한 예수의 일들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요5;39).
그러나 이스라엘의 대부분이 눈이 감겨 예수를 모른다(사6;10).
그래서 열두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여러 표적들을
행하신 것은 예수가 누구신가를 그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이다.
곧, 바람과 물을 명하여 잔잔케 하신것등이 그것이다.
그러던중 죽어가는 딸을 살려달라는 한 회당장의 요청을 받고
예수께서 그집에 가시는 도중 열두해 동안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고 그 순간 병이 나았다(44절).
그런데 예수님은 ‘내게 손 댄자가 누구냐.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줄 앎이라 ’ 하신다(45-46절).
이에 여인이 떨며 자초지종을 고하니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하신다(48절).
여인의 어떤 믿음인가?
선지자의 겉옷에도 능력이 있어 물을 갈랐다면(왕하2;8-14),
말씀대로 오신 예수의 능력은 당연히 더 크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회당장 딸이 죽었으니 오실 필요없다 한다.
그러나 주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얻으리라” 하신다(49-50절)
그리고 그 집에 가서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하며(52절).
“아이야 일어나라”하시니 아이가 곧 일어난다(54-55절).
이런 일련의 상황은 예수님의 의도적인 것이요.
주님은 이런 사건들을 통해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곧,
군대 귀신을 쫓은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신 예수! (요일3;8).
혈루병을 고친 것은 죄를 사하러 오신 예수!.
죽은 아이를 살린 것은 생명의 부활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시며 살아난 아이를 보고 놀라는 부모에게는
‘이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신다.
왜? 그가 세상에 오신 최종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가
받으신 죽을 계명을 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기 때문이다(요10;18).
그러나, 그가 메시아인 것을 안다면 누가 그일을 맡겠는가?
그래서 그들 중 더러가 완악하게 된 것이다(롬11;25),
그러나 지금은 모든 일을 다 이루셨으니 이제는 전해야 한다.
이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세상끝날까지 함께 하시니(마28;20),
곧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들이 그 증거요(막16;17).
영광의 부활은 이런 이들의 몫이다!
열두 제자들의 파송(눅9;1-9)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마지막 하실일은
죽을 계명을 가지고 십자가에 오르시는 일이다(요10;18).
그래야만 마귀의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죽기를 무서워 마귀의 종된 이들을 구원할수 있다(히2;15).
이 일을 위해 이스라엘 12지파가 택함받은 것이요,
그 일이 완성되기 까지 그들의 눈과 귀가 가려지기도 했다(사6;10).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후에는(요19;30)
이 복음은 세상에 널리 전파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12제자를 택하신 것이니,
귀신 쫓음을 통하여는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음을,
병 고침은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치신 것이다(눅5;24).
그리고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내보신다(눅9;1-2).
그리고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하신다(3-5절).
빈손들고 가라는 것은 이방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에게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마10;6).
곧 사마리아 쪽의 짝퉁 말씀을 받은 이들이니(왕상12;25-33).
그중 하나가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다(요4;11).
또 한 부류는 유다쪽에서 율법의 정죄받아 버려진 이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준한 목자 때문에 방황하지만,
주를 사모하는 이들‘을 찾아가라는 것이다(렘10;21).
엘리야로 찾아가게 하신 시돈땅의 사르밧 과부 같은 이들이다(왕상17장).
극심한 가믐으로 먹고 죽을 한끼 양식밖에 없다는 과부에게,
그것으로 나를 먹게 하면 가믐이 다하도록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주의 말씀을 전하매, 과부가 순종했고,
이후 그대로 그 집에는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왕상17;16).
주의 종을 보내는 이유가 이것이다.
곧 먹고 죽을떡은 대신 먹고, 먹고 살떡을 주라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를 찾으신다.
이에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눅9;6).
어떤 복음인가?
죄값은 사망이요, 사망의 그림자가 질병이라는 것이다.
복음은 죄 사함을 주는 것이니 표적으로 병도 낫는 것이다.
12제자에게 명하신 이 말씀을 오늘은 모두에게 명하셨으니(행1;8)
그러면 믿는 자에게 따른 표적들이 나타날 것이라 하셨다(막16;17).
그때는 빈손들고 가라 했지만
이제는 필요한 물질등을 가지고 가라 하신다(눅22;36).
이 영광의 대열에 참여하는 자가 복이 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눅9;10-17)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눅9;13).
저물때까지 빈들에 있는 무리들의 끼니를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이에 제자들은 ‘우리에게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고, 여기 무리들은 남자만 오천명이라 한다(13-14절).
즉, 이는 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라는 의미이다.
그동안 데리고 다니시며 가르치셨고, 바로 직전에도
그들은 예수의 능력과 권세를 부여받고 나가 복음 전할 때
병든자가 일어나는 엄청난 경험을 했다(6절).
그렇다면 그 권능을 주신 예수가 누구신지 깨달았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모르니 마치 예전의 모세와 같다.
즉 출애굽하여 광야를 건너던 이스라엘이 매일 먹는 만나에
싫증이 나서 고기가 먹고 싶다며 모세를 원망한다.
이에 하나님이 일개월간 고기를 먹여주겠다 하니, 이 백성이
육십만명이나 되는데 말도 안됩니다 했다(민11;21-22).
그러나 결과는 일개월간 코에서 냄새 나도록 고기 먹었다(민11;23).
또 하나는 엘리야의 신학교에 누가 떡 20개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신학생은 백명이다. 어떻게 할까요?(왕하4;42-44).
이에 나눠줘라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니 과연 그대로 되었다.
이런 것들은 예수 하실일의 예표로서
주 말씀대로 빈들에 모인 무리들을 50명씩 앉히고 떡을 떼어주니
모두가 배불리 먹고 12 바구니가 남았다(15-17절).
이런 이적을 보이신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너희에게 줄 생명의 떡이요”(눅22;19-20).
예수의 몸과 피는 전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는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갔을 때 불평 불만없이 순종했으면
아무것도 안먹고 통과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신8;3).
그들은 준비없이 나왔어도 40년간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옷도, 신발도 헤어지지 않고 발도 부르트지 않았다(신29;5).
이처럼 예수 자체가 생명이기에 예수와 함께 있으면 산다.
그가 세상에 오심은 죄인을 구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심은 제자들을 테스트 하심이요.
그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저런 모양으로 시험하신다.
그리 하심은 우리를 세워 생명의 말씀을 나눠주려는 것이다.
지금 그 생명의 말씀을 먹을 영혼들이 내 주변에 너무 많다.
이젠 우리 차례다! 저들에게 이 생명의 말씀을 나눠주자!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눅9;28-36)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분명하다.
곧 하나님이 홀로 계실 때 세우신 뜻은
그의 사람들과 함께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이다(딛1;2).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생명길이 막혔으므로(창2;17.3;24),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를 보내 구원하시는 것이다(고전15;45).
그가 오시는 길로 택함받은 이가 이스라엘이요
그들에게 율법과 선지자를 주어 오실이를 소개하였다.
곧 율법에 의해 양의 피 흘리는 것은
죄인의 죄를 대속하실 예수 하실일의 예표요.
어떻게 오실것에 대한 것은 선지자로 예언을 하셨다(사40;3).
(사7;14.믹5;2).
그가 오셔서 결국 하실일의 먼저는 죽으시는 것이다.
이는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계명이다(요10;17-18).
때문에 인정으로 베드로처럼 죽음을 말려서도 안되고(마16;22),
자기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주를 따라야 한다(눅9;23).
그런데 제자들이 아직 희미하니,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하는 메시아임을 더 확인 시켜주시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신 것이다(28절).
그곳에서 그들은 주님의 얼굴과 옷이 해처럼 빛나는 것을 본다.
그 옆을 보니 모세와 엘리야도 있어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그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실것에 대한 말씀이다(31절).
비몽사몽간에 이 모습을 본 베드로가 여기 초막셋을 짓자 한다(33절).
이스라엘의 초막절은 마지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절기요
지금도 그들은 그때 왕으로 임하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세분이 함께 있으니 하나님 나라 이룬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 말할 즈음에 구름이 덮히더니 두사람은 없고 예수님만 계시는데,
하늘에서 ‘너희는 저의 말만 들어라’는 음성이 들린다.
무슨 뜻인가? 모세는 율법의 대명사요,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다.
율법과 선지자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의 말씀만을 들어야 한다.
곧 그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에 대한 말씀이다.
이를 성령이 오셔서 기억나게 하고 생각나게 하신다(요14;26)..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한 예수 오심도 이루어졌고,
또 성령이 오셔야 하리라는 것도 오순절로 이루어졌다(행2;1).
그러나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진행중이다.
성령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자!
생명의 부활의 때를 사모하는 자에게 성령은 임하시고,
그런이에게 성령은 오늘 무엇을 할것인가 감동케 하신다.
최고의 복은 그 감동에~ 자기 생각 버리고 순종하는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눅9;18-27)
예수께서 12 제자들을 택하여 가르치심은
이후 이들로 주님을 증거케 하려 함이시다(요15;27).
저들은 귀신쫓고, 병 고치고, 죽은자 살아나고, 오병이어로
수천명 먹고도 12광주리 남는 이적의 현장들을 목도했다.
뿐만아니라 자신들도 예수께 받은 능력과 권세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며 병도 고치는 엄청난 체험을 하기도 했다(눅9;6).
이 정도 되면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알만도 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이 나를 누구라’ 하시매, 더러는
세례요한등 옛 선지자중 하나가 살아났다 하더이다‘ 한다(18-19절).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하매, 주님이
기뻐하시며 그러나 이를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신다(21절).
왜? 아직 죽으실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후 비로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아 장로등에게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나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22절).
그런데 베드로가 죽지 마소서 하니(마16;22).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하시며 책망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죄인을 대신하여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 같은 몸으로 오신 것은(빌2;6-8)
모든 사람을 구원키 위해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다(히2;9).
그런데 베드로가 말리고 있으니 이는 사탄의 짓이다.
이에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신다(눅9;23).
즉 자기의 생각과 고집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가 주를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목숨에 대한 염려다.
그러나 주님은 먹고, 마시고, 입는것에 대해 염려치 말라 하셨다(마6;33).
이는 이미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년간을 통해 보여주셨다.
그들은 어둠의 곳 애굽에서 준비없이 나왔어도 어느것도 부족하지 않았다.
우리도 애굽같은 어두움에 살던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는 어둠에 살던 생각과 고집 내려놓고 주를 따라가자!.
그런이들에 대해 주님은 육체의 날 동안에도 여러배 받고
내세에도 영생을 받지 못할자 없을 것이라 하셨다(마19;29).
이 말씀을 믿는것이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다!(시119;105).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된 것은~ (눅9;37-45)
예수님은 먼저 보내신 말씀대로 세상에 오신이시다(요1;14).
곧 율법과 선지자로 주신 말씀이요,
그 중심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사 죽으시는 것이다(눅9;31).
그러나 그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것이다(요10;17-18).
그 마지막 소개를 세례 요한이 했고(요1;29,36),
율법과 선지자로 증거된 말씀을 이루신 후 예수님은
당신을 증거할 자로 열두제자를 택하여 가르치신다(요15;27).
그러나 그들은 어느때는 주를 아는 것 같기도 하면서 또 보면
베드로처럼 죽지마소서 하며 사탄짓을 한다(마16;23).
그러므로 예수님은 더 확실케 하기위해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 보고 듣게 하신 것이다(눅9;28)
그리고 하산하니 무리중 하나가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달라 한다(38절).
이를 제자들에게 부탁한바 있으나 그들이 하지 못했다.
이에 예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하시며, 귀신을 쫓아내셨다(41-43절).
믿음이 없고 패역하다는 대상은 당신의 제자들이다.
그들이 아직 예수에 대한 믿음이 불확실하다.
이들은 이미 어느 한 백부장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가 본바있다.
그의 청대로 병든 하인을 고쳐주려 예수께서 그의 집에 가려하실 때.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하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마8;5-10).
또한 제자들은 이미 복음을 위해 권능을 받은 터이다(마10;1).
그러면 주님이 안계셔도 주의 말씀이 믿음 되었다면
능히 그들도 귀신을 쫓아낼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너희 믿음이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수 있다라고 하신 것이다(마17;20).
‘산’이란 인간의 힘으로 할수 없는 죄와 저주의 문제다.
예수님은 그것 위해 죽으려 오신 분이다.
그래서 주님은 반복하여 내가 죽어야 하리라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깨닫지도 못하며 또 묻기도 두려워하니
이는 저들에게 숨김이 되었기 때문이다(눅9;45).
왜? 이는 이사야 선지자로 예언된 것이요(사6;9),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우는 것이 임무다.
그런데 무리와 제자들도 그를 이땅의 왕으로 오신이라고 착각했다.
또 하나는 숨김의 기간동안 이방인을 구원키 위한 것이다(롬11;25).
그런데 이제 그들의 눈을 감겨놓은 기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이스라엘이 예수믿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다(겔39;28).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경륜을 알게 해주신 주께 엎드려 감사하자!
호흡있는 동안, 주를 찬송하며, 복음위해 주께 쓰임받기를 간구하자!
천국에서는 누가 큰자인가?(눅9;46-50)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
그런 그가 자기를 비우고 이땅에 오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누가 이처럼 낮아질수 있겠는가?(빌2;6-7).
바로 이를 율법과 선지자로 말씀하셨으니(요5;39,히10;7),
곧 당신의 몸을 드림으로 율법의 제사를 완성시키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게 된것인즉(히10;10).
아무도 거룩함이 없이는 천국에 못들어간다(히12;14)
열두 제자를 가르치신것의 결국도 이것이다(눅9;44).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여러 표적을 보면서
그를 이땅의 왕으로 오신분이라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메시아 왕국때 누가 크냐 하며 논쟁을 하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한 아이를 저희가운데 세우시고 누구든지
어린 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신다(마18;3).
어떤 아이인가? 어머니 밑에서 율법의 가르침을 받은 아이다.
이는 율법에 의해 정죄된 죄인이 주님앞에 나오는것의 비유다.
곧 율법의 용무는 정죄요, 그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역할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죄인을 만나러 오신분이다(막2;17).
그러면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
바로 이런 죄인을 예수께 인도하여 영접케 하는 자이다.
많은 이를 주께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처럼 빛나리라 했다(단12;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듣지 못한이를 어찌 부르며 믿을수 있겠는가?(롬10;14).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는 것이다(롬10;15).
이 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림이 최고의 섬김이요,
이런 이들이 가장 작은 자 같으나 가장 큰 자이다(눅9;48).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
그런데 어떤이는 믿음이 연약한 소자를 실족시키기도 한다.
이는 맷돌을 그 목에 달리워 물에 빠트리는 것보다 더 악하다(마18;6).
때문에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옳은 것이 아니다(고전10;23).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아도 그 죄값이 무겁거늘(겔33;6),
하물며 살려고 온자를 실족케 하면 그 죄값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래서 네 눈이나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차라리 빼버리라는 것이다(마18;8).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귀신 쫓는 것을 보고
금했노라 하는 사도 요한에게 금하지 말라 하신 것이다(눅9;49-50).
어떤 이유로 예수를 알든 그들도 구원받을 대상이다.
주님은 속죄 이루셨고, 구원하는 일은 우리에게 맡기셨다(막16;15).
이 일을 위해 시간도 물질도 써야 한다.
생명의 부활의 때 큰자의 영광은! 바로 이런이들의 몫이다!!.
누구든 주를 좇으려면 -(눅9;51-62)
하나님이 그 독생자를 보내심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는 것이다(요3;17).
이를 위해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에 오르셔야 한다(눅9;51).
주님이 가시는 이길은 에덴에서 막힌 생명길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이길을 방해한다.
그런이들중 하나가 예수의 통행을 막는 사마리아인들이다.
이에 제자들이 불을 명하여 저희를 멸할까요 하나
주님이 꾸짖으신다(눅9;54-55).
그들은 멸할자가 아니라 그들도 구원해야 할 대상이다.
누가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가?
하나님의 피붙이요, 그래서 주님이 피흘리러 오신 것이다.
누구든 호흡있는 동안 그피의 은혜로 천국갈 기회는 있다.
그런데 방해한다고 멸한다면 그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그럴수 없다!.우리의 일은 하나님 피붙이 만드는 일이고,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소관이시다(롬12;19).
한편 어떤이가 나는 주께서 어디 가시든 좇으리이다 한다(57절),
그런데 주님은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곳이 없다” 하신다(58절).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며 좇아 다니지만
정작 예수에 대한 믿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후 또 다른 사람에게는 “나를 좇으라”하신다.
그러나 그가 먼저 내 부친을 장사하게 하옵소서“ 하니(59절),
“죽은자들로 죽은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다(60절).
죽은자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자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경우는 내가 주를 좇겠지만,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해달라고 한다(61절).
이에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 하신다(62절).
이는 누가 주를 좇는 종이 될 수가 있는가를 가르치신 것이다.
첫째 육신의 입신 양명을 위해 주를 따르는 자는 안된다.
둘째 세상의 염려와 관심에 의해 방해받는 자도 안된다(눅14;26-27).
우리의 믿음이 구원얻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혼의 때의
영광을 소망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야 한다(마10;38).
이런이들이 진정 주를 좇는 종이요.
종 노릇은 자기의 가치관, 윤리 도덕, 감성을 가지고는 안된다.
그러나 이들에게 예비된 영광이 있으니 곧 생명의 부활의 때이다!.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영광의 믿음이 소망되어야 한다.
과연 나는 주를 좇는 믿음이 있는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라.(눅10;25-37)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
이는 어느 율법사가 예수께 질문한 것이요.
이에 예수님은 율법의 기록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다(27-28절)
영생이란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 영생은 의인의 몫이요, 죄인은 영멸이다.
그런데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
그러기에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신대로
그리스도 예수를 구원자로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엡1;4-5).
그래서 그 구세주를 찾아가도록 율법과 선지자로
먼저 말씀하신바, 성경은 모두 예수에 대한 말씀이다(요5;39).
율법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가정교사다(갈3;24).
율법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롬3;20)
죄인 만나러 오신 구세주를 만나라는 것이다(막2;17).
그러므로 율법은 사랑이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는 그 계명을 지킬 능력이 안된다.
그러므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그 자체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한 내가 얻은 구원을 이웃에 전하는 것이 이웃 사랑이다.
그러면 율법사는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자신은 율법을 잘지키므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연이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질문한 것이다(29절).
당시 율법사들은 자기 이웃을 유대인으로 한정시켰고,
사마리안이나 이방인들은 불의한자로 간주했다.
이에 예수님은 강도 만난자를 구해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어 “이웃”이 누구인가를 말씀하신다(30-37절).
곧 내 이웃이 누구인가 라는 관점이 아니고
네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 가를 가르치신 것이다.
이웃이란 나에게 호감을 갖고 호의를 베푸는 자가 아니라
나의 사랑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강도맞은 이처럼 죽어가는 내 주변의 영혼들이다.
내 부모 형제! 직장 동료! 친구들! 살펴보라~
그들의 영혼이 마귀에게 강도맞아 죽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내 물질 투자해 그들을 살리자!
머뭇 거릴 틈이 없다! 살려내자. 살리자~
사람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눅14;15-24)
천국에는 누가 들어갈수 있을까?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이들이다.
그러나 어둠속의 세상이 알리 없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율법과 선지자를 보내 예수께 찾아오도록 한 것이요.
또한 그들을 통해 이방인도 구원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율법에 대해 오해했다.
즉 율법을 잘지키므로 의인되어 천국은 자기 몫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막상 예수님이 오셨어도 알지 못하고, 배척한다.
큰 잔치를 베풀어 초청하는 것이 이에 대한 비유다(눅14;16).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런 저런 핑계로 응하지 않는다.
이에 초청자는 시내의 가난한 자등 모든 소외된 이들과
또 산울까지 가서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한다(23절).
이는 이스라엘을 벗어나 이방에게 가라는 것이요.
그들은 약속도 예언도 없으니 강권하여 데려오라는 것이다.
먼저 천국잔치에 초청받은자는 이스라엘이요
그런데 정작 잔치에는 처음 초청이 없었던 이방인들이 먼저다.
곧 나중 된자로 먼저 되고 먼저 된자가 나중되는 것이
이 혼인잔치 비유의 참 뜻이다(마19;30).
이는 하나님안에 있는 두 민족 이스라엘과 이방이다.
이는 이미 이삭의 처 리브가 태속의 쌍둥이로 예표되었다.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기리라” 했다(창25;22-33).
그러나 세월속에 이런 하나님의 뜻이 희미해지니
이사야로 하여금 장자의 눈과 귀를 막게 하셨으니(사6;10-12)
곧 작은 아들 이방인의 충만한수가 구원되기 까지이다(롬11;25).
이것은 하나님이 두 민족을 사랑하는 방법의 차이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말1;2-3).
또한 내 백성아니었던 자를 내 백성이라 하리라는 것과(호2;23)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예언을 이루는 것이다.
곧, 이스라엘이 건축자요. 이들이 버린돌이 예수시다(마21;42).
이것이 우리 눈에 기이하나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뜻을 알았다면 혼인잔치에 청함받고 와도 말석에 앉아야 하고.
또한 그 잔치에 가난한자들 곧 이방을 초대하여 유월절의 뜻을
알게 한다면 의인의 부활시에 갚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눅14;13)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고, 우리도 그빛을 받았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강권하여 주님의 혼인 잔치 자리를 채우자!
영혼의 때를 위한 참 가치있는 일이 그것외에 또 있을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누가복음16;1-13)
주인에게 신뢰받지 못해 해고 통보받은 청지기가
마지막 한일은 주인에게 빚진자들의 채무를 탕감해 준 것이다(6-7절).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이 오히려
이 청지기를 지혜롭다 라고 칭찬을 하니 이상한 주인 아닌가?
더하여 예수님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롭다 하신다(8절).
자신의 직분을 사용해 저 살길 찾는것이 지혜롭다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는 땅에서의 지혜로운 자이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새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주님께 칭찬받을 만한 우리의 지혜는 무엇일까?
청지기가 자기의 직위를 사용한 것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도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9절).
이 세상의 것은 다 썩어없어지고 두고 가는 것이기에 불의하다.
그런것들은 필요 조건이긴 하지만
만일 그것을 위해 산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이제는 그런 것을 사용해 “너”를 위해 살아라!
“너”가 누구냐? 구원받은 “네 영혼”이다.
곧, 세상에서의 내 직책, 내 세월, 나의 물질등을 사용해서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뜻을 위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 하실수 있음에도
내 영혼을 복되고 살찌게 하려 우리에게 일거리 주신 것이다.
그러니 초토막처럼 사라질 것으로 정말 너를 위해 살라!
그러면 썩지 아니할것으로 하나님이 바꾸어 주신다(고전15;42)
그것 가지고 육체의 때를 잘 활용하여
영혼의 때를 준비함이 참으로 지혜로운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지극히 작은것에 충성하는 자는 큰것에도 충성되고”하셨다(10절).
작은 것은 세상의 것이요 큰 것은 하늘 나라의 것이다.
작은 것 사용해서 하늘의 큰 것 얻는자가 진정 지혜로운 자이다.
이 세상에서 두 주인을 섬길수 없으니 곧 하나님과 재물이다(13절).
왜 재물이 문제가 되는가?
세상에서는 재물이 모든 가치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어느쪽을 주인으로 삼고 있는가?
☞참 “나”를 위해 육체의 것들을 망설임없이 쓸수 있어야 한다.
“참 나”를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잠시동안 비록 어렵더라도 영혼의 때에 멋지게 살라는 것이니,
땅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