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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김경손 金慶孫(미상~1251)】 "몽골대군을 막아선 김경손 장군과 결사대 13명"
김경손(金慶孫)은 처음 이름이 김운래(金雲來)이며 평장사(平章事) 김태서(金台瑞)의 아들이다. 그 모친이, 오색의 구름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푸른 옷을 입은 아이 하나를 둘러싸고 하늘에서 내려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를 배었다. 태어나니 아름다운 모습인데다가 머리 위에 용 발톱처럼 불룩 솟은 뼈가 있었다. 성품은 장중하고 온유했으며, 지혜와 용기가 다른 사람보다 빼어났고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방에 있을 때에도 반드시 조삼(皂衫)을 입고 손님을 대하듯 예를 차렸으며 화가 날 때면 수염과 머리털이 꼿꼿이 일어섰다. 일찍부터 음보로 진출하여 화려하고 귀한 벼슬을 두루 거쳤다.
고종 18년(1231) 정주(靜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 분도장군(分道將軍)1)으로 있을 때 몽고군이 압록강을 건너 철주(鐵州 :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를 짓밟고2) 정주까지 침범해왔다. 김경손이 관아의 결사대 열두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가 힘껏 싸우니 몽고군이 퇴각했다. 그러나 뒤이어 대군이 당도하자 주(州)의 사람들은 수비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모두 달아나 숨어버렸다. 김경손이 성에 들어갔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열두 명과 함께 밤중에 산길을 통해 이레 익힌 음식을 먹지 못한 채 귀주(龜州 :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 구성)까지 갔다. 삭주(朔州 : 지금의 평안북도 삭주군)의 수장(戍將) 김중온(金仲溫)도 성을 버리고 도망쳐 오자 병마사(兵馬使) 박서(朴犀)가 김중온에게 성의 동서쪽을 지키게 하고 김경손에게는 성의 남쪽을 지키게 하였다.
몽고의 대군이 남문으로 몰려오자 김경손은 열두 용사와 여러 성의 별초(別抄)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면서 군사들에게 “너희들은 목숨을 돌보지 말고 죽어도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우별초(右別抄)들이 모두 땅에 엎드린 채 명령에 불응하자 김경손은 「너희들은 성으로 돌아가라. 우리 열셋이면 된다.」그들을 성으로 돌려보낸 후 열두 용사와 함께 나가 싸웠다. 검은 깃발을 들고 선봉에 선 기병 한 명을 쏘아서 즉사시키자 열두 명도 용기를 얻어 분전했다. 날아온 화살이 김경손의 팔뚝에 맞아 피가 철철 흘러 내렸지만 북을 치며 독전을 멈추지 않았다.
"모두 살아있는냐?
네댓 번 맞붙은 후 몽고군이 퇴각하자 김경손이 대오를 정비하고 쌍소금(雙小笒)을 불며 돌아오자 박서가 큰절로 맞이하며 울었고 김경손도 마주 절하며 울었다. 이후로 박서는 성을 지키는 일은 모두 김경손에게 맡겼다.
몽고는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해 왔다. 수레에 풀과 나무를 싣고 굴리며 공격해오자 김경손은 포차(砲車)를 사용해 끓는 쇳물을 쏟아 부어 수레에 실은 풀을 태우니 몽고 군사가 퇴각했다. 다시 공격해 오자 김경손은 의자에 앉아서 독전하고 있는데 포탄이 김경손의 머리 위를 지나 뒤에 있던 군졸에게 명중해 전신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부하들이 의자를 옮기자고 청하였으나 김경손은
“안 된다. 내가 움직이면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흔들린다.”라고 태연한 얼굴빛으로 거절하며 끝내 옮기지 못하게 하였다. 20여 일 동안3) 큰 전투를 치루면서, 김경손이 상황에 따라 적절히 귀신같이 대응해 내자 몽고는 “이렇게 작은 성이 대군을 맞아 싸우는 것을 보니, 하늘이 돕는 것이지 사람의 힘은 아니다.”라고 혀를 내두르며 결국 포위를 풀고 갔다.
"평생 천하의 성을 보았지만 이렇게 맞고도 항복하지 않는 성은 처음 본다."_몽골군 노장
얼마 뒤에 그는 대장군(大將軍)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임명되었다.
고종 24년(1237)에 전라도 지휘사(指揮使)가 되었다. 당시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 형제가 원율(原栗 :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담양(潭陽 :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등 여러 군(郡)의 무뢰배(無賴輩)들을 불러 모아 해양(海陽 : 지금의 광주광역시) 등 주현(州縣)을 치고 내려오다가 김경손이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자 나주성을 포위하였다.
김경손이 성문으로 올라가서 적도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는, “적이 비록 숫자는 많지만 모두 짚신 걸친 촌백성들일 뿐이다.”라며 바로 별초(別抄)가 될 만한 자 서른 명 정도를 뽑았다. 그리고 원로들을 모아놓고 울면서 “너희 고을은 왕후의 고향[御鄕]이니 다른 고을을 따라 적에게 항복할 수는 없다.” 하고 타이르니 원로들이 모두 땅에 엎드려 울었다. 김경손이 출전을 독려했으나 부하들은 “지금 상황을 보건대 아군은 수가 적고 적은 많으니 다른 고을의 군사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싸우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건의하였다. 김경손이 노해 꾸짖고는 길거리에서 금성산신(錦城山神)에게 제사7)를 지내고 손수 잔을 두 번 올린 다음,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 마지막 잔을 올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일산(日傘)을 펼치고 성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부하들이 “이렇게 하면 적들이 바로 대장님을 식별하게 됩니다.”하며 말렸다. 김경손이 다시 그들을 꾸짖어 물리친 후 문을 열고 나갔는데, 현문(懸門)이 아직 내려지지 않았기에 문지기를 불러 처형하려 하자 즉시 현문을 내렸다.
이연년이 그 무리들에게 “지휘사(指揮使)는 바로 귀주에서 공을 세운 대장으로 인망이 대단히 두텁다. 내가 사로잡아서 도통(都統)으로 삼아야 하겠으니 활을 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그가 화살에 맞을까 우려해 모두 활과 화살을 쓰지 않고 칼[短兵)]로 싸우게 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이연년이 용맹을 믿고 곧장 전진해 김경손의 말고삐를 잡으려 했다. 김경손이 칼을 빼들고 독전하자 별초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이연년을 죽인 후, 승세를 몰아 적을 쫓으니 적도가 완전히 궤멸되고 이 일대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김경손이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추밀원지주사(知奏事)가 되자 어떤 사람이 최이(崔怡)에게 “김경손 부자가 상공(相公)을 해치려 하며 또 반역하려는 뜻도 있습니다.”고 참소하였다. 최이가 조사하여 보니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참소한 자를 강에 던져 죽이고 김경손을 다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전임시켰다.
고종 36년(1249)에 최항(崔沆)은 김경손이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을 시기해 백령도(白翎島 :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로 유배보냈다. 2년 뒤에 최항이 계모(繼母) 대씨(大氏)를 죽이고, 아울러 대씨의 전 남편 아들 오승적(吳承績)을 강에 던져 죽였다. 또 김경손이 오승적의 인척이라고 하여 사람을 유배지로 보내어 바다에 던져 죽였다.10) 김경손은 여러 번 큰 공을 세워 조야에서 그를 의지하고 높이 받들었는데, 갑자기 간악한 도적에 의해 살해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였다. 아들은 김혼(金琿)이다.
어릴 때 이름은 김운래(金雲來), 본관은 경주지만 전주 김씨가 된다. 즉 본관은 전주가 된다. 평장사(平章事) 김태서(金台瑞)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어미가 오색의 구름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푸른 옷을 입은 아이 하나를 둘러싸고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를 가졌다고 한다. 어릴 때 이름인 '운래'(雲來)는 이 태몽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외모가 몹시 빼어났고 머리 위에 용발톱처럼 튀어나온 뼈가 있었다고 고려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성품은 장중하고 온유했으며 지혜와 용기가 다른 사람보다 빼여났다. 다만 한 번 화가 나면 수염과 머리털이 꼿꼿히 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常處室 必著皂衫如對賓 怒則鬚髮輒竪。 방에 있을 때도 반드시 조삼을 입고 손님을 대하듯 예를 차렸으며 화가 날 때면 수염과 머리털이 꼿꼿이 일어섰다. 《고려사》 김경손 열전 처음 '음관(蔭官)'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그의 형인 김약선은 바로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의 사위이며, 아들로는 김혼이고, 조카로는 김미, 정순왕후 김씨(김연) 등이 있다.
高宗十八年 爲靜州分道將軍 蒙古兵渡鴨綠江 屠鐵州 侵及靜州。 고종 18년(1231년) 정주(靜州) 분도장군(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몽고군이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咸新鎭)을 1차로 점령하고 철주(鐵州)를 짓밟아 도륙한 뒤 정주, 귀주성 부근까지 침범해 왔다. 《고려사》
몽고의 1차 침입이 있던 해인 1231년 현재의 평안북도 의주군인 정주에서 분도장군(分道將軍)으로 근무했다. 몽골군의 선발대가 정주까지 침입하자 김경손은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성문을 나와 힘껏 싸워 몽골 장수 수 명을 베며, 몽골군을 일격에 격퇴시켰다. 이때 아무도 안 죽었다. 하지만 본대가 침입하자 정주의 모든 사람들이 숨거나 도망가버렸고 김경손이 성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단 12명의 병사들과 함께 정주성을 탈출, 7일 간 몽골군과 조우하지 않고 인근 귀주(龜州)로 이동하여 상장군 겸 서북면 병마사 박서와 함께 귀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외로운 성에서 약한 군졸로 천하의 사납고 날랜 강성한 오랑캐를 막아 동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를 산악처럼 우뚝 서게 하였다. 우리 동방에서 성을 잘 지킨 것은 안시성 이후 또 귀주가 있으니, 박서와 김경손의 공은 작지 않은 것이다." 《동사강목》
그덕에 1232년 몽골의 1차 침입(제1차 여몽전쟁)이 끝나고 최씨 일가의 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이 시기에는 그의 형 김약선이 최우의 정식 후계자로 공인되어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패하고 돌아왔어도 칼바람은 안 맞았을 것이다. 역사학자 임용한이 이 점을 굉장히 높이 평가한다. 그냥 도망쳐 왔어도 호의호식할 수 있는 사람이 목숨을 내걸고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웠기 때문에.
김경손의 아버지가 말로는 유학자이신데 돈과 아첨을 잘하는 분이셨어요. 보통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분은 대체로 비겁하잖아요? 형은 김약선인데 이 양반도 군인이에요. 최씨 집안의 돌격 대장이었던 사람이어서 최우의 사위가 됩니다. 최우가 김약선을 마음에 들어했냐면 자기 아들을 내치고 사위를 후계자로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사람의 동생이면 출세는 맡아놓은 당상이잖아요. 그런데 (김경손은) 최전방의 별볼일 없는 작은 성의 장군으로 왔어요. 여기까지야 경력관리 하러 왔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내내 이야기 했듯이 12명 데리고 돌격하고, 목숨을 건 전투를 한 거죠. 우리가 보통 인식하기론 이 정도 빽이 있으면 몸을 사릴 텐데, 정말 헝그리한 장군처럼 싸운 겁니다.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고려 vs 몽골 전쟁 中
몽골의 1차 침공이 끝나고 대장군(大將軍)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임명되었다.

첫댓글 "너희들은 오직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라! 내가 너희들을 위해 앞장설 것이다!" _김경손 장군
(“汝等但當效身於國! 吾爲汝等先!”)
몽골의 대군이 귀주성으로 밀려오자, 김경손 장군은 12명의 결사대(별초)만을 이끌고 성문을 열어 기습을 감행하려 했다. 이때 부하들이 두려워하며 만류하자 남긴 말이다.
이 말을 마친 뒤 김경손 장군은 홀로 말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돌격했고, 이에 감명받은 12명의 군사들이 뒤따라 몽골군을 격파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전라도 지휘사로 부임했을 당시 백제 부흥을 외치며 일어난 이연년 형제의 반란군을 마주했을 때의 일이다.
군사가 턱없이 부족하자 좌우에서 다른 고을의 구원병을 기다리자고 청했으나, 김경손 장군은 단호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도적들이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먼저 공격해 온다면, 다른 고을의 군사가 어찌 미처 올 수 있겠느냐?
만일 불행히 승리하지 못한다면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내 어찌 삶을 훔쳐서 적에게 등을 돌리겠는가!"
그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연연하지 않고 즉시 격문을 띄우고 앞장서서 전투를 지휘하여 반란군을 진압했다_김경손장군(1237년)
김경손 장군의 완강한 방어에 막혀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몽골군 장수가 남긴 유명한 말도 김경손 장군의 영웅적 면모를 증명하는 어록으로 자주 함께 인용된다.
"내가 성인이 되어 종군하면서 무수한 성을 공격해 보았지만, 이처럼 맹렬하고 오랜 공격을 버티며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경우는 보지 못했다. 성안에 있는 장수들은 훗날 모두 재상과 장군이 될 만한 자들이다." 몽골군 70대 노장
김경손 장군이 활약한 귀주성 전투의 구체적인 전술이나, 당시 함께 성을 지켰던 박서 장군과의 일화